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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목사

2014년 1월 7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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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우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은 모든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신념이다. 누구든지 무엇을 주장하려면 성경에 근거해서 주장해야 하고 누구든지 무슨 이의를 제기하려면 성경에 근거해서 제기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목회 전반, 목사의 설교나 지교회 혹은 전체 교회의 모든 활동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우리는 성경을 제쳐놓고 무슨 활동을 계획하거나 수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성경 명칭은 맨 처음 단어인 베레쉬스 (‘태초에’)이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 기원)라는 말은 헬라어 70인역에 따른 명칭이다. 창세기는 과연 기원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는 세상의 기원, 인류의 기원, 결혼의 기원, 죄의 기원, 출산의 기원, 제사의 기원, 살인의 기원, 죽음의 기원, 심판의 기원, 언약의 기원, 나라들의 기원, 이스라엘 백성의 기원, 전쟁의 기원 등이 담겨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이다. 예수께서는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할례의 규례를 모세가 준 율법이라고 말씀하셨다(요 7:23). 또 원어 성경에서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가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은 두 책이 연결된 내용임을 나타낸다. 창세기는 출애굽기 이후의 책들의 배경으로서 필요했다. 이 일을 위해 모세는 적합한 때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또 창세기 50:10-11의 “요단강 건너편”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저자가 요단 동편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세의 저작성에 맞다.

창세기가 한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다음 두 사실에서 보강된다. 첫째, 히브리어 톨레도스가 반복해 사용되었다. 이 말은 한글개역성경에서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 (10:1; 11:10, 27; 25:12), ‘약전(略傳)’(37:2) 등으로 번역되었다. 둘째, 선택되지 않은 조상의 족보나 역사가 선택된 조상의 족보나 역사보다 먼저 기술된다. 가인이 셋보다, 야벳과 함이 셈보다, 롯과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에서가 야곱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이 사실들은 창세기가 한 사람의 저작임을 나타낸다.

창세기는 인류의 초기 역사(1-11장)와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들에 관한 역사(12-50장)이다. 천지 창조,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첫 명령, 첫 사람의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 홍수 심판, 유황불비 심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선택과 언약, 메시아 예언, 열국의 복에 대한 예언 등에서 특히 하나님의 주권 진리가 잘 증거된다.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angenscheidt 

Karl Feyerabend, Langenscheidt's Pocket Hebrew Dictionary to the Old

Testament.

Holladay 

William L. Holladay, A Concis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 Faussett, Brown의 주석.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NBC

The New Bible Commentary. IVP. 

 

 

 

내용 목차

1장: 천지 창조

2장: 사람 창조

3장: 타락

4장: 가인과 아벨

5장: 아담의 자손들

6장: 방주를 만듦

7장: 홍수 심판

8장: 방주에서 나옴

9장: 홍수 직후의 일들

10장: 노아의 자손들

11장: 연합과 분리

12장: 아브람을 부르심

13장: 롯과 헤어짐

14장: 롯을 구출함

15장: 믿음의 의

16장: 하갈과 이스마엘

17장: 할례(割禮)

18장: 하나님의 나타나심

19장: 소돔과 고모라의 성의 멸망

20장: 아내를 빼앗김

21장: 이삭과 이스마엘

22장: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23장: 사라의 죽음

24장: 이삭의 아내를 택함

25장: 이삭의 두 아들

26장: 이삭이 그랄에 우거함

27장: 야곱이 축복을 가로챔

28장: 야곱의 꿈과 서원

29장: 야곱의 하란 생활--결혼

30장: 야곱의 하란 생활--재산

31장: 고향으로 돌아감

32장: 얍복 강변에서의 씨름

33장: 형 에서를 만남

34장: 디나 사건

35장: 벧엘로 올라감

36장: 에서의 자손들

37장: 요셉이 팔림

38장: 유다와 다말

39장: 요셉의 고난과 형통

40장: 죄수들의 꿈을 해석함

41장: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42장: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옴

43장: 형들이 베냐민과 함꼐 다시 옴

44장: 베냐민을 남겨 두려함

45장: 요셉이 자기를 알림

46장: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감

47장: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 거함

48장: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

49장: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예언함

50장: 야곱과 요셉의 장례식

 

 

 

1장: 천지 창조

1-5절, 첫째 날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본절은 단지 1장 전체에 대한 제목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실제적 시작을 증거한다. 그것은 원문 2절에 히브리어 라는 말에서 확증된다. 그 말은 ‘그런데’라고 번역될 수 있다. 1절의 말씀이 단지 제목이라면, 2절은 ‘그런데’()라는 말로 시작될 수 없을 것이다.

‘태초에’(베레쉬스)라는 말은 ‘맨 처음에’라는 뜻이다. 그것은 시간의 시작을 가리킨다.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 즉 존재 세계의 근원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계셨고 그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라는 히브리어(엘로힘)는 복수명사 형태이다. 이 말은 때때로 이방의 신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출 23:13; 왕하 18:33 등). 그러나 이 복수명사의 형태가 유일하신 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히브리어에서 복수명사는 복수 동사를 취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을 가리킬 때 항상 단수 동사를 취한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 복수명사 형태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이 크심을 나타내며 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암시할 것이다.

본절의 ‘천지’는 우주 공간과 땅의 원소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다음 몇 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창조된 천지는 아직 원시 상태에 있었다.

‘창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단어로서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무엇을 만드셨음을 잘 나타낸다. 사람은 이미 있는 재료로 집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든다. 재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또 사람은 이미 있는 자연법칙을 터득하여 전기도 발명하고 컴퓨터도 발명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 외에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 그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다(롬 4:17).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하나님 대신에 물질이 있지 않았다. 물질은 근원적 요소가 아니다. 물질은 영원하지 않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된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근원이시다. 그가 모든 것을 만드셨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진리이며 가장 중요하고 큰 진리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계신 자’라고 계시(啓示)하셨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 . .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은 ‘있다, 존재한다’는 단어(하야)에서 나온 말로서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을 나타낸다.

시편 90편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기도하기를,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다(시 90:1-2). 이사야 40:28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렀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는데(계 22:13) 그것은 그의 영원하심을 나타낸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水面)에 운행하시니라.

본절은 원문에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것은 ‘그런데’라고 번역될 수 있다. 본절은 창조된 천지의 원시적 상태를 묘사한다. ‘혼돈’이라는 원어(토후)는 ‘형태가 없음, 혼돈, 공허’ 등의 뜻이며, ‘공허’하는 원어(보후)는 ‘텅 비어 있음’이라는 뜻이다(BDB). 창조된 땅은 아직 형태가 없고 텅 비어 있었다.

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깊음’이라는 원어(테홈)는 바다의 깊음을 가리키는 말이며(시 104:6), 이어서 ‘수면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깊음은 물로 뒤덮인 땅이나 수증기로 가득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피조 세계에서 기본적 요소인 물은 창조된 천지의 초기 상태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어두움이 천지에 가득하였다. 빛이 창조되기 전까지 온 우주는 캄캄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영께서는 그 물 위에 운행하셨다. ‘수면에’라는 원문은 ‘그 물(함마임) 위에’인데, ‘그 물’은 앞에 나오는 ‘깊음’(테홈)을 가리키는 것 같다. 땅과 우주 공간은 물과 수증기로 가득한 상태이었던 것 같다. 그 창조 사역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물 위에 운행하고 계셨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우리의 구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어떤 이들은 본절이 천사의 타락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땅이 천사의 타락으로 혼란하고 공허해졌다고 추측한다. 그러면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천지 창조의 사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천지 회복의 사건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장의 구조상 1절은 첫째 날 안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창세기 1-2장과 출애굽기 20:11은 천지 창조가 엿새 동안에 된 것을 증거하며, 이것은 천사 세계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 세계의 기원을 말한다고 본다. 또 창세기 1:31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은 천사의 타락이 천지 창조의 제6일 이전에 있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 같다.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원문은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된다. 창조된 천지가 아직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고 어두움이 가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빛을 만드셨다. 본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이나 나온다. 요한복음 초두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계셨던] 말씀(로고스)이라고 불리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거되었다(요 1:3).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일하셨다. 그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시다. 인간의 말도 힘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그러하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풍성하게 기록되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며 이제는 한 책의 종교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근거이며 권위이며 내용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과 위로와 힘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빛을 만드셨다. 그는 어두움의 세계에 밝은 빛을 주셨다. 빛의 정체는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는 대표적 빛인 태양빛 아래서 불빛이나 전기 빛을 보며 살고 있다.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빛 가운데서만 드러난다. 빛이 있어야 만물의 색깔도 있다. 어두움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검정색일 뿐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요일 1:5) 하나님의 세계는 빛의 세계이다. 성경에서 어두움은 무지와 죄, 슬픔과 불행을 상징하고, 빛은 지식과 의,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기쁨과 행복이 기대되는 세계이었다. 장래의 천국도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세계일 것이다(롬 14:17).

[4절]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빛이 좋았음을 보셨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창세기 1장에 일곱 번 나온다. 이 말씀은 창조된 천지 만물의 본래의 상태가 선하고 아름다웠음을 증거한다. 창조된 세상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면, 그것은 사람 보기에도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죄와 불행은 본래 상태의 모습이 아니고 사람이 범죄한 후 상태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도 만드셨고 빛도 만드셨다. 빛과 어두움은 이 세상에서만 있다. 천국에는 밤이 없을 것이다(계 22:5). 이것은 교훈적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이것은 세상에 죄와 슬픔과 불행도 있고, 의와 기쁨과 행복도 있을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셨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빛과 어두움은 섞일 수 없다. 그것들은 본질상 서로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무질서를 싫어하시고 죄와 불의를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나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을 뿐 아니라, 의와 불의, 선과 악을 나누신다. 그는 최종적으로 의인과 악인을 나누실 것이다. 마태복음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셨다. 낮과 밤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공간과 땅의 원질, 물, 그리고 빛을 만드셨다. 천사들의 창조도 첫째 날에 두어야 할 것 같다(욥 38:4, 7; 시 148:5; 골 1:16).

본장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육일의 하루가 일상적인 24시간의 하루에 적합함을 보인다. 여기에 하루가 긴 시대를 가리킨다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무의미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고 그것을 기념하는 안식일이 일상적 하루이므로, 다른 육일도 일상적 하루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긴 시대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나 천지 창조의 처음 삼일은 태양 없는 날들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만드셨고 지구의 자전도 아마 시작된 것 같다. 그러나 현재 지구의 빛에 주된 공급원인 태양은 아직 창조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태양이 없이 저녁과 아침을 맞이하였다.

본문은 몇 가지의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인생의 해답이시다. 인간에게는 ‘우주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등의 근본적 질문이 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 있다. 하나님께서 그 대답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 속에 그 대답이 있다. 우리도 모세처럼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1-2)라고 고백하자.

둘째로, 온 우주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물질 세계와 인간 세계는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사도 요한의 증거대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여기에 인간의 바른 위치가 있다. 사람은 피조물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셨다. 어두움은 무질서와 무지와 죄와 슬픔과 불행과 통한다. 그러나 빛은 질서와 지식과 의와 기쁨과 행복과 통한다. 하나님의 세계는 빛의 세계이다. 현재 세상은 사람의 죄로 슬픔과 불행이 많지만, 구원은 의와 평안과 기쁨을 주며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의와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나라일 것이다(롬 14:17).

6-13절, 하늘, 땅, 바다, 식물을 만드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신 천지 창조의 육일 중 둘째 날과 셋째 날에 하신 일을 증거한다. 둘째 날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늘이라 부르셨고, 셋째 날 그는 궁창 아래의 물이 한 곳에 모이게 하시고 뭍이 드러나게 하시며 그것을 땅이라 부르셨고 그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땅에서 각종 식물이 나게 하셨다.

[6-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6절에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는 말씀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고 번역해야 정확할 것이다.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이미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날 그가 만드신 하늘은 우주공간이라고 생각되며 그가 만드신 땅은 아직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또 그가 만드신 원시상태의 천지는 물이 가득하였고 성령께서는 그 물 위에 운행하셨다. 이제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대로 궁창이 창조되었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나뉘어졌다.

‘궁창’이라는 원어(라키아)는 ‘큰 공간’이라는 뜻이다. 궁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궁창 위의 물은 무엇이며 궁창 아래의 물은 무엇인가? 궁창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좁은 의미의 궁창은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본장 20절은 거기에서 새들이 난다고 말한다. 구름은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 것인데, 낮은 구름의 높이는 해면에서 1.8km 미만이고 높은 구름의 높이는 10km 혹은 18km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1) 그러므로 땅과 구름 사이 공간인 궁창 위에는 많은 물들이 있다.

땅으로부터 100km 정도까지를 대기권 즉 공기가 있는 공간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공기의 99% 이상이 있다고 한다.2) 과학자들에 의하면, 대기권도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3) 그 중 맨 아래 층인 대류권에 구름들이 있지만, 대기권 전체에 땅에서 80km 높이까지의 공기 중에 평균 3.12%의 수증기가 있으며, 대기 중 수증기의 부피는 약 13,000km2, 무게는 약 14조 4,560억 톤이라고 한다.4) 참 많은 양이다. 또 바다와 육지에서 증발하는 수증기 양은 연간 약 519경 톤이며 이것은 1초 당 약 1조 6457억 톤이 된다.5) 이 수증기들은 비와 눈이 되어 땅 위에 내린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과연 궁창 위에 막대한 양의 물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성경에서 궁창은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뿐 아니라 하늘 공간 전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궁창은 하늘(솨마임)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이 하늘은 1절에서 언급된 하늘과 구별이 없는 것 같다. 또 본장 14절과 17절은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때의 궁창은 구름 아래의 낮은 공간으로서의 하늘이 아니고 높은 하늘이다. 달은 지구로부터 38만km 떨어져 있고, 해는 지구로부터 1억 5천만km 떨어져 있고, 별들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있는 궁창은 우주공간과 동일한 의미로 보인다. 이렇게, 궁창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보인다. 좁은 의미로는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우주공간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9-10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절과 2절은 땅과 물이 첫째 날 창조되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셋째 날 단지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땅이 제 모습을 드러나게 하신 것뿐이다. 형태가 없고 텅 비어 있던 땅은 이제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또 바다도 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거대한 공과 같다. 지구의 볼록 나온 배를 적도라고 부르는데 그 둘레는 약 4만 75km이며 거기에서 지구의 중심까지의 거리는 약 6,378km라고 한다. 지구의 무게는 약 6섹스틸리온 톤이라고 하는데, 섹스틸리온은 10의 21제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큰 공과 같은 지구는 팽이처럼 돌고 있는데(이것을 자전이라 함), 한 바퀴 도는 시간이 하루 즉 24시간, 정확히 말하면 23시간 56분 4.09초이다. 또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서도 돌아가고 있는데(이것을 공전이라 함), 그것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이 1년 즉 365일, 정확히 말하면 365일 6시간 9분 9.54초라고 한다.

물이 한 곳으로 모이며 이 거대한 지구는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지구에는 높은 산들도 있고 낮은 언덕들도 있으며 넓은 평원들도 있고 깊은 골짜기들도 있다. 흔히 지구에는 여섯 개의 큰 대륙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이 그 여섯 대륙이다. 이것을 육대주라고 말한다.

이 지구에는 더운 곳들도 있고 추운 곳들도 있다. 지구에서 제일 더운 곳은 섭씨 58도나 되고 제일 추운 곳은 섭씨 영하 88도나 된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세 개의 층으로 되어 있으며6) 세 번째 층 즉 가장 중심층인 중심핵의 중앙에는 섭씨 약 5,000도의 뜨거운 불이 있다고 추측한다.

물들은 모여 바다를 이루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가 가진 물의 총량은 약 1억 3,600만km2이며 그것은 지구 전체를 약 2.7km 깊이로 덮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7) 지구가 가진 물의 97.2%는 바닷물이다. 바다 중 대륙에 인접한 곳은 얕지만, 멀리 나가면 깊어지는데 깊은 바다는 보통 깊이가 5-6km나 된다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깊은 바다는 깊이가 약 11km라고 한다. 흔히 지구에는 다섯 개의 큰 바다가 있다고 하는데,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빙양, 북빙양 등이 그것이다. 여섯 개의 대륙과 합하여 5대양 6대주라고 부른다. 땅과 바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이다.

[11-1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또 그 날 하나님께서는 식물들을 창조하셨다. 식물들은 세 부류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풀(데쉐, grass)이요, 둘째는 씨 맺는 채소(에셉, herb)이며, 셋째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츠, tree)이다. 물론 이 세 부류 안에 수많은 종류의 풀들과 채소들과 나무들이 있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상에 식물은 35만종 이상이라고 한다. 그 중 반 이상은 꽃을 피우는 것들이다.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 가장 작은 것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규조류(diatom)라는 것이 있고, 가장 큰 나무는 키가 88m이며 너비가 9m라고 한다. 나무의 수명은 길어서 가장 오래된 것은 4-5,000년된 것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3번이나 언급됨), 즉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만드셨다. 또 그 식물들은 그가 보시기에 좋았다. 식물의 세계는 아름다운 다양성을 지닌 세계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둘째 날과 셋째 날의 창조 사역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세상은 광대하고 오묘막측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땅은 광대한 우주의 작은 한 지점이다. 광대한 하늘, 광활한 땅, 신비한 바다를 갖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이 크고 오묘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지혜를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의 눈을 높이 뜨자.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자. 그리고 이 광대한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우리 하나님 만세.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 또 각종 식물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들이었음을 다시 생각한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자연만물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 문제이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한 것이 문제이다. 도덕성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다. 죄가 문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과 산과 들판들과 꽃들과 나무들과 풀들은 아름답건만, 성경의 증거대로 사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필요한 일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고 새 사람이 되어 선하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양성을 가진 세상을 만드셨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존중하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획일주의는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이 아니다. 식물 세계에 다양성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도 다양한 재능과 취미와 기술과 직업을 주셨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 있고 그가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와 직분에 충실하자.

14-19절,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심

[14-1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장엄한 천지 창조의 육일 중 넷째 날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 ‘하늘의 궁창’은 땅에서 볼 때 높은 우주 공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로 “징조들과 계절들과 날들과 해(年)들”을 이루게 하셨다. 또 그는 그것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게 하셨다. 그는 두 큰 광명(마오르 빛을 발하는 물체=발광체)을 만드셔서 큰 것 즉 해는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것 즉 달은 밤을 주관하게 하셨고 그것들로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셨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해와 달과 별들은 참으로 신기한 창조물들이다. 혹은 태양은 빛을 발하는 거대한 공 같은 가스 덩어리로서 수소 75%와 헬륨 25%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태양은 직경이 약 139만km로서 지구보다 약 109배 크고 달보다 약 400배 크지만, 달보다 400배나 멀리, 즉 지구에서 약 1억 5천만km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달보다 작게 보인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태양은, TNT 1메가톤 즉 100만톤급의 원자탄을 1초에 1,000만개씩 계속 터뜨리는 것과 같은 가스 폭발을 함으로써 그 열과 빛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표면 온도는 섭씨 약 5,500도, 그 중심 온도는 섭씨 약 1,500만도라고 한다.

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는 큰 물체이다. 달의 크기는 직경이 약 3,476km로서 지구의 4분의 1 정도이며 지구로부터 평균 약 38만km 떨어져 있고 타원을 그리며 지구를 돌고 있다. 달에는 공기도, 바람도, 물도 없다고 한다.

태양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돌고 있는 8~9개의 거대한 물체들이 있는데 이것을 행성(planets)이라고 부른다. 과학자들은 지구도 그 행성 중의 하나라고 본다. 행성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별들(stars)과 다르다. 별들은 그 자체에 열과 빛이 있지만, 행성은 그런 것이 없고 태양 빛을 반사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밤하늘에 보면, 행성은 지속적으로 빛나는 물체이지만 별들은 반짝거리는 물체라고 한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약 5천만km) 행성은 지구의 반보다 작은 크기의 수성인데, 표면 온도가 섭씨 영하 193도부터 영상 342도까지라고 한다. 그 다음은 지구보다 약간 작은 금성인데, 태양에서 약 1억km 떨어져 있고 표면 온도가 약 455도의 고온이라고 한다. 금성은 해가 진 후에 서쪽 하늘에서 보이므로 ‘저녁별’이라고도 하고 또 해 뜨기 전에 동쪽 하늘에 밝게 나타나므로 ‘새벽별’ 혹은 ‘계명성’이라고도 하는 행성이다.

그 다음에 태양에서 약 1억 5천만km 떨어져 있는 지구가 있다. 그 다음은 역시 지구의 반만한 크기의 행성인 화성인데, 태양에서 약 2억 3천만km 떨어져 있고 표면 온도는 영하 124도부터 31도까지라고 한다. 그 다음에 있는 목성과 토성은 지구보다 10배나 크며 천왕성과 해왕성은 4배나 크다. 마지막의 명왕성은 태양에서 가장 멀리 있는, 평균 약 60억km나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행성이다. 이 행성들은 다 영하 150도가 넘는다. 햇빛은 그곳까지 약 6시간 걸린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별들을 태양계(solar system)라고 부르는데, 그 직경은 빛의 속도로 반나절쯤 걸리는 셈이다.

별들은 하늘에 멀리 떨어져 있는 빛을 발하는 거대한 공 같은 가스 덩어리들이다. 태양도 하나의 별이다. 그러나 태양 외의 별들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도 지구에서 40조km 이상 떨어져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곳에 가는데 가장 빠른 제트기로도 약 100만년이 걸리는 거리이다. 또 이 별은 가장 먼 별의 거리의 10억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별은 수소 75%와 헬륨 22% 등으로 구성된 가스 덩어리가 불타고 있는 것인데, 온도와 크기에 따라서 노란색, 붉은색, 파란색을 띈다고 한다. 붉은색 별은 온도가 섭씨 2,800도, 노란색 별은 5,500도, 파란색 별은 28,000도이며, 별의 중심 온도는 약 110만도라고 한다. 별들의 크기는 다양해서 태양보다 약 1,000배나 큰 별도 있고, 지구보다 더 작은 별도 있다고 한다.

맑은 날 밤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은 약 3,000개이지만, 과학자들은 하늘에 약 2,000경[2,000억 X 10억] 개 이상의 별들이 있다고 한다. 별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태양과 같은 별 1,000억개 이상으로 구성된 은하수(the Milky Way)가 그것이다. 이 은하수는 직경이 약 10만 광년이며 중앙의 두께는 약 16,000광년이라고 한다. 빛은 1초에 거의 30만km를 가며 빛이 1년간 간 거리를 1광년(光年)이라고 한다. 1시간이면 10억 8천만km, 1일이면 259억km, 1년이면 약 9조 4500억km의 거리이며 그것이 1광년의 거리이다. 그런데 은하수의 직경은 약 10만 광년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과학자들에 의하면, 이 우주에는 은하수 같은 은하(galaxy)들이 약 1,000억개가 있다고 추정한다. 우리가 사는 우주의 크기와 그 별들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고 광대하다.8)

우리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넷째 날 사역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거대한 우주의 주인이시다. 그는 해와 달과 별들을 홀로 창조하셨고 지금도 홀로 주관하고 계신다. 그는 인류 역사상 몇 번 해와 달을 비상하게 운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아홉 번째 재앙으로 애굽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을 주셨고(출 10:21-22), 여호수아가 아모리 다섯 왕과 전쟁할 때, 그는 여호수아의 부르짖는 목소리에 응답하셔서 태양과 달을 얼마 동안 멈추어 머물게 하셨고(수 10:13), 유다 왕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려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3일 만에 병을 낫게 하셔서 성전에 올라가게 하셨고 그 징조로 해 그림자 시계가 10도를 물러가게, 즉 해를 뒤로 물러가게 하셨다(왕하 20:11). 또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기이하게 태양을 운행하신 일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자요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옛날 사람들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였다. 예를 들어, 고대 아프리카의 이집트인들, 아시아의 수메르인들, 북아메리카의 멕시코 원주민 아즈텍 인디안들, 중앙 아메리카 원주민 마야 인디안들, 남아메리카 페루의 잉카 인디안들 등이 그러하였다고 한다.

열왕기하 17: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도 앗수르 나라에 멸망하기 전 이방인들의 풍습을 본받아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였었고, 또 열왕기하 21:3에 보면, 유다의 므낫세 왕과 백성들도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였었다(왕하 21:3). 이것은 바로 10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이었고 하나님을 대단히 노엽게 하는 죄악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해서는 안 되고,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 그것들의 소유주이신 하나님, 그것들을 홀로 운행하시는 하나님,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마땅히 섬기며 그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주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다. 우주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아니다. 사람은 어둡고 광막한 우주 속에 던져져 방황하는 고아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셨다. 그는 이 모든 일을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장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90:1). 또 하나님의 종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고백하였고(시 18:1-2), 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고백하였다(시 23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장하신다.

셋째로 그리고 부수적으로, 우리는 우주의 규칙성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자연 만물은 창조 때로부터 지금까지 오착이 없이 운행되고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의 움직임은 매우 규칙적이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변태무쌍한 존재인지! 하나님의 법은 불변적이며 자연 만물은 그 법을 지키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배반하고 저버렸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우주의 규칙성에서 배워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법을 배워야 한다. 또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신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고 주 예수께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엡 6:24; 계 2:10).

20-25절,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만드심

[20-2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다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물들에 큰 물고기들(큰 바다 동물들, 핫탄니님 학게돌림)과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하늘의 궁창에 나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고기의 종류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과학자들은 물고기(fish) 종류가 약 21,700가지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물고기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물고기에서 제외하는 고래나 바다표범 같은 큰 바다 동물들도 포함한다. 고래는 보통 물고기와는 다르다. 보통 물고기는 아가미로 숨을 쉬고 꼬리에 수직 지느러미가 있고 대부분 알을 낳지만, 고래는 허파로 숨을 쉬고 꼬리에 수평 지느러미가 있고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운다. 또 물에는 악어 같은 큰 동물이나 거북, 게, 조개, 소라 같은 것, 또 낙지, 문어 같은 것도 있다.

물고기 종류는 다양해서 작은 망둑어는 길이가 1.3cm밖에 안 되지만, 고래상어는 길이가 12m, 무게가 14톤(코끼리의 두 배)이나 되고, 청색 고래 같은 동물은 길이가 30m, 무게가 200톤이 된다. 물고기의 수명도 다양해서 숭어는 4년, 철갑상어는 50년, 악어는 56년, 메기는 60년 이상, 그리고 거북은 최고 123년된 것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의 종류들도 다양하다. 과학자들은 새의 종류들은 약 8,600가지라고 한다. 크기가 5cm, 무게가 3g밖에 안 되는 벌새 같은 작은 새도 있고, 키가 2.4m, 무게가 140kg이나 되는 타조 같은 큰 새도 있다. 타조는 알도 1.4kg 정도나 된다. 또한 7,600m가 넘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기러기 같은 새도 있고, 먹이를 잡으려고 내려올 때 시속 320km 이상으로 빠르게 내려오는 송골매 같은 새도 있고, 북극 제비갈매기 같이 북극에서 남극까지 17,700km를 나는 새도 있다. 또 수명이 긴 새도 있는데, 타조는 수명이 50년이고 까마귀는 수명이 69년이라고 한다.

[24-25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생물들을 창조하셨다. 본문은 땅 위의 생물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는 가축(베헤마)이고, 둘째는 기는 것(레메스)이고, 셋째는 땅의 짐승(카예소-에레츠 혹은 이야스 하에레츠)이다.

첫째 부류인 가축은 소, 양, 말, 나귀, 낙타, 돼지, 개, 고양이, 토끼 등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을 가리킨다.

둘째 부류인 기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과학자들은 기는 동물, 소위 파충류 동물을 약 6,000종으로 본다. 물론 그것에는 악어나 거북처럼 물에서 사는 것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외해도 도마뱀이나 뱀 종류만 거의 3,000종에 이르며 그 중에는 비단뱀같이 길이가 9m나 되는 것도 있고 어떤 도마뱀같이 길이가 5cm밖에 안 되는 것도 있다. 또한 거기에 더하여, 개구리나 두꺼비 종류가 약 2,700가지나 된다. 뿐만 아니라, 벌이나 나비나 나방이나 파리를 포함하여 메뚜기, 개미, 바퀴벌레, 거미 등 곤충(insects) 혹은 발이 여섯 개 달린 벌레들은 무려 80만종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셋째 부류인 땅의 짐승은 소위 포유동물 중 집에서 기르지 않는 것들이다. 포유동물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고 새끼를 보호하며 훈련시키고 또 머리털이 있고 체온이 있고 뇌가 발달한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동물들이 약 4,000종이라고 한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땅의 짐승이라는 부류에 속한다. 사자, 호랑이, 곰, 코끼리, 원숭이, 여우, 노루, 사슴, 너구리 등 야생동물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땅의 짐승 중에는 박쥐같이 무게가 2g밖에 안 되는 작은 것도 있고 코끼리같이 키가 7.5m, 무게가 7.5톤이나 되는 짐승도 있고 또 치타같이 시속 110km로 달릴 수 있는 짐승도 있다. 또 짐승의 수명도 다양해서 쥐같이 1년도 못 사는 것도 있고 코끼리같이 60년이나 사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물고기들와 새들과 짐승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역에서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참으로 놀랍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것도 놀랍고, 온갖 식물들을 만드신 것도 놀랍고, 또 각종 바다 짐승들과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과 물에 사는 온갖 생명들을 만드시고 공중에 나는 각종 새들을 만드시고 가축들과 땅에 기는 각종 생명체들과 땅의 짐승들을 만드신 것이 놀랍다. 이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나타낸다. 창조자 우리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은 피조 세계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마땅히 창조자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촬스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을 진리인 양 믿는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정한다. 진화론은 세상에는 처음부터 물질이 있었고 어쩌다가 물질에서 생명체가 발생했고 가장 단순한 생명체로부터 점차 복잡한 생물체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은 식물세계를 포함하여 물고기들과 새들과 짐승들은 다 한 생명체에서 진화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쉬운 말로, 사람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사람과 다른 피조물들의 근본적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진화론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사역을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에 불과하다. 진화론에 대한 객관적 과학적 증거는 없다. 단지 가설들이 있을 뿐이다. 더욱이, 진화론은 무신론적 사상이요 허무하고 비도덕적인 사상이다. 거기에는 사람과 짐승 간의 구별이 없다. 하나님 없는 세계에 사람의 가치나 도덕적 선과 의의 근거가 있을 수 없다. 진화론은 그것들을 다 부정하는 허무하고 비도덕적인 사상이다.

창세기 1장은 ‘각기 종류대로’ 혹은 ‘[그] 종류대로’라는 말을 열 번이나 반복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식물들과 모든 동물들 곧 새들과 물고기들과 땅의 짐승들을 각기 종류대로 만드셨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각 생물들은 각각 다르게, 즉 각각 그 존재의 목적과 방식이 다르게 창조되었다. 이 사실은 진화론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자이시다. 그의 창조 사역은 존재 세계의 시작이요 하나님은 존재 세계의 모든 문제의 대답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음미하며 확신하고, 창조자 하나님께 합당한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

둘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본문에는 창조된 세상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두 번 나온다(21, 25절). 창세기 1장 전체에는 일곱 번이나 나온다(4, 10, 12, 18, 21, 25, 31절). 식물계에 가시와 엉겅퀴가 난 것은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은 그에게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창 3:18). 사람의 범죄로 동물 세계도 악화되었다. 물질세계 자체가 악하거나 저급한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의 죄가 나쁜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본래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이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람들은 사나운 짐승과도 사이좋게 지낼 것이다. 이사야 11:6-8,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우리는 천국에서 이처럼 변화된 삶을 살 것을 믿고 기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사역의 놀라움도 깨달아야 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이 거대한 우주와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 그는 우주만물을 운영하시는 뛰어난 경영자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지키시고 기르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4:10-15, 25-29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다(마 6:26, 28-30).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께서 또한 온 우주와 만물을 섭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창조하신 세상을 친히 보존하시고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위대하신 경영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에만 순복하자.

26-31절, 사람을 창조하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육일 중 여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가축들과 땅의 짐승들과 땅의 기는 것들을 창조하셨고 또 사람을 창조하셨다.

[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땅의 동물 중 하나이거나 원숭이 같은 저급한 동물로부터 진화(進化)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조하신 존재이다. 26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하고 2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증거한다. ‘만들다’(아사)는 단어와 ‘창조하다’(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창세기 2:7에는 ‘지으신다’(야차르)는 단어도 사용되었다. 그 셋은 다 서로 교대로 쓸 수 있는 동의어(同義語)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경에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암시한다. 창세기 3:22에 하나님께서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러한 암시는 더욱 분명해진다.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단지 명령함으로써 창조되었으나,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의논하심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특별한 창조물이었다. 여기에 사람의 가치성과 존귀성이 있다. ‘형상’과 ‘모양’은 성경에서 특별한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어떤 영적 특성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것을 지식과 의(義)라고 가르쳐준다.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요소는 사람이 범죄함으로 상실된 것이지만,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중생(重生)과 성화(聖化)를 통해 회복된다.

성경이 범죄한 사람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기 때문에(창 9:6; 고전 11:7),9) 하나님의 형상은 지식과 의 외에 어떤 독특한 점들도 포함한다. 그것들은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사람의 인격성과 도덕성 그리고 생물통치권 등을 포함할 것이다. 사람의 눈과 귀와 입과 손발 등 몸의 지체들까지도 그것들이 선한 일을 하는 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여섯째 날에 창조된 짐승은 몸의 구조나 자녀 출산과 양육의 방식이나 지능 등에 있어서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과학자들은 사람을 포유동물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사람은 본질적으로 짐승과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이 바로 그 차이이다. 즉 사람은 지식과 도덕성과 인격성에 있어서 짐승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여기에 사람과 짐승들의 가치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는 남자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창조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방식이었다. 남자와 여자 간에는 기능의 차이와 질서가 있을 것이지만, 그 둘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귀한 존재이었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복과 영광은 동등하였다.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신 일차적 목적은 출산에 있었다. 출산은 하나님의 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땅의 생물들 곧 가축들과 땅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다른 생물들과 같이(창 1:22), 사람은 출산을 통해 땅에 충만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도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 9:1).

오늘날 사람들이 자녀 출산을 짐스러운 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함이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문제들이 많지만, 그 중의 한 문제가 여기에 있다. 인구 폭발을 염려하는 것도 순전히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다. 성경에 밝히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자녀들을 많이 출산하는 것이다.

시편 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箭筒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시편 128: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물론 자녀 출산은 결혼을 전제한 것이다. 오늘날 세속 사회는 결혼 없는 동거(同居)를 허용하는 풍조가 많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명백한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율법은 결혼 관계를 벗어난 모든 종류의 행음자를 사형시키라고 명시하였다(레 20:10-21). 신약성경도 음란한 자나 행음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고전 6:9; 계 22:15).

오늘날 결혼 관계를 벗어난 음행의 풍조는 낙태의 죄악을 사회에 가득하게 만들었다. 산부인과 의원은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드나드는 곳이 되어버렸다. 1980년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행해진 낙태만 약 150만건이었고 우리나라도 비공식적 낙태가 한 해에 100만건이 넘으며 세계적으로 연간 약 5,500만건으로 추산된다고 한다.10)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이 약 1,70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낙태는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무서운 유아 대학살의 죄악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성경 다른 곳들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지만(롬 11:36; 사 43:21), 그 일차적 목적은 본문에 증거된 대로 사람으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생물들을 다스려야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그 목적에서 떠나며 그 임무를 포기하고 오히려 피조물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악을 행하였다.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 속에는 노아 시대의 홍수 후에 허락된 대로 생물을 먹을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된다(창 9:3). 생물은 어떤 이들의 생각처럼 윤회(輪廻)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생명체를 죽이는 살생(殺生)을 금지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축이나 물고기를 감사함으로 잡아먹을 수 있다.

특히,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어떤 개혁신학자들의 말처럼 ‘문화 명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문화라는 영역 속에는 인류의 삶의 물질적, 정신적 모든 부분들이 다 포함된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영역인 농업, 어업, 목축업, 광업을 비롯하여, 옛날부터 공업, 상업, 건축, 교통, 음악, 미술, 정치, 교육, 철학, 법, 군대, 경찰 등의 영역이 발달하였고, 오늘날 사회는 훨씬 복잡해져서 고층 건물, 자동차, 고속도로, 큰 다리, 비행기, 선박, 고속전철, 컴퓨터, 휴대폰, 인터넷 등의 고도의 기술 문명과 대학, 과학, 의학, 약학, 대기업, 은행, 신문, 방송, 언론, 영화와 연극 등의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이 모든 영역이 땅을 정복하는 일들이며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의에 일치하고 인류의 유익을 위해 발전하도록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환경 보전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 같은 자들이 있다. 그러나 환경 보전만 말한다면 사회는 원시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발은 땅을 정복하는 일이다. 단지 그 개발이 다른 이들에게 해를 주는 개발이 되지 않도록 연구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사람은 생태계 파괴를 최소화하고 자연 환경을 고려하면서 땅을 정복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29-31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食物)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사람에게 먹을 양식으로 주셨다. 그는 또 새들과 동물들에게는 푸른 풀을 먹이로 주셨다. ‘푸른 풀’이라는 원어(예레크 에세브)는 ‘푸른 채소’라는 뜻이며 이것은 풀과 씨 맺는 채소(창 1:11-12)를 다 포함한 듯하다. 식물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원래의 양식이다.

