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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23년 7월 29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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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으로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성경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뜻을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도는, 유일한 선생님이신 성령의 지도를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강해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심히 부족한 종에게 지혜와 분별력과 간절함과 건강을 주시고 또 약한 남편을 위해 일평생 헌신한 아내를 주시고 또 많은 기도와 물질로 후원한 성도들과 합정동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제목 차례

마가복음 서론

1장: 전도사역을 시작하심

2장: 죄인을 부르러 오심

3장: 열두 제자를 세우심

4장: 비유로 말씀하심

5장: 예수님의 능력

6장: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7장: 내면적 성결

8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9장: 변화산 사건

10장: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1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2장: 변론하심

13장: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

14장: 잡히심

15장: 죽으심

16장: 부활하심 

 

 

서론

마가복음의 저자는 베드로의 통역자이었던 마가이다. 초대교회는 마가가 본서를 기록했음을 풍성하게 증거한다. 파피아스(60-130년경)에 의하면, “장로는 또 이렇게 말했다--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었기 때문에,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행적을 순서적으로 기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자기가 기억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한다(유세비우스, 교회사, 3. 39). 이레니우스(130-200년경)도 증거하기를, “[베드로와 바울이] 떠난 후에 베드로의 제자이며 통역자인 마가가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기록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고 하였다(Against Heresies, 3. 1. 1). 마가복음의 많은 생생한 내용들은 이 복음서가 목격자의 증언들을 담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 마가복음의 단순한 문체, 활기에 넘친 솔직한 언어, 생동감 있는 묘사 등은 베드로의 증거에 어울린다.

마가는 본명이 마가 요한이고 그 모친은 마리아이며 그 집은 제자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행 12:12). 그는 바나바의 사촌이었다(골 4:10). 그는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 시 그와 함께 갔다가 얼마 가지 않아서 되돌아갔다(행 13:5, 13). 본서에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한 청년이 따라오다가 벌거벗은 채 도망쳤다는 기록은 아마 본인을 가리켰을 것이다(막 14:51-52). 그는 후에 바울과 베드로를 도왔다(골 4:10; 몬 24; 딤후 4:11; 벧전 5:13). 디모데후서 4: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베드로전서 5:13, “내 아들 마가도 [문안]하느니라.” 두 사도와의 관계는 마가복음의 신빙성을 확고히 한다.

마가복음의 저작 시기에 관하여,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증거하기를, “마태는 히브리인들 가운데서 그들 자신의 방언으로 하나의 기록된 복음서를 내었다. 그 동안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말씀을 전하며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그들이 떠난 후에 베드로의 제자이며 통역자인 마가는 우리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것을 기록으로 남겨 전해주었다”고 하였다. ‘떠난 후에’라는 말이 그들의 죽음을 가리킨다면, 마가복음은 주후 68년경 로마의 성도들의 요청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주후 65년경 (혹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68년경), 사도 바울은 주후 67-68년경 순교하였다고 보인다.

마가복음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이 있다.

(1) 마가복음은 간결한 복음서이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의 8분의 5 정도로서 복음서들 중에 가장 짧다.

(2) 마가복음은 ‘선교 복음서’라는 별명을 가지며 전도용으로 가장 적합하다. 특히 이 책은 이방인들을 위해 쓰인 것 같다. 구약성경의 인용은 단 한번뿐이다(1:2-3).

(3) 마가복음은 행적의 복음서이다. 이 책에는 ‘곧, 즉시’(유데오스는 40회, 유뒤스는 1회)라는 말이 41회 나오며, 예수님의 비유들은 5개만 나오고 그의 행하신 기적들은 19개나 기록되어 있다. 또 예수님의 족보와 유아시절의 기사는 생략되어 있다.

(4)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들에 대해 비교적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했다. 예를 들어, 2:3은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어서” 왔다고 증거했고, 4:38은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다고 증거했고, 5:41과 7:34는 “달리다굼”이나 “에바다”라는 아람어를 그대로 증거했고, 6:14-29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자세히 증거했고, 6:39는 무리를 “푸른 잔디에” 앉히셨다고 말했고, 9:14-29는 간질병 소년의 치료를 자세히 증거했고, 14:30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주를 부인하였음을 증거하였다.

 

 

1장: 전도사역을 시작하심

1-11절, 세례 요한의 증거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고 증거한다. 베드로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다(마 16:16). 요한도 그가 쓴 요한복음 끝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증거하였다(요 20:30-31).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요 1:12) 의미와 다르게, 그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셨다는 의미이다. 사도 요한은 그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였고(요 1:14), 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전통본문)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했다(요 1:18).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또 그가 새벽녘에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배에 있던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마 14:33). 이처럼 하나님의 본질을 가진 아들께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2-5절] 선지자 이사야[선지자들](전통본문)1)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전통본문)2)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요한이 세례를 베풀며](전통본문)3)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마가는 말라기 3:1과 이사야 40:3의 예언을 인용하였다. 이 예언들이 세례 요한에게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예언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다(사 46:10). 그가 그의 행하실 일을 예언하시는 것은 우리로 소망 중에 하나님을 기대하다가 그 일이 이루어질 때 그를 더욱 확신케 하려 하심이다. 과거의 예언 성취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도 확신하고 소망하게 된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이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버리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회개는 죄사함의 필수 조건이다(행 2:38; 3:19). 죄사함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복이다. 죄가 사람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기 때문에, 죄사함은 행복의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가 필요하다. 주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눅 5:32).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후에 베드로를 통해 3천명을 회개시키는 일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버려두시면 선지자 예레미야 때처럼 41년간의 사역이라도 결실 없는 사역이 될 수 있다. 씨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고전 3:7). 메시아의 오심은 이렇게 준비되었다.

[6-8절]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신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띤 것은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을 나타낸다(왕하 1:8). 요한은 광야생활과 설교사역에 적합한 검소한 복장을 하였다. 세례 요한은 먹는 음식도 단순하여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석청(石淸, 멜리 아그리온)은 들판에서 얻을 수 있는 야생꿀을 가리킨다. 반찬이 많은 식탁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해야 한다(잠 30:8; 마 6:11).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보다 능력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은 극히 제한적이다. 요한복음 1:34에 보면, 세례 요한은 메시아께서 신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은 그 분의 신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천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물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성령세례는 실제로 죄씻음을 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단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죄씻음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그가 승천하신 후, 성령의 강림으로 성취되었다(행 1:5). 오늘날 예수님 믿는 자들은 다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6,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9-11절]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땅의 북부에 있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요단강은 북쪽 갈릴리 호수로부터 남쪽 사해까지 약 100킬로미터나 되는 강이며 요한이 세례를 베푼 곳은 남쪽 유대 지역이었다(마 3:1; 막 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곧 우리의 죄를 짊어진 대속 제물로 세례를 받으셨다고 보인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요 1:29, 32-34).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 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혹은 내가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마태, 마가, 누가 등 세 복음서가 다 증거하는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이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께서 그에게 내려오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메시아 신분을 확인하신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신적 메시아이시지만, 사람이신 그의 메시아 의식은 아마 점진적으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누가복음 2장에 증거된 대로, 그는 열두 살 때에 벌써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그의 부모에게 말씀하셨다(눅 2:49, KJV). 이제 아버지께서는 그를 전도 사역에 내보내시기 전에 그에게 메시아 신분을 밝히 증거하셨고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확인하시고 확신하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의 증거를 받으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시작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의 한 기본적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친히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으셨다. 우리는 네 권의 복음서들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을 보았고 들었으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었고 구원을 받았다.

둘째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죄가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었고 죄사함은 그 해결책이다. 죄가 모든 사람의 모든 불행의 근본적 원인이다. 그런데 죄사함은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대속(代贖)의 제물이 아니고서는 사람의 죄는 용서될 수 없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대속 사역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대속 사역이다. 이것은 그가 오시기 전에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의 사역을 통해 증거되었다. 우리의 죄를 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 또 이것은 단지 물세례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세례, 곧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 증거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를 믿는 것이다.

 

12-20절,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심

[12-13절] 성령이[성령께서] 곧 예수를[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는 거칠고 들짐승이 있고 온갖 위험이 있고 특히 마귀의 시험이 있는 곳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40일간 금식을 하셨다. 40일간의 금식과 사탄에게 시험받으심은 그의 전도사역을 위한 준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없으나 사람인 예수께서는 받으셨다. 그는 친히 사람의 연약함을 체험하셨다(히 4:15). 첫째 사람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졌었다. 그러나 둘째 사람이신(고전 15:47) 예수께서는 승리하셨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다. 우리는 세상사는 동안 마귀의 시험들을 이겨야 한다.

[14-15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하나님의 나라의](전통본문)4)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하나님께는 완전한 시간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이 끝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갈릴리는 이스라엘 땅의 북부 지방이고 예루살렘은 남부 유대 지방에 있었다. 예수님의 공적 전도사역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에서가 아니고 갈릴리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지역이나 외적인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그의 자유로운 뜻에 따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내용을 가리킨다. 죄인들은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작정하신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있다. 이제 다니엘이 예언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때가 되었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곧 로마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이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 나라가 바로 신약교회이다.

