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7년 11월 18일 [특별123호]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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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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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우리는 노예로 사육됐다

[김성욱, "우리는 노예로 사육됐다," 미래한국, 2007. 11. 03, 11쪽.]

신동혁 씨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중 하나인 개천14호 관리소 완전통제구역에서 수용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죄수의 삶을 시작했다. 1996년 11월 29일 어머니와 형이 탈출 시도를 하여 공개처형을 당했으며, 본인은 14세 나이로 불고문 등 온갖 만행을 겪었다. 2005년 1월 2일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그는 같은 해 2월 2일 중국으로 탈출해 이듬해 8월 10일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하나원 수료 이후에도 정치범수용소 경험과 충격 등으로 심각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증상을 호소하고 있다. 2007년 1월부터 북한인권정보센터에서 운영하는 '고문 및 PTSD상담팀'의 보호 하에 들어와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2005년 북한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을 탈출한 신동혁 씨의 수기 '세상 밖으로 나오다'출판기념 세미나가 23일 북한인권정보센터 주최로 서울 배재빌딩에서 개최됐다. 신 씨는 '개천14호관리소' 출생자로서, 수용소 탈출 후 중국으로 도망쳐 지난해 8월 한국에 들어왔다. 정치범수용소는 출소가 가능한 '혁명화구역'과 출소가 불가능한 '완전통제구역'으로 구분된다. 탈북민 중 강철환 씨 등은 모두 혁명화구역에 있었던 이들이다. 신동혁 씨는 완전통제구역을 탈출해 수기까지 출판한 국내 최초의 인물이다.

억울하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통상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연애, 결혼, 임신, 출산 등이 금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20- 30년 간 '노동량향상을 위한 보상책'으로 결혼제도가 이용돼 왔다. 신 씨는 수용소 내 결혼제도에 대해 "일을 잘 하게 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라며 "수용소 관리(보위지도원)가 일 잘하는 사람을 추천한 뒤, 수용소 소장(보위부장)이 승인하고, 결혼 한 부부는 5일 동안 함께 지낸 뒤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숙소에 살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 씨는 배우자 선택의 자유조차 박탈된 결혼의 결실로 태어나 '죄 없는 죄수의 삶'을 살아 온 케이스이다. 그는 오전 5시에서 생활총화를 마치는 오후 10시까지 18시간의 강제노역은 물론 일상적인 폭행, 구타, 고문을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했다.

신 씨는 이날 세미나에서 "수용소 안에선 '북한'조차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랑한다, 행복하다, 즐겁다, 불행하다, 억울하다, 저항하다는 말을 들어 본적도 없고, 그 의미를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며 "우리는 덧셈과 뺄셈 그리고 작업지시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단어와 감정만을 학습한 채 노동현장에서 주먹과 몽둥이 아래 노예로 사육되었다"고 했다.

성적노리개가 되는 여자 수감자들

신 씨는 또"수용소 안에선 위계질서가 철저하다"며 "수용소 관리(보위지도원)에 대한 절대복종을 정점으로 수용소 출신 가운데 '총반장,' '작업반장'을 임명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게 한다"고 증언했다. 또 그는 "수용소 주민들은 수용소 관리들의 기분에 따라 생사, 화복이 결정되며, 그로 인해 보위지도원에 의한 임의적 살인이 자행된다고"고 말했다.

정치범수용소에서 저질러지는 만행 중 하나는 성적 유린이다. 보위원들은 여성들을 건드리고, 임신 등 문제가 생기면 그 여성은 '사라진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순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임신한 처녀가 사라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 신 씨의 설명이다.

