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10월 16일 [제9권 42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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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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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전도하자"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은 전도의 내용이나 전도의 방식에 다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표현은 사람들이 전도의 내용이나 방식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미련한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미련한 방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전도의 내용이나 방법을 미련하게 생각할지 모르나, 전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사람들을 멸망의 상태에서 영생으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혼 구원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요한복음 6:40에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그의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이루셨고, 또 승천하시기 직전 그 일을 그의 제자들, 즉 신약교회에게 맡겨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끝부분에 보면,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끝부분도, 예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20:21은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1:8은, 주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이 모든 말씀은 전도가,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그를 믿는 자들 곧 신약교회에 남겨두신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증거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는데(벧전 2:9), 그것은 전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며 따라서 우리가 힘써야 할 바임을 암시합니다. 이와 같이, 전도의 중요성은 분명합니다. 전도는 성도들의, 그리고 교회의, 최대의 임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도해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믿는 이들은 왜 전도에 힘써야 합니까?

그것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전도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전도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전도에 힘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전도가 바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요 그의 사명이며 또 그가 제자들에게 남겨두신 가장 중요한 임무라면, 우리는 모든 지혜와 힘을 합쳐 이 일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그의 양식과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4:34), 우리도 하나님의 뜻인 전도의 일을 우리의 양식처럼 생각하고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람들이 처한 현재와 미래의 상태를 생각할 때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현재 상태는 한마디로 불행의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죄의 결과로 고통과 불행과 허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사 48:21; 57:21). 전도서가 증거하는 대로,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헛된 일들임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말하기를,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 39:5-7). 짧은 인생! 그림자 같은 인생! 헛된 일에 분주 복잡하게 살고 있는 인생! 이것이 모든 인생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생을 표현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1:28). 바울도 로마서 3장에서 죄인들이 고생과 파멸의 길을 걷고 있고 평강을 알지 못한다고 증거했습니다(롬 3:16, 17).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 불행하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가장 좋은 이웃 사랑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처한 미래의 상태를 생각하면 우리는 더욱 전도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인간은 죽음 후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죽음 후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죽은 후에 없어집니까? 아니면 내세가 있습니까? 내세가 있다면, 그것은 평안의 상태입니까, 불행의 상태입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증거합니다(히 9:27). 예수께서는 친히 사람들의 죽은 후 상태에 대해 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비유라는 말로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만일 그 이야기가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대해 확실한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신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 이야기를 통해 주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바를 분명히 깨닫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주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바들은 분명합니다. 첫째는 사람이 죽은 후에 들어가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죽은 후의 세계가 있고,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나 다른 이들은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이 죽은 후에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한번 운명이 결정되면 그것을 임의로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나 이웃을 위해 이 세상에서 전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넷째는 사람의 구원이, 기적을 체험한 자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성경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현재의 불행하고 허무한 상태를 생각할 때, 또 더더욱 그들의 두려운 미래의 상태, 특히 지옥 형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이웃의 영혼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잘 하든지 못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말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들은 찬송과 기도 외에,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도의 말을 통해 영혼들을 구원하십니다.

전도자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고(롬 1:16), 그가 고린도에 전도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또 인간의 아름다운 말로 전도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전도했다고 간증하였습니다(고전 2:1-5).

말로 하는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 후,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했습니다(롬 10:13-17).

물론 말을 듣는 자들이 다 구원을 얻지는 못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고전 1:18). 또 그는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 말하기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고후 4:3, 4).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복음을 쉽게 전하려고 애써야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지혜에 속한 문제이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가감하거나 변질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심령의 변화, 즉 죄로부터의 회개를 요청합니다. 회개가 빠진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참 구원은 회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원, 회개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으로 사람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안드레를 부르실 때 "와 보라"고 말씀하셨고, 빌립도 친구 나다나엘을 초청할 때 "와 보라"고 말했습니다(39, 46절).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주 예수께서는 천국을 어떤 임금의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면서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라는 암시입니다(마 22:9).

또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잔치 비유에서도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주인의 말을 하셨는데, 그것도 전도하라고 가르치신 말씀입니다(눅 14:23). 전도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교회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는 선한 행위를 동반할 때 효과가 있습니다. 전도자가 선한 행위를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행한다면, 그것은 전도를 가로막는 일이며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롬 2:23, 24). 주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선을 행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5:14- 16). 선행은 구원의 증거로서 꼭 필요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 믿는 아내들에게 교훈하면서,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했습니다(벧전 3:1, 2). 그렇습니다. 선한 행위가 없는 말뿐인 전도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에게 오히려 방해거리이지만, 선행을 동반한 전도는 다른 사람을 구원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생각한 말씀을 요약해보십시다. 전도는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요 그가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임무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필요성은 이 전도의 중요성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현재의 불행하고 허무한 상태와 더욱이 미래의 처참한 운명, 즉 지옥 형벌을 생각할 때 우리는 힘써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이웃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교회로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행실을 나타내면서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십시다. 사람들을 초청하십시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이 일을 힘써 실천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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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중생(重生)