주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파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죄를 버리고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십계명을 어긴 죄들을 회개해야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죄와, 온갖 부도덕의 죄, 즉 불효,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등을 포함한다. 복음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가리키며(롬 1:2-4),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칭의(稱義)와 영생이다(고전 1:22-23; 롬 3:23-24; 6:23; 요 3:16). 사람은 누구나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16-20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는 죄인을 부르러 세상에 오셨다(막 2:17). 사도 바울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전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에게 맡기신 일이며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것은 교회의 최대의 임무와 사명이며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주께서는 이 중요한 일을 위해 전도자들을 부르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으려면 그 이름에 대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 전도가 필요하고 전도를 위해서 전도자가 필요하다. 누군가 사람들에게로 가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롬 10:13-15).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는 주와 함께 있으면서 주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한다. 오늘날 전도자는 성경에 정통하여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 또 전도자는 주님의 인격과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는 무엇보다 주님의 거룩과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마 11:29). 또 전도자는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각오해야 한다(딤후 4:3-5).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그 나라가 곧 신약교회이다.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나라에 들어온다.

둘째로, 죄인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는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누구든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오려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셋째로,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신약교회의 사명이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에게 맡기신 일이며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전도는 지옥 갈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임무요 사명이다. 우리는 전도를 중요하게 여기고 이웃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배포해야 한다.

 

21-34절, 귀신들림과 열병을 고쳐주심

[21-22절]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처음 전도하신 마을이었다. 그는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셨고 가버나움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율법이 명한 성도의 생활 규칙이었다. 그 날에는 육신의 일을 쉬어야 하였고(출 20:9-10) 공적인 집회로 모여야 했고(레 23:3) 세속적인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다(출 31:13-15).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지만, 그 완성은 축소된 방식으로가 아니고 풍성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신약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7일 중 하루 이상을 거룩히 구별하여 예배의 날로 지켜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의 규례와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고(눅 4:16) 거기서 가르치셨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생긴 유대인들의 집회 장소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한 곳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성경말씀을 배웠다. 회당의 예배는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비슷했다. 신약 성도들도 성수주일, 십일조, 예배당 중심의 생활 같은 경건한 습관을 가져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습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당에 모인 경건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교훈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로 가르치셨다. 사람들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23-28절]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더러운 영]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예수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천사는 영이다. 귀신은 악한 천사 곧 악한 영이다. 귀신은 사람 속에서 더러운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며 사람으로 더러운 일을 행하게 한다. 그것은 사람들로 남을 미워하고 음란하고 거짓되고 탐욕적인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가 과거에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랐는데 그가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했고 우리가 그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하였다(엡 2:1-5).

회당에서 만난 그 더러운 귀신은 나사렛 사람 청년 예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알고 있었고 그가 자신을 멸할 수 있는 자이심을 알고 두려워했다. 그는 예수께서 평범한 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히 구별한 자이시며 더러운 귀신들을 멸할 수 있는 신적 권세를 가진 자이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악령도 상당한 지식은 가지고 있다. 단지 그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 구원은 범죄한 사람들에게만 주셨고 범죄한 천사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귀신을 꾸짖으시고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권위 있게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그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물었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신들까지도 복종하였다. 그의 소문은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귀신들을 복종시키는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신적 구주이시다.

[29-31절]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주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말하자, 그는 나아가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누가복음 4:39는 그가 열병을 꾸짖으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의 열병이 떠나고 그는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예수께서는 열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그는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셨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32-34절]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날이 저물어 해가 질 때, 사람들은 모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본문은 “온 동네가 문앞에 모였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과장법일 것이다. 그러나 온 동네의 모든 사람이 모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고 많은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그를 알아보므로 그들의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신 그의 사명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각가지 병들과 불행들이 있다. 그것들은 근원적으로 사람의 죄 때문에 왔다. 죄 없는 천국에는 병도 불행도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각종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사건들은 그의 행하신 일들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가 각종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 또 가버나움에서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귀신은 그에게 복종하였고 각종 병들은 치료되었다. 그는 확실히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예수께서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참된 의사이시다. 그는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사람을 영육으로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의사, 특히 우리의 죄악된 생각과 감정, 또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구주, 곧 우리의 인격의 결함과 연약을 변화시켜 주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단번에 법적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깨끗케 하셨고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고, 또 비록 우리의 성화가 매우 더디고 불완전하지만, 오래 참으시며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점점 더 거룩하고 선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셋째로, 그러나 우리는 기적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기적을 전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고전 1:22-24). 방언, 병고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삶이다(고전 13:1-2). 바울은 거짓된 기적주의를 경계했다(살후 2:9-12). 기독교는 초자연적 기적과 은사를 믿지만,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경의 교훈을 열심히 배우고 믿고 행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알아야 한다.

 

35-45절, 예수께서 하신 일들

[35-39절] 새벽 오히려 미명에(엔뉘콘 리안)[아직 꽤 어두울 때]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예수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예수께서는 이른 새벽, 아직 꽤 어두울 때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그는 새벽기도를 하신 것이다. 그가 매일 새벽기도를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확실히 새벽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새벽기도는 하루의 복잡한 일과가 시작되기 전,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또 밤에 충분히 잠을 잔 후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정성어린 일이다. 또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기도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생활화하려면 성도는 밤에 좀 일찍 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은 신비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 예수님의 사역에 필요하였다고 보이며, 그것은 모든 성도들과 특히 사역자들에게 본이 된다. 예수께서는 기도로 그의 전도사역을 수행하셨고 진행하셨다. 인간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을 위해 기도로 날마다 새 힘을 공급받으셨다. 그와 같이, 오늘 우리 모든 사역자들은 기도로 우리의 직분을 수행하고 날마다 기도로 하나님께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신성(神性)을 가지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셨다면, 죄악된 세상에서 죄성과 연약성을 가진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도들과 초대 성도들은 기도에 전념하였다(행 6:4; 2:42).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 그를 만나서 모든 사람이 그를 찾는다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이는 내가 이를 위하여 왔음이니라.” 그는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셨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을 내어쫓으셨지만, 그것은 그의 주된 사역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이를 위해 전도하는 일이었다. 그가 병을 고치신 것은 그의 신적 능력과 긍휼에 수반된 일이었다. 회개와 천국 선포를 통해 영혼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의 더 중요한 사역이었다. 몸의 건강과 병의 치료도 귀하지만, 영혼의 구원은 더 가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이 세상에서의 복된 삶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복이다. 죄의 결과는 질병과 불행과 죽음이었으나, 죄씻음의 구원은 평안과 행복과 영원한 생명이다.

오늘날 전도는 일차적으로 전도자의 임무이지만(마 28:19; 막 1:17; 딤후 2:2; 딛 1:3),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임무이다. 모든 성도는 가정복음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 특히 믿는 아내들은 믿지 않는 남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순복하고 그들 앞에서 선하고 거룩한 행실을 보이면서(벧전 3:1-2) 전도해야 한다. 또 모든 성도는 이웃에게 친근히 하며 정직하고 선한 본을 보이면서 한 사람이라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해야 한다.

[40절] 한 문둥병자[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아왔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부정(不淨)하므로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런데 그가 예수께 나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였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가 꿇어 엎드려 간구한 것은 그의 겸비함과 간절함을 보인다. 그의 질병은 그에게 유익하였다. 그는 그 고난을 인하여 겸손히 예수께 나아와 엎드렸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능력을 믿었음을 나타낸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예수께서 자기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놀라운 깨달음과 믿음이 있었다.

[41-42절]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으시고]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그가 말씀하시자]5) 곧 문둥병[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는 이런 불치의 병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그는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곧 그의 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졌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었다.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병보다 더 더럽고 나쁜 우리의 죄악을 깨끗이 씻어주셨고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셨다(롬 3:23-24; 요 3:16).

[43-44절]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예수께서는 그에게 엄히 경계하시고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그가 그에게 엄히 경계하신 것은 그의 사명이 병 고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임을 군중들로 오해하지 않고 알게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가 그에게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의 깨끗케 됨을 인해 모세의 명한 것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규례대로(레 14:2-32) 하라고 하신 것이다.

[45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그 사람은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했다. 그는 이 점에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이루어진 그 놀라운 일을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다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께서는 새벽 미명에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새벽기도는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가장 좋은 시간에, 또 가장 적절한 때에 하는 정성어린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새벽기도를 생활화하려면 밤에 좀 일찍 자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예수께서는 새벽기도, 밤기도, 철야기도를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기도에 힘쓰셨듯이,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기도에 힘써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를 깨끗케 고쳐주셨다. 그는 나병보다 더 더럽고 나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구주이시다. 사도행전 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이 세상과 사람들의 모든 불행의 궁극적 원인은 죄이며 죄사함은 모든 불행의 근본적 해결책이다. 우리의 죄를 씻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피밖에 없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택자들의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 사역을 이루셨다. 이제 죄인들은 회개하고 이 속죄의 복음을 믿음으로 죄씻음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구원의 방법이며 신약교회에 주신 최대의 과제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며 또 시시때때로 전도해야 한다.

