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7년 5월 06일 [특별111호]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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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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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문제:               主思派가 조종하는 대한민국

[강길모, "主思派가 조종하는 赤化된 대한민국," 미래한국, 2007. 4. 28, 6쪽; 프리존뉴스 공동대표.]  

"현 정치권력·시민단체·법조계에 침투한 좌파들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다. 이처럼 권력 핵심들이 주사파(主思派)의 조종을 받고 있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적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강길모 인터넷 프리존뉴스 공동대표는 21일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가진 한국발전연구원(이사장 안무혁) 초청 조찬강연에서 "386세대가 권력 핵심에 등장하면서 주사파는 물론 이들에 거부감이 없는 동조 세력, 권력의 흐름에 묻어가려는 포퓰리즘 세력이 결합해 간첩이 암약하기 좋은 정치·사회·문화적 토양이 대한민국에 조성됐다"고 주장했다.

80년대 대학 재학 시절 반미청년회 핵심 멤버로 활동했던 강 대표는 이날 강연에서 청와대 전·현직 간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등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이 "직접 주사파 교육을 했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운동권 출신들"이라고 증언했다.

강 대표는 "당시 반미청년회는 후배교육에 박차를 가해 연세대 내 12개 단과대학 가운데 열심히 운동을 할 자들을 엄선해 단계별로 주사파 교육을 시켰다"면서 "반미청년회를 통해 길러진 주사파들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자신이 교육시켰던 대표적인 주체사상 신봉자로 안희정 씨를 꼽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386측근인사이자 최근 대북 비밀 접촉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안 씨에 대해 강 대표는 "주사파인 그는 대북밀사가 아니라 대남밀사로 봐야 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까지 그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외쳤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생각이 바뀌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 특사로 갔으니 북측은 '오냐 내 새끼'라고 했을 것이다. 장군님이 바라는 것을 말만 해주면 알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권력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니 김정일은 남한 권력을 친구로 여길 것이 분명하다."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도 강 대표는 "내부 코어(핵심) 집단을 반미청년회 출신의 주사파 지도조직 인사들이 내용적으로 장악하고 있다"면서 "확실한 인원만 20여 명이다. 이들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당 전체노선을 이끌고 있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이어 "좌파는 어디까지나 한반도 평화와 호혜·평등·발전 등의 명분을 들어 앞으로도 김정일과의 이해관계에 굴종하면서 대한민국을 갉아먹을 것"이라며 "이들이 성공적인 대한민국을 허무는 첫 번째 임무는 한미동맹 파기와 국보법 폐지"라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반미청년회 출신의 주사파 중에는 공개 전향한 사람이 자신 이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전향과 관련한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기자회견 등을 통해 언론에 노출된 후 반미청년회 출신의 지인 2명이 찾아왔다. 한 친구는 벤처사업가라고 말했고 또 한 친구는 일본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주사파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것에 대해 '형님, 이제 그런 얘기 그만하자'고 했다. 그래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좌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사실인데, 벤처사업가라던 그 친구가 바로 평택에서 현지 주민 행세를 하면서 '반미(反美)투쟁'을 했던 인물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강 대표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좌우 이념논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대한민국을 얼치기 친북좌파들이 잡고 있는 상황에서 이념논쟁을 하지 말자는 얘기는 좌파의 방종을 내버려두자는 것과 같다"면서 '어설픈 중도주의'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전환 움직임에 대해서도 "확고한 사상과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뭉친 정치집단이 아니라 적당히 시간이 남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중심 없이 기둥뿌리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닌지 싶다"면서 경계심을 표출했다.

그는 "중도주의는 기회주의일 뿐"이라며 "좌파의 잘못을 알고 있는 '대한민국파'는 모두 오른쪽으로 결집해 '우파골통'이 되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2007년 정권교체는 반드시 이뤄야 할 과제이다. 한나라당이 최선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것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박빠'다 '명빠'다 갈라져서 패거리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강 대표는 "정권교체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좌파들이 오염시킨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되돌리는 것"이라고 밝힌 뒤, "과거를 속죄하고 열심히 하겠다고 한 것이 7년 밖에 되지 않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며 이날 강연을 마무리했다.

  공산정권과 평화협정은 허구요 적화

[김성욱, "공산(共産)정권과 평화협정은 허구(虛構)요 적화(赤化)," 미래한국, 2007. 4. 28, 6쪽.]

소위 '한반도평화체제' 논의가 북한 정권과 남한 좌파, 이제는 미국 조야(朝野)에서 조차 거듭 제기되고 있다. 前주월공사 이대용(李大鎔) 예비역 장군(82)은 20일 북한연구소 학맥강좌와 기자와의 인터뷰 내내 '공산정권과의 평화협정'이 갖는 허구성과 위험성을 경고했다.