창조된 만물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7번이나 나오는데, 그 중에 31절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증거한다. 창조된 세상은 단조롭지 않고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색깔과 조화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늘과 바다, 산과 들은 다 아름다웠다. 하늘에 새들과 들에 식물들, 땅에 동물들과 물 속에 고기들은 다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별들과 그 규칙적 운행, 자연 법칙들과 인간의 신체 구조 등은 신비하고 놀랍다. 사람의 마음의 지혜와 사랑은 신비하고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놀랍고 아름답게 만드셨다.

창조된 세상은 아름다웠다. 아직 죄가 없었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창조된 세상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천사의 타락과 그 꾀임을 받은 첫사람의 탈선이 문제이었다.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세계는 진선미의 세계이었다. 천국의 영광은 그 이상일 것이다.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그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인간 창조에 대한 진리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존귀성을 회복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범죄함으로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그것은 바로 지식과 의이다.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하는 데 사람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교훈대로 힘써 살자. 여러분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먼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으라. 죄는 사람을 무가치하게 만들었으나, 구원은 사람의 존귀성과 가치성의 회복이다.

둘째로, 우리는 남녀의 동등성과 역할을 깨달아야 한다. 남녀는 다 하나님의 귀한 형상이므로 서로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또한 남녀의 역할이 있다. 특히 출산이 하나님의 뜻이며 복인 줄 바로 깨닫고 우리는 출산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세속 사회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결혼을 중히 여기고 음란을 버리고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며 명령인 줄 알고 사모하며 감사히 받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힘써 행해야 한다. 우리는 피조물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오히려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해야 한다. 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문화적 활동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따라 인간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각자의 직업의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연구하고 행해야 할 것이다.


2장: 사람 창조

1-3절,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육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고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케 하셨다.

[1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만물’이라는 원어(콜 체바암)는 ‘그것들의 모든 것들’ 즉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라는 뜻이다. 또 ‘이루니라’는 원어(와예쿨루)는 ‘이루어졌더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일은 육일 동안에 다 이루어졌다.

2절에도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증거하였다. 2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그가 만드신 그의 일을 그치시고 일곱째 날에 그가 만드신 그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시니라”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그가 만드신 그의 일을 그치시고”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일이 여섯째 날까지 다 이루어졌고 일곱째 날에는 그쳤다는 뜻이다. 또 2절에 ‘. . . 일이 다하므로’라는 말이나, 3절에 ‘. . . 일을 마치시고’라는 말은 원문에는 단순하게 ‘. . . 일로부터’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육일 동안 이루어졌다. 그는 제7일에는 그 일을 그치셨다. 천지와 만물 즉 천지에 속한 모든 것들이 육일 동안 다 창조되었다. 그것은 물질 세계의 모든 것뿐 아니라 영의 세계 곧 천사의 세계까지도 창조되었음을 뜻할 것이다. 천사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시편 103:20-22는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증거하였다. 천사들은 창조의 육일 중 아마 첫째 날 창조되었을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창조’라는 말은 최초의 창조물들에게만 적용된다. 그 후에는 사람이나 동식물이나 출산 혹은 번식을 통해 퍼져나간다. 출산이나 번식도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활동이지만, 또 하나님의 행하신 기적들을 포함하여 그의 섭리의 모든 일들이 그의 크신 능력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창조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처음 육일로 다 끝났지만,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지 말고(마 22:29) 하나님의 변함없는 능력을 항상 믿어야 한다.

[2절]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그가 만드신 그의 일을 그치시고 일곱째 날에 그가 만드신 그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시니라.” 3절 하반절에도, “. . . 이는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증거한다. 그 부분도 다시 번역하면,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그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창조 사역을 그치시고 안식하셨다. 그는 육일 동안 창조의 일을 하셨다. ‘일’이라는 원어(멜라카)는 ‘일, 노동, 수고’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많은 일을 하셨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안식한다’는 원어(솨바스)는 ‘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일 동안 천지만물을 만드시는 놀라운 많은 일들을 행하셨고 일곱째 날에는 그 일들을 그치고 쉬셨다.

하나님의 쉬심은 사람의 생활 양식에 본이 되었다. 이것은 사람도 육일간 열심히 수고하면서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상, 하나님은 휴식이 필요하시지 않지만, 사람은 휴식이 필요하다. 특히, 옛시대에 종 같은 아랫 사람들에게는 휴식이 매우 필요하다. 심지어 가축들도 그러하다. 그래서 출애굽기 23:12에는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말씀하였다.

또 하나님의 본을 따라 사람들에게는 7일을 단위로 하는 생활 양식이 나타났다. 우리가 날들을 7일 단위로 나누는 것은 창조 때 하나님의 쉬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에서 비둘기를 내어보낼 때 7일을 기다렸고 또 다시 7일을 기다렸다(창 8:10, 12). 또한 야곱은 결혼할 때 7일 간격으로 두 형제를 아내로 얻었다(창 29:27).

[3절]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그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신 날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셨다. 구약 안식일의 기원이 여기 있다. 이 일은 사람이 아직 범죄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7일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이와 같이, 안식일 계명 자체는 모세의 율법에서 성문화되었지만, 안식일은 창조 때부터 암시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친 음성으로 들려주실 때 안식일 계명을 일곱째 날의 자신의 안식에 근거시키셨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의 안식에 근거되었다. 출애굽기 20:8-11은 이렇게 말씀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구약의 안식일은 복된 날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유익하였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3:12는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말씀하였다. 이사야 58:13-14는 안식일의 유익을 가장 잘 증거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聖日)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聖日)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業)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안식일은 사람에게 짐이나 부담으로 주신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복이었다. 물론 하루의 구별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율법은 심지어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쉬라”고 명한다(출 34:21). 그러나 그것을 지킬 때 받는 영적인, 육적인 유익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이것은 나중에 엄격한 계명과 법이 될 것이다. 그것이 십계명의 제4계명이다. 이 법은 매우 엄격하여 어기면 사형에 해당하였다. 출애굽기 31:14-15는 말하기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하였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참 안식을 예표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8).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안식이 있다.

사도 바울은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증거하기를,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하였다(골 2:16-17).

성도에게는 참 안식이 남아 있다. 히브리서는 교훈하기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히 4:9-11).

이 세상은 수고로운 세상이다. 참 안식은 장차 천국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시편 90편 저자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말한 후,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는데(시 90:10, 13-15),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에서의 안식이 그 응답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비록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그쳤지만, 우리는 그의 능력이 역사상 항상 있었고 지금도 그러함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므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사 40:28-29, 31).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우리는 창조의 능력의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자. 그 능력을 항상 사모하며 힘입자.

둘째로, 참 안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하였다(살후 3:16). 참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안식과 참 평안을 항상 누리자.

셋째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안식을 누릴 것을 기대하면서 세상에서 주일을 자원함으로 지키자. 우리는 이 날을 지킴으로 육신의 휴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성도들의 아름다운 교제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이루는 일을 힘쓰자. 성경은 교훈하기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하였다(히 10:24-25). 우리는 주일을 복되고 즐거운 날, 곧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키자.

4-7절, 아담을 만드심

창세기 2:4 이하는 여섯째 날의 일 중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상세히 기록한다.

[4절]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1장에서 하나님의 명칭으로 ‘하나님’(엘로힘)을 줄곧 사용하던 모세는 본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예호와 엘로힘)을 사용한다. ‘여호와’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보다 2.5배나 더 많이 사용된 명칭이다.11) 그 두 명칭은 다 하나님의 명칭이다. ‘하나님’이라는 원어(엘로힘)는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 같고, ‘여호와’는 그가 영원히 스스로 계심과 사람과 언약을 맺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구약성경에서 두 말은 구별 없이 교대로 사용된다.12) 창조자 하나님은 곧 영원히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창세기에 하나님의 두 명칭이 나오는 것은 두 개의 다른 문서들이 무리하게 합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창세기는 한 사람 모세가 썼다. 물론 모세 이전에도 창조 사건에 대해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들이 있었고 또 어떤 기록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그런 것들을 참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세가 영감 중에 이 내용을 다 썼고 이 내용이 다 진리이며 사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진리의 말씀이다(딤후 3:16).

본문에 ‘대략’이라고 번역된 원어(돌레도스)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는데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 (10:1; 11:10, 27; 25:12), ‘약전’(37:1)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 말은 2장부터 37장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에 걸쳐 사용됨으로써 창세기 저자가 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그가 바로 모세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시대에 책을 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5-6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얼른 보면, 천지만물 창조의 순서가 창세기 1장에서의 증거와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창세기 1장은 천지만물의 창조를 전체적으로 기술하였고, 창세기 2장은 사람 창조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보충적이다. 여섯째 날에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 초목이라는 원어(시아크)는 ‘떨기나무(관목)’를 가리킨다. 초목이나 채소는 다 셋째 날에 창조되었지만, 그것들이 아직 들판에 두루 퍼진 것은 아니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었다.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다. 여기에 ‘사람’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담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그의 형상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生氣)’라는 원어(니쉬마스 카이임)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뜻이다.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영’ 혹은 ‘영혼’의 창조를 가리킨다. 매튜 풀의 말과 같이, 여기에 ‘생명’이라는 말(카이임)은 ‘생명들’이라는 말로서 충만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산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생령’이라는 원어(네페쉬 카이야 )는 ‘생물’ 혹은 ‘생명체’라는 뜻이다. 창세기 1:20, 21, 24에서는 ‘생물’이라고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공중의 새나 바다의 물고기나 땅의 짐승 등을 가리켰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몸과, 생명의 호흡으로 만들어진 영 혹은 영혼이 결합되어 산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몸을 만드셨다는 것은 몸도 소중히 여겨야 할 요소임을 보인다. 몸은 저급하거나 더러운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이다. 우리는 몸이나 물질세계를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은 천사같이 영으로만 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육을 가진 존재이다. 장차 부활 때에도 사람이 영으로만 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영화롭게 변화되는 육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잘 먹이고 잘 보살펴야 한다. 몸을 위해서는 적당한 영양 섭취와 수면과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몸을 학대하거나 몸을 병약하게 하는 것은 건전한 생각이 아니다.

사람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매우 약하다. 넘어지면 살이 찢어지고 터져 피가 난다. 심하게 넘어지면 뼈에 금이 간다거나 부러지기도 한다. 사람의 몸은 범죄한 이후 더욱 연약해졌다. 그래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또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노쇠해진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43은 현재의 우리의 몸을 ‘약한 몸’이라고 표현했다. 또 고린도후서 4:7은 우리 몸을 ‘질그릇’이라고 말하며, 4:17은 우리의 겉사람이 후패하며 낡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여성들의 몸은 연약하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7에는 여성을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몸보다 더 소중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으로 만드신 영 혹은 영혼이다. 군대로 비유하면, 영은 사령부요 몸은 예하부대이다. 영은 생각하고 느끼고 결심한다. 마음은 곧 영의 활동양식이다. 몸은 영의 지시와 마음의 결심대로 행동한다. 사람은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고 또한 영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사람도 영을 가졌다. 사람이 영적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유물주의(唯物主義), 즉 하나님이나 영을 부정하고 세상에는 오직 물질만 있다고 보는 사상은 무지하고 허무하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상이다.

사람은 영이 강건하고 평안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의 건강을 위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사람의 영의 평안은 하나님 안에 있다. 죄는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의의 길을 걷는 자의 심령은 항상 평안하다.

사람의 영은 몸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면 몸도 평안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로운 삶 가운데서 심령으로 평안하고 강건할 때 몸도 건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3:7-8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했고, 잠언 18:14는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다.

사람은 영과 육의 두 요소가 결합된 존재이며 그 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다. 또 그 두 요소는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의 평안도, 몸의 건강도, 우리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신명기 32:39에는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고 했고, 또 출애굽기 15:26에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임을 알고 몸도 소중히 여기자.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학대하지 말고 잘 먹이고 보살펴야 한다. 적당한 영양 섭취와 적당한 수면과 적당한 운동은 몸을 위해 선한 일이며 그런 것을 낮추어 볼 것이 아니다. 특히 남자는 여성의 몸이 연약함을 알고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이 몸보다 더 귀함을 알고 영의 건강을 위해 힘써야 한다. 죄로 죽었던 영이 중생하였다. 이제 영의 건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고 계명을 순종하며 죄 짓지 않고 의롭게 살 때 얻는다. 사람은 밥만 먹으면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그 말씀을 통하여 평안과 힘과 용기를 얻는다. 또 우리의 영은 육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했고 또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몸도 영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몸도, 영도 다 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경건하게 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갈 5:16), 또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한다(딤전 4:7-8). 우리는 경건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8-17절, 에덴 동산에서 주신 명령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을 거기에 두셨다. ‘동방의’라는 말은 에덴 동산이 이스라엘 땅 혹은 모세가 글을 쓴 광야에서 볼 때 동쪽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에덴 동산은 실제의 장소이었다. 에덴이라는 원어는 ‘사랑스러움,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그곳은 아름다움과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었다. 인류 창조 초기에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아름답고 복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실 것이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시며 그가 창조하신 세계는 아름다운 세계이었다. 그가 만드신 나무들은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이었고 먹기에 좋은 열매들을 맺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사과와 포도, 복숭아, 감 등 다양한 과일들을 맺었을 것이다. 과일과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음식들이다.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이것들은 실제의 나무이었을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그것을 먹으면 건강하고 영생할 만한 열매이었던 것 같다. 범죄한 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조치하셨다. 그 나무는 영생이 있음을 암시한다. 천국에도 생명나무가 있을 것이다(계 22:2). 한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을 시험하는 나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를 두고 사람을 시험하실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선이 되고 순종치 않으면 악이 됨을 알게 될 것이다.

[10-12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에덴은 높은 지대이었다. 거기에는 강들의 발원지인 샘이 있었다. 강이 에덴에서 시작되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 에덴 동산에서 갈라진 네 강들의 묘사는 에덴 동산이 실제적 장소이었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진실한 내용이다. 성경에서 비유와 상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역사적 서술을 비유적,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다.

첫 번째 강은 비손이다. 본문은 비손강이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비손강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하윌라 땅은 아프리카 동부의 이디오피아 지역이다. 창조 이래로 지구의 지형에 대변화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윌라’라는 이름은 함의 손자, 구스의 아들 중에도 있고(창 10:7), 셈의 6대손 중에도 있다(창 10:29). 베델리엄은 그 정확한 뜻을 모르나 아라비아역이나 다수의 유대교 랍비들은 그것을 ‘진주’라고 보았다.

[13-14절]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우리는 둘째 강인 기혼강의 정확한 위치도 모른다. 그 강이 구스 온 땅에 둘렸다는 표현은 나일강을 생각나게 한다. 구스는 오늘날의 이집트와, 수단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반면, 다음에 언급된 힛데겔과 유브라데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때문에 지형의 대변화를 전제하지 않고는 이 강들의 공통적 근원지를 상상하기 어렵다. 아마 노아 시대의 대홍수 때 지구의 지형에 현격한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셋째 강인 힛데겔강은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는 티그리스강을 가리키고, 넷째 강인 유브라데강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를 관통하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킨다. 이 두 강은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에서 발원하여 이라크로 흐르고 있다. 그것들은 소위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강이다.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다스린다’는 원어(바드)는 ‘일하다, 노동하다, 가꾸다, 경작하다’는 뜻을 가진다. 사람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동산을 가꾸며 경작하는 일, 곧 농사짓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담에게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노동은 저주의 결과가 아니었다.

‘지키게 하셨다’는 말은 악한 자의 침입을 예상하는 말이다. 얼마 후 아담은 사탄의 시험을 받을 것이다. 사탄의 타락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고 단지 얼마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높으신 뜻 가운데 사탄의 타락을 허락하셨다. 아담은 에덴 동산을 잘 지켜야 했다.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그 동산의 복락의 상태를 잘 지켜야 했다.

[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한가지 명령을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첫명령이며 최초의 율법이며 시험하는 명령이었다. 그 명령은 허용하는 것, 금지하는 것 또 엄숙한 경고를 포함했다.

허용하는 것은 그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자유로,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이었다. 아담에게는 그 동산에서 나는 무슨 과일이든지 따먹을 자유가 있었다. 그는 먹는 즐거움을 누릴 자유가 있었다. 먹고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금지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쉽게 보였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허락하시고 한가지만 금하셨다. 사실, 그는 무엇을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시요 사람은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할 자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사람을 시험하는 의도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책임 있는 존재로 대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계로 만들지 않고 인격적 존재로 만드셨다. 사람은 무엇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 즉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었다. 사람은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원적 순종을 요구하셨다. 순종은 선이 되고 불순종은 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엄숙한 경고도 포함하였다. 그 금지된 과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의미하였다.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우주적 철칙이다. 순종은 생명이요 불순종은 죽음이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과장된, 헛된 경고가 아니고 참된 경고이었다. 그 경고대로 사람은 범죄했을 때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그 죽음은 영적 죽음, 육신적 죽음, 영원한 죽음을 다 포함한다. 영적 죽음은 그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참 평안을 잃어버리고 마음의 불안과 공포와 고통 속에 사는 것이며, 육신적 죽음은 육신이 늙고 병들고 연약하다가 마침내 죽는 것이며, 영원한 죽음은 영육이 함께 지옥 불못에 던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 속에는 또한 영원한 생명이 암시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정녕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영생은 또한 에덴 동산 가운데 있는 다른 한 나무인 생명나무를 통해서도 암시되었다. 성경 전체가 영생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요 5:39). 성경은 영생을 증거한다.

아담의 범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죄씻음과 영생을 가져온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디도서 1:2-3,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요한일서 5: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처음 명령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르쳐준다. 그 순종의 원리는 신약시대인 오늘날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고 그의 음성을 항상 거역한 데 있었다(신 9:6-7).

그러므로 모세는 신명기 10:12-13에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선지자 사무엘도 순종에 대해 증거하기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라고 하였고(삼상 15:22-23), 전도서는 증거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였다(전 12:13).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였고(롬 6:22), 요한계시록은 땅에서 구속받은 14만 4천명의 성도들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계 14:4).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결론적으로 두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처음 명령을 어겼고 아담 안에서 온 인류는 다 죄인들이 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약속된 복음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분은 없는가? 사람이 구원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둘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도 변함 없는 진리다. 인류의 불행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는 데서 왔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바는 죄와 불순종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진리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죄의 낙을 누렸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의 명령과 뜻은 성경에 밝히 증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우며 연구하고 거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자.

18-25절, 여자를 만드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던 날, 처음 여자를 만드신 목적과 방법, 그리고 결혼에 관해 증거한다.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기시며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시기를 뜻하셨다. 아담이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물론 거기에는 자녀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뜻도 있었다. 아담은 결혼을 통해 자녀들을 땅에 출산하여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기쁘신 뜻이었다.

‘돕는 배필’이라는 원어(에제르 케네그도)는 문자적으로는 ‘그 앞에 늘 있는 돕는 자’라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그에게 맞는(혹은 적합한) 돕는 자’(a helper suitable for him)라고 번역하였다. 우리말에 ‘배필’(配匹)이라는 말은 ‘짝’이라는 뜻인데 좋은 번역 같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남자를 위해 항상 그의 곁에 있어서 그와 교제하고 그를 위로하고 그를 도와주는 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짝이 되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리지만, 이 세상에서 그들의 역할은 다르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뜻이었다. 여자가 자신의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에서다. 여성이 좋은 주부가 되는 것은 여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모범적 여인상을 가르친 성경은 잠언 31:10-31이다. 거기에 보면, 모범적 여인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표현하며 그 값은 진주보다 크다고 말한다. ‘현숙한’이라는 원어(카일)는 ‘힘있는, 훌륭한’이라는 뜻이다. 현숙한 아내는 가정에서 자기 남편을 잘 내조(內助)하는 여인 즉 아내로서의 역할을 유능하게 잘 행하는 여인이다. 그 본문에 보면, 그 여인은 “살아 있는 동안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12절),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13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5절), “간곤한[가난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20절),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는” 자이며(27절) 그 자녀들은 일어나 그에게 감사하고 그 남편은 그를 칭찬한다고(28절) 묘사되어 있다.

[19-20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순서를 말하지 않고 단지 사람 창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새와 들짐승도 흙으로 지으신 후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사람이나 짐승의 몸은 다 흙으로 지음받았으므로 죽을 때 다 흙으로 돌아간다(시 104:29; 전 3:20). 아담은 모든 육축과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기에 아담의 지혜가 잘 드러나고 생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된 그의 권위가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생물들은 아담과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그것들 중에는 그에게 돕는 배필이 될 자가 없었다.

[21-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이와 같이, 처음 여자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을 만드실 때처럼 흙을 사용하여 독립된 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여 여자를 만드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잘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별개의 두 인격체를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다른 한 사람을 만드셨다. 즉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환원될 수 있는 자이었다. 그 둘은 한 몸처럼, 한 인격처럼 살아야 할 자들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신 것은 뜻이 있어 보인다. 그는 아담의 머리뼈나 발뼈를 사용하지 않으셨고 그의 갈빗대를 사용하셨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거나 남자의 짓밟힘을 받는 존재가 아니고 사랑의 대상인 것을 잘 나타낸다. 가슴은 사랑의 품이다. 사람이 사랑하면 가슴이 뛰고 사랑에 실패하면 가슴이 아프다. 아내를 구박하거나 학대하는 남편은 자신의 갈빗대를 스스로 치는 자와 같다. 부부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이다.

[23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을 알았다. 그는 자기 눈 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님께서 바로 그의 갈빗대로 그를 위해, 그를 돕는 배필로 만들어주신 아내임을 알았다. 그는 그 여자를 보고 “이 사람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그 여자가 자기 몸의 소중한 한 부분이며 자기가 가슴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알았다. 그는 그를 여자라고 불렀다.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שׁיאּ)라고 하고 ‘여자’는 잇솨(האּ)라고 한다. 이-쉬에게서 나온 그는 잇솨라고 불리운 것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본절은 결혼의 의미를 잘 말해준다. ‘떠난다’는 원어(아자브)는 ‘버린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가지는 효도의 의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준다. 사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와 감독 아래 있으나 커서 결혼한다는 것은 이제 부모 곁을 떠나 독립된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결혼은 부모를 떠나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시키는 부모 입장에서도, 결혼하는 자녀 입장에서도 알아야 할 사실이다. 부모가 결혼한 자녀를 자기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때 갈등이 생긴다. 효도는 자녀 편에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며, 부모가 교훈은 할 수 있어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는 결혼한 자녀 가정의 독립성을 인정해야 하며 자녀도 결혼 후에는 부모의존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결혼은 또한 부부간의 관계에서 보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사랑은 연합이다.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에서 신부는 신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한다(아 2:16; 6:3). 이것이 사랑의 성격이다.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 상대에게 붙잡혀 산다.

결혼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 결혼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보다 더 밀접한 관계이다. 부모와 자녀는 한 몸이 아니지만 부부는 한 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며 그가 정하신 뜻이다. 부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도, 부모보다도, 친구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부부는 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즉 삶의 목적과 방식이 하나이어야 하며 돈주머니가 하나이어야 한다. 결혼의 이러한 원리를 알고 사는 부부들은 복되다.

부부가 한 몸으로 사는 성경적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하면 사랑과 순종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자신의 갈빗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하고, 또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엡 5:25, 28).

또 성경에는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벧전 3:7).

지금부터 3,500년 전, 모세도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기를,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고 하였다(신 24:5). 성경이 남편들에게 교훈하는 바는 아내에 대한 바로 이런 사랑과 배려이다.

한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아내의 의무를 순종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에베소서 5:22-24는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한다.

또한 베드로전서 3:1-6은 교훈하기를,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사랑과 순종으로 부부는 한 몸이 되며 거기에 부부관계의 행복이 있다. 사랑과 순종이 없는 부부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연합의 복을 모를 것이다. 자기 아내를 구박하는 남편과 자기 남편을 무시하는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들이다.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처음 사람들은 순수하였고 그들에게는 아직 죄악된 생각이나 감정이 없었다. 부끄러움은 선악의 비교 의식에서 생기는 것 같다. 아직 악이 없는 상태에서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패된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으므로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본문이 주는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여자는 자신의 본래의 역할을 알아야 하겠다. 여자는 본래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다. 현숙한 여인은 그 남편을 돕는 역할을 유능하게 수행하는 아내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자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이 현숙한 아내, 즉 남편을 돕는 좋은 배필이 되기를 소원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하겠다. 우리가 결혼시키는 부모라면 결혼한 자녀가 독립된 가정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결혼한 자녀라면 이제는 부모를 의존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부부가 된 자들은 사랑과 순종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하겠다. 성경에 교훈한 대로, 남편은 아내를 참으로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참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부의 생활은 참으로 복되다.

 

3장: 타락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근본적 지식은 창조에 대한 지식이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창세기 1, 2장이 증거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그 다음에 알아야 할 근본적 지식은 타락에 대한 것이다. 즉 그는 사람이 본래의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3장은 이것에 대해 증거한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건은 그들이 자녀들을 출산하기 전이었으므로(창 4:1) 그들이 창조된 후 오래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1-6절, 첫 사람의 범죄

[1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첫 사람의 범죄는 뱀의 미혹을 통해 일어났다(고후 11:3). 이 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 하나인 실제적 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이 사용한 도구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9에는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였다. 간교함은 사탄의 특징이다. 간교함은 이중적이고 거짓됨을 말한다. 그것은 성도의 품성에 정반대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진실함과 순진함을 요구하신다(시 15:2; 32:2; 요 1:47). 그러나 사탄은 거짓되다.

사탄과 악령들은 범죄함으로 타락한 천사들이다(벧후 2:4; 유 6). 요한일서 3:8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말한다. 사탄의 범죄는 인류 역사 초기에 일어난 것 같다. 그는 교만함으로 타락한 것 같다(딤전 3:6).13) 이 사탄이 악한 꾀를 내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였고 타락시켰다.

뱀은 여자에게 접근하였다. 그것은 그가 여자에게서 어떤 약점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때(창 2:16-17) 여자가 아직 창조되기 전이었으므로,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을 통해 들었을 것이며 그의 지식과 믿음은 아담보다 약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약할 때 마귀의 공격을 받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베뢰아에서 전도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마음이 고상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행 17:11-12).

뱀이 여자에게 접근한 또 다른 이유는 여자가 남자보다 좀더 감성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대체로 남자보다 더 감성적이며 덜 이성적이고 다른 이의 말에 잘 반응하는 것 같다. 또 뱀은 남자가 여자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약하다는 점도 노렸던 것 같다. 아내가 남편에게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성경도 그런 사실을 증거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왕후가 우상숭배자일 때 왕이 더욱 우상숭배에 빠졌다(대하 21:6). 그러므로 여성도들은 경건한 아내가 되어야 한다.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뱀은 여자에게 물었다. 뱀이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지만, 사탄의 역사로 그렇게 한 것 같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나귀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신 경우가 있고(민 22:28), 또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장차 사탄의 활동으로 우상이 말하는 일도 예언되어 있다.

뱀은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지나친 질문이었다. 뱀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질문을 통해 하와의 생각을 혼란시키고 있다. 사탄은 진리를 혼란시키기를 잘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생각과 논리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바른 생각과 논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3절]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의 지나친 질문에 대해 여자는 지나친 대답을 하였다. 동산 중앙에는 두 개의 나무, 즉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고(창 2:9) 그 중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아야 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만 하셨지 ‘만지지도 말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록한 말씀을 넘어가지 말고 그 말씀에 충실하도록 힘써야 한다.

[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의 말은 확신이 있게 보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거짓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으나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주의 말씀대로, 마귀는 거짓말장이요 살인자이다(요 8:44).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임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이 모든 죄의 원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것이 순종의 길이다. 거짓과 속임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확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딤후 3:13-17).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와의 교만을 부추겼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게 된다. 교만은 불순종의 원인이다. 사람이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다(삼상 15:23).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선을 지우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악이다. 사람은 교만하면 결국 망한다(잠 16:18).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는 뱀의 거짓말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깨어지고 있었다. 그가 그 나무를 본즉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 그 여자는 마침내 그 열매를 따먹었다.

여자는 그 열매를 남편에게도 주었다. 남편은 그것을 받아먹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탄의 계산은 적중했다. 여자가 먼저 범죄하였고(딤전 2:14) 남편은 너무 쉽게 아내의 뒤를 따랐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이렇게 범죄하였고 타락하였다.

이와 같이 에덴 동산에서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시험 기간을 잘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그들만의 불행이 아니고 온 인류의 불행이었다.

오늘날도 세상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미혹이 많다. 사탄은 예수님 당시에 그를 시험하였었다(마 4:1). 예수께서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듯이 원수 마귀가 세상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다닌다고 말씀하셨다(마 13:25, 38-39). 또 성경은,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이 지금도 세상 사람들 속에 활동하고 있으며(엡 2:2), ‘이 세상 신’이라고 불리는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고 말한다(고후 4:3-4).

또 성경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고 말하며(딤전 4:1), 또 이단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예언한다(요일 4:1). 또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징조로서 사탄이 교회를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배교 운동과 거짓된 기적 운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한다(살후 2:9-10). 또 요한계시록은 큰 성 바벨론으로 묘사된 마지막 때의 배교한 교회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계 18:2).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영적인 전쟁과 같다. 주께서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22:31). 우리는 세상 사람과 싸우는 자가 아니요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과 악령들과 싸우는 자이다(엡 6:12). 또 성경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한다(벧전 5:8).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꾀에 빠져 범죄하고 실패한 것처럼, 사탄과 악령들은 오늘날도 사람들을 시험하고 미혹한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게 하는 불신앙의 방향으로,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높이게 하는 교만의 방향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가 되게 이끄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세상을 불경건과 부도덕으로 악화시키고 교회들을 배교와 세속화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마귀의 미혹을 조심하자. 주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마 26:41).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라고 교훈한다. 야고보서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우리가 마귀와 악령들의 미혹이 많은 세상에서 영적 전쟁에 승리하려면, 우리는 영적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한다. 에베소서 6:10-18,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미혹을 받아 범죄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앙하지 말고 교만하거나 불순종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자. 이제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고 의에게 종이 된 자이므로(롬 6:17-18, 22) 성경에 밝히 가르쳐진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고 그 의의 길만 걷자.

7-24절, 첫 범죄의 결과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그 아내는 범죄한 직후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 죄 의식이 생기자 수치감도 따라왔던 것 같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창 2:25) 본래의 순진함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비교적 잎이 넓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하였다.

[8절]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거니시며 사람과 교제하곤 하셨다. 그는 사람과 교제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범죄한 그 날 아담과 그 아내는 서늘한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들은 죄책감과 수치감 때문에 그렇게 숨었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다(사 59:2). 어두움에 속한 죄인은 빛 되신 하나님께 나오기를 꺼린다(요 3:20).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배를 탔을 때 배 밑창에 내려가 자신을 숨기려 했던 요나처럼, 죄인은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한다.

[9-10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선한 목자처럼, 아담을 부르시며 찾으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범죄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이 있다(잠 28:1).

[11-13절]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생긴 수치심이 그가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결과임을 깨닫게 하셨다. 아담은 아내가 그 실과를 주므로 먹었다고 대답하였고, 여자는 뱀이 속이므로 그 실과를 먹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말 속에는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핑계의 정신이 있었지만, 그들이 범죄한 과정은 그들의 말 그대로이었다.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두 가지 저주를 선언하셨다. 첫째는 네가 배로 다니게 되리라는 것이다. 뱀의 발들은 그 후 퇴화하였던 것 같다. 둘째는 네가 흙을 먹으리라는 것이다. 흙이 뱀의 음식은 아니지만, 발이 없는 뱀이 먹이를 먹을 때 흙도 먹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는 하나님보다 뱀을 더 친근히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하였지만, 이제 뱀과 여자는 원수가 될 것이다. 사실, 뱀은 여자의 친구가 아니고 원수이었다. 여자가 범죄한 것은 순전히 그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는 여자를 속이고 그에게서 영생의 복을 빼앗고 영원한 죽음을 준 살인자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사실이다. 사람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 하고 뱀은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파하실 것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셨다”(히 2:14). 이와 같이, 본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처음 주신 메시아 약속이었다.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에게는 두 가지의 징벌이 내려졌다. 첫째는 출산의 고통이다.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는 원문은 직역하면 “너의 고통과 너의 잉태를 크게 더하리니”이다. 여자는 잉태하며 출산하는 큰 수고와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둘째는 남편을 사모하고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사모한다는 말은 바라며 열망하며 욕구한다는 뜻이다. 범죄한 후 여자에게는 무슨 부족이 있는 것처럼 남편을 애타게 사모하는 연약한 마음이 생겼고 또 남편에게는 아내를 지배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17-19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에게 내린 징벌은 세 가지이었다. 첫째는 땅의 저주이다. 아담은 땅의 책임자이며 그의 범죄로 땅은 저주를 받았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땅에는 천재지변과 질병과 병충해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땀 흘리는 수고이다. 아담은 이제 종신토록 수고하며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될 것이다. 땀 흘리며 수고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의 정상적인 삶이 되었다.

셋째는 죽음이다. 사람의 몸은 본래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창 2:7) 범죄한 사람은 그 본래의 흙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람이 범죄치 않았더라면 육체의 죽음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몸은 비록 흙으로 구성되었으나 영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범죄한 육체는 본래의 원소로 돌아가야 했다(전 3:20; 12:7).

본문에 영혼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은 성경의 명확한 진리이다.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마 10:28; 눅 16장) 구약성경도 이 사실을 증거한다. 전도서 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주 예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심으로(마 22:32) 영혼 불멸을 증거하셨다.

[20절]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이며 그를 통해 사람은 번식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죽을 것이지만, 인류는 하와를 통해 번식되고 마침내 ‘나는 곧 생명이요’라고 선언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은 그들의 수치감을 해소시키고 육신의 약함을 보호할 영구적인 옷 이상의 어떤 영적 의미를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이셨고 그 피를 흘리셨다. 짐승 제사가 여기에서 암시되었다. 사실, 죽임을 당해야 할 자는 아담과 하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대신에 한 짐승을 죽이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암시가 있다.

이것은 장차 인류를 위해 죽으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의 대속의 죽음은 죄인들의 수치를 가릴 완전한 의의 옷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나(사 64: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의의 옷을 입혀주셨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범죄하기 전에는 악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선악을 아는 자가 되었다. ‘우리 중 하나같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진리를 암시한다(창 1:26; 11:7; 사 6:8).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심은 타락한 상태로 영생할까 염려하심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람이 영원히 죄인이 되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일 것이다. 물론,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복된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

[23-24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셨고 농사의 일을 하게 하셨다. 24절에는 그를 쫓아내셨다고 표현한다. 범죄한 사람은 에덴 동산에 적합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룹 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 즉 ‘사방을 향해 번쩍이는 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그 후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떤 죄인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본문은 아담의 첫 범죄의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고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저주를 선언하셨고 여자에게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더하실 것을 선언하셨고 아담에게는 땀 흘리는 수고와 육체적 죽음에 대해 선언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의 선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암시하셨다. 그는 장차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말씀하셨고, 또 그가 그들에게 만들어 입히신 가죽옷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암시하셨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우선, 우리는 아담의 첫 범죄의 비참한 결과를 깨닫고 이제는 범죄치 말자. 죄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또 우리는 저주받은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수고와 고난을 달게 받자. 세상에는 수고와 슬픔이 많고 질병과 눈물과 고난이 많으며 죽음이 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온 인류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것은 인생의 정상적 삶이다. 우리는 고난의 이 현실을 달게 받자.

우리는 특히 주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주 예수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다 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의 십자가로 이루신 완전한 의의 가죽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셨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은혜 안에 거하며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이제는 죄 짓지 말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의(義) 중심, 순종 중심, 천국 중심으로만 살자.

 

4장: 가인과 아벨

1-5a절, 가인과 아벨의 제사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得男)하였다 하니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은 아내와 동침하였고 아내는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다. ‘동침한다’는 원어(야다)는 ‘안다’는 뜻으로 ‘성 관계를 가진다’는 뜻도 있다. 아담은 첫아들 가인을 얻었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였다.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원어(에스 예호와)는 ‘여호와의 도움으로’라는 뜻이다.

[2절]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다. 농업과 목축업은 인류 역사의 아주 초기로부터 있었던 가장 오래된 직업들이었다.

