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7년 9월 23일 [특별1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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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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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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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공산화 초래한 평화협정 [김정은, "2년 만에 월남 공산화 초래한 1973년 베트남 평화협정," 미래한국, 2007. 9. 8, 5쪽; 홍규덕, "베트남전쟁과 한국·베트남·미국 외교관계" 참고.] 1973년 1월 23일, 파리시간으로 12시 30분에 전쟁 종식과 베트남에서의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이 미국 측 헨리 키신저와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특별고문 르덕토에 의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세계에 전해졌다. 이 협정은 1월 27일, 베트남 파리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관계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조인되었다. 닉슨 美 대통령은 23일 베트남전쟁 종결 선언을 하며 "명예로운 평화"를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명예로운 협정을 맺은 만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면서 "우리는 동맹국들을 배반하는 평화협정을 맺지 않았으며, 우리는 전쟁포로를 희생하여 평화를 획득한 것도 아니다. 또한 인도차이나의 5천만 국민을 전쟁에 방기한 채 우리만이 전쟁을 끝맺은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73년 평화협정 이후의 베트남 상황은 닉슨의 발언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 베트남이 무너지고 베트남이 완전히 공산화 되는 데에는 불과 2년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존슨 대통령은 월 20억 달러가 넘는 전비를 지출하면서도 전황이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당시 20만 명의 추가병력을 요구하던 웨스트모얼랜드 주월 사령관을 본국으로 송환하고, 그 동안 공세정책을 주도하던 맥나마라 국방장관도 경질하고 만다. 결국 1968년 3월 31일 존슨은 DMZ를 제외한 지역에 대한 폭격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1968년 대선에 불참할 것을 발표했다. 아울러 그는 에버렐 해리만을 대표로 지명하여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노이 당국과 평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도모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1968년 5월 13일 파리협상의 첫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쉽게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들을 제시했다. 핵심은 남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라는 것이었다. 하루빨리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킬것을 요구하는 반전여론을 의식한 후임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아시아는 아시아의 손에 맡긴다는 정책으로 급선회하여 철군을 시도했다. 물론 남 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미국의 일방적인 철수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1973년 1월 27일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닉슨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시작된 인도차이나 개입의 멍에를 20여년만에 벗어던질 수 있었다. 숙명여대 홍규덕 교수는 "결과적으로 베트남 평화협정은 미국의 철군명분을 충족시켜 준 반면 결코 평화가 지켜질 수 없는 내용들로 구성된 미완의 협약이었다"고 지적한다. 닉슨은 하노인 당국이 협약을 위반할 경우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티우를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그의 영향력은 사라져갔고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 역시 베트남에 다시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1974년 가을까지 군사적 균형은 이미 북 베트남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북 베트남과 임시혁명정부는 이미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보급품을 축적하면서 결정적 타격을 가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반면 남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점차 어려워져 가고 있었다. 미군철수와 함께 경기는 위축되었고, 미국의 원조삭감과 90퍼센트가 넘는 인플레로 실업이 속출하고 군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이 같은 사기저하는 1974년 한해 동안 24만명의 정부군이 탈영을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회를 기다리던 북 베트남은 1975년 본격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불과 55일 만에 사이공 정부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얻어냈다. 사이공 함락 후 남 베트남의 지도층 인사, 공무원, 지식인들은 수용소에 보내졌다. 심지어 북 베트남을 도와 사이공 정권 반대운동을 벌였던 인사들도 대부분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작은 보트를 이용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국민들의 숫자는 약 106만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11만명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 부른 유화정책과 뮌헨회담 [김정은, "2차대전 부른 체임벌린의 對히틀러 유화정책과 뮌헨회담," 미래한국, 2007. 