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03월8일 [제13권 10호] ◆ 매주 발행 ◆ |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
레위기 강해: 나병환자의 정결법 [14: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 . . .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나병환자가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에 대해 명하셨다. 병이 나은 나병환자는 제사장에게 데려갈 것이며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그를 진찰해야 했다. 그 나병환자의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정결한 산[살아 있는]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명하고,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죽이게 하고 다른 하나는 산 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와 새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말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아야 했다. 병이 나은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 의식은 단순히 위생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 때문에 오지만, 나병환자의 나병은 특히 그 근본적 원인이 죄이었다. 그러므로 그 정결 의식은 죄씻음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새 한 마리를 죽여 그 피를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살아 있는 새를 들에 놓아주는 것은 죄의 완전한 제거를 상징하고, 백향목은 썩지 않음을, 홍색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상징하였다고 본다. 우슬초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며 피를 적셔 뿌리기에 편리하였다.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불행이 왔고 죄씻음을 통해 참 평안과 행복이 온다. [8-9절]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 . . .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는 자는 또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어야 깨끗케 되었고 그 후에 백성의 진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장막 밖에서 또 7일을 거해야 했다. 제7일에 그는 그의 모든 털을 다시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어야 깨끗케 되었다. 이렇게 옷을 빨거나 모든 털을 밀거나 몸을 씻는 것을 두 번 하여야 했다. 그것은 위생적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한 정결함을 상징하였다. [10-14절] 제8일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 . . . 제8일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둘과 일년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또 고운 가루 에바 10분의 3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해야 했다. 가루 한 에바는 약 22리터이며, 기름 한 록은 약 0.3리터이다.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어린 숫양 하나를 취하여 기름 한 록과 함께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搖祭)를 삼아야 했다. 그 어린 숫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물과 번제물 죽이는 곳에서 죽이고 속건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므로 속죄제물처럼 제사장에게 돌려야 했다. 또 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환자의 오른편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발라야 했다. 레위기 1장과 4장에 규정된 대로, 어린 숫양 하나는 속건제를 위해, 다른 하나는 번제를 위해 쓰였고, 어린 암양은 속죄제를 위해 쓰였다. 속건제는 죄값을 보상하는 뜻이 있고, 속죄제는 단순히 속죄의 뜻이 있고, 번제는 속죄와 더불어 온전한 헌신의 뜻이 있고, 소제는 감사와 온전한 순종의 뜻이 있다고 본다. 속건제물의 피를 취해 정결함을 받아야 할 자의 오른편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바른 것은 귀로 죄악된 말들을 듣고 손으로 죄악된 일들을 행하고 발로 죄악된 길들로 갔던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씻음받고 이제부터 깨끗하게 살겠다는 각오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본다. [15-20절]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 . . .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해 자기 왼손바닥에 따르고 오른손가락으로 왼손의 기름을 찍어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또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는 환자의 오른편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 위에 바르고, 그 손에 남은 기름은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해 속죄해야 했다. 속건제물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상징하고, 기름은 성령의 은혜로운 활동하심을 상징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성령의 사역이다. 우리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받았고 중생(重生)했고 성화(聖化)한다(고전 6:11; 딛 3:5-6). 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을 인해 정결함을 받으려는 자를 위해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물을 죽이며 그 번제물과 소제물을 제단에 드려 그를 위해 속죄하면 그가 깨끗케 되었다. 속죄제는 속죄를, 번제는 속죄와 온전한 헌신을, 소제는 감사와 온전한 순종을 상징한다고 본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죄씻음을 받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신과 감사와 온전한 순종을 각오해야 한다. [21-25절] 그가 가난하여 이에 힘이 미치지 . . . . 만일 정결함을 받을 환자가 가난하여 이런 제물들을 준비할 힘이 없으면, 그는 속건제를 위해 어린 숫양 하나와 소제를 위해 고운 가루 에바 10분의 1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취하고,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삼아, 제8일에 그 결례를 위해 그것들을 회막문 여호와 앞 제사장에게로 가져와야 했다. 제사장은 속건제 어린양과 기름 한 록을 취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속건제물 어린양을 죽여 제물의 피를 취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편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발라야 했다. [26-32절] 제사장은 그 기름을 . . . . 