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08월 30일 [제13권 35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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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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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오늘날 바른 교회란? [성경본문] 에베소서 5:26-27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께서 순결한 교회를 원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씻어 우리의 옛 죄악들을 깨끗하게 하셨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순결한 교회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른 교회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바른 길 걷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교계의 혼란한 풍조 속에서 바른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우리는 바른 교회가 성경적 장로교회라고 믿습니다. 장로교회가 믿는 요점은 제가 쓴 기독교 교리개요에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 장로교회들조차 혼란한 상황이므로, 우리는 성경적 장로교회가 믿는 바에 더하여, 몇 가지 점들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오늘날 바른 교회는 그 교인들이 사랑과 겸손을 가졌으나 연합주의, 포용주의에 빠지지 않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며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 3:16).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엡 5:1-2). 사랑과 온유와 겸손은 참 교회의 표입니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의 표로 주셨습니다(요 13:3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일치를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엡 4:1-3). 바른 교회가 사랑과 겸손의 덕으로 단장된 교회이지만, 연합주의, 포용주의의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연합주의와 포용주의란, 바른 교리들을 분별함이 없이 모든 교회와 교인들과 교제하고 연합하고 포용하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는 연합주의와 포용주의가 대세(大勢)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 사상인데, 많은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변질된 기독교인데, 심지어 복음주의 교회들이 로마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합주의와 포용주의는 잘못된 생각이며 입장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단을 멀리하라고 교훈합니다.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고린도후서 6:14-17,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가져야 하지만, 교리적 이단과 오류를 포용하는 연합주의, 포용주의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오늘날 바른 교회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주셨음을 믿으나 은사주의에 빠지지 않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주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대로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증거된 대로 모세 시대에 주신 기적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주신 기적들, 다니엘과 세 친구들 시대에 주신 기적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 주신 기적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마 22:29). 그러나 바른 교회는 은사주의적이지는 않습니다. 은사주의란, 오늘날도 사도 시대와 똑같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다고 믿으며, 또 성경의 교리적, 도덕적 교훈보다 은사 체험을 강조하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는 성령의 이름으로 거짓된 신비주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 방언통역, 예언, 병고침, 투시, 넘어짐 등 온갖 신비한 행위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건전한 교훈의 지식과 믿음과 순종에 거하지 않는 무지하고 연약한 교인들을 미혹케 하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기적들이나 초자연적 은사들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22-23). 기독교 2천년 역사는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도 시대 이후에 거두어 가셨음을 증거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준은 기적이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아니고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은 성경의 교훈을 알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8:20은,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였음이라[그들 속에 정녕 아침빛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께서도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구약성경]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29, 31).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 등의 은사가 일시적이고 초보적이며 부분적임을 증거했습니다(고전 13:8-12). 거기에 비해, 성경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의 책입니다. 특히, 은사주의는 성경의 최종적이고 충족한 권위를 부정합니다. 그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모든 개신교회들은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성경에 충족하게 기록되었다고 믿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 22:18-19은 성경의 충족한 계시에 무엇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계속성을 주장하는 은사주의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셋째로, 오늘날 바른 교회는,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축제주의에 빠지지 않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기쁨과 감격을 가진 자들의 모임입니다. 시편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각종 악기로 그를 찬양하라고 말합니다(시 96:1; 98:4 등). 시편은 심지어 손바닥을 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시 47:1) 춤을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시 149:3).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고(빌 4:4) 성령의 열매는 희락[기쁨]이요(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말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음을 증거합니다(행 2:46; 5:41; 13:52). 그러나 바른 교회는 축제주의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축제주의는, 축제적 기쁨과 감격이 예배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그것은 예배의 기쁨과 감격만 생각하고 예배의 경건함, 질서, 엄숙함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축제주의는 교인들의 관심과 흥미를 끄는 세상적 방법들을 도입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열린 예배입니다. 또 그 특징의 하나는 세상의 음악인 록이나 랩 같은 음악을 도입하는 현대기독교음악(CCM)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히 말세에 거짓 목사들이 나타나 허탄한 이야기들, 즉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이야기들로 교인들을 미혹케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딤후 4:4). 말쟁이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설교 시간을 세상적 예화들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교회는 옛날부터 경건한 예배를 지켜 왔습니다. 그것은 장로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임직할 때 서약하는 예배 모범에 제시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시편 96:9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우상숭배자들의 제사는 시끄럽고 어지러웠습니다(출 32:6). 그러나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33).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되기를 기도하였고(빌 1:10), 히브리서 12:28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날의 바른 교회란, 첫째로, 그 교인들이 사랑과 겸손을 가졌으나 연합주의, 포용주의에 빠지지 않는 교회이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역사상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주셨음을 믿으나 은사주의에 빠지지 않는 교회이며, 셋째로,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축제주의에 빠지지 않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보수적 장로교회를 세웁시다. 