보위원들은 처녀들에 대한 강간·추행 등을 저지르고 문제가 되면 죽여 버린다. 신 씨는 1996년 9월 억울하게 죽어간 사촌누나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어느 날 숙모와 사촌누나 신혜숙이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올라갔다. 그러던 중 경비대 눈에 들켰다(허가 없는 도토리 줍기는 금지돼 있다). 그들은 숙모와 사촌누나를 불러놓고 경계선까지 올라왔다고 하면서 말을 시키다가 사촌누이에게로 눈길이 쏠렸다. 누나는 맨 알몸으로 성폭행을 당한 채 기절하였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숙모는 정신이 돌아서 그 다음날 경비대 새끼들이 내 딸을 죽였다며 통곡을 하다 어디론가 잡혀갔다. 그리고는 소식이 없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신 씨는 "수용소 주민들은 모든 것을 일종의 신분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죄인이라는 죄책감이 주입돼 살기 때문에 억울하거나 부당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며 "불만이 있더라도 관리소 체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같은 수용소 주민인 작업반장이 나를 때리는 것에 대한 것 등일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수용소 안에서 저항이 없는 이유'에 대해 "처벌에 대한 두려움" 외에도 수용소의 소위 교화(敎化)로 인하여 "죄인이라는 죄책감이 주입돼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고발해 생기는 보상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정일정권이 주민들을 육체적 노예뿐 아니라 정신적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신 씨는 "지금도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밥 한 끼 더 얻어 먹기 위해 서로를 감시하고 짐승 같은 싸움도 서슴지않는다. 나 역시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남의 잘못을 찾아내 고발하고 그 사람 밥을 대신 먹는 짓을 했었다"며 "우선 탈북민들이 힘을 합쳐 김정일정권에서 모든 정치범 수용자들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고 역설했다.

  갈고리로 찍혀 불 위에 매달린 소년

[김성욱, "갈고리로 찍혀 불 위에 매달린 14세 소년," 미래한국, 2007. 11. 3, 11쪽.]

신동혁 씨가 14살 어린 나이에 겪었던 고문의 기록은 끔찍하다 못해 참담하다. 그는 어머니·형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1996년 4월 6일부터 11월 29일 반년 넘게 수용소 비밀감옥에 수감돼 고문을 당한다. 당시 고문의 상흔(傷痕)은 십여년이 지난 후에도 선명히 남아 있다. 아래는 수기에 실린 그의 기록이다.

"두 명이 달라붙어서 내 옷을 모두 벗겼다. 그리고는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운 뒤 리모콘을 작동시키니 다리가 천정쪽으로 올라가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쿵'하고 부딪쳤다. 그들은 나를 거꾸로 매단 상태에서 양 팔목을 밧줄로 묶었다. 밧줄을 끌어당기자 내 팔목이 천정 쪽으로 따라 올라갔다.

옆 사람에게 뭔가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숯불이 담긴 통이 들여졌고, 풍구(風具)를 돌려서 숯불을 점점 타오르게 했다. 그리고는 내 등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에 닿도록 했다. 허리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살타는 소리가 지르르르 나고, 살타는 냄새도 났다. 입을 악물고 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온 몸을 요동치며 꿱꿱 소리쳤다. "아… 악! 아악!!"내가 몸을 심하게 요동치니까 그들은 숯불통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허리에 닿도록 했다.

그래도 요동치자, 그들은 끝이 뾰족한 갈고리로 내 배꼽 아래(사타구니)를 찍어 관통시켰다. 허리가 너무 뜨거워 갈고리로 사타구니를 관통시켜도 아픈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움직이자 오른쪽 허벅지 바깥쪽을 갈고리로 다시 찍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나는 배꼽 아래쪽과 허벅지가 모두 갈고리에 찍힌 채로 계속 요동치다가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얼마동안 내 등에 불을 갔다댔는지 알 수 없다. 끝내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 만에 정신을 차렸는지 나도 모른다."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 탈출 수기

[김성욱,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 탈출수기 '세상 밖으로 나오다' 서평," 미래한국, 2007. 11. 3, 11쪽.]

신동혁 씨의 수기 '세상 밖으로 나오다'는 북한정권이 만들어 낸 지옥의 기록이다. 김일성 부자(父子)의 잔인성에 관한 가장 명쾌한 증언이기도 하다.

