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01월 18일 [제13권 3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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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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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강해:                                          속건제와 화목제의 규례

[7:1-7]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 . .

첫째로, 속건제의 규례이다. 속건제는 지극히 거룩하므로 번제물을 죽이는 곳에서 제물을 죽이며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리며 그 모든 기름을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불태워 드려야 하였다. 거기에 포함된 것은 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 등이다.

그 피를 단에 뿌리는 것은 속죄의 의미가 있다. 속건제물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하였다. 또 그 모든 기름은 제물의 가장 좋은 부분을 가리킨다고 본다. 또 콩팥은 죄악된 요소를 걸러내는 것을 상징한 것 같다. 또 속건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므로 제사장의 남자마다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다. 그것은 속죄제의 규례와 동일하였다. 제사장이 그 제물의 고기를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속죄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8-10절] 사람의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 . . .

8-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에게 줄 제물의 부분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은 그 번제물의 가죽을 얻을 것이다. 또 소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은 그 소제물을 얻어 모든 형제들과 함께 나누어야 했다.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에게 이런 것들을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셨음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대우하는 뜻도 있었다고 본다.

[11-14절]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 희생 . . . .

둘째로, 화목제의 규례이다. 본장은 화목제에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을 보이는 것 같다. 첫째는 감사의 화목제이며(12절), 둘째는 서원의 화목제이고, 셋째는 자원의 화목제이다(16절). 화목제는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과의 화목과 그 결과로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됨을 상징하는 제사이며, 하나님과의 교제의 요소들로서 감사와 서원과 자원을 말씀한 것이라고 본다.

특히, 감사의 화목제는 화목제 짐승 제물과 더불어 기름 섞은 무교병(누룩 없는 떡)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함께 드리고 또 유교병(누룩 넣은 떡)도 함께 드려야 했다. 유교병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대상인,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자가 여전히 부족한 죄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동안에도 여전히 부족이 많은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치 않고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화목제의 예물들은 그 전체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擧祭) 혹은 헌물(NASB)로 드리고 그 드린 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했다.

[15-18절]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 . . .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제사 드린 그 날에 먹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아야 했다. 우리의 감사는 보통 하루에 제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의 화목제물은 제사 드린 날에도 먹지만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었다. 단지 그 고기가 제3일까지 남았으면 불살라야 했다. 만일 그 고기를 제3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제사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가증한 것이 되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과 가지는 우리의 교제는 경건함과 두려움과 진지함을 가진 교제이어야 한다.

[19-21절]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 . . .

또 화목제물이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살라야 했고 또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어야 했다.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아무 물건이든지 만지고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화목제물은, 비록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하는 복된 제사이지만, 거기에 참여할 자들은 죄사함받고 진실하게 거룩과 의를 행하고자 힘쓰는 자이어야 했다.

[22-2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 . . .

하나님께서는 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중요한 명령을 추가하셨다. 첫째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먹는 것 외에는 쓸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짐승의 기름을 여러 가지 생활의 용도로 쓰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의 기름을 먹지 말아야 했다. 특히 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었다. 기름은 하나님께만 온전히 드려야 했다.

둘째는, 그들의 사는 모든 곳에서 무슨 피든지 새나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오직 대속(代贖)의 상징으로 거룩하게 사용되어야 했다.

[28-3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 . . .

하나님께서는 또 화목제에서 제물의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의 영원한 소득으로 주어야 할 것을 명하셨다. 화목제를 드리는 자는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며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테누파)를 삼고 그 기름은 단 위에 불살라야 했다. ‘요제’(搖祭, wave-offering)는 ‘흔들어 드리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번제단을 향하여 전후로 흔드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그것을 다시 받는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런 다음 그 가슴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졌다. 또 제사 드리는 자는 화목제물의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KJV) 혹은 ‘헌물’(NASB)로 삼게 하였고 그 우편 뒷다리는 화목제의 피와 기름을 드린 제사장의 소득이 되었다.

이와 같이, 화목제물의 가슴과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을 ‘영원한 소득’(34절) ‘여호와께서 명하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36절)이 되었다.

[37-38절]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 . . .

37-38절은 이상의 내용이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의 규례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하신 날에 시내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하셨더라”고 기록하였다. 어렵지만 우리가 읽고 묵상하며 조금 깨달았던 레위기의 이 제사 규정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명하신 바이었다. 이것이 성경의 성격이다. 성경은 인간 역사의 구체적인 시점들에 구체적인 환경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의 내용들인 것이다. 성경책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들이다. 우리는 이 책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묵상하며 깨닫고 믿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 이해하여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평안과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레위기 7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자. 속건제에서 제사 드리는 자는 속건제물의 모든 기름을 다 취하였고 제사장은 그것을 다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렸다(3-5절). 제물의 기름은 사람이 먹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화제로 드려야 했고 제물의 기름을 먹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었다(25절).