제사장은 또 그 기름을 그의 왼손바닥에 붓고 오른손가락으로 왼손의 기름을 조금 찍어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리고, 그 손의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편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를 바른 곳에 바르며, 그 손에 남은 기름은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발라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해 속죄해야 했다. 또 정결함을 받을 그 환자는 그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하나나 집비둘기 새끼 하나를 속죄제물로, 하나는 소제물과 함께 번제물로 가져와야 했고,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해 여호와 앞에 속죄해야 했다. [33-47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 . . . 본장에는 또한 집에 생긴 나병에 대한 규례가 나온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가나안 땅에 이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나병 색점을 발하게 하시면 그 집 주인은 제사장에게 와서 무슨 색점이 집에 생겼다고 말해야 했다. 34절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느 집에 나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며, 나병을 포함하여 모든 질병도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시요 주권적 섭리자시다. 제사장은 그 색점을 보러 가기 전에 그 가장집물(家藏什物)에 부정을 면케 하기 위해 명하여 그 집을 비우게 한 후에 들어가서 그 집을 보되, 그 집 벽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벽보다 우묵하면 제사장은 그 집 문으로 나와 그 집을 7일 동안 폐쇄하였다가 7일 만에 또 와서 살펴보되, 그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그는 색점 있는 돌을 빼어 성밖 부정한 곳에 버리도록 명하고 또 집안 사면을 긁게 하고 그 긁은 흙을 성밖 부정한 곳에 쏟아 버리게 하고 다른 돌로 그 돌을 대신하며 다른 흙으로 집에 바르게 해야 했다. 만일 돌을 빼며 집을 긁고 고쳐 바른 후에 색점이 집에 다시 생기면 제사장은 또 와서 살펴보되, 그 색점이 집에 퍼졌으면 악성 나병이므로 부정하기 때문에, 그는 그 집을 헐고 돌과 재목과 집의 모든 흙을 성밖 부정한 곳으로 내어가게 해야 했다. 그 집을 폐쇄한 날 동안에 그 집에 들어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집에서 자는 자는 그 옷을 빨고 그 집에서 먹는 자도 그 옷을 빨아야 했다. [48-53절] 그 집을 고쳐 바른 후에 . . . . 그 집을 고쳐 바른 후에 제사장이 들어가 살펴보아서 색점이 집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색점이 나은 것이므로 제사장은 그 집을 정하다고 말하고 그 집을 정결케 하기 위해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취하고 그 새 하나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죽이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과 산[살아 있는] 새를 가져다가 죽인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리며, 새의 피와 흐르는 물과 산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로 집을 정결케 하고 그 산 새는 성밖 들에 놓아 그 집을 위해 속하여 깨끗케 해야 했다. 이상과 같이, 레위기 13장과 14장은 각종 나병환자에 대한 규례와 의복과 집에 생긴 나병에 대한 규례, 그리고 나병이 나은 자를 정결케 하는 규례 등을 기록했다. 본장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완전한 죄씻음이 필요하다. 정결함을 받을 나병환자에게 죽인 새의 피를 일곱 번 뿌린 것이나 산 새를 들에 놓아준 것은 완전한 죄씻음을 상징한다. 우리의 완전한 죄씻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만 가능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모든 추하고 더러운 죄를 깨끗케 하신다(요일 1:7).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다 얻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만 믿고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자. 속건제, 속죄제, 번제의 피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상징한다. 또 정결케 될 나병환자의 귀와 손과 발에 발라진 기름은 성령의 은혜를 상징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만 믿고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자. 성경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밝히 증거한다(롬 3:21-24). 또 성경은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육신의 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갈 5:16).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의 비결이 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만 믿고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확신하고 성령의 은혜와 도우심을 의지하며 간구하자. 셋째로, 우리는 온전한 헌신과 감사와 온전한 순종으로 새 삶을 살자. 번제와 소제는 온전한 헌신과 감사와 온전한 순종을 상징한다고 본다. 또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기름을 바른 것은 거룩한 새 삶의 시작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 몸을 죄의 도구로 쓰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거룩히 드리고(롬 6:12-13),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자(엡 4:22-24).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온전히 드리자(롬 12:1-2). 우리는 헌신과 감사와 순종의 거룩한 새 삶을 살자.본장은 나병에 관한 법이다. 이것은 위생적 규례인 동시에 영적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이사야 강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8:11-12]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 . . .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 즉 강한 감동으로 그의 뜻을 선지자 이사야에게 알게 하셨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강하고 그 영향이 너무 크므로 하나님께서는 강한 감동으로 선지자를 교훈하신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감동하셔서 이 세대와 싸워 이기게 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의 길로 행치 말라고 교훈하셨다. 