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11월 27일 [제9권 48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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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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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본문은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할 줄 몰랐던 사람들에 대해 증거합니다. 우리는 감사에 인색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돌아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국토는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갈릴리 지방, 사마리아 지방, 유대 지방의 세 지역으로 구분됩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 지방의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는 갈릴리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의 경계 지역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 때 그 부근에 살던 나병환자 열 명이 멀리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예수께 간구하였습니다. 나병은 불치병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동네 밖에서 격리되어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아야 했었습니다(레 13:46).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많이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의 긍휼의 치료밖에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을 당할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7, 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었고 그 말씀 속에는 그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주의 말씀대로 갔고 가다가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다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얻습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은 복된 길입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그것도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십니다. 그는 실상 불치의 병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인 지옥 갈 죄들로부터 죄인들을 건져주시는 구주이십니다. 오늘도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오면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습니다. 또 그를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어떤 어려운 문제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는 응답하심을 얻을 것입니다.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은택은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평소에도 우리는 맑은 공기와 물을 마시고 살며 하나님이 주시는 각종 식물들, 채소들과 산나물들과 약초들을 먹고 삽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나, 바다의 물고기들도 굽거나 삶아서 먹습니다. 자연 속에서 금은이나 철, 구리 등의 광물질도 캐내고 땅 속에서 석유나 가스도 채취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이런 은택들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곡식들과 열매들이 풍성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풍성한 자연 은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든 성도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귀한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속죄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나병보다 더 지독한 죄의 용서입니다. 그것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천국을 얻는 것이요 이 세상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이 복된 부활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는 동안 교회 안에서 성경의 교훈을 받으며 위로를 받고 양육을 받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든 진실한 신자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의 복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 모두가 고침을 받았으나, 그 중에 오직 한 사람만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주 예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께 돌아와 감사한 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었지만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과 혼합된 혈통의 역사를 가졌고 그래서 이방인이라고 불리웠던 자입니다(18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그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했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사마리아인보다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를 받았던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세상에는 감사에 인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큰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감사는 상대방이 내게 베푼 호의와 선한 행위를 인정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감사치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까닭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중심적이고 세상중심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적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는 것과 심령으로 그의 큰 은혜를 받은 것은 다릅니다. 옛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많은 기적들을 체험했지만 그 심령에 깨달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조금만 어려운 일들이 있어도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기를 잘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많이 들었고 병고침의 일들을 체험하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으며 떡 기적의 현장에 있었고 그 기적의 떡을 먹기도 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을 때 그들에게 동조하고 주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무지하고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평소의 모든 자연 은택들과 또 해마다 주시는 추수의 풍성함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과 천국의 약속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립시다.

예수께서는 그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 자주 '네 믿은 대로 되라'(마 8:13) 혹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마 9:22; 눅 7:50; 8:4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병고침을 받았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어떤 의로운 행위가 아니고 그저 긍휼의 하나님만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이런 구원받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병만 치료받은 것이 아니고 영혼의 구원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증거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주와 섭리자이심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은택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과 물질, 또 가정과 가족들과 국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는 추수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추수는 창조주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선인과 악인을 구별치 않고--주시는 복된 자연적 혜택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던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우리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통한 죄사함의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우리에게 영생의 천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또 장차 누릴 영생과 천국의 영광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참된 교회를 주시고 성경책을 주시고 그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함으로써 큰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참 믿음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참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모든 은택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주시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립시다. 또 추수 때를 맞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풍성한 추수의 복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구원을 인해 항상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올립시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했습니다(살전 5:16-18). 우리는 병고침을 받고도 하나님께 영광돌리거나 감사할 줄 몰랐던 저 무지하고 배은망덕한 아홉 명의 유대인들처럼 되지 말고, 예수께 돌아와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했던 저 한 명의 사마리아인처럼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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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강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찬송과 찬양은 사람이 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양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 다섯 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는 시편인데, 이 시들은 찬송과 찬양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께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 150편은 우리가 왜 하나님께 찬송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것을 증거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까? 오늘 읽은 시편 150:2은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시편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그의 능하신 행동 때문에,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 혹은 위대하심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시고 돌보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일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나타냅니다. 광대한 우주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은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고 높은 산들과 넓은 들판들과 깊은 바다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 거기에 각종 나무들과 풀들과 꽃들이 있고 또 거기에 수많은 각종 새들과 각종 물고기들과 각종 크고 작은 짐승들과 또 여러 민족, 나라, 언어, 피부색깔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이며 이것들은 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시고 놀라우신 지혜와 능력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온 세상과 모든 생물들과 사람들을 돌보시고 다스리시고 각 개인과 나라와 온 세계의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다스리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같이 지혜와 능력이 크신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멸망으로부터 건져내어 자기의 거룩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높습니다.