李 前 공사는 공산월맹(북월)과 자유월남이 주변강국이 보장하는 '평화체제'를 거쳐 적화(赤化)통일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인물이다. 그는 1963년 이래 월남에 주재하던 중 1975년 공산통일이 되자 수용소로 끌려갔고, 5년 후 구사일생으로 풀려났었다.

李 前 공사가 전하는 20세기 후반 베트남과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상황은 섬뜩할 정도로 유사하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친북(친월맹)반미세력의 발호, 주월미군 철수와 한미연합사해체, 월남과 한국의 경제 풍요와 정치 혼란 그리고 월맹과 북한의 식량난과 이로 인한 방심… 월남은 미국이 보장하는 '평화체제'를 통해 패망했고, 한국은 미국이 보장하는 '평화체제'가 현재 거론되고 있다.

李 前 공사는 "베트남에서 맺어진 평화체제인 1973년 10월 파리협정은 4+4+4=12개국이 감시하고, 월맹 남침 시 미군의 즉각적 북폭(北爆) 등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국가 위기 앞에서 자유세력은 '월맹은 이미 망했다'며 방심한 채 내 편, 네 편 나눠 분열했습니다. 그 결과 공산화를 막지 못했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세력이 분열해서 12월 대선에 져버린다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을 겁니다. '이미 망한' 월맹에 월남이 당한 것처럼, '이미 망한' 북한에 남한이 당할지 몰라요. 북한과 남한의 좌파세력의 적화통일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12월 대선은 한국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평화에 취한 월남의 적화(赤化) 이야기

[김성욱, "平和에 취한越南, 누구도 南侵믿지않았다," 미래한국, 2007. 4. 28, 6쪽; 前 주월공사  이대용  예비역 장군 강연·발언 정리.]

요즘 젊은이들은 베트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통일도 됐고, 지금은 잘 살지 않는가?" 공산화 과정에 눈을 감은 그야말로 무지한 생각들이다.

1975년 3월 10일 월맹(북월)은 파리평화협정을 깨고 월남을 침공했다. 침공 직후 36시간 동안 26만명의 월남사람이 학살됐다. UN의 경고로 캄보디아와 같은 대량학살을 간신히 면했을 뿐이다.

월남사람이 누리던 모든 자유도 박탈됐다. 화폐개혁으로 구화(舊貨)는 무효화됐고, 금(金)을 가진 사람은 총살당했다. 장사도 할 수 없게 됐다. 무려 116만명이 보트피플이 돼 해외로 탈출했고, 그 중 11만명이 죽음을 당했다.

350만명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재교육이라는 명분이었다. 월맹당국은 '몇 주간 교육을 시킨 뒤 집에 돌려보낼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는 달랐다. 수용기간도 무한정이었다.

역사는 아이러니다. 월남에서 反정부시위를 주도하던 좌익들까지 모두 잡혀갔다. 골수 몇몇을 빼곤 친(親)월맹인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번 반역하면 또 다시 반역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수용소에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맞아서 죽고, 굶어서 죽고, 병 걸려 죽었다. 80년대 후반 베트남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노선을 수용했다. 그러나 수용소 해체는 90년대 중반에야 시작됐다.

베트남은 공산화된 후 12년간 지옥 같은 암흑을 헤매야 했다. 그 12년을 모른 채 '베트남은 통일됐고, 지금은 잘 살지 않느냐'는 말은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가?

김정일은 연방제로 한반도를 적화시킨 후 이런 계획을 세웠다 한다. "천만 명은 해외로 탈출하도록 내버려두고, 남북한 5,000만으로 '통일국가'를 만들겠지만, 남한의 700만 정도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북핵문제와 관련, 6자회담이 계속 중이다. 여기서 월남과 월맹의 파리협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공산화 직전 월남에서 평화체제 실현에 앞장섰던 정치인이 있었다. 쭝 딘쥬(張廷裕)라는 인물이다. 그는 67년 월남대선에 출마해 이렇게 주장했다.

"내전으로 시체가 산을 이룬다. 외국군까지 끌어들였으니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우리는 동족이다.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다. 날 찍어 달라.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북폭을 중단시키겠다."

쭝 딘쥬는 스스로를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민주주의 신봉자이자 진실한 불교도라고 주장했다. 당시는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몰랐다. 쫑 딘쥬는 대선에서 티우에 이어 2등을 했다. 그는 대통령은 못 됐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對美로비를 통해 파리평화협정을 이끌어낸다.

