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12월 18일 [제9권 51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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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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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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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고통하는 시대" 디모데후서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 .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속사회는 언제나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사회이지만, 어떤 때는 더 악한 시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심판 직전에 그러할 것입니다. 또 교회는 세상의 등불로 진리와 의와 선의 빛을 세상에 비추어야 하지만,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물들어서 더러워지고 변질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종말이 가까운 때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면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그 때를 대비하고 잘 대처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교회가 악한 시대를 거스려 진리와 의를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참 교회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서서히 변질되다가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배교(背敎)에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이 증거하는 고통하는 시대의 몇 가지 특징들을 기억함으로써 시대를 분별하며 모든 잘못된 풍조들을 배격하고 바르고 선한 길을 걷는 개인과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통하는 시대의 한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이기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위한 헌신도 봉사도 희생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어려움 가운데 사는 불쌍한 이웃들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 건강만 위하고 자기 유익만 위하고 자기 행복만 위하여 생각하고 일합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해도 자기만 위해 하고, 직장인들은 돈을 벌어도 자기만 위해 합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삶입니다. 그들에게는 진리도, 의도, 양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무엇이 자신들에게 유익하냐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가 법을 어기는가, 남에게 해가 되는가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하기만 하다면 무슨 일이라도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하기만 하다면 죄를 짓는 것도 큰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기심은 불법과 불의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무디게 만들거나 아예 소멸시킵니다. 이기심은 자신이 행하는 무슨 악이라도 합리화시킵니다. 또 이기심은 자신에게 유익이 없는 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언제든지 포기하거나 대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 성도들이 경계해야 할 악한 세상의 풍조입니다. 고통하는 시대의 다른 한 특징은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심과 맞물려 강력한 행동 동기가 됩니다. 돈은 인생의 가장 큰 가치가 되며 심지어 삶의 목표처럼 되어 버립니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돈을 쉽게 벌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법하고 부도덕한 일들을 행합니다. 이성이나 양심의 거리낌도 돈 앞에는 맥을 못춥니다. 돈을 사랑함은 옛날부터 세상에 있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강력한 생활 목표나 방식 또는 가치 기준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밤낮 쉬지 않고 뜁니다. 또 사람들은 사람을 돈으로 평가합니다. 돈이 많으면 사람은 외적으로 그럴 듯한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장 좋은 옷을 사 입고 좋은 집을 꾸미고 좋은 차를 굴리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삶을 부러워하고 젊은이들은 그런 삶을 목표로 삼습니다. 돈의 위력은 커서 심지어 하나님보다, 성경보다, 신앙보다, 교회보다, 천국과 영생보다 힘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라는 말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이 훨씬 사람들의 귀에 솔깃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도 돈에 대해서는 관심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딤전 6:10). 고통하는 시대의 다른 한 특징은 교만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람들이 자긍하며 교만하며 자고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훼방하거나 부모를 거역하거나 참소하거나 사납다는 말씀들도 교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젊은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책망을 듣지 않고 자랐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어른들의 말을 들으려 하는 젊은이들을 찾는 것은 이제는 아마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합니다. 사람들은 책망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위엄과 권위가 사라지고 있고 직장에서는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존경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이 자신을 칭찬해주는 한 그를 좋아할 수 있지만, 남이 자신을 책망하면 당장에 그를 욕하고 그에게 등을 돌립니다. 칭찬을 들을 만한 고상한 인격이 아니어도 칭찬해주어야 좋아하고 평안한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보잘 것 없고 부족 투성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드물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교만에 뒤따라오는 것은 멸망입니다(잠 16:18). 고통하는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오늘 시대의 풍조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클라식 음악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광란적인 록 음악과 춤으로라야 만족을 누립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스포츠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인 오락물이 되었습니다. 운동경기는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킵니다. 어린아이들은 전자 게임들에 중독되어가고 그것은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아갑니다. 