[3-4a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원어(미케츠 야밈)는 ‘날들의 끝에서’라는 뜻인데, 상당히 많은 날들이 지난 것 같다. 영어성경들은 ‘시간이 지나면서’(in the course of time)(NASB, NIV)라고 번역한다.

어느 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다. 훗날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곡식 제사 즉 소제는 정당한 제사의 한 방식이었다. 한편,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으며 후에 그것도 모세의 율법에 규정될 정당한 제사 방식이었다.

[4b-5a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 ‘열납한다’는 원어(솨아)는 ‘유의한다, 존중한다.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존중하고 인정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과 그들의 제물에 대해 차별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4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기록한다.

아벨이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첫새끼와 그 기름’이라는 그의 제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이라고 본다.

첫째로, 아벨의 제물은 정성어린 제물이었다. ‘첫새끼’는 짐승 중에 가장 귀한 것을 가리킨다. ‘기름’이라는 원어(켈렙)도 ‘가장 좋은 부분’이라는 뜻이 있다. 민수기 1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소득의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주고 레위인들은 그들이 받은 모든 예물 중 그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다(29-32절). 거기에 세 번이나 나오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원어가 바로 이 단어이며 영어성경들은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신명기 6:5는 우리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명하였다. 잠언 3:9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교훈한다. 아벨은 바로 이런 정신으로 정성어린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둘째로, 아벨의 제물은 피가 있는 제물이었다. 그것은 믿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제사이었다. 아벨은 자신이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며 장차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속(代贖)하며 구원할 구주를 보내실 것을 믿고 바라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면서 입히신 가죽옷을 통해 깨달았든지, 혹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말미암아 받은 진리이었을 것이다. 죄인이 오직 대속하실 구주의 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진리이다(창 8:20; 레 1장; 히 9:7, 12; 10:19; 고전 11:25; 계 13:9). 그러므로 레위기 17:11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하였고, 히브리서 9:22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두 가지 조건을 교훈한다고 보인다. 하나는 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속죄의 피이다. 특히 속죄의 피는 성경 전체에 계시되어 있는 근본적인 진리이다. 죄인은 죽어야 마땅하지만,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아벨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예표이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셨다(마 20:28). 우리는 그의 피로 죄씻음과 거룩함을 얻었다(히 9:12; 10:10, 14).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5b-8절, 가인이 아벨을 죽임

[5b-7a절]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 ‘안색이 변하였다’는 원어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그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엎드려 회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교만하였고 심히 분노하며 얼굴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그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며 그것이 정당치 않다고 지적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는 구절의 원어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열납되지 않겠느냐?”고 번역되기도 한다(Syr, Vg, KJV, NIV). 하나님의 말씀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포한다.

[7b절]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사람이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선과 악,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선을 행치 않으면 악을 행케 될 것이며 악을 피하려면 선을 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큰 죄를 짓는 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4:17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한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원어는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며 너는 그를 다스릴 것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KJV). ‘그의 소원’은 아벨에 대한 소원 즉 아벨을 이기고 지배하려는 소원을 가리키며 또 그는 아벨을 다스릴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14)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 보인다.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그들이 들에 있었을 때 가인은 일어나 그 아우 아벨을 죽였다. 그의 교만과 불쾌함은 분노와 시기심과 미움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살인의 행위로 나타났다. 이것이 인류 역사 최초의 살인 사건이었다.

죄가 전혀 없었던 세상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살인이라는 추한 죄악이 나타났다. 선하게 창조되었던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 속에 이런 무서운 죄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시기와 미움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육신의 일들을 행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갈 5:19-21; 계 21:8; 22:15).

본문은 인간의 죄성을 증거한다. 가인 속에는 교만과 시기심과 미움과 분노가 있었고 그것은 살인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은 모든 죄인들에게 있는 죄악된 성질이다. 우리는 이런 죄악성을 경계해야 한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며 그런 자는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요일 3:15). 본문은 의인의 죽음을 증거한다. 인류의 역사상 많은 무고한 자들, 특히 순교자들의 억울한 피흘림이 있었다(마 23:35; 계 6:9-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9-15절, 가인에게 내리신 벌

[9-10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찾아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거짓말을 하며 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하였다.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벨의 억울한 죽음을 변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지라도, 그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살인 사건을 다 알고 계셨다.

[11-12절]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인에게 징벌을 선언하신다. 그 징벌은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저주는 두렵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내용이었다.

첫째는,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이다. 농사의 수확은 인간 생활에 필수적 요소인데, 땅이 다시 효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물질적인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는, 너는 땅에서 떠돌며 방랑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원어(나 봐나드)는 ‘떠도는 자와 방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사람이 안정이 없이 이리 저리 떠돌며 방랑하고 방황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13-14절]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징벌이 너무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또 그는 장차 떠돌며 방랑하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 이것은 악인들의 두려움이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나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친다(잠 28:1).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그러므로].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그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표를 주어 만나는 자들에게 죽임을 면케 하셨다. 그 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그가 살인자에게 주신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셨다.

본문은 죄의 결과를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은밀한 죄를 다 알고 계셨고 그 죄에 대해 벌하셨다. 가인은 이전같이 땅의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며(물질적 벌) 떠돌며 방랑할 것이며(환경적 벌) 죽음의 두려움을 가질 것이다(심리적 벌). 우리는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16-26절, 가인의 자손들과 셋의 아들 에노스

[16절]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은 하나님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앞을 떠나 나갔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섬기는 일을 멀리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가인의 후손들에게서는 경건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의 아들 에노스 때가 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줄 몰랐다.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 이라는 원어는 ‘방랑, 떠돎’이라는 뜻이다. 그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는 말씀은 에덴 동산의 위치를 추측케 만든다. 만일 에덴 동산이 오늘날 지중해 지역이었다면, 에덴 동산에서 네 강이 발원하였다는 말씀(창 2:10-14)이나 그가 에덴 동편에 거했다는 말씀과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역이 이전에 높은 산악 지역이었다가 후에 지형의 큰 변화로 바다가 되었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17-18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가인은 그 아내와 동침하였고 에녹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인류의 초기에는 가족들 간의 결혼이 불가피하였다. 성경은 꼭 필요한 내용을 선택하여 쓴 역사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들이 많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아담이 창조된 지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고, 그때에는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많은 딸들이 이미 출생되어 있었을 것이다. 가인은 에녹을 얻은 후에 한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불렀다. 그가 성을 쌓은 것은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녹은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22절]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하였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여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는 것 즉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는 하나님의 뜻이다(딤전 3:2). 그러나 라멕은 특이하게 두 아내를 취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절제되지 않은, 악한 육신적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멕의 아들들에게서 다양한 직업이 나타났다. 라멕의 첫째 부인인 아다의 첫아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가 장막에 거한 것을 보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유목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는 유목민들의 조상인 셈이다. 둘째 아들 유발은 수금과 통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는 음악가와 연주가들의 조상이었다. 라멕의 둘째 부인인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 즉 대장장이 혹은 철공업자이었다.

[23-24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그가 그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말했고 가인을 위해 벌이 칠 배일 것이라는 하나님의 긍휼의 배려를 인용하며 자신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가인의 6대손 라멕 속에는, 가인 속에 있었던 악하고 과격한 감정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가인보다도 더 뻔뻔스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25절]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아벨이 죽은 후, 아담은 다시 아내와 동침하였고 하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셋이라고 불렀다. 셋은 하와가 지은 이름이었다. 이라는 원어는 ‘둔다, 놓다’는 단어(쉬스)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이것은 아벨이 죽은 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일 것이다. 창세기 5:3은 아담이 셋을 얻은 것이 그의 나이 130세 때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전 에덴 동산에서의 생활이 얼마 동안인지 모르지만 약 10년 정도만 잡고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성장에 약 60-70년만 잡아도 아벨이 죽은 후 50-60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 될 것이다.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은 아들 에노스를 낳았는데, 그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후반부를 다시 번역하면, “그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더라,” 즉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5:6에 의하면, 셋이 아들 에노스를 낳은 때는 그의 나이 105세 때이었다. 아담이 셋을 낳은 것은 130세 때이며 셋이 에노스를 낳은 때가 105세 때이니, 아담과 하와가 몇 세에 범죄했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범죄한 지 적어도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또 아벨이 살해된 지 상당히 세월이 흐른 후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이다. 범죄한 아담과 그 자손들은 영적으로 매우 무디어져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찾지도 않았다(시 14:1-3; 49:12, 2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가인의 자손들을 통해 인류 사회는 다양화되고 있었다. 가인은 성을 쌓았다. 가인의 7대손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목축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통소 잡은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이었다. 이와 같이, 가인과 그 자손들에게서 건축업, 목축업, 음악가, 철공업 등 다양한 일들이 나타났다. 가인의 자손들에 대한 기록은 셋의 아들 에노스 때의 일과 대조된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성경의 강조점이 있다. 가인 자손들의 문제점은 불경건과 부도덕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고 살인까지 했다. 가인의 자손들은 세상일에는 힘썼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며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각자의 재능과 직업을 따라 일상 생활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따라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해야 한다.

 

5장: 아담의 자손들

[1-2절] 아담 자손의 계보16)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17)

[3-5절] 아담이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18)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19)를 낳았으며 그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6-20절]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12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815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0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84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1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65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83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89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62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1-24절]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31절]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782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969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777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절] 노아가 500세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자손들에 대해 증거하는데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로, 아담의 자손들은 오랫동안 살았고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였다. 그들 중 다수는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전까지, 약 10대에 걸쳐 거의 900세 이상씩 장수하였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다. 아담의 8대손 므두셀라는 969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 아담의 10대손 노아까지도 950세를 살았다(창 9:29).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본래의 몸은 건강하였고 환경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후 사람의 수명은 600세로 그리고 점차 200세 이하까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창 11:10-26). 노아의 아들 셈의 수명은 600세이었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살았다. 홍수 심판 때 지구 대기권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고 그 변화로 인해 사람의 몸이 빨리 노쇠해지기 시작하였음이 분명하다.

홍수 심판 전에, 사람들은 오래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출산하였다.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자녀들은 부모의 외모와 기질을 이어받아 출생하였다. 아담의 자손들의 오랜 수명과 다산(多産)으로 인해 땅에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500세가 되기까지 자녀를 얻지 못한 일도 있었다. 노아는 500세가 되기까지 자녀가 없었고 500세가 된 후에 세 아들을 낳았다. 그들이 세 쌍둥이었는지 아니면 몇 년 간격으로 얻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경은 자녀가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임을 말한다(시 127:3).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사람이 원해도 자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출 23:26; 호 9: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를 허락지 않으신 일은 노아에게 영적으로 큰 유익이 되었음에 틀림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경건하게 훈련시키고 크게 쓰시려는 사람들에게 불임(不姙)의 고통을 주셨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보통 30세 전후에 결혼하였는데(창 11:11-24), 아브라함은 결혼한 지 약 70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이삭도 결혼한 지 20년이 되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다(창 25:21, 26). 한나도 여러 해 동안 자녀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한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사무엘을 아들로 얻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

둘째로, 아담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마침내 다 죽었다. 창세기 5장의 중요한 한 특징은 ‘죽었더라’는 말의 반복이다(5, 8, 11, 14, 17, 20, 27, 31절; 총 8번 나옴). 아담부터 노아의 아버지 라멕까지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다 ‘죽었더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담의 자손들이 다 죽었다.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홍수 심판이 시작되기 5년 전에 죽었고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홍수 심판이 있기 직전이든지 아니면 홍수 심판 때에 죽었다. 노아의 많은 형제들과 사촌들도 홍수 심판 때에 다 죽었다. 홍수 때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뿐이었다.

사람이 죽은 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경고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6-17). 또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선언하셨었다(창 3:19).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말한 뱀의 말 곧 마귀의 말은 거짓이라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사람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왔다. 죄의 형벌이 죽음이라는 것은 성경의 대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했고(롬 6:23), 또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해 사망이 왔다고 했고(롬 5:12), 또 말하기를,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다(고전 15:21).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고 또 죽을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에녹은 예외적으로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고 그는 365세를 살았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21-24절).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오직 에녹에게만 ‘죽었더라’는 말이 빠져 있다. 그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영접되었다.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다(히 11:5). 그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말은 그의 승천을 가리킨다. 그는 후에 엘리야가 승천하였듯이(왕하 2:11), 또 우리 주 예수께서 승천하셨듯이(행 1:9-11), 그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 천국으로 올라갔다. 에녹의 승천은 세상너머에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이 있음을 증거한다.

에녹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본문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두 번이나 말한다. 한마디로, 에녹은 경건한 사람이었다. 대략적으로 말해, 에녹은 아담 후 622년에 출생하여 987년까지 365년간 살았다. 에녹은 아담과 308년 동안 같이 살았고 셋이나 에노스와는 평생 같이 살았다. 경건했던 그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확신했을 것이다.

경건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즐거이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경건한 삶을 가르친다. 시편 1:1-3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된 삶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고 하였다(딤전 4:7-10).

다른 이들의 900년 가까이의 일생에 비하면, 에녹은 365년의 짧은 지상 생애를 살았지만, 본장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 중에 가장 복된 삶을 살았다. 말씀과 기도의 삶,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서 사셨던 삶이요 그가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복된 삶이다.

본장의 내용에서 얻는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28). 시편 127편은 말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다(시 127:3-5). 부모가 자녀들을 많이 낳아 잘 기른다면 참으로 복되다. 디모데전서 5:10은 나이든 여성들의 선한 행실의 한 증거로 자녀를 양육한 것을 꼽았다. 우리는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고 그 일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자.

둘째로, 우리는 영생의 세계를 믿고 소망하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리웠다. 인간에게는 죽음너머의 세계가 있다. 에녹이 올라간 세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계신 세계가 있다. 선지자 엘리야가 올리운 곳이 있다. 주 예수께서 올리우신 곳이 있다.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 있다(히 12:23).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이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라”고 말했다(고후 5:1).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대해 증거하였다(계 21:1-2). 우리는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자.

셋째로, 우리는 에녹의 경건을 본받자. 사도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교훈하였다(딤전 4:8). 우리는 에녹처럼 경건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에 다 들어가자.

 

6장: 방주를 만듦

[1-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할 때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우선, 그들은 천사들을 가리킬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 천사는 본질상 사람과 결혼할 수 없기 때문이며(눅 20:35-36),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에 대해 천사들에게 징벌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징벌하셨기 때문이다(3절).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자손들을 가리켰고, ‘사람의 딸들’은 불경건한 가인의 자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라는 말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경건한, 거룩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사람의’라는 말은 ‘사람에게 속한, 사람의 본성 그대로의’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본문은 가인의 자손에게서는 이미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악이 나타났으나(창 4:19), 이제 셋의 자손들 가운데서도 그런 풍조가 보편화되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일부다처의 풍조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람의 육체적 감정과 욕구대로 행하는 악한 일이었다.

[3-4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일부다처의 풍조에 대해 불쾌해 하시며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LXX, Syr, Vg, Targ)을 영어성경들은 “항상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니”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사람의 죄악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통제되며 이로 인해 사람이 극도로 죄악된 상태에 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그가 심히 부도덕한 상태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120년의 기간을 남겨두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성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고 사람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 즉 ‘거인들’이 있었고 또 셋의 자손들도 가인의 자손들을 취하여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을 낳았다. 그러나 세상은 더욱 부패해져갔다.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죄악은 점점 커 갔고 그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한탄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슬픔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타락과 부패를 원치 않으셨으나 사람들은 스스로 그 길을 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과 새들을 다 멸하기로 결심하셨다. 이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결심이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용납할 수 없으시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아담의 자손들은 누구나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노아도 예외는 아니며 만일 그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죄 가운데 살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멸망을 받았을 것이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9-10절] 노아의 사적(事蹟)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로운 삶으로 증거되었다. 노아는 의롭고 완전한 자이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절 있는 삶으로 나타난다. 또 완전하다는 말은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이런 말들은 절대적인 의미는 아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 세상에 의인이나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들과 여실하게 다른 선한 인격자이었다. 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경건한 삶을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썼음에 틀림없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뜻과 계명을 따르고자 힘썼다. 그것이 그의 의롭고 온전한 삶으로 나타났다.

[11-12절]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패괴하였다. 본문에는 ‘패괴함’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 ‘패괴하다’는 원어(솨카스)는 ‘부패되다, 더러워지다’는 뜻이다. 사람들의 패괴함의 한 특징은 ‘강포함’이었다. 노아 시대에는 강포함이 온 땅에 충만하였다. 세상은 양심과 도덕과 법과 질서가 없고, 힘과 폭력만 있는 공포 사회이었다. 이런 시대적 풍조에 역행하여 노아는 혼자라도 바르게 살았던 것이다. 그는 좁은 길, 외로운 길을 걸었다. 노아는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된다. 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교훈이 있다. 우리는 이 시대가 심히 세속적이고 악할지라도 나 혼자만이라도 바르게 살겠다는 신념으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13-16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사람들의 부패함과 강포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날, 곧 세상의 끝날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120년이나 참고 기다리시며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셨으나, 세상의 도덕적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끝날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중에서도 구원의 계획을 가지셨다. 그는 멸망할 세상으로부터 노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를 뜻하셨고 이 일을 위해 그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방주는 나무로 만든 네모난 큰 배이었다. ‘잣나무’라고 번역된 원어(고페르)는 소나무나 전나무의 일종이라고 한다. 방주의 크기는, 한 규빗을 약 50cm로 보면, 길이가 약 150m, 너비가 약 25m, 높이가 약 15m이었다. 방주는 3층으로 되었고 그 안에는 많은 칸들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50cm 아래로 창문 한 개가 있었고 문은 옆으로 있었다. 방주의 안팎은 역청으로 칠하였다. 역청(피치)은 원유를 증유시킨 뒤에 남은 검은 찌꺼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좋은 방수제이었다.

어떤 구약 학자에 의하면, 방주의 부피는 오늘날 소 20마리나 양 100마리를 실은 짐승운반차 2,000대 분량이라고 하며, 오늘날 양보다 큰 짐승은 290종, 양부터 토끼까지의 크기는 757종, 토끼보다 작은 것은 1,358종이 있다고 하는데, 방주는 이런 동물들 한 쌍씩과 그것들을 위한 충분한 사료를 싣기에 넉넉한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한다.20)

[17-21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氣息)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食物)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食物)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해 땅을 멸하실 것을 선언하셨다. 원문에서는 ‘내가’라는 말(아니 힌니)이 강조되어 있다. 홍수를 일으켜 모든 생명체를 죽이실 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가 바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약속을 받은 것이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를 예비하였고 그것을 통해 홍수 심판을 피하였다.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생물들이 암수 한 쌍씩 노아에게 나아올 것이며 노아는 그것들을 방주 속으로 들여 그 생명들을 보존해야 했다. 또 그는 그것들이 방주 안에 있는 동안 먹을 식물도 준비하고 저장해야 했다. 이 일들이 노아에게 주어진 임무이었다.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 . . .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신 그 일들을 다 준행하였다. 특히 방주 짓는 일은 심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큰 방주를 짓는 데 아마 수십 년 혹은 100년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위해 자기와 자기 아들들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다 쏟았음에 틀림없다. 방주 짓는 일은 그에게 부업이 아니고 본업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친척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았을 것이며, 아마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방주를 지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렸고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였다.

창세기 6장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 죄가 가득해지면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움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도 온갖 불경건과 세속주의와 방탕과 음란과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다. 죄의 결과는 지옥 형벌이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든 죄를 경계하며 그것들을 철저히 회개하고 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노아는 혼자라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혼자라도 바르게 살겠다는 심령으로 날마다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할 것이다.

셋째로,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예표이었다. 의인 노아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온전히 순종함으로 옛 세상의 구주가 되었듯이,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택자들의 구속(救贖)을 이루셨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구주가 되셨다. 방주가 홍수 심판으로부터 노아의 8식구들과 모든 들짐승들과 새들의 구원이 되었듯이, 교회는 장차 임할 불 심판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방주이다. 사람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교회 밖에 있으면 구원받을 수 없으나,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다. 또 믿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7장: 홍수 심판

[1절]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구원은 가정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뿐 아니라 그의 가정도 구원해주셨다.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아버지가 구원받으면 가족들도 대체로 구원의 복을 받을 것이다.

[2-3절]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짐승들과 새들을 방주에 들여놓게 하심으로 그것들을 땅에 보존시키셨다. 홍수 심판은 대변혁이었지만,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변혁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들과 새들을 다시 창조하지 않고 그것들을 방주에 보존하기를 원하셨다.

노아 시대에 벌써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이 있었다. 그 구별은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성문화되었다(레 11장, 신 14장). 암수 ‘일곱씩’이라는 원어(쉬브아 쉬브아)는 ‘일곱 일곱’이라는 뜻으로 암수 ‘일곱 쌍’을 가리킨다. 암수 ‘둘씩’이라는 말은 ‘한 쌍’을 가리킨다. 정결한 짐승들과 새들을 암수 일곱 쌍씩 보존케 하신 것은 그것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사용하며 또 홍수 후 사람들의 식물로 사용케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창 8:20; 9:3).

[4-6절] 지금부터 7일이면 내가 40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7일 후면 40일 동안 밤낮 비가 내릴 것이다. 땅에는 큰 홍수가 있을 것이며 그 홍수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은 멸망할 것이다. 그때 노아의 나이는 600세이었는데, 그것은 성경의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하면 아담이 창조된 후 1656년경이며, 대략 주전 2456년경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다. 그는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도, 모든 생물을 방주 안으로 들여놓으라는 명령도, 모든 식물을 비축하라는 명령도, 또 그와 그의 온 집이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도 다 행하였다. 의인 노아의 삶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삶이었다.

[7-10절]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에 들어갔다. 그들은 필요한 생활 도구들과 식량을 방주로 옮겼을 것이다.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홍수가 시작되기 7일 전에 있었다. 아직 비가 오지 않는 때이었다. 이웃 사람들은 “무슨 홍수가 나서 세상이 망한다는 말인가” 하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를 미쳤다고 놀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였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생물들은 암수 둘씩 질서 있게 노아에게 나아왔다. 그것들은 다가올 홍수 심판을 예감이라도 하듯이 방주로 나아왔다. 그 많은 생물들이 순순히 방주 속으로 들어온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들은 다 방주에 들어갔다. 아무리 방주가 준비되어 있었을지라도 그 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 배 안으로 다 들어갔고 땅에는 홍수가 있었다.

[11-12절] 노아 600세 되던 해 2월 곧 그 달 17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그때는 노아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이었다. 연월일의 계산은 인류의 초기부터 있었던 것 같다. 노아 시대 홍수의 정확한 날짜는, 입에서 입으로나, 토판(土版) 같은 기록물을 통해 전해 내려왔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의해, 모세에게까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만큼 성경은 정확하게 역사적 성격을 띤다. 성경은 역사적 책이다.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비가 40주야 땅에 쏟아졌다. 땅의 물 근원들은 터졌고 하늘의 수증기들은 창들이 열리듯이 땅에 부어져 내렸다. 이런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났다. 땅 위의 이상기후 현상은 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일어난다.

[13-16절]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홍수가 시작된 그 날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다 방주로 들어왔다. 또 암수 한 쌍씩 그들에게 나아온 모든 생물들도 다 들어왔다. 방주 밖에는 심상치 않은 소낙비로 인해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감돌기 시작했을 때, 노아의 식구들과 그 모든 생물들은 다 방주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대로이었다. 그러므로 16절은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고 기록한다.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이도,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신 이도 다 하나님이셨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배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을 방주 안에 닫아 넣으셨다. 방주 안의 사람들과 방주 밖의 사람들은 구별되었고, 방주 안의 생물들과 방주 밖의 생물들도 구별되었다. 방주 안에 있는 자들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었고, 방주 밖에 있는 자들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정한 시간이 지났고 문은 닫혔다. 그 문은 사람이 닫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닫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닫으셨기 때문에 그가 허락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17-20절] 홍수가 땅에 40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 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15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40일 동안의 비로 온 땅은 물바다가 되었다.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지자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다. 물이 더 많아져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덮였다. 본문은 물이 15규빗, 약 7m 더 불어오르자 온 산들이 덮였다고 말한다. 노아는 아마 그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았을 것이다.

이 홍수는 한 지역에 국한된 홍수가 아니고, 온 세계에 미친 홍수이었다. 어떤 이들은 홍수가 유브라데강 유역에 국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1) 히말라야 상봉을 덮으려면 현재 지구상의 물의 8배가 있어야 하며 (2) 그 물이 없어지는 것도 큰 문제이며 (3) 모든 식물이 1년간 소금물에 잠겼다면 살 가능성이 아주 적으며 (4) 어떤 지역은 침수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 등을 들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이 홍수가 지역적 홍수가 아니고 세계적 홍수임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본문은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덮였고 땅 위의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이 다 죽었다고 분명히 증거한다(19, 21-23절). 이 말씀을 부정하지 않는 한 다르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구 곳곳에는 땅이 깊이 갈라진 곳이 있고 그 속에 동물들의 골격이 남아 있다고 하며, 또 세계의 여러 민족들에는 홍수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인도의 마누는 다른 일곱 명과 함께 세계적인 홍수에서 배 타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중국의 파헤는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딸만 함께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하와이의 누우, 멕시코 인디안들의 테즈피, 알곤킨인들(북아메리카의 한 원주민)의 마나보조 등도 인류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받았고 오직 한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구원받았다고 전한다.

[21-24절]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물이 150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홍수는 죄악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죄악되었던가. 일부 일처의 가정 윤리는 깨어지고 남자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자들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남녀의 순결성이나 정절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고 부부 관계의 사랑과 절제가 무가치하게 여겨졌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부패되었다. 또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무서운 사회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다. 본문은 홍수로 땅 위의 모든 사람과 생물이 죽었음을 반복하여 증거한다. ‘다,’ ‘모든’이라는 말이 우리 성경에는 다섯 번, 영어 성경에는 여섯 번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지를 잘 증거한다. 아,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고 엄위하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심판하시면, 그는 악인들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고 그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신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심지어 모든 동물과 새까지 죽었다.

홍수 심판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새와 짐승과 땅에 기는 것이 죽었고,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사람들과 생물들만 남았다. 방주가 아니었다면 그들도 다 죽었을 것이다. 방주는 그들에게 홍수로부터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새 세상을 위해 오직 그들만 남겨두셨다.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옛날 노아 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을 뿐 아니라, 장차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후서 3:6-7,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성경은 악인들을 위한 지옥 불못을 밝히 증거한다(계 21:8).

둘째로, 모든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의인들과 악인들이, 신자와 불신자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 다 그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2,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 . .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

셋째로,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오직 그를 믿으며 죄를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던 노아가 구원을 받았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참된 신자들만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행 16:31). 신자는 죄에게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는 자이며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롬 6:22). 또 육신대로 사는 자는 반드시 죽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는 살 것이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임할 불 심판을 잘 대비하는 신자가 되자.

 

8장: 방주에서 나옴

1-14절, 물이 줄어들고 땅이 마르게 하심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들과 새들을 생각하셔서 바람으로 땅 위에 불어 물을 감하게 하셨다. ‘권념(眷念)하다’는 원어(자카르)는 ‘기억하다, 생각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신 32:10) 손바닥에 새기시고(사 49:16)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시 121:8).

[2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쳤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을 여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닫으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홀로 주관하신다. 비가 오는 것도 가뭄이 드는 것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

[3절]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150일 후에 감하고.

하나님께서는 많은 경우 자연법칙을 사용하시고 특별한 경우에만 기적을 일으키신다. 홍수도 자연적 방법으로 이루어졌고 홍수의 제거도 자연적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50일 동안 세상에 가득했던 물이 서서히 줄어들게 하셨다. 건전한 믿음은 기적주의가 아니고 자연법칙이나 이성적 사고를 존중한다.

[4-5절] 7월 곧 그 달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10월 곧 그 달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7월 17일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 2월 17일에 비가 오기 시작했으니 약 5개월이 지난 때이었다. 아라랏산은 오늘날 터어키의 동쪽 국경에 있는 높이 5,165m 되는 산이다.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문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주위에 아라랏산보다 높은 산도 있고 또 멀리 동쪽 네팔 부근에는 유명한 히말라야 산맥의 높은 산들이 있었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아라랏산을 택하셨다. 그 지역은 홍수 후의 세계를 위해 선택된 곳이었다. 물은 점점 더 줄어들어,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문 지 70여일이 지난 10월 1일에 산들의 봉우리들이 보였다.

[6-12절] 40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接足)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또 7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그 후 또 40일이 지난 11월 10일경, 노아는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았고 까마귀는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 노아는 또 비둘기를 내어놓았는데, 비둘기는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 ‘접족(接足)할 곳을 차지 못했다’는 말은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어놓았을 때 그 비둘기는 감람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왔다. 노아는 그것을 보고 땅에 물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7일 후 비둘기를 다시 내어놓았는데 비둘기는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땅이 말랐고 비둘기가 거할 곳을 찾았다는 증거이었다.

[13-14절] 601년 정월 곧 그 달 1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2월 27일에 땅이 말랐더라.

노아의 나이 601년 1월 1일, 땅 위에 물이 걷혔다.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제거하고 내려다보았고 땅에 물이 걷혔음을 확인했으나 땅이 완전히 마르지는 않았다. 또 두 달이 흘러 2월 27일에야 땅이 완전히 말랐다. 홍수가 시작된 지 1년 10일이 지난 때이었다. 그 기간은 온 세상에 대변혁을 가져온 시간이었다. 그 기간은 또한 노아의 식구들에게 갑갑하고 지루한 시간이었으나 두려움 중에 감사함이 넘친 시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15-19절, 방주에서 나오게 하심

[15-19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와 함께한 모든 생물들도 다 이끌어내라고 하셨다. 이제 홍수가 끝났으니, 그들은 지루했던 1년 10일 간의 방주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방주에서 나와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고 이제는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노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해야 할 일이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왔고 땅 위의 모든 생물들도 다 방주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어야 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야 한다. 그러한 생활 원리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가야 했던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를 때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진을 쳤다.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하루만 머물 때에도 그들은 순종해야 했고, 한 달이나 일년을 머물 때에도 순종해야 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명령과 신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을 치기도 하였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행하기도 하였다(민 9:15-23). 이와 같이 주의 자녀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 가기도 하고 그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 서기도 해야 한다.

20-22절,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

[20-22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방주에서 나온 후, 노아는 첫째로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들을 취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이것은 그의 자발적인 행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양의 첫새끼로 제사드렸던 의인 아벨의 발자취를 좇는 일이었다.

번제는 제물을 죽여 온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번제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들을 대속(代贖)하실 중보자의 죽음을 상징하는 뜻이 있었다. 노아와 그 식구들은 홍수로 멸망한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짐승 제물로 예표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을 받았다. 죄인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는다.

번제는 또한 하나님께 대한 노아의 온전한 헌신과 순종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은 노아는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헌신과 순종의 각오를 표현하였다. 홍수가 있기 전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롭게 살았던 노아지만,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이후 그의 심정은 하나님을 향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번제의 단을 쌓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고 감사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했고(롬 12:1), 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교훈하였다(고전 6:19-20). 또 그는, “저가[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5:15).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제물들의 향기를 받으시고 그 마음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땅을 저주하였지만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성경은 세상 마지막 날 불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 경고대로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올 것이지만, 다시 홍수로 세상이 멸망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8장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자. 비가 오게 하시는 이도, 홍수가 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비를 그치게 하시는 이도, 바람이 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자연 은택 속에 산다면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하고, 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낙심치 말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를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수 있고, 만일 우리가 그의 뜻에 합당하게 산다면,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한 걸음씩 오직 주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자.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에 들어가기도 하고 방주에서 나오기도 하였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명령과 교훈대로 행해야 한다. 우리는 주의 명령대로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우리의 삶을 의탁해야 하며 그의 교훈과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은 것처럼, 우리는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감격하며 즐거이 주님을 섬기며 따라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옥갈 죄인들인 우리를 그의 긍휼과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하셨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과 명령과 교훈을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자.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여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행하자.


9장: 홍수 직후의 일들

1-7절, 노아의 가족에게 복주심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첫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도 복주시며 동일한 말씀을 하셨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복(福)은 좋은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영육의 좋은 것이다. 정신적 평안과 육체적 건강과 물질적 여유와 사회적 평안이 다 복이다. 본문은 또 자손을 출산하고 자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 때에 첫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복주셨고 이제 홍수 심판 후에 노아와 그 가족을 복주신다. 그는 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복주실 것이다. 그 복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그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와 도우심과 물질적 유여함을 포함하며 마침내 메시아를 통한 전세계적 구원을 의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노아와 그 아들들이 많은 자녀를 출산하여 수적으로 많아지고 온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많은 자녀의 출산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2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며 그것들이 너희 손에 붙이웠다고 말씀하셨다. 본래 사람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 1:26, 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그 동안 이 임무를 잘 수행했는지 모르나, 이제 다시 그 임무가 강조된다.

사람은 다른 생물과 본질이 다르다. 피조물들 중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생물을 섬겨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사람이 그것들을 다스리고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상 사람은 무지하게 피조물을 조물주처럼 숭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것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신이라고 말하였다(출 32:5). 사람들은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짐승과 벌레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롬 1:23).

[3절]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래의 식물(食物)은 채소와 나무 열매이었다. 창세기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이후 사람에게 새와 물고기와 땅의 짐승과 기는 것 등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식물로 허락하셨다. 이제 육식(肉食)은 사람에게 정당한 일이 되었다.

물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구분되고 정결한 것만 먹도록 허락되었을 것이다. 또 후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죽은 것은 먹지 말도록 금지되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2:31,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니라.” 레위기 22:8,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이제 육식은 정당한 일이 되었으나, 이것은 명령이라기보다 허용이라고 본다. 아마 홍수 후에 사람들의 기력은 급격히 약해진 것 같다. 사람의 수명은 1000살에서 100살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 즉 사람의 기력의 쇠약해짐과 더 많은 영양분의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식을 허용하셨지만, 한가지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고기를 살아 있는 채로, 즉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단서를 두신 까닭은, 아마 짐승처럼 산 생명체를 그대로 먹는 것이 잔인한 행동이기 때문인 것 같고, 또 피가 생명이라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특히 피와 생명은 신비하게 연관되어 있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피는 곧 생명이다. 짐승의 생명도 피에 있고 사람의 생명도 피에 있다. 사람의 몸에는 약 5리터의 피가 있고 그것은 약 30초마다 심장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온 몸을 한바퀴 돈 후에 심장으로 돌아간다. 피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피는 곧 생명이다.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지만 피는 먹지 말라는 것은 후에 모세의 율법에 명문화되었다. 레위기 3:17,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레위기 17:10-11,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자는 그것의 피를 다 뺀 후에 먹어야 했다.

그러나 구약의 이 법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고 본다. 피를 먹지 말라는 법은 의식법에 속할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들은 신약 아래서 다 폐지되었다. 골로새서 2:16-17,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5절]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람의 생명의 피를 찾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라는 말씀은 짐승이 잘못하여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출애굽기 21: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사람의 형제면’이라는 말씀은 가인같이 형제가 그 형제를 죽였을 경우 마땅히 그가 그 죗값을 받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6절]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마땅히 그 자신이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살인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법이다.

이것은 개인적 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형벌 곧 정당한 재판에 의한 공적 사형 집행을 의미한다고 본다. 출애굽기 21:12,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살인자를 사형으로 응징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사람은 짐승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살인은 사람에게 죄를 짓는 악일 뿐 아니라, 그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큰 악이며, 따라서 그 악은 사형으로 응징되어야 한다.

물론, 후에 모세의 율법은 고의적이지 않고 우연히 부지중에, 실수로 저지른 살인의 경우 그 살인자가 죽음을 모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 자는 이스라엘 땅에 6개의 도피성들 중 하나로 피신하여 들어가 살 수 있었다. 민수기 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실수로, 부지중]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사형 제도는 오늘날에도 필요하고 정당한 법이라고 본다. 사형은 극악한 죄에 대한 공의의 징벌과 그와 유사한 범죄의 예방을 위해 또 사회의 정의와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라는 주의 말씀(마 5:39)은 개인적 보복을 금하신 것이며 사회적 형벌이나 사형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7절]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1절의 내용을 반복하시며 강조하신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수정하시거나 취소하신 적이 없다. 과거에 인구 증가와 자원 문제를 고려하여 산아 제한을 주장한 것이나 오늘날 여러 가지 경제적 여건을 구실 삼아 임신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인간적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다산(多産)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이며 복이다. 시편 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또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것은 사람의 의무이며 선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이나 경제 여건이 아주 어렵지 않다면 또 특별한 사명의 걸음이 아니라면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복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낳은 자녀를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바르게 키우고 양육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몫이다. 세상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며 또 필수적인 일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키우는 일이다. 바른 인격이 되지 못하고 세상 지식만 갖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별 쓸모가 없으며 세상을 위해서도 큰 유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자녀를 많이 낳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이며 복이고 사람의 의무요 선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고의로 그 뜻을 저버리고 거스리고 있다. 우리는 자녀 출산을 짐스럽게 생각하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귀하고 복된 일로 깨닫고 감사히 받으며 자녀를 복되게 길러야 한다.

