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10월 9일 [제9권 41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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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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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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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고린도전서 1:23, 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도(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위해 속죄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속죄(贖罪)는 기독교 진리들 중에, 매우 귀하고 중요한, 아니, 가장 귀하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그가 고린도에 전한 복음을 '십자가의 도(道)'라고 부릅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셨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1:22, 23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전한 바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기대하는 바와 매우 달랐다고 그는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추구하는 바는 오늘날 오순절파 교인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이 구하는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오순절파와 은사주의는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보다 하나님의 기적적 은사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또 이방인들은 지혜를 구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는 다음 절에서는 이방인을 헬라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의 소아시아와 유럽의 세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 아래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의 영향 속에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로마 제국 안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언어는 헬라어이었습니다. 유명한 헬라의 철학자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상은 온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헬라어 필로소피아)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예수께서 친히 택하시고 보내신 자들인 그의 사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에서 복음의 골자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 그가 전한 복음의 골자입니다. 여기에 참된 기독교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종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전하는 종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贖罪)를 전하는 종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몸으로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리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12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말합니다. 또 에베소서 5:2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제물과 생축'은 '예물과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번제물이나 소제물이나 화목제물 등은 다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었습니다. 레위기 1장, 2장, 3장에 보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는 표현이 아마 7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레 1:9, 13, 17; 2:2, 9; 3:5, 1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그가 이루신 속죄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죽음은 비록 사람에게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요 능력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고 또 고린도전서 1:23-25에서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속죄(贖罪)는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인들의 죄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죄인들 자신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벌을 직접 받는 것입니다. 그 경우, 죄의 값은 죽음이므로 죄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어 영원한 지옥의 불에 던지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구주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벌을 받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죄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 가능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의미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바로 그 구원의 방법을 생생하게 암시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인들이 제물을 성막 앞으로 가져와 그 제물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의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상징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많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할 만큼 가치가 있는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12은 예수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하고 로마서 3:24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속죄'나 '구속(救贖)'이라는 원어(뤼트로시스, 아포뤼트로시스)는 '속전(贖錢) 즉 몸값을 주고 건져냄'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 '속(贖)'이라는 말은 '속전(贖錢)을 낸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의 값을 대신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3:25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화목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테리온)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누그러지게 하는 제물「유화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구약시대의 법궤 뚜껑, 즉 '속죄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캅포레드에 해당하는 헬라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시고 누그러지게 하신 죽음이었습니다. 또한 속죄(贖罪)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벌을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고린도후서 5:21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게 하심으로써 그 안에서 우리가 의인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속죄의 이치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우리의 죄의 벌을 대신 받으신 이치입니다. 