 

2장: 죄인을 부르러 오심

1-12절,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

[1-4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는 모여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는 주로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셨다. 구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죄인을 구원하신다. 교회의 중심적 사역은 말씀 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또 풍성하고 힘있게 전파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인도되었다. 중풍병은 뇌혈관이 터지거나 막혀 팔이나 다리 등의 신경이 마비되는 병이다. 세상에는 많은 병들이 있고 많은 불행한 일들이 있다. 그것들의 궁극적 원인은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사람의 모든 불행의 해결책이 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사람은 모인 무리를 인해 그를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가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 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렸다. 그들은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하였다. 이것은 상당한 비용지출과 집 주인이나 거기 모인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방법 외에는 그 병자가 고침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고 또 그 기회를 놓치면 다른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어떤 대가(代價)도 중풍병의 치료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행위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과 열심은 본받을 만했다. 이제 우리는 병고침을 위해 그런 열심을 내지 말고 영혼 구원과 전도를 위해 그런 열심을 내어야 한다. 병고침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필요한 일이지만, 영혼 구원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시간과 돈과 힘을 써야 한다.

[5-7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테크논)[아이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죄와 질병이 관련이 있음을 보인다. 욥이나 바울의 경우와 같이, 어떤 특정한 병이 특정한 죄의 결과가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병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죄가 없었던 세상에는 병도 없었다. 질병의 원인이 그렇다면 그 해결책도 분명해진다. 죄사함이 그 해결책이다. 죄사함은 실상 사람의 병뿐 아니라 사람의 모든 불행의 해결책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다.

어떤 서기관들이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점에서 옳았다. 입법자와 재판자이신 하나님 한 분 외에 죄를 사할 권한이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은 합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보았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8-12절]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그의 영으로]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들이 속으로 품은 생각을 그의 영으로 아셨다. 그의 인성(人性)은 신성(神性)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적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사람의 속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일상적인 말이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보다 쉬운 말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원적 해결책을 주시고 또 가르치시기 위해 그것보다 더 어려운 말을 택하셨다고 보인다.

여기에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 사역이 있다. 그것은 죄사함의 사역이다. 죄사함은 인생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요 그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었다. 그는 이 권세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 구주 예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이다.

그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는 일어나 곧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 사람들 앞에서 나갔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에 근거하여 그 병자의 중풍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불치의 병들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을 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유의 기적들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영적으로 중풍병자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정상적인 생활, 곧 경건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게 하신다. 죄인들의 구원은 병자들의 치료보다 훨씬 더 큰 일이다. 죄인들의 구원은 더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의 삶에 관계된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놀라운 일을 쉬지 않고 행하신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사람들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제 죄인들은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는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사도행전 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로마서 3:2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며, 예수님 믿는 자들은 이미 죄사함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셋째로, 중풍병자를 데려왔던 사람들은 그 병자를 위해 열심을 내었다. 우리는 중풍병보다 더 불행한 죄로 인해 상한 영혼들을 구주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열심을 내어야 한다. 우리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어야 한다. 우리는 천하보다 더 귀한 한 명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힘과 시간과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13-17절, 많은 죄인들이 따름

[13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집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말씀을 증거하시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말씀 사역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죄인들을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이 레위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마태일 것이다(마 9:9-13). 세리 즉 세무 공무원은 부정과 불법이 많은 직업이었고 죄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주목하셨고 사역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의 관심, 그의 생각, 그의 의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사역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레위는 주 예수님의 부름을 받자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복음의 일꾼은 주 예수님을 따르는 자, 곧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는 자이어야 한다.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예수께서는 늘 바쁘셨겠지만 사람들과 함께 음식 잡수시기를 피하지 않으셨다. 주와 함께 식탁에 앉은 세리들과 죄인들은 레위의 친구들로서 레위의 전도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자기가 의롭고 자기의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많은 죄인들은 그를 따랐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믿음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16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전통본문)6)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인들 중에 있었다(행 23:9)(NBD). 그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가 의인이라면 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 그들은 이것을 죄인들과의 교제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혼의 구원과 전도의 차원에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것이었다. 교제의 차원과 전도의 차원은 구별되어야 한다. 더욱이, 주님과 함께 식사한 자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 자들이었다. 회개하고자 하는 진실한 죄인들이 실제로 악을 행하면서도 의인인 척하는 위선자들보다 구원에 가깝다.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전통사본)7) 왔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5:32도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나 병원이 필요치 않다. 의사나 병원은 병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병자는 고침을 받을 것이나, 건강한 척하는 자는 그 병으로 죽을 것이다. 병자는 병원 가기를 싫어하거나 자기 병을 속이지 말고 병원에 가서 바른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고침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 병 때문에 죽고 말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죄에서 건져주시는 구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구주는 죄인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우침 받고 그 죄를 깨닫고 그 죄의 씻음 받기를 원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의인인 척하는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세상에 오셨다.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요, 죄사함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가장 놀랍고 감사한 선물이시며, 죄인인 모든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보다 더 복되고 감사하고 감격적인 일은 없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죄인들의 구주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다 죄인이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해주셨다. 그는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비록 그가 어떤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그에게로 나아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며 주 예수께 엎드려 간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심정을 본받아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 이방종교인들 등 그 어떤 죄인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을 하나님께로, 구주 예수께로, 또 바른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전도적 접촉에는 어떤 제한이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심정으로 사람을 접촉하고 전도하고 인도해야 한다.

셋째로, 그러나 우리는 교회적 교제, 즉 성도간의 교제의 선은 지키고 원칙은 지켜야 한다. 우리는 교제와 절교(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불신자나 이단자나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와 교제하지 말고 그를 멀리하여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을 말씀의 바른 교훈으로 잘 훈련시키고 잘못이 있을 때 적절한 권징도 시행해야 한다. 성도들의 무분별한 교제는 개인과 교회의 신앙을 변질시킬 것이다.

 

18-22절, 금식 문제에 대하여

[18-20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바리새인들의 제자들](전통본문)8)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의 오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습관을 따라 금식을 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오셨으나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록 금식하지는 않았지만,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종교적 형식만 지키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기쁨과 즐거움의 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동안에 금식할 일이 아니었다. 금식은 비상한 기도, 결사적인 기도의 형태이다. 지금은 그들이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때이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금식할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에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날을 가리킨다. 그때 제자들은 금식할 것이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며 이후에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간구할 것이다.

신약시대에 금식이 불필요하거나 폐지된 것은 아니다. 주께서 어느 날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한 간질 환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려와 고쳐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때 주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나았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음을 지적하신 후 마가복음 9:29 전통본문에 보면,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9) 주께서 금식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었다(행 13:1-3).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였고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신약교회에서도 특별한 경우에는 금식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금식 기도는 율법적 규례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 경건 생활의 규칙으로 규정할 것도 아니다. 규칙적 금식이 더 경건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신약성도는 언제든지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생겼을 때 자원함으로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21-22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 아래서의 옛 생활방식을,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 가죽부대와, 또 암시된 바, 새 옷은 복음 아래서의 새 생활방식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신약 아래서 우리가 어떤 법적 규정에 얽매여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유함과 자원함으로 섬겨야 함을 암시한다. 로마서 7:6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율법의 속박과 공포로부터의 자유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롬 7:6; 갈 5:1).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으므로(롬 3:24; 히 10:10, 14)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롬 7:6; 갈 5:1).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율법에서의 자유는 율법의 속박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롭다 하심과 거룩함의 당연한 결과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자원함으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고(갈 5:13),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명백히 구별됨을 증거하였다(갈 5:19-23). 사도 베드로도,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고(벧전 2:16), 성도가 선한 행실로 자신의 구원을 견고케 해야 하며 또 흠과 점 없는 인격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벧후 1:5-11; 3:14). 또 사도 요한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곧 중생한 자들은 계속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의를 행함과 형제 사랑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명확히 구별된다고 교훈하였다(요일 3:9-10).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으나 이제 자원함으로 계명을 힘써 지켜야 한다.

 

23-28절,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자름

[23-24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다. 밀 추수 때이었던 것 같다. 마태복음 12:1은 그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매우 경건하고 보수적이게 보였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했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남의 밭을 지날 때 이삭을 자른 것은 죄가 아니며 율법이 허용한 것이다(신 23:24-25). 단지 안식일에 행한 그 행위가 문제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25-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궁핍하여 배가 고팠을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차려놓은 떡]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한 사건을 들어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답하셨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할 때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간 때가 있었다.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로서 성경 역사에서 그 부친보다 더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 같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제사장은 그들에게 성전의 거룩한 떡을 주어 먹게 하였었다. 이 일은 구약의 의식법에 저촉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비상한 때에 부득이한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큰 죄로 여기지 않으셨고 다윗과 그 일행들을 용납하셨다. 이와 같이, 이번 경우에도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삭을 잘라먹었겠는가 하고 이해한다면 큰 비난거리가 될 것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27절]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디아)[때문에] 있는[만들어진]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때문에] 있는[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의 목적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씀이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유익을 위해 제정하신 것이며(신 10:12-13), 안식일 계명도 그러하다. 안식일 규례는 사람의 육신적 휴식과 영적 성장을 위해 주신 좋은 규례이었다. 출애굽기 23:12,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7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물론, 사람이 안식일에 자기 마음에 원하는 바를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매우 엄격하여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은 큰 죄가 되었다. 또 안식일에 매매 행위나 육신을 위한 오락은 중지되어야 했다(느 13:15-17; 사 58:13). 그러나 안식일의 본 정신은 사람을 위하는 데 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 중요하며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자들에게는 복이 약속되어 있었다(사 58:14). 실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 평안과 건강을 주시는 자이시다. 다른 날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안식일에 다 허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나, 우리가 안식일의 참 의미를 이해한다면, 상대의 사정을 고려치 않고 그의 행위를 단순히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생명을 구하는 일이나 의식주에 관한 부득이한 행위는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28절] 이러므로 인자(人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도 주인이 되신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지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참된 안식과 자유가 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의 복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다. 주일은 휴식과 예배의 날이다. 우리는 이 날 오락과 세속적 일을 금하고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안식일을 즐거이 지키지만, 남의 어려운 형편을 동정함이 없이 그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안식일의 참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안식일은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날이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안식일 없이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에게 예배드리지 않고 무신론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섬기며 의지하고 소망한다. 신약 시대에 성수주일(聖守主日)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우리의 구원을 견고케 하고 우리로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한다. 또 우리는 주일을 구별하여 지킴으로 영적인 복은 물론 육적인 복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안식일을 자발적으로 지켜야 한다. 오늘날에는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날이요 거룩한 날이지만,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예배의 날로 받았다. 사도시대로부터 교회는 주일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렸다(행 20:7; 고전 16:2). 사도들의 다음 시대에는 그 규례가 더욱 확실하였다.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에 세속적 일들과 육신적 오락을 피하고 휴식하며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며 들으며 또 이런 일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3장: 열두 제자를 세우심