그는 그에게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생각지 말고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12절에 두 번 나오는 ‘맹약한 자가 있다’는 말의 뜻은 불분명하다. ‘맹약한 자’라는 원어(케쉐르)는 ‘공모(共謀), 모반(謀反)’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한 것 같다. 그러나 12절 후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맹약한 자 혹은 공모(共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아람과 동맹하여 형제 유다를 치려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 연합군의 침공, 그들의 공모는 유다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13-15절]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 . .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개인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나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하나님께서 홀로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동맹이 위협적이고 두려운 일이지만, 유다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유다는 오직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역사상 경건한 성도들은 다 그러하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풀무불과 사자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의지하고 소망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즉시 부언(附言)하시기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적 유다 백성에게는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되실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절정적으로 드러났다(벧전 2:8). [16-18절]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 . . . 이사야는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그의 제자들 중에 봉함하라고 말한다. ‘싸매며 봉함한다’는 것은 보존한다는 뜻인 동시에 감춘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향해 낯을 가리우시지만, 이사야는 하나님만 바라본다. 그는 세상 풍조와 여론까지도 역행하며 살아야 했다. 그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외로운 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이 가야 할 길이다. 이사야는 또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의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의 첫아들 ‘스알야숩’은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뜻을 가졌고, 둘째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노략이 속히 임한다’는 뜻이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계시의 말씀을 잘 보존해야 했다. 그 말씀은 유다 백성에게 지침이 되고 소망이 될 것이었다. [19-22절]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 . . . 이사야는 특히 신비주의적, 은사주의적 거짓 선지자들에 관해 경계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고 하였다. 선지자 이사야가 사역하던 시대에 유다 사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는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 즉 신비주의적, 은사주의적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는 단호하게 말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한다’는 원문(아쉐르 에인-로 솨카르)은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다’는 뜻이다(KJV, NASB).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준은 율법과 증거, 곧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뿐이다. 기적은,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는 목적으로 어느 기간 동안 주셨던 것이었다. 기독교는 결코 기적을 추구하거나 기적을 의존하는 기적주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사는 종교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결심하고 힘쓰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 곧 성경 중심으로 살지 않는 자는 그 속에 진리의 빛, 곧 참된 지식이 없는 자이다. 이사야는 계속 말하기를, “[그들은]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노하여서] 위를 보며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원문, NASB, NIV)고 하였다. 거짓된 신비주의에 빠져 거짓된 것을 의지하고 그것들에게 묻는 자들은 결국 방황하고 곤고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환난과 고통의 흑암에 떨어질 것이다. 이사야 8:11-22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섭리자이시다. 그는 개인의 생사화복과 사회의 흥망성쇠를 홀로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만 우리의 의지할 자이시며 우리의 참된 피난처이시다.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마 10:28), 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고 하셨다(마 24:6).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참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만 붙들자.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이다.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 역사적 기독교, 곧 옛신앙을 굳게 붙들자. 특히 오늘날 불건전하고 거짓된 신비주의, 은사주의가 난무하여 성도들을 유혹한다. 기독교는 신비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증거했다(고전 1:22-23). 우리는 은사추구적, 은사의존적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의 바른 교리를 믿고 바른 생활교훈을 따라 살자.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했다(딤후 4:3-4). 오늘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라고 생각된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경 말씀을 붙들자.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옛 길을 참고하면서 바로 믿고 바로 사는 신앙생활을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