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02월 1일 [제13권 5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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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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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강해:                                   제사장 직무를 시작함

본장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 직무를 시작한 일을 증거한다.

[9:1-4] 제8일에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 . . .

제사장 임직을 한 후 제8일, 즉 한 주간이 지난 후,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렀고 아론에게 말했다. “흠 없는 송아지를 속죄제를 위해 취하고 흠 없는 숫양을 번제를 위해 취하여 여호와 앞에 드리라.” 그는 아론에게 또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숫염소를 속죄제를 위해 취하고 또 송아지와 어린양의 1년 되고 흠 없는 것을 번제를 위해 취하고 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숫양을 취하고 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흠 없는 속죄제물과 번제물과 화목제물은 일차적으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셨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했다(벧전 1:18-19).

번제와 화목제와 소제는 부차적으로 온전한 헌신과 교제, 감사와 온전한 순종을 교훈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제사 드리는 자들에게 큰 교훈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온전한 순종을 바쳐야 한다.

[5-7절] 그들이 모세의 명한 모든 것을 회막 앞으로 가져오고 . . . .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명한 모든 것을 회막 앞으로 가져왔고 온 회중은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섰다. 모세는,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했 아론에게,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해 또 백성을 위해 속(贖)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해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고 말했다.

본문은 아론이 처음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바이었고 아론이 모세의 명 곧 여호와의 명대로 그 일을 다 수행했다고 증거한다. 모세의 명은 곧 여호와의 명이었다. 아론은 모세의 명 곧 하나님의 명대로 일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해져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진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오늘날 성경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모든 성도의 생활법칙은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행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분명한 뜻이다.

[8-14절]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 . . .

아론은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죽였고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받들어 주니 아론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단 밑에 쏟고 그 속죄제물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단 위에 불살랐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다. 또 그는 속죄제물의 고기와 가죽을 진 밖에서 불살랐다.

아론은 또 번제물을 죽였고,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니 그는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렸고, 그들이 또 번제물의 조각들과 머리를 그에게로 가져오매 그는 단 위에 불사르고 또 내장과 다리는 씻어서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살랐다.

[15-21절] 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 . . . .

그는 또 백성의 예물 곧 백성을 위한 속죄제의 염소를 취하여 죽여 전과 같이 죄를 위해 드렸고, 또 번제를 드리되 규례대로 드렸고 또 소제를 드리되 그 중에서 한 움큼을 취하여 아침 번제물에 더해 단 위에 불살랐다. 또 그는 백성을 위하는 화목제의 수소와 숫양을 죽였고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매 그는 단 주위에 뿌렸고, 그들이 또 수소와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콩팥과 간 꺼풀을 그에게로 가져다가 그 기름을 가슴들 위에 놓으매 그가 그 기름을 단 위에 불살랐고 그가 가슴들과 우편 뒷다리를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드니 모세의 명한 것과 같았다.

[22-24절]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 . . .

아론은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왔다. 또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그 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다. 모든 백성은 그것을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다.

모세의 말대로(4, 6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는 불의 응답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는 지금도 활동하고 계신다. 그는 때때로 인간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사건들을 증거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나타나심들을 특별계시라고 부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이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법은 바뀌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고 말씀하셨고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다 기록된 사도 시대 이후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통해 또 그것과 함께 활동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활동하시지만, 주로 성경을 통해 일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또 그 말씀과 더불어 활동하시는 성령의 불 같은 사역을 사모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불 같은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고 우리의 인격을 새롭게 하시고 무능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를 사모한다.

레위기 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의 제사 제도를 통한 교훈을 기억하자. 구약의 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우리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또 구약의 제사들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과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함과 온전한 순종을 교훈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속죄 신앙을 가지고, 온전한 헌신과 교제, 감사와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자.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였다(벧후 3:11-13, 14).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성경의 교훈대로 행하자. 아론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해져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야 하며, 교회의 봉사의 일도 성경대로 해야 한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감치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대로 지키라고 말했고(신 4:1-2; 5:32-33), 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신 10:12-13).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생활하며 봉사하자(딤후 3:16; 마 28:20; 살후 2:15).