그래서 시편 96:1-4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우리는 특별히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구원의 일들을 인해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는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는 우리의 입과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은 사람이 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람의 입과 목청은 매우 아름다운 악기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는 독창이나 아름다운 화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중창과 합창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좋은 방법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악기들을 사용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여덟 가지의 악기들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나팔, 둘째는 비파, 셋째는 수금, 넷째는 소고(작은 북), 다섯째는 현악, 여섯째는 퉁소, 일곱째는 큰 소리 나는 제금, 여덟째는 높은 소리 나는 제금입니다. 오늘날에는 더 많은 종류의 악기들, 예를 들어 피아노를 비롯하여,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같은 현악기들, 트럼펫, 트럼본, 플륫, 클라리넷, 피콜로, 오보에 같은 관악기들, 팀파니, 큰 북, 작은 북, 탬버린, 트라이앵글 같은 타악기들 등 다양한 악기들이 있습니다. 또 이런 여러 종류의 악기 소리를 재생하는 전자 오르간 혹은 파이프 오르간 같은 악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 뿐만 아니라 악기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하나 이상씩 악기를 배울 필요가 있고 또 자녀들에게 악기를 배우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세상의 허무한 것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악기를 배우고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과 목소리를 사용해서 그리고 모든 좋은 악기들을 사용해서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마지막으로, 오늘 읽은 성경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6절)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육신으로 찬송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서 영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겠지만, 지상에서의 찬송은 중단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 우리의 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나쁜 말, 남을 비난하고 욕하는 말, 남을 속이는 거짓말,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악독한 말, 남을 저주하는 말, 더럽고 죄악되고 음란한 욕설 등 이런 말들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남을 위로, 격려하고 의와 선과 진리로 사람을 교훈하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148:12, 13,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이, 특히 영적 생명, 영적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3, 4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교훈했고, 에베소서 5:19, 20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교훈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누구나, 그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대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가 온 세상만물을 만드셨고 홀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혜와 능력이 지극히 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과 목소리로 또 모든 악기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오늘 읽은 성경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기의 손을 심장에 대보십시오. 여러분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코에 숨결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호흡이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백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영적 생명, 영적 호흡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다같이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위대하신 하나님, 창조주, 섭리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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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평양 봉수교회는 가짜교회"

기독교사회책임(공동대표 서경석)은 지난 10월 21일 ‘평양 봉수교회,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제11차 포럼을 개최, 평양 봉수교회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봉수교회는 1988년 9월 북한의 정권 아래서 최초로 설립된 교회다. 1, 2층 450석 규모의 예배당으로 평양시 보통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성도수는 3백명으로 알려져 있다. 설립 당시부터 한국교회의 유명 인사들이 봉수교회 예배를 위해 줄줄이 방북길에 오른 바 있다. 예장 통합 남선교회전국연합회는 최근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와 2006년 말까지 봉수교회 예배당을 재건축하기로 합의했다(총 40억원의 공사비 투입 예정).

발제를 맡은 서경석 목사는 탈북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봉수교회의 실상을 공개했다. “봉수교회에는 보통사람들은 근처에도 갈 수 없다. 그곳은 선택받은 사람들만 가는 곳이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한 사람이 그 교회 교인이었는데 한번은 그 사람이 예배를 보다가 눈물과 기도가 터져 나왔단다. 그리고 그는 곧 지방으로 쫓겨 갔단다. 가짜 기독교인으로 있어야지 진짜 기독교인이 되면 안되기 때문이다. 봉수교회는 단지 한국인 등 외국인으로부터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세워졌을 뿐이라는 것이 탈북자들의 말이었다.”

패널 중 박봉규 목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 사무국장)의 발언은 더욱 강경했다. “일본에 가서 몇 사람(조선그리스도교연맹 사람)과 대화했는데 결론은 내 자신의 판단이지만 그들 일당은 성령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오랜 신앙생활하면서 그 정도 판단할 수 있다. 우스운 얘기 같지만 북 사람들은 선교사를 악당(흡혈귀)으로 표현하고, 교회를 간첩들의 모략장소로 판단한다. 분명하게 한국교회의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이날 포럼에서도 참석인사들은 대체적으로 봉수교회가 ‘가짜교회’라는 데에는 동의했다고 한다.