영화와 비디오와 인터넷 등의 동영상물들은 현대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점점 더 사로잡는 강력한 오락물이 되고 있습니다. 동영상물들의 디지털 전송시대가 시작되고 화질이 더욱 선명해질수록 그것들은 사람들을 더 사로잡을 것입니다. 쾌락주의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반드시 음란을 동반합니다. 이미 영상물들의 세계는 음란에 깊이 감염되어 있어서 그것을 제거하기가 어려워보입니다. 사탄은 현대 문명을 통해 세계를 음란화시키고 있습니다. 음란한 노래와 춤, 음란한 복장, 음란한 동영상물들은 온 세계에 가득해지고 있습니다. '섹시하다'는 말은 평범한 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메스컴들이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광대한 정보의 바다이지만, 또한 온 세상을 더럽히는 음란의 바다입니다. 또 인터넷 채팅은 우리의 청소년들을 음란에 물들고 병들게 하고 많은 가정들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은 각종 오락물들과 음란으로 심각하게 병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으로 마침내 폐기처분될 때까지 아마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고통하는 시대의 마지막 특징은 경건한 모양만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계의 문제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형식주의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에 언급한 세상 풍조들이 교회 안에, 교인들 가운데 들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교인들이 자기 자신들만 사랑합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구하고 자기 명예만 구하고 자기 행복만 구합니다. 교인들의 생활이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할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돈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깁니다. 성경은 너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라고 교훈하지만, 교인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처럼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또 교인들은 돈을 가지고 사람도, 교회도 판단합니다. 사도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안일함이 이 시대의 문제입니다. 또 교인들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종해야 할 터인데, 세상사람들처럼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교만하고 형제를 거짓되이, 함부로 비난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사납고 자신을 높입니다. 여성들은 성경의 교훈을 짓밟고 자신들도 안수받아 목사와 장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벌써 여성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들이 지구상에 그리고 우리나라 안에도 여러 개가 생겼습니다. 또 교인들은 세상의 쾌락주의적 풍조에 물들어 어린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에 빠지고 어른들은 스포츠와 영화에 빠집니다. 텔레비젼이나 인터넷 등의 음란한 동영상물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만 유혹이 아니고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과 학생들에게도 심각한 마귀의 시험이 되고 있고 또 어른 성도들에게도 시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실한 남녀노소의 성도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온 세상을 음란하게 만들고 있는 사탄과 악령들은 그들도 시험하고 넘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교인들이 자기 사랑, 돈 사랑, 교만, 쾌락에 빠지면,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형식적 교인, 생명 없는 교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벌써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에 드나드는 자들은 많지만, 진리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고 그 모든 말씀을 믿고 순종하려 하는 자들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많은 의식들을 행하고 있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성경 교훈들에 대한 바른 지식과 순종이 없다면, 그것들은 형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장로나 권사나 집사의 직분들을 남발하는 것도 이 시대의 잘못된 풍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형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지식과 믿음, 그리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의롭고 선한 삶을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앞으로 다가올 고통스러운 시대에 대해 말하면서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깨어 사도의 교훈, 성경의 교훈, 즉 하나님의 교훈 안에 거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목사와 전도사들은 말세의 고통하는 시대의 풍조를 분별하고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쾌락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영광과 그의 일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즐거이 드리며 하나님을 우리의 기쁨과 복으로 여기며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행하며 육신의 쾌락을 절제하고 특히 죄악된 풍조를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 교역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는 이 성경의 교훈을 깨닫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은 이기적이게 살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물질을 사랑하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음란한 세상의 풍조에 물들지 않도록 그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길이요 지혜롭고 복된 길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벌써 그런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깨어 시대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에 물들고 말 것입니다. 진실한 성도들은 다 성경 말씀의 교훈을 깨닫고 이 시대의 풍조를 분별하고 배격하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의(義) 중심으로 살아갑시다. 