수용소가 정해주는 결혼상대

신 씨와 같은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의 삶은 인간 이하, 아니 짐승 이하이다. 결혼과 같은 인류의 대사(大事)도 '일을 시키기 위한'수단일 뿐이다. 수용소가 허락하고 지정해 주기 전에는 남자도, 여자도 상대를 모른다. 어느 날 담당 보위지도원(수용소관리)은 '일을 잘 해 온' 대상 남녀를 불러 놓고, 훈시하며 결혼을 알려준다. "야, 너희 둘 오늘부터 결혼이야. 알갔디? 앞으로 일을 열심히 하라. 일 안 하구 뺀질뺀질 대믄 알디? 다시 갈라 놓겠어."

불성실·불복종하면 총살

신 씨가 수감됐던 정치범수용소는 출소가 불가능한 소위 완전통제구역이다. 보위지도원의 통제 아래 죽는 날까지 혹사당한다. 이곳에선 '작업관계 외 3명 이상이 모여 대화할 수 없다' '보위원 승인 없이 밤에 3명 이상 돌아다니면 총살 당한다' '보위원에게 불만을 품은 경우·불성실한 경우·불복종한 경우, 시설물을 파괴한 경우, 도둑질한 경우' 모두 총살 대상이다.

피가 나오지 않고 혹이 튀어나왔다

정치범수용소에선 보위원의 사형이 비일비재하다. 죽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신 씨는 1989년 6월경 인민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을 적고 있다. 소지품 검사 중 같은 반 여덟 살 여자아이 주머니에서 밀 이삭 5개가 나왔다. 일상적 굶주림에 창고에서 밀 이삭 몇 개를 집어든 것이다.

"야 새끼야, 너 강냉이 따왔다. 너 새끼 손목아지 잘려 나가라구 길디" 보위원 선생의 욕설과 함께 구타가 시작됐다. "아이를 무릎 꿇어 앉힌 채 지시봉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 머리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고 혹이 사방에 튀어나왔다. 그러기를 1시간 30분 정도… 그 아이는 끝내 기절했다. 코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 아이를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그 날 저녁 끝내 죽었다고 한다… 그 여자 아이는 참 곱게 생겼었다. 이렇게 어린 여자아이가 매 맞아 죽었어도 그 누구도 책임이 없다. 이것이 바로 보위부 14호 관리소의 현실인 것이다"(본문에서).

노인들을 얼리고 데워 죽였다

1999년 12월, 개천14호 관리소는 영하 15도에서 20도까지 내려갔다. 신 씨는 지게로 거름을 나르다 쉬던 중 발각된 4명의 노인 이야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보위지도원이 그들을 불러냈다. 신발과 바지를 벗기고 팬티 바람으로 맨 땅에 무릎을 꿇게 했다. 노인들은 오후 2시쯤부터 벌을 받았는데 저녁 7시경에는 휴게실 안으로 불러냈다. 구들바닥에 다시 무릎을 꿇어 앉혔다. 그리고는 사람이 델 만큼 뜨겁도록 장작을 계속 넣었다. 그들의 발바닥과 무릎은 얼었다가 데어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우성 소리는 보위지도원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몇 달이 지난 후 그들은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과 남편 앞에서 처형 당한 어머니

정치범수용소 탈출기도자는 공개처형대상이다. 신 씨의 어머니와 형 역시 도망치다 붙잡혀 공개 처형당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던' 가족들의 사형 모습에 대해 신 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공개처형은 어머니부터 시작됐다. 어머니 팔을 뒤로 묶은 채 나무상자 위에 올라 세웠다. 그리고 이들은 어머니 입만 가리고 눈은 가리지 않았다… 교수형장에 매달려 있는 밧줄을 어머니 목에 건 다음, 그 광경은 차마 지켜 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엄마와 형이 교수형과 총살을 당하는데 그것을 지켜 볼 아들과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 아버지 쪽을 보자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때가 되었는지 어머니가 밟고 있던 상자를 빼내었고, 상자를 빼내자마자 어머니는 대롱대롱 매달리기 시작했다. 밧줄은 점점 어머니의 목을 조여 갔다. 어머니는 마지막 발악으로 몸을 몇 번 요동치고는 잠잠해졌다. 그리고는 형의 차례였다. "민족반역자 신희근을 향하여 총탄 세발 쐈!!"