9. 8, 5쪽.] "우리는 크고 강력한 이웃나라와 대결하고 있는 조그만 나라에 동정하지만 어떠한 사정이 있든 다만 그것만을 위해 전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이끌어 넣을 수는 없다. . . . 나는 내 영혼 깊숙한 곳까지 철저한 평화애호자이다. 국가 간의 무력충돌은 내게는 악몽이다." 히틀러가 체코 주데텐 지역을 침략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1938년 9월 27일,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은 방송에서 국민들을 향해 이같이 말했다. 그가 말한 '조그만 나라'란 체코를 의미했다. 히틀러는 이미 수년 전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그의 침략 야욕을 밝혔고,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며 공공연하게 자신의 야망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임벌린 수상은 '전쟁을 피한다'는 명목 하에 독일에 타협하는 정책을 계속했다. 은 체임벌린의 '평화에 대한 환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영국은 평화의 유지를 원했고, 이것을 위해 나찌 독일의 요구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같은 태도로부터 이른바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이 탄생한다. 1938년의 뮌헨회담은 유화정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히틀러에 굴복하여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도록 결정한 것이다. 당시 체코에는 320만 명의 독일인이 살고있었다. 주데텐 독일인은 민주주의 국가인 체코에서 적당히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1938년 9월 12일, 히틀러는 뉘렌베르크 당대회에서 선동적인 연설을 한다. "주데텐 독일인들이 체코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으며 독일은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요지였다. 체임벌린은 연설 다음날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를 만난다. 69세의 나이에 한 번도 비행기 여행을 한 적이 없는 인물이 7시간이나 비행을 하여 독일의 맨 끝에 있는 베르흐테스가르텐까지 날아간 것이다. 체임벌린은 회담 후 "그 사나이는 냉혹하고 고집투성이이지만 나는 그의 참다운 모습을 본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그 인물에게서 한번 약속을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히틀러에 대해 평가했다(윌리엄 L. 샤이러, 제3제국의 흥망, 1993). 영국수상이 왜 이처럼 히틀러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서울대 박지향 교수는 저서(영국사,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2007)에서 "전통적 정치만을 알고 있던 . . .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자기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형의 악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9월 말까지 그는 세 차례에 걸쳐 히틀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 결과는 독일의 끝없는 요구를 전부 들어준 것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주데텐 독일인이 50%이상 살고있는 지역은 '평화의 유지와 체코의 생명적 이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데 합의한다. 체코의 베네슈 대통령은 두 강대국의 태도에 대해 "우리는 치사한 배반을 당했다"고 표현했지만, 두 나라는 베네슈 대통령에게 체코가 영불의 공동제안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9월 29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수반이 뮌헨에 모였다. 9월 30일 새벽 1시가 조금 지나서 히틀러, 체임벌린, 무솔리니, 달라디에는 순서대로 10월 1일 독일군이 체코에 진주를 개시하고 10월 10일 주데텐 지역의 점령을 완료할 것을 규정한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뮌헨협정 후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평화선언서를 제안한다. "우리들 독일 총통 겸 수상과 영국 총리대신은 오늘 거듭 회합하여 영독관계의 문제는 양국과 유럽에 있어서 제1급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인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는 어젯밤 서명된 협정과 영독 해군협정을, 다시는 전쟁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양국민이 희구하는 상징이라고 인정한다." 히틀러는 그 선언서를 읽고 즉시 서명했으며, 체임벌린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히틀러가 서명한 평화선언서를 들고 귀국한 체임벌린은 영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수상은 선언서를 흔들며 "여기 우리시대의 평화가 있다"고 외쳤다. 런던타임스는 "전장에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 정복자의 누구도, 이보다 더 고귀한 월계관으로 장식된 사람은 없었다"고 극찬했다. 체임벌린에게 감사하는 전국 모금운동이 일어났으나 체임벌린이 정중하게 이것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영국 정계에서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람이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10월 5일 하원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패배를 맛보았다"고 비판했다. 그가 후일 저술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처칠은 이 발언에 대한 야유가 진정될 때까지 연설을 몇 번씩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인들은 뮌헨회담으로 인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환호했으나, 평화에 대한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에게 수차례 더 이상의 영토침략은 없다고 약속했었다. 