둘째로, 고기를 먹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 소위 채식주의적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셋째로, 사람의 생명은 귀중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이나 남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생명을 해하는 행동은 큰 죄악이다. 돈 몇 푼 때문에 살인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살인은 사형으로 응징되어야 할 큰 죄악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며 가꾸어야 한다.

8-17절, 무지개 언약

[8-10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언약을 세우셨다. 8-17절의 본문에 ‘내가 . . . 세우리니’ 혹은 ‘내가 . . . 세운’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11, 12, 17절). 또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표현하신다(9, 15절). 언약의 대상은 노아와 그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과 또 그들과 함께한 모든 생물들, 즉 새들과 육축들과 땅의 짐승들, 즉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과 자연계 전체이었다.

언약(베리스)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었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었다(창 2:16-17). 또 그는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며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창 6:18). 또 그는 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 표로 할례를 명하셨다(창 17:7). 또 그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표로 안식일을 주셨다(겔 20:12, 20). 이것이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옛언약 곧 구약이다. 또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과 새언약 곧 신약을 세우셨다. 새언약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며 세례는 그 표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자신을 낮추시며 스스로를 제한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사회의 계약과 달랐다. 인간 사회의 계약은 서로간의 동의 아래 이루어지는 쌍방적 약속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 약속이다. 그것은 일종의 명령, 즉 약속 있는 명령이었다.

[11절]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세우신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 즉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5절에서도 그는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약속이었다.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자가 자동차 운전을 두려워하고 꺼려하듯이, 홍수 심판 후에 사람들과 새들과 짐승들은 비가 많이 오면 혹시 다시 홍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 그들에게 이러한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평안과 위로를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호의와 은혜이었다.

물론, 세계적 홍수 심판은 다시 없을 것이나, 부분적, 지역적 홍수는 있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이나 가나안 땅의 완전한 진멸 같은 지역적 심판도 있을 것이다. 또 마지막 날 세상에는 불 심판도 있을 것이다(벧후 3:6-7).

그러나 상당한 평안이 오랫동안 온 땅에 지속될 것이다. 본문 12, 16절에서, 이 언약은 “영세(永世)까지”(레도로스 올람) 세우는 언약이며 “영원한” 언약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8:21-22에서 암시되었었다: “. . .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12-1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거 혹은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무지개’라는 원어(케쉐스)는 ‘활(bow)’이라는 뜻이다. 무지개(rainbow)는 물방울로 만들어진 활 모양이다. 무지개는 언약의 증표로 주어졌다. ‘증거’라는 원어(오스)는 ‘표(sign), 증표(pledge)’라는 뜻이다. 17절도 무지개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증표임을 말한다. 증표는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함과 견고함을 나타낸다.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는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이라고 하셨다. 16절에도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무지개는 비가 온 후 아직 공중에 물방울이 많이 있을 때 햇빛이 물방울에 굴절되어 일곱 가지 색깔을 내는 신비로운 모양이다. 비가 개었어도 사람들이나 새들과 짐승들이 홍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만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주실 것이다. 줄과 화살이 없는 활 모양의 그 무지개는 사람에게 공포를 주는 활이 아니고 위로를 주는 활이 될 것이다.

[15-16절]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15절과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무지개를 보실 때 그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시겠다는 뜻이다. 무지개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사람들은 홍수 심판을 기억하고 두려움을 가질 것이지만, 비가 갠 후 하늘에 생기는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무지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제거하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줄 것이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감사하자. 사람은 부족투성이의 존재이며 세상도 그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생물들 속에 있을 홍수 심판의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그 대신 위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옛세상에 무서운 홍수 심판을 시행하셨으나 그는 이제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이다. 무지개 언약은 마지막 심판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자연 세계의 안전 보장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이다. 우리는 그 자비와 긍휼을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언약하시고 언약의 증표를 주셨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내용을 확증하는 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믿을 만함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특히 그의 약속에 있어서 그러하시다. 그는 신약교회의 성도에게 주신 약속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 1:2).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다(요일 5:13). 하나님의 뜻은 택한 백성의 부활과 영생이다(요 6:39-40). 그는 우리에게 하신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의 약속을 믿자.

셋째로, 그러나 비록 더 이상 홍수 심판은 없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남아 있다. 그것은 불 심판이다(벧후 3:7).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마지막 지옥 불 심판이 경고되어 있다. 불의한 자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고전 6:9-10).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인은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다 버리고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하며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18-29절, 노아의 축복과 저주

[18-19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온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나왔다. 인류는 본래 한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 가족같이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마땅하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고 표현된다. 22절에도 함을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고 말한다. 또 25절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는 노아의 말과, 26절과 27절은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고 또 야벳의 종이 되리라는 말을 기록한다. 또 창세기 10:15-20은 함이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등 네 아들을 낳았고 또 가나안은 북쪽 시돈에서부터 남쪽 가사까지 흩어져 살았던 가나안 자손의 아버지라고 좀더 자세하게 증거한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고 반복해 표현하고 또 가나안에 대한 예언을 반복해 기록한 것은 장차 그들이 들어가 얻을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 누구의 자손이며 그들이 왜 저주를 받아 진멸(殄滅)되어야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후에 그 땅의 거주민들이 매우 우상숭배적이고 음란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웠다(레 18:3, 25; 신 7:1-5).

창세기에는 가나안 땅에 대한 언급이 32번이나 나온다.21)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고(창 11:3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창 12:5).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고(창 12:6), 그는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창 13:12; 16:3). 후에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고(창 31:18; 33:18; 35:6; 37:1), 마침내 가나안 땅에 묻혔다(창 50:5, 1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다.

[20-21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는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포도원을 만들었다.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원어는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노아는 포도 수확을 하였고 포도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의 큰 실수이었다.

성경에서 포도주가 기쁨의 음료수로 여겨지기도 하지만(신 14:26; 시 104:15), 술 취하는 죄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로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다(고전 6:10; 갈 5:21). 술 취함은 사람으로 올바른 정신과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고 범죄케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고 말했고(엡 5:18), “그것을 보지도 말라”고 했다(잠 23:31).

노아의 실수는 인간의 본성의 부패성과 연약을 잘 드러낸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했지만(창 6:9) 엄격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노아도 실수가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어느 정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경건한 노아의 실수는 우리 모두에게 금주(禁酒)의 교훈이 된다. 더욱이 오늘날의 술은 적은 양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 금주(禁酒)의 좋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좋다.22)

[22절]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하체’라는 원어(에르와)는 ‘벌거벗음 혹은 음부(陰部)’라는 뜻이다. 함의 잘못은 부모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말았어야 했고 즉시 얼굴을 돌리고 옷 같은 것으로 그것을 가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부끄러운 장면을 형제들에게 말하기까지 하였다.

오늘 시대는 지나친 노출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시대이다. 성인 영화나 비디오, 인터넷 음란물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다. 부부 관계나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은밀한 것이며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는 부끄러운 시대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시대이다. 오늘 시대가 그러하다.

[23절]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셈과 야벳은 달랐다. 그들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가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셈과 야벳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과 경외심이 있었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식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올바른 태도이었다.

[24-25절]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술이 깬 노아는 그 작은 아들 곧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가장 낮은 종이라는 표현이다. 또 26절과 27절에서 노아는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고 또 야벳의 종이 되리라고 저주하였다.

부모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던 함은 저주받을 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고(출 20:12) 또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셨다(레 19:3). 또 신명기 27:1에는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씀하였다.

함의 아들에 대한 노아의 저주는 함에 대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이었다. 부모와 자녀는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5). 복된 부모의 자녀는 복되지만, 저주받는 부모의 자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모가 범죄하면 그 자녀들에게 화가 미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조심해야 한다.

또한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실제적으로도 가나안 족속들은 심히 음란하고 우상숭배적이었다(레 18:24-25; 신 7:1-2). 저주는 의인들에게 임하지 않고 악인들에게 임한다. 노아의 저주는 예언적이었고 공의롭게 성취되었다.

[26절]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다른 한편, 노아는 셈을 축복하였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복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께서만 인간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셈과 함께하시니 셈은 복을 받은 자이다. 과연 셈족은 참 종교의 전파자가 될 것이다. 참 종교는 셈족에서 발견될 것이다. 참된 경건은 셈족을 통해 전달된 유산이었다. 하나님의 복은 셈족을 통해 이어져 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셈족이었고 그 족속을 통해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롬 9:5).

[27절]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는 야벳도 축복하였다. 그에게는 창대케 되는 복이 선언되었다. 이것은 특히 문화적, 경제적 번창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야벳 족속은 서구 문명을 건립한 자들이다. 그들은 과연 번창하는 복을 받았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말은 야벳 족속이 셈의 종교적 복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야벳의 자손들인 유럽인들은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들은 셈의 장막, 곧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에 들어왔다.

[28-29절]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오십세에 죽었더라.

노아는 아담 후 천년경에 출생하여 이천년경에 죽었다. 그는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노아와 128년이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의 초기 역사가 경건한 아브라함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술 취하지 말자. 술 취함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며 의인 노아에게라도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게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천국 길을 가로막는 큰 죄악이다.

둘째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자. 비록 그들이 실수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실수를 쉽게 남에게 전하지 말고 은밀하게 덮어드리는 자가 되자. 그런 자녀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성에 대한 염치를 가지자. 우리는 노출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이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거룩함과 정절, 그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가지자. 그것이 성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넷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들을 축복하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셈의 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셈의 복을 얻었다.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우리의 자녀들도 이 복을 누리도록 기도하고 축복하고 권면하며 본을 보이자.

 

10장: 노아의 자손들

1-5절, 야벳의 자손들

[1-3절]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본장은 세계 민족들의 기원에 대한 개요이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 등이었다. 고멜은 킴메리아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터어키 북부에 거주했고 후에는 지금의 불가리아로 이주하였다. 마곡은 스구디아인의 조상이며 흑해 동쪽에 거주하였다. 마대는 메데인의 조상이며 카스피해 남부 즉 지금의 이란에 거주하였다. 야완은 이오니아인의 조상이며 발칸 반도 남부 즉 지금의 그리스에 거주하였다. 두발은 이베르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터어키 동부에 거주하였다. 메섹은 갑바도기아인의 조상이며 흑해 남부에 거주하였고 러시아인이 여기서 나왔다. 디라스는 아마 드라키아인의 조상이며 소아시아 서북부에 거주하였다.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 리밧, 도갈마 등이었다. 아스그나스는 소아시아 북부, 본도와 비두니아 지역에 거주했는데, 그곳의 호수와 항구는 아스카니어스라고 불리었다. 리밧도 같은 지역에 거주했다. 도갈마는 소아시아 중앙의 부르기아과 갈라디아 지역이나, 혹은 아르메니아 지역에 거주했던 것 같다.

[4절]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 달시스, 깃딤, 도다님 등이었다. 엘리사는 그리스 지역에 거주했던 것 같다. 달시스[다시스]는 남부 스페인의 타르테수스에 거주했던 것 같다. 깃딤은 구브로섬에 거주했던 것 같다. 도다님은 그리스 동북부에 거주했던 것 같다.

[5절]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요약해보면, 야벳의 자손들은 처음에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어키 북부에 거주했고, 후에 북쪽과 서쪽으로 즉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바닷가의 땅’이라는 말은 지중해 연안과 그 섬들을 가리킨다.

6-20절, 함의 자손들

[6-7절]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함의 아들은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등이었다. 구스는 이디오피아와, 아라비아 서부에 거주하였다. 미스라임은 지금의 이집트에 거주했다. 은 아프리카 북쪽 즉 지금의 리비아에 거주했던 것 같다. 거기에는 붓이라는 강이 있었다. 가나안은 팔레스틴 곧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다.

구스의 아들은 스바, 하윌라, 삽다, 라아마, 삽드가 등이었다. 스바[세바]는 이디오피아의 홍해 가까이에 거주했고, 하윌라는 이디오피아 동북부에 거주했던 것 같다. 삽다는 아라비아 남부에, 라아마는 아라비아 남부와 서부에, 삽드가는 아라비아 남부에 거주했던 것 같다. 라아마의 아들 스바[쉐바]는 아라비아 남부에, 드단은 아라비아 서부에 거주했던 것 같다.

[8-9절]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구스는 또 세상의 처음 영걸인 니므롯을 나았다. ‘영걸’이라는 원어(깁보르)는 ‘용사, 영웅’이라는 뜻이다. 또 ‘특이한 사냥꾼’이라는 원어(깁보르 차이드)는 ‘사냥하는 용사’라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그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겨루듯이 자기를 높이는 교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니므롯’이라는 원어는 ‘우리는 반역하리라’는 뜻이 있다. 니므롯은 단순히 짐승 사냥꾼이 아니고 그 이름처럼 사람들과 나라들을 사냥하는 정복자이었고 고대에 나타난 강력한 폭군이었던 것 같다.

[10-12절] 그의 나라는 시날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니므롯은 바벨, 에렉, 악갓, 갈레, 니느웨, 르호보딜, 갈라, 레센 등의 성을 건축하였다. 바벨은 지금의 이라크의 알 힐라 지역이며, 에렉은 바벨에서 동남쪽 200km 지역이며, 악갓은 지금의 이라크의 바그다드 지역이었다. 또 레센은 큰 성이라고 증거되었다. 니므롯의 나라는 고대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의 뿌리와 같다. 이와 같이, 앗수르와 바벨론의 뿌리가 되는 성들은 본래 셈족에 의해서가 아니고 함족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13-14절]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미스라임의 아들은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 등이었다.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 북부에 거주했고 아프리카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 중 가슬루힘의 자손은 팔레스틴 서남부에 거주하여 블레셋 사람이 되었다.

[15-20절]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이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

가나안의 열 한 개의 고대 종족들이 언급되어 있다. 앞장의 노아의 예언과 본장의 고대 민족들의 이름들에서, 가나안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창세기가 모세의 글임을 증거한다. 가나안에 있는 종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었다. 또 19절에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을 언급한 것은 본 기록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의 상황을 나타낸다. 모세는 이런 성들을 구전(口傳)으로나 기록물들을 통해서나 혹은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로 알았을 것이다.

요약해보면,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의 북부와 북동부, 즉 오늘날 리비아, 이집트, 이디오피아 등에 거주했고 또 일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땅에도 거주했다.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 대륙에 퍼져 살았고 아프리카 사람이 되었다.

21-32절, 셈의 자손들

[21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었다. 셈의 자손 중에 특별히 에벨이 중요한 인물로 언급되었다. 여기에 ‘에벨 온 자손’은 바로 히브리인을 가리킨다. 창세기 14:13은 최초로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원어(이브리)는 ‘에벨(에베르)의 자손’이라는 뜻일 것이다. 또 히브리어 에베르)는 ‘건너편의 땅’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히브리(이브리)라는 말은 유브라데강 건너편에서 온 아브라함에게 적합하기도 하였다(창 11:31; 12:5).

[22-23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셈의 아들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등이었다. 엘람은 엘람인 혹은 파사인의 조상이며 페르샤만 북서쪽, 즉 지금의 이란 지역에 거주하였다. 앗수르는 앗수르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거주하였다. 아르박삿은 아마 갈대아인의 조상이며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류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은 리디아인의 조상이며 소아시아 서남부에 거주했다. 아람은 아람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거주했다.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 등이었다. 우스는 에돔 북쪽에 거주했고 은 아르메니아 지역에 거주했다.

[24-30절]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고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다. ‘세상이 나뉘었다’는 말은 다음 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의 언어들이 혼잡되어 그들이 각 종족과 각 언어대로 온 땅에 흩어진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이 고대에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욕단은 아라비아 남부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열 세 명의 아들은 아라비아 중남부의 종족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들의 거주지는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의 남부와 예멘 지역이다.

[31-32절]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요약해보면, 셈의 자손들은 팔레스틴 북쪽과 메소포타미아 동쪽, 그리고 팔레스틴 남쪽의 아라비아 지역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동쪽 아시아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우리 민족도 셈족에 속할 것이다.

이상이 모세 시대에 세계 민족들의 기원에 대한 개요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났고 민족들이 서로 섞였기 때문에, 오늘날 민족들을 완전하고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노아의 세 아들은 대략적으로 인류의 삼대 인종을 보인다. 즉 야벳의 자손은 유럽에 거주하는 백인종이고, 함의 자손은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흑인종이고, 셈의 자손은 아시아에 거주하는 황인종이다. 앞장에 기록된 노아의 예언대로, 야벳의 자손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창하였고, 함의 자손은 많은 고난을 당하였고, 셈의 자손은 종교적 복을 얻었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창세기 10장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성경은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 본장은 아주 고대의 역사 자료를 담고 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기록이다. 성경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신화라면, 본장과 같은 부분들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성격을 깨닫고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자.

둘째로, 우리는 모든 인류가 아담의 자손이며 노아의 자손임을 알고 다 귀히 여기며 사랑하자. 우리는 우리의 이웃은 남이 아니고 우리의 형제요 자매임을 알자.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지식과 넓은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힘써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함의 자손의 번창과 몰락을 보자. 함의 자손 니므롯은 고대에 강력한 통치자이었고 그의 나라는 매우 광대하였다. 니므롯은 거대한 세상 나라의 한 예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그 후 완전히 멸망했다. 물론 그 이유는 불경건과 부도덕 때문이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도 적그리스도와 강력한 그 나라의 출현을 예언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살후 2:3-8; 계 13:7-8; 18:2-4). 우리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동안 참된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하며 택한 백성을 구원하자.

 

11장: 연합과 분리

1-9절, 바벨탑 사건

본문은 홍수 심판이 있은 후 노아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중에 일어난 바벨탑 사건에 대해 증거한다.

[1절] 온 땅의 구음(口音)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오늘날 세계에 3,000개 정도의 언어가 있고 그 중에 5천만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19개라고 한다.23) 그러나 본래 아담의 자손들과 노아의 자손들은 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아라랏 산에 머문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과 그 자손은 ‘동방으로’ 이동하였고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시날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중하류 평지로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평원 즉 오늘날 이라크의 동부이다. 바벨은 이라크의 알 힐라이다.

[3-4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城)과 대(臺)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시날 평지에 거하며 큰 성과 높은 탑을 쌓을 계획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성’(이르)은 ‘도시’를 가리키고 ‘대’(믹달)는 ‘탑’을 가리킨다. 그들은 벽돌을 잘 굽고 역청을 접착제로 사용하여 성과 탑을 만들려고 하였다. 사람의 지혜는 처음부터 뛰어나 고도의 건축술을 개발했다. 그것은 노아와 그 아들들이 거대한 방주를 만든 일에서도 드러났지만 시날 평지에서 그 자손들이 큰 성과 높은 탑을 지으려 한 데서도 드러난다.

창세기 10장은 함의 자손 니므롯의 나라가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한다(창 10:9-10). 바벨탑 사건은 아마 니므롯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많은 학자들은 바벨 남쪽 유브라데스 강 서편 언덕에 흔적이 남아 있는 빌스 니무룻이라는 명칭의 일곱 층계로 된 탑이 이 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노아의 자손들이 성과 탑을 건립하고자 했던 동기는 무엇이며 그 일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그 일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말했다. 그러나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지만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시편 115: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사람들이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생각은 실상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겸손히 자신과 하나님  간의 무한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하나님과 견주려 하였다.

그들은 마땅히 높임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 대신에 인간을 높이며 자신들의 이름을 자랑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 허영, 자랑, 명예심을 나타낸다. 인간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높이고 칭송하며 인간 만세를 부르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일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랑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송하고 감사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속히 그 은혜를 잊었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로 떨어졌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가 곧 불경건한 세속주의이며 인본주의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다. 교만과 자랑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워하신다. 사람은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교만과 허영과 자랑은 오늘 우리도 경계해야 할 바이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둘째로,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기 위해 그 성과 탑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연합과 일치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영걸이었던 니므롯에 의해 주도되었을 것이다. 불경건과 교만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연합은 무서운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연합을 미워하신 것을 보면, 시날 평지에서의 그들의 시도는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회를 지향했던 것 같다. 전체주의란 개인의 모든 활동이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역사상 나타났던 독재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생각이며 그 한 예가 바로 북한이다.

일반적으로, 연합은 선하고 좋으며, 분열은 악하고 나쁘다. 그러나 비자발적, 인위적, 강제적 연합은 나쁘다. 왜냐하면 그런 연합 아래서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합 아래서는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되고 사유재산권이 부정되며 개인의 특성들이 소멸되며 오직 전체만 남게 된다. 더욱이 그것이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을 때 그런 전체주의적 사회는 무서운 괴물이 된다. 역사상 종종 그러했듯이, 그런 사회는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신자들을 핍박한다.

현재 세계에서도 우리는 연합 정신을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유엔(UN)과 유럽 연합은 그 정신의 증거들이다. 컴퓨터 문명은 세계 통합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컴퓨터는 국가로 국민 개개인을 한 손에 파악하게 만들고 있다. 성경은 말세에 적그리스도적인 세계 통합과 교회 통합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계 13:16-18). 주의 재림 직전에 전체주의적 국가와 교회가 나타날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참 연합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단합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고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질 때만 좋은 것이다.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선과 악은 섞이기보다는 분리되어야 한다. 불경건과 교만으로 연합하기보다는 차라리 분리된 상태로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 거기에는 최소한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자유로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된 일치는 경건과 의와 겸손과 사랑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5-9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 성과 탑을 쌓는 일을 기뻐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그것은 악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본주의적 연합 추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만일 그것을 내버려두면, 불경건한 전체주의 사회가 되며 경건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소외당하며 핍박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일을 악하다고 판단하셨다. 그는 오늘날도 참된 진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연합 운동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내려오셔서 그들의 하는 일을 보셨다. 그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또 그는 그들이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심으로 그 일을 중단케 하셨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뜨리셨다.

본문은 이와 같이 노아의 자손들이 무엇을 시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어떻게 막으셨는지 증거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일은 성공 같으나 실패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실패케 하실 때 그것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인간의 모든 일은 실패할 것이다. 사람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일을 성공케도 하시고 실패케도 하신다.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시 127:1-2).

사람이 아무리 무슨 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워하시면 헛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안에서 계획하고 행해야 한다. 잠언 16:3, 9,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인간의 교만과 자랑과 명예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찬송하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미워하신다. 교만과 자랑은 큰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멸하실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거나 칭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앞세우고 그만 높이고 그만 찬송하자.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자. 인간은 칭찬과 영광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좋은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시편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게 우리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높이며 하나님만 찬송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자.

둘째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명령만 지키자.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밝히 가르치는 바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계획하고 행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그의 모든 명령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우리가 이렇게 행할 때 행복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이 인생의 바르고 복된 길이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보이신 선한 삶이 무엇인가? 그것은 겸손하고 경건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가 명하신 계명대로 의롭게 살고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이 인생의 정로(正路)이다.

요한일서 3:23, “그의[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마디로 요약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주신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 실천해야 할 모든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사실상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자.

10-26절, 셈의 후손들

[10절]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100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본문은 노아 시대의 홍수 후 2년이 셈의 나이 100세인 해라고 말한다. 창세기 7:11에 홍수가 노아 600세 2월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므로 셈은 노아가 502세 때에 낳은 아들이라고 보인다. 창세기 5:32에는 “노아가 500세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창세기 9:24는 함을 ‘작은 아들’이라고 표현하므로, 셈은 노아의 장자가 아니고, 노아의 세 아들은 야벳, 셈, 함 순서일 것이다. 또 창세기 10:21은 아마 “셈은 . . . 형 야벳의 형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KJV, NIV).24) 성경에 ‘셈, 함, 야벳’이라고 계속 표현되는 것(창 5:32; 9:18; 10:1; 대상 1:4 등)은 중요성의 순서일 것이다.

성경은 주로 셈과 함에 관심을 둔다. 본문은 셈의 자손에 대해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셈의 후손이고 가나안 족속은 함의 후손이다. 성경 역사는 하나님께서 셈의 자손 중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으로 흘러 내려간다. 마침내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를 통해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구원받을 것이다.

[11-26절]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5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을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벨렉을 낳은 후에 43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벨렉은 30세에 르우를 낳았고 르우를 낳은 후에 20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르우는 32세에 스룩을 낳았고 스룩을 낳은 후에 2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낳았고 나홀을 낳은 후에 2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11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홍수 후 셈의 자손의 목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초산 연령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자손의 기록에서는 가장 낮은 것이 65세이었으나 본문에서는 전부 35세 이하이며 대부분 30세 전후이다. 둘째는 수명(壽命)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홍수 전에는 사람이 보통 900세 이상을 살았으나, 홍수 후에는 셈이 600세, 에벨이 464세, 그 후부터는 더욱 줄어 그의 아들 벨렉이 239세, 데라의 아버지 나홀은 149세까지 내려갔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 때 대기층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태양 광선이 지구에 많이 들어와 사람의 노화(老化)를 촉진시킴으로 사람의 수명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 같다.

[26절]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원문은 창세기 5:32과 같은 문장 구조이며 “데라가 70세가 된 후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뜻이다. 27절과 29절에 보면, 하란은 결혼하여 롯과 밀가와 이스가를 낳았고 그 중 밀가는 삼촌인 나홀의 아내가 되었다.25) 그렇다면, 데라의 세 아들은 아브람, 하란, 나홀 순서일 것이며, 또한 하란과 나홀의 나이 차이도 컸을 것이다. 데라의 연대는 아담 후 1878-2083년경이며, 아브라함의 연대는 만일 데라가 그를 70세에 낳았다면 아담 후 1948-2123년경이다.

27-32절,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27-30절]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와 그 아들들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오늘날 이라크의 나시리야에서 서쪽으로 10여km 떨어진 텔 엘-무카야르라고 추정된다. 갈대아 우르는 옛 시대에 문명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당시에 중산층의 집은 열 개 내지 스무 개의 방이 있는 이층집이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은 읽기와 쓰기와 산수를 공부했고 곱셈과 나눗셈, 심지어 제곱근과 세 제곱근도 공부하였다.26)

데라의 아들 하란은 그 아버지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 데라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불행한 일을 경험해야 했다. 또 그의 아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바꿈)은 아내가 자녀를 잉태치 못하였다. 그것도 아버지 데라에게 큰 근심거리이었을 것이다.

[31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그의 아들 아브람과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다. 본문은 왜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데라와 그 일행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이었다. 창세기 15: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고 말씀하셨다. 느헤미야 9:7도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마 아브람에게 어떤 계시를 주셨고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를 설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본다. 사도행전 7:2에 보면,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도 하나님을 약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불행한 일이나 며느리 사라가 잉태치 못하는 근심거리를 통해 인생의 무능력함과 허무함을 느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아브람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지 않았을 것이며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난은 사람에게 유익하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죄인 됨과 세상의 헛됨을 깨닫게 되고(왕상 17:18; 시 39:5-6),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한 삶을 구하게 된다(시 39:7; 고후 1:8-9; 시 119:67, 71; 히 12:10-11). 고난은 성도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신앙의 순수함과 성장을 위해 매우 유익하다.

그런데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의 약 3분의 2쯤 되는 곳에 있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잘 떠났지만, 처음 목표대로 끝까지 진행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중도에 하란에 거주하고 말았다. 데라가 중도에 주저앉고 만 것은 그의 연약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데라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지 못했다.

하란은 여전히 우상숭배적인 환경이었다. 데라는 우상숭배적 환경을 완전히 떠나지 못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하였다(수 24:2). 데라의 아들 나홀은 처음에 아버지와 함께 오지 않았으나 후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온 것 같다. 그래서 후에 야곱은 하란으로 가서 나홀의 손자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살았다(창 27:43; 28:10). 그러나 나홀도 우상숭배적 요소를 완전히 떠나지 못했고 그 요소들이 야곱의 가족들에게도 남아 있었다(창 31:19; 35:2-4).

[32절] 데라는 250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세기 12:4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것이 그가 75세 때라고 증거하므로,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다면, 아브람은 데라가 145세에, 즉 그가 죽기 전에 하란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난 것이라면, 데라는 아브람을 130세에 낳은 것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 해석은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자. 광야 같고 나그넷길 같은 세상,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있고 불행한 일들이 많은 세상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자. 세상에서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자. 세상은 우상숭배와 부도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2:39). 우리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갈대아 우르 같은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 운동은 분리 운동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분리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데라처럼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중간에 하란에 주저앉는 불완전한 구원 말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천국만 사모하며 사는 완전한 구원을 받자.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제 죽도록 충성하자. 주께서 교훈하신 대로 자신을 부정하고(마 10:37-38) 하나님의 참된 교훈을 마음에 간직하고 인내로써 순종하여 선한 열매를 맺자(눅 8:15). 우리는 처음 믿을 때 시작한 것을 끝까지 굳게 잡자(히 3:14). 그것이 참된 믿음이며 참된 구원이다. 또 주께로부터 직분을 받은 자는 그 임무를 완수하고(골 4:17) 죽도록 충성하자(계 2:10).

 

12장: 아브람을 부르심

창세기 1-11장은 인류의 초기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12-50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에 대해 서술한다.

1-9절, 아브람을 부르심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이다. 죄악이 가득했던 세상 가운데서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듯이(창 6:8), 아브람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로마서 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때는 그가 하란에 거하였을 때인 것 같다. 성경 다른 곳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셨다는 말씀을 보면(창 15:7; 느 9:7), 갈대아 우르에서도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어떤 암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브람이 하란에 여러 해 거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심으로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명령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환경으로부터 분리하라는 분리의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한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모든 죄를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데라와 그 자녀들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은 분리의 시작이었다. 데라는 분리를 위한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이제, 아브람에게 분리된 삶이 필요했다. 나이 든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아브람이 죄악된 전통과 풍습을 완전히 떠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새 가문의 시작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한 땅을 예정하셨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2-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분리를 명령하시면서 두 가지를 약속하셨다. 첫째는,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크게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람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조상으로 높임을 받는 큰 이름이 되었고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도 믿음의 조상으로 높임을 받고 있다(롬 4:16).

둘째는, 그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22:1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마 1:1)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구원의 복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신 메시아 약속의 말씀이다. 성경은 구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갈 3:29).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75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그가 가지 말라 하시면 가지 않는 것이 순종이다.

롯도 아브람과 함께 갔다. 롯이 아브람과 동행한 것을 보면, 그는 아브람의 영향으로 비교적 경건하였던 것 같다. 베드로후서 2:7-8은 롯을 의로운 자라고 증거한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이었다. 그러면 그때는 그의 부친 데라가 아직 죽기 전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1:26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다고 말하므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부친 데라는 145세이었을 것이다.27) 그는 205세까지 살았다(창 11:32).

[5-6절]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라는 표현은 그가 하란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던 것을 증거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정들었던 그의 모든 환경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하란을 떠날 때에 아브람의 목표는 분명하였고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해 예정하시고 그에게 지시하신 그 땅이다. 그 땅은 창세기를 쓴 모세가 강조하고자 하는 땅이다. 모세는 그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이며 이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땅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 중부,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함의 아들 가나안(창 9:22)의 자손이다. 그들은 후에 그들의 죄 때문에 완전히 멸망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차지할 것이었다(창 15:16).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특별한 방식으로 종종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기도 하셨고, 구름이나 불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셨고, 또 자신의 음성으로나 기적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셨다. 이 때는 아마 그가 직접 나타나신 것 같다. 하나님의 이런 직접 나타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요 1:14; 14:9).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지구의 한 지역을 누구에게 주실 권한을 가지고 계신가?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시며 주인이시므로 그런 권한이 있으시다(대상 29:11; 시 24:1).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느니라.” 신명기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다. ‘단’이라는 원어(미즈베아크)는 ‘짐승을 잡아 죽인다’(자바크)는 말에서 나왔다. 그것은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8-9절]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람은 그곳에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처를 정하고 장막을 쳤고 또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노아가 홍수가 그친 후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것과 같았다. 짐승 제사에는 하나님의 긍휼로 예비하실 속죄 제물을 믿는 뜻이 있고 또 참된 헌신과 순종을 다짐하는 뜻이 있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배와 기도의 삶, 곧 경건한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셋의 아들 에노스의 삶이었고(창 4:26), 에녹의 삶이었고(창 5:22, 24), 또 노아의 삶이었다(창 6:9, 22).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악된 세상을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죄로 인해 멸망할 세상에 속하여 살면 세상과 더불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죄악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죄를 청산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전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4:17). 또 바울은 말하기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했다(행 17:30). 회개하자.

둘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을 받아 누리자. 이 복은 오늘날 온 세상에 충만하게 전파되고 있다. 우리 중 다수는 이미 그 복을 받았다. 영생의 구원은 복 중의 복, 가장 귀한 복이다. 우리는 다 이 복을 받고 또 이 복을 남에게 전하자.

셋째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건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자. 그것은 복된 삶이요 평강의 삶이다.

10-20절,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감

[10절]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은 거하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 우거하려 하였다. 기근은 보통 하나님의 징벌로 온다. 레위기 26:26,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아마 그 땅 거주민의 죄 때문에 기근이 왔을 것이다.

아브람은 사람의 일반적 생각에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에는 나일강 하류를 비롯하여 비옥한 땅이 많았다. 사사시대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도 비슷한 생각으로 흉년을 피해 유다 땅을 떠나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다(룻 1:1).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므로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 땅에 머물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 지혜와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

[11-12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그런데 그가 애굽에 가까이 왔을 때에 한가지 걱정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믿음으로 행하면 담대함과 평안이 있지만,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행할 때는 염려와 걱정이 생긴다. 아브람의 걱정은 죽음에 대한 염려이었다. 그의 보기에 그 아내 사래는 아름다운(예파스) 여인이었기 때문에, 아브람은 애굽 사람이 자기의 아름다운 아내를 보고 자기를 죽이고 자기 아내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 우거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생각과 감정일 것이다.

[13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은 그런 상황에서 한가지 인간적 대책을 생각하여 아내에게 요청하였다. ‘원컨대’라는 표현은 아브람이 그 옛 시대에 평소에 아내에게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인격적이고 사랑을 가지고 대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아내에게 사람들에게 그가 나의 누이라고 말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는 실상 아내를 지켜줄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쓸데없이 만용(蠻勇)을 부리지 않고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상황을 파악하고 인간적인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사래가 그의 누이라는 말은 반쯤 거짓말이며 일종의 거짓말이다. 사래는 그의 아내이다. 아브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거짓말은 악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두려운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 아브람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14절]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아브람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애굽 사람들은 사래의 심히 아름다움을 보았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났을 때 75세이었고(창 12:4)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차이가 10살이므로(창 17:17),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사래의 나이는 65세 이상이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의 창조 세계의 본모습이다.

아름다움의 주된 한 요소는 조화로움이다. 사람의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그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오늘날 아름다움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유행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음란한 자태와 아름다움을 혼동하는 것 같다. 그러나 참 아름다움은 음란함과 아무 상관이 없다. 참 아름다움은 오히려 단정함을 포함한다.

[15절]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애굽 왕 바로는 대신들의 칭찬을 듣고 사래를 궁으로 취하여 들였다. 아브람은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기근을 피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 아내를 빼앗기는 슬픔과 낭패를 당했다.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대신에 인간적 지혜와 판단으로 행했을 때 큰 것을 잃어버렸다.

아브람의 슬픔과 낭패는 하나님의 징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훗날에 엘리멕렉과 나오미 가족의 경우와 같았다. 룻기 1:3-5에 보면, 기근을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간 나오미는 그곳에서 남편을 잃었고 두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얻었으나 10년 즈음에 두 아들도 다 죽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했다(룻 1:13). 또 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후 이웃 사람들에게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했다(룻 1:21).

아브람은 처음부터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실했을 것이며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응답을 얻었을 것이다. 후에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1,754명의 유대인들을 인도하여 파사 나라로부터 유대 땅으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길에 대적들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군대의 지원을 요청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고(스 8:21-23) 무사히 잘 도착하였다.

[16절]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애굽 왕 바로는 사래를 인해 아브람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비록 아내 대신 양과 소와 남녀 종들과 암수 나귀와 약대를 많이 얻었지만, 그것이 아브람에게 무슨 기쁨이 되었겠는가? 아내를 잃은 아브람은 비로소 애굽으로 내려오려 했던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기근 중에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래 때문에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그것은 아마 무서운 질병이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큰 재앙을 내리셨는가? 그것은 바로의 행위가 간음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하고 중요한 제도이며 그것을 어기는 것은 간음죄가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며 결혼 관계를 잘 지켜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시며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말 2:16; 히 13:4). 더욱이,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이며 남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될 자이었다.