1-19절,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심

[1-4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보셨다. 그 병자의 간절한 소원은 병의 치료이었을 것이다. 예수께는 그의 병을 치료할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 주위에 있었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그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엿보고 있었다. 우리는 비난거리를 찾으려고 사람을 엿보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교훈을 배우며 그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공개적 사역이었다. 그는 은밀히 무엇을 가르치거나 행하지 않으셨다. 그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들은 책들에 다 기록되어 온 세상에 드러나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선행과 악행, 생명을 구함과 생명을 죽임 중 안식일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셨다. 그의 질문은 그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이었다. 그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그런 행위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처럼 보였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 반대이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행하려 하셨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악한 일을 행하려 하였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는 것은 확실히 악한 일이었다.

[5-6절]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시고 노하셨다. 사람의 심령의 온유함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사람의 마음은 완악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저 불쌍한 병자를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그는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의 손을 내밀자 그것은 회복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의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神性)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이 사건에서 우리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할 수 있음을 증거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헤롯당은 주후 6년 헤롯 아켈라우스가 파면되고 로마 총독이 임명되었을 때 결성된 헤롯 가문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속적 권력과 돈과 명예를 추구했던 것 같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함께 예수님 죽일 일을 의논했다. 그들은 악한 일을 위해 협력했다. 복음사역자에게 진실한 동료들도 있지만 원수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교회 일에는 사탄의 방해가 있지만, 주께서는 언제나 승리케 하신다.

[7-10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等待)하도록[미리 준비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밀침]이더라.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을 때,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그를 좇았다. 그는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시기 위해 작은 배를 미리 준비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가 많은 사람을 고치셨기 때문에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그를 만지려고 밀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진리보다 기적에 더 흥미를 느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 성경은 그 사실을 반복해서 증거하였다(막 1:34; 마 4:23-24; 8:16; 9:35; 14:35-36). 복음서들에 기록된 것들은 대표적인 예들에 불과했다. 마태복음에는 14개, 마가복음에는 13개, 누가복음에는 17개, 요한복음에는 단지 5개, 합하면 중복된 것을 빼고 사복음서에 단지 26개의 병 고친 사건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11-12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엄히] 경계하시니라.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다. 그는 귀신 들린 여러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마 4:24; 8:16; 막 1:34). 귀신은 더러운 영이다. 귀신은 범죄한 영이며 또 사람을 범죄케 하는 영이다. 우상숭배, 이기주의, 미움, 음란, 쾌락주의, 거짓말은 악령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질병을 위해 회개하며 기도할 뿐 아니라, 적절한 수면, 영양 있는 식사, 기분 전환, 운동, 및 의학적 치료 등의 방편을 감사히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다. 그것은 병고침이 그의 중심적 사역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자신의 사역을 오해하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의 사역의 목표는 단지 육신의 병고침이 아니고 죄사함에서 오는 영육의 구원이었다. 회개와 죄사함의 구원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먼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그의 사역이 충분히 이해되기 어려웠다.

[13-15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후스 에델렌)[원하고 계셨던]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병들을 고치며]10)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불러 열둘을 세우셨다(눅 6:12-13). 그들은 그가 세우기를 원하고 계셨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使徒)라고 불리었다(눅 6:13). 이처럼 사도들은 주께서 직접 택하여 세우신 제자들이었다. 요한복음 15:16에 보면, 그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는 주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 제한된다. 오늘날도 교회는 주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직분자들로 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3장에 기록된 장로와 집사의 자격 요건대로 세우는 것이라고 본다.

주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목적은, 첫째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그것은 그와 함께 있음으로써 그의 말씀을 빼놓지 않고 배우며 또 그의 인격과 행위를 배우고 본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자는 선생에게 듣고 배우며 그를 보며 본받는 자이다.

둘째는 그들을 전도하러 보내기 위해서이었다. 사도는 전도하게 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이었다. 사도의 중심사역은 전도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서 1:3에서,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셋째는 그들에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주기 위해서이었다. 병 고치는 권세는 특히 사도들에게 주신 권세이었다.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병 고치는 권세는 사도의 표와 신분증이었다.

오늘날도 목사와 전도자의 첫 번째 임무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디모데전서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정통하고 하나님과 기도로 많이 교통해야 하고 그의 인격과 삶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충성되고 능력 있는 일꾼이 될 수 있다.

[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11)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들과 그 외에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러나 그는 단지 병을 고치려고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이며 죄문제의 해결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을 잡아죽일 궁리를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이었다. 우리는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위선자가 되지 말고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길에 평안만 있지 않고 미움과 핍박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자기의 원하고 계셨던 자들을 불러 열둘을 세우셨다. 주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그 말씀에 정통하고 하나님과 기도로 깊이 교제해야 하고 그의 인격과 삶이 성경 교훈에 맞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35절,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과 따르는 자들

[20-22절]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속[친척]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생활하셨다. 우리도 이 세상을 오랫동안 살려고만 하지 말고, 바르게, 충실하게, 바쁘게 살다가 천국에 가기를 소원한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를 붙들러 나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가 미쳤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칭찬과 사랑을,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모욕과 핍박을 받았었다(고후 6:8). 오늘날에도 주의 충실한 종들에게 선한 평판도 있지만, 악한 비방도 있을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즉 성경학자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하여 거기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혔고 그를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비난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이도 성경학자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종교는 이론적 내용을 가지지만, 경건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 종교가 이론뿐이라면 죽은 것에 불과하다. 참 종교는 이론적 내용을 가진 참 생명이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강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강탈]하리라.

사탄은 사탄을 쫓아낼 수 없다.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듯이,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한다. 그러므로 사탄을 힘입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고서야 그 집 물건을 빼앗을 수 있듯이, 사탄보다 강한 자만이 그를 내쫓을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사탄을 내쫓으실 수 있다.

[28-3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정죄](전통사본)12)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죄는 사하심을 얻는 죄가 있고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다. 모든 죄들이 다 사하심을 얻을 수 있으나, 단지 성령 훼방의 죄를 범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5장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구분하며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암시하였다(요일 5:16).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어떤 일이 성령의 활동이 분명한 데도 그것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을 가리켰다고 본다.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는 것을 더러운 귀신에게 돌리며 비난하였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명백한 일을 부정함으로 스스로 회개할 수 없게 하는 지극히 완고한 마음이다. 이런 유의 죄는 오늘날 이단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성경에 증거된 명백한 사실들을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악하게 비난한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대항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께서만 주실 수 있는 회개를 할 수 없고, 회개가 없으면 죄사함의 구원도 없다.

[31-32절]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동생들과 그의 모친]13)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께는 동생들이 있으셨다. 마가복음 6:3과 마태복음 13:55에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 그의 남동생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 외에도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예수님의 남동생들과 누이들에 대해 말한다(요 2:12; 7:3, 5, 10; 행 1:14; 고전 9:5; 갈 1:19).

[33-35절]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뜻을 행하는] 자는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께서는 육신의 가족보다 믿음의 가족을 더 중시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요 가족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한 큰 가정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믿음과 순종이다. 첫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요 6:40; 롬 3:21-24). 둘째로, 순종은 율법에 명령된 하나님의 뜻이다(신 10:12-13). 계명 순종은 사람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무이다(롬 6:12-13). 순종의 삶은 서로 사랑함과 거룩함과 선행 등으로 표현된다(요 13:34; 살전 4:3; 딛 2:14).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증거들과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들을 다 인정하고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믿음과 순종의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며 경건하고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가족이며 실상 육신의 가족보다 더 친밀해야 할 자들이다.

 

4장: 비유로 말씀하심

1-20절, 씨 뿌리는 비유

[1-8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바다 위에 배에서 앉아 가르치셨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었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기회 있는 대로 가르치셨다. 그는 설교하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셨다. 그는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다. 비유는 일상적 사건이나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하셨다. 예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귀에 장애가 없는 일반 사람들은 들을 귀를 다 가지고 있으므로 모두가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할 것이나, 육신의 귀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듣고 깨닫는 영적인 귀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은혜 주시는 자들만 가질 것이다.

