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5월 22일 [제9권 21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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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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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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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부부의 관계" 에베소서 5:22, 25,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개개인이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양육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 일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가 될 때 가져야 할 의무에 대해 좀 생각해 봅시다. 부부의 관계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본으로 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듯이, 또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듯이, 남편과 아내는 사랑과 순종의 의무를 가집니다. 첫째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계명의 중요한 한 내용입니다. 또 성도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부부는 특별한 의미에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부의 의무요 특권입니다. 특히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남편들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결혼한 남편의 일차적 의무는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랑의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일에서 찾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사랑, 즉 희생적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13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여기셔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큰 사랑, 놀라운 사랑입니다. 남편들은 이러한 사랑으로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때리거나 아내에게 폭력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입니다(창 2:22). 아내를 때리는 것은 자기의 갈빗대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남편은 말로라도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또한 아내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내의 수고와 생활의 단조로움을 이해할 것입니다. 아내들의 일은 육체 노동입니다. 식탁을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널고 개고 다리미질하고 청소하고 시장 보는 아내의 매일의 일들은 다 육체 노동입니다. 또 그것은 반복되는 일들이며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일들입니다. 남편은 자신을 위해 수고하는 그런 아내를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위로하고 격려할 것입니다. 결혼의 이유들 중 하나는 서로 교제하며 도우며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려운 일들이 많고 수고로운 세상입니다. 아내들에게는 남편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합니다. “당신, 항상 나 때문에 수고가 많지요. 늘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일들 하느라고 고생이 많아요. 감사해요. 사랑해요.” 사랑하는 남편은 또한 아내의 부족을 용서하고 용납할 것입니다. 흠과 약점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방의 흠과 실수를 큰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언 10:12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또한 고의적으로 아내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든지 주려는 성격이 있습니다. 특히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돈을 넉넉히 주어야 합니다. 아내들이 시장에서 사고 싶은 것들을 자유로이 사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근검절약하며 살아야 하지만, 아내가 너무 돈의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를 슬프게 만드는 일입니다. 남편들이 이렇게 아내들을 사랑해야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3:7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둘째로, 오늘 본문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22-24절)고 말합니다. 본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아내가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혼한 여자들의 일차적 의무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항하지 않고 복종해야 하듯이,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대항하지 말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에 나타나 있는 진리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를 돕는 자로 여자를 만드시기를 뜻하셨고(18절)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21, 22절).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된 것입니다. 좋은 돕는 자는 우선 상대방에게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2:11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조용히] 배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자로서 남편을 돕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혼의 중요한 한 이유요 복입니다. 그래서 잠언 18:22에는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가정은 사람의 안식처입니다. 순종하는 아내의 일차적 덕은 온유함과 조용함일 것입니다. 또 성경은 아내들이 사치하지 말고 외모의 단장에 힘쓰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베드로전서 3:1-4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조용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2:9에도 “[여자들이]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여성들은 혼자서는 씩씩하게 살아야 하겠지만, 결혼하면 온유함과 조용함의 덕을 가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내는 또한 집안 일을 잘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 31장은 진주보다 귀한 현숙한 여인에 대해 묘사하기를,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 . .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 . . 그는 간곤한[가난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 . .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10, 12-13, 15, 20, 27절). 또 디도서 2:4, 5은 말하기를, “[경건한 늙은 여자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복종하는 아내는 또한 남편과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 21:9, 19은 말하기를,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합니다. 행복의 주요한 조건은 큰 집이 아니고 사랑과 평안입니다. 바가지 긁는 여자는 남편을 피곤케 하고 그를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나돌게 만듭니다. 그것은 아내로서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아내들은 지혜롭게 남편들의 마음을 붙잡고 좋은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부는 침실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그의 갈빗대로 한 여자를 만드시고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부부의 침실은 부부의 사랑의 중요한 표현과 수단입니다. 