우리는 오늘날의 보수적 장로교회들의 잘못된 풍조를 분별하고 배격합시다. 연합주의, 포용주의를 분별하고 배격합시다. 잘못된 교제를 책망합시다. 또 은사주의를 분별하고 배격합시다. 또 축제주의를 분별하고 배격합시다. 잘못된 예배의 풍조, 현대기독교음악(CCM)의 풍조를 분별하고 배격합시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을 섬기며 바른 말씀의 교훈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의 일을 힘쓸 만한 바른 교회를 세웁시다. 그것은 목사와 교역자들과 장로들과 모든 교인들의 바른 사상과 분별력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강해: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 [21:1-4]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 . . 1-4절은 바벨론에 대한 경고이다. 1절의 '해변 광야'는 큰 강 유브라데를 품고 있는 바벨론 땅을 가리킨다. 선지자는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같이 몰려왔도다.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라고 말한다. 바벨론을 침공할 적군들이 회리바람같이 몰려올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주께서는,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바벨론은 이전에 속이는 자요 약탈하는 자이었으나 이제는 엘람[파사]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약탈을 당할 것이다. 메대와 파사의 연합군은 들어와 바벨론을 멸망시킬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메대와 파사에게 '올라가서 바벨론을 치고 정복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고 이루실 것이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이다.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그의 모든 탄식'은 바벨론의 학대로 인한 모든 사람의 탄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선지자는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내 마음이 진동하며 두려움이 나를 놀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라고 말한다. 대제국 바벨론의 멸망 소식은 선지자에게 여인의 출산 고통 같은 큰 고통과 두려움을 주었다.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라는 구절은, "내가 그것을 듣자 엎어졌고 그것을 보자 당황하였도다"라는 뜻이라고 본다(KJV). '희망의 서광'이라는 원어는 '나의 즐거움의 새벽빛(저녁빛)'이라는 뜻이다(BDB). [5-9절]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 . . . 5절에서, 선지자는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방백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라고 말한다. '파수꾼을 세운다'는 구절(차포 핫차피스)은 '자리를 편다'는 뜻이다(BDB, NASB). 바벨론 군대는 아마 자신들의 군사력만 믿고 안일하게 식탁을 베풀고 먹고 마셨다. 그래서 선지자는 "너희 방백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르라"고 말한 것이다. 침략자가 곧 들어올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막을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6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 마침내 멸망할 것을 예언하셨다. 주께서는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떼와 약대떼를 보거든 자세히, 유심히 들으라." 메대 파사의 연합군은 마병대와 나귀떼와 약대떼를 전쟁에 많이 사용하였다. 마침내 파수꾼이 사자같이 부르짖었다.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섰었고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과거시제로 표현된 것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확실히 멸망할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의 원인은 죄 때문이었다. 특히 그것은 우상숭배의 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도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조각한 신상들을 벌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51:47, 52). 우상숭배의 죄는 죄 중에 가장 큰 죄이다. 바벨론이 멸망하는 날 그 우상들이 무익하고 헛된 것들임이 증명될 것이다. [10절]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 . . 선지자 이사야는,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고하였노라"고 말한다. '너 나의 타작한 것' '나의 마당의 곡식'은 이스라엘을 가리킨 말씀이라고 본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소식을 듣고 그의 섭리의 손길을 깨닫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배우고 확신해야 한다. [11-12절] 두마에 관한 경고라. . . . 11-12절은 두마에 관한 경고이다.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두마는 에돔을 가리킨다. 선지자는 자신을 파수꾼이라고 부른다. 에돔 사람들도 지금 밤, 곧 환난 중에, 고난 가운데 있다. 그들은 그 밤이 언제 지나갈 것인지 선지자에게 묻는다. 선지자는 "아침이 오리라" 즉 환난의 끝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지자는 또 "밤도 오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 다른 환난이 올 것이라는 뜻 같다. 그러나 선지자는 "너희는 돌아올지니라"는 중요한 말을 선포하며 전한다. 중요한 것은, 환난의 남은 기간이 얼마이며 그 끝이 언제인가가 아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가, 참으로 회개했는가이다. 회개가 없으면 또 환난이 올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안한 날을, 그것도 오랫동안 주실 것이다. [13-17절]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 . . 13-17절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이다. 선지자는, "드단 대상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 데마 땅의 거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고 말한다. 드단 대상(隊商)은 낙타 타고 떼지어 다니는 상인들이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이 멸망할 때에 그들은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피하여 수풀 속에 거하며 데마 거민들을 통해 겨우 물과 떡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들은 물질적 여유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릴 것이다. 주께서는 또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품꾼의 정한 기한같이 일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게달은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들 중 하나이다(창 25: 13-15). 그들은 양떼를 치는 유목민이었고 비교적 부유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전쟁의 패배로 1년 내에 쇠약해질 것이다. 본문은,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증거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들은 결국 다 멸망할 것이다. 강대한 바벨론도 멸망할 것이다. 부요한 드단 대상들도, 게달의 영광도 쇠하여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나라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세상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들임을 깨닫자. 둘째로,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엘람(파사)과 메대의 연합군을 불러와 바벨론을 쳐서 멸망케 하실 것이다. 그는 바벨론으로 인한 모든 탄식을 그치게 하실 자이시다. 본장 6절과 16절은 하나님을 '주'(아도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요 주관자이시다. 그는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 개인의 삶과 행복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과 우리의 일생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 우리는 그 사실을 굳게 믿자. 셋째로, 중요한 것은,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의 원인은 우상숭배의 죄 때문이었다(9절). 하나님께서는 에돔 족속에게 "너희는 돌아올지니라"고 말씀하셨다(12절). 지금 그들은 고난의 밤을 통과하고 있다. 아침이 곧 올 것이지만, 그러나 밤도 올 것이다. 그러므로 에돔은 지금 닥친 고난을 모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참된 평강이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산다면, 아침이 와도 곧 또 밤이 올 것이다. 인생의 참 행복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데 있다. 그것이 인생의 정로이며 평강과 형통의 길이다.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바른 길을 붙들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