기독교사회책임은 포럼을 접으며 ‘평양 봉수교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천명했다. 주된 내용은 서경석 목사의 발제처럼 △한국교회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교류를 중단해야 하며 북한을 방문하는 기독교인들은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보아서는 안 된다 △북한 당국은 신천 역사박물관에서 자행하고 있는 반기독교선전을 중단하여야 하며 신앙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북한 내에서 반기독교선전이 계속되고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신규의 인도적 지원과 종교의 자유문제를 연계시켜야 한다 라는 것. 이날 모임에서는 봉수교회 문제 외에도 신천역사박물관의 기독교 비판 문제, 지하교회 문제, 김동식 목사와 안수웅 목사의 생사확인 촉구 문제 등이 함께 이야기 됐다. (기독교보, 2005. 11. 5, 5쪽.) 

      전교조는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가르쳐왔다

["全敎組는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가르쳐왔다," 조선일보, 2005. 11. 9, A31쪽.]

전교조는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상소리를 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動映像) 패러디로 물의를 빚은 부산지부의 반(反)APEC 수업을 오는 14~18일 전국 학교로 확대해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 여론과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전교조가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국가의 정체성을 짓밟고, 나라의 역사를 거짓으로 가르치고, 우방 국가들을 모욕하고, 대한민국의 진로를 거꾸로 돌려놓으려는 세뇌교육에 열을 올려온 것이 한두 해의 일이 아니다. 벌써 16년이 흘렀다. 교육의 무서움, 정확히 말하면 왜곡교육의 무서운 결과를 우리는 매일 매일 맞닥뜨리고 있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에 거부감을 느끼는 국민 비율이 42%로 몇 년 사이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전교조가 홈페이지에 ‘50문 50답’이란 이름으로 올려놓은 ‘(이라크戰전에서) 퇴각하는 이라크 군인 6,000명이 미군 탱크에 의해 생매장됐다’, ‘걸프전 후 이라크 암 환자가 700% 늘었다’는 ‘反戰(반전)수업자료집’을 보면 反美(반미) 여론이 그 정도에 그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전교조는 자신들이 내놓은 ‘反戰(반전) 퀴즈’에서 80점 아래로 받은 학생은 ‘겉은 한국인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인일 가능성이 많은 사람’으로 부끄러운 느낌을 갖도록 유도 교육을 해오기도 했다.

물론 미국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APEC 반대집회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설령 교사가 그런 생각에 共感(공감)한다 하더라도, 판단이 성숙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을 교실에서 가르칠 때는 자신의 固定(고정) 관념보다는 균형 있는 판단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선생님의 最小(최소) 倫理(윤리)다.

우리의 한해 교역규모는 5,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작년 경제성장에서 수출이 기여한 비율이 73%나 된다. 국제화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국민 2세를 길러내는 책임을 맡고 있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핵심 우방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주고 북한처럼 굶어죽는 孤立(고립) 自主化(자주화)를 대한민국의 活路(활로)인 양 퍼뜨리는 행위는 교사이기를 포기했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전교조의 행위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과 윷놀이를 하자면서 윷놀이 판에 ‘국가보안법’이라고 적힌 자리를 만들어놓고, 학생들에게 ‘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인 친구를 숨겨주고 밥을 사주면 보안법의 무슨 혐의로 걸리나’라는 퀴즈를 내놓기도 한다. 전교조는 어린이날 아이들에게 읽히는 동화 자료에 ‘빨치산이었던 춘자네 아버지는 경찰에 끌려가 죽고, 송서방 아저씨는 인민군 부역자라고 해서 너무 많이 두들겨 맞아 미쳐서 발가벗은 채 온 동네를 뛰어다니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얘기까지 실어놓았다.

자기방어적 사고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편견과 증오와 고정관념을 심어 세상을 비뚤게만 보게끔 가르치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다. 우리 사회는 이미 ‘교사로 위장한 거짓 교사들’이 주입시킨 이념의 毒(독)을 해독시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비용을 지급하고 있다. 이제는 국민들이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이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중대 결심을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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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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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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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