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7월 10일 [제9권 28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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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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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맥추절의 의미

출애굽기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열매를 거둠이니라."

맥추절은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규정된 연중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연중 3대 절기란 유월절(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첫 번째의 유월절(무교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봄에 보리를 추수하는 기간에 지켰는데,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예표합니다. 세 번째의 수장절 혹은 초막절은 가을에 포도주와 기름과 열매들의 수확을 마치고 그것들을 창고에 저장한 후 지키는 일년 중 가장 기쁜 절기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장차 천국 곳간에 들어갈 것을 예표합니다.

그러면 두 번째의 맥추절은 어떤 절기이며 성경은 그 절기를 어떻게 지키라고 규정했습니까? 오늘 본문은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열매를 거둠이니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34:22은 맥추절을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이라고 표현합니다. 맥추절은 밀의 초실절, 즉 밀의 첫열매를 거둔 후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대 땅에서 보리 추수는 봄에 무교절 기간 중에(오늘날 달력으로 3-4월경에) 이미 했습니다. 맥추절은 무교절 기간 처음으로 추수한 보리단을 안식일 다음날 하나님께 바친 때로부터(그것을 보리 초실절이라고 부름) 일곱 주간이 지난 다음날 하루를 절기로 지키는 것입니다(레 23:9-16). 이때는 여름입니다(6월즈음).

레위기 23장에 보면, 맥추절에는 무교절 때와 달리 누룩 넣은 떡 2개를 만들어 요제(흔들어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했고(레 23:17), 그 날은 성회로 모여야 했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안식일로 지켰습니다(레 23:21). 신명기 16:16도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보이라]"고 교훈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날 공적 모임을 가져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헌금도 바쳐야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무교절을 지키라고 말씀한 후에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고 했는데(15절), 신명기 16:16, 17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교훈하기를,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빈 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맥추절 규례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우선, 그것은 추수 감사의 의미를 가집니다. 맥추절은 밀 추수 기간에 첫열매, 즉 '새 소제'(레 23:16)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밀은 유대인들의 주식입니다. 맥추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밀을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맥추절은 또한 영적으로 성도의 구원을 예표합니다. 맥추절에 하나님께 드리는 누룩 넣은 떡 2개는 구원받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것일 것입니다. 구약의 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6, 17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연중 절기들 중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고, 무교절 기간의 보리 초실절은 그의 부활을 예표합니다. 부활하신 그는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맥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상징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신약 성도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표현했습니다(롬 8:23).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약 1:18). 사도행전 2장이 증거한 대로,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이 전도함으로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던 오순절은 바로 칠칠절 즉 맥추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들, 즉 제사 제도나 절기들이나 정결-부정결 음식의 법들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완성되었고 따라서 신약 아래서는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7:18은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폐하였다]"라고 말했고 또 8:13은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의식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곧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표준적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고 말했습니다(19:3).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맥추절은 무슨 의미를 가집니까? 우선 우리가 맥추절을 지키는 것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맥추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따라서 폐지되었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그 의미를 살려서 자원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신약의 모든 절기들, 즉 부활절이나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 등이 다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구약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신약 교회가 자원하여 정해 지키는 것입니다. 맥추절의 의미는 구약의 맥추절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구약의 맥추절은 밀의 추수 절기이었듯이, 우리 나라의 맥추절은 6월말에 보리와 밀 추수를 하며 지키는 추수 절기입니다.

우리는 이 날 가뭄이 들지 않게 하시고 시시 때때로 단비를 내려주시고 병충해를 막아주시고 전쟁이 없게 해주셔서 보리와 밀을 추수하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부족함이 없이 공급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마 6:11) 하나님께로부터 부족함이 없이 일용할 양식의 공급함을 얻습니다. 또 주 예수께서 "너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가르쳐 주신 대로(마 6:31-33), 우리는 하나님을 첫째로 섬기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의 삶을 첫째로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가운데 의식주의 풍성한 공급함을 받습니다.

