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9월 18일 [제9권 38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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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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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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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시편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시편 62편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랐음을 간증하며 또 우리에게 그런 삶을 권면하고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난이 많은 세상입니다. 다윗은 본문 2절에서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고, 6절에서도 또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들은 그가 처한 현실이 요동할 만한 현실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지금 복잡한 현실, 평안과 안정을 잃을 만한 현실, 두려움과 염려를 가질 만한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다윗은 또한 1절과 2절에서 '나의 구원'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고, 5절에서는 '나의 소망,' 6절에서는 '나의 구원'이라는 말을 또 한번 했는데, 이것은 그가 지금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고 그의 현실이 절망적임을 암시합니다. 사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평안이 없습니다. 찬송가 474장의 저자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평안을 몰랐구나/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라고 했습니다. 시편 90편의 말씀대로, 인생의 70년 혹은 80년의 삶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던 것입니다(마 11:28). 사도 바울도 로마서 3장에서 죄인인 인생들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고 그들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롬 3:16, 17). 왜 인간의 세상 생활에 참평안이 없는 것입니까? 죄 때문에 그렇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사야는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사 57:21). 인생은 죄 때문에 참평안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시편 34편은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말합니다(시 34:19). 욥의 고난은 그 대표적 고난입니다. 주께서도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33). 또 사도 바울도 신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행 14:22). 바울 자신도 전도 사역의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당했고 고린도후서에서는 그들이 아시아에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했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다고 간증했습니다(고후 1:8, 9).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3절을 다시 번역하면, "너희가 언제까지 사람을 해할 궁리를 하느뇨? 너희는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이 부숴지리로다." 4절,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지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세상에는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종들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성도를 해칠 궁리를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를 꾀한 것과 같습니다(마 12:14). 그들은 거짓말로 그 일을 도모합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요,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속으로는 저주하는 이중인격자요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3절을 다시 번역한 대로, 악인들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이 부숴질 것입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든든히 선 것 같으나 실상 기초가 없고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한 건축물과 같습니다. 시편 1:6의 말씀대로, 악인의 길은 망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여전히 악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구원받은 참성도들은 몸도, 마음도 약한 자들입니다. 몸은 잘 피곤하고 아프며 마음도 약해 낙심과 두려움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고난의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 이 시를 씁니다. 1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말합니다. '잠잠히 바란다'는 히브리어 두미이야는 '잠잠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랐습니다. 본 시편에는 '. . . 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원문 성경에는 아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5번 ". . . 만"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1절, "하나님만." 2절, "오직 저만." 4절, "떨어뜨리기만." 5절, "하나님만." 6절, "오직 저만." 그리고 9절에서는 "진실로"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다윗은 왜 하나님만 바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1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절,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한다'는 말은 다윗이 고난 중에 약간 요동했음을 암시합니다. 성도도 사람인 고로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 잠시 동안, 약간 요동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5절에서는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권면하고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소망'은 구원의 소망이요 회복의 소망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를 물리치고 그의 억울함을 갚아주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다윗은 6절에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라고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든든한 반석이시며 우리가 피하여 숨을 산성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다윗은 이번에는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진전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이제는 조금도 요동치 않게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잠언 28:1에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또 7절에서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다시 확인하듯이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 우리의 영광, 우리의 힘의 반석,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구원과 영광과 피난처를 가집니다. 다윗은 이제 8절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교훈을 줍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시로'라는 히브리어는 '항상, 언제나'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십여 년 동안 사울의 칼을 피해 피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과 피난처 되심을 체험했습니다. 바울도 많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장에서,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고백했습니다(고후 1:8-10). 오늘 본문 8절은 '하나님을 의지함'과 '그 앞에 마음을 토함'을 함께 말합니다. 믿음은 기도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눅 18:8).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시시 때때로, 항상 그에게 나아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란다'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어서 이 세상의 것들의 허무함을 말하면서 그것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9절에서 그는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천한 자들이 있습니다. 좋은 옷을 못 입어보고 좋은 음식을 못 먹어보고 좋은 집에서 못 살아보고 사람들에게 존경과 대접을 못 받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참으로 허무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신분이 있고 재물이 많은 자들도 실상 허무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그들은 외모만 귀하게 보이며 옷이 날개라 고상하게 보일 뿐이지 실상 하나님을 무시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고상하고 가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외형적 고상함은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볍다'는 말씀은 인생은 천한 자나 귀한 자는 비슷하게 허무하고 가치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이 죽어 그 육체가 썩고 그 영혼이 지옥의 불못에 던지운다면 그의 가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시편 119편에는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시 119:119). 다윗은 10절에서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치심(置心)한다'는 말은 '마음을 둔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포학을 의지하지 말아야 하고 탈취한 것으로 허망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포학한 자는 당장에는 힘이 있고 세력이 있는 것 같고 무엇을 얻은 것 같으나 헛된 자이고, 탈취한 재물은 당장에는 무엇을 많이 가진 것 같으나 결국 다 헛됩니다. 그러므로 잠언 20:17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잠언 23:5에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본 시편의 끝부분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대해 몇 마디 증거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권능으로 행하십니다. 11절에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주기도의 끝의 말씀처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하나님께만 속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천지 창조의 일에서, 또 그의 섭리의 모든 일들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권능을 가지신 섭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참도움이시요 그를 앙망하는 자마다 독수리 같은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사 40:28-31). 둘째로, 하나님은 인자로 행하십니다. 12절에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하며(시 103:17), 그는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시 32:5). 