그는 "체코는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요구하는 영토"라고 말하기도 했다. 1939년 3월 15일 독일은 프라하에 입성했다. 다음날 히틀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독일에 병합시킨다고 선언했다. 영국인들의 충격 또한 엄청났다. 불과 6개월만에 여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유화정책의 실상이 드러났다. 이어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 국경을 침략하였고, 4일 영국과 유럽국가들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세계 제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반미(反美)유도 전국 순회 [김성욱, "좌파단체, 反美유도 전국 순회," 미래한국, 2007. 8. 11, 1-2쪽.] 북한이 부산에서 열리는 8·15남북 공동행사에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하고 김정일이 최근 5일 연속 군부대를 시찰하는 등 8·15를 남북 '평화 무드'의 계기로 삼으려는 음모에 변수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있는 가운데 남한 친북단체는 반미·반(反)한나라당 구호를 외치는 전국 순회 행사를 갖고 있다. 이들의 반한나라당 투쟁은 기존의 인터넷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한총련과 상급조직 범청학련 등은 지난 6월 소위 '6·15순례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며 반한나라당 선전·선동을 벌였다. 7월 30일에는 소위 '20기 범청학련 통일선봉대'를 결성해 순회에 나섰다. 통선대 목적 역시 미군철수와 한나라당집권 저지 선전·선동에 있다. '6·15순례단'은 6월 5일 서울 미대사관 앞에서 발대식을 가진 후 춘천-수원-청주-광주-대구-부산-대전-서울-경기를 거쳐 16일까지 활동했다. 한나라당을 규탄하는 집회도 계속됐다. 6월 11일 한나라당 부산시당 앞에서는 범민련, 실천연대 등 단체 관계자들까지 참석, '전쟁불사, 6·15공동선언 폐기 망발 한나라당 해체기자회견'을 가졌다. "한나라당을 해체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들을 다해나갈 것이다(동아대생 박병석)." "진정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한나라당을 없애야 한다. 모두가 한나라당을 해체시키기 위해 힘차게 싸워 나가자(통일시대 젊은 벗 김동윤)." "조국통일의 걸림돌 한나라당을 해체시키기 위해 자주와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들과 함께 강력하게 투쟁해 나갈 것이다(6·15순례단장 조현상, 남총련 의장)." 이상은 인터넷 통일뉴스가 전하는 참석자들의 발언이다. 이들은 기자회견 후 '근조(謹弔) 한나라당'이라고 적힌 스티로폼을 주먹으로 박살냈다. 6월 5일 출발 시에는 '한나라당 때려잡는 6·15순례단' '한나라당 주한미군은 만악의 근원' 등의 퍼포먼스를 벌였었다. 통선대는 7월 30일 지역별 발대식을 가진 후 8월 1일 서울 미대사관 앞에서 전체 발대식을 가졌다. 역시 전국을 돌며 미군철수와 반(反)한나라당 투쟁을 벌이고, 8월 15일 부산에서 열리는 남북공동행사에 합류한다는 계획이다. 7월 21일 작성된 '20기 범청학련 통일선봉대 사전교양자료집'은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 침략자들과 친미사대 한나라당 놈들은 우리민족의 꿈을 짓뭉개기 위해서 전쟁도발을 획책하고 민족의 단결을 막기위해 갖은 모략들을 결사적으로 벌이고있다… 반미, 반한나라당 대결전에서 우리청년학생들의 기개를 만방에 떨쳐낼 절호의 기회가 다가왔다. 핵 억제력을 보유한 우리민족에게 승리는 시간문제이다." "6·15- 8·15 범청학련 공동투쟁기간을 6·15시대의 일대전진과 승리의 분수령으로 장식하자!… 우리 청년학생들은 저들끼리 헐뜯고 있는 한나라당의 취약성을 파악하고 그 반역적 무리의 실체를 폭로하고 규탄하는 투쟁을 계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7월 19일 작성된 '범청학련 20기 통일선봉대 준비지침'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평화와 통일의 걸림돌, 주한미군 철수하자', '우리민족끼리 미군 없이 살아나가자'는 기치를 들고 전국 경향각지를 돌면서 대중실천 활동을 최상의 수준에서 벌일 것입니다. 또한 자주통일의 걸림돌인 미군과 친미보수정당을 걷어내는 강위력한 투쟁을 전개하여 미군철수, 친미보수척결에 대한 민중들의 의지를 표출할 것입니다." "반통일 친미보수세력인 한나라당에 대한 투쟁을 기획력 있게 전개하여 친미 반통일반민주정당으로서의 본질을 폭로 규탄한다. 선군정치에 대한 이해를 대중적으로 확산, 반한나라당 투쟁을 기획적으로 전개한다." '8·18 판문점 도끼만행'의 교훈 [이상호 ,"8·18 판문점 도끼만행'의 교훈," 문화일보, 2007. 8. 18, 22쪽.] 9·11 테러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1년 11월 미국 워싱턴 펜타곤에서 제33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가 열렸다. 그 무렵 미국은 9·11 테러를 자행한 빈 라덴과 알카에다의 근거지인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사전 작전으로 특수부대원들을 은밀히 침투시키는 중이었다. 주요 동맹국 국방장관에 대한 배려인지, 당시 현안이었던 F15 구매를 권하기 위한 의도였는지 당시 도널드 럼즈펠드 장관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김동신 장관과 단독 회담을 하면서 그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은밀히 침투한 미군 특수부대원이 당나귀 위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침투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한국의 국방부장관에게 최초로 알려준 것이다. 단독회담이 끝난 뒤 두 사람이 기자회견을 했는데 모두에 김 장관은 자신과 럼즈펠드 장관이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운을 뗐다. "25년 전 휴전선에서 북한군의 도끼만행 사건이 있었는데 럼즈펠드 장관은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으로, 나는 한국군 소령으로 보복 작전에 함께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에 럼즈펠드 장관은 "오래전 일이라 여러분들이 잘 모르겠지만 그 사건은 미루나무와 도끼가 등장하는 해괴한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럼즈펠드 장관이 '해괴한 사건'이라고 표현한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한 지 18일로 31년이 되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군들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 등으로 무자비하게 죽인 사건이다. 