그것이 바른 길이요 지혜로운 길이요 복된 길입니다. ------------------------------------------------------------------------------------ 교리강해: "성화(聖化) (계속)" 성화와 상(賞) 선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인 동시에 성화의 당연한 열매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은 선행에 대한 상(미스도스)에 관해 많이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상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3, 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10:41, 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상(賞)은 선행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 5:11, 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16, 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19-21,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특히,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각각 수고하고 충성한 만큼의 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은 종종 오해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말씀은 일반 성도의 성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사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성경적 교훈을 말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그릇된 인간적 교훈을 말한다. 이 말씀의 요지는,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면 마지막 날 상을 받을 것이지만,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 받을지 모르나 자기의 교훈을 받던 자들의 멸망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께서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5). 또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고 역사상 아마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종이었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또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계 4:10, 11). 더욱이,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는 여전히 예수님의 보혈 공로밖에 없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은 진술하기를, "그들의 순종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라도 공로를 쌓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이 의무상 해야 할 만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들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오직 그의 은혜일 뿐이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마땅한 자들이다(눅 17:10). ----------------------------------------------------------------------- 현대사회문제: 이성(理性) 잃은 언동(言動)들 [유근일, "理性 잃은 言動들," 조선일보, 2005. 12. 13, A34쪽.] 이 사람들의 하는 짓거리와 내뱉는 말들이 갈수록 해괴해지고 있다. 예컨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는 북한 여성들의 태반이 중국인들의 성(性) 노예로 팔려가고 있다는데도, 누가 그런 북한의 인권 참상을 지적하면 대뜸 “그렇다면 북한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며 핏대를 올린다. 그것도 다름 아닌 집권당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그랬다니, 정치에 중독이 되면 멀쩡하던 사람들도 다 이 지경으로 인사불성이 되는 것인가? 전국의 여성들이 들고일어나 그들에게 따져봄직한 일이다. “그대들의 안식구들이 그런 수모를 당한대도 그따위 비정한 소리를 할 작정이냐?”고. 북한 여성들의 수난 등 김정일 통치하의 처참한 인권 현실에 대해 ‘전쟁 날까 보아’ 입도 벙긋해선 안 된다면, 그렇다면 일본의 정신대(挺身隊) 행패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쟁 날까 보아’ 전전긍긍하지 않고 당당히 떠들었는가? 이유는 자명하다. 인권 유린에 대한 시비는 당연히 할 소리를 하는 것이기에 한·일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건 없건, 정신대 시비를 주저없이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또, 한·일 관계가 설령 총체적인 파국에 직면하는 한이 있더라도 집권측은 그것이 너무나 정당하다고 믿었기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소리 높이 외친 바도 있다. 그런데 왜 김정일의 인권 유린에 항변하는 것만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며, 마치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했다는 양, 볼멘소리를 내지르는가? 그들은 도대체 누구 편인가? 그들은 중국 공안에 붙잡혀 공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탈북 동포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세상에 저럴 수가 있나!” 하는 단 한마디 연민의 말도 표현할 심정이 안 든다는 것인가? 북한 정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자 “남조선에 민주정권이 들어서야만 남북회담을 하겠다”며 회담을 장기 표류시켰다.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도 “광주 시민의 피가 묻은 손과는 악수할 수 없다”며, 역시 회담을 끝내 거부했다.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대의명분과 원칙을 세워놓고 그에 따라 남북관계가 악화되건 말건, 하고 싶은 소리와 해야 하겠다고 믿는 소리를 거침없이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쪽에선 ‘성 노예로 팔려가는 북한 여성’ ‘탈북여성 다리 절단’ 같은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반(反)인륜적 행패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거론해야 할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단 한마디 비명도 질러선 안 된다는 것인가? 그들의 그런 철면피하고 막가는 언동은 최근 들어 갑자기 이상하리만큼 빈번해지고 있다. ‘강정구·천정배 현상’과 맥아더 동상 철거 기도는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황우석과 PD수첩 사건’, 사립학교법 강행처리, 유엔 ‘북한인권 결의안’ 기권, ‘이해찬·이병완·조기숙 언행’,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애국열사 호칭’ 같은 어이없는 작태들이 연이어 속출했다. 그래서 그런지 국민들은 이제 자신들이 과연 어떤 진영을 권력에 앉혔는지를 현저히 깨닫기 시작했다. ‘황우석 사건’으로 저들은 한국과 한국인의 영예와 긍지를 해코지하려 한다는 시민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사립학교법 강행처리로는 모든 사학인들과 종교계를 적으로 내몰았다. 북한 인권에 대한 냉담은 학살자와 피학살자 사이에서 그들이 과연 어느 쪽에 서 있는지를 전 세계에 분명하게 보여줬다. 이처럼 저들이 자살골을 계속 넣는 가운데, 그 언동들이 갈수록 악에 받친 듯 궁색·억지·궤변·유치·철면피로 치닫는 것은 결국 그들의 수명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기야 그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언동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그들의 너절한 정체와 속내와 수준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런 언행을 자꾸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 국민이 그들의 실체를 알게 하고, 그래서 그들의 정치적·도덕적 퇴장이 하루라도 빨리 기정사실화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순리(順理)를 저버리고 도(度)를 넘으면 그 어떤 것도 기우는 법이다. ◈ 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