이북 백성들은 김일성-김정일 일인독재와 무서운 공포정치 아래서 자유도 없고 인권도 없이 60년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을 못견디어 탈북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북한에서는 실제 1950년대부터 2001년까지 약 150만명의 정치범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현재도 5개 정치범수용소에 약 20만명이 일상적 굶주림과 폭력과 가혹한 장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미래한국, 2005. 5. 7, 3쪽).

탈북민 출신 조선일보 기자 강철환 씨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보낸 10년간의 경험을 증언한『수용소의 노래』라는 책 개정판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은 수백만의 아사자를 냈습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참혹함 속에서도 인민들의 반항조차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포가 있기에 굶어죽으면서도 김정일에게 원망조차 하지 못했을까? 남한에서 단 백 명이라도 먹지 못해 굶어죽었다는 기사가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그 정권은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는 히틀러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용소가 전국 곳곳에 만들어져 있어 인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저항정신을 말살하고 있습니다. . . . 북한 인민들을 기아보다 더 무섭고 굶어죽으면서까지 반항할 수 없게 만든 수용소는 과히 히틀러의 아우슈비츠와도 비교할 만합니다. 북한에선 수용소를 보통 '관리소'라고 부릅니다. 최근 북한에서 온 고위탈북자들의 말에 의하면 정치범수용소 수감자가 20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더 증가했다고 합니다. 정치범수용소가 생긴 지 이제 4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그 안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될지 생각하기도 끔직한 일입니다.

그 쟁쟁했던 북한의 부주석 최창익, 남로당 총수였던 박헌영, 고위간부인 박금철, 김두봉 등 반(反)김일성 세력은 그 10촌까지 북한 땅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600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실에서 무참히 죽어가면서도 나치독일에 반항하지 못했던 이치와 오늘의 북한현실은 너무나 똑같습니다.

수용소란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모두 수감돼 평생을 노예처럼 살다가 사라져야 하는 끔찍한 곳이기에 북한 주민들은 그 말만 들어도 부들부들 떨게 됩니다. 이렇듯 수령 독재는 공포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핵문제보다 더 중요한 북한의 인권문제, 미국과 한국, 아니 전 세계의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김정일의 인간학살을 중시시키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 대한민국에서 일용할 양식의 부족이 없이 사는 것을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북의 우리 동포들이 김정일 일인독재의 억압과 공포의 정치와 인권유린과 굶주림으로부터 속히 해방되어 자유로이 하나님을 섬기는 날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의 맥추절은 또 영적으로 성도의 구원을 예표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맥추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방황하며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긍휼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주시며 섭리자이심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알게 하셨고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옛죄들을 회개하고 그의 피로 씻음을 받게 하셨고 이제는 성경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며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새 삶을 추구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더욱 분발하며 노력합시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율법에 매여서가 아니고 자원함으로 맥추절을 지킵니다. 우리는 이 날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늘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지킵시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먹을 양식을 풍성히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행복한 가정을 주시고 적절한 직장을 주시고 좋은 국가를 주시고 사회적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천국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환경여건을 감사합시다.

우리는 특히 자유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지금도 억압과 학대와 굶주림과 고통 가운데 있는 이북의 진실한 성도들과 순진한 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속히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또 맥추절에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고 구원의 첫열매가 되게 하신 구주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시다.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돈의 욕심에 매여서 그리고 육신의 정욕에 노예가 되어 불경건함과 음란과 부도덕함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있으나, 우리를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시고 이제는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그리고 날마다 더욱 분발하여 성도답게 살기 위해 신앙의 선한 싸움을 힘써 싸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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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죄의 형벌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가? 죄의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목적이 그들의 개선(改善)을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서 사형 반대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과 징계를 혼동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징계 혹은 권징은 죄에 대한 벌이기는 하나 그 정도가 약하며 대략적이다. 그것은 징계받는 죄인들의 개선을 위할 것이다. 징계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위해 유익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은 다르다. 그것은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함일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하나님의 최종적 지옥 심판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일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물론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 사건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도덕적 교훈이 되며 그들의 회개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심판 당한 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목적이 사람들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혼동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당하는 본인들에게 앞으로의 범죄 예방을 위해 유익이 있을 것이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당사자들에게 최종적이다. 심판 받아 죽었는데 무슨 범죄 예방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물론, 죄의 형벌이나 징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범죄 예방의 효과와 유익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한 대답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형벌은 더 이상 범죄 예방과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이 범죄 예방을 위함이라는 생각도 바른 생각이 아니다.

