옛신앙  2005년 7월 03일 [제9권 27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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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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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성도의 고난

로마서 5:3, 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난이 많은 세상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습니다(시 90:10). 이것은 세상을 너무 어둡게 보는 것이 아니고 사실 그대로입니다. 특히 성도에게는 고난이 많습니다(시 34:19). 의로운 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침마다, 분초마다 간섭하시며 침 삼킬 동안도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표현했습니다(욥 7:18, 19). 또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 아니고 사생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히 12:8).

성도는 왜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까?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주요한 원인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성도는 많은 경우 자기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합니다. 신명기 28장은 성도가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할 때 여러 가지 종류의 질병, 물질적 손실과 궁핍, 자녀들의 불행, 또 전쟁 같은 사회적 재난 등을 당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매로 벌을 주실 것입니다. 욥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침마다, 분초마다 간섭하시며 침 삼킬 동안도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 아니고 사생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어려운 문제가 우리에게 생길 때 우선 자신을 돌아보고 무슨 죄가 없는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그의 인격 단련을 위해서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죄 안 짓는 인격자를 만듭니다. 고난은 범죄 예방의 효과가 있습니다. 욥기에 특별히 계시된 진리의 주제는 고난인데, 욥의 고난의 의미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욥은 하루 아침에 큰 재앙을 당했습니다. 스바 사람들이 쳐들어와 그의 소들과 나귀들을 빼앗아갔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많은 양들이 불타 죽었고 갈대아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의 약대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또 그의 열 명의 자녀들은 맏형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을 때 큰 바람이 집에 불어와 집이 무너져 한꺼번에 다 죽었습니다. 게다가 욥의 온 몸에는 악창이 나서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욥은 어떤 죄가 있어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마귀가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를 찾아와 그 자신이나 그 자녀들이 죄를 지어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그를 책망했지만, 욥은 마음에 생각나거나 거리끼는 죄가 없었습니다. 성경의 증거대로, 욥의 고난은 죄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고 단지 욥의 인격을 더욱 성숙시키는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된 고난도 그러합니다. 바울의 고난은 그가 범한 어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고 단지 그가 교만의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에서 말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격 단련을 위해 때때로 고난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성도가 당하는 고난들은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그의 인격을 단련시키고 성숙시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이 아니라면 그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표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자녀들을 채찍질하십니다(히 12: 6).

오늘 본문은 고난의 유익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말씀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을 잘 참으면 인격의 연단을 받아 좋은 사람으로 나타나게 됨을 증거합니다. 순금을 만들기 위해서 원광을 용광로에 넣고 뜨거운 불로 녹여 금과 찌꺼기를 분리시키듯이, 성도는 고난을 통해 인격의 모든 불결하고 악한 요소들이 제거되고 아름다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통해 단련된 인격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거룩하고 의로운 인격이 됩니다. 시편 119편 저자는 고백하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고(67절), 또 고백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71절). 고난이 그에게 약이 되었습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내버리기 어렵고 고치기 어려웠을 악성과 악습이 고난을 통해 조금씩 뽑혀졌고 교정되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순종하는 인격이 된 것입니다. 성화는 비록 더딜지라도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인간 부모는 자기의 뜻대로 자녀들을 징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셔서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며, 또 징계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후에는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에게는 의와 평안의 열매를 맺습니다(히 12:10, 11). 이와 같이 고난은 성도에게 필요하고 유익합니다.

고난은 또한 성도로 하여금 겸손한 인격이 되게 합니다. 사람의 죄성은 본래 교만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고 자신을 남보다 높이고 자신을 남 앞에 내세우고 자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만인 줄 압니다. 남보다 무엇을 더 가진 자들이 빠지기 쉬운 죄가 교만입니다. 남보다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든지 더 많이 배웠다든지 외모가 더 아름답다든지 더 나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가졌을 때, 사람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때 고난은 약이 되어서 그의 인격을 겸손케 만듭니다. 히브리어에 '겸손한'이라는 뜻을 가진 아니(??????)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고난을 받은'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것은 고난을 받은 자가 겸손한 자가 된다는 것을 잘 보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겸손한 인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던 목적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던 것입니다(고후 12:7).