셋째로, 우리는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불 같은 사역을 사모하자.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또 성경과 더불어 활동하신다.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의 단에 불로 응답하시기를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우리 교회에게 내면적 불로 응답하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우리의 모든 추하고 더러운 죄악을 다 태우시고 하나님을 확신하고 사랑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기를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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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강해:                                      나를 보내소서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자신의 추함과 입술의 부정함을 깨달았고 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제단의 숯불로 그의 입의 악을 정결케 하심도 보았다. 그는 이 일들을 환상 중에 보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하신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몇 번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다(창 1:26). 또 그는 범죄한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실 때,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창 3:22). 또 노아의 자손들이 뜻을 모아 바벨탑을 쌓았을 때, 그는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말씀하셨다(창 11:7). 하나님께서 이처럼 때때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위해 사람을 사용하심을 보인다. 그것은 성경 역사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에 사람을 사용하신다. 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실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나님의 일은 어려운 일이며 그의 일을 수행하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나 신약 시대의 사도들은 다 고난과 핍박을 당했고 멸시와 배척을 당했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욕과 비방을 당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전 4:9-13).

이사야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그는 어디에서 이런 헌신의 용기가 났을까? 그것은 분명히 그가 본 사죄(赦罪)의 환상에서 났을 것이다. 죄책감은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무기력함에 머물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죄사함을 확신할 때 힘과 용기를 얻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게 될 것이다. 죄는 영원한 멸망의 원인이며 거기에는 두려움밖에 없지만, 죄사함은 영생의 길이며 거기에는 기쁨과 평안이 넘친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9-1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직무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좀 이상한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진리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은혜 주실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그가 버려두신 자들에게서는 그의 은혜를 거두신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깨닫지도 못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구원을 받지도 못하고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도 못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진리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사도행전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6: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로마서 9: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선지자의 직무를 받은 이사야는 하나님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여쭈었다. 하나님께서는,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벨론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때까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불순종하는 유다는 결국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의 사역은 전망 없는 사역, 결실 없는 사역처럼 보였다. 하나님의 일은 때때로 전망 없는 사역, 결실 없는 사역처럼 보인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역이 대표적인 예이었다. 그는 41년간 사역했지만, 한 명도 구원하지 못한 사역이었다. 예루살렘은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마침내 멸망을 당하였다(렘 5:1).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도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이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런 사실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배우게 된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러나 전도자는 고난을 각오하며 전도자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딤후 4:3-5).

[13절] . . .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러나 사람이 무지하고 완악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루터기는 나무를 벤 후에 남은 나무둥치를 가리킨다. 유다가 멸망해도, 그 그루터기는 남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땅의 ‘거룩한 씨’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메시야를 암시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그것이 이사야의 책 전체에 흐르고 있는 메시야 진리이다. 이사야서는 또 ‘남은 자’에 대해 많이 말한다. 그들은 메시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은 처음에는 적은 수효일 것이지만(눅 12:32), 마지막엔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될 것이다(계 7:9). 하나님의 일은 결국 실패치 않고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힘들고 지루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사야 6:8-13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자가 되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 사역을 위해 보내실 만한 사람들을 찾으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그 죄사함을 확신하고 그 죄사함받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즐거이 헌신하자. 또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어렵다는 것을 미리 알자. 사람은 심히 부패되어 있고, 사람 구원의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만 간구하며 또 하나님의 심정을 배우며 인내하며 일해야 할 것이다. 목회와 전도, 주일학교 교사와 권찰의 일, 또 교회의 모든 봉사의 일이 다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어려움을 알고 단단히 각오하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남은 자들이 되자. 인류의 소망은 거룩한 씨에 있다. 거룩한 씨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세상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에게 소망을 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롬 6:3-4; 요 15:4-5). 그 증표는 믿음과 순종과 거룩한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남은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