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7년 3월 18일 [제11권 11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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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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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하갈과 이스마엘

[창세기 16장 1-2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브람이 믿었고(창 15:4-6) 그의 아내 사래도 아마 믿었겠지만, 사래는 결혼한 후 처음부터 자녀를 낳지 못했고(창 11:30) 그 때까지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좀더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연약한 생각이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애굽 사람 여종이 있었는데, 사래는 그를 자기 남편에게 주어 그를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는 그 일을 남편에게 제안했고 남편은 아내의 말을 따랐다. 마치 첫사람 아담이 아내의 잘못된 요청을 받아들인 것처럼, 아브람은 아내의 인간적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의 제안이라 하더라도 거절할 것은 거절해야 했었다. 아브람은 우리와 같이 연약함을 가진 자이었다.

[3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10년 후이었더라.

'첩'이라는 원어(잇솨)는 '아내'라는 말이다. 아브람은 아내가 둘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었다. 일부일처(一夫一妻)는 하나님의 뜻이다(창 2:2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

[4-5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으로 인하여 임신한 하갈은 자신의 임신함을 깨닫고 사래를 멸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갈의 연약이며 잘못이었다. 여종인 그에게 아브람을 준 것은 사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의 첩이 된 것이 여주인의 덕분인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여주인을 끝까지 존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고 연약했다.

[6절]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의 눈에 좋은 대로 그 여종 하갈에게 행하라고 말했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했다.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했으니 학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주인이 여종에게 멸시를 받고 그냥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을 좀더 참고 끝까지 잘 대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임신한 여종을 학대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었다. 하갈의 인격이 부족해서 여주인께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위치를 벗어난 것이지, 여종이 여주인을 무시한다고 여주인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람의 마음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있지 여종에게 있지 않았다.

학대를 받던 하갈은 사래의 얼굴을 피해 집을 나와 도망쳤다. 학대받는 자가 도망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학대는 자신이 스스로 가져온 일이었다. 그가 여주인을 멸시하지 않았더라면 받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므로 실상 도망칠 일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겸손히 여주인에게 복종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는 도망쳤다.

[7-8절]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도망치는 하갈을 여호와의 사자가 만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이었다. 여기 여호와의 사자는 단지 한 천사가 아니었다. 10절에 보면 그는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13절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라는 말씀을 보면, 그는 구약 시대에 종종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창 22:12, 14; 출 3:4).

여호와의 사자는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셨다. '술 길' 곧 술이라는 곳으로 가는 길은 당시의 주요한 도로 중의 하나이었고 그 길에 한 샘이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만나신 것은 그 샘 곁, 즉 구체적인 한 장소에서이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다. 하갈의 신분에 대한 언급은 하갈로 하여금 즉시 자신의 신분을 다시 깨닫게 했을 것이다.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멸시했고 그에게 학대를 받았던 사래를 '나의 여주인'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사래는 그의 여주인이었다.

[9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셨다. 여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여종의 마땅한 본분이다. 종은 주인을 멸시하지 말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질서를 중히 여기신다. 또 임신한 몸으로 도망친 것은 자신과 태아 모두에게 해로웠다. 그 태아는 아브람의 아이이다. 그는 자신과 그 아이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한 때까지 힘들어도 집에 머물러 있으며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했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질서를 존중하며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와 혼란을 원치 않으신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학생은 선생님께 순종하고 직원은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적절한 다른 길을 보여주시기 전까지 현재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0-12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는 또 하갈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산(多産)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복이었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가 실수로 잉태케 한 하갈의 아들도 복주셔서 번식케 하실 것이었다.

또 그는 그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고 그가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다(시 68:5).

또 그는 하갈이 낳을 아들이 사람들 중에 들나귀같이 되겠고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혹은 앞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어떻게 활달하고 호전적 인물이 될지를 보인다. 과연 이 말씀대로, 이스마엘의 자손인 아랍인들은 호전적 유목민의 특징을 가졌다.

[13-16절]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86세이었더라.

하갈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이라고 불렀다. 그는 주인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외로웠겠지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 너무 감격하였던 것이다. 하갈은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리웠는데, 그것은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샘물'이라는 뜻이다. 그 샘물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는 언급은 모세의 보충적 설명이다. 그것은 성경의 사건이 인간이 지어낸 허구적 내용이 아니고 진실한 역사적 내용임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때가 되어 하갈은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다. 그 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 즉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1년 후이었다. 비록 아브람의 적자(嫡子)가 아니고 서자(庶子)이긴 하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첫아들이었다.