성도는 또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이 점을 잘 증거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주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중 아시아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증거하기를,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했습니다(고후 1:8, 9).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에게 그런 극심한 고난을 주신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증거하기를,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증거했고(고후 1:9), 또 말하기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했습니다(고후 1:10).

고난은 성도에게 이와 같이 매우 유익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많은 고난은 그의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흠 없고 아름다운 인격으로 단련시키고 성숙시킵니다. 고난을 통해 성도는 죄를 버리고 멀리하는 거룩하고 의로운 인격이 되고, 자신을 남들보다 높게 생각하지 않는 겸손한 인격이 되고, 또 자신이나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화는 매우 더디게 보이는 과정이지만, 성도는 점점 변화되고 있고 특히 많은 고난을 통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그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성도는 고난 중에서 먼저 자신을 살피고 회개할 죄가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는 어떤 고난이 닥치기 전에 회개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미 닥친 고난 중에서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서 생각나는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 죄를 버리고 그 죄로부터 떠나고 그 죄를 청산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병자들에게 이렇게 교훈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4-16). 성도에게 닥치는 질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야고보가 몸이 아픈 성도들에게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고 교훈한 줄 압니다.

자신의 죄의 고백과 그 죄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돌이킴이 고난 중에 성도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과 죄 때문에 온갖 재앙이 온다는 것과 자신에게 닥친 이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는 시편 저자와 같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성도는 고난 중에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과 같이, 환난을 잘 참으면 좋은 인격이 형성됩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겸손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좋은 인격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피로 구원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습니다(롬 8:28). 이것은 놀라운 보장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과 실수와 실패까지도 또 그것들로 인해 우리에게 내리시는 고난과 징벌과 징책까지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성화(聖化)와 유익과 우리의 최종적 행복을 이루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우시고 기쁘신 뜻 가운데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뜻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먼저 우리 자신을 살피고 생각나는 죄가 있으면 진실하게 다 고백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 없는 인격입니다. 비록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써서 거룩과 의와 선의 인격과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더욱 단련받고 온전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우리는 거룩하고 겸손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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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하나님의 법(계속)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s)

둘째로, 의식법은 할례, 성막 제도, 제사들, 절기들,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 십일조 등에 대한 법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은 의식법에 대해 다음과 말했다: "보통 도덕법이라고 불리우는 이 법 외에, 하나님께서는 미성년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몇 가지 모형적 규례들을 담고 있는 의식법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시(豫示)하는 예배에 관한 것들과; 부분적으로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제시하는 것들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의식법들의 한 부분은 예배에 관한 것들인데,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들을 예표한다. 예를 들어, 성막 제도에서 번제단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물두멍은 그의 성결함을, 떡상은 그가 생명의 떡 되심을, 촛대는 그가 세상의 빛 되심을, 향단은 그의 중보 기도를, 속죄소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예표한다. 제사들에서 번제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속죄 사역을, 소제는 그가 자신을 즐거이 드리심을, 화목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심을,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의 속죄 사역을 예표한다.

절기들에서 안식일은 그가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셨음을, 유월절은 그가 친히 우리에게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보리 초실절은 그의 부활을, 맥추절은 그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의 열매들이 맺힘을, 나팔절은 그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전파함을, 속죄일은 그의 십자가 단번 속죄의 사역을, 수장절은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감을, 안식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참 안식을, 희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만물의 회복을 예표한다. 도덕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며,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은 죄 씻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법들은 또한 도덕적 교훈들도 준다. 예를 들어, 할례는 죄로부터 거룩하게 됨을 암시한다. 제사들은 일차적으로 속죄의 뜻을 가지지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도 상징한다. 절기들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이며,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한다. 정 부정의 음식에 관한 법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교훈한다.