[10-12절]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그 비유]14)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라고 표현하셨고, 또 ‘너희’와 ‘외인(外人),’ 즉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버려두신 자들을 구별하셨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확실히 제한적이다. 비유는 예화와 다르다. 예화는 사람의 이해를 돕는 이야기이지만, 비유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뜻이 있다. 비유에는 표면적 내용과 이면적 내용이 있다. 비유의 표면적 내용은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이면적 진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신 자들, 그래서 불신앙과 죄악으로 그 마음이 굳어진 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께로 돌아오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의 눈이 열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13-15절]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그들의 마음에](전통본문)15)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예수께서는 그 비유를 설명해주셨다.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처럼 생명이 있다. 마른 씨를 땅에 심으면 싹이 나듯이,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 역사(役事)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마 13:37) 또 그 후에 그의 사도들과 오늘날까지 목사들과 전도자들이 그 직무를 이어받는다.

주께서는 씨가 뿌려진 땅을 네 종류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킨다. 첫째로,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고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말씀을 뿌리는 일을 하시지만, 사탄은 그 말씀을 빼앗는 일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싫어하며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생각을 흐트러뜨리고 진지하게 받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생각을 집중하고 진지하게, 졸지 말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을 깨닫고 믿고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된다.

[16-17절]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둘째로, 씨가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것을 가리켰다. 세상에는 질병이나 궁핍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 또 특히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한 환난과 핍박도 있다. 하나님 말씀의 뿌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들은 환난 중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을 위해 성경을 주셨으므로(눅 1:1-4; 딤후 3:14),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18-19절]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재물]의 유혹(아파테)[속임](KJV, NASB, NIV)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셋째로, 씨가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그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것을 가리켰다. 누가복음 8:14는 거기에 ‘쾌락’을 추가하였다. 재물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사람을 속인다. 그러나 실상 재물은 환난 날에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한다(잠 11:4; 습 1:18; 겔 7:19). 돈은 어느 날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린다(잠 23:5).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9-10). 그러므로 우리는 돈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또 세상 염려를 버리고, 성경 교훈대로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6, 8).

[20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넷째로, 씨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것을 가리켰다. 식물의 씨앗 하나는 심기어서 자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한 사람은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단지 인간편에서 성실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8:15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듣고 깨닫고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그것을 지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람은 그의 충성의 정도대로 차등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믿어야 하고, 우리의 지식과 믿음이 성경을 통해 견고해지고 성경에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이 실패치 않도록 세상의 염려와 돈의 속임과 육신의 쾌락을 다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진지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그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그 교훈대로 의와 선을 실천하여 많은 열매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34절, 겨자씨 비유

[21-23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등잔대]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드러나지 않을]16)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나타나지 않을]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은 열 되짜리 큰 통을 뜻하고, ‘평상’은 침상을 뜻하고, ‘등경’은 등잔대를 뜻한다. 등불은 큰 통 아래나 침상 아래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둔다. 이처럼,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은밀하게 전해질 것이 아니고 세상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지고 알려져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책에 기록되어 세상 만민에게 공개되어 있고 모든 사람이 읽고 듣고 확인할 수 있다.

[24-25절]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듣는 너희는]17) 더 받으리니 [이는]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빼앗길 것임이니라].

우리는 듣고 배운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를 취급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대하실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고 불신앙적이면 그는 우리를 버리실 것이다. 주께서는 “이는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있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없는 자는 이미 가진 지식과 은혜도 빼앗길 것이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 듣고 음미하고 간직하고 실행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들은 말씀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삼가며 굳게 지켜야 한다(히 2:1; 고전 15:1-2).

[26-29절]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코르토스)[잎]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사람이 씨를 땅에 심으면 어느 날 씨에서 싹과 가지와 잎이 나와 자라서 이삭이 생기고 그 이삭이 충실한 곡식이 되면 낫을 대어 추수를 한다. 이 비유는 천국의 성장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의 전파를 통해 세상에서 시작되며 처음에는 잎이 나듯이 작은 단체이지만 점차 성장한다. 이 세상에 심겨져 잎이 나며 성장하는 천국은 지상의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어지고 그의 택한 백성이 다 구원 얻게 되면, 그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세계복음화와 복음 전도는 주께서 신약교회에 명령하신 최대의 사명이며 과제이다.

[30-32절]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채소]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성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더 증거된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서 심히 작은 씨이지만, 심긴 후에 자라면 모든 채소보다 더 커지며 큰 가지를 내므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겨자씨 나무는 키가 3미터 이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천국, 즉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은 처음에는 심히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놀랄 만큼 심히 커질 것이다. 이것은 전체 교회를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성도들 개인의 성화나 지교회나 전체 교회들의 영적 건립과 영적, 수적 성장도 그러하다. 그러나 공중의 새가 깃들인다는 말씀은 세계 교회가 심지어 마귀와 악령들이 그 안에 자리를 잡을 만큼 커질 것을 암시하신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점도 교회 역사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마귀와 악령들의 종인 많은 이단자들과 거짓 목사들이 들어와 있다.

[33-34절]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께서는 많은 비유들로 말씀을 가르치셨다. 비유는 그의 설교 방식의 한 특징이었다. 비유들은 표면적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나, 그 이면적 의미는 해석이 필요하였다. 예수께서는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해주셨다. 오늘날 성경은 수수께끼 같은 책이 아니고 어려운 부분이 해석된, 이해할 만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관적으로 그 뜻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성경 자체가 밝히 보이는 뜻, 특히 성경의 전체적인 뜻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의 개요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죄악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경건과 도덕성의 새 삶에 관한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은 처음부터 은밀하게 전해지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져 왔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고 묵상하며 간직하고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 교훈 속에서 개인 성화를 이룰 뿐 아니라, 세계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전도자들을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35-41절,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심

[35-38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아펜테스)[보낸 후에](KJV)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배 뒷쪽]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날이 저물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낸 후에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 다른 배들도 함께했다.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났고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가는데도 큰 풍랑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다. 세상의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배 뒷쪽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다. 육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깊은 잠이 드셨던 것 같다. 잠이 드신 것은 그가 사람의 연약한 몸을 가진 분이시며 몸의 피곤을 느끼셨고 잠이 필요하셨음을 증거한다. 비록 그의 신성(神性)으로 큰 풍랑의 상황을 아셨겠지만 그는 그런 중에도 잠잠하셨다. 주께서는 성도의 고난의 현실에서도 때때로 잠자듯이 조용하시다.

제자들은 그를 깨우며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직 알지 못하고 그를 단지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날 밤 그들은 예수께서 신적 구주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39-41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예수께서는 깨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말씀하셨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 바람과 바다가 인격이 아닌데도, 주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자연만물도 예수님께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계(靈界)와 인간계뿐 아니라 자연계도 다스리신다. 그는 천사들과 사람들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만물도 주관하신다. 사람들 중에 바다에서 일어나는 큰 풍랑을 제어할 자가 아무도 없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풍랑을 제어할 자가 사람들 중에서도 아무도 없지만, 주 예수께서는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다. 그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고 서로 말하였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람과 바다를 명령하여 복종시키는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신성을 가지신 자, 곧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신 자이시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풍성한 증거들이다.

또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연환경까지도 주관하심을 증거한다. 그는 풍랑뿐 아니라, 홍수와 가뭄, 태풍과 폭설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건강이나 가정의 일들도 주관하시고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도 주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사함과 영생의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도우시며 해결하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일을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7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큰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이 세상에 거센 바람을 꾸짖고 거대한 풍랑을 잔잔케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증거한다. 우리는 이 사건과 또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확신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다. 주의 제자들은 그와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는데 큰 풍랑을 만났다. 세상에는 사람이 예기치 못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자들에게도 생기며 참된 교회에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큰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그는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를 자연재해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 또 그는 우리의 건강과 경제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악을 멀리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또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시시때때로 그에게 나아가 감사하며 죄를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며 우리의 모든 소원을 아뢰어야 하고, 또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교훈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소망하고 다 힘써 실천해야 한다.

 

5장: 예수님의 능력

1-20절,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심

[1-4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가다라인]18)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가다라인의 지방은 갈릴리 호수 동남쪽 10킬로미터 지점 야르묵 강에 인접한 마을이다. 예수께서 배에서 나오실 때에 곧 더러운 영에 잡힌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그를 만났다. 더러운 영은 더러운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사람을 더럽히는 영이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을 끊었다.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하다. 인생은 죽음의 그늘진 곳에서 방황하는 존재이다. 오늘도 지옥의 문 앞에서 방황하는 인생--이것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인생의 방황과 광기(狂氣)를 제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고서는 그들에게 소망이 없다.

[5-8절]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그것은 일종의 미친 증세이었다. 오늘날도 귀신의 작용으로 미친 자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지르며 또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정상적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면 이렇게 비정상이게 된다. 이렇게 미친 증세를 가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악령의 작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며 헛된 것을 구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절제하는 힘이 없어 자기의 몸을 광란적 활동들에 내맡긴다.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였다. 악령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그의 신적 권세를 인정하였다. 예수께서는 과연 영의 세계를 다스리며 악령을 내쫓을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다.