[18-20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바로는 그 재앙이 사래 때문에 온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서 옳지 않은 일에 가책을 느낀다. 살인, 간음, 도적질 등이 죄악임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은 양심 때문이다. 요나의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선원들은 그 재앙이 누구 때문에 왔는지 알기를 원했다(욘 1:7). 헤롯 왕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려 하였고 또 그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막 6:20). 그들은 다 양심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었다.

바로가 양심적으로 두려워하고 사래를 돌려보낸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이었고 긍휼하신 간섭과 도우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빼앗겨 슬퍼하며 낙심했을 아브람을 위해 비상하게 개입하셨고 그를 도우셨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며 선한 뜻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롬 8:28).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기근이 있다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자. 우리는 어려움이 있다고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자.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고 교회 안에 거해야 한다. 그곳이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평안과 기도 응답과 그의 보호하심이 있다.

둘째로, 우리는 목숨 때문에 거짓말하지 말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소망을 굳게 가지자.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마 10:28), 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다(마 10:39). 우리가 죽음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는 바르게 살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굶어 죽을까봐, 맞아 죽을까봐, 아파 죽을까봐 두려워하지 말자. 의인은 죽을 때도 소망이 있다(잠 14:32).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섭리를 믿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연약과 실수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끝까지 지키시고 도우신다. 주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8).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 38-39).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자(롬 8:28).

 

13장: 롯과 헤어짐

[1-2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銀金)이 풍부하였더라.

아내를 빼앗겼다가 하나님의 긍휼의 도우심으로 다시 찾은 아브람은 그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애굽에서 나와 남방으로 올라갔다. ‘남방’(네겝)은 유대 나라와 애굽 나라 사이의 넓은 지역, 즉 유대 땅에서 볼 때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 아브람은 애굽의 왕에게 양과 소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기 때문에(창 12:16) 육축이 풍부하였고 또 은금도 많았다. 아브람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였다.

[3-4절]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벧엘에 이르렀고 벧엘과 아이 사이, 즉 전에 하란에서 이곳 가나안 땅에 와 장막을 치고 처음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고 기도했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단 쌓기를 힘썼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5-7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과 롯은 각각 소유물이 많아 그곳에 함께 거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기도 하였다. 사람은 더불어 살고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만, 때때로 제한된 땅과 음식물로 인해 다툼이 생긴다. 가난과 불편함을 참고 이기는 것이 사랑이며 성숙한 인격이지만,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 다툰다.

[8-9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우리가 한 골육이니 서로 다투지 말고 헤어지자고 제안하였다. 함께 있으면서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위하고 사랑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사람의 연약성 때문에 때때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 간에도 부득이 서로 헤어지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서 서로 다투는 것보다 헤어져서 서로 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브람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다.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는 양보심을 발휘했다. 사람의 다툼은 대체로 욕심 때문에 온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했다(약 4:1-2).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며 그 나라에 소망을 둔 자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 때문에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지 않고 세상 사람처럼 다투지 않는다. 사람은 세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만 보화로 알 때 세상 것을 양보할 수 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 요단 들은 사해로 이어지는 요단강 주위의 지역을 가리킨다. 소알은 소돔과 고모라의 이웃 도시이었고 사해 남단에 위치했던 것 같다. 요단 들은 소알까지 비옥하였다.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후에는 황폐해졌으나 그 당시에는 비옥하여 여호와의 동산 곧 에덴 동산 같고(창 2:8; 사 51:3; 겔 28:13) 애굽 땅과 같았다. 에덴 동산에는 강의 근원이 있어서(창 2:10) 비옥하였고 애굽 땅도 풍부한 나일 강을 인해 매우 비옥하였다.

[11-13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은 요단 들을 택했고 아브람을 떠나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는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 소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다고 본문은 말한다. 죄도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다. 사람이 약해서 실수로 혹은 알지 못하고 짓는 죄는 작은 죄이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도전적으로 짓는 죄는 큰 죄이다. 사람의 양심은 고의적인 죄를 어느 정도 통제하지만, 죄가 반복되고 양심이 무디어지면 사람은 고의적인 죄를 담대히 짓게 된다. 소돔 사람들은 큰 죄인이었다.

롯이 요단 들을 택하고 소돔성 가까이에 장막을 친 것은 신앙적이지 못했다. 그는 물이 넉넉한 땅이라는 현실적 유익만 생각하여 그곳을 택했고 그가 살 곳이 그의 경건 생활에 얼마나 유익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만일 그가 바른 생각을 했다면, 그는 죄악된 환경을 멀리했을 것이다. 죄악된 곳에는 하나님의 재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과 달리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이었다(창 12:7). 그는 얼마 전 기근 때문에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낭패를 경험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약속의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

[14-17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롯이 떠난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본문이 말하지 않지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은 직접 나타나시든지, 환상 중에나 밤에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민 12:6).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두 가지 말씀을 주셨다. 첫째는 가나안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창세기 12:7에 기록된 대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말씀의 반복이었다. 본문 14-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이는]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이를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또 17절은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이는]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그와 그 자손들에게 약속된 땅임을 재확인시켜 주셨다.

둘째는 그의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세기 15: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끌고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자손들을 땅의 티끌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즉 수적으로 번창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 부근에 장막을 치며 거기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그것은 그가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렸음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받는 죄사함과 하나님께 대한 참된 헌신과 전적 순종의 각오를 상징한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것은 인간의 합당한 삶이요 복된 삶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아브람에게서 양보심을 배운다. 그는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다. 이것은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보화로 삼은 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상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 사람이 세상 것에 욕심을 내면 다투지만, 하나님과 천국에 가치를 두면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고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가나안 땅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롯과 같이 현실적 이익을 따라 불경건하고 죄악된 세상으로 나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거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요 15:4) 성경적 교훈과 믿음 안에 거하고(행 14:22; 골 1:23) 참 교회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의 쉼터인 참 교회를 세우고 가꾸며 참 교회 안에서 교훈을 받고 믿음으로 살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아브라함의 경건한 삶은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삶은 복된 삶이다(시 1:1-3; 마 6:33). 하나님은 그것을 요구하시며 그것은 생명의 길이다.

이 세 가지 교훈은 결국 한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만 보화로 여기며 사는 것이다. 그런 자는 세상 것을 다 양보할 수 있고 바른 믿음과 참 교회 안에 거할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헛되며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후에 지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하다. 욥기는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라”고 말한다(22:24-25). 우리는 하나님만 보화로 바로 깨닫고 경건하게 살자.

 

14장: 롯을 구출함

1-16절, 롯을 구출함

[1-2절]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북방의 네 나라의 왕들은 소돔성 주위의 다섯 나라 왕들과 전쟁을 하였다. 시날은 바벨론의 수도 바벨과 아브람의 원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 지역을 가리키며 오늘날 이라크 동부 지역이다. 엘람은 페르샤만부터 카스피해까지 페르샤 지역을 가리키며 오늘날 이란 서부 지역이다. 엘라살과 고임은 그 주위에 있었을 것이나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남방의 다섯 나라들은 염해 남부 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단지 “벨라 곧 소알”이라는 표현은 벨라가 옛 이름이고, 소알이 모세가 창세기를 쓸 당시 사용되었던 이름임을 보인다.

[3-4절]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이들이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13년에 배반한지라.

북방의 연합군들이 남방의 왕들과 전쟁한 곳은 싯딤 골짜기이었다. ‘싯딤’이라는 원어(싯딤)는 ‘들판’이라는 뜻이며 그곳이 본래 들판이었음을 보인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라는 표현은 들판이었던 싯딤 골짜기가 후에 염해로 변했음을 보인다. ‘염해’(鹽海)는 ‘소금 바다’라는 뜻인데, 그곳의 물은 보통 바닷물보다 10배나 더 짠 30-33%의 소금물이라고 한다.28) 전쟁의 동기는 남쪽 나라들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12년간 섬기다가 제13년에 배반했기 때문이었다.

[5-7절] 제14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르바(거인), 수스, 엠, 호리는, 신명기 2장이 증거하는 대로, 옛시대에 요단강 건너 동북쪽부터 요단강 남단 염해 동쪽과 남쪽, 즉 모압과 암몬과 에돔 지역에 살았던 족속들이다. 아스다롯 가르나임은 요단강 동북쪽 바산 땅에 있었고, 함은 갈릴리 호수 동쪽 게술 땅이며, 사웨 기랴다임은 요단강 동남쪽 르우벤 지파 땅에 있었고, 세일산은 에돔 지역이다. 엘바란은 에돔의 남단, 즉 홍해 북단 항구이며, 엔미스밧은 가데스 바네아일 것이다. 하사손다말은, 역대하 20:2에 의하면, 염해 중서부의 엔게디이다. 다시 말하면, 북방 연합군은 요단강 동북쪽 땅으로부터 요단강 남쪽 염해 동부와 남부와 서부를 쳤던 것이다.

본장은 그 내용의 역사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 옛 시대의 나라들이나 성들의 이름과 왕들과 족속들의 이름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R. D. 윌슨은 본장의 왕들의 이름이 고고학적 발굴 내용과 일치한다고 증거하였다.29) 또 본장에는 창세기를 쓴 모세의 보충적 설명이 여러 번 나온다. 2절에는 “벨라 곧 소알,” 3절에는 “싯딤 골짜기 곧 염해,” 7절에는 “엔미스밧 곧 가데스,” 8절에는 “벨라 곧 소알,” 17절에는 “사웨 골짜기 곧 왕곡(왕의 골짜기)” 등이 그것이다.

[8-12절]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곧 그 다섯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북방의 네 왕들의 연합군이 소돔성 주위의 다섯 왕들의 연합군과 접전한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았다. ‘역청’(케마르)은 석유나 석탄에서 나오는 ‘아스팔트, 콜타르, 피치 등’을 가리킨다. 그 전쟁에서 소돔 왕과 그 동맹국들은 패전하였고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겼다. 소돔에 거했던 롯도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재물들도 다 빼앗겼다. 롯은 큰 낭패를 당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악된 도시 소돔에 내리신 경고의 징벌이며 또 인간적 생각과 욕심을 따라 요단 들을 선택했고 심히 죄악된 소돔성에까지 내려가 거주하며 그들과 교제했던 롯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벌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람은 물질적 유여함을 가진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셔야 사람이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침략자를 보내시면 하루아침에 모든 좋은 것도 다 빼앗길 것이다.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13절]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도망쳐 온 한 사람이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성경에서 여기에 처음으로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이브리)이 나온다. 이 말은 ‘에벨의 자손’이라는 뜻인 동시에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 명칭은 아마 가나안 땅에 나그네처럼 거주했던 아브람에게 주위 사람들이 붙여준 것일 것이다. 그때 아브람은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다. 마므레는 에스골과 아넬의 형제이며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들이었다.

[14-16절]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은 평소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켰던 가신(家臣)들 318명과 더불어 롯을 구출하기 위해 북방 나라의 왕들을 뒤쫓아갔다. 그와 동맹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도 거기에 참여하였다(24절). 아브람은 평소에 자기 방어를 위해 가신들을 훈련시켰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운동도 하고 체력도 단련시키는 것이 좋고, 세상에서는 군대도 필요하고 경찰력도 필요하다. 아브람은 단까지 쫓아갔다. 여기의 ‘단’은 사사기 18:28-29에 나오는 도시를 가리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단은 사사 시대에 단 지파가 그곳을 정복한 후에 붙여진 이름이고, 북방 왕들은 요단 동쪽의 바산 길이나 평지 길 그리고 왕의 대로로 내려오고 올라갔을 것이며 그 길은 그 성을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단은 길르앗에 속한 한 성읍을 가리킬 것이다.30)

아브람은 가신들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했고 다메섹 북편에 있는(원문의 뜻)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긴 재물과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부녀들과 사람들을 찾아왔다. 이것은 그의 조카 롯을 위해 자기 목숨의 위험을 무릅썼던 아브람의 사랑과 용기를 잘 나타내준다. 아브람의 믿음은 헌신적 사랑과 용기로 잘 표현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소극적 태도로가 아니고 적극적 참여와 순종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홀로 혹은 직접적으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지만(사 37:36),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자연적 수단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에나 성실하고 자연적 수단도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행 27:31).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내용을 다 믿자. 창세기는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은 에덴 동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10-14절), 7장과 8장은 홍수가 시작된 연월일과 물이 땅 위에서 마른 연월일에 대해 언급한다(7:11; 8:13-14). 10장은 노아의 자손들의 이름들과 그들로 인해 퍼져 나간 열국들의 이름들에 대해 자세히 증거한다. 11장은 바벨탑 사건에 대해 증거한다. 12장 이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자세히 기록한다. 창세기는 첫장부터 끝장까지 역사적 성격을 가진 책이다. 사실 성경 전체가 역사적 성격을 가졌다. 성경은 절반 이상이 역사적 내용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징책을 깨닫자. 롯은 소돔성과 거기 살던 자신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책을 깨달아야 했다. 사람의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께 달렸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달아야 한다. 시편 119:67, 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셋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사랑과 용기를 가지자. 우리는 모든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이 세상을 용기 있게 살아가자. 시편 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로마서 8:31-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용기 있게 세상을 살자.

17-24절, 아브람이 이기고 돌아옴

[17절]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파하다’는 원어는 ‘치다, 패배시키다, 죽이다’는 뜻을 가진다. 옛날 영어성경은 ‘죽이다’는 말로 번역했다. 아브람은 소돔 왕의 입장에서 그의 성읍 곧 그의 나라 사람들과 빼앗긴 재물들을 찾아준 은인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돌아올 때 소돔 왕은 사웨 골짜기 곧 왕곡(王谷, 왕의 골짜기)에 나와 아브람을 영접하였다.

[18절]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살렘 왕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다. ‘살렘 왕’은 ‘평강의 왕’이라는 뜻이고, ‘멜기세덱’은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다. 또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증거되었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져온 것은 아브람과 그의 동료들의 원기 회복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본문은 그가 실제로 역사적 인물이라고 증거하는 것 같다.

많은 유대인들과 성경 연구자들은 멜기세덱을 셈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람이 롯을 구한 사건은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창 16:3). 그러면 그때는 아담 후 2033년 이전이었다. 셈은 아담 후 1558년경에 출생하여 2158년경까지 살았으므로 또 그는 경건하였을 것이므로, 멜기세덱과 비슷한 인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셈이 가나안 땅에 있었을까 하는 점, 그가 셈이라면 셈이라고 부르지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것 같지 않다는 점, 또 히브리서 7:3에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묘사된 점 등은 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멜기세덱이 실제 인물이라면 가나안 족속의 한 왕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 7:3의 말씀은 그에 대해 족보도, 출생일도, 사망일도 언급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경건한 인물을 가나안 땅에 숨겨두셨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흠모할 만한 은혜가 무명의 사람 속에서 더 분명히 빛난다. 왜냐하면 부패된 세상 속에서 멜기세덱은 그 땅에서 종교의 바르고 신실한 배양자요 수호자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매튜 풀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최악의 장소들과 나라들 가운데서도 그의 남은 자들을 여기 저기 흩어두셨다”고 말했다(성경주석, I, 35).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고 그의 대적들을 그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멜기세덱의 말에서, 우리는 그의 경건을 엿본다.

첫째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로 알았다. ‘주재’라는 원어(코네)는 ‘소유자, 창조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존재케 하신 창조자이시며 창조된 온 세상의 참 소유자이시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알았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혹은 ‘지존자’라는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그것은 시편에 적어도 21번 나오고 다니엘서에 14번이나 나온다.31) 하나님께서는 저 높고 광대한 하늘보다 크시다. 그는 초월자이시다. 그의 지혜와 능력은 탁월하시다.

셋째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았다. 복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며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한나도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고 하였다(삼상 2:6-7).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여야 했다(민 6:24-26). 또 시편 1편은 악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자가 복되다고 증거하였고,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성도들에게 항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다(롬 1:7).

[20절]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넷째로, 멜기세덱은 아브람의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붙이신 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힘이시며 방패시고 구원이시며 대적들을 그 발 아래 굴복케 하시는 자이시다.

다섯째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으로 알았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들을 통해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자이시다. 사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주었다. ‘그 얻은 것에서’라는 말은 원문에 단순히 ‘모든 것의’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성경에서 최초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아브람이 드린 최초의 십일조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 주심을 인정한 표, 즉 전쟁에서 이긴 것과 빼앗겼던 물건들을 다시 찾은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한 표이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그의 복 주심을 인정하고 우리의 소득이 그의 복이며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이다.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족보도 없고, 출생이나 사망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였고 그에게서 십일조를 받았으므로 그의 자손인 레위보다 높은 자이었다. 히브리서 7:1-3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이름이 그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며 의의 왕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실상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다.

[21절]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소돔 왕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죽었거나 종이 되었다 할지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가족들, 친지들, 이웃들을 찾게 되었다. 그는 감히 물품들까지 되돌려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말했다.

[22-23절]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아브람의 믿음은 멜기세덱의 믿음과 같았다. 그는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진실을 말하는 행위이다. 맹세는 그의 말이 장난삼아 하는 것이거나 경솔히, 가볍게, 혹은 거짓되이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지하게, 진심으로, 진실하게 하는 것임을 증거한다.

아브람은 그가 전쟁에서 도로 찾은 물건들 중 실 한 개나 신발끈 하나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에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음을 증거한다. 재물 욕심을 버린 자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은 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돈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자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과 천국을 아는 자, 내세를 믿는 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가치관의 차이는 생활방식의 차이를 만든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며 살 수 없다(마 6:24). 우리가 참으로 주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천국을 믿는다면, 네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주의 말씀(마 6:19-20)에 동의할 것이다. 주께서는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6:21). 또 그는 의식주의 문제 때문에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6:25 이하).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17-18).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한 까닭은, 자신이 하나님으로가 아니고 소돔 왕으로 말미암아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었다. 그는 그런 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기를 원치 않았다. 경건한 아브람은 세상 재물을 작게 여겼고,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크게 여겼다. 사람에게 물질적 부요를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의 이름은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그 영광이 사람에게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욕을 당하지 않고(롬 2:24)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24절]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단지, 아브람은 그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소년들이 먹은 것과 그와 동행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수고의 댓가는 제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공정한 요구이었다.

우리는 본장 17절부터 24절까지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멜기세덱과 아브람에게 주셨던 참 경건을 소유하자. 그들은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복을 주시는 하나님, 승전(勝戰)케 하신 하나님,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을 믿었다. 그것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두신 자들의 경건이었다.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은 이런 은혜를 증거한다. 로마서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1:5,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되고 남은 자의 경건과 믿음을 가지자.

둘째로, 우리는 물질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자. 우리는 세상의 것, 특히 물질적인 것이 전부인 줄 아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과 천국을 참 가치과 복으로 알고 참된 믿음과 온전한 순종으로 살자.

셋째로,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이익보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더 중히 여기자.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손상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처신하며 살아가자.

 

15장: 믿음의 의

[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온 후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다. 이상(異常)은 하나님께서 옛날 자신을 특별하게 계시하시던 방식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옛날에는 꿈이나 이상(異常)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민 12:6).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이상 중에 하나님을 뵈옵게 되니 두려웠을 것이며 또 아마 북방 연합군이 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에게 “나는 너의 방패니라”고 말씀하셨다. 방패는 전쟁에서 적군의 칼과 창을 막는 무기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공격을 막아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뜻이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람에게 “너의 상은 매우 크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원어는 “너의 상은 매우 크도다”라는 뜻이다.32)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조카 롯를 위해 행한 희생적 사랑과 봉사, 그리고 소돔성의 물품들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 등의 선한 행위에 대해 큰 상으로 갚기를 원하셨다. 사람의 선행은 보잘것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상을 주신다.

[2-5절]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그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브람은 자기 집에서 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그의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3절에 ‘내 집에서 길리운 자’라는 원어(벤 베시)는 ‘내 집의 아이’라는 뜻으로 영어 성경들은 ‘내 집에서 난 자’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그는 아브람의 집에서 종으로 나서 길리운 자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 엘리에셀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며,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며, 네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의심 없이 믿었다. 아브람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늙었고 자녀 출산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었다. 로마서 4:19-21,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義)로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의 착하고 의로운 행위를 의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 간주될 만큼 완전치 못하며 부족투성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아브람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의 본이 되었다(롬 4:1-3, 23-25).

[7절]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다. 그는 가나안 땅을 그에게 기업으로 주기 위해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말씀하셨다. 하란에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창 12:1)은 단지 하란에서가 아니고,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에게 암시적으로라도 주어졌던 것 같고, 그렇다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자녀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던 것(창 11:31)은 아마 아브람의 요청 때문이었을 것이다.

[8-11절]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증의 표를 요청했다. ‘무엇으로’(밤마)라는 말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내기보다 믿음을 위한 확증의 표를 구한 것이다. 훗날에 기드온이나 히스기야도 비슷한 요청을 하였다(삿 6:37; 왕하 20: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3년된 암소, 3년된 암염소, 3년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그것들을 준비하고 그 중간을 쪼개었다. 제물의 중간을 쪼갠 것은 언약을 맺는 당사자 어느 한 쪽이 그 언약을 어기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이었던 것 같다(렘 34:18). 솔개가 제물의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그것을 쫓았다.

[12-14절]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람의 자손이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어 이방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며 그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심으로 그들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대로 이루어졌다. 당시에 그들은 애굽에서 심한 학대와 고통을 받고 있었고(출 1:11, 14; 2:23-24; 3:7, 9), 그들은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 만에 그 괴롭힘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왔다(출 12:40).

[15절]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다시 번역하면, “또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라. 너는 장수하다가 장사되리라”(원문, KJV). ‘조상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이 몸의 죽음 후에도 계속 존재하며 어떤 장소에 모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영혼불멸에 대한 성경의 한 증거이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불멸적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영혼은 몸이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곳에 집결된다. 성경은 그 장소가 천국과 지옥이라고 말한다. 의인의 영혼은 천국에 올라가 몸의 부활 때까지 안식하지만,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 던지워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고통을 당할 것이다(눅 16:19-31).

[16절]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4대 만에’라는 말씀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예를 들어, 야곱이 애굽에 내려간 때로부터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에 이르는 4대째에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을 대표한다(창 48:22; 왕상 21:26; 암 2:9-10). 또 아브람은 현재 아모리 족속 곁에 살고 있다. 창세기 14:13은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고 말한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은 후에 있을 가나안 땅 정복이 그곳 거주민들의 가득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것을 암시한다. 과연, 레위기 18:24-25는 증거하기를, “너희는 이 모든 일[심히 음란한 일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고 하였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신약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의 약속도 꼭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7-21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쪼갠 제물들 사이로 지난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은 하나님을 상징한 것 같다(출 3:2). 그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요청한 하나님의 표증이었다. 그 날 하나님께서는 다시 땅을 약속하시고 그 땅의 경계와 당시에 거기 살고 있었던 열 족속들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후에 다윗과 솔로몬 왕 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그 경계까지 거의 확장되었다(삼하 8:6, 14; 왕상 4:21, 24).

결론적으로, 창세기 15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방패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모든 성도의 방패시다. 다윗은 시편 18:2에서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방패라고 고백하였다. 세상에는 환난과 시험이 많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대적들도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시요 방패가 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방패로 삼고 살자.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매우 크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의 상은 매우 크다”고 말씀하셨다. 시편 19:11은 “또 주의 종이 이로[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운동 선수처럼 열심히 달려 썩지 않을 상을 얻으라고 교훈하였다(고전 9:24-25). 예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약속된 상을 기대하며 열심히 의와 선을 행하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의를 주신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그의 의로 간주하셨다. 우리의 구원도 그러하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러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그는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우리의 의가 되시며 현세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내세에서 영생의 영광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오랜 세월 후일지라도 반드시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의 약속도 꼭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자.

 

16장: 하갈과 이스마엘

[1-2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브람이 믿었고(창 15:4-6) 그의 아내 사래도 아마 믿었겠지만, 사래는 결혼한 후 처음부터 자녀를 낳지 못했고(창 11:30) 그때까지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좀더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연약한 생각이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애굽 사람 여종이 있었는데, 사래는 그를 자기 남편에게 주어 그를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는 그 일을 남편에게 제안했고 남편은 아내의 말을 따랐다. 마치 첫사람 아담이 아내의 잘못된 요청을 받아들인 것처럼, 아브람은 아내의 인간적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의 제안이라 하더라도 거절할 것은 거절해야 했었다. 아브람은 우리와 같이 연약함을 가진 자이었다.

[3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10년 후이었더라.

‘첩’이라는 원어(잇솨 האּ)는 ‘아내’라는 말이다. 아브람은 아내가 둘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었다. 일부일처(一夫一妻)는 하나님의 뜻이다(창 2:2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남자든지 동시에 한 아내 이상을 가지거나, 어떤 여자든지 동시에 한 남편 이상을 가지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4-5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으로 인하여 임신한 하갈은 자신의 임신함을 깨닫고 사래를 멸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갈의 연약이며 잘못이었다. 여종인 그에게 아브람을 준 것은 사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의 첩이 된 것이 여주인의 덕분인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여주인을 끝까지 존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고 연약했다. 사래도 그런 일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브람과 자신의 가정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6절]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의 눈에 좋은 대로 그 여종 하갈에게 행하라고 말했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다.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했으니 학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주인이 여종에게 멸시를 받고 그냥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을 좀더 참고 끝까지 잘 대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임신한 여종을 학대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었다. 하갈의 인격이 부족해서 여주인께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위치를 벗어난 것이지, 여종이 여주인을 무시한다고 여주인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람의 마음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있지 여종에게 있지 않았다.

학대를 받던 하갈은 사래의 얼굴을 피해 집을 나와 도망쳤다. 학대받는 자가 도망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학대는 자신이 스스로 가져온 일이었다. 그가 여주인을 멸시하지 않았더라면 받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므로 실상 도망칠 일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겸손히 여주인에게 복종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는 도망쳤다.

[7-8절]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도망치는 하갈을 여호와의 사자가 만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이었다. 여기 여호와의 사자는 단지 한 천사가 아니었다. 10절에 보면 그는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13절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라는 말씀을 보면, 그는 구약시대에 종종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창 22:12, 14; 출 3:4).

여호와의 사자는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셨다. ‘술 길’ 곧 술이라는 곳으로 가는 길은 당시의 주요한 도로 중의 하나이었고 그 길에 한 샘이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만나신 것은 그 샘 곁, 즉 구체적인 한 장소에서이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다. 하갈의 신분에 대한 언급은 하갈로 하여금 즉시 자신의 신분을 다시 깨닫게 했을 것이다.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멸시했고 그에게 학대를 받았던 사래를 ‘나의 여주인’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사래는 그의 여주인이었다.

[9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셨다. 여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여종의 마땅한 본분이다. 종은 주인을 멸시하지 말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중히 여기신다. 또 임신한 몸으로 도망친 것은 자신과 태아 모두에게 해로웠다. 그 태아는 아브람의 아이이다. 그는 자신과 그 아이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한 때까지 힘들어도 집에 머물러 있으며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했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질서를 존중하며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와 혼란을 원치 않으신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학생은 선생님께 순종하고 직원은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적절한 다른 길을 보여주시기 전까지 현재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0-12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는 또 하갈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산(多産)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복이었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가 실수로 잉태케 한 하갈의 아들도 복주셔서 번식케 하실 것이었다.

또 그는 그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고 그가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다(시 68:5).

또 그는 하갈이 낳을 아들이 사람들 중에 들나귀같이 되겠고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혹은 앞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어떻게 활달하고 호전적 인물이 될지를 보인다. 과연 이 말씀대로, 이스마엘의 자손인 아랍인들은 호전적 유목민의 특징을 가졌다.

[13-16절]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86세이었더라.

하갈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이라고 불렀다. 그는 주인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외로웠겠지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 너무 감격하였던 것이다. 하갈은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 라고 불리웠는데, 그것은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샘물’이라는 뜻이다. 그 샘물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는 언급은 모세의 보충적 설명이다. 그것은 성경의 사건이 인간이 지어낸 허구적 내용이 아니고 진실한 역사적 내용임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때가 되어 하갈은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 즉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1년 후이었다. 비록 아브람의 적자(嫡子)가 아니고 서자(庶子)이긴 하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첫아들이었다.

창세기 16장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 아브람도 부족과 연약이 없지 않았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연약한 그를 통하여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본장에서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사래와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려 해서는 안 된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났으나 더 기다려야 했듯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때때로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여기에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계 13:10; 14:12).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믿고 사랑한다면 그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리자.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처한 환경에서 질서를 중히 여기고 서로 존중하고 피차 복종해야 한다.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빌립보서 2:2-3,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또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성경은 종이 두려움과 성실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엡 6:5; 벧전 2:18).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선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인간의 감정을 따라 보복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셨다(마 5:39-48). 또 성경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교훈한다(롬 12:17, 21).

넷째로, 우리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만 돌아보시는 섭리자가 아니시고 사래의 여종 하갈도 돌아보시고 그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오늘날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고통도 들으시고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목자이시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8:20). 성령께서는 예수 믿는 우리 속에 영원히 거하신다(요 14:16).

 

17장: 할례(割禮)

[1절] 아브람의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99세 때에 나타나셨다. 그것은 창세기 16장에 기록된 하갈의 사건이 있은 지 13년 후의 일이었다. 성경은 소수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나 내용만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나타나지 않으셨지만 간혹 나타나셨다.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계시 사건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이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그는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엘 솻다이)임을 증거하셨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창 18:14; 눅 1:37). 둘째, 그는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은 경건한 삶이며 의롭고 선한 삶이다. 사람 앞에 사는 자는 하나님 없이, 무신론적으로 살 수 있고 또 위선적으로나 가식적으로도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사는 자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그는 사람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완전하다’는 말(타밈)은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 양심에 거리낄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의롭고 선하고 흠 없게 살기를 원하셨다.

[2-4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본장에는 ‘내 언약’이라는 말이 9번(2, 4, 7, 9, 10, 13, 14, 19, 21절),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이 3번(7, 11, 19절), 그냥 ‘언약’이라는 말이 1번(13절), 도합 13번 나온다. 창세기 15:18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다고 말했었는데, 이제 본장은 본격적으로 그 언약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 당사자와 의논하는 쌍방적 언약이 아니고 일방적 언약이다. 그것은 일종의 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조건을 가진 약속의 형태이기 때문에 언약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에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를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그 앞에 엎드렸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배하는 태도를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5-6절]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주셨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비’라는 뜻이지만,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다. 히브리어 학자들은 아브라함이라는 말이 ‘우두머리’(아비르)라는 말과 ‘많은 무리’()라는 말의 복합어라고 추측한다(BDB).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심히 번성케 하셔서 그에게서 나라들과 열왕들이 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7-8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민족적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그 대대의 자손들 사이에 세워지는 영원한 언약이다. 그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지금 우거하는 가나안 땅을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이미 여러 번 반복된 내용이었다(창 12:7; 13:15; 15:18).

[9-10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언약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지켜야 할 언약의 내용은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할례의 명령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 남자에게 해당되었다. 남자는 사람들을 대표하였다. 10절에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민족적 성격을 넘어섬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에 ‘너희’라는 말 속에는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날 아들 이삭뿐 아니라, 이스마엘과 지금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다른 종들까지도 포함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초민족적 성격을 보인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신약시대에 있을 이방인들의 구원을 암시하였다.

[11-12절]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고 명령하셨다. 할례는 남자의 양피 곧 음경의 귀두를 싼 가죽을 자르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포경수술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이었으며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든지 이방인에게서 돈으로 산 자든지 간에,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남자의 양피의 제거는 죄와 불결을 제거하는 뜻이 있었다. 남자의 성기는 인간의 죄와 정욕이 표출되는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할례는 성결과 절제를 상징적으로 교훈하였다.

[13-14절]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할례를 통해 언약의 표를 그들의 살에 두라고 말씀하셨고 또 할례를 받지 않는 남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자로 간주되었다.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말은 그들의 공동체로부터의 출교, 혹은 사형, 혹은 하나님의 직접적 징벌로 인한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15-16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고쳐주셨고 그에게 복을 주셔서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열국의 어미가 되고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라’라는 말은 ‘공주 혹은 여주인’이라는 뜻이다.

[17-19절]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100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100세된 자신과 90세된 아내 사라에게서 어떻게 자식이 날까 하고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께 이스마엘이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이 여종 하갈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삭은 ‘그가 웃는다’는 뜻인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잘못된 웃음을 기억나게 하는 이름이었다.

[20-21절]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말을 들으셨고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셔서 그 자손도 번창케 하실 것이며 그가 열두 방백을 낳아 큰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출생을 분명하게 약속해주셨다.

[22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땅으로 내려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다(마 6:9). 주 예수께서 올라가신 곳은 바로 그 하늘이다.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23-27절]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99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13세이었더라.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23절의 ‘이 날에’나 26절의 ‘당일에’라는 원어는 동일한데, ‘바로 그 날에’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바로 그 날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온 집안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99세이었고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이었다.

본장의 중요한 진리와 교훈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민족적 성격을 가지는 동시에 초민족적 성격을 가진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의 백성이다. 그러나 그 언약은 또한 이방인의 구원을 암시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들이다(갈 3:29). 우리는 전에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에 참여한 자가 되었고(엡 2:19; 3:6),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천국을 얻은 자가 되었다.

둘째는, 할례의 진리이다. 할례는 죄와 불결을 끊어버리는 것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중생(重生)의 씻음과 성화를 의미하였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1:44; 19:2). 성경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말하며(신 10:16; 렘 4:4; 9:26), 그것을 강조한다(롬 2:28-29).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죄씻음과 성결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의 요점이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는 교훈이다. 그것은 경건한 삶과 의롭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경건이다. 또 의롭고 선한 삶이 완전한 삶이다. 그것이 책망할 것이 없는 성화된 삶의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이다. 성결과 절제, 의로움과 선함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18장: 하나님의 나타나심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간혹 그는 나타나셨다. 창세기 17장은 아브람의 99세 때에 그가 나타나셨음을 증거했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인격적이신 분이시다. 그는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 있고 나타나셨다. 그는 마침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14).

하나님께서는 시공(時空)세계 속에 나타나셨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초월자이시므로 시공세계 속에 나타나실 수 없고 사람이 육신적으로 경험하거나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사상이지 성경 진리와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시공세계 속에 나타나셨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신화적 묘사가 아니고 사실적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 장막문에서이었고 시간은 오정 즈음이었다. ‘오정 즈음’이라는 원어(케콤 하이욤)는 ‘낮의 뜨거움’이라는 뜻으로 ‘한낮 즈음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시공세계 속에 나타나셨다.

[2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았다가 맞은편에 사람 셋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세 사람 중 둘은 천사요 하나는 하나님이셨다. 다음에 나오는 10절과 13절은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또 여호와 하나님은 계속 아브라함과 대화하고 계셨고 두 사람만 소돔성으로 갔고 19:1은 두 천사가 소돔성에서 롯의 영접을 받은 것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이 보통 분이 아니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유대교 정통 서기관들인 마소라 학자들은 3절의 ‘내 주여’라는 말을 하나님께 대한 호칭인 아도나-이로 읽었다.33) 히브리서 13:1-2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했다.

[2-5절]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2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정성껏 손님을 대접하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본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36, 40). 또한 성경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하고(롬 12:13), 또 감독의 자격요건 중 하나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들었다(딤전 3:2).

아브라함은 어떻게 손님을 대접하였는가? 우선, 그는 달려가서 그들을 영접하였다. 그것은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대접했음을 보인다. 또 그는 몸을 땅에 굽혔다. 그것은 그가 겸손한 마음으로 대접했음을 보인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내 주여’라고 말했고 자신을 ‘종’이라고 말했다(3, 5절). 이것은 손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춤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고(마 20:26-27), 바울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 피차 복종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0; 엡 5:21; 빌 2:3).

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자신을 떠나 지나가지 말 것을 간청하며 그들에게 발 씻을 물을 드리고 떡을 제공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대접은 자원적이었다. 성경은 우리의 선행이 억지같이 되지 않고 자의로, 자발적으로 되어야 할 것을 교훈했다(몬 14). 또 성경은 우리의 헌금도 인색함이나 억지로가 아니고 즐거움으로 내는 것이어야 하고(고후 9:7) 양 무리를 돌보는 목회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벧전 5:2).

[6-8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은 급히 그의 아내 사라에게 가서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라고 부탁했다. 세 스아는 약 22리터로 세 사람 먹기에는 넉넉한 양이다. 또 그는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해 하인에게 급히 요리하게 하였다. ‘기름지다’는 원어(라크)는 ‘부드럽다, 연하다’는 뜻이다. 그는 맛있는 고기로 대접한 것이다. 그는 뻐터와 우유와 송아지 요리를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모셔 섰고 그들은 먹었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하되, 즐거이, 겸손히, 간절히, 자원적으로, 정성스럽게 하였다.

[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그가 장막에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성경적 아내의 모습은 좋은 주부이며, 시편 128:3은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라고 표현하였다. 디도서 2:4-5는 젊은 여자들이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것을 교훈한다. 반면에, 잠언 7:11은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는 음녀’에 대해 묘사한다.