의식법들이 보이는 도덕적 교훈들은 신약 아래서도 여전히 중요하고 강조되어야 한다. 신약 성도는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신약 성도는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드려야 한다. 신약 성도는 어떤 시간이든지 하나님께 거룩한 절기의 정신으로 드릴 수 있다. 신약 성도는 물질적 소득의 십분의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소득의 십일조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헌금에 대한 최소한의 규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신약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 자체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고 그것은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을 속박하지 않는다. 신약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들의 의무 아래 있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특히 신약 히브리서는 의식법의 폐지, 더 정확히 말해, 율법 제도의 폐지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다.

히브리서 7:18, 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 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전통사본]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 명령된 바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유월절만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고 10가지의 절기들에 대해 다 명령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할례와 제사에 대해서도 명령하였다. 우리가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신약 교회에서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며 무의미한 일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성경에 명령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가지는 신앙적 의미와 유익 때문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맥추절은 겨울이 지난 후 처음 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하는 모든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성탄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그런 절기들은 교회들이 스스로 정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재판법(judicial laws)

셋째로, 재판법은 신정(神政)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서의 민법, 상법, 형법 등 사회 생활에 관한 법들이다. 출애굽기 21:1의 '율례'라는 원어(???????????? 미슈파팀)는 '판단들'이라는 뜻으로 재판법을 의미한다. 재판법의 한 예는 출애굽기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죽이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구약의 어떤 법이 도덕법에 속하는지, 재판법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구약의 어떤 법이 신약에서 인정되거나 혹은 그 이유가 영구적이면 신약에서도 유효한 도덕법이라고 보고 그 외에는 재판법으로 볼 수 있다(박형룡, 인간론, 312쪽).

구약의 재판법들은 신약 아래서 역시 폐지되었다. 신정 국가에서 사용되었던 법들은 오늘날 세속 사회들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4, "또한 한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그들에게, 그는 여러 가지 재판법들을 주셨는데, 그것들은 그 백성의 국가와 함께 끝났고, 지금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것들의 일반적 정당성이 요구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세의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등 세 가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중, 도덕법은 사람의 죄를 확정한다. 자범죄는 도덕법을 어긴 죄들이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그것들은 곧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죄, 하나님을 첫째로,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죄,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지 않은 죄, 이웃을 미워한 죄, 사람을 죽이는 죄,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범죄들, 남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죄, 거짓말 하는 죄, 남의 것들에 대해 탐심을 품는 죄 등이다.

성경에서 도덕적 죄들을 열거한 대표적 두 구절을 들어보자. 로마서 1:29-31, "곧 모든 불의, 음란(전통사본),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전통사본) 무자비한 자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간음과(전통사본)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전통사본)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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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미국이 평화 위협국?"

[김상철, "'미국이 평화 위협국' 여론 29.5%," 미래한국, 2005. 4. 16, 1쪽 중에서.]

인터넷 언론인 프런티어 타임스가 21세기 알앤에스(R&S)에 의뢰하여 20세 이상 1,05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 나라의 평화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에 미국이 29.5%, 일본이 29.2%, 북한이 18.4%로 나왔다고 한다. 또 ‘북한의 핵보유가 장래 통일한국의 국력신장에 바람직하다’가 44.1%, ‘그렇지 않다’가 41.2%라고 한다. 우리의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 나라에 위협국가라는 사람이 약 30%나 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미국인이 갖게 될 아연실색(啞然失色)과 배신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 북한이 우리 나라 평화에 가장 위협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18.4%밖에 안되니 우리 동족에 대한 김정일의 폭정에 의분(義憤)을 느끼는 사람도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더욱이 ‘북핵보유가 장래 통일한국의 국력신장에 바람직하다’고 보는 사람이 44.1%나 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핵무장을 한 북한의 협박 앞에, 그것도 한미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에서 한국은 김정일의 볼모 신세를 면할 수 없는데, 그것을 국익에 유익하다고 본다니 참으로 정신 없는 생각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너무나 정의감이 없다. 목표가치와 판단기준이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것은 친북좌파세력과 정권들이 이를 조장시켰기 때문이다. 또 교회가 정의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말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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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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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