[9-12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그 모든 귀신들이]19)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그 악령의 이름은 ‘군대’이었다. ‘군대’라는 원어(레게온)는 6,000명 가량의 인원으로 구성된 로마의 부대 단위를 가리킨다. 이렇게 많은 악령들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 많은 더러운 악령들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힘이 세고 난폭했던 것이다. 그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다. 돼지는 풀이나 곡식을 잘 먹는다. 그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기를, 자기들을 돼지 떼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다.

[13-17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영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2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는 귀신들의 간청을 허락하셨다. 허락하실 권세가 그에게 있었다. 더러운 영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떼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 2천 마리나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해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능력이 증거되었다. 또 예수께서 한 명의 영혼을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심도 증거되었다. 돼지 한 마리를 40만원만 쳐도 돼지 2천 마리의 값은 8억원이다. 사람의 가치는 돼지 2천 마리보다 크다.

돼지 치던 자들은 도망하여 읍내와 마을에 고하였다. 사람들은 그 일이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나아와 그 귀신 들렸던 사람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해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사람들은 그들에게 고하였다. 이 사건을 본 증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그것은 2천 마리나 되는 돼지의 손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참 가치가 무엇인지와 그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신 신적인 구주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 대한 무지(無知) 때문에 그를 영접하며 경배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를 배척하였다.

물질적 손해는 돼지떼의 주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았다면 그들의 손실은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가치 있으시며, 그를 통한 인생의 구원도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가치 있다. 우리는 이 지식과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 믿음 중심, 성경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 말고 그를 환영하고 따라야 한다.

[18-20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친척들]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일이었다. 그는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고 모든 사람은 기이히 여겼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죄와 사망과 악령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성령의 사람, 곧 바른 정신을 가진 인격적인 사람을 만드신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과 형벌로부터 영생과 행복으로 이전시키는 일, 곧 구원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크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께서는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다. 육신의 질병도 고치기 어렵지만, 정신적 질환도 고치기 어렵다. 현대인은 정신적 방황이 심하고 돈과 쾌락을 추구하고 절제심이 부족하다. 그들을 치료하며 구원할 길은 구주 예수님의 은혜뿐이다.

둘째로, 주께서는 귀신 들린 자 한 명의 영혼을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귀하게 보시고 그를 구원하셨다. 사람들은 사람의 영혼보다 돈을 더 크게 여긴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의 구원은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우리는 한 명의 영혼의 구원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

셋째로, 그 귀신 들린 자가 고침 받은 것은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기인한다. 로마서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면 어떤 악한 죄인도 구원 얻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고 전도해야 한다.

 

21-43절, 두 가지 기적을 행하심

[21-24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회당장’은 회당에서 예배를 준비하며 주관하는 자이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존귀한 직분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높아지면 마음이 교만해지기 쉽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 와서 겸손히 그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딸의 병의 치료를 소원하였다. 그 딸은 열두 살이었고(42절) 외동딸이었다(눅 8:42). 주께서는 그의 청을 즉시 들어주지 않으신 것 같다. 그러나 그 회당장의 믿음은 컸다. 그는 예수께서 죽게 된 자기 딸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그 딸이 살게 될 것을 믿었다. 그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믿은 것이다. 또 그는 금방 허락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많이 간구하였다. 마침내 그의 간구는 응답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그 회당장의 요청대로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셨다.

[25-26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우사 엔 뤼세이 하이마토스)[피가 흐르는 상태에 있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열두 해를 피가 흐르는 상태에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것은 피가 흐르는 병, 유출병, 출혈병이었다(레 15:2). 그는 많은 의원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좋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녔고 좋다는 약을 다 복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효험이 없었고 도리어 더 심하여졌다. 12년 동안 그러했으니 몸도 마음도 몹시 쇠약해졌고 돈도 많이 허비하였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오늘날도 의술과 약이 유익하지만 여전히 완전하지 못하고 치료의 한계성을 가진다.

[27-29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그 여자는 감사하게도 예수께서 많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그뿐 아니라, 그의 속에는 믿음이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마지막 희망을 발견하고 그에게로 나왔다. 그런데 많은 무리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어서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는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가 부끄러웠을 것이지만,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참된 믿음은 어떤 고정된 신앙고백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그는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다.

[30-33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도 그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아셨다. 또 그는 자기의 옷에 손을 댄 여자가 있음을 아셨고 그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백하였다.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 여자의 믿음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불치의 병의 고침을 받았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원리는 병 고침에서나 영혼 구원에서나 비슷하다. 12년된 불치의 혈루병을 고쳐주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도 도덕적으로 불치병자와 같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35-36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즉시](전통사본)20)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 가시는 중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통보가 왔다. 그가 예수께 간청한 일은 불가능하게 된 듯했다. 사람들은 딸을 위한 그의 간청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인간편에서의 상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현실의 모든 상황과 정반대로 이루실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낙망치 않고 어려운 현실을 거슬러 행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하는 말을 즉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야 할 까닭은 병든 자를 고치실 수 있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자가 그와 함께 있으시고 그가 그의 딸을 살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은 성경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오직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37-39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떠들석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 세 제자는 예수님의 최측근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실 그 현장에 있을 산 증인들이었다. 죽음은 과연 사람들에게 가장 슬픈 일이며 사람에게 어찌할 수 없는 원수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 앞에서 안정을 잃고 슬퍼하며 소동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생의 끝으로 본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이 생의 끝이 아니고 부활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 아이를 잔다고 표현하셨다. 죽음은 자는 것과 같고 부활은 깨는 것과 같다. 주께서는 이제 그 아이를 깨우실 것이다. 또 그는 마지막 날에 모든 죽은 사람들을 깨우실 것이다.

[40-41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탈리다 쿠미 Taliqa, kou'mi](전통본문)21)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비웃었다. 그들이 비웃은 까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누구신 줄 알았다면 그들은 그의 말씀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제한된 생각으로 주님과 그의 말씀을 판단하고 멸시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어보내신 후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셨다. 그들은 증인들이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을 내보내신 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기보다는 기적이나 구경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적은 단지 사람의 호기심이나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람을 불쌍히 여기심에서 나온 것이며 사람을 회개와 믿음의 길로 이끄는 목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탈리다 쿠미”(전통본문--Byz A D it vg). 그것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이다. 이것이 주께서 그 죽은 소녀를 깨우신 행동이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쉬웠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빛이 있었듯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으셨다.

[42-43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그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즉각적 효력이 있었다. 이것은 신적 능력이었다. 이것은 그의 신적 인격의 증거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그 이상이셨다. 그가 사람이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다. 그 속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셨다(골 2:9).

다시 살아난 그 소녀는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곧 크게 놀라고 놀랐다. 그의 부모와 세 제자들은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그 외에 그 집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도 그 사건의 증인이었다. 예수님의 기적 사건들은 이와 같이 많은 증인들의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된 바이었고 그 증거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후시대의 사람들은 이 기록된 증거의 말씀들 곧 신약성경에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다. 그 까닭은 병고치는 일이 그의 사명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는 단지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육체적, 물질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더 근원적인 영혼의 죄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또 해결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일반적 자연법칙을 인정하셨음을 보인다. 사람은 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 자연법칙으로 산다. 기적은 역사상 특별한 경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지 성도의 일상적 생활법칙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적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기적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은 건강을 위하여 영양 있게 소식(小食)을 하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적당히 잠을 자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의약적 처방도 감사히 사용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를 고쳐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먹은 외동딸을 살려주셨다. 이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단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둘째로, 회당장 야이로나 혈루병 앓던 여자는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병 치료나 영혼 구원은 원리가 비슷하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된다. 예수께서는 불치의 병이나 죽음의 해결자이실 뿐 아니라, 죄와 죽음과 지옥의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그를 믿는 자는 죄사함의 구원을 얻고 영생의 복된 삶을 얻는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셋째로,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은 그의 딸의 치료를 위해 예수께 간절히 구하는 행위로 나타났고,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의 믿음은 무리 속을 헤치고 예수께 접근하여 그의 옷이라도 만지려고 한 행위로 나타났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오늘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죄를 멀리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며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6장: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1-6절, 고향 사람들이 배척함

[1-2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2장의 증거대로, 아기 예수께서는 얼마간의 애굽의 피난생활 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와서 사셨고, 그래서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었다. 또 요한복음 1:45에 보면,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우리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만났는데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하였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열일곱 번이나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마 26:71; 막 14:67; 16:6; 눅 4:34; 18:37; 24:19; 요 1:45; 18:5, 7; 19:19; 행 2:22; 3:6; 4:10; 6:14; 10:38; 22:8; 26:9).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는 30세까지 안식일마다 참석하셨을 그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이제는 그가 일하시는 때이었다. 사람은 겸손히 배우며 자라야 할 때가 있고, 또 일하며 가르쳐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또 교회가 요청하는 때에 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동네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 그들은 그가 가르치는 말을 듣고 그가 어떻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고 놀라며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통해 그가 사람의 지혜와 능력 이상의 것을 소유하신 분이심이 증거되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보다 지혜와 능력의 차이이다.