[10절]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9절에는 ‘그들이 . . . 이르되’라고 말했으나, 10절은 ‘그가 가라사대’라고 말한다. 말씀하는 주체가 ‘그들’에서 ‘그’로 바뀌었다. 여기에 ‘그’가 누구인지는 13-14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는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기한이 이를 때에’라는 원어(카에스 카이야)는 직역하면 ‘소생하는 때에’ 즉 ‘오는 봄에’라는 뜻이다(BDB).

[11-15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다.34) 사라는 그의 말씀을 듣고 웃으며 그와 그의 남편이 늙었으니 무슨 낙이 있겠는가라고 속으로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으며 부정적인 말 함을 지적하시며 그의 약속을 반복하셨다. ‘기한이 이를 때에’라는 말(람모에드 카에스 카이야)은 ‘오는 봄에, 정한 때에’라는 뜻이다(왕하 4:16-17에도 같은 표현 나옴).

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이시다(창 17:1). 그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민 11:23; 신 32:39; 욥 42:2; 눅 1:37).

[16-19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성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내가 그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셨다(19절). ‘내가 그를 택하였다’는 원어(예다티우)는 ‘내가 그를 알았다’는 단어이다. ‘안다’는 말은 ‘호의적으로 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선택하심을 의미한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둘째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의(義)를 행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19절,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하나님의 주관심은 사람이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그 자손들에게 명령하고 가르쳐야 할 내용이다. 부모는 자녀들을 의의 말씀으로 교육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8-19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12:3에 나와 있는 말씀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또 이 약속은 창세기 22:18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것은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복이다.

1절부터 1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가진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자. 하나님께서 역사상 나타나셨음과 그의 약속하신 모든 말씀을 믿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능력과 약속을 믿자.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들처럼 회의주의자나 불신앙자가 되지 말자. 주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22:29).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자. 세상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과 받지 못한 자들이 있다. 선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의인 되고 실제로 의롭게 사는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생과 영광스런 천국이 약속되어 있다.

셋째로, 우리는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자. 선행은 경건과 의의 한 열매, 중요한 한 열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손님 대접도 잘하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장로의 자격 요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즐거이, 겸손히, 간절히, 자원적으로, 정성스럽게 손님 대접을 하였다. 우리도 그런 선한 인격자가 되자.

[20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한 도시가 악화되는 것은 매우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악한 자들의 악한 행위로 인해 의인들의 고통과 부르짖음이 있고 여론의 지적과 비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악의 세력이 커지고 악에 대한 반대는 약해진다. 도시는 점점 더 악에 물들어간다.

사회의 도덕적 갱신과 회복은 오직 종교적 각성에서만 가능하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종교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도시, 그 사회는 도덕적 갱신의 가망성이 없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컸다. 그것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의인들과, 그 사회에서 밀려나고 사라져 가는 순진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부르짖음이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외치는 큰 소리를 들었다(계 6:9-10). 그런 부르짖음이 소돔성을 위해서도 있었을 것이다

또 선한 천사들의 부르짖음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의인들을 섬기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8:10). 또 소돔성에 살았던 의로운 롯의 부르짖음도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2:7-8에 보면, 소돔성에 살았던 의로운 롯은 날마다 저 무법하고 불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들을 보고 들음으로 심령이 상하고 고통을 느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곳으로부터 건져주셨다.

소돔의 죄악은 심히 무거웠다. 죄는 다 악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비교적 작은 죄가 있고 비교적 크고 중대한 죄가 있다. 작은 죄란 ‘부지중에 지은 죄, 실수로 지은 죄, 연약하여 지은 죄’를 가리킨다. 크고 중대한 죄란 ‘알면서, 고의적으로, 반항적으로 지은 죄’를 가리킨다. 우리는 큰 죄를 짓지 말고 작은 죄도 조심해야 한다.

[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소돔성의 죄악된 형편을 확인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유한(有限)한 사람처럼 직접 확인하셔야 비로소 무엇을 아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의 확인하심은 실상 우리로 확인케 하시는 뜻이 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으로 인해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다. 우리는 소돔성의 멸망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이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말세의 적그리스도 왕국과 배교한 교회도 그러할 것이다. 성경은 그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께서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고 말한다(계 18:5). 마침내 세상의 종말이 온다.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세 명의 사람들 중 하나님을 뺀 나머지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창세기 19:1은 소돔성에 두 천사가 나타났다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는 구절의 원래 히브리어 원문은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계속 서 계셨더니”이었으나, 유대교 서기관들이 오래 전에 이 구절을 한글개역 본문과 같이 수정하였다.35) 그러나 다음 절의 주어가 ‘아브라함’이므로(한글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본절의 주어는 ‘아브라함’보다 ‘여호와’가 더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으시고 계속 그 앞에 서 계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근히 하셨고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이사야 41:8에 보면, 그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셨다.

[23-25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50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50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갔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양심에 거리낌을 가지면 가까이 나갈 수 없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8). 주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3:20-21).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라.” ‘친근히 한다’는 원어(다바크)는 ‘꼭 붙든다’는 뜻으로 가까이 함을 뜻한다. ‘부종(附從)한다’고 번역되기도 하였다(신 11:22). 야고보서 4:7-8,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아브라함의 질문은 당돌하게 보였다. 그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책망하는 듯한 어투로 말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질문의 내용은 정당하였다.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다루셔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셔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단지 아브라함은 너무 세상을 관대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죄악된 소돔성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의인이 50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는 무지하였다. 그는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잘 모르고 있었다. 세상을 무조건 나쁘게만 보아서도 안 되지만, 세상을 너무 좋게만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26-27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성중에서 의인 50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비천함과 무례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라는 원어(아노키 아파르 와에페르는 ‘저는 티끌과 재입니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티끌과 재와 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본래 흙(티끌)으로 지음을 받았다. 창세기 2:7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했는데, 거기에 ‘흙으로’라는 원어(아파르 민-하아다마)는 ‘땅의 흙으로’라는 뜻이며, 거기에 흙이 바로 본문에 ‘티끌’과 같은 말이다. 히브리어로 ‘아담'은 첫사람의 이름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보통명사이기도 한데, 사람(아담)은 땅(아다마)에서 나왔다. 사람은 티끌과 재와 같은 존재이다.

[28-31절] 50 의인 중에 5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5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45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4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40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3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30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2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20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의 계속되는 끈질긴 대화는 그의 확고한 도덕적 신념을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심판하셔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는 그의 무지한 관대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례한 대화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지함과 연약한 생각을 오래 참으셨고 너그럽게 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인간을 상대해주셨고 단번에 무시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너그러움과 인내도 배워야 하겠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겠다. 어떤 때는 어린아이가 더 바르고 좋은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무지하고 무례한 질문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32-33절]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1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10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소돔과 고모라 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롯의 가족들이 겨우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것도 그의 아내는 실패하고 두 딸들은 근친상간적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면 실상 의인은 롯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소돔성에 살면서 마음 고생만 많이 했고 결국엔 빈손으로 그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베드로후서 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20절부터 33절까지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큰 죄를 짓지 말자. 죄 중에는 부지중에, 연약하여, 실수로 짓는 죄도 있지만,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반항적으로 짓는 죄가 있다. 부지중에, 연약하여, 실수로 짓는 죄는 그래도 작은 죄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죄도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노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알면서 짓는 죄, 고의적인 죄, 반항적이게 짓는 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큰 죄이다. 그것은 회개의 가망성이 거의 없는 죄이다. 그런 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고칠 수 없는 심령의 심각한 병이다. 우리는 큰 죄를 짓지 말자. 우리는 멸망하는 소돔성 사람들처럼 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심을 알자. 하나님은 불의하거나 편벽된 심판자가 아니시다. 그는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무정한 자가 아니시다. 그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악에 대해서는 엄격하시다. 그는 사람의 행한 대로 공의롭게, 철저하게 심판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러므로 전도서 12:14에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했다. 또 로마서 2:6-8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

셋째로, 우리는 성의 멸망을 막을 의인 10명이 되자. 소돔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서울은 소돔성보다 나은가? 오늘날 서울의 밤거리는 소돔의 밤거리보다 나은가?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불경건하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되고 있다. 현대 문명은 부도덕하고 음란한 문명이 되고 있다. 지구의 종말이 오고 있다. 세상이 멸망할 때, 거기에서 구출될 노아의 여덟 식구들은 누구인가? 서울의 멸망을 막을 의인 10명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해질지라도, 우리는 남은 자가 되자.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자.

 

19장: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소돔성이 위치한 요단 들은 비옥한 땅이었고 그들에게는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었다(창 13:10; 겔 16:49). 그러나 소돔성 사람들은 큰 죄인이었고 그들의 죄는 심히 컸다(창 13:13; 18:20).

[1-3절]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성 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經夜)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無酵餠)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에게 찾아 왔던 세 사람들 중 하나님을 제외한 천사 두 명은 날이 저물 때에 소돔성에 이르렀는데, 성 문에 앉아 있던 롯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몸을 굽혀 절하며 말했다. “내 주여, 당신의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지내리라”고 하자, 롯은 간청하여 그들을 집으로 들였다. 롯은 그들을 위해 식탁을 베풀고 누룩을 넣지 않은 가루반죽으로 떡을 구워 대접하였다. 롯은 손님을 친절히, 겸손히, 간절히 영접하며 대접하였다.

[4-5절]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그들이 눕기 전에 소돔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많이 모여와 그 집을 에워쌌고 롯을 부르며 말했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상관하리라’는 원어(네드아)는 ‘알리라’는 말로서 ‘성적으로 관계하리라, 성 관계를 가지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동성애(同性愛)를 가리킨다. 동성애는 음란의 변태적 형태로서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죄악이다(레 18:22). 소돔성은 어른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전체적으로 매우 타락하여 있었다.

[6-8절]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롯은 문 밖으로 나아가 뒤로 문을 닫고 말했다. “내 형제들아, 제발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롯은 자기 집에 들어온 귀한 손님들을 동성애의 악으로부터 지키기를 원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엄하게 키웠던 순결한 두 딸을 대신 내어주겠다는 제안까지 하였다. 그의 제안이 옳아보이지 않지만, 그는 손님들을 위해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9절]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소돔 사람들은 “너는 물러나라.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고 말하면서 롯을 밀치며 그 문을 부수려 하였다. 그들은 무법한 폭력자들이었다. 소돔성은 무법한 성이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의 인격을 참으로 존중하지 못할 것이다.

[10-11절]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천사들은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밖의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문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문을 찾느라 피곤하도록 애썼다. 천사들은 필요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기한 일을 행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 때에도 그를 잡으려고 도단 성을 포위한 아람 군사들의 눈을 어둡게 하였다(왕하 6:18).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보호하셨다.

[12-13절]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천사들이 롯에게 말했다.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하나님 앞에 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려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은 죽은 의인들이나 롯이나 천사들의 부르짖음일 것이다. 그 성은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롯에게 속한 자들은 성밖으로 도피하여야 했다.

[14절]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은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성을 멸하실 것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훗날 니느웨 사람들은 “40일 후에 이 성이 망하리라”는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멸망받을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

[15-17절]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동이 틀 때 천사들은 롯을 재촉하였다. “이 성의 죄악 중에 멸망하지 않도록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자 그들은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성 밖으로 인도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다. 천사들은 또 말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그 성과 함께 멸망을 받지 않으려면, 롯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성을 멀리 떠나야 했다. 이 세상이 장차 멸망할 곳임을 아는 자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18-22절]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롯은 산까지 도망가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한 작은 성으로 피하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천사들은 말했다.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나님께서는 롯을 아끼셨다. 그는 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와 그 가족이 소알이라는 작은 성에 도피하기까지 기다려주셨다.

[23-25절]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쏟아 내리셨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와 거기 살던 모든 사람과 생물을 다 엎어 멸하셨다. 하나님은 불경건하고 음란한 그 성에 무서운 불의 심판을 내리셨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증거되었던 하나님의 공의가 또다시 증거되었다. 그 비옥했던 요단 들은 사람들의 큰 죄로 인해 황폐하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오늘날 유대 땅의 동남부에 위치한 염해(鹽海) 속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그 바다는 매일 평균 500만톤의 물이 흘러 들어오지만, 섭씨 40도의 고온으로 계속 증발하여 일정한 수위(水位)를 유지한다고 하며 그 염도는 보통 바닷물의 10배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염해라 불리고 또 물고기들이 살지 못한다고 해서 사해(死海)라고도 한다. 아랍인들은 그것을 ‘소돔 고모라의 바다,’ ‘롯의 바다’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바닷물은 염분 외에 마그네슘, 소듐, 칼슘 등의 무기물이 풍부하고 그 주위에는 역청 진흙과 유황도 많다고 한다.36)

[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다. 사해 남단에는 ‘소돔의 산’이라고 불리우는 소금 산이 있다. 길이 약 10km, 너비 약 5km, 높이 약 300m인 이 산의 표면은 몇 자 정도 흙으로 덮여 있으나 그 속은 딱딱한 소금이라고 한다(Amplified Bible).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가 아마 그 속의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께서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7:32). 그것은 세상과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영생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교훈이다.

[27-29절]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에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소돔성에서 건져주셨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자 했던 롯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다.

[30-38절]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롯은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해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굴에 거하였다. 롯의 딸들은 아버지께 술을 먹이고 동침하여 그로 말미암아 후손을 가지려는 생각을 하였다. 그 근친상간적 생각은 소돔성에서 듣고 배운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레위기 18장).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기다려야 했다. 롯의 딸들은 임신하여 각각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

창세기 19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는 소돔의 죄악이다. 소돔성은 비옥한 땅에 위치하여 물질적 유여함을 누렸지만, 심히 죄악되었다. 그 증거가 본문에 기록된 무법하고 난폭한 동성애 풍조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성적 순결과 단정함과 염치도 없었다.

둘째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과 그 주위의 모든 사람을 유황불비를 내려 완전히 멸망시키셨다.

셋째는 롯의 구원이다. 롯은 하나님의 긍휼로 겨우 구원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그의 딸들도 소돔의 죄악된 풍조에서 완전히 떠나 있지 못했다. 세상에 참 의인이 없지만, 롯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다.

본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자. 죄악된 세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은 불경건하고 음란한 도시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의 한 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마지막 불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살인자, 행음자, 우상숭배자, 거짓말하는 자 등 모든 죄인은 최종적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한다(계 21:8).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자. 롯은 유황불비로 멸망할 소돔에서 구원을 받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유황 불못인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요 3:16; 롬 6:23). 모든 죄를 회개함으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또한 이 구원의 소식을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자.

셋째로, 우리는 이제 죄를 짓지 말자. 소돔의 멸망은 죄악 때문이다. 우리는 이 죄악된 세상을 본받지 말자(롬 12:2).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지 말며 죄인의 길에 서지 말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고(시 1:1), 오직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실행함으로써 범죄치 말자(시 119:11).

 

20장: 아내를 빼앗김

[1-2절]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다가(창 13:18; 18:1) 남방으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에 살다가 그랄에 우거하였다(원문). 남방(네게브)은 헤브론에서 애굽 시내와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 그는 그랄에 거하면서 그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겼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애굽에 내려가 우거할 때에도 그 아내를 잃어버린 일이 있었는데(창 12:15), 이번이 두 번째이었다. 사라는 89세가 된 때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으나 거짓말함으로써 자기 목숨과 아내를 맞바꾸었다. 거짓말은 죄악이다. 사람이 범죄하면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이다.

[3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꿈에 나타나 네가 남의 아내를 취하였으므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꿈에 말씀하시는 것은 옛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죽음으로 위협하셨다. 그것은 남의 아내를 취한 것이 죽을 만한 큰 죄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레 20:10). 죽음의 위협은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아브라함이 비록 연약하여 거짓말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비상한 개입으로 위기에서 그와 그의 아내 사라를 건지셨고 보호하셨다.

[4-7절]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아비멜렉은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 대답하였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이 말을 보면 아비멜렉은 상당히 도덕적 인물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도 도덕적 인물이 인정을 받고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꿈에 말씀하셨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하나님은 그가 비교적 양심적인 인물임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를 막아 그로 ‘그에게 범죄치 않게’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죄는 다 하나님께 대한 죄이다.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아내와의 불륜이 큰 악이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창 39:9). 다윗도 밧세바를 범한 죄를 회개하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고백하였다(시 51:4).

6절에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라는 원어는 ‘여인을 만지지 못하게 함’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간음이 큰 죄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고 죽음으로 그를 위협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었다.

[8-9절]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든 신하들을 불러 그 일을 말했다. 사람들은 심히 두려워하였다. 아비멜렉은 또 아브라함을 불러서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라고 말했다. 아비멜렉은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큰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왕으로서 그런 죄를 지으면 온 나라가 죄에 빠진다고 깨닫고 있었다. 이것은 양심에서 나온 판단이며 세속사회에 주신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이다.

[10-13절]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異腹)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異腹)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그랄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서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속사회에서 참된 도덕적 행위를 기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잠 16:6). 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거짓말하는 죄를 지었다.

사라가 그의 이복누이이기는 하였다. ‘나의 이복누이’라는 구절은 원문에 ‘나의 아버지의 딸이지만 나의 어머니의 딸은 아닌 나의 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사라는 그의 아내이므로 ‘나의 누이’라는 말은 반쯤 거짓말이며, 반쯤 거짓말도 일종의 거짓말이었다.

[14-16절]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아비멜렉은 양들과 소들과 노비들을 아브라함에게 주었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었다. 또 그는 아브라함에게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고 말했다. 또 그는 사라에게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고 말했다. ‘네 수치를 푼다’는 원어는 문자적으로는 ‘너를 위해 눈을 가리운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연약 때문에 당했던 그 위기에서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상한 개입으로, 그의 크신 긍휼과 돌보심으로 된 일이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17-18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출산케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때문에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으셨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20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범죄하게 되고, 범죄하면 아내를 빼앗기는 것 같은 어려운 문제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범죄하는 자에게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 형벌만 두려워하자.

둘째로, 사람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 도덕적이어야 하고, 적어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도덕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고 양심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다. 옛날 그랄 왕 아비멜렉은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큰 죄임을 알고 있었다. 도덕성은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이며, 사회의 도덕성은 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둥이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사회의 도덕성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자멸하고 말 것이다. 왕이 범죄하면 나라가 환난을 당하고 부모가 범죄하면 가정과 자녀들이 그러할 것이다. 부도덕한 사회는 망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사회가 도덕적인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며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죄악을 떠나며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위험에서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며 여인의 태를 닫기도 하시고 열기도 하신다. 그는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며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21장: 이삭과 이스마엘

1-21절, 이스마엘을 내보냄

본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신 일과 여종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게 된 일을 기록한다.

[1-2절]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25년 전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살던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복을 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창 12:2-3). 또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는 봄 정한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7:21; 18:10, 14).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택하신 자, 곧 그를 경외하는 아브라함에게 복된 약속을 주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그가 약속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권고(眷顧)한다’(파카드)는 원어는 ‘돌아본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돌아보셨고 약속을 지키셨다. 사라는 임신하였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셨고 그 약속의 말씀도 신실하였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성경을 주신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는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모든 약속과 말씀은 신실한 말씀이다.

[3-5절]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8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100세라.

아브라함은 사라가 그에게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라고 하신 이름이었다(창 17:19). 이삭(이츠카크)은 ‘그가 웃는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난 지 8일째 되는 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창 17:10, 1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었다.

이삭이 출생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이었다. 2절은 아브라함을 ‘늙은 아브라함’으로 말하고, 7절은 이삭을 ‘아브라함 노경에’ 얻은 아들로 말한다. 원문은 같다. 100세된 노인이 아들을 얻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해보였다. 창세기 17:17은 사라의 나이가 90세라고 말하며 또 창세기 18:11은 사라의 경수(經水)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능력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었다(창 18:14).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6-7절]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이삭을 출산한 사라는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웃음은 기쁨과 행복이 넘친 웃음이었다. 늙은 자신들을 통해 아들이 출산된 것은 참으로 자신들 뿐만 아니라 그 소식을 듣는 모든 친지와 이웃도 함께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아브라함에게 감히 말할 자가 없었으나 그는 아브라함 노경에 아들을 낳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었다.

[8-9절]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大宴)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아이는 잘 자랐고 젖을 떼는 때가 되었다. 그것은 보통 3살쯤이라고 추측된다.37) 어린아이가 병약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려는 잔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보았다. 그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7살이며 조심할 만한 나이이었다. 더욱이 한 집에 배 다른 두 형제가 사니 이런 일은 예상할 만한 일이었고, 하갈이 좀더 생각이 있었다면 아들 이스마엘을 엄히 교훈하고 단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것 같고, 사라는 그 일로 마음이 몹시 상했다.

[10-11절]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사라의 감정은 일반 여인들의 감정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사라의 요청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 심히 근심하였다. 아들까지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큰 근심의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하갈을 첩으로 얻었을 때부터 예상된 문제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부족에서 왔고 한 집에 같이 살면서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문제이었다. 서로 헤어지는 것이 불가피해보였다. 이스마엘도, 하갈도, 사라도 완전한 인격은 못되었다.

[12-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문제로 고민하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입을 것이지만, 사라에게서 난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참된 계보를 잇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삭을 위해, 이삭을 위주로 섭리하실 것이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예표이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자들이다(요 1:12). 또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한다(롬 8:28).

[14-16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였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해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보냈다. 인간적으로는 마음이 안 된 일이었지만, 가정의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그들을 내보내는 길뿐이었다. 여기에 인간의 연약함이 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부족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갈도, 이스마엘도, 사라도 다 부족하였다.

하갈은 아들과 함께 나가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였다. 브엘세바는 유다 땅의 맨 남쪽에 있고 남방(네게브) 지역에 속하였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하자, 하갈은 그 아들을 한 떨기나무 아래 두고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말하며 살 한 바탕쯤 떨어져 아들 이스마엘을 마주 앉아 바라보며 크게 울었다. ‘살 한 바탕’ 거리는 2, 3백m쯤 된다고 한다. 하갈의 눈물은 자신과 아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아들 이스마엘도 울었다.

[17-21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그때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 ‘아이’라는 원어(나아르)는 ‘청년’이라는 뜻도 가진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늘로부터 하갈을 불러 말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또 그의 눈을 밝히시므로, 하갈은 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들에게 마시웠다.

이스마엘은 비록 이삭과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불안하고 두려운 광야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도 함께하셨다. 이스마엘은 커서 광야에 거하며 활쏘는 자가 되었고 하갈은 그를 위해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선택된 백성이 아닌 자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다(욘 4:11).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햇볕과 비를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 5:45).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신다고 말했다(행 10:35).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도 자비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자연만물에게도 자비하시다. 시편 104편은 땅의 짐승들이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며 그가 주신즉 그것들이 취하며 그가 손을 펴신즉 그것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한다(27-28절).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다(욥 38:41). 주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풀을 입히신다고 말씀하셨다(마 6:26, 30).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자. 그는 살아계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꼭 지키신다. 그는 전능하시다. 그는 모든 일을 언약 백성을 위해 섭리하신다. 그러나 그는 만인에게 자비하시다. 그의 긍휼과 선하심은 심히 크시다. 그는 겸손히 그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삶의 참된 해답이시다. 그는 인생의 삶에 목적과 방향을 주시고 방법을 알려주신다. 그는 우리에게 소망과 영생을 주시고 이 땅에서의 행복도 주신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방향은 무엇이며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방향 그리고 여러분의 소망이 하나님이심을 아는가?

22-34절,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음

본문은 그랄 왕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서로 언약을 맺은 사건의 이야기다. 이것은 평범한 사건처럼 보인다. 이 평범하게 보이는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무엇인가?

[22-24절]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낸 때 즈음,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방인 아비멜렉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심이 저 이방인에게도 증거된 것이다.

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서로 해치지 않기를 맹세하는 언약을 맺자고 제안한 것이다. 환경적으로 불안했을 아브라함에게 이런 언약은 더 나은 안정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요청에 응하였다.

역사상 신앙의 열조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였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증거하였다. 아브라함이 그러하였다. 그의 아들 이삭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26:28에 보면, 그랄 왕 아비멜렉은 그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고 말했다. 요셉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39:3에 보면, 그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가 생활하고 있었을 때, 그 주인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 다니엘도 그러하였다. 다니엘 4:8에 보면,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은 그의 안에 거룩한 신의 영이 있다고 증거하였다.

[25-31절]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아브라함은 그때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기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 말하며 그를 책망하였고 아비멜렉은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고 해명하였다. 아브라함은 양과 소를 취하여 그에게 주었고 서로 언약을 맺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를 준 것은 그의 호의와 우정에 대한 표시인 동시에 언약을 맺는 데 필요한 제물로 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 아브라함은 암양 새끼 일곱을 따로 구별하여 그에게 주려 하였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자신이 그 우물을 팠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라고 그에게 말했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언약을 맺고 맹세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의롭고 너그럽게 처신하려고 애썼다. 그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상대에게 지적하고 책망하기도 하였고 선물을 통해 상대방의 호의와 우정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의와 선과 진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수적 덕목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였다(엡 5:8-9).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벌려 해서는 안 된다. 잠언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잠 16:8). 또 집사의 자격에는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않는 것이 포함된다(딤전 3:8).

성경은 우리에게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교훈한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하셨다(마 5:44-45).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했다(롬 12:17, 20-21).

[32-34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웠고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는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다. ‘에셀나무’는 타마리스크 나무 또는 위성류라고 한다.

또 아브라함은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엘 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하나님은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천지만물은 그가 창조하신 것이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셨다. 모세는 시편 90:1-2에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경건이며, 거기에 영생의 길이 있다.

천지만물은 지금 낡고 쇠하여지고 있다. 시편 102편에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말했다(시 102:26-27). 성경은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전 1:2).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벧전 1:24-25).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6: 27).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낡고 쇠해지고 썩어지지만, 오직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그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하다(벧전 1:25).

오늘 평범하게 보이는 이 사건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 가지 귀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신앙의 열조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삶 속에서 체험하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증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둘째로, 우리는 신앙의 열조들처럼 의롭고 너그러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셋째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되면, 첫째 것과 둘째 것도 이루어질 것이다.

 

22장: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명령을 하신 것과 그가 그 명령을 순종한 것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선언하신 것을 증거하며, 또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자손들에 대해 조금 기록한다.

[1-2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런 일들, 즉 이삭이 출생되어 자람, 이스마엘을 내보냄,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음 등의 일들이 있은 후, 아마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명령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그 명령은 아브라함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지나쳐 보이는 명령이었다. 이삭은 그가 약속하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로 인해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 21:12)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귀하고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스런 아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자이시며 그의 명령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오직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감하지 말고(신 4:2; 12:32),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신 5:32)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이 명령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교훈하는 뜻이 있다. 주 예수께서도,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26-27, 33).

순종은 온전해야 한다. 부분적 순종은 불순종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울 왕에게서 생생하게 증거되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 왕 아각과 또 양과 소와 어린양 중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었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고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삼상 15:9-11). 또 사무엘은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지적하였다(삼상 15:22-23).

[3-4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묵묵히 순종하였다. 그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무엇을 질문하거나 대항하지 않았다. 그는 지체치 않고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 즉 종들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즉 모든 준비를 갖추고 하나님의 지시하신 곳으로 떠났다. 제삼일에 그는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까지는 삼일 길이었다. 모리아산은 바로 예루살렘이다. 역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아브라함이 거주한 브엘세바에서(창 22:19) 모리아산 즉 예루살렘까지는 지도에 보면 약 70km의 거리이다. 그 정도면 서울 광화문에서 청평이나 용인까지의 거리이다. 그것은 긴 여행이었다. 또 그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고통스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순종하며 자신의 감정을 이겨내었다. 그의 순종은 일시적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삼일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5-8절]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나와 아이 곧 우리가(원문)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갔다가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19는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를 취하여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였다. 번제할 나무를 진 것을 보면 이삭의 나이가 15살은 되었을 것 같다. 그때 이삭은 말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당황스런 질문을 듣게 된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다.

[9-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가지런히 놓은 후 이삭에게 말했을 것이다. “아들아, 하나님이 너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았다. 이삭은 아버지께 반항한 것 같지 않다. 아버지처럼 이삭도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것 같다. 아브라함은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막지 않으셨다면, 그는 아들을 죽였을 것이다.

[11-12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것은 다급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이기를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은 이삭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단지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시험하여 무엇을 확인하신다는 것은 인간적 표현 즉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이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중심을 아시지만, 이 일을 통해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사자는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다.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는 표현은 그가 곧 하나님 자신임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은 충분히 검증되었다. 비록 그가 독자 이삭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그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를 사랑했고 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였다. 이것이 참 경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시며 그의 명령은 인간이 순종해야 할 절대적 명령이다.

[13-14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 이삭 대신 한 숫양을 준비하셨다.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뿔이 수풀에 걸린 한 숫양을 보았다. 그는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보시리라 혹은 준비하시리라”는 뜻이다. 그 후에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15-19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하나님의 사자의 두 번째 음성은 복의 선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면서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믿을 만하지만, 특히 맹세하며 선언하신 말씀은 더욱 그러하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복을 선언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기 때문이다. 18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복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창케 하시고 복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고 그 대적의 문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 자손이 혈통적으로, 수적으로, 세력적으로, 또 영적으로 번창할 것을 뜻한다. 또 대적의 문을 얻는다는 말은 대적들을 정복한다는 뜻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메시아 예언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받을 것을 뜻한다. 과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은 죄와 사탄의 권세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 복이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약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20-24절]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아키카 יאָ)[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이 일들 후에 아브라함은 형제 나홀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내 밀가는 여덟 아들을 낳았다. 우스는 욥이 살았던 땅의 선조 같고(욥 1:1) 브두엘은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낳았다. 또, 아마 밀가가 죽은 후, 나홀은 르우마를 후처로 얻어 네 아들을 더 얻었다.

본장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본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이제 그를 통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복을 얻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받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예로 우리에게 교훈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지혜와 능력, 그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세상의 가장 귀한 것보다 더 귀히 여기고 그의 모든 명령을 즐거이 순종하자.

셋째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복된 길임을 알자.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높임을 받으셨다(빌 2:8-11). 순종에는 큰 상이 따른다(계 22:12).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큰 복을 누리자.

 

23장: 사라의 죽음

[1-4절] 사라가 127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아름답고 사랑스런 사라, 아브라함과 결혼하여 아마 80년 이상을 같이 살았을 그는 127세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원문)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이었다. 기럇 아르바는 헤브론의 옛이름이었다(수 14:15; 삿 1:10). 사람은 다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도 죽는다. 누구나 죽을 때가 있지만,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들어가 아내의 시체 앞에서 슬퍼하며 애통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다. 아브라함은 슬픔 중에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the Hittites)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나그네와 우거한 자로 살고 있었다. 사실, 세상은 인간의 영원한 거처가 아니다.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다. 다윗도 고백하기를,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했다(대상 29:15). 우리의 참 고향은 죽음과 이별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다.

옛날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죽은 자의 시체를 매장(埋葬)하였다. 매장은 부활 소망에 가장 적합하다. 사람의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 현상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몸을 떠나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가고 몸은 무덤에 묻힌다. 마지막 날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죽은 성도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할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말하고(고전 15:51-52), 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살전 4:16-17).

우리는 또한 영생을 믿는다.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요일 5:13). 또 사도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말했다(딤전 6:12).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자답게 살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했다(벧전 1:17).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했다(요일 2:15, 17).

[5-6절]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라고 말했다. ‘내 주여’라는 표현(6, 11, 15절)은 일반적인 존칭어이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방백’이라는 원어(네시 엘로힘)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라는 뜻으로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와 위엄을 느끼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이웃 사람들에게서 선한 증거를 얻은 자이었다(딤전 3:7).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게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호의적인 말을 하였다.

[7-11절]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때에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았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호의적인 말에 대해 일어나 그들을 향해 몸을 굽혀 답례하며 말했다.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 끝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값을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그때에 에브론이 거기 앉았다가 모든 자들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였다.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호의적인 말에 대해 감사하는 표시로 그들을 향해 몸을 굽힌 것은 그의 겸손을 보인다. 우리는 전에 그가 집에 온 손님들을 접대하는 모습에서도 그의 겸손함을 보았었다. 그는 집 앞에 온 손님들을 보고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몸을 땅에 굽히며 그들을 영접하였다(창 18:2). 경건한 아브라함은 겸손한 인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의 덕을 교훈하신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또 잠언 11:12는, 지혜 없는 자는 이웃을 멸시한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겸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빌 2:5). 또 주께서는 교훈하시기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마 23:11-12).

[12-15절]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 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400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6-20절]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400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아브라함은 다시 그 땅 백성을 향해 몸을 굽히고 그 밭값을 정당히 지불하고 매입하기를 원하였다. 땅 주인 에브론이 그 땅을 그냥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아브라함은 정당하게 당시 장사들이 사용하는 세겔로 은 400세겔을 달아 주고 그 땅을 샀다. 400세겔은 약 4.6 kg이었다.38) 그 땅은 모든 증인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지가 되었다. 그런 후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의 시신을 그 밭의 굴에 안장(安葬)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밭을 정당한 값을 주고 샀다. 그는 물질 생활에서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정당하게 살려 하였다. 그것이 의와 사랑이다. 사람의 인격성은 그의 정확한 돈 계산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정당하게 돈을 벌고 정당하게 물건을 소유해야 한다. 도적질은 악한 일이며,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토색하는 것도 악한 일이다. 그것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악들 중에 포함된다고 성경은 말한다(고전 6:9-10).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죽음을 대비하자. 인간은 어느 날 죽는다.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넷길이며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하자. 믿음, 소망, 사랑으로 그렇게 하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과 영생을 소망하며 성도답게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행하자.

둘째로, 겸손한 인격의 열매를 맺자.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는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자임을 안다.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셋째로, 정정당당하게, 의롭게 살자. 남에게 해를 주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선을 베풀고 유익을 주며 살자. 결코 불의의 이익을 탐하지 말자. 주의 교훈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자(마 6:33).

 

24장: 이삭의 아내를 택함

[1-2절]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이제 그의 외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를 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140세이었고 아내 사라가 죽은 지 3년 후쯤 되었다.39) 그는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을 불러 이삭의 아내 구하는 일을 맡겼다. 아브라함은 그 종에게 그의 손을 자기 환도뼈 밑에 넣으며 하나님께 맹세하라고 말했다. ‘환도뼈 밑에’ 넣는 것은 허벅지 밑에 놓는다는 뜻으로 옛날 맹세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3-4절]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은 그 종으로 하여금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케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땅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천지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요 왕이신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그 종으로 하여금 맹세케 한 내용은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그 아들을 위해 아내를 택하지 말고 그의 고향 친족 중에서 택하라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예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리라”고 예언하였었다(창 9:25-26). 가나안은 저주를 받은 족속이었다. 불완전하지만, 인류의 경건은 셈 족을 통해 전달되어 왔다.

[5-6절]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7-9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또 아브라함은 종에게 만일 그 여자가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할지라도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는 말라고 두 번이나(6, 8절) 반복하여 명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고향에서 불러내시고 이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이 약속의 땅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아브라함은 그의 종에게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그 앞에 보내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안에서 가진 확신이었다.

[10-11절] 이에 종이 그 주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 약대를 성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

나홀의 성은 창세기에서 ‘밧단 아람’(창 25:20; 28:2, 5, 6, 7; 31:18; 33:18; 35:9, 26; 46:15) 혹은 ‘하란’(창 27:43; 28:2, 10)으로 언급되었다.

[12절]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 종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45절). ‘우리 주인’이라는 원어는 ‘나의 주인’이다. 그러면 창세기 24장에 ‘나의 주인’이라는 말이 19번 나오는 셈이다(12, 12, 14, 27, 27, 27, 35, 36, 36, 37, 39, 42, 44, 48, 48, 49, 54, 56, 65절). 그 종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13-14절]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그 종은 기도 중에 이삭의 아내가 될 소녀를 확인할 구체적 방법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운 생각이었다. 노인에게 물을 대접하는 소녀는 착한 성품의 사람일 것이다. 또 약대들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는 것도 착한 성품이다. 잠언 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15절]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그 종이 마음으로 한 기도를 끝내지 못하여서 응답이 왔다.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우물가로 나왔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즉각적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그 경건한 종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16절]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17-20절]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우기를 다하고 가로되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긷는지라.

[21절]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리브가는 얼굴이 아름다웠고 순결한 처녀이었다. 또 그는 노인의 요청에 물을 드렸고 약대들을 위해서도 물을 주었다. 본문은 ‘급히’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며(18, 20절), ‘달려가서’라는 표현도 사용한다(20절). 그것은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선을 베푼 것을 보인다. 그는 거룩하고 착한 인품을 가진 자이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소녀를 묵묵히 주목하면서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 주신 여부를 알기를 원했다.

