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04월 26일 [제13권 17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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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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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강해:                           여러 가지 법들(2)

[19:13]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 . . .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압제하다’는 원어(아솨크)는 ‘압제하다, 학대하다, 강탈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폭력으로 남을 위협하거나 구타하거나 해치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는 그런 나쁜 사람들이 있지만 이스라엘 사회 안에는 그런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폭력으로 남을 해치거나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또 “너는 늑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늑탈하다’는 말은 강도짓하는 것, 곧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앞의 명령 속에 내포된 바이기도 하다. 강도짓은 도적질보다 더 나쁜 것이다. 밥 한 끼라도 부담을 주어 얻어먹는 것은 좋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또 “너는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품꾼은 누구에게 고용된 일반 노동자를 가리킨다. 옛시대에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어떤 직장에 고용되어 매월 월급을 받는 자들이 많다. 하나님의 명령은, 매일이든지 매월이든지 주인이 일꾼들의 품삯을 미루지 말고 제 때에 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생활비이기 때문이다. 신명기 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신 24:14-15). 우리가 누구에게 일을 시키면, 그 값은 정중하게 그 날 혹은 그 시간에 지불해야 하고 고의적으로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14절]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 . . .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또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듣지 못하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고 보지 못하는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악한 일이다. 비록 귀먹은 자는 그의 저주를 듣지 못하고 소경은 그가 장애물 놓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다 들으시고 보시며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귀먹은 자나 소경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눈앞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을 첨가하신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 하신 것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런 악한 일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본절과 16절과 18절에,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모든 명령의 근거와 권위를 증거한다. 이 명령들은 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명령이라는 뜻이다. 영원자존자 여호와 하나님,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홀로 섭리하시는 살아계신 주 하나님께서 이 모든 명령들을 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명령들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것들을 성심으로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15절]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 . . .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또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라”고 말씀하신다. 재판은 사람들 상호간 생긴 문제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다. 재판은 하나님의 행위를 본받는 일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재판에 불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3:3에서,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명하셨다. 모세도 천부장과 백부장 등을 세우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라”고 하였다(신 1:17). 우리는 재판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일에서도 공정하게, 공평하게, 공의로 판단해야 하고, 어떤 일에서 무조건 가족이나 친구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16절]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 . . .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원문은, “너는 네 백성 중에 남을 중상하는 자로 다니지 말라.” ‘남을 논단하지 말라’는 원어(라킬)는 ‘남을 중상(中傷)하는 자, 즉 거짓 소문으로 남을 비난하고 헐뜯고 남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3장에서,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라”고 명하셨다(출 23:1). 거짓 소문으로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다.

세상에는 이런 나쁜 사람들이 많고 이스라엘 사회에도 그런 악한 자들이 있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니며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 지적하였다(렘 6:28; 9:4). 시편 101:5은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였다. 잠언 20:19도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하는데,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라는 원어가 바로 같은 단어이며, 그것은 남을 비난하고 헐뜯으며 돌아다니는 자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에서,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의 자격에 대해 말하면서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하였다(딤전 3:11). 참소하는 것이 거짓말로 남을 헐뜯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우리가 남을 훼방하고 비방하는 일을 버리라고 교훈한다(엡 4:31; 벧전 2:1).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또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웃이 잘못을 하면 그를 책망할 수 있지만, 그를 죽음에 내몰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부모가 자녀를 책망하는 것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잘못을 깨우치고 고쳐 좋은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듯이, 성도의 책망은 상대방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깨우치고 고치려고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책망은 이 정도의 선까지이며 그 이상은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이다.

[17절]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 . . .

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미움은 살인(殺人)의 시작이다. 미움은 실상 마음의 살인이다. 남을 미워하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를 죽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하였던 것이다(요일 3:15).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이웃에 대한 미움부터 없애야 한다. 미움은 상대에 대한 독한 비난을 만들고 기회가 되면 그를 죽이게까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責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웃이 잘못을 행할 때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권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 이웃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뜻이다. 참된 사랑은 이웃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잠언 27: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신약성경도,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라”고 말한다(살전 5:14).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 . . .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 대해 공의로 보복하실 것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잠언 20:22은,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마 5:44). 사도 바울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9).

하나님께서는 또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일을 하다가 잘 안 되면, 우리는 남을 원망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와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그 현실을 달게 받고 잘 대처하고 이겨나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교훈하고(빌 2:14), 또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교훈한다(약 5:9).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명령은, 주께서 하나님의 계명들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두 개 중 두 번째의 계명이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완성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고 말한 것이다.

13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은 여러 가지 법들을 말한다. 이 법들은 다 여호와 하나님, 곧 온 세상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법들이며 모든 인생이 유념하고 지켜야 할 생활 법칙이다.

