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09월 13일 [제13권 37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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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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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전설교:                          병자들을 고쳐주심

[성경본문] 마태복음 8:1-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며 전도사역을 하실 때 많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은 그 중에 몇 가지 사건들을 증거합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한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나병은 거의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가르치시고 내려오셨을 때 수많은 무리가 그를 따랐습니다. 그 때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그에게 절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원하시면 자기의 나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는 그것을 믿고 말합니다. 나병을 고치는 것은 신적 권능 외에는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은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놀라운 믿음이 생긴 것입니까? 그 믿음은 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긴 것일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 10:17).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단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며 말씀하신 것뿐인데, 그의 나병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말 한 마디로 나병이 나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병이나 고치는 자로 오해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병이나 고치는 기적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영혼이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몸의 병이 낫는 것보다 백 배, 천 배나 더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며 죽은 후에는 천국 아니면 지옥에 들어갑니다. 또 모든 사람은 마지막 날에 영생의 부활 아니면 심판의 부활로 부활할 것입니다(요 5:28-29). 그러므로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한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로마 군대의 하급장교인 한 백부장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 간구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그는 자기 하인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있는 자, 자기 하인의 고통을 자기 아픔으로 생각하는 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께서 그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중풍병자 자신이 믿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인인 백부장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누추함을 아는 겸손한 자이었고 예수께서 말씀만 하셔도 자기 하인의 중풍병이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말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전통사본에는, "이스라엘 중에서라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 중에서라도 볼 수 없는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각에 하인이 나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백부장의 믿음대로 예수께서 말씀만 하셨을 뿐인데 그 병자가 즉시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한 열병 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장과 누가복음 4장에도 기록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여자가 중한 열병에 걸려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그것은 고열을 동반하는 신종 플루 같은 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손을 만지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께 청하였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까이 가셔서 그의 손을 만지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 때 그 열병이 그를 떠나갔고 그 여인은 일어나서 예수를 수종들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여인이 곧 일어났다고 증거합니다(눅 4:39).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열병을 일으키는 병균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오직 신적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 8:16과 또 2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고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에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났습니다. 마가복음은 그 사람이 무덤 사이에 거처하였다고 말합니다(막 5:3). 사람이 집에서 거처하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무덤에 거처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심히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가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고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고 증거합니다(막 5:3-4). 그것은 악령의 성질과 힘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는 많은 귀신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마가복음은 그 귀신의 이름이 '군대'(레기온)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약 6천명 가량의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소리지르며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에게 그들에게서 나오라고 이미 명령하셨습니다(막 5:8; 눅 8:29).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또 그 귀신들은 자신들이 장차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었는데, 그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였습니다.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떼에 들여보내소서."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은 그 수가 거의 2천 마리이었다고 증거합니다(막 5:13). 하나님께서는 귀신 들렸던 그 두 사람과 돼지 2천 마리를 맞바꾸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돼지 수백, 수천 마리보다 귀합니다. 돼지 치던 자들은 놀라서 뛰어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을 고하였고, 온 동네는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 그 지역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병자들은 고쳐주신 것은 의학적 방법으로가 아니고, 말씀으로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나병환자는 즉시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중풍병자의 주인인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시각 그 하인은 나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심한 열병을 앓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고 그 열병이 즉시 떠나갔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게 그 사람들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고 귀신 들린 자들은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말씀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예수께서 단순히 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아직도 이 사실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어야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를 다 믿으십시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것 외에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물론 기적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22-23). 주께서는 한 비유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31). 오늘날 우리는 기적을 추구하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적 구주는 오늘 우리 곁에 계신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속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위로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험한 세상을 힘있게 삽시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했습니다(요일 5:4-5).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빌 4:13).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신적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이 세상을 이기고 이 세상의 모든 시험과 고난과 역경을 다 이깁시다.

 

 이사야 강해:                             로에 대한 경고

[23:1-3] 두로에 관한 경고라. . . .

본장은 "두로에 관한 경고"이다.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국경 너머 지중해 연안의 나라이다. 본장은 부요하고 견고하고 희락이 넘쳤던 두로의 영화가 황폐케 되어 그 주위의 나라들의 거민들이 슬퍼하며 두로의 거민들도 슬퍼하고 부끄러워하고 도피할 것을 예언한다.

선지자는,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니라"고 말한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타르테서스를 가리키거나, 이탈리아 서쪽의 사디니아섬을 가리키거나, 소아시아 동남부 길리기아 다소를 가리킬 것이다(요세푸스, 매튜 풀). 그것은 두로와 무역했던 한 중요도시이었다. 옛시대에 세계 무역의 중심지이었던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기 때문에 그 소식을 깃딤 땅 곧 구브로섬으로부터 들은 다시스의 뱃사람들은 슬피 부르짖을 것이다.

선지자는 또,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고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거민들아, 잠잠하라.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물로 수운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었도다"라고 말한다. 두로와 시돈은 애굽의 풍부한 곡물이 거래된 열국의 시장이었다. 오늘날 홍콩처럼 각 나라의 상품들과 물건들이 그곳에서 거래되었다.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의 상인들 때문에 부요함을 누렸다. 그러나 이제 두로의 멸망은 그들로 할 말을 잃게 하는 큰 충격이 될 것이다.