그것은 죄악된 것이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3:4에 우리 말 성경에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의 뜻은 “혼인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혹은 성 관계]는 더럽지 아니하니라”입니다. 성 관계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부부 관계에서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성은 정당하고 건전하게 사용된다면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다. 건강에 지장되거나 생활의 성실함에 지장되도록 너무 육신적 쾌락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부부의 성 관계는 죄악된 것이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 행위를 음행이라고 정죄하실 뿐입니다. 잠언 5:18, 19은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합니다. 특히, 부부의 침실은 음행 방지의 정당한 수단입니다. 세상은 음란한 세상이며 인간의 본성 속에는 성적 호기심과 충동이 있고 이것은 항상 음행의 죄에 빠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7:1-5은 이렇게 교훈합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서로 거절하지 말라]. 다만 [금식과]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남편들이 아내들을 참으로 사랑하고,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참으로 복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그는 부부가 침실을 귀히 여기고 복되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가기까지 이 세상에서도 영육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개인이나 가정의 행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개인의 영육의 평안이나 가정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우리가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시편 127:1-2은 그 사실을 잘 증거하기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 믿음 중심, 하나님 말씀 중심, 순종 중심, 의(義) 중심, 사랑 중심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본래의 상태의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냄을 받은 후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은 후 아담이 130세에 셋을 얻었기 때문에, 아담의 무죄 상태는 최대한 100년 내지 110년 가량을 넘지 못할 것이다(창 4:1-3, 25; 5:3). 세상의 악은 궁극적으로는 천사들의 타락에서 기원하였다. 에덴 동산에 들어와 하와를 유혹한 뱀은 사탄이었다(계 12:7-9). 천사는 언제 타락하였는가? 성경은 천사들이 언제 타락하였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계시해 주지 않으나, 천사들의 타락이 인류 역사의 초기에 있었다는 암시가 신약에 있다. 요한일서 3:8는 증거하기를,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하였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마귀는 인류의 역사 초기에 범죄하였고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는 데 성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의 타락이 천지 창조의 6일이 끝나기 전의 어느 때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천사의 세계를 포함하여 천지 만물이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보며, 창조된 세계는 모두 선하였기 때문이다(창 2:1; 1:31). 천사는 어떻게 타락하였는가? 천사들의 타락은, 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되어진 일이지만, 하나님께 직접적 원인이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이 악의 창조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타락은 그 자신들 밖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사탄의 죄를 교만이라고 암시한다. 디모데전서 3:6,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그렇다면, 천사 타락의 원인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다수의 천사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서 6절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이사야 14:12- 15과 에스겔 28:12-16의 말씀을 사탄의 타락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 구절들은 바벨론 왕과 두로 왕에 대한 예언일 뿐이라고 본다. 타락한 천사들(영들)은 사탄과 그의 사자들로 분류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의 두목이다. 그는 ‘사단’(욥 1:6, 대적자), ‘마귀’(계 12:10, 디아볼로스, 참소자), ‘바알세불’(마 12:24, 더러움의 주), ‘벨리알’(고후 6:15, 무가치한 자, 악한 자), ֲ아바돈 혹은 아폴뤼온(계 9:11, 파괴자), ‘귀신[들](demons)의 왕’(마 12:24),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악한 자’(요일 5:19), ‘큰 용, 옛 뱀’(계 12:9; 20:2) 등의 명칭들로 불리운다. ----------------------------------------------------------------------- 현대사회문제: 국회는 ‘북핵 特委’ 구성하라 [고려대 남성욱 교수, 조선일보, 2005. 5. 14, A31쪽.] 지난 1994년 북한 핵 위기는 군사적 측면에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유엔 안보리 제재를 촉구하자 북한은 1994년 6월 5일 “유엔 제재는 곧 선전포고다. 전쟁에서 자비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미국 국방부는 1994년 초부터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 대한 병력 증강을 가속화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은 전쟁 불사(不辭)에 무게 중심이 실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측 협상 수석대표인 로버트 보브 갈루치 차관보는 사태가 ‘전쟁, 그것도 대전(大戰)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음을 직감했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작금의 사태가 실질적인 전쟁 위험 단계’에 진입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서울에서 근무했던 하웰 에스테스 중장은 “이미 장교들이 속으로는 모두가 전쟁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미국의 작전계획 5027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추상적인 문서나 컴퓨터 파일이 아닌 현실적인 실행 계획으로 검토되기 시작했었다. 북한이 ‘불바다 발언’으로 한국을 자극한 지 나흘이 지난 1994년 5월 23일 이병태 국방장관이 국회 증언에서 5027 계획의 핵심을 공개적으로 설명하면서 국민들의 ‘라면 사재기’가 시작됐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연일 계속되는 CNN의 한반도 위기 보도에 놀라 매일 저녁 서울의 안부를 묻는 국제전화가 폭주하였다. 주한 미국대사관도 한국에 있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소개(疏開)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부 외국 투자가들은 한국 증시에서 돈을 빼내고 있었다. 1993년 말부터 시작된 10개월에 걸친 군사적 대치 시나리오는 1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된 1914년 ‘8월의 총성(the guns of August)’과 유사하였다. 1914년 여름 각국의 엇갈린 목적과 오해, 우연 등의 불씨들로 말미암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것이다. 1994년 북핵 위기는 민주당 소속 카터 전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서고 클린턴 행정부의 합리적 결정에 의하여 10월 제네바 합의로 연착륙하였다. 그러나 2005년 북핵 위기는 1994년보다 여건이 더 나쁘다. 9·11 테러를 겪은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서 ‘악에 응징’하는 실전을 전개하였다. 1994년 당시는 군사 충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요즘과 같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지도자 간 상호 비방도 적었다. 그리고 평양과 워싱턴 간에 뉴욕 채널 등을 통하여 핫라인이 작동되고 있었다. 1994년 뉴욕 시내 2평 빵집에서 북폭(北爆)과 협상의 주제를 놓고 고뇌하던 양국 외교관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현재 6자회담 틀이라는 외교 협상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1994년보다 유용하지 않다. 또한 공화당 행정부에는 카터와 같은 평화주의자도 별로 없다.