[22절] 약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중 금고리 한개와 열 세겔중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1 세겔은 약 11.4g을 가리킨다. ‘고리’라는 원어(네젬)는 ‘코나 귀에 끼는 고리’를 가리킨다고 한다.

[23-25절] 가로되 네가 뉘 딸이냐? 청컨대 내게 고하라. 네 부친의 집에 우리 유숙할 곳이 있느냐?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또 가로되 우리에게 짚과 보리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

‘보리’라고 번역한 원어(미스포)는 ‘마초, 꼴’이라는 뜻이다.

[26-27절]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집(베스 아케)[형제들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 종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인자와 진실을 베푸셨고 자기를 선히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성실’이라는 원어는 ‘진실’이라는 뜻이다.

[28-31절] 소녀가 달려가서 이 일을 어미 집에 고하였더니 리브가에게 오라비가 있어 이름은 라반이라. 그가 우물로 달려가 그 사람에게 이르니 그가 그 누이의 고리와 그 손의 손목고리를 보고 또 그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때에 그가 우물가 약대 곁에 섰더라. 라반이 가로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섰나이까? 내가 방과 약대의 처소를 예비하였나이다.

[32-34절]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약대의 짐을 부리고 짚과 보리를 약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 종자의 발 씻을 물을 주고 그 앞에 식물을 베푸니 그 사람이 가로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가로되 말하소서. 그가 가로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35-36절]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부인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37-38절] 나의 주인이 나로 맹세하게 하여 가로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나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아비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39-41절] 내가 내 주인에게 말씀하되 혹 여자가 나를 좇지 아니하면 어찌하리이까 한즉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비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네가 내 족속에게 이를 때에는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설혹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할지라도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하시기로.

41절 중간을 다시 번역하면, “만일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한다면.”

[42-44절]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나의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내가 이 우물 곁에 섰다가 청년 여자가 물을 길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하여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약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45-46절] 내가 묵도하기를 마치지 못하여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내게 마시우라 한즉 그가 급히 물 항아리를 어깨에서 내리며 가로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약대에게도 마시운지라.

‘묵도하다’는 원어의 뜻은 ‘마음에 말하다’이다.

[47-48절]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뇨 한즉 가로되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고리를 그 코에 꿰고 손목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49절] 이제 당신들이 인자와 진실로 나의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고하시고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게 고하여 나로 좌우간 행하게 하소서.

[50-51절]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대로 그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50절 하반절을 다시 번역하면, “우리는 나쁘다 혹은 좋다 말할 수 없노라.” ‘여호와의 명대로’라는 원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라는 뜻이다.

[52-53절]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리어 여호와께 절하고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 오라비와 어미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54-56절] 이에 그들 곧 종과 종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가로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리브가의 오라비와 그 어미가 가로되 소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치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7-58절]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59-60절]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61절] 리브가가 일어나 비자와 함께 약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63절] 때에 이삭이 브엘 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남방에 거하였었음이라.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40)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브엘 라해로이는 유다 땅의 최남단이며 남방(네게브)의 최남단에 있었다. 이삭은 그곳에 거하다가 거기로부터 아마 아버지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는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으로 올라왔을 것이며, 아마 거기에서 리브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64-65절]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약대에서 내려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뇨? 종이 가로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

[66-67절]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고하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창세기 24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본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그의 종으로 하여금 그 아들 이삭의 아내를 택하기 위해 맹세케 하는 행위에서 잘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여자를 이삭의 아내로 택하지 말고 그의 고향의 친족 중에서 택할 것을 맹세하게 한다. 그것은 노아의 예언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또 그는 혹시 이삭의 아내될 여자가 이 곳으로 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아들을 그리로 데려가지 말라고 명한다. 그것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그의 종 앞에 보내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둘째로, 본장은 아브라함의 종의 믿음을 증거한다. 그는 그의 주인의 요청대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였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증언이나 약속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는 자만 할 수 있는 엄숙한 행위이다. 맹세는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확정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자는 거짓으로 무엇을 말하거나 고의로 약속을 어기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건한 종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구하고 또 그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구하였다(12절). 그는 특히 기도 중에 이삭의 아내가 될 만한 소녀를 확인할 표를 생각해 아뢰었다(13-14절). 그는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 주심을 확인하기를 원했고(21절), 그것을 확인했을 때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하였다(26-27절).

특히, 그 종은 자기 위치를 바로 아는 자이었다. 본장에 의하면, 그는 19번이나 아브라함을 가리켜 ‘나의 주인’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그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종이라고 말했다(34절). 그는 종으로서 자신의 일을 완수하는 일에 충실하였다. 그는 긴 여행으로 피곤했을 터이지만, 그 앞에 차려진 식탁 앞에서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33절). 또 라반과 브두엘의 허락을 받은 후에도 하룻밤을 쉰 후에 지체치 않고 돌아왔다. 그는 참으로 경건하고 충성된 종이었다. 그는 우리 모두의 본이 된다.

셋째로, 본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 그의 아들 이삭의 좋은 아내를 예비하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형통한 길을 주셨다. 그가 기도 중에 만난 리브가는 아름답고 순결하고 착하고 민첩한 처녀이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가 분명하였다. 그것은 라반과 브두엘도 인정하는 바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대로 그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했다(50-51절). 리브가도 낯선 곳으로 따라가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무사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성도의 결혼은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되었다(신 7:3).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교훈한다(고후 6:14-16). 또 그는 성도의 결혼이 “주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것을 교훈한다(고전 7:39).

둘째로, 복된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얻는다. 복된 가정의 건립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시 127:1). 잠언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언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경건하고 착한 인품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자. 종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인을 위해 산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리브가는 교회의 예표이다. 전도자는 중매쟁이와 같다(고후 11:2). 우리는 한 명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즐거이, 담대히, 충성되이 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자. 우리는 다 하나님의 종들이다. 종에게 요청되는 최대의 덕은 주인에 대한 충성이다(고전 4:2).

 

25장: 이삭의 두 아들

1-11절, 아브라함의 후년의 삶

[1-4절]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아마 이삭이 결혼한 후 그두라라는 이름의 후처를 취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력을 주셨고 그의 아내 그두라는 아브라함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다. 그의 자손들 중에는 스바, 드단, 앗수르 등 성경에 나오는 지역 혹은 종족의 이름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같은 이름의 사람들이나 종족들이 있으므로(창 10:7, 22, 28)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5-6절]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베네 핫필라그쉼)[첩들의 아들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사랑하던 아내 사라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인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다. 이삭은 그의 주상속자이었다. 또 아브라함은 자기의 다른 아들들, 즉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그두라의 여섯 아들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이삭을 떠나 동쪽 땅, 즉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 여러 곳으로 가게 하였다.

[7-8절]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라. 그가 수(壽)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아브라함은 175세에 별세하였다. 그는 주전 2166년경에 출생하여 주전 1991년경에 사망하였다.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대의 인물이었다. 그 시대는 우리나라의 고조선 시대이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았고 기운이 다하여 숨이 끊어졌다. 본문은 그의 죽음을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창세기 15:15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이 표현은 사람이 죽음으로 그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 어떤 곳에 모이는 것을 암시한다.

[9-11절]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를 막벨라 굴에 장사함으로써 그의 장례를 치르었다. 그 굴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산 밭이었고 그 아내 사라도 거기 장사된 곳이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이제 이삭은 아브라함을 이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가 될 것이다. 이삭은 남방에 있는 브엘 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다.

12-18절, 이스마엘의 자손들

[12-18절]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12방백이었더라. 이스마엘은 향년이 137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본문은 이스마엘의 후예에 대해 기록한다. ‘후예’라는 원어(톨레도스)는 창세기에 11번이나 나오는 단어인데, 창세기가 한 사람의 저자 모세에 의해 쓰여진 책임을 잘 나타낸다. 그것은 ‘대략, 계보, 사적, 후예, 약전’ 등 여러 말로 번역되었다(2:4; 5:1; 6:9; 10:1; 11:10, 27; 25:12, 19; 36:1, 9; 37:1).

이스마엘은 12명의 아들들을 낳았고 그들은 다 열두 부족의 방백들이 되었다. 이스마엘은 137세까지 살았고 기운이 다하여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180세까지 산(창 35:28) 이삭보다는 일찍 별세하였다. 그의 자손들은 아라비아 반도에 흩어져 살았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수적으로 번창하였다. 두 번째 아내 그두라를 통해 여섯 아들들이 출산되었고, 첩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 열두 명의 아들들이 출산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시고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5-6)고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

19-26절, 리브가의 출산

[19-21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이삭은 40세에 결혼하였으나 60세가 되기까지 20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그는 자녀를 가지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의 기도는 하루 이틀의 기도가 아니고 수 년 혹은 십여 년 동안 올린 기도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다.

이삭이 자녀를 위해 기도한 20년의 기간은 하나님께서 언약 자손 이삭을 훈련시키신 기간이었다. 그의 조상 노아는 500세에 자녀를 가졌었다(창 5:32). 그의 부친 아브라함도 75세 이전에 결혼했으나 100세가 되기까지 자녀가 없었다. 이삭은 하나님께 자녀 주시기를 구하면서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성숙되었을 것이다. 그는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의지하였을 것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체험하였을 것이다. 또 그는 기도 응답의 체험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시편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22-26절]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60세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쌍태를 주셨다. 아이들이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리브가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해주셨다. 때가 되어 쌍둥이가 출산되었는데, 먼저 나온 아이는 붉고 온 몸이 갖옷 즉 가죽털옷 같아서 에서라 이름하였고, 뒤에 나온 아이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불렀다.

27-34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팖

[27-28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 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 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그 쌍둥이 아이들은 잘 자랐다. 에서는 장성하여 익숙한 사냥꾼인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순전한 사람이 되었다. ‘종용한’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성경에 13번 나오는데, 주로 ‘순전한, 순진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BDB). 고대 헬라어 번역인 70인역도 ‘순전한, 순진한’이라는 말(아플라스토스 a[plasto")로 번역하였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 생각되는 욥에 대해 증거하는 욥기에는 이 말이 7번이나 나오며, ‘순전한’이라는 뜻으로 쓰였다(1:1, 8; 2:3; 8:20; 9:20, 21, 22). ‘순전한’이라는 말은 ‘경건하고 착한’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경건하고 착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이다. 야곱은 순전한 사람이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온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

[29-34절]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어느 날 야곱이 집에서 죽을 쑤었는데, 에서는 들에서 돌아와 심히 피곤하였고 야곱에게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었다고 본문은 기록한다. ‘에돔’은 ‘붉다’는 말에서 나왔다. 야곱은 그에게 “형의 장자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고 말했는데, 그가 평소에 장자의 명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사모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에서는 달랐다. 그는 배가 고파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했고, 야곱이 “오늘 내게 맹세하라”고 말하자 그는 맹세하며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 야곱은 떡과 팥죽을 그에게 주었다. ‘팥죽’이라는 말에서 ‘팥’이라는 원어(아다솨)는 ‘렌즈콩’(편두 혹은 불콩)이라는 뜻이다. 팥죽이라는 말은 일종의 붉은 색의 콩죽이다. 에서는 그것을 먹었고 일어나서 갔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기록한다.

이삭 가정의 장자 명분은 단순히 땅 위에서 부모의 유산을 배갑절 받는 것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배갑절 받는 것(신 21:17)은 아마 옛날부터의 관습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 가정의 장자 명분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계대(繼代)될 하나님의 언약의 복과 관계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2:18). 이 언약의 계승자, 이 언약의 복을 누릴 자가 누구인가?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중시하고 사모하며 의지하였다. 그것은 그의 경건성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무시하고 경홀히 여겼다. 그것은 그의 불경건성을 나타낼 것이다.

창세기 25장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훈련을 달게 받자. 이삭은 결혼한 지 20년이 되도록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앙 훈련의 과정이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인격의 훈련을 받는다. 야고보서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깨닫고 달게 받자.

둘째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자. 이삭은 자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의 기도는 거의 20년 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근심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뢰고 그 해결책을 간구해야 한다.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며 성도의 특권이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고난은 성도에게 걱정거리가 아니고 기도거리일 뿐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붙들자. 오늘날 우리에게 장자의 명분은 무엇인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장자의 명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언약의 복이다.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상속자의 특권이 주어진다. 로마서 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구체적으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디도서 1:2,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생은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 충만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셨다.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또 이런 복된 영생과 천국을 위해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언약의 복들을 붙들자.

 

26장: 이삭이 그랄에 우거함

[1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었는데, 이삭 때에 또 흉년이 들었다. 땅의 흉년은 주로 하나님의 징벌로 온다. 그것은 사람들의 도덕성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 짓기를 두려워하고 양심의 각성을 가진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땅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2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듯이(창 12:7; 15:1; 17: 1; 18:1) 이삭에게도 나타나셨다. 그는 아마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이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이삭이 가나안 땅에 머무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부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이다. 창세기 12:7,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창세기 13:14-15,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세기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땅에 머물러야 하고 애굽 같은 곳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했다.

[3-4절]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3-4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 땅에 유하라.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 이는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며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며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이 땅에 유하라”고 다시 반복해 말씀하신 후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신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항상 복되다. 후에,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었다(창 39:2-3, 23).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 다시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이 모든 가나안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 부친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번성케 되어 이 모든 땅을 얻으며 그 자손으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5절]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복을 약속하신 것은 그가 그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불순종 곧 죄는 징벌과 재앙의 원인이지만, 순종은 하나님의 복을 얻는 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는 평안과 형통을 얻는다.

[6절]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에 거하였다. 그랄은 가나안 땅의 남서쪽의 해안 지역이다. 이삭은 믿음이 있는 자요 순종하는 자이었다.

[7절]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은 그곳에 거할 때에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해 묻자 그가 나의 누이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그의 아내 리브가가 보기에 아름다우므로 그곳 사람들이 리브가로 인해 그를 죽일까봐 그의 아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삭은 부친 아브라함처럼 인간적으로 연약하였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공통적 감정인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사람이 이런 연약함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8절]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삭이 그랄 땅에 오래 거하였는데, 어느 날 그가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았다. ‘껴안다’는 원어(메차케크)는 ‘놀다, 장난치다, 껴안다’는 뜻을 가진다. 이삭은 그 아내 리브가를 간격 없이 친하게 대하며 사랑하였다. 그의 친근한 사랑은 바깥에서도 드러날 정도이었다. 부부는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부는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해야 한다.

[9-11절]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 . . .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러 “그가 참으로 네 아내인데 어떻게 네 누이라고 말했느냐?”고 추궁했다. 이삭은 “내 생각에 그를 인해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아비멜렉은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고 말하며 모든 백성에게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고 명하였다. 이방 세계에도 부모 공경이나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의 금지 등 약간의 도덕성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킨다. 불완전하지만, 세속 정부의 역할은 바로 그런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위험한 중에서도 이삭을 지켜주셨고 모든 일이 잘 해결되게 해주셨다.

[12-13절]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복주셔서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물질적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 물론 하나님의 복은 물질적 복 이상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구원의 복, 즉 죄사함과 영생과 천국의 복이다. 그러나 물질적 복도 그의 복이다.

[14-15절]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고 종들도 심히 많았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시기하였다. 그들은 그의 부친 아브라함 때에 그 종들이 판 모든 우물들을 막고 흙으로 메웠다. 옛 시대에 우물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사람 속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 본성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때때로 신자들 속에도 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이 투기와 분쟁의 마음으로 전도한다고 증거하였다(빌 1:15). 또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빌 2:2-3).

[16-18절]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와서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고 말했다. 이삭은 거기를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부친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 그것들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메웠던 것들이었다. 또 이삭은 그 우물들을 그 아버지가 불렀던 이름으로 불렀다.

[19-22절]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또 이삭의 종들은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어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떠나 다른 우물을 팠다. 그런데 그들이 또 다투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우물을 팠다. 이제는 그들과 사이의 다툼이 없었다. 옛 시대에 우물 하나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이웃 사람들이 다툼을 걸어올 때 그것을 피하였고 다시 다른 우물을 파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삭의 온유함과 인내심을 본다. 참된 경건은 선하고 온유한 성품을 동반한다.

[23-25절]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은 거기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전과 같이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삭은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행위는 이삭의 경건함을 증거한다. 이삭은 그의 부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단을 쌓는 자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며 기도하는 자이었다.

[26-29절]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어느 날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로 계약을 맺자”고 제안하였다. 또 그는 이삭에게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이방인 아비멜렉이 이삭에 대해 증거한 놀라운 증거이다. 하나님의 사람 이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에게도 선한 증거를 받은 자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30-33절]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이삭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그들은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평안히 돌아갔다.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은 이삭에게 와서 자기들이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질적, 환경적 평안을 주셨다.

[34-35절] 에서가 40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에서는 40세에 헷 족속의 두 여자들을 아내로 취했다. 그러나 그 자부들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다. ‘마음의 근심’이라는 원어(모라스 루아크)는 ‘영의 고통’이라는 뜻이다. 잠언 10: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때때로 어려운 일들이 있으나 우리는 그런 때에 세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복음 진리를 깨닫고 믿는다면 끝까지 그것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경적 믿음과 바른 삶 안에, 참된 교회 안에 거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평강과 형통이 따른다.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천국과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이런 내세의 복뿐 아니라, 현세의 복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마 6:33). 믿고 순종하면 복을 얻을 것이다. 또 사도 바울은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했다(딤전 4:8).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육의 복, 현세적 내세적 복을 받자.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삭에게도 어려운 문제들이 없지 않았다. 그랄 사람들은 그의 종들이 판 우물들을 메우며 훼방하였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온유함으로 양보하며 참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릴 때 어려운 문제가 전혀 없지 않겠으나, 온유함과 양보심을 가지고 참으며 그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삭은 그 이웃에 사는 아비멜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서 선한 증거를 얻었다.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와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도다” “너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니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복된 증거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면서 믿지 않는 이웃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마 5:14-16). 사도 베드로는 교훈하기를,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하였다(벧전 3:1-2). 사도 바울은, 교회의 장로가 될 자격자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했다(딤전 3:7).

옳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는 믿지 않는 이웃 사람들에게 도덕적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되며 도리어 그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복주심을 이웃에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27장: 야곱이 축복을 가로챔

[1-4절]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던 어느 날 그는 맏아들 에서를 불러 말했다.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너는 들에 가서 나를 위해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내 영혼이 네게 축복하게 하라.” 그는 죽기 전에 맏아들 에서에게 유언적 축복을 하기를 원했다.

[5-10절]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 [둘](쉐네 י)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듣고 에서가 사냥하러 나간 후에 야곱에게 그 사실을 말하며 한가지 일을 지시한다. 그것은 염소떼에 가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면 내가 그것을 네 부친을 위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들어가 그로 죽기 전에 너를 축복하시게 하라는 것이다. 원문은 영어성경들처럼 염소 새끼 ‘두 마리’라고 되어 있다.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고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한 것 같다.

[11-17절]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야곱은 주저하며 말했다.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러나 리브가는 너의 저주는 내게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라고 말했다. 리브가는 야곱이 가져온 새끼 염소들로 별미를 만들었고 야곱에게 에서의 좋은 옷을 입히고 염소가죽으로 손과 목에 꾸민 후 그 별미와 떡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들어가게 하였다.

[18-24절]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야곱은 아버지 앞에서 네 번이나 반복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첫째,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둘째, 그는 가져간 고기를 사냥한 고기라고 말했다. 셋째,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는 말에 그는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넷째,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는 질문에 그는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확실히 거짓말을 반복하였다.

[25-29절]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은 야곱이 가져온 별미를 먹고 야곱을 맏아들 에서인 줄 잘못 알고 축복하였다. 그의 축복은 세 가지 내용이었다. 첫째, 물질의 복의 기원이다. 그는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둘째, 권세의 복의 기원이다. 그것은 사회적 안정을 포함할 것이다. 그는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다. 셋째, 명예의 복의 기원이다. 그는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내용이었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30-33절]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뒤이어 돌아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가져왔고 그가 진짜 맏아들 에서임을 알았을 때 이삭은 심히 크게 떨며 말했다.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삭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축복의 효력을 믿었다.

[34-38절]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에서는 방성대곡하였다. 원문은 ‘심히 크고 쓰라린 통곡을 하였다’고 표현한다. 에서는 아버지에게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라고 두 번이나 말했다(34, 38절). 또 그는 아버지께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라고 말했다. 그는 전에 장자의 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했다. 그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았을 때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기록했다(창 25:34).

[39-40절]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삭은 에서에 대해 몇 가지 예언을 했다. 첫째, 그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떨어지고 하늘 이슬에서도 떨어질 것이다. 둘째, 그는 칼을 믿고 생활할 것이다. 셋째, 그는 그 아우를 섬길 것이다. 넷째, 그는 안정이 없을 때 그 아우의 멍에를 그의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다. ‘네가 매임을 벗는다’는 원어(타리드 די)는 ‘안정이 없다’(BDB)는 뜻이라고 본다(NASB, NIV).

[41절]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에서는 야곱을 미워하였고 마음 속으로 “아버지가 죽으시면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고 말했다. 에서는 실상 장자 권한을 주장할 입장이 못 됨에도 불구하고 아마 세상적 욕심 때문에 그것을 사모하였고 그것을 얻지 못하자 동생을 미워하고 죽일 마음까지 품게 되었다.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의 사건은 이와 같이 형제 사이의 극단적 불화로까지 진전되었다. 거짓말의 파장과 결과는 크다.

[42-46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이런 상황을 말하고 하란의 삼촌 집에 피신하여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고 말한다. ‘그 몇 날’이 20년이 될 줄은 리브가도, 야곱도 몰랐을 것이다.

[46절]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리브가는 이삭에게 야곱이 헷 사람의 딸을 취하지 않도록 하자고 제안하며 그를 하란으로 보내도록 머리를 썼다. 에서의 헷 사람 아내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고통이 되었던 터이므로 리브가의 제안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27장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본문은 부모의 유언적 축복의 효력에 대해 증거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부모의 유언적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삭은 “내가 그를 위해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했다(33절). 이삭은 그의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성경은 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노아는 그 아들들 셈과 함과 야벳에 대해 예언적 축복 혹은 저주를 하였었고(창 9:25-27)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후에, 야곱도 죽기 전 요셉을 위해,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위해 축복하였고(창 48:15-16) 또 그의 열두 아들들에 대해 예언적 축복을 하였다(창 49장).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위해 한 예언적 축복을 하였다(신 33장).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음의 말로 축복해야 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믿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성경으로 교훈하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야곱은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이삭의 축복을 받았다. 리브가와 야곱이 거짓말은 했지만,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함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복받기를 사모하였다. 리브가는 임신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창 25:23)을 기억했던 것 같다. 야곱은 어릴 때부터 장자권과 하나님의 복을 사모했다. 리브가와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함이 있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의 복을 사모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만복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복주심을 사모해야 한다.

셋째로, 본문은 리브가와 야곱의 거짓말에 대해 증거한다. 형 에서가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 때 맹세하며 팔았으므로 야곱이 장자권을 가지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정당성을 가지고 아버지께 마지막 유언적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명백히 거짓말을 하였다. 야곱은 아버지 앞에서 반복하여 거짓말을 했다. 리브가와 야곱의 거짓말은 형제간의 심각한 불화를 일으켰다. 또 야곱은 속임의 대가를 20년 동안 매우 고통스럽게 치루었다(창 31:40; 47:9).

거짓말은 큰 죄악이다. 그것은 지옥에 들어갈 죄악이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악이다.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새 예루살렘성] 밖에 있으리라.”

참된 인간 관계나 성도의 교제는 진실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하며(롬 2:9) 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한다(엡 4:2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되 리브가와 야곱처럼 속임으로 그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하자.

 

28장: 야곱의 꿈과 서원

[1-2절]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이삭은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할아버지 브두엘 집에 이르러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고 말했다. ‘밧단아람’은 ‘하란’을 가리키는 말로서 성경에 10번이나 나온다(25:20; 28:2, 5, 6, 7; 31:18; 33:18; 35:9, 26; 46:15).

이삭의 이 말은 단순히 인종 차별의식이나 인종 우월의식이 아니고, 노아의 예언에 근거한 것이었다.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리라”고 예언했다(창 9:25-26).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브라함은 그 예언에 근거하여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 할 때 그의 거하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가 아니고 그의 고향 그의 족속에게서 구하게 하였다(창 24:3-4).

[3-4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삭은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였다.

이삭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인생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과 달리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시다. 이 하나님께서만 참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 분만 인생에게 복을 주실 수 있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이삭은 야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기원하였다. 출산과 번성은 분명히 하나님의 복이다. 인간 사회가 잘 유지되려면 좋은 인재들이 많이 출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려면 경건하고 충성된 인물들이 많이 출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은 출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출산은 확실히 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복은 메시아 약속을 포함하였다. 그것은 14절에서 증거된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민이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육의 복과 현세와 내세의 복을 포함한다.

[5절]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의 단서로 그의 나이를 추측할 수 있다. 후에 야곱은 애굽에 내려가 바로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나이가 130세라고 말했고(창 47:9), 그때는 애굽에서 7년간의 풍년이 지나고 2년 동안 흉년이 든 때이었으므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지 9년 후쯤, 즉 요셉의 나이 39세쯤이었다(창 41:46-54; 45:6). 야곱이 하란에 14년 거주했을 때 요셉을 낳았으므로(창 30:25), 야곱이 130세된 때는 그가 하란에 내려간 때로부터 14년과 39년, 즉 53년이 지난 때이었다. 그러면 야곱이 하란에 내려갔을 때의 나이는, 130세에서 53년을 뺀 77세이었다. 야곱은 나이에 비해 매우 건강했던 것 같다.

[6-9절]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야곱의 형 에서는, 이미 가나안 땅 헷 족속의 딸들인 유딧과 바스맛, 두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았었고,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큰 고통이 되었었다(창 26:34-35). 에서는 또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세 번째 아내로 취하였다. 에서는 일부일처의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과 부모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육신적 생각과 욕심을 따라 세 명의 아내를 취하였다. 그것은 경건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은 아니었다.

[10-11절]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야곱은 가나안 땅 남쪽 끝부분에 위치한 브엘세바에서 떠나 대략 750킬로미터41) 북쪽에 있는 하란으로 향하여 갔다. 그가 80킬로미터쯤 갔을 때 해가 저물었고 들판에서 밤을 지내려고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잤다. 사랑하는 부모와 편안한 집을 두고 먼 곳에 있는 친척집을 향해 막연히 떠나온 야곱은, 비록 하나님을 경외했고 하나님의 복을 사모했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아, 아마 불안하고 쓸쓸하고 두렵기까지 했을 것이다.

[12-15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그 밤에 한 꿈을 꾸었다.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 사람들에게 종종 꿈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 야곱이 꾼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적 꿈이었다. 야곱은 꿈에 한 사닥다리가 땅위에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사닥다리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몇 가지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째,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둘째,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하리라. 셋째,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반복하여 주셨던 약속의 내용이었다. 창세기 12:3, 7,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창세기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창세기 26:3-4, “(이삭에게)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특히, 세 번째의 내용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다고 증거하였다(갈 3:13-14, 28-29; 롬 4:16).

하나님께서 주신 네 번째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네게 허락한 것’이란 앞에 말씀하신 여러 내용들을 가리킨다.

[16-19절]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은 잠을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하며 이 곳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는 뜻이 있다(레 8:10-11). 그는 그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다.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이었다.

[20-22절]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또 야곱은 하나님께 몇 가지를 서원했다. 서원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약속하면서 구하는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나의 가는 길에서 나를 지켜주옵소서. 둘째, 내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옵소서. 셋째, 나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야곱은 이런 내용을 구하면서 하나님께 세 가지를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첫째, 그러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 둘째,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리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창세기 28장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언제나 함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집을 떠나 쓸쓸히 먼 길을 가던 야곱과 함께하셨고 항상 함께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요셉과 함께하셨다(창 39:2-3, 21, 23). 그는 여호수아와도 함께하셨다(수 1:5, 9).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또 그는 그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고(요 14:16) 성령께서는 이미 세상에 오셨다. 그는 지금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계신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범죄치 말아야 한다(수 1:7-8). 우리는 이스라엘의 아이성의 실패, 삼손의 실패, 사울의 실패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믿음과 순종으로 주 안에 거해야 한다(요 15장).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의 당연한 응답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고 그를 섬기며 그를 위해 성전을 짓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로 섬길 것이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매우 힘썼다(행 2:42). 그들은 모일 때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배웠다(고전 14:26). 이런 경건한 모임은 중단되거나 폐지되지 말고 주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히 10:25).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의 첫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교훈과 헌금으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자.

 

29장: 야곱의 하란 생활--결혼

[1-6절]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웠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물을 양떼에게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구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전히 우물 아구 그 자리에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형제여, 어디로서뇨? 그들이 가로되 하란에서로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가로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롭고 쓸쓸하게 먼 곳 동방 사람들의 땅 곧 하란 가까이에 왔다. 그는 한 우물곁에서 목자들이 세 무리의 양떼를 누이고 물 먹일 때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란에서 온 자들이었다. 야곱은 그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라반이 평안하다고 대답하며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떼를 몰고 오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후에 그의 아내가 될 라헬을 야곱은 하란의 들판 우물곁에서 이렇게 처음 만났다. 야곱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신비롭다.

[7-14절]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매 라반이 가로되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하더니.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양떼를 몰며 왔다. 야곱은 자기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양떼를 보자 나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야곱은 라헬에게 입맞추며 소리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조카이며 리브가의 아들임을 말했다. 쓸쓸했던 긴 여행으로 그의 가슴은 눈물로 가득하였다. 라헬은 달려가서 라반에게 고했고 라반은 조카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다. 야곱은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였고 한 달을 그와 함께 거하였다.

[15-20절]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 내게 고하라.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7년을 봉사하리이다.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라반이 야곱에게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고 물었을 때 야곱은 그의 딸 라헬을 사랑하므로 그를 아내로 주시기를 요청하며 그러면 외삼촌에게 7년을 봉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라반은 그 일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해 7년 동안 수고로운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고 기록한다. 사랑은 수고로운 긴 7년간을 수일같이 여기게 만들었다. “7년을 수일같이!”--이것은 야곱의 사랑의 힘을 잘 증거한다. 사랑의 힘은 참으로 크다.

야곱의 결혼은 이렇게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섭리하신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롬 11:36). 야곱의 결혼은 라헬에 대한 참된 사랑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결혼은 사랑의 관계이다. 결혼의 중요한 조건은 사랑이다. 그 외의 다른 조건들은 부수적일 뿐이다. 사랑 없는 결혼은 삭막할 것이며 또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21-25절]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7년의 기한이 찼다. 야곱은 라반에게 아내를 주어 그에게 들어가게 하시기를 요청했다. 라반은 사람들을 모아 혼인 잔치를 열었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그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는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에게 시녀로 주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이었다. 그는 라반에게 자기가 라헬을 위해 봉사하였는데 왜 그를 속이셨는가 하고 물었다. 전에 부친을 속였던 야곱은 이제 그 자신이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했다. 그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갚으심으로 과거의 그의 부족을 기억나게 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행한 대로 하나님께 받는다.

[26-30절]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7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7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7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7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라반은 언니보다 동생을 먼저 주는 것이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라고 말하며 “이를 위해 7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해 또 7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7일을 채우라”는 원어는 “이 한 주간을 채우라”는 말로서 레아를 위한 혼인 잔치 주간을 채우라는 뜻이라고 본다(Amplified Bible, KJV, NASB, NIV). 야곱이 7일을 채웠고 라반은 그의 딸 라헬도 그의 아내로 주었고 그의 여종 빌하를 그에게 시녀로 주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고 다시 7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원치 않게 두 아내, 그것도 형제인 두 아내를 얻게 되었고 또 7년간의 수고로운 봉사를 더하게 되었다. 야곱은 그의 두 아내로 인해 심적 고통이 컸을 것이다. 일찍이 아브라함이 하갈로 인해 그런 고통을 당했었다(창 21:11). 또 야곱은 결혼을 위해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고로이 보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혹독한 고난의 훈련 과정이었다. 인간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는 그의 종들을 고난을 통해 단련시키신 후 크게 쓰셨다. 요셉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으며 다윗이 그러하였다.

[31-35절]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섭리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미움받음을 보셨고 그를 돌아보셨다. ‘총이 없다’는 원어(세누아)는 ‘미움을 받다’는 뜻이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를 더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미움을 받는 것이 된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마 6:24).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했고 레아가 아무 잘못이 없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동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태를 여심으로 그를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통해 야곱에게 자녀들을 주셨다. 야곱의 자녀들은 먼저 레아를 통해 출산되었다. 출산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레아의 태를 여셨다고 말한다(31절).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태를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신다(창 20:17-18; 30:2, 22; 삼상 1:19).

레아는 남편 사랑을 받지 못했던 과정을 통해 경건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은 고난 중에 인격 단련을 받는다. 레아는 첫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지으며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아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말했고, 둘째 아들을 낳고 “여호와께서 내가 미움받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라고 말하며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지었다. 그는 셋째 아들을 낳고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고 말하며 그 이름을 레위라 지었고, 넷째 아들을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말하며 그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다. 그가 지은 아들들의 이름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모하며 의지했는지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창세기 29장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랑의 힘을 본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수고하였다. 남녀간의 사랑도 이러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그러하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요 3:16; 롬 5:8). 우리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우리는 그의 모든 계명을 즐거이 지킬 수 있고 그의 모든 일에 헌신하며 충성할 수 있다(요 14:15; 21:15). 또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벧전 1:22; 4:8).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수고하였듯이,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께 거룩히 드리며 하나님의 일에 수고하며 죽도록 충성하자.

둘째로, 우리는 현실의 고난을 달게 받자. 야곱의 하란 생활은 고난의 생활이었다. 그는 아내를 얻기 위해 7년을 두 번, 즉 14년간이나 수고를 하였다. 하나님은 야곱을 고난의 현실에 두셨고 고난 중에 그를 단련시키셨다. 하나님의 섭리로 주시는 고난들은 우리의 많은 부족에 비하면 오히려 그의 선하신 처분이시다. 또 그 고난의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있다. 성도는 고난들을 통해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믿고 바라며 의지하게 되고 성결하게 되고 또 겸손하게 된다. 우리의 인격은 고난을 통해 거룩하고 온전하게 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단련된 인격]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한다(롬 5:3-4). 우리는 고난의 현실을 불평하지 말고 달게 받자.

셋째로, 우리는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선을 베푸심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길을 인도하셨고 또 레아의 길을 인도하셨다. 특히 그는 레아가 미움을 받음을 보시고 그를 동정하셨다. 그는 그에게 자녀들을 주심으로 그를 위로하셨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은 지금도 온 세상을 홀로 다스리신다.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그에게 우리의 모든 삶을 의탁하며 그와 동행하며 그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자.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요점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며 영생이다. 그 분을 믿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참 행복이다. 여러분은 그 구원, 그 영생, 그 행복을 알고 있는가?

 

30장: 야곱의 하란 생활--재산

1-24절,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주심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많은 자녀들을 주셨다. 자녀 출산은 인간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복주심으로 된다.

[1-2절]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은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갈등과 경쟁 속에서 자녀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전장에서 우리는 레아가 네 명의 아들, 즉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낳은 것을 읽었다. 라헬은 그 언니 레아를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질투는 남자에게도 있지만, 주로 여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마음인 것 같다. 라헬이 남편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고 말하자, 야곱은 화를 내며 “그대로 임신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말했다. 불임(不姙)은 누구에게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3-5절]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은 남편에게 자기의 시녀에게 들어가라고 청했고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무릎에 두면 그를 인해 자식을 얻으리라고 말하며 자기의 시녀 빌하를 첩으로 주었다. 야곱은 이와 같이 자의가 아니고 타의로 첩을 얻게 되었다. 레아와 라헬에 이어 빌하까지 그의 아내가 되었다. 야곱은 빌하에게 들어갔고 빌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6-8절]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라헬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정을 들어주셨다고 말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단이라고 불렀다. ‘억울함을 푼다’고 번역된 원어()는 ‘사정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빌하는 또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낳았다. 라헬은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말하며 그 이름을 납달리라고 불렀다. 라헬이 지은 아들들의 이름에서 우리는 그에게 언니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심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9-13절]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복되도다 하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레아도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자기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었다. 레아도 동생 라헬처럼 경쟁심이 없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자기 뜻과 상관없이 실바를 네 번째 아내로 얻었다. 레아의 시녀 실바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레아는 행운이라고 말하며 그의 이름을 갓이라고 지었다. 갓은 ‘행운’(fortune)이라는 뜻이다. 실바가 둘째 아들을 낳자 레아는 ‘내가 복되도다’(베아쉬리)라고 말하며 그 이름을 아셀이라고 지었다.