성경은 구원을 또한 중생(重生,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이란,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중생을 '하나님께로서 남,' '거듭남,' 혹은 '성령으로 남'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야고보서 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아페퀴에센)." 디도서 3:5, "중생의(팔링게네시아스)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여 중생은 마음의 시초적 변화로서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monergistic) 사역이며, 회심은 중생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생을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사역으로 본 것은 성경적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의 사상이었고, 오늘날 개혁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과 칭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중생을 사람이 자기 생활과 습관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행위 정도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다. 교회 역사상 어떤 이들은 중생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를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 혹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고 부른다. 근세에 나타난 알미니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이런 견해와 같다. 한편,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부패성이 제거되고 의가 주입(注入)됨으로써 중생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세례중생설 혹은 주입은혜의 교리라고 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다. 로마서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죽은 영혼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고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중생 시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중생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 수동적(受動的)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러내실 때 죽은 나사로가 주의 음성에 협력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선지자 에스겔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할 때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그것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겔 37장).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주권적 활동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중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이다. 중생에서 사람의 의지는 협력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을 중생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한다.

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요한복음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5, "물과 성령으로(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나지 아니하면." '성령으로'라는 말은 중생에서 성령께서 원인자이심을 보인다. 에베소서 2:1, "[하나님께서] 허물들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들을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4, 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3: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 . .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 주로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을 중생의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야고보서 1:18,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유아들의 경우는 다르나, 성인들의 경우, 중생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과 동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는 오직 전도에 힘써야 한다.

중생은 사람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중생한 영혼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중생은 중생한 자의 이전 영혼이 새 영혼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이다. 그의 영혼은 동일하다. 단지 그의 영혼이 중생으로 새로워진 것이다. 또 중생은 영혼의 지정의(知情意)의 기능들 중의 일부 혹은 전부가 단지 새로워지는 정도도 아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 중생은 중생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존재로 완전하게 변화되는 사건도 아니다. 사람은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것은 성경도, 경험도 증거하는 바다.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 성향(governing disposition)의 변화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중생은 "새 생명의 원소를 인간에게 심으시고 영혼의 지배적(혹은 주도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촬스 핫지의 설명도 비슷하다. 중생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속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고,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영혼의 성향, 의향, 즉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마음을 받는다. 비록 옛 죄악성이 그의 인성에 남아 있어 자주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롬 7장), 그의 영혼의 이 새 성향은 의를 지향하고 의만 지향한다. 그것은 다시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악성에 굴복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다.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에베소서 4:22-23,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즉 새 생명]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중생한 자는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게 된다. 요한일서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7,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복음 1:12, 13, "영접하는[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16의 말씀도 요한복음 3:3, 5의 중생에 대한 말씀과 관련해 생각하면, 중생으로 얻게 되는 영원한 새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확증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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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북 인권 침묵은 분단 고착시켜

["北인권 침묵은 분단 고착시켜," 조선일보, 2005. 9. 24, A1; 서울변호사회 인권개선촉구 선언문.]

변호사들이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북한인권문제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변호사단체가 북한인권을 집단적으로 문제삼고 나선 것은 처음이다. 서울지방 변호사회(회장 이준범)는 23일 오후 ‘이제는 북한 인권을 말해야 한다’는 주제로 가진 북한 인권문제 심포지엄에서 선언문을 통해 “북한 인권에 대해 단계적 접근을 주장하는 우리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과거 군사독재정권이 경제발전이나 전쟁위협을 구실로 인권을 탄압하던 논리와 그 궤(軌)를 같이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또 “경제협력을 위하여 북한 인권문제에 침묵하고,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남북의 긴장을 고조시킬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북한 인권문제에 침묵하는 것은 분단을 고착시키는 길”이라고 밝혔다.

그간 국내 인권문제에 영향을 미쳐온 변호사단체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일 전망이다.

이준범 회장은 인사말에서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우리 정부와 입을 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버리는 북한 당국에 대해 이대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날 토론자들은 북한 정치범 수용문제, 탈북자 인권문제,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심포지엄 개최와 함께 서울변호사회는 소속 변호사 5,000여 명을 상대로 북한인권개선운동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를 후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무신론적 사회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무신론이게 되고 있다. 1933년 '제1 인문주의 선언'이 발표된 후, 1973년 제2 인문주의 선언은 "어떤 신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또 1980, 2003년의 제3 인문주의 선언은 "인간들은 자연의 필수적 부분이며 안내 없는 진화의 결과다. 인간들은 자연을 '자존적(自存的)'이라고 인식한다"고 진술한다. (Christian- News, 3 November 2003, 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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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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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