갈라디아서 3:13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실제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참된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이루신 속죄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면, 지옥에 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마 7:13), 넓은 길 곧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전체가 아니고 그 중 일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10:14, 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의 속죄의 죽음은 효력이 있습니다. 그의 속죄의 죽음으로 죄인들의 죄값이 실제로 지불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곧 그의 속죄 사역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은 다 하나님께로 나올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속죄(贖罪)는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는 것입니다. 속죄는 죄인이 받을 벌을 대신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는 택자들의 죄벌을 친히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는 택자들의 모든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속죄 사역은 완전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기에 무엇을 첨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였습니다. 구원얻는 자들은 단지 그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10:10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거룩함을 얻었다'는 원어(헤기아스메노이)는 완료시제로서 우리의 거룩함이 완료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물론 법적인 완전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0:14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온전케 하셨다'는 원어(테텔레이오켄)도 완료시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우리는 법적으로 완전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의 의(義)에 무엇을 첨가할 것이 없습니다. 죄인들은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은 행위와 다른 무엇입니다. 물론 참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자체는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말했고, 로마서 3:21, 22에서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2:16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 년 전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입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의 죄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죄에서 건져내신 것이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신 것이었고 그들을 대신하여 죄벌을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역사상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물론 그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속죄가 아니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속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이루신 일에 무엇을 더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그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읍시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구속하신 자들은 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올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힘써 따르고 섬기고 순종합시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 구원받은 자마다 이제는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이제는 허무한 것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만 따르며 그를 위해서만 삽시다. ----------------------------------------------------------------------- 주일오후설교: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성경은 또한 구원을 연합의 개념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른다. 신비적 연합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은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생명을 찾고 그 생명 안에 포함된 모든 복과 특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여러 구절들에게 증거한다. 첫째로,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신비적 연합을 포도나무와 몸의 비유로 말한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에베소서 1:22, 23, "그「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자신을 위해 완성시키시는」 자의 충만「완성」이니라." 에베소서 4:15,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둘째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그가 영으로, 생각으로, 정신으로, 마음으로, 말씀으로 그들 속에 계심을 인정한다. 요한복음 15:4, 5,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 . 내가 저 안에 있으면." 로마서 8:9, 10,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빌립보서 1:2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골로새서 1:2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 이 신비적, 영적 연합은 참으로 놀라운 복이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의 생각 안에, 그의 마음 안에, 그의 사랑 안에, 그의 보호와 능력 안에 있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로마서 16: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고린도전서 3:1,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고린도전서 15:18,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 고린도전서 15: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갈라디아서 1: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 에베소서 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3:6,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빌립보서 4: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골로새서 1: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골로새서 1:28,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2: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 데살로니가전서 4:16,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요 특권이다. --------------------------------------------------------------------------------- 현대사회문제: 김일성, 독립운동가로 볼 수 없어 「김성욱, "김일성, 독립운동가로 볼 수 없어," 미래한국, 2005. 4. 23, 3쪽; 성신여대 명예교수이며 한국 근현대연구가인 이현희 교수의 견해를 소개함.] 