성경에서 기름은 가장 좋은 것을 가리킨다. 실상 기름은 맛도 좋고 냄새도 좋다. 제물의 기름은 제물의 가장 좋은 부분을 가리킨다. 민수기 18장에 보면, “너희의 받은 모든 예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고 말씀했다(29절). 그 장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오는데, ‘아름다운 것’이라는 원어(켈레브)는 ‘기름, 가장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 신명기 6:4-5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생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그에게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드리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하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자. 화목제는 일차적으로는 속죄의 의미가 있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하는 뜻도 있었다고 본다. 화목제는 제사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먹을 수 있었다.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타낸다. 특히 화목제는 감사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었다. 물론 화목제물은 깨끗한 자만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먼저 죄씻음을 받고 평소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성결한 생활을 힘써야 함을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즐거이 교제를 나누게 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인생의 가장 큰 특권이며 행복이다. 시편 25:14은 “여호와의 친밀함(소드)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고 말했다.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신약성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과 즐거움을 누린다(롬 5:1).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특권을 누리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귀히 여기자. 하나님께서는 속건제물의 고기, 번제물의 가죽, 소제물들, 감사의 화목제 중 무교병, 무교전병, 구운 과자, 및 유교병의 각각 한 개씩, 또 화목제물 짐승의 가슴, 우편 뒷다리 등을 제사장들에게 주게 하셨다. 그것들은 제사장의 영원한 소득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들을 받으셨다는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일꾼들로 대우하시는 뜻이 있어 보인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제사장들을 존중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꾼들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라고 교훈한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또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25:40).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권면했다(살전 5:12-13). 물론 하나님의 종들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겸손히 성도들을 섬겨야 하지만, 성도들은 주의 종들과 일꾼들을 존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 교회는 교회의 교역자들과 직원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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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강해:                                     화 있을진저

[5:18-23]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 . . .

선지자는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라고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과 죄악을 행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의와 선과 진실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불의와 죄악과 거짓으로 행하였다. 이스라엘 사회는 남을 비방하고 해치는 일이 많았고 거짓말이 난무하였다는 말이다.

선지자는 또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섭리를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참고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의 조급함은 곧 그들의 불신앙이었다.

선지자는 또,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악 판단을 바르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부패한 사회의 모습이다. 잠언 28:4은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고 말했다. 악을 선하다, 선을 악하다 하는 것은 그 심령이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되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도덕적 혼란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잠언 17:15은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다. 성도는 선악 판단을 바르게 해야 한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해야 하며, 선한 것은 선하다 하고 악한 것은 악하다 해야 한다.

선지자는 또,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한다.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잠 26:12).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낮추며 우리 자신의 부족과 어리석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선지자는 또,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사회는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는 사회이었다. 이것이 구약 교회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였고 독주를 섞어 만들기에 유력하였다. 그러나 술 취함이 사람을 실수케 만들며 또 과음과 폭음이 사람의 몸도 병들게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술 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고전 6:9-10). 금주(禁酒)와 금연(禁煙)은 그리스도인의 지혜요 복이다.

선지자는 또,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사회에는 뇌물이 많이 오고갔고 그로 인하여 도덕 판단이 혼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 하고 또 의인을 악하다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출애굽기 23:8에 말씀하셨다.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사회는 이처럼 거짓과 죄악이 많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를 믿지 않았고 선과 악을 잘못 판단하였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지혜롭다고 생각하였고 술을 즐겼고 뇌물이 많이 오고갔다. 이스라엘 사회는 심히 부패되었고 죄악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런 죄악에 대해 진노하셨다. 18-23절에서, 선지자는 이미 ‘화 있을진저’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였다(18, 20, 21, 22절).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화와 진노이다.

[24-30절]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 . . .

선지자는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불일 수도 있지만,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불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킨다. 불은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다 태우고 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또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같이, 그 뿌리로부터 썩고 망하겠고 꽃 같은 그 찬란한 영광은 티끌처럼 날아갈 것이다.

선지자는 그들의 멸망의 이유를 다시 요약한다. 그는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멸시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존중한다(사 66:2).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존중한다면, 그는 겸손하며 정직하고 선하며 진실할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또 선포하기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 백성의 시체는 거리에 쓰레기같이 많게 될 것이나 그래도 하나님의 노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는 또 하나님께서 먼 나라들을 불러와 이스라엘을 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말한다. “기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 올 것이로되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그 말굽은 부싯돌 같고 차바퀴는 회리바람 같을 것이며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물건을 움키어 염려 없이 가져가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리어져서 어두우리라.”