당시 유엔군 측은 공동경비구역 내 '자유의 다리' 남쪽에 위치한 미루나무가 무성해 북측을 관측하는 데 장애가 된다며 가지치기를 했다. 한국과 미국 장병들이 노무자 5명을 인솔해 가지치기를 하자 북한 장교 두 명이 나타나 작업 중단을 요구했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때 트럭을 타고 온 북한군 20여명이 갑자기 달려들어 도끼·몽둥이·삽·곡괭이 등으로 공격했다. 미군 장교 두 명이 살해되고, 한국군 장교 1명과 병사 4명, 미군 병사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국은 즉각 북한에 해명과 배상을 요구했다. 만약 북한이 거부하면, 강력한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하고 일본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북한 해역으로 항진시켰다. 대형 공중 급유기 15대도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로부터 도쿄의 요코하마 기지로 이동시켰다. 이어 8월 21일 아침 B52 폭격기와 헬리콥터 등 26대를 출격시킨 가운데, 한·미 양국군 300명을 판문점에 투입시켜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 버리자 김일성은 친서를 통해 미국에 사과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의 소중한 교훈은 때로는 힘을 동원한 강경한 대응이 가장 효과적인 해법이라는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이 월남전에 발이 묶이자 북한은 걸핏하면 판문점 언저리에서 미군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으며 매복 공격으로 살해하기도 했다. 1966년 4월 14일 북한군은 판문점 비무장지대에서 매복해 있다가 드리쿼터를 타고 판문점으로 가던 미군을 습격해 미군 2명과 한국인 카투사 2명을 살해했지만 미군은 그냥 넘겼다. 1968년 1월 23일 북한군이 미국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 호를 동해상에서 납치했지만 미군은 보복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미군의 수수방관 속에 북한군의 도발은 갈수록 심해졌다. 1975년 7월 15일에는 미군 소령을 짓밟아 중상을 입혔고 급기야 8·18 도끼만행으로 치달은 것이다. 그때 한·미 양국은 전쟁을 각오하고 북한에 대처했기 때문에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월남에서 철수한 터였으므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군사적 여력이 있었다. 여기에 북한은 겁을 먹고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뒤로는 판문점에서 미군을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하게 됐다. 교회가 잘못할 때, 재앙이 온다 1938년 9월 9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의 장로교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지 정확히 만 10년 후인 1948년 9월 9일 평양에 김일성의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지금은 20미터 높이의 만수대 황금우상을 비롯한 3만5천여개의 김일성 우상과 지난 과반세기에 종교 사상범으로 100만명의 처형과 최근 300만명의 아사자를 낸 세계 최악의 불량국가로 전락했다. 1950년 4월 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회개 없는 '친일파 전통'의 교권이 주도한 장로교회 제38회 총회에서 정화를 부르짖는 고려신학교와 그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를 분쇄하려는 전권위원회의 폭력으로 무장경관이 출동, 진압해야 하는 5일간의 대 치욕을 남기고 9월 속회를 결의했으나, 그 해 북괴 남침의 6·25(주일) 전쟁으로 300만의 생명을 빼앗고 세계최후의 분단국가로 남겨졌다. (김진섭, "장로교 100주년과 고신 57회 총회를 맞으며," 기독교보, 2007. 9. 8, 4쪽의 글 중에서.)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02-334-8291, oldfaith@oldfaith.net 김효성, 신약성경강해(1192쪽, 18,000원-송료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330쪽, 4,000원), 김효성, 기독교 교리 개요(96쪽, 1000원), 김효성, 여호수아 강해(130쪽, 1000원), 김효성, 아가서 강해(87쪽, 1000원), OPC, 어린이 요리문답(38쪽, 500원), 김효성, 공산주의 비평(28쪽, 무료). 김성욱, 대한민국 적화보고서(355쪽, 13,000원). ◆ www.oldfaith.net에 올려진 자료들을 참조하세요. --------------------------------------------------------------------------------- ◈ '근본주의'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과 은사운동을 배격하고, 또 자유주의자들이나 포용주의자들과 교제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타협적 복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과 노선을 가리킨다. ● 많은 사람들이 근본주의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비난하는 것 같으나, 오늘날 기독교계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상황에서 근본주의는 바른 입장을 적절히 표현하며 이 말 외에 오늘날 성경적 바른 입장을 표현할 만한 좋은 말이 없다고 본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에도 근본주의적 교회들과 교단들이 있어야 하고 또 자유주의적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나 신복음주의적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또 근래에 구상되는 '한국교회연합'과 같은 잡동사니와 구별되는 근본주의적 초교파 협의체가 매우 필요하다고 믿는다. ♣ www.oldfaith.net에 있는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