탄차를 미는 열두 살 어린이들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람의 목숨은 벌레와 같다. 어린이들까지 탄광작업, 건설현장에 동원된다. 신 씨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93년 6월 중순경 갱지원(탄광작업)을 나갔던 당시의 회상이다.

"열 두 살의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이 쓰는 탄광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불을 들었다. 얼굴은 탄가루로 뒤덮여 눈 흰 자위와 치아만이 하얗고 온통 검댕이었다… 탄차를 밀고 한 10리 정도 나왔을 때, 옆에 있던 문성심이 발을 잘못 짚으면서 탄차 바퀴에 발이 찢겼다. 순간 좁은 갱 안에 12세 여자이이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울음소리가 이렇게 소름끼치게 들려보기는 처음이었다… 문성심의 신발을 벗겨 보니 엄지발가락과 두번째 발가락이 바퀴에 눌리어 뼈가 부서진 상태였다. 이때 학급장 홍주현이 달려와 신발 끈으로 문성심의 발목을 묶어 피가 나오지 않게 지열하고 문성심을 탄차에 태웠다."

열네 살에서 열일곱 시신들, 모두 예쁜 남녀아이들

신 씨가 고등중학교(고등학교) 시절인 1998-1999년 개천14호관리소 수감자들은 대동강 내 중형발전소 건설에 동원됐다. 신 씨는 "하루에 3-4구의 시체가 나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공사 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주검들을 수습하는 일을 직접 거들기도 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어린 학생들이 노동재해 사고로 사망한 숫자는 내 눈으로 본 것만 7명이다. 거기에 소문으로 들은 것까지 합하면 수십 명은 될 것이다. 이들의 나이는 모두 14세부터 17세. 모두 예쁜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다."

누가 죽는다 해도 눈물조차 안 흘려

1999년 3월 신 씨는 콘크리트 벽 밑에서 일하던 남녀학생 8명이 30m 높이에서 추락한 사고를 목격한다. 결과는 뻔했다. 수십 톤 콘크리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신 씨의 회상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의 시체를 지울 수가 없었다. 보위원들은 하던 일을 계속 하라는 것이었다… 건설 현장에서 누가 죽는다 해도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다. 단지 나의 목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금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할 뿐이다. 발전소 건설 현장은 매일 매일 삶과 죽음을 갈랐다."

목욕 후 붉은 반점이 생겨 죽어나갔다

정치범수용소에서 인간의 존엄 따윈 없다. 신 씨는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북한정권의 생체실험을 고발한다. 2004년 11월 어느 날 밤의 기억이다.

"그날 밤 사상투쟁회에는 웬 일인지 4명의 보위원들이 함께 참가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느 호실에 '이'가 많은지 물었다… 보위원은 남자호실 한 곳, 여자호실 한 곳을 지목한 다음 약을 주겠으니 그것으로 목욕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각방에 20kg짜리 물통을 두 개씩 주었다. 그 물통을 받고 여자호실 5명과 남자호실 7명이 목욕을 했다. 당시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면서부터, 몸에 붉은 반점 '혼디(종기 같은 것으로 살에 고름이 생기는 것)'가 생겨나 곪아터졌다. 한 달 뒤에는 살이 문드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고열에 시달렸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거의 죽어간다고 생각될 즈음, 트럭 한대가 오더니 그들을 모두 싣고 갔다. 그리고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다는 생각은 떨쳐버릴수 없다."

김정일을 심판대에 세우고 북(北)주민을 구출해야 신 씨는 수기'세상 밖으로 나오다'마지막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제 내가 할 일을 정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보위부 14호 관리소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고 세계가 나서서 북한의 인권을 생각해 김정일을 심판대에 세우고 그들을 구출하여야 한다."