[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요세스]22)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알고 있었고 또 그의 동생들이 야고보와 요세스와 유다와 시몬이며 또 그의 누이들도 그들과 함께 있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배척했다. 마태복음 13:55는 그들이 그를 목수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또 그의 동생들의 이름도 언급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목수의 아들 목수이며 그의 동생들의 형제, 즉 단지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가 신적 본질과 속성을 가진 자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처럼 그는 사람이며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을 듣고 그의 능력의 일들을 보았지만 무지와 완고함 때문에 그를 거절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그의 어린 시절을 가지고 판단할 때가 아니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때이다. 그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며 야고보와 요세스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일지라도 그의 교훈과 행위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면, 그들은 교만과 완고함을 버리고 겸손히 그를 영접하고 그를 인정하고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16-17).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하였다(고후 4:6).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귀한 은혜이다. 그가 은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4-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선지자는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선지자의 어린 시절의 연약한 모습을 기억하고 그를 무시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고향 나사렛에서는 몇 사람의 병자들에게만 안수해 고치셨다. 그는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치 않으셨다. 믿을 만한 상황에서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앙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든지 영접하지 않든지 모든 마을들에 이곳 저곳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종들은 환경여건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세상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신약성도는 주일에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지혜로 가르치셨고 능력의 일들을 행하셨다. 그것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었다. 그의 지혜로운 가르치심은 그의 신적 인격을 드러내며 그의 능력의 일들은 그것을 확증하였다. 그의 전도 사역에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풍성한 증거이었다.

셋째로,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했다. 사람이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교만과 완고함이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 주께서는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다.

 

7-13절, 열두 제자들을 둘씩 보내심

[7절]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열두 제자들이 전도를 위해 둘씩 보냄을 받은 것은 예비적 일이었다. 장차 주의 부활하신 후 그들은 성령을 받아 땅끝까지 주의 증인으로 보내질 것이다(마 28:19, 20; 행 1:8).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후 그들은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수행하여야 했다.

주께서 제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증거의 확실성과 상호협력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증거보다 두 사람의 증거는 더 힘이 있고 확실하다. 또 제자들은 서로 위로하고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전 4:10). 하나님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동역자(同役者)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부족을 보충하며 서로를 붙들어 줄 수 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분증이었다. 오늘날 말씀의 사역자들은 비록 그런 외적인 권세의 표는 없지만, 말씀의 권위의 표를 가진다고 본다.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표이다. 주께서는 주의 종들을 말씀의 권위로 붙들고 사용하신다고 본다.

[8-9절]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해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돈이나 가지지 말고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전도자의 삶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는 삶이므로, 전도자는 세상의 걱정 근심을 가급적 초월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도자들이 저축이나 보험이 필요 없다고 지나치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본다. 범사에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고 저축하며 사는 것은 모든 성도의 기본적 생활 태도이어야 할 것이다.

[10절]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이것은 전도자가 한 지역에서 이집 저집 이동함으로써 부덕(不德)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전도자의 삶은 편안함을 위해 택한 길이 아니고 주와 함께 고난에 참여해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거하게 된 집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거기에 만족하며 더 나은 곳을 찾아 이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8).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의 백성과 자기의 종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

[11절]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저 성보다 더 견딜 만하리라](전통본문)23) 하시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전도자들을 영접할 것이며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이다.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마 10:40). 그러나 전도자는 그를 영접지 않는 자들을 떠나갈 때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음을 증거해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주께서 보내신 전도자의 말을 거절하는 죄는 죄들 중에 매우 큰 죄로 간주되었다. 주께서는 전도자의 말을 거절하는 죄가 옛날 유황불비로 소멸되었던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12-13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였고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 그들이 나가서 한 활동은 두 가지이었다. 하나는 회개하라고 전파한 것이다. 세례 요한도 회개를 전파했다(막 1:4). 예수께서도 회개를 전파하셨다(막 1:15). 사도 바울도 전도 활동을 할 때 회개를 전파했다고 증거했다(행 20:21). 하나님의 뜻은 회개, 즉 죄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를 깨닫고 버리고 떠나야 한다.

제자들이 나가서 한 또 하나의 활동은 많은 병자들을 고친 것이었다. 제자들은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성령의 능력의 활동을 상징한 것 같다. 병자들의 치료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었다. 병자들의 치료는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보증하는 표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께서는 친히 모든 마을에 두루 다니며 전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둘씩 둘씩 마을들로 보내셔서 전도하게 하셨다. 복음을 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전도는 신약 성도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둘째로, 주께서는 전도자들를 보내실 때 병자들을 고치며 귀신들을 내쫓는 능력을 주셔서 보내셨다. 그 권세는 그들이 주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이라는 표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권위를 주신다. 그들은 성령과 말씀의 권위로 전도한다.

셋째로, 전도자들은 의식주의 문제 같은 세상 일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는 의식주의 문제로 염려하지 말고(마 6:31)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딤후 2:4)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가 그들의 필요한 것을 주실 줄 알고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전도자들을 영접해야 한다.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14-29절,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함

[14-16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열두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유대 땅에 더욱 알려졌다. 헤롯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듣고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활동하느니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라 했고 또 어떤 이는 그를 선지자 곧 옛 선지자들 중의 하나와 같다고 말했다.그러나 헤롯 왕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가 목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본문의 헤롯은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스로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하였었다(주전 4년-주후 39년). 누가복음 9:7에 보면, 헤롯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해하였다.

[17-20절]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여자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에네코)[원한을 품고]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많은 것을 행하며](전통본문)24) 달게 들음이러라.

헤롯 안디바스는 그의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고 세례 요한은 그것이 옳지 않은 행위라고 지적했었다. 그의 지적을 불쾌하게 생각했던 헤로디아는 요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해 보호하며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달게 듣고 그의 교훈을 따라 선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였다.

[21-29절]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女兒)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본문은 세례 요한이 어떻게 순교로 생을 마쳤는지 증거한다.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헤롯의 생일이었다. 헤롯 왕은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과 함께 잔치하였다. 그때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하였다. 왕이 그 소녀에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왕은 맹세까지 하면서 말했다.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그 딸은 어머니에게 가서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라고 묻자, 그 어머니는 딸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말했다. 그 딸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말하였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왕이 심히 근심하였으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그 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왕은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였고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소녀에게 주었고 그 소녀는 그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죽음을 맞았다. 그의 제자들은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였다. 헤롯 왕은 공의보다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헤로디아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 헤로디아는 잘못된 결혼을 하였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부귀와 권세와 영광을 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고 부도덕한 삶을 산다면 복되지 않다. 왕후 헤로디아는 사람들 보기에 행복했을지 모르나 그의 잘못을 지적했던 선지자를 미워해 옥에 가두게 했고 기회를 만났을 때 그를 죽이는 일을 요청한 악한 자이었다. 사람은 참으로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악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헤롯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 헤롯은 세상의 것들을 다 가진 자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부귀와 권세와 육신적 행복을 누렸다. 그것은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두려워하지 않았고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불륜도 행했고 의인을 옥에 가두었고 마침내 죽였다. 그는 공의와 양심보다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회개치 않는 악인들은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살다 죽어야 한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직을 버리고 가난하고 거친 환경의 삶을 택했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경건하게 생활했다. 그는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했고 또 용기 있게 왕의 잘못을 지적했다. 헤롯 왕도 그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임을 알았고 그를 두려워했고 그의 말을 듣고 선한 일을 많이 행했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쓸쓸히 목 베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았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살다 가야 한다.

 

30-44절, 5병 2어의 기적

[30-33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그]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가서 그에게 모였더라](전통본문).

사도들은 돌아와 예수께 모여 그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그들이 행한 것은 병고친 일들이며 그들이 가르친 것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선포했을 뿐 아니라 또한 가르쳤다. 그들은 회개와 믿음이 무엇인지, 사람이 왜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지 설명했을 것이다. 전도는 선포와 가르침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루 몇 번 음식의 섭취와 휴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의 연약하며 때때로 휴식이 필요함을 아신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날마다 밤을 주셔서 잠을 자고 쉬게 하시며 또 7일에 하루를 휴식의 날로 주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갔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일행이 쉬는 곳까지 따라왔다. 그들의 사모함과 열심은 매우 컸다.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께서는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바른 교훈과 인도를 받지 못했으나 바른 말씀을 갈망하여 원근 각처에서 모여왔다. 그들은 바른 말씀에 흥미가 없는 교인들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사모하는 그들에게 여러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그는 그때 병자들도 고치셨지만(마 14:14)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치시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후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그의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는 주로 무리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그의 뒤를 이은 사도들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행 6:4). 배교와 혼란의 말세에도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하고 성경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옛길이며 바른 길이다.

[35-37절]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2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요한복음 6:7에 보면, 빌립은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이[2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가지고도] 부족하리이다”라고 말했다. 2백 데나리온의 돈도 없었겠지만, 비록 그런 큰 돈이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어디서 그 많은 수량의 떡을 구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싣고 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께서는 그 저녁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신적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38절]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사람들에게는 먹을 떡이 없었다. 제자들이 알아 보고 얻은 음식은 단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이것들은 그 많은 무리들에게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었다. 그러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는 것도 감사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었다(요 6:7). 그 아이는 그것을 예수님께 기꺼이 바쳤다. 그것을 바치기 싫어했다면, 강제로 빼앗아 주님 앞에 가지고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자기도 배가 고팠을 텐데 그것을 바쳤다. 이 작은 것, 그러나 그 귀한 것을 가지고 주께서는 그 저녁에 기적을 행하셨다.