셋째로, 하나님은 각 사람을 공의로 보응하십니다. 12절에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와 선을 행하며 고난 중에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을 건지시고 지키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을 공의로 보응하시고 벌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에는 고난과 역경이 있고 마귀의 시험과 때때로 악한 자들의 핍박이 있지만, 우리는 고난의 현실만 보고 낙심치 말고 마귀의 시험과 장난과 위협만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잠잠하며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또한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맙시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돈을 의지하지 맙시다. 그것들은 다 허무하고 실상 참 가치가 있는 것들이 못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그만 우리의 구원이시요 그만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권능과 인자와 공의의 보응으로 섭리하심을 믿읍시다. 하나님은 권능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섭리하십니다. 또 그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 참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인자를 베푸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를 두려워하며 의지하고 그의 교훈대로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을 돌보며 좋은 것으로 주시지만, 그러나 반면에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공의로 보응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오직 그를 의지하며 모든 악을 버리고 날마다 의와 선만을 힘써 행해야 할 것입니다. ----------------------------------------------------------------------- 주일오후설교: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몇 가지 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역사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이 기독교 진리에 있어서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인류의 구속(救贖)을 이루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며 이 사건을 믿고 이 사건을 전파한다(고전 1:23; 2:2).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객관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직 죄인들의 심령에 그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아직 죄인들 자신에게 구원이 적용되기 전에, 아직 죄인들의 심령 속에 그 죽음의 효력이 미치기 전에, 그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택자들을 위한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앞에서 고찰한 속죄의 네 가지 의미들은 다 속죄의 객관성을 증거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대리적(代理的)이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대속의 공로는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기에 충족하였다. 그의 속죄의 대리적 충족성은 그의 신성(神性)에 근거한다. 그의 신인(神人)적 인격은 그의 속죄 사역을 무한한 가치를 가진 행위로 만들었다. 이사야 53:5, 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복음 20:28,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완전하였다. 그것은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완전하였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덧붙여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였다.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한 속죄를 다 이루셨다. 그 속죄 사역은 택자들의 죄값의 완전한 지불이며 그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의 완전한 보상이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히브리서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케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택자들의 죄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 그는 택자들을 위해 완전한 대속 제물이 되셨다. 이제 예수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죄씻음과 완전한 의를 받았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참자유와 평안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참감사와 사랑과 헌신의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속량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에 대해서는, 역사상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보편속죄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속죄설이다. 보편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 견해의 전제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고, 그 견해의 핵심적 생각은 구원이 궁극적으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알미니우스주의라고 부른다. 이와 구별하여, 제한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만을 대속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를 원하셨는가, 아니면 인류 중 일부 즉 그가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전체를 위해 즉 인류 전체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는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만을 위해 돌아가셨는가?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구원의 보장(保障)의 문제와도 관계되며, 또 전도할 때 전도자의 실제적 마음가짐에도 관계된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문제는, 사람의 구원이 오직 인간 자신의 결심에 달려 있는가, 혹은 달리 표현하여, 하나님께서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신가이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한성을 성경적 진리로 고백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의 근거는 다음 3가지 요점으로 서술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밝히 가르치며 또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가르친다.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요나 2: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로마서 9: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 .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마태복음 16: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사도행전 16:14,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하나님의 예정이 효력이 있다는 사실도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확증한다. 요한복음 6:39,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러한 모든 말씀들을 볼 때, 사람의 구원이 오직 자신의 결심(회개와 믿음)에 달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또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거나 제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고 뜻하셨다면,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시는 일이 없다. 그런데 보편속죄설은 사람의 구원이 자신의 결심에 달렸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구원의 능력을 부정하는 잘못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변화시키실 수는 없고 또 변화시키시려고도 하지 않으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와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제한성을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이 않다면, 선택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인류 전체와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 자기 사람들, 자기 양들에 대해 분명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0: 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민족들과 구별하여 사랑하심도 하나님의 구원의 제한성을 증거한다(호 11: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도 구원의 제한성을 암시한다(사 53:5, 6, 8; 고후 5:21; 갈 3:13). 또한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도 구원의 제한성을 암시한다(사 53:11, 12; 마 20: 28; 26:28).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크심을 옹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부정한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어떻게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만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그 나머지를 영원한 멸망 가운데 버려두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믿는 보편 구원을 주장하지 않는 한--물론 보편 구원론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그들의 보편적 속죄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옹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을 가진 전능자가 죄로 멸망하는 인생을 관망만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을 영원한 멸망에 버려두셨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속죄의 본질적 성격에 있다. 속죄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사도행전 20:28, "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는 결코 헛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어떤 사람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는데 그가 멸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영원 전에 선택된 자들, 곧 그의 양들을 위하여 속죄의 피를 흘리셨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그들, 바로 그가 피흘려 사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신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면, 멸망 받을 죄인이 세상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아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속죄의 본질적 성격상 피값을 주고 사신 자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속죄설은 논리적으로 보편구원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은 성경적 진리일 수 없다. 마태복음 7:13,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누가복음 13:23, 24, "구원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 . .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