쭝 딘쥬는 월남 패망 후인 1978년 거물급 비밀공산 프락치였음이 탄로 났다. 쭝 딘쥬에 놀아난 미국은 뒤늦게 그를 간첩 혐의로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월남 공산화의 전환점은 1967년 선거 이듬해인 1968년 1월 31일 소위 '구정공세'이다. 신년 명절인 3일간 남북은 휴전에 합의했지만, 월남 내 베트콩 특공대가 미국 대사관 등 주요 건물을 공격했다. 구정공세 후 월남은 전국적인 베트콩 소탕에 돌입했고, 베트콩은 궤멸직전에 처했다. 승리는 월남에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문제가 생겼다. '구정공세'로 미국의 조야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대사관이 점령당할 정도니 이제 큰일 났다'는 비관론이 일어났다. 쭝 딘쥬가 67년 대선에서 주장한 대북협상론에 관심이 모아졌다. 쭝 딘쥬는 이때를 놓칠세라 상원의 맨스필드, 훌브라이트, 맥거번 , 케네디 의원 등 중진들에게 선을 댔다. 결국 미국은 68년 5월 평화협상을 개시했다.

티우 대통령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다 이긴 전쟁이다. 북폭으로 월맹 사기는 위축됐다. 지금 모든 전투에서 이기고 있다. 조금만 밀어붙이면 완전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티우의 호소는 美상원 중진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이들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 전에, 쭝 딘쥬의 대북협상 제의를 수용하라고 존슨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었다.

쭝 딘쥬는 티우에 대한 정치공세를 강화하면서, 좌우간의 남남갈등을 부추겼다. 티우도 한계에 부딪쳤다. 결국 1973년 10월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파리협정에는 겹겹의 안전장치가 있었다. 12개국이 이 조약을 담보했다. 미국은 월남과 방위조약을 맺어 월맹침공 시 공군·해군이 즉각 개입, 북폭(北爆)한다고 약속했다. 월남의 병력을 125만으로 증원시켰다. 당시 월맹의 111만을 앞지르는 수치였다. 신예장비를 공급받은 월남공군은 세계 4위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하게 됐다. 일종의 인질도 잡았다. 월맹 외무부 차관급인 하반라우 육군대좌를 포함, 월맹군 150명을 사이공에 머물게 했다. 여기에 미국은 80억 달러의 재건비용까지 지원했다.

파리협정이 체결된 배경에는 월맹에 대한 방심도 한몫했다. 당시 월맹은 그야말로 '거지'였다. 국민들이 쌀을 두 끼만 먹는데도 한 해 80만톤에서 100만톤이 모자랐다. 부식은 소금이 전부였다. 군인들은 부서진 타이어를 잘라 샌들을 만들어 신었다. 옷은 월남에서 뺏은 것을 걸치고 속옷은 누더기였다.

티우 대통령에게 "미군이 나갔으니 공수부대와 해병대를 증강하라"고 건의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월맹은 저대로 놔둬도 10년 내 망할 겁니다. 월남에 지금 필요한 것은 경제개발입니다."

국민들은 키신저가 만들어 놓은 파리협정의 안전장치와 80억달러의 재건비용에 취해 '평화의 신기루','평화의 환상'에 들떠 있었다. 누구도 월맹이 남침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착시'에 빠지긴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월남이 망하기 전 미국에서 50명의 조사단이 왔다. 그들은 이렇게 공언했다. "월남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

파리협정 체결 이후 월남은 안에서부터 무너져 버렸다. 대공(對共)기능이 마비되고, 공산프락치가 만연했다. 공산프락치는 티우의 비서진에도 침투했다. 각계각층의 공산당원은 9,500명, 친공(親共)세력인 남월인민혁명당원은 약 4만명에 달했다. 좌익세력은 이익단체와 연대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월남의 고질적 병폐인 4대악(뇌물, 도박, 마약, 매춘)이 창궐했다. 지도층의 부정부패, 국민들의 황금만능이 판을 쳤다. 국가에 대한 병역의무 불이행은 심각했다. 지도층 자식들은 일단 입대한 후 뇌물을 써서 선진국에 유학가 버렸다. 58만 정규군 가운데 10만명이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가거나, 취업한 상태였다. 이들은 '유령군인', '꽃 군인'으로 불렸다. 일선 군인들도 썩어빠진 후방 정권을 위한 희생을 포기했다.

반공(反共)인사들은 암살돼갔다. 암살된 사람이 연평균 840명에 달했다.

마침내 75년 3월 10일 월맹이 남침해왔다. 당시 월남은 9월 대선을 앞두고 치열한 정쟁에 빠져 있었다. 전쟁은 해보나 마나였다. 월남군 가운데 10만명 가량은 월맹군을 보자마자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군대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티우는 정쟁을 중지하자고 호소했지만, 미국과의 방위동맹만 믿은 월남사람들은 내분을 멈추지 않았다. 종교지도자들까지 자신이 미는 후보를 대선에 당선시키려고 '티우 사퇴'를 외쳐댔다.