창세기 16장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 아브람도 부족과 연약이 없지 않았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연약한 그를 통하여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본장에서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사래와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려 해서는 안 된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났으나 더 기다려야 했듯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때때로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여기에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계 13:10; 14:12).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믿고 사랑한다면 그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리자.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처한 환경에서 질서를 중히 여기고 서로 존중하고 피차 복종해야 한다(롬 12:10; 빌 2:2-3). 또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성경은 종이 두려움과 성실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엡 6:5; 벧전 2:18).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선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인간의 감정을 따라 보복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셨다(마 5:39-48). 또 성경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교훈한다(롬 12:17, 21).

넷째로, 우리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만 돌아보시는 섭리자가 아니시고 사래의 여종 하갈도 돌아보시고 그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오늘날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고통도 들으시고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목자이시다(시 23:4).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8:20). 성령께서는 예수 믿는 우리 속에 영원히 거하신다(요 14:16).

[2-5절]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때까지 그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브람은 자기 집에서 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그의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3절에 '내 집에서 길리운 자'라는 원어는 '내 집의 아이'라는 뜻으로 영어 성경들은 '내 집에서 난 자'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그는 아브람의 집에서 종으로 나서 길리운 자이었던 것 같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 엘리에셀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며,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며, 네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의심 없이 믿었다. 아브람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늙었고 자녀 출산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었다. 로마서 4:19-21,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義)로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의 착하고 의로운 행위를 의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 간주될 만큼 완전치 못하며 부족투성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아브람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의 본이 되었다(롬 4:1-3; 23-25).

[7절]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다. 그는 가나안 땅을 그에게 기업으로 주기 위해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말씀하셨다. 하란에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창 12:1)은 단지 하란에서가 아니고,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에게 암시적으로라도 주어졌던 것 같고, 그렇다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자녀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던 것(창 11:31)은 아마 아브람의 요청 때문이었을 것이다.

[8-11절]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증의 표를 요청했다. '무엇으로'라는 말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내기보다 믿음을 위한 확증의 표를 구한 것이다. 훗날에 기드온이나 히스기야도 비슷한 요청을 하였다(삿 6:37; 왕하 20: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3년된 암소, 3년된 암염소, 3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그것들을 준비하고 그 중간을 쪼개었다. 제물의 중간을 쪼갠 것은 언약을 맺는 당사자 어느 한 쪽이 그 언약을 어기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이었던 것 같다(렘 34:18). 솔개가 제물의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그것을 쫓았다.

[12-14절]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람의 자손이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어 이방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며 그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심으로 그들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대로 이루어졌다. 당시에 그들은 애굽에서 심한 학대와 고통을 받고 있었고(출 1:11, 14; 2:23-24; 3:7, 9), 그들은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 만에 그 괴롭힘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왔다(출 12:40).

[15절]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다시 번역하면, "또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라. 너는 장수하다가 장사되리라"(원문, KJV). '조상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이 몸의 죽음 후에도 계속 존재하며 어떤 장소에 모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영혼불멸에 대한 성경의 한 증거이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불멸적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영혼은 몸이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곳에 집결된다. 성경은 그 장소가 천국과 지옥이라고 말한다. 의인의 영혼은 천국에 올라가 몸의 부활 때까지 안식하지만,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 던지워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고통을 당할 것이다(눅 16:19-31).

[16절]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4대 만에'라는 말씀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예를 들어, 야곱이 애굽에 내려간 때로부터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에 이르는 4대째에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을 대표한다(창 48:22; 왕상 21:26; 암 2:9-10). 또 아브람은 현재 아모리 족속 곁에 살고 있다. 창세기 14:13은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고 말한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은 후에 있을 가나안 땅 정복이 그 곳 거주민들의 가득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것을 암시한다. 과연, 레위기 18:24-25은 증거하기를, "너희는 이 모든 일[심히 음란한 일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고 하였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신약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의 약속도 꼭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7-21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쪼갠 제물들 사이로 지난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은 하나님을 상징한 것 같다(출 3:2). 그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요청한 하나님의 표증이었다. 그 날 하나님께서는 다시 땅을 약속하시고 그 땅의 경계와 당시에 거기 살고 있었던 열 족속들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후에 다윗과 솔로몬 왕 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그 경계까지 거의 확장되었다(삼하 8:6, 14; 왕상 4:21, 24).