대한민국 공직자들의 김일성에 대한 호평(好評)이 이어지고 있다. 장관급인 광복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 강만길씨의 '김일성 항일빨치산운동을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발언에 이어 열린우리당 김원웅의원은 13일 오마이뉴스의 기고문을 통해 강씨의 발언을 옹호하고 나섰다. 강씨는 임시정부 수립 86주년 기념식의 상하이 개최와 관련한 기자간담회에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질문에 대해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은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이다. 항일운동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 만큼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 빨치산 운동도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김 의원은 "김일성이 왔다. 김일성이 살아왔다. 분단 60년의 아픔, 냉전체제의 무자비함 속에서 철저하게 죽었던 그 이름 '독립운동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돌풍을 예고하며 우리 곁에 와 있다"라고 시작되는 기고문을 통해 김일성의 독립운동사실을 역설했다. 그러나 한국근현대사연구계의 권위자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이 같은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북한의 왜곡된 역사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과장된 평가"라며 "전체적인 독립운동사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미미(微微)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교수는 "독립운동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은 곧 독립운동으로서의 평가(評價)를 넘어 포상을 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그 같은 독립운동으로 평가받을만할 정도가 아닐 뿐 아니라 광복 이후 그의 반민족적 죄악상을 비춰볼 때 결코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천보 전투, 하루 분탕질한 것 "김일성의 일제시대 항일투쟁은 1937년 보천보전투와 1939년 무산전투 정도였습니다. 물론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로서 광복 후 전설 속의 김일성 장군인 '김광서'(함경남도 북천군태생 1887 ~1937년 11월 전사)을 참칭하고 북한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김성주가 보천보전투와 무산항쟁을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김성주의 항일투쟁을 어느 정도나 평가해줄 수 있느냐입니다." 이 교수는 김일성의 지휘한 보천보 전투는 "보천보라는 리(里)단위 마을을 야습해서 하루 동안 분탕질한 것"이었고 무산전투 역시 "무산의 일본주재소를 습격했던 유사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군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단체도 아니었습니다.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이 섞여 있는 30여 명을 이끄는 소대장급 신분으로 인근 보천보와 무산을 하루 밤 야습해서 분탕질한 데 불과하죠. 얕은 압록강을 넘어 잠깐 왔다 간 것입니다. 우리 측 자료는 물론 중국, 일본 측 자료를 종합해 볼 때, 김일성이 항일(抗日)의식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北, 김일성 투쟁 확대, 과장, 왜곡 그러나 중공군에서 나중에 소련군으로 변신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북한의 역사학계에 의해 확대, 과장,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동북항일연군 말단 소대장의 행적은 북한의 조선전사나 이나영의 조선민족 해방투쟁사 등에서 잔뜩 부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정사(正史) 조선전사는 33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16권 이후는 김일성의 문중(門中)역사로 기술해놨죠. 가령 3·1운동은 평양지역에서 김일성이 주도했는데 8살 너무 어린 나이여서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식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일제시대 김일성의 행적도 온갖 왜곡이 이뤄졌습니다" 한편 이러한 북한식 김일성 평가는 남한의 소위 민중사관론자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됐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남한의 민중사관론자들은 보수세력에 대한 반발로 사료(史料)에 대한 취사선택이나 비판 없이 북한식 평가를 받아들였습니다. '김일성장군의 항일투쟁이 냉전논리로 폄하됐다'는 것이죠. 강만길 교수 역시 평소에도 그 같은 주장을 해왔지만, 공인이 된 이후에도 이 같은 견해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견(私見)이라고 주장하지만 누가 이를 사견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강교수 주도 독립운동사 대계, 김일성 선전 우려 그러나 김일성의 독립운동가 인정 주장에 비판이 제기되는 더 큰 이유는 광복 이후 김일성의 반민족적 죄악상에 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김일성은 45년부터 6·25이전까지 10월 대구폭동,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여순반란사건, 제주 4·3유혈폭동 등의 배후였고 이는 소련 스티코프 대장의 문서 등에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6·25에서는 수백만의 동족을 학살한 자가 김일성입니다. 동족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죠. 여기에 숱한 납북자·국군포로,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폭압, 그리고 아들 김정일 대에 이르러 KAL기 폭파, 울진삼척테러, 1·21청와대 습격사건 등 테러행위에 이어 체제유지를 위해 200만에 달하는 주민들을 아사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인물이 과연 독립운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문제발언의 진원지인 강만길 씨는 국무총리 소속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 위원장직 뿐 아니라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독립운동사 대계(大系)를 다시 쓴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이 교수는 강씨의 이 같은 '새로운(?)' 독립운동사 기술(記述)에 "김일성의 행적이 뚜렷이 나타날 것"이라며 "남북의 통일된 독립운동사가 아니라 김일성의 공적을 위장 선전하는 식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민족이 하나 되려면 역사가 하나 돼야 한다는 그럴싸한 논리가 횡행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통역사에 반해 북한의 역사는 '김일성 역사'입니다. 합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자꾸 북한식 논리에 따라가다가 남한까지 빨갛게 물드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北, 집권과정서 반대파 제거, 진정한 친일청산 없어 이 교수는 정권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친일청산문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북한은 친일청산이 이뤄졌지만 남한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편향된 시각"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의 소위 친일청산은 김일성이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방해세력을 제거한 것입니다. 소위 부르주아 계층들, 친미분자들과 함께 친일파들이 숙청되는 경우가 생긴 것이지 클리어(clear)한 친일파청산은 이뤄진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대다수 친일파들은 광복 후 남쪽으로 내려온 상태여서 친일청산이고 뭐고 없었죠. 그에 반해 남한은 초대내각이 독립운동가들로 이뤄졌고 이후 반민특위를 만들어 800명을 체포하고 상당수를 걸러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도 모두 죽어버린 상태에서 이뤄지는 근래의 과거사청산은 정치적 목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