[4-7절]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 . .

선지자는 또 말한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보장(保障)이 말하기를 나는 구로하지 못하였으며 생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 남자들을 양육하지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니라." '바다의 보장(保障)'은 바다에서 견고한 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이 견고한 성 두로가 자녀들을 출산치 못하고 양육지 못하는 자가 됨으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선지자는 또 말하기를,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을 인하여 통도하리로다.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거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유하던 성이냐?"라고 말한다. 두로의 멸망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애굽 사람들도 슬퍼할 것이다. 두로는 고대에 건설된 유서 깊은 성이며 '희락의 성' 곧 그 부요와 세력으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던 성이며 먼 지방까지 세력을 떨쳤던 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두로 거민들은 다시스로 도피할 것이다. 또 그로 인해 유여함을 얻었던 지중해 연안의 거민들은 그의 멸망을 인해 슬피 부르짖을 것이다.

[8-12절]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 . . .

선지자는 두로의 멸망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이었음을 증거한다. 그는 두로를 "면류관을 씌우던 자" 즉 다른 나라들을 부요하고 존귀하게 하던 자이며 "그 상고들은 방백이요 그 무역자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 즉 두로와 무역하던 자들이 각 나라의 방백과 귀족들이었음을 말하면서, 그 두로의 멸망에 대해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뇨?"라고 묻는다. 그런 후,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고 스스로 대답한다. 그 부요하고 강력한 나라 두로를 멸망시킬 일을 계획할 수 있는 자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바이었다. 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두로의 멸망을 뜻하신 것이 "모든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과 영광을 꺾으시기 위하여 두로의 멸망을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을 가장 미워하신다.

선지자는 또, "딸 다시스여, 나일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고 말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다시스도 두로에게 속박을 당했었으나 이제 두로의 멸망으로 자유함을 누릴 것이다. 다시스는 두로의 패권주의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것이다. 선지자는 또,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을 내려 그 견고한 성을 훼파하게 하시고 가라사대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흔드시고 주장하셔서 두로의 멸망을 이루실 것이다. 상인이라는 뜻을 가진 '가나안'은 두로 지역을 염두에 둔 말씀이며 '그 견고한 성'은 두로를 가리켰다고 본다. 두로는 이방 나라에게 학대를 받을 것이며 다시는 희락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또 두로 거민들은 깃딤 곧 구브로 섬으로 도피할지라도 거기서도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악인들은 어디를 가나 평안을 얻지 못한다.

[13-14절]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 . .

13절은 갈대아 사람들의 멸망을 예로 든 것인지,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들을 사용하여 두로를 멸망시키실 것을 암시한 것인지 분명치 않아 보인다. 원문을 직역하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었으며 앗수르 사람들이 들짐승의 거하는 곳이 되게 하였고 포위망대를 세웠고 그 궁궐들을 헐었으며 그가 그것을 황무케 하셨느니라." 본절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황폐케 하신 것을 증거하며 이처럼 두로도 이처럼 황폐케 될 것이라는 뜻 같다. 또 선지자는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고 말한다. '너희 견고한 성'은 두로를 가리킨다고 본다.

[15-18절] 그 날부터 두로가 . . . .

15-18절은 하나님께서 두로의 멸망뿐 아니라, 두로의 회복도 작정하셨다는 것을 증거한다. 선지자는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같이 70년을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70년이 필한 후에 두로는 기생 노래의 뜻같이 될 것이라. 잊어버린 바 되었던 기생 너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행하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케 하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두로는 70년 동안 잊혀져 있다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 선지자는 또 말한다. "70년이 필한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권고하시리니[돌아보시리니] 그가 다시 취리(取利)하여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거하는 자의 배불리 먹을 자료, 잘 입을 자료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70년 후에 두로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두로는 다시 물질적 유여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물질적 여유가 이제는 하나님께 거룩히 드려지고 하나님 앞에 거하는 자들의 먹을 양식과 입을 것을 제공하는 데 쓰일 것이다. 이 예언은 신약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유세비우스의 초대교회사 책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두로에 세워졌고 그것의 많은 재물이 하나님께 바쳐졌고 전도사역의 후원을 위해 드려졌다는 한 사람의 연설문이 실려 있다(교회사, 10.4).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말자. 부요하고 견고하며 즐거움이 넘쳤던 성 두로를 하나님께서 황무케 만드실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부귀, 영화, 권세, 기쁨과 즐거움이 변하는 것임을 알고 자랑치 말자.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하나님께서는 두로의 멸망도, 회복도 작정하시고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홀로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이시다. 개인의 생사화복도, 교회와 국가의 흥망성쇠도 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자.

셋째로, 우리는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계명만 순종하자. 하나님께서 두로를 멸망시키신 까닭은 두로가 부요와 영광 속에 교만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계명만 순종하고 믿음과 사랑으로만 살자.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바른 길을 붙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