성경에 밝히 계시된 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므로 죄는 엄격한 공의의 처벌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에서 보이신 의는 엄격한 보응의 의이었다. 출애굽기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신명기 19:21, "네 눈이 [그 거짓 증인을]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하나님의 공의는 적당한 형벌로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9장에서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12, 17, 21절). 또 예레미야는 대언하기를,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라고 했다(렘 23:19, 20; 30:23, 24). 또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시편 62:12,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나이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5, 6,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리라." 이러한 말씀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행위임을 나타낸다.

그러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역사상 인간의 죄에 대한 여러 가지 형벌을 내리셨으나 그것들은 죄에 대한 엄격한 형벌이 아니었다.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을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첫사람 아담에게 처음 명령을 주실 때에 하신 경고의 말씀 속에 들어 있었다.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였으며 그 결과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린도전서 15:21, 22,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죄에 대한 형벌은 한마디로 죽음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한 것이다(롬 6:23). 그런데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우선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영적 죽음 혹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사람에게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아무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하나님과 단절된 자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대언하기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하였다(렘 2:13).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 곧 생명의 근원이시다. 또 주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람이 주 안에 거하지 못하면 마치 포도나무에서 잘리운 가지와 같이 생명이 없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요 15:4, 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누가복음 9: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여기에서 처음 말씀하신 '죽은 자들'은 일반 사람들을 가리켰다. 또 탕자의 비유에서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가 돌아온 그 아들을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표현하셨다(눅 15:24). 또 주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거듭날 것을 의미하셨다고 생각된다(요 5:25).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1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했고, 또 에베소서 2:5에서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 영적으로 이전에 죄 가운데서 죽어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4:18에서는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했다. 구원받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떠나 있고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섬길 줄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있다. 사람의 정신적인 모든 문제들, 예를 들어 양심의 가책과 고통, 공허함, 우울증, 슬픔, 공포 등은 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영적 죽음의 결과들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물론 육체적 죽음을 포함한다. 육체적 죽음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창 35:18; 왕상 17: 22; 눅 8:55). 그것은 본래 결합되었던 흙과 생기가 분리되어 흙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창 2:7; 3:19; 전 12:7).

인간의 육체의 죽음은 어떤 불신앙적 학자들의 주장대로 자연적 현상이 아니고 인간의 범죄함 때문에 왔다. 첫사람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언하시기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다(창 3: 19). 그것은 그가 아담에게 첫명령을 주시면서 이 명령을 어기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던 말씀 그대로이었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 때문에 왔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아담의 후손들의 명단을 기록하면서 '죽었더라'는 말을 8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하신 말씀대로, 즉 죄의 형벌로 죽게 되었음을 증거하였다. 아담의 범죄로 그와 그 후손들은 다 죽게 되었고 그 죽음은 육체적 죽음을 포함했다. 로마서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육체의 노쇠, 각가지 질병들, 자연적 재난들로 인한 육체의 고통들 등은 육체적 죽음의 전조(前兆)들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성경에 의하면, 이 정도가 아니고 또한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이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영혼은 육체가 죽을 때 멸절(滅絶)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인들의 부활이나 악인들의 지옥 형벌은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 10:28). 이 말씀은 첫째로 영혼의 불멸성을 증거하며 또한 둘째로 지옥의 교리를 증거한다. 지옥 교리는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진리이다. 이것이 왜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이 교리를 변경해서는 안되는가 하는 이유이다.

지옥 교리는 마가복음 9:43-49에서 가장 강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증거되어 있다. 특히 한글개역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44절과 46절은 전통본문에는 분명히 들어 있고 이 구절은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의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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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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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