결론적으로, 창세기 15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방패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모든 성도의 방패이시다. 다윗은 시편 18:2에서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방패라고 고백하였다. 세상에는 환난과 시험이 많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대적들도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시요 방패가 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방패로 삼고 살자.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실 상은 매우 크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의 상은 매우 크다"고 말씀하셨다. 시편 19:11은 "또 주의 종이 이로[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운동 선수처럼 열심히 달려 썩지 않을 상을 얻으라고 교훈하였다(고전 9:24-25). 예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약속된 상을 기대하며 열심히 의와 선을 행하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의를 주신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그의 의로 간주하셨다. 우리의 구원도 그러하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러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그는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우리의 의가 되시며 현세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내세에서 영생의 영광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오랜 세월 후일지라도 반드시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의 약속도 꼭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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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후설교:                                      전쟁

전쟁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모든 종류의 전쟁이 악하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전쟁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소위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들은 전쟁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살인이 항상 옳지 않으며 특히 전쟁은 대량 학살을 가져오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들은 전쟁의 동기와 결과가 악하므로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전쟁이 다 탐욕에 근거하고,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 신체 불구, 가정 파탄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 가지 질병과 기아 등의 많은 불행한 일들을 만들며, 또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므로 모든 전쟁이 악하다고 말한다.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전쟁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전쟁의 예들은 신정국가의 특수한 경우들이며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넷째로, 그들은 성경이 악을 악으로 응징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주의 말씀을 인용하며(마 26:52), 또 악한 자를 대적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도 인용한다(마 5:39, 44; 롬 12:17-21).

그러면 평화주의자의 이런 주장은 타당한가? 그리스도인의 바른 전쟁관은 무엇인가? 전쟁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국가 혹은 정부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정부의 권세를 인정하셨다. 요한복음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사도 바울도 국가와 위정자들의 권세를 인정하고 거기에 복종할 것을 교훈하였다. 로마서 13:1-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디도서 3: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라." 베드로전서 2:13-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국가나 정부는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로 주신 기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질서와 평안을 위해 위정자들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국가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고 백성들은 자기 나라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물론 자기 나라에 불만족한 자는 기회가 된다면 다른 나라로 이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나 정부는 사회의 혼란을 막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악한 정부라도 무정부(無政府)보다 낫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물론, 국가나 정부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악한 명령을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그 명령을 복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더 높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많다.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렸다(출 1:17, 21).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금신상에 절하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복종치 않았다(단 3장).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유대인 공회의 명령을 복종치 않았다(행 4:18-20).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군인은 결코 나쁜 직업이 아니고 경건한 군인이 가능하며 세속 국가에서 군대 조직은 필요하다. 세례 요한은 군대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단지 군인들에게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誣訴, 거짓되이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 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눅 3:14). 예수께서는 한 백부장이 이스라엘의 그 어떤 사람보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증거하셨다(마 8:5-10).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한 고넬료라는 백부장에 대해 증거한다(행 10:2, 4). 또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로마 총독의 심문을 받았을 때,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에게 호소하면서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행 25:8-11). 군대는 악한 조직이 아니고 사회의 질서와 평안을 위해 필요한 조직이다.

셋째로, 정당한 전쟁은 인정되어야 한다. 정당한 전쟁이란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정당성을 가지는 전쟁을 말한다. 한 국가가 상대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자기 나라와 그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행하는 정당방위적 전쟁이나, 또는 다른 나라를 부당하게 침략했거나 악한 테러를 일삼는 나라에 대해 여러 나라들이 연합하여 응징하는 전쟁 등은 정당한 전쟁이다. 국가가 이러한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려 할 때 모든 국민은 그 전쟁에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공의의 응징에 대해 가르친다. 이것은 국가가 행하는 사형의 정당성에서 확인된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또한 성경은 정당 방위를 옹호한다. 출애굽기 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그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검을 사라고 말씀하셨다(눅 22:36).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행한 전쟁은 이런 전쟁이었다(창 14장). 또 유다 왕 아비야 때에 하나님은 유다를 침공한 이스라엘 군대를 패하게 하셨고(대하 13:15-16), 여호사밧 때에도 이방 나라를 패배케 하셨다(대하 20:22-23, 29).

물론,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는 것은 선한 일이므로 전쟁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신 20:10-15). 전쟁은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합법적 전쟁이라 할지라도, 포로들이나 여성과 어린이의 학대나 민간인 살상 등을 피해야 하며, 특히 오늘날 화학 무기, 생물학 무기, 핵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의 사용은 금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개인적 보복과 공적 보복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의 교훈(마 5:38-44)이나 원수를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롬 12:19-21)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개인적 보복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주님 자신이나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눅 23:34; 행 7:60) 상대방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사랑의 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이 사회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전쟁을 부정하는 구절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적인 보복적 살인은 허용되지 않으나 공적인 사형 집행이 정당하듯이, 국가는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정당성을 가지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2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정당하다고 본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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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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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18,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4,000원(송료 포함).

  [추천하는 책]

◆ 김성욱, 대한민국 적화보고서. 355쪽. 13,000원.

--오늘 우리 사회의 이념적 문제를 잘 증거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