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06월 21일 [제13권 25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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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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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전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심령이 가난한 자가 그냥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난 증거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은, 비록 심령이 가난한 것만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충분한 조건은 아니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 들어갈 준비가 된 자이며 구원을 받을 준비가 된 자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심령의 가난은 심령의 부요와 반대되는 말이며, 심령의 부요가 무엇인지 생각하면 심령의 가난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얻는 자라면, 심령이 부요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복이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부요한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심령이 부요한 자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가리킵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는 심령이 부요한 자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크게 여깁니다.

교만은 죄의 근원적 요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는 것은, 그의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치 않듯이,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순종치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치도 않습니다.

교만은 사실상 사람이 하나님 대신 자신을 믿고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만은 인간의 자기숭배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웁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교만은 인류의 모든 악의 원인인 마귀의 죄악입니다. 마귀는 교만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모세 시대의 고라는 교만한 자의 한 예입니다. 고라와 그 동료들은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며,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고 말하였습니다(민 16:3). 그들은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습니다(민 16: 19). 고라는 자신을 크게 여기며 모세와 견주려 하였습니다.

심령이 부요한 자는 또한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의 것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합니다.

그는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농부와 같습니다. 그 농부는,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눅 12: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20).

또 같은 뜻에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9:24).

마음이 부요한 자는 또한 자신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심령이 부요한 자는 남에게 과시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또 자기 만족과 자랑은 신앙의 해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점점 더 미지근해질 것입니다.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7).

이렇게 심령이 부요한 자, 즉 마음이 교만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고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에는 하나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세상 것들이 자기에게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합니다.

그는 참된 지혜와 지식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이 얼마나 긴 것입니까?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인간에게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입니까? 특히 인간에게 도덕성이라는 것, 선하다는 것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덮어둔 채 살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부요하고 교만하며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사람은 무지한 죄인이요 그의 결말은 멸망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잠 16:18).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의 부족, 사상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 속에 진리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는 인생의 소망의 부족, 특히 도덕성, 즉 의와 선과 진실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는 인간의 기쁨과 평안의 부족을 느끼며, 인간의 행복의 부족을 느끼는 자입니다. 그는 자기 심령에 만족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을 작게 여깁니다.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하였습니다. 창세기 18:27에 보면, 그는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흙으로 지어진 존재요 흙과 같이 미천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 다윗이 그러하였습니다. 시편 39:5-6에서, 그는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죽을병에 걸렸을 때, 인생의 일평생이 허사(虛事)이며 그림자와 같고 물질적 부요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또 다른 시편에서 자신의 낮은 마음가짐을 증거하였습니다. 시편 131:1-2에서, 그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심령은 참으로 가난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느끼며 땅의 것의 헛됨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하나님의 복을 갈망합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되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생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는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가난한 마음, 겸손한 마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영광스런 천국을 버리고 누추한 세상에 내려오셨고 하나님의 영광의 신분을 버리고 비천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빌 2:5).

주께서는 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8-29). 또 그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6:24), 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3).

어떤 이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유약한 자이며 그런 자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겠는가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유약한 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힘, 그의 위로, 그의 지혜, 그의 기쁨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였고(시 3:6), 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시 4:7). 그는 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하며(시 18:1), 또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시 20:7).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 곧 천국을 소유한 복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부요한 심령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실상 자기숭배의 죄악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죄악입니다. 우리는 자기 만족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세상 것들을 의지하는 마음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은 참으로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이 못 됩니다. 그것들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며, 또 장차 우리가 다 두고 세상을 떠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참으로 허무하고 허망한 것들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덕적 의(義)와 선과 진실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또 기쁨과 평안도 부족하고, 행복도 부족하며, 또 소망도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갈망하고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義)를 받고 구원받고 영생얻고 천국을 소망하는 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돈 안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결코 유약한 자가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인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힘을 힘입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로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지혜로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힘으로 힘을 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사는 자입니다. 우리가 다 그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자기을 높이지 않고 낮추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깨닫는 자는 하나님만 높이며 하나님 안에서 힘과 소망과 위로를 얻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레위기 강해:                               등불과 진설병

[24: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 . . .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등대에 대해 말씀하신다. 등대는 성막의 성소 안에 둔 세 개의 거룩한 기구들 중 하나이었다. 본문에서 등대는 ‘순결한 등대’라고 불리며(4절), 또 거기에 쓰일 감람유도 ‘순결한 기름’이라고 불린다(2절). 등대를 관리할 자는 아론이었다.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휘장 밖의 등대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끊이지 않고(2, 4절), 항상(3절) 등불을 켜야 하였다.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 그리고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성막의 등대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12).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참 지식을 주셨고 완전한 의를 주셨고 또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셨다.

등대는 성령을 상징하는 뜻도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일곱 영, 곧 완전한 영이시다. 요한계시록 4:5은,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하고, 요한계시록 5:6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깊은 의미에서 일체(一體)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의 신비를 믿습니다. 또 성령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희락 곧 기쁨을 포함합니다(갈 5:22).

또 등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뜻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빛이며 등불이며 또 우리의 기쁨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빛이요 우리의 기쁨이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92, 103,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5-9절]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 둘을 . . . .

5-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진설병(陳設餠)에 대해 말씀하셨다. 떡상도 성막의 성소 안에 둔 세 개의 거룩한 기구들 중 하나이었다. 본문에서 떡상은 ‘순결한 상’이라고 불리며(6절), 또 거기에 차려지는 떡과 그 위의 유향은 ‘지극히 거룩한 것’(9절), ‘정결한 유향’(7절)이라고 불린다. 진설병은 여섯 개씩 두 줄로 위로 쌓았다고 본다. 그 떡은 항상 매 안식일에 차리고(8절) 지난 것은 아론과 그 자손이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규정되었다(9절).

진설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한 생명의 떡이시다. 요한복음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또 진설병은 성경말씀을 상징하는 뜻도 있다고 본다. 성경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다. 마태복음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떡이 생명과 힘을 주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과 위로와 힘을 준다.

[10-23절]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요 . . . .

10-16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범죄자에 대한 벌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된 자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중에서 싸우다가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갔다.

사람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렸을 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것은 매우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막제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정반대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거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17-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보응에 대해 다시 말씀하셨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짐승을 쳐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게 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 . . .”

공의는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벌을 요청한다. 죄인은 그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공정한 벌을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23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니 . . . .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였다. 그들은 저주한 자를 진 밖에 끌어내어 돌로 쳤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

레위기 24장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막제도, 특히 등불과 진설병에서 상징된 바를 유념하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 거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의 참 지식과 완전한 의(義)를 주셨고, 또 기쁨을 주셨다. 또 성령의 빛 안에, 그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고, 성경말씀의 빛 안에, 그 교훈 안에 살자.

우리는 또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먹자.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그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것, 곧 속죄신앙을 말한다. 또 성경말씀은 생명의 양식이며 우리의 기쁨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죄이며 더욱이 하나님을 비방하고 저주하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큰 죄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