첫째로, 우리는 이웃을 폭력으로 위협하거나 구타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힘을 그렇게 남용하는 자는 능력의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이웃의 소유물을 강제로 빼앗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도적질보다 더 나쁜 악한 일이다. 그렇게 얻은 이익은 결코 자신에게 복이 되지 못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일을 맡긴 자에게 그 삯을 뒤로 미루지 말고 약속대로 정한 때에 지불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이 자기가 일하고 받을 삯을 간절히 기다림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이웃이 못 보고 못 듣는다고 그를 저주하거나 해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다 들으시고 공의로 보응하실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모든 일을 공의로 판단하고 처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을 미워하시고 모든 일을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남을 거짓되이 헐뜯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나쁜 사람이다.

일곱째로, 우리는 이웃을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책망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지 죽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로, 우리는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미움은 이미 마음으로 그를 죽인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아홉째로,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보면 지적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열째로, 우리는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한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는 오직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열한째로, 우리는 이웃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자신의 부족을 반성하며 어려운 현실을 담대히 대처해 나가야 한다. 열두째로, 우리는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 강해: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 찬송함

본장은 메시야 시대에 성도의 감사와 찬송의 이유와 그 내용과 그 기쁨과 그 전파에 대해 증거한다.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 . . .

먼저,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에 성도의 감사와 찬송의 이유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 날’은 메시야 시대를 가리킨다(사 11:10). 그 시대에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할 것이다. ‘감사하다’는 원어(야다)는 ‘감사하다’(NASB) 혹은 ‘찬송하다’(KJV, NIV)라고 번역된다.

성도들이 감사하며 찬송할 이유는 하나님의 노가 쉬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속죄의 은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5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라고 말하였는데, ‘화목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테리온)는 ‘유화제물’ 즉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그는, 또 로마서 5:9에서,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증거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의 그치심, 곧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이 우리의 감사와 찬송의 이유이다.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 . .

선지자 이사야는 또 성도의 감사와 찬송의 내용을 말한다. 그는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고 말한다. 성도의 감사와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만 의뢰한다. 우리는 이 세상도, 우리 자신의 현재와 미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 가운데 방황하던 시간들을 끝내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주 여호와는 우리의 힘, 우리의 노래, 우리의 구원이시다. 옛날 영어성경(KJV)은 ‘여호와’라는 원어(ה㰕¯㰕œ㰖¾)를 ‘주’(the Lord)라는 말로 번역하였으나 본절을 포함하여 네 곳에서는 ‘여호와’(Jehovah)라는 말로 그대로 번역하였다(출 6:3; 시 83:18; 사 12:2; 26:4). 죄는 하나님의 징벌로 우리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가져왔으나, 죄사함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 힘과 기쁨과 노래를 가져다 주었다.

[3절]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 . . .

선지자 이사야는 또 성도의 감사와 찬송의 기쁨을 표현한다. 그는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구원을 우물들에 비유한다. 우물은 물 저장고와 다르다. 물 저장고는 물을 다 쓰면 물이 없지만, 우물은 계속 물이 나오는 곳이다. 우물은 물이 풍성하다. 그 물은 목마름을 해소시킬 만한 시원한 물이며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줄 만한 깨끗한 물이다. 그 물은 물맛도 매우 좋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생명이다.

주 예수께서는 구원을 생수에다 비유하셨다. 그는 수가성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4:13-14). 또 그는 초막절 끝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켰다(요 7:37-39).

성도의 감사와 찬송은 기쁨의 감사와 찬송이다. 성도는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다. 성도는 기쁘게 하나님을 찬송한다. 선지자 스바냐는 그 기쁨의 노래를 예언하기를,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다(습 3:14-15).

[4-6절]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 . . .

선지자 이사야는 또 메시야 시대에 성도들이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이름을 만방에 선포하며 전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지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메시야 시대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할 것이다. 찬송은 일종의 전도가 될 것이다. 성도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극히 아름다운 일을 찬송할 것이다. ‘극히 아름다운 일’이라는 원어(게우스)는 ‘뛰어나신 일들’(KJV, NASB), 혹은 ‘엄위하신 일들’ (BDB)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원의 일을 가리킨다.

구원은 역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사건들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하였다(고전 15:3-4). 복음의 내용은 놀랍고 엄위하신 일들이다. 그러나 구원은 또한 개인적으로는 구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건이다. 우리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구원은 단지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또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딤전 1:1; 딛 1:3). 우리의 성화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하였다(고전 3:7).

본장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에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릴 것을 예언하였다. 성도들의 감사와 찬송의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고 그의 위로하심이 임하였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감사와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과 힘과 노래가 되신다는 것이다. 또 성도들의 감사와 찬송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들의 구원의 기쁨은 다함이 없을 것이다. 또 성도들의 감사와 찬송은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이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일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일들, 또 우리 속에 주신 구원의 일들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이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졌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쳤고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다. 구원의 생명수는 우리의 심령에 넘쳐 흐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만방에 전파하고 알리자.

◈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바른 길을 붙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