월맹이 남침한 상황에서 티우가 호소했던 정쟁의 중지도, 공산군 철수도, 미국 방위동맹 이행도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티우는 4월 21일 하야했고, 사이공은 4월 29일 월맹군에게 포위됐다. 월남군 2군단장, 4군단장, 특별부대장, 5사단장, 7사단장 같은 이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겠다"며 끝까지 항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FTA저지 범국민본부 지휘부 20인

[김성욱, "'FTA범국본' 지휘부 20인," 미래한국, 2007. 4. 21, 2쪽.]

한미FTA반대를 주도하고 있는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FTA범국본)'은 지휘부는 물론 대다수 실무진 역시 전국연합 등 친북단체 구성원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전국연합은 "국가보안법철폐-주한미군철수-연방제통일"를 주장하는 등 북한의 대남노선에 호응해 온 단체이다.

FTA범국본은 우선 전국연합 대의원(15기, 2006년)인 오종렬(전국연합 상임의장)·정광훈(민중연대 상임대표)·문경식(전농 상임의장)이 상임대표로서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

전국연합 대의원(15기)인 한충목(통일연대 집행위원장), 박세길(전국연합 집행위원), 장대현(민중연대 조직위원장), 김지현(민중연대 자주평화위원장), 안지중(전국연합 사무처장), 주제준(민중연대 사무처장), 김재윤(전국연합 사무국장), 김동규(민중연대 정책국장), 전기환(전농 사무처장), 최재관(전농 정책위의장)은 FTA범국본에서 각각 집행위원장, 교육특위위원장, 조직투쟁팀장, 조직투쟁팀원, 공동상황실장, 소식지편집팀장, 정책기획팀장, 농축수산대책위 집행위원장, 정책기획팀장을 맡고 있다.

전국연합 대의원은 아니지만 전국연합과 동일한 노선을 지향하는 '통일연대'와 '민중연대'의 간부인 박석운(민중연대 집행위원장), 정보선(통일연대 문예위원장), 정관영(전북 통일연대 조직부장), 이대영(대구경북 민중연대 집행위원장), 이영복(대전충남 통일연대 집행위원장), 양지윤(충남 민중연대 상황실장), 강석헌(경기 민중연대)은 FTA범국본에서 각각 집행위원장, 문예팀장, 전북본부 사무국장, 대구경북본부 집행위원장, 대전충남본부 집행위원장, 충남본부 상황실장, 경기본부 상황실장의 직책을 맡고 있다.

통일연대와 민중연대는 "국가보안법 철폐-주한미군 철수-한미동맹 파기-6·15선언실현"을 주장해 온 단체로서 2005년 9월 11일 "미군 강점 60년을 철거하자"며 인천맥아더동상 파괴폭동을 주최하기도 했다.

인적 구성에서 확인되듯 FTA범국본은 전국연합, 통일연대, 민중연대가 그대로 옮겨 온 단체라고 볼 수 있다. 'OO위원장' 등 전국연합, 통일연대, 민중연대의 직책이나 지역도 대부분 FTA범국본에서 같이 사용하고 있다. '대전충남 통일연대 집행위원장'이 'FTA범국본 대전충남본부 집행위원장'을 맡는 식이다. 북한의 대남노선에 호응해 온 세력들이 '한국사회 변혁(?)'의 일환으로 FTA반대를 선동하고 있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전국연합, 통일연대, 민중연대 간부들은 지난 해 초부터 전국을 누비며 FTA반대 소요, 집회, 강연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이들의 활동을 반증하듯, 지난 해 11월 22일 반FTA폭동 직후 지도부는 배후조종 혐의로 대거 소환조사를 받았고, 이 중 전국연합 대의원(15기) 위두환, 안은찬, 정현우, 신성재는 구속되고, 같은 대의원 주제준, 김덕종, 한병석은 수배됐다.

전국연합, 통일연대, 민중연대 등이 1월 8일 출범시킨 '한국진보연대(준비위원장 오종렬 외)'는 2월 27일 충북 진천 수련회를 통해 향후 FTA반대투쟁을 통해 '11월 경 민중총궐기를 일으키고, 12월 대선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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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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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쪽. 5000원(우송료 포함).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쪽. 20,000원(우송료 포함).

김효성 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5쪽. 1,000원(우송료 포함).

김효성, 공산주의 비평. 28쪽. 700원(우송료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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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과 은사운동을 배격하고, 또 자유주의자들이나 포용주의자들과 교제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타협적 복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과 노선을 가리킨다. ● 많은 사람들이 근본주의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비난하는 것 같으나, 오늘날 기독교계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상황에서 근본주의는 바른 입장을 적절히 표현하며 이 말 외에 오늘날 성경적 바른 입장을 표현할 만한 좋은 말이 없다고 본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에도 근본주의적 교회들과 교단들이 있어야 하고 또 자유주의적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나 신복음주의적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또 근래에 구상되는 '한국교회연합'과 같은 잡동사니와 구별되는 근본주의적 초교파 협의체가 매우 필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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