금년 하반기에는 1994년 5월부터 전개된 무력 시나리오가 유사하게 재연될 것 같다. 역사의 반복이다. 이제 정부도 북한 핵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사태에 수동적인 반응보다는 가능성과 개연성에 대비하여야 한다. 북핵의 경착륙 시나리오가 우세해지는 시점에서 입지가 어정쩡한 정부를 보완하는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재·보선에 주력하느라 국제정세 파악이 어두운 여야는 우선 ‘북핵 특위(特委)’를 구성하여 핵심을 직시해야 한다. 국회는 북핵 불감증으로 우리 정부의 대책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안위에 관한 사안에 대한 직무유기다. 국회는 사태가 악화된 이후에 우왕좌왕하지 말고 사전에 체계적으로 대처하여 위기상황에서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
김정일 ‘남쪽 친구들’의 궤변 [류근일, 조선일보, 2005. 5. 17, A34쪽.] 김정일의 핵 보유 선언은 그들의 핵 개발이 단순한 벼랑 끝 전술도 아니고, 협상력 높이기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김정일은 정말로 핵무기를 갖기로 작정한 것이고, 핵 덕택으로 살든지 핵 때문에 죽든지, 둘 중 하나로 나가기로 작심한 것이다. 김정일로서는 설령 만에 하나 핵을 포기할 생각이 들더라도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와서 핵을 포기하면 ‘위대한 영도자’의 무오류(無誤謬)의 권위는 끝장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핵 보유 선언은 숱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우선 ‘햇볕’만 쬐어주면 김정일이 달라질 것이라고 장담하던 위인들이 영 우습게 돼버렸다. 그리고 통일부장관 정동영씨 같은 사람도 꼴이 아주 사납게 돼버렸다. ‘북한에 못 가본 통일부장관’이 될까봐 더 안달이 난 듯, “핵을 보유하겠다는 것이지, 이미 보유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던 그가 이번에는 또 어떤 말장난을 준비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일이 이렇듯 난감해지자 저들은 또 새로운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김정일이 핵을 가지기로 작정한 것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대북(對北) 강경정책 때문이라는 ‘책임 떠넘기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리고 김정일은 핵을 만들지 않기로 국제적으로 약속한 그 무렵(1994년)에도 비밀리에 핵 만들기를 줄기차게 계속하고 있었다. 저들의 궤변은 계속된다. 이제는 김정일이 ‘핵 보유국’이 됐으니 미국이 그것을 인정하고 ‘김정일 살리기’ 카드를 조건 없이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인즉 “서로 양보해야…” 운운하지만, 결국은 미국더러 김정일 떼쓰는 대로 다 들어주라는 것이다. 예컨대 전 대통령 김대중씨 같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에 책임 있는 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 인해 6·25전쟁 같은 동족상잔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점에서라도 김정일과 타협하라는 것이다. 며칠 전 그가 어느 대학에서 했다는 강연의 한 대목이다. 하지만 6·25 동족상잔은 결코 분단 자체의 탓이 아니었다. 스탈린-모택동-김일성 합의하에 ‘인민군’이 탱크를 밀고 남쪽으로 쳐들어 오지만 않았더라면, 6·25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기야 ‘남한’이 있었기에 남쪽으로 쳐들어왔다는 논리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애당초 분단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런 명명백백한 사실들을 ‘김정일 감싸기’ 세력은 한사코 외면하고 있다. 외면 정도가 아니라 6·25전쟁의 원인을 미국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궤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북한이 너무 궁지에 몰려서 저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오늘처럼 만든 것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며 귀신도 아니다. 북한을 저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김정일 자신일 뿐이다. 세계의 공산권이 붕괴했을 때 그는 지금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꼭 한 가지, 개혁 개방이 자신의 절대권력을 위협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인민이 먹고살 길보다는 자기 개인의 절대권력을 더 우선시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조차도 자기가 세운 나라가 ‘굶어죽는 나라’라는 실상을 보고받고서는 경련을 일으키며 경악했다지 않는가. 북한 정보기관에서 일하다가 탈북한 어느 인사에 의하면 김일성은 그 즉시 아들을 제치고 남북 정상회담을 주도하는 등 모든 것을 털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어떻게 했기에 오죽하면 그 아버지까지 그랬겠는가. 한국의 자칭 진보파가 진정한 이성적 좌파가 되고 싶다면 김정일의 잘못된 노선을 온갖 궤변으로 감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초래한 북한 주민의 고통을 가슴 아파해야 한다. 북한의 주인은 북한 주민이지, 한 사람의 ‘실패한 독재자’일 수 없다. 김정일과 그의 ‘남쪽 친구들’이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미국이 아니라, 언제인가는 깨어날 북한 주민임을 명심해야 한다. 대학가에 일고 있는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아침 햇살처럼 수구좌파의 캄캄한 어둠과 미망을 걷어낼 날을 고대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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