선지자는 무서운 전쟁을 예고하였다. 이스라엘 나라를 침공할 이방 나라들의 군대는 빠르고 강할 것이며 그들 중에는 피곤하여 넘어지거나 조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무기는 날카로울 것이며 그들의 병거 바퀴는 회리바람 같을 것이며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는 사자들의 표호 소리와 같을 것이다. 온 땅은 흑암과 고난으로 가득할 것이다. 오직 바르게만 살자.

현대사회문제

대북 전단 살포 가로막는 이들

[사설: “대북 전단 살포 가로막고 나선 ‘북(北)의 대리인’들,” 조선일보, 2008. 12. 3, A31쪽.]

한국진보연대, 전국여성연대 등 친북(親北) 좌파단체 사람들이 2일 북한을 향해 전단을 띄워 보내던 납북자가족모임,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납북자가족모임 등은 전단 10만장을 풍선 10개에 매달아 보내려 했다가 좌파단체들의 방해로 풍선 한 개만 띄우는 데 그쳤다.

진보연대는 한총련, 범민련남측본부,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같은 대표적 친북 좌파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단체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주도하면서 서울 도심을 석 달 동안 전쟁터나 다름없는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자기네들은 대한민국의 법이란 법은 모조리 무시하면서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멋대로 해놓고서 납북자 가족들이 북한에 전단 보내는 일을 막겠다고 임진각까지 쫓아갔다. 여성연대라는 단체도 작년 7월 발족 선언문에서 ‘미군기지 확장과 그 어떤 형태의 전쟁훈련도 반대한다’고 했던 걸 보면 북한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외워대는 종북(從北)단체일 게 뻔하다.

진보연대 등은 “전단 살포가 가뜩이나 어려운 남북관계를 더욱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지난 7월 금강산에서 여성 관광객이 북한군 총에 맞아 죽었을 때 북한에 대고 남북관계가 나빠지니 사과 한마디라도 하라고 말했다는 걸 들어본 일이 없다.

사실 요즘 같은 인터넷시대에 굳이 전단을 띄워 보내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다. 북한 당국이 주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지 않고 있다면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탈북 여성들이 지난 10월 북한 인권운동가 수잔 숄티 여사와 만났을 때 “북에서 대북(對北) 방송을 들은 적은 없지만 전단은 읽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측이 개성공단 문을 닫아 걸겠다고 하면서까지 전단을 막으려는 것은 북한 주민들을 바깥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암흑 속에 계속 가둬두겠다는 얘기다. 입만 열면 인권이 어떻다느니 하는 좌파단체들이 왜 북한 주민들의 귀를 열고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전단 보내기엔 시비를 걸고 나서는 건가.

교육 평준화 정책을 재고해야

[“평준화가 있는 한 교육 세계는 없다,” 미래한국, 2008. 12. 27. 2쪽.]

30년이 넘도록 진행되어온 평준화 교육제도가 국가 경쟁력에 조금이라도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은 전교조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평준화는 학력저하, 부실교육, 조기유학 그리고 국가 경쟁력 추락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전교조는 최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전국단위의 학력평가(일제고사)를 투쟁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전교조의 관심과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한 대목이다. 촛불시위, 좌파 교육감 후보 후원 등 불법. 이적 행위를 일삼아 온 전교조의 목적이 국가 정체성 훼손에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초. 중. 고 교실이 되살아나고 국제 경쟁력 있는 교육이 실시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평준화 교육제도가 폐지되고 시장경쟁논리가 교육계에 적용되어야 한다. 전교조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법. 공안 기관의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따라야 하겠다. 검찰이 전교조 소속 교사 몇 명을 소환조사 하면서 적당히 넘어간다면 우리 교육의 후진성은 끝내 극복하기 어렵다.

평준화 교육은 다양한 학력 수준의 학생들이 획일적인 교육을 받았을 경우 성취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상위권 학생들의 학력은 저하시키면서 하위권 학생들은 방치시키는 아주 기이한 교육 현실을 초래하였다. 결국 전교조가 추구하는 평준화는 우수인력 양성을 억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처지게 하는 반국가적 행위이다.

또 다른 문제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사교육비이다. 1973년 고교 평준화 도입 시 과외와 사교육비의 축소가 큰 명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교육비는 이제 교육 예산을 넘을 정도로 커졌다. 평준화 교육 이후 대학 입시 비중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삼성, LG, 현대와 같은 대기업들은 어떻게 국제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왜 우리 교육기관들은 다양한 국제 등급 및 평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까? 답은 자명하다. 기업들은 평준화와 같은 틀속에서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정부는 2009년을 경제회복 뿐만 아니라 교육 선진화의 원년으로 살아야한다. 그 첫 단계가 전교조 와해와 평준화 정책 폐지라는 점을 대통령부터 빨리 깨달아 주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