  민노총·전교조, 북 연방제와 일치

[안용현, "민노총·전교조 등 9개 단체 통일방안 북 연방제와 일치," 조선일보, 2006. 11. 3, A8쪽.]

국내 9개 단체의 통일 방안이 북한의 '연방제'와 일치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들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실천연대)·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 등이다. 정부 주도의 과거사 진상 규명 활동에 맞선 민간 차원의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제성호 중앙대 교수)는 이들 단체의 강령·규약·발표문 등을 분석한 결과, 모두 남측의 통일 방안인 연합제를 부정하고 북측의 연방제를 지지했다고 2일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5일 이런 내용의 '국내 재야단체 통일론의 실체'를 발표한다.

◆ "연방제가 유일한 통일 방안"

발표문에 따르면 민주노총·전국연합·실천연대 등은 강령과 규약에 연방제 통일안을 명시했다. 한총련·범민련 남측본부 등은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연방제 강령은 삭제했지만 간행물 등에선 여전히 연방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남측 연합제를 "분단을 고착화하는 방안"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노총의 경우 올해 7월 노동자통일토론회 자료집에서 "연방제 통일 방안이야말로 자주적 평화 통일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통일 방안"이라고 밝혔다. 연합제에 대해선 "두 개의 나라로 고착하고 외세 개입을 용인함으로써 자주 원칙을 훼손한다"고 적었다. 한총련은 2001년 연방제 강령을 지웠지만 2006년 임시대의원대회 자료집에선 "연방통일 조국 건설을 위해!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이자"고 썼다. 특히 2002- 2007년 한총련의 통일구호는 그해 북한이 신년 사설에서 발표한 통일 구호와 일치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전교조는 통일론을 담고 있는 각종 자료를 비공개로 운영하고 있지만 2001년 자료에서 "평화 통일의 구체적인 방안은 연방제 통일"이라고 밝혔다.

◆ "주한미군 철수, 국보법 폐지"

9개 단체들은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다. 유엔사·한미연합사 해체,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단, 국가정보원·국군기무사령부 폐지 등도 요구했다. 민주노총은 올해 "연방제 자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노동자 민중의 당면 투쟁 과제는 그 모든 것의 걸림돌인 주한미군 철수와 국보법 폐지"라고 밝혔다. 전국연합은 강령에서 '자주국방'을 위해 "주한미군이 사용하던 모든 기지와 시설을 국민을 위한 시설로 전환한다"고 써놓았다. 또 2007정상선언에 명시된 '법률적·제도적 장치' 문제는 1993년 범민련의 1차 공동의장단 회의에서 이미 언급됐던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범민련은 "민족 대단결과 통일을 가로막는 구시대의 유물인 국보법과 안기부, 기무사 같은 법적·제도적 장치를 철폐하고…"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제성호 교수는 "이들의 통일론은 우리 사회에 감상적 통일론과 민족공조론을 확산시켜 남남(南南) 갈등과 국론 분열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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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신약성경강해(1192쪽, 18,000원-송료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330쪽, 4,000원), 김효성, 기독교 교리 개요(96쪽, 1000원), 김효성, 여호수아 강해(130쪽, 1000원), 김효성, 아가서 강해(87쪽, 1000원), OPC, 어린이 요리문답(38쪽, 500원), 김효성, 공산주의 비평(28쪽, 무료). 김성욱, 대한민국 적화보고서(355쪽,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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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과 은사운동을 배격하고, 또 자유주의자들이나 포용주의자들과 교제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타협적 복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과 노선을 가리킨다. ● 많은 사람들이 근본주의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비난하는 것 같으나, 오늘날 기독교계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상황에서 근본주의는 바른 입장을 적절히 표현하며 이 말 외에 오늘날 성경적 바른 입장을 표현할 만한 좋은 말이 없다고 본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에도 근본주의적 교회들과 교단들이 있어야 하고 또 자유주의적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나 신복음주의적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또 근래에 구상되는 '한국교회연합'과 같은 잡동사니와 구별되는 근본주의적 초교파 협의체가 매우 필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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