[14-16절] 맥추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밀을 추수하는 계절이 되었다. 레아의 아들 르우벤은 들에 나가서 합환채를 얻어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다. 합환채는 성욕을 일으키는 풀로 알려진 풀이다. 라헬은 그 풀을 원했고 레아는 그 대신 그 밤에 자기가 남편을 얻기로 하고 그 합환채 풀을 주었다. 레아는 저물 때 들에서 돌아오는 야곱을 영접하였고 그 밤에 그와 동침하였다.

[17-21절]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레아는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인 잇사갈을 야곱에게 낳았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믿음의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 스불론을 낳았고, 그 후에 딸 디나를 낳았다.

[22-24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셨다. ‘생각한다’는 원어(자카르)는 ‘기억한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정하신 때에 그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나타낸다. 창세기 8:1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다”는 말씀에서 ‘권념하다’는 말이 바로 이 단어이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하나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을 때 성경은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라고 기록하는데(삼상 1:19), 거기에 ‘생각한다’는 말도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셨고 그를 들으셨고 그의 태를 여셨다. 자녀 출산은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자녀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얻을 수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라헬을 들으셨다는 표현은 라헬이 자녀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나타낸다. 사람은 부족한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이렇게 훈련시키셨다. 라헬은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말하며 여호와께서 다시 그에게 다른 아들을 더하시기를 원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다.

이와 같이,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해 7년간 봉사했고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은 후 또 7년간 봉사하는 동안에 자녀를 11명이나 얻게 되었다. 그것은 레아와 라헬의 경쟁 속에서, 또 그들의 두 시녀들까지 아내로 얻음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게 이루어졌다. 야곱은 7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11명이나 되는 많은 자녀들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산(多産)의 복을 주셨다.

25-43절, 하나님께서 많은 재산을 주심

야곱이 많은 재산을 얻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것도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25-30절]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자신의 가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때 그는 아무 재산도 없는 상태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때에나 그의 집을 세울 수 있을지 생각하고 외삼촌 곁을 떠나기를 원했다. 그때 라반은 “여호와께서 너로 인해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고 말했다. 라반이 사용한 ‘내가 깨달았노니’라는 원어(니카쉬티)는 ‘내가 점술로 알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것은 라반의 미신적 행위를 보이는 것 같다. 또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정하면 주겠다고 말한다. 야곱은 자기가 외삼촌을 어떻게 섬겼는지 아실 것이며 자기가 오기 전에는 그의 소유가 적었으나 지금은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수고에 따라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야곱의 성실함을 보시고 라반에게 복을 주셨다.

[31-33절]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품삯으로 양떼나 염소떼 중에서 아롱진 것이나 점 있는 것이나 검은 것을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면 후에 외삼촌이 양떼나 염소떼를 살피실 때 재산의 구별이 분명할 것이며 다른 것들은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4-36절] 라반이 가로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 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치니라.

라반은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고 말하며 야곱의 요청을 허락하였다. 그 날에 라반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구별하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구별하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구별하여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다. 라반은 물질적 이익에 관해서는 계산 적이었고 너그럽지 못하였다.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쳤다.

[37-39절]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들을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었다. ‘버드나무’라는 원어(리브네)는 ‘미루나무’(poplar) 혹은 ‘때죽나무’(storax-tree)를 가리키고, ‘살구나무’라는 원어(루즈)는 ‘편도나무’(almond tree)를 가리키고, ‘신풍나무’라는 원어(아르몬)는 ‘플라타너스’(plane tree)를 가리킨다고 한다(BDB, KB, NASB, NIV). 야곱은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를 향하게 하였다. 그런데 양떼들은 물을 먹으러 올 때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았다. 이것은 신기한 일이지만 야곱의 간절한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과 복주심을 나타낼 것이다.

[40-43절]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야곱은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새끼양을 구분하여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였고 건강한 양이 새끼를 밸 때는 양떼 앞에 물구유에 그 가지들을 두었고 쇠약한 양이 새끼를 밸 때는 그것들을 두지 아니하였다. 41절의 ‘개천’이라는 원어는 38절의 ‘물구유’라는 말과 같다(레하팀). 그러므로 건강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되고 쇠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야곱의 재산은 심히 풍부하여졌고 양떼와 종들과 약대와 나귀가 많아졌다.

창세기 30장은 무슨 교훈을 주는가?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하란 생활을 섭리하셨다. 그는 야곱의 결혼과 자녀 출산과 재산 증식을 섭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자이시다. 그는 특히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새 생명을 주시고 내세의 복, 즉 천국과 영생을 약속하시고 보장하실 뿐 아니라, 광야 같은 이 세상의 삶도 섭리하신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마 6:33). 경건한 삶은 현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는 복된 삶이다(딤전 4: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명령만 순종하자.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큰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육의 복과 현세와 내세의 복도 주심을 확신하자.

 

31장: 고향으로 돌아감

창세기 31장은 야곱이 하란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일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다. 이 긴 내용은 야곱의 생애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어떻게 역사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1-16절,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함

[1-3절]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어느 날 야곱은 라반의 아들들이 자기가 그들의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그들의 아버지의 소유로 인해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다는 불평어린 말을 들었다. 똑같은 사건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고 비슷한 내용의 말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다. 야곱이 라반 때문에 많은 재산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라반의 소유를 빼앗았다는 것은 바른 말이 아니다. 그는 외삼촌의 재산을 빼앗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의 재산 형성은 외삼촌과의 정당한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재산이 많아지자 라반의 아들들은 불평어린 말을 했고 라반의 안색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야곱이 하란을 떠나야 할 때가 이르렀다. 만약 라반의 안색이 바뀐 상황이 아니었다면 야곱은 하란을 떠날 생각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우리의 현실을 조성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4-9절]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야곱은 자기 아내들 라헬과 레아를 자기가 양떼를 치는 들로 불러다가 그 상황을 말해주었다. 지금부터 3,900여년 전인 옛날에 야곱은 아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였다. 모세의 율법은 새로 아내를 취한 자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있어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하라고 명령했고(신 24:5) 잠언은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 . .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했다(잠 5:18-19). 또 말라기 2:15는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라”고 말했다. 성경은 이처럼 아내를 인격적으로 대하며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야곱은 아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였다.

야곱은 아내들에게 장인의 안색이 그에 대해 전과 같지 않다고 말했다. 또 그는,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고 말했다. 또 그는 아내들이 알 듯이 그가 힘을 다해 장인을 섬겼지만, 장인은 그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으며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인을 금하셔서 그를 해치 못하게 하셨고 장인의 짐승을 빼앗아 그에게 주셨다고 말했다.

[10-13절] 그 양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또 야곱은 그가 꿈에 받은 계시를 말했다. 그의 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양떼 중에 얼룩무늬 있고 점 있고 아롱진 새끼들을 주실 것을 암시하였다. 또 야곱은 꿈에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 그는 야곱에게 벧엘에서 한 서원을 기억나게 하셨다. 야곱은 쓸쓸히 집을 떠나 올 때 벧엘에서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서 그를 지켜 주시고 양식과 옷을 주시고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그가 세운 돌기둥으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고 소득의 11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그 서원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4-16절]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라헬과 레아는 남편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재물을 취하여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의 소유로 주신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를 다 행하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야곱이 아내들의 동의를 얻음으로 그 가족들이 하란을 떠날 수 있도록 여건을 준비해주셨다.

17-30절, 라반이 쫓아옴

[17-20절]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새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야곱은 곧 행동하였다. 그는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 태우고 그 얻은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가나안 땅 아비의 집으로 떠났다.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라헬은 그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적질하였고 야곱은 그 거취를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가만히 떠났다. 라헬이 훔친 드라빔은 가정 수호신 같은 ‘가정 우상들’이었다. 그것은 당시에 그 지역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으로서 부패된 종교의 산물이었다. 야곱이 라반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떠난 것은 그가 뒤에 라반에게 말한 바와 같이 라반이 그의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과 그의 재산을 빼앗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21-24절]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산을 향하여 도망한지 3일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7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야곱이 그의 모든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유브라데 강을 건너 길르앗산을 향해 도망한 지 3일 만에 그의 도망한 사실이 라반에게 알려졌다. 라반은 그의 친척들을 거느리고 7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산에서 그에게 미쳤다. ‘형제’라고 번역된 원어(아크)는 ‘친척, 친족’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그 밤에 꿈에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너는 주의하여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을 해치려는 라반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그 위험을 막아주셨던 것이다.

[25-30절] 라반이 야곱을 쫓아 미치니 야곱이 산에 장막을 쳤는지라. 라반이 그 형제로 더불어 길르앗산에 장막을 치고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라반은 야곱에게 왜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가만히 끌고 갔느냐고 하면서 그가 즐거움과 노래로 그를 보낼 것인데 자기가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도 맞추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자기에게 그를 해할 만한 능력이 있지만, 어젯밤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주의하여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또 라반은 야곱에게 왜 자기의 신을 도적질하였느냐고 말했다. 라반은 하란의 우상숭배적 풍습대로 드라빔 즉 가정 우상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섬겼던 것이 분명하다.

31-42절, 야곱의 책망

[31-35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

야곱은 라반에게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했다. 31절에 “내가 말하기를”이라는 원어(아마르티)는 “내가 생각하기를”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BDB, NIV; 창 20:11; 26:9). 야곱은 또 외삼촌의 신을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친족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라고 말했다. 야곱은 라헬이 그 드라빔을 도적질한 줄 알지 못했다. 라반은 야곱과 레아와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했다. 그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갔을 때 라헬은 그것을 약대 안장 아래 숨기고 그 위에 앉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으니 노하지 마시기를 요청하였다. 라반은 그것을 찾지 못했다.

[36-40절]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내가 이 20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 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야곱은 노하여 라반을 책망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외삼촌의 것들 중의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를 불같이 급히 쫓아오셨는가라고 물었다. 또 그는 20년 동안 외삼촌의 양들과 염소들을 먹일 때 낙태한 것이 없고 외삼촌의 것을 먹지 않았고 물려 찢긴 것은 보충하였고 낮이나 밤에 도적을 맞으면 물어드렸다고 말한다. 39절에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라는 원어(테바크쉔나)는 “외삼촌이 내게 물어내게 하셨으며”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르다(KJV, NASB, NIV). 또 야곱은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라고 회고하였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였다. 성경은 나태를 정죄하고 근면을 장려한다(잠 6:6; 10:4-5, 26; 12:24, 27; 21:5; 27:23; 31:10, 13, 15, 27). 또 성경은 종들에게 눈가림만 하지말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단 마음으로 일하라고 교훈한다(엡 6:5-8). 시편 128:1-2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실히 살아야 한다.

[41-42절]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20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14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6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을, 두 아내를 위해 14년, 양떼를 위해 6년 외삼촌을 섬긴 세월이라고 요약한다. 또 그는, 외삼촌께서 그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셨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그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과 그의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감찰하시고 눈동자같이 보호하신다.

43-55절,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음

[43-50절]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떼는 나의 양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취하면 사람은 우리와 함께할 자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하시느니라 하였더라.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와 언약을 맺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야곱은 돌을 가져 기둥을 세우고 언약을 맺었다. 또 그는 돌들을 가져 무더기를 만들고 그 위에서 함께 식사하였다. 라반은 그것을 아람어로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히브리어로 갈르엣이라 불렀다. 그것은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또 그것을 미스바(미츠파)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망대, 망루’라는 뜻이다.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 딸들을 박대하지 말고 다른 아내들을 취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51-55절]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너와 나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않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경야하고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라반은 또 야곱에게 이 무더기와 이 기둥을 증거로 삼아 서로 이 경계를 넘어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하자고 하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아버지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라고 말했다. 야곱은 그 아버지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였고 또 제사를 드렸고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 그들은 하루를 묵은 후 서로 헤어졌다. 모든 일이 선하게 이루어졌다.

창세기 3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야곱이 하란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음을 깨닫고 증거하였다(5절, 42절). 하나님은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치는 동안 라반이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고(7절) 그의 짐승을 빼앗아 야곱에게 주셨다(9절). 야곱의 재산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16절). 또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환경을 조성하셨다. 그는 라반의 아들들의 불평어린 말들을 들었고 라반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았다(1-2절). 하나님은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해주셨다(3절, 13절). 그는 아내들의 동의를 얻었다(16절). 또한, 라반이 야곱을 향해 불같이 뒤쫓아왔지만, 하나님께서는 밤에 꿈에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24절). 라반은 자기가 야곱을 해할 만한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젯밤 꿈에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그것을 금하셨다고 고백하였다(29절).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켜주셨다. 라반은 마침내 야곱과 언약을 맺기를 원했고 함께 언약을 맺었다.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되었다. 이 모든 일은 다 야곱을 위해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섭리의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서 바로 살자. 세상 사는 동안에 어려운 일은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승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범죄치 말고 의와 선을 행하며 인격적 사랑을 실천하자.

 

32장: 얍복 강변에서의 씨름

[1-2절]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라반과 헤어지고 고향으로 가고 있었을 때, 한 곳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다. 야곱은 그들을 보며 이는 하나님의 군대(마카네)라고 불렀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마카나임)이라 했다. 마하나임은 ‘두 군대’라는 뜻으로 야곱의 가족들과 하나님의 사자들의 두 무리를 가리킨 것 같다. 이 신비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일행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암시한다.

[3-5절] 야곱이 세일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야곱은 세일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 먼저 사자들을 보내며 형에게 문안하게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고 말했다. 그는 형을 ‘내 주 에서’, ‘내 주’라고 불렀고 자신을 ‘주의 종[당신의 종] 야곱’이라고 표현하였다(4, 5절). 이 말들은 그의 겸손해진 마음을 보인다.

[6-8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400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그런데 그 사자들은 돌아와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러 온다고 보고하였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였다(차랄).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좁은 공간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한 심정을 가진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보장하신 길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였다. 그는 우선 자기와 함께한 종들과 양들과 소들과 약대들을 두 떼로 나누었다.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라도 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9절]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그렇게 한 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원문에 보면, 본절은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전에 내게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고 명하신 여호와여.”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기억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야곱에게도 약속하셨었다(창 28:13-14).

[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야곱은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인자와 모든 진실을 조금이라도 받을 자격이 없나이다. 이는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음이니이다”라고 기도하였다. 야곱은 과거에 자신이 이기적이었고 거짓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무자격한 야곱에게 넘치는 자비를 베푸셨고 진실하게 약속을 이행하셨다. 그는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으나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를 지키셔서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다.

[11-12절]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특히 하나님께서 형 에서의 손에서 자기를 구원해주실 것을 기도한다. ‘처자들’이라는 원어는 ‘자녀들을 가진 어머니’라는 뜻이다(영어성경들). 그는 형이 와서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또 그는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같이 많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것을 그의 기도의 근거로 아뢴다. 어려울 때 우리의 할 일은 기도뿐이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기도는 모든 문제의 최선의 해결책이다.

[13-15절]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200이요 숫염소가 20이요 암양이 200이요 숫양이 20이요 젖 나는 약대 30과 그 새끼요 암소가 40이요 황소가 10이요 암나귀가 20이요 그 새끼나귀가 10이라.

야곱은 밤을 지낸 후 그의 소유물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해 예물을 준비하였다. 야곱이 구별한 예물은 모두 아홉 떼이었다. 그것은 첫째 암염소 200, 둘째 숫염소 20, 셋째 암양 200, 넷째 숫양 20, 다섯째 젖 나는 약대 30과 그 새끼, 여섯째 암소 40, 일곱째 황소(수소) 10, 여덟째 암나귀 20, 그리고 아홉째 수나귀 10이었다. 본문에 맨 마지막의 ‘새끼나귀’라는 원어(아이르)는 ‘수나귀’를 가리킨다(BDB).

[16-21절]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세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야곱은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자기보다 앞서 건너가며 각 떼로 거리가 뜨게 하였다. 또 그는 앞선 자가 형 에서를 만날 때 그가 물으면 앞엣것은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나의 주’(원문)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라고 말하라고 일러주었다. 또 그는 뒤따라가는 모든 종들도 같은 말을 하라고 했다. 그것은 그가 예물들로 형의 감정을 푼 후 대면하면 형이 혹시 그를 받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잠언 18:16,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22-26절]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 밤에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였고 또 그의 소유물들도 그렇게 하였다. 그에게는 많은 두려움과 염려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제 홀로 남았다. 무슨 중요한 일을 결단할 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 홀로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고독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 계셨다.

그 밤에 어떤 사람이 야곱 곁에 있었고 그와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였다. ‘씨름한다’는 말(아바크 קאָ)은 성경에서 이 곳에서만 나온다. 이것은 비유적인 말이 아닐 것이다. 야곱의 환도뼈, 즉 허벅지의 연결부분이 위골된 것을 보면 그것은 실제의 씨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의미가 담긴 사건이었다.

야곱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 자신을 축복해줄 것을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 사람은 그의 끈질긴 요청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야곱의 환도뼈를 쳤고 야곱은 그 씨름에서 환도뼈가 위골되었다. 날이 새려했으므로 그가 가기를 원했지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그에게 끈질기게 매달렸다.

[27-28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마침내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물었고 그 이름을 고쳐주었다. 그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고 말했다. 그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었다. 야곱은 ‘그가 발꿈치를 잡는다, 그가 속인다’라는 뜻을 가지고(KB), 이스라엘은 아마 ‘그가 하나님과 겨룬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그 사자의 설명대로 야곱이 하나님과 사람들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음을 나타낸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한 간절함으로 에서나 라반을 이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도 이겼다. 호세아 12:3-4는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증거한다. 야곱은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고 인간 관계의 모든 복잡한 일들에서 승리하였다.

[29-32절]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 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야곱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았다. 그는 그곳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불렀고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는 그 환도뼈로 인해 절었다. 본문은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환도뼈 힘줄을 먹지 않는다고 기록한다.

창세기 32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첫째로, 본문은 성도가 하나님의 명령과 보장하심 속에서 행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어려운 일들이 있음을 보인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낙심치 말자.

둘째로, 본문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기도임을 보인다. 야곱이 가족과 소유물을 두 떼로 나누거나 형을 위해 예물을 아홉 떼나 준비하는 것이 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만이 참 해결책이 된다. 기도는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의 최선의 해결책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자.

셋째로, 본문은 우리에게 끈질긴 기도가 필요함을 가르쳐준다. 야곱의 승리의 비결은 끈질긴 씨름,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사모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강청함’의 기도 즉 끈질긴 기도와, 낙망치 않고 항상 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셨다(눅 11:8; 18:1, 7). 그것이 어려운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승리하는 비결이다.

 

33장: 형 에서를 만남

[1-4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야곱은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갔다. 아내들과 자식들을 세 무리로 나눈 것은 그가 아끼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 같다. 그는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 에서에게 가까이 나갔다. 같은 나이의 쌍둥이인 야곱이 형 에서를 향해 몸을 입곱 번 땅에 굽힌 것은 그의 겸손과 자신의 과거의 행위에 대해 사과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그가 장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한 것은 좋았고 또 콩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샀으니 축복받을 정당성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복을 가로챈 것은 잘못이었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간의 혹독한 고난을 통해 확실히 자신의 부족을 반성하고 겸비하여졌다.

야곱을 본 에서는 달려와서 그를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었고 그들은 피차 울었다. 에서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동생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사라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야곱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제거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

[5-7절]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는 눈을 들어 여자들과 그 자식들을 보고 야곱에게 너와 함께 한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대답하였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이다. 자녀는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다(시 127:3). 야곱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또 그는 에서 앞에서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겸손히 불렀다. 본장에서 그는 자신을 두 번 종이라고 불렀다(5, 14절). 그때 여종들이 그 자식들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들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였다. 그들은 야곱이 아끼는 순서대로 나아와 절하였다.

[8-11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에서는 또 그가 만난 모든 떼들, 즉 아홉 떼나 되는 짐승들이 무엇 때문인지 물었다.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내 주’라는 말(아도니)이 본장에서 다섯 번 나온다(8, 13, 14, 14, 15절). 이것은 야곱의 겸비함과 동시에 형 에서에 대한 그의 뉘우침을 나타낼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면서 형을 ‘내 주’(나의 주)라고 불렀을 것이다. 야곱은 상당히 겸손한 인격이 되었다.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오히려 높아지며 큰 자가 된다. 겸손한 자가 큰 자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에서가 처음에 사양하였지만, 야곱은 자기가 형에게 은혜를 얻었다면 그의 예물을 받으라고 간청한다. 그는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야곱의 선물은 진심의 선물이었고 기쁨의 선물이었다. 에서는 야곱의 강권함으로 그 선물을 받았다.

[12-14절]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에서는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연약하여 용서하면서도 약간의 감정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에서의 감정이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곱은 겸손히 이해를 구하며 사양한다.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야곱은 본문에서 에서를 ‘내 주’라고 세 번 불렀고 자신을 ‘그의 종’(원문)이라고 불렀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한다.

[15-17절]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또 에서가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고 말하자, 야곱은 다시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형 에서를 ‘내 주’라고 부르며 그의 은혜얻기를 구하였다. 어려움이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에서와의 갈등이 해소되고 야곱은 그 고민스러운 문제에서 승리하였다. 그 날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에서 자기를 위해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해 우릿간을 지었고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고 불렀다. ‘숙곳’(숙코스 )은 ‘천막들’이라는 뜻이다. 거주할 천막 혹은 집을 세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심적, 환경적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다.

[18-20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100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부터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쳤다. ‘평안히’라는 원어(솰렘)는 고대 헬라어 70인역과 라틴어 벌케이트역이나 옛날 영어성경(KJV)은 ‘살렘’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본문을 “가나안 땅에 있는 살렘 즉 세겜성에 이르러”라고 번역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 살렘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 셈이다(창 14:18; 33:18). 근래의 영어번역들은 ‘평안히’라고 번역하지만(NASB, NIV), ‘살렘’이라는 고대 번역이 옳을지도 모른다.42)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돈을 주고 샀다. ‘은’이라는 원어(케시타)는 옛시대의 무게 단위인데, 은인지 금인지 불분명하다고 한다(BDB, KB). 거기에서 야곱은 단을 쌓았다. ‘단’(미즈베아크)은 ‘짐승 제사를 드린 단’을 암시한다.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속죄와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야곱의 경건을 나타낸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창 8:20), 아브라함은 여러 번 단을 쌓았으며(창 12:7, 8; 13:18; 22:9), 이삭도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창 26:25). 이제 야곱도 하나님께 단을 쌓은 것이다.

창세기 33장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야곱같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도 응답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두려움과 심적 고통으로 부르짖었던 야곱에게 문제의 해결과 평안을 주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의 처한 환경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므로 항상 기도 응답과 그의 도우심을 체험하자.

둘째로, 우리는 겸비한 자가 되자. 야곱은 고난을 통해 겸비한 인격으로 변화되었다. 고난은 겸손 훈련을 위해 유익하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필수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빌 2:3).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쓰자. 하나님께 단을 쌓는 자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며, 육신 생활에서도 성공할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과 기도를 올리며 그가 주신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기를 결심하는 것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이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34장: 디나 사건

[1-4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본장은 야곱이 가나안 땅 세겜에 거할 때 그의 가정에 생긴 좋지 않은 일을 기록한다. 그것은 그의 아내 레아가 그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일이었다. 이것은 야곱에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일이었다. 야곱에게는 고난이 많았다. 하란에서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이런 고통의 일을 당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야곱이 당한 가정적 고통은 하나님의 징책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 야곱에게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시며 그가 서원했던 벧엘을 회상시키셨다. 창세기 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창세기 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그러나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에 도착하여 땅을 사고 거기 거하려 하였다. 창세기 33:17-19,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100개로 사고.” 세겜과 벧엘 간의 직선거리는 약 30킬로미터이며 벧엘에서 이삭이 거주했던 헤브론까지는 약 45킬로미터이다.43) 야곱이 벧엘이나 헤브론으로 가려 생각하였다면 그곳에서 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곳에서 땅을 산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디나 사건을 통해 야곱을 징책하시고 그가 그곳에 머물지 않고 떠나게 하셨다고 생각된다. 야곱이 하란을 떠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의 불평어린 말들을 듣고 또 라반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음을 보고 그의 마음이 불편했을 때 그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었다(창 31:1-2).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환경적으로 야곱을 불편케 하신 후에 그곳을 떠나게 하셨다. 창세기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그러므로 디나 사건은 야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본장은 또한 세겜 땅의 추장 세겜의 잘못된 사랑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것 같다. 그는 그를 끌어들였고 강간하여 욕되게 하였다. ‘강간하다’라는 원어(솨카브)는 ‘눕다, 동침하다’는 뜻이다. 세겜의 마음은 디나에게 끌렸고 그 소녀를 사랑하였다. ‘연련(戀戀)하다’는 원어(다바크)는 ‘붙들다, 끌리다’는 뜻이다. 또 그는 그에게 친절히 말하였다.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다’는 원어(딥베르 알 렙)는 ‘[그에게] 친절히 말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의 관용구이다(BDB). 또 그는 그 아비 하몰에게 그 소녀를 자기 아내로 얻게 해주시기를 청하였다.

세겜의 감정은 인간적으로 이해될지라도 그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행위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그가 한 부족의 추장이므로 그 지역에서 상당한 권세를 가졌겠지만, 그것이 그의 도덕적 탈선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디나 사건은 한 권세자의 도덕적 탈선을 드러낼 뿐이다.

[5-7절]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 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야곱은 세겜이 딸 디나를 더럽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다.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다.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그 사실을 듣고 돌아왔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여 아버지 이스라엘과 그들 모두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다. 강간은 부끄러운 일이며 일어나서는 안 될 부도덕한 일이었다.

[8-12절]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련하여 하니 원컨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취하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세겜도 디나의 아비와 남형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청구하는 것은 내가 수응하리니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빙물과 예물을 청구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수응하리라.

하몰은 그들에게 그의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디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기를 청하였다. 8절의 ‘연련하다’는 원어(카솨크)는 ‘애정을 가지다’는 뜻이다. 하몰은 또 그들에게 그 땅에 거하여 서로 통혼(通婚)하며 서로 거래하자고 말하며 그들이 신부 값으로 어떤 큰 예물을 청구하여도 듣겠다고 말하였다.

세겜은 디나에게 반했고 인간적으로 그를 사랑했다. 19절도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라고 기록한다. 여기에 ‘사랑한다’는 원어(카페츠)는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본장은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끌렸고 사랑했으며 친절히 말했고(3절) 애정을 가졌고(8절) 기뻐하였다고 증거한다(19절).

세겜은 디나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참 사랑이 못 되었다. 그의 사랑은 강간이라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것은 정당치 못한 행위이었다. 혼전 동침은 하나님 앞에서 불법이며 죄이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고 배려하며, 이기적 사랑은 자기 욕망일 뿐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참았다(창 29:20).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4-5).

[13-17절]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야곱의 아들들은 하몰과 세겜을 대면했을 때 그들에게 속여 대답하였다. 그것은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할례받지 않은 자에게 우리 누이를 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없으나 만일 그들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우리같이 되면 서로 통혼하고 우리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18-24절]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치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 아비 집에 가장 존귀함일러라.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성문에 이르러 그 고을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를 받음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하몰과 세겜은 그들의 제안을 좋게 여겨 그 성 사람들에게 설득하여 그들로 할례를 받게 하였다. 21절에 ‘친목하다’는 원어(솰렘)는 ‘화친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 야곱의 사람들과 재산들이 결국 다 자신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성의 모든 남자들은 추장 세겜의 요청대로 할례를 받았다.

[25-29절] 제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그러나 제3일 되어 그들이 고통할 때,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는 갑자기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데려왔고 야곱의 여러 아들들은 그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들은 양과 소와 나귀 등 모든 짐승과 재물을 취했고 그 자녀들과 아내들을 사로잡았다. 추장 세겜의 잘못된 행동으로 그와 그의 부친과 그 성의 남자들이 다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었다.

[30-31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책망하며 그 땅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그와 그 집을 쳐서 멸망시킬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듯이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고 아버지께 반문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에게 속여 대답한 것이나 그들을 죽인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행동을 인정하신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허용하셨다.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의로운 분노가 있었다. 세겜이 디나를 욕보인 행위는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이며 행해서는 안 될 악한 일이었다(7절). 그러므로 본장은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더럽혔다고 두 번이나 기록한다(13, 27절). 그것은 세겜이 받은 보복이 도덕적으로 마땅함을 보이는 것 같다. 강간은 분명히 벌받을 큰 악이다.

창세기 34장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본장은 성도에게 고난이 많음을 보인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큰 근심거리가 또 생겼다. 성경은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말한다(시 34:19). 욥은 하나님께 왜 우리를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라고 아뢰었다(욥 7:18). 히브리서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조금만 잘못을 행해도 하나님의 징책을 경험한다. 만일 그런 징계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아닐 것이다.

많은 경우에, 고난은 우리의 부족 때문에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당할 때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서 7:14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에 깨달아지고 기억나는 부족과 실수와 죄를 회개하고 고치기를 결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중간한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확실히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본문은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이 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분별력인 양심을 주셨다. 살인과 간음이 죄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명확한 도덕법으로 주셨다. 십계명은 우리가 지켜야 할 생활 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간음하지 말아야 한다. 정조는 건전한 인격성의 기본적 요소이다. 우리는 도적질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거짓 증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의 것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탐심에서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 온갖 죄악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다. 세겜은 디나를 강간함으로 인해 그와 그의 종족이 큰 화를 당하였다. 그 성의 모든 남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자녀들과 여자들은 사로잡혔다. 사람은 순간적인 자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범죄하고 큰 불행에 떨어진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고 구주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죄인을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실 것을 분명히 선언하셨다(계 21:8).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는 경건과 도덕성, 즉 거룩과 의와 선함과 사랑과 진실함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포도나무 비유에서 열매라고 말씀하신 그것이다(요 15:8).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교훈대로 살면, 우리는 큰 평강을 누릴 것이다(사 48:17-18).

 

35장: 벧엘로 올라감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세겜에서 디나 사건으로 인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을 죽인 일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며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세겜에 머물지 말고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며 거기서 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것은 그가 거기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바를 행하라는 뜻이기도 하였다.

[2-3절]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즉시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응답해야 한다. 야곱은 자기 집 사람들 즉 아내들과 아들들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사람 즉 종들에게까지 말했다. 그는 자기 혼자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 하지 않고 자기 집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순종하려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에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출 20:10). 우리는 가족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야곱은 그들에게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말했다. 그들 가운데 여전히 이방 신상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장의 하나님의 징책의 또다른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방 신상을 가정에 두고서는 평안과 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들을 정결케 해야 했다. 의복을 바꾸는 일도 필요했다. 옷은 마음가짐과 관계가 있다. 평소에 입는 옷과 놀러 갈 때 입는 옷과 하나님께 예배하러 갈 때 입는 옷은 달라야 할 것이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려는 것은 그의 환난날에 그에게 응답하시며 그의 가는 길에서 그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 단을 쌓기 위함이었다.

[4-5절]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의 가족들과 그와 함께한 자들이 다 모든 이방 신상과 귀고리들을 그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곳을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실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셔서 그 사방의 성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뒤쫓아오는 자들은 없었다. 우리는 실수와 부족이 많고 세상은 악하고 험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의 삶은 항상 안전할 것이다.

[6-8절]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은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도착하였다. 한 사람도, 한 아들도 불순종하는 자가 없었다. 그것이 경건한 선조들이 가정을 다스린 모습이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친 부모의 권위이며 남편의 역할이다. 성경은 교회의 장로의 자격에 대해 교훈할 때도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한다”고 말했다(딤전 3:4). 야곱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이라 불렀다. 그것은 그가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 하나님께서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

[8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본문은 갑작스럽게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에 대해 기록한다. 드보라는 죽어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되었다. 그는 이삭과 리브가와 함께 헤브론에 살고 있었을 것이지만, 어느 때, 아마 야곱이 가나안 땅에 돌아온 후 세겜에 머문 어느 때, 야곱에게로 보냄을 받은 것 같다. 그렇다면, 드보라를 야곱에게 보낸 것은 아마 야곱의 모친 리브가의 배려이었을 것이다.

[9-10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고 그에게 복을 주셨다. 또 그는 그의 이름이 다시는 야곱이라 불리우지 않고 이스라엘이 그의 이름이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다. 얍복 강변에서 천사로 나타나 씨름하시면서 주신 그 이름을 다시 재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그 이름은 그의 새로운 삶을 증거한다. 그는 더 이상 형을 속이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이다.

[11-15절]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하나님께서는 또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시며 많은 백성이 그에게서 나고 왕들이 그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말씀과 같다. 그는 또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 곧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후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야곱은 그곳에 기둥(맛체바)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서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16-20절]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그들이 벧엘에서 떠나 에브랏으로 가는 중에 라헬은 심한 해산의 고통 중에 아들을 낳고 죽었다. 그는 그 영혼이 떠나려 할 때 아들의 이름을 벤오니 (슬픔의 아들)라고 불렀으나, 그 아버지는 그를 빈야민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라헬은 죽어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다. 가나안 땅의 삶은 여전히 나그넷길이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도 죽었고 사랑하던 라헬도 죽었다. 또 후에는 그의 아버지 이삭도 죽을 것이다(29절). 야곱은 라헬의 묘에 기둥(맛체바)을 세웠고, 창세기를 쓴 모세 시대에도 그것은 라헬의 묘의 기둥이라고 불리었다.

[21-26절]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이스라엘은 다시 그곳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다. 그가 그 땅에 거할 때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통간하였고 이스라엘은 그 일을 들었다. 아직 청소년이었을 르우벤은 부끄럽고 악한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온 야곱의 가족들 안에도 여전히 죄악된 일이 있었다. 지상에서의 가나안 땅은 여전히 불완전하였다.

[27-29절]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이삭의 나이 180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야곱은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다. 기럇아르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우거하던 헤브론이었다. 그런 후 여러 해가 지났고 이삭이 180세가 되었을 때 그는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여 죽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은 그를 장사하였다. 이삭이 죽었을 때 야곱은 120세이었고 가나안 땅에 돌아온 지 약 30년 후이었다.

창세기 35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서원했던 곳이다. 야곱은 온 가족과 더불어 자신을 정결케 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에게 그 주위의 이방인들이 뒤쫓지 못하게 하셨고 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성경의 모든 교훈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런 명령은 신구약 성경에 여러 번 반복되어 있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즐거이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고(마 28:20) 성경말씀의 깨달음과 성령의 감동과 기도의 응답을 주실 것이다(요일 3:22).

둘째로,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이름을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와 ‘성도’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7,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 고린도전서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우리는 이 새 이름을 귀히 여기며 감사하자.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나그넷길임을 알자. 야곱에게 가나안 땅은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있고 인간의 부끄러운 실수와 죄악이 있는 나그넷길이었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다(대상 29:15; 벧전 2:11). 우리의 본향은 여기가 아니고 장차 올 저 세상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의 열조들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증거하였다(히 11:13- 16). 사도 베드로도 성도의 소망이 그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말했다(벧전 1:4). 우리는 이 세상이 나그넷길임을 알고 천국을 우리의 본향으로 삼고 사모하자.

 

36장: 에서의 자손들

[1절]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형인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었다. 창세기 25: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에돔 이라는 말은 ‘붉은 것’이라는 히브리어 아돔에서 나왔다.

‘대략’이라는 원어(톨레도스)는 창세기에 11번 나온다(2:4; 5:1; 6:9; 10:1; 11:10, 27; 25:12, 19; 36:1, 9; 37:2). 그것은 ‘대략’ ‘계보’ ‘사적’ ‘후예’ ‘약전’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창세기 전체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은 창세기가 여러 사람에 의해 편집된 것이 아니고 모세 한 사람의 저작임을 증거한다.

[2절]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취하고.

에서는 가나안 여인 중에서 아내를, 그것도 둘씩이나 취하였다. 그의 아내들은 필경 우상숭배적이고 불경건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에서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것은 그에게 경건성이 부족했음을 보인다.

본문은 에서가 헷 족속 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를 아내로 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 26:34-35는 그가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다고 기록했고, 창세기 27:4에 보면, 그의 어머니 리브가가 남편 이삭에게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내 생명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에서의 아내들은 헷 사람의 딸들이라고 불리었다. 그렇다면, 엘론의 딸 바스맛은 아다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고, 브에리의 딸 유딧도 오홀리바마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부친도 그러하고 종족도 혼합적이었던 것 같다.

[3절]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취하였더니.

창세기 28:9는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또 취하였다고 기록한다. 마할랏은 본절이 증거하는 대로 바스맛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는 에서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에서는 스스로 세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다. 성경은 일부일처를 교훈한다. 에서가 세 아내를 취한 것은 그의 무절제한 욕망을 나타낼 것이다.

[4-5절]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에서가 가나안 땅에 그 부친 이삭 가까이에 거하는 동안, 아다는 엘리바스를, 바스맛은 르우엘을,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알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다. 에서의 자녀들은 점점 많아졌다.

[6-8절]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의 우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