우리는 한 알의 밀이 어떻게 많은 밀 이삭들을 맺고 한 마리의 물고기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알들을 낳는지 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에서 이미 그런 일을 많이 하고 계심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떡 다섯 개로 많은 떡을 만드시고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물고기를 만드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39-40절]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마가복음은 주께서 무리들을 ‘푸른 잔디’(클로로스 코르토스) 위에 앉게 하셨다고 더 생생하게 증거한다. 푸른 잔디밭은 그 날 저녁 무리들의 야외식당이 되었다. 주께서는 무리를 백 명씩, 오십 명씩 질서정연하게 앉히셨고 그러므로 그 저녁 그 기적의 떡을 먹은 자들의 수는 쉽게 파악되었다. 무리들은 무슨 음식이 나올 것인가 궁금했을 것이다. 그보다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 많은 무리를 먹일 음식이 공급될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염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실 일을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용히 그의 하시는 일을 기다려야 한다.

[41절]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그의]25)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매.

‘축사하다’는 원어(율로게오)는 ‘감사하다, 축복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감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런데 그 저녁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줄어들지 않고 없어지지 않았다. 제자들과 무리들, 또 그 음식을 주님께 드렸던 아이는, 너무 감격적인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그 날 저녁의 일은 결코 잊혀질 수 없었을 것이다.

[42-44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그 날 밤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그 기적의 떡을 배불리 먹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육신적 필요를 풍성히 공급하셨다. 남은 떡을 거두게 하신 것은 기적의 떡이 오용되지 않게 하시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기념물을 신성시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은 남자가 5천명이었다. 마태복음은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라고 증거한다(마 14:21).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만명은 넘었을 것이다. 떡 기적의 일은 만여 명의 증인을 가진 사건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떡 기적은 사람들이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말씀을 들으려고 저녁까지 있었던 무리를 위해 떡 기적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날마다 만나를 주셨다. 예수께서는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시면서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32). 그는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도 주신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셨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그는 우리에게 육의 양식뿐 아니라, 영의 양식도 주신다. 그는 우리에게 의(義)와 영생을 주셨고 또 영의 양식인 성경말씀도 주신다.

 

45-56절, 바다 위로 걸어오심

[45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벳새다 건너편으로](KJV, NASB) 가게 하시고.

무리들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다 먹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벳새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 누가복음 9:10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벳새다에서 일어났다고 증거한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해안 지역에 있고, 북에서 갈릴리 호수로 들어오는 요단강의 동쪽에 있다. 또 본문 53절과 마태복음 14:35는 그들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요한복음 6:17, 24-25는 그들이 가버나움에 왔다고 말한다. 게네사렛 땅은 벳새다 건너편 곧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가버나움과 게네사렛 마을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 명칭이었다고 보인다.

쉴 시간도 없이 계속 무리를 대해야 했던 제자들은 몹시 피곤했을 것이다. 떡 기적 사건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그들을 재촉하여 먼저 배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고, 자신은 무리를 보내기 위해 남으셨다. 이것은 제자들을 위한 그의 배려이었고 또 원근 각처에서 모여왔다가 돌아가는 무리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그의 겸손한 관심과 사랑이었다. 주께서는 한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또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히 여기신다.

[46절]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무리를 다 보내셨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고 밤이 깊었을 것이다. 그는 무리를 작별하신 후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그가 밤 4경, 곧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을 보면, 그는 그 밤에 여러 시간 동안 기도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그는 새벽기도에 힘쓰셨고(막 1:35) 밤기도에 힘쓰셨다. 신성(神性)을 가진 그에게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그는 기도에 힘쓰심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다.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큰 일을 이루신 후에 기도하는 본을 보이셨다. 사람은 어려울 때 기도하기는 쉬워도 큰 일을 행한 후 기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때 자만과 해이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人性)을 가지셨으나 그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을 보호하며 지도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지만,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바르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심령으로 힘을 얻기 위해 시시때때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47-48절]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거스르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날은 저물어 밤이 깊었고 배는 바다 가운데 있었고 예수님은 홀로 육지에 계셨다. 그런데 마귀가 떡 기적 사건을 샘내어 바람을 격동시키기라도 한 듯이, 이상하게도 거친 바람이 제자들의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젯저녁에는 기쁨과 감격이 넘쳤으나 지금 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상에는 평안과 고난이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평안한 때에 우리는 너무 기뻐하여 자만하지 말고, 고난의 때에 너무 낙심하여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하며 불신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바람 때문에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셨다. 그는 멀리서도 모든 것을 보셨다. 밤 사경 즈음, 즉 새벽 서너 시경에 그는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다. 그 깊은 밤에, 그 바다 가운데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을 제자들에게 그는 친히 가까이 오셨다. 그는 오늘날에도 세상의 풍랑 속에서 분투하는 성도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도우실 것이다.

[49-51절]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매우] 심히 놀라니[놀라고 의아해 하니](전통본문).26)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쳤다.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라고 의아해 하였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은 기적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물건이 공중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물 위에서 가라앉는 것은 자연법칙이지만,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힘이 붙들면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다.

[52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것은 그가 물 위로 걸어오심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들이 그때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다면 그가 물 위로 걸어오심을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마태복음 14:33에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았고 깨닫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53-55절]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오니.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 해안의 벳새다에서 갈릴리 북서쪽의 땅으로 건너갔다. 요한복음은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갔다고 기록한다(요 6:17, 24-25). 게네사렛 땅은 게네사렛과 가버나움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일컫는 명칭이다. 사람들은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그가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왔다. 사람들은 병고침을 위해서 열심을 가졌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을 품어야 한다.

[56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건강함]을 얻으니라.

병자를 시장에 두었다는 표현은 주께서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전도하셨기 때문이다. 이전에 혈루증 여인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원했고 옷가에 손을 대는 자는 다 병고침을 얻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을 나타낸 일들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밤늦게 무리를 돌려보내신 후 홀로 산에 남아 기도하셨다. 그는 새벽에도(막 1:35), 밤에도,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눅 6:12). 기도는 능력의 통로이며 승리의 길이다.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바람이 거스르므로 괴로이 노를 젓는 제자들을 외면치 않으셨고 또 많은 병자들이 자기에게 접근하여 옷가에라도 손을 대기 원하는 것을 거절치 않으셨다. 이것은 주님의 크신 긍휼이었다. 그는 오늘도 우리를 이 험한 세상에 버려두시지 않고 돌보실 것이다.

셋째로,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곁에 계신 구주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해야 한다.

 

7장: 내면적 성결

1-23절,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1-5절]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보고 흠을 찾았더라](전통본문).27)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전통]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물로 씻지]28)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과 침상들]29)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전통]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씻지 않은]30)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예수께서는 씻지 않은 손으로 떡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크게 여겼고 거기에서 흠을 찾았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로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그 외에도 잔과 주발과 놋그릇과 침상들을 씻는 것 등을 지켜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지 예수님께 물었다. 그들의 지적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일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 대한 비난이었다고 보인다. 즉 장로들의 유전을 버리는 것은 잘못이며 그것을 용납한 선생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또 그것은 자기들의 경건 생활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보다 낫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교만한 태도도 나타낸다고 보인다.

[6-9절]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遺傳)[전통] [즉 주발과 잔을 씻음과 기타 너희가 행하는 여러 가지 일들]31)을 지키느니라[지킴이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주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그들의 외식의 악을 지적하셨다. 그 외식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고백하나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 대신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며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린다고 지적하셨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더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도 없었고 사람의 전통이나 붙들고 외식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겉모습으로만 경건하고 의로워 보였던 것이다.

[10-13절]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 예를 드셨다. 율법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명령되었으나(출 20:12; 21:17), 장로들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으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교훈에 반대된다. ‘고르반’은 예물이라는 뜻이다. 헌금이 부모님에 대한 자녀들의 물질적 보답의 의무를 면제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였다고 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사람의 전통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뿐이다. 사람의 교훈은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성경적일 때에만 권위가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

[14-19절]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32)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외식자들은 외적 정결만 힘썼다. 그러나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과 부정결은 도덕적 문제이지 단지 위생적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을 듣고 배울 때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주께서 아무리 바른 말씀을 하셔도 영적인 귀가 없는 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이 말씀뿐 아니라 모든 말씀들이 그렇다. 아무리 많은 말씀들이 선포될지라도 깨달은 말씀만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주께서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그 비유에 대해 묻자 그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으로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설명해주셨다. ‘뒤’라는 원어(아페드론)는 ‘변소’를 뜻한다. 사람이 먹는 것들은 유익한 영양분들은 몸에 다 흡수되고 나머지는 다 배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먹는 것들 자체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음식물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고 깨끗하다.

[20-23절]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아셀게이아)[음탕, 방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아프로쉬네)[미련함] (BDAG)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22절의 전통본문은 “간음, 음란, 살인, 도둑질, 탐욕”의 순서이다.33) 마음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그 악한 생각들은 간음, 음란, 살인, 도둑질,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미련함 등이다. 사람은 죄로 심히 부패되어 있어서 육신적 욕망에 지배를 받고 있다. 모든 인류는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무능력해져 있다. 구약의 역사가 이 사실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하였고, 예레미야 13:23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아담의 자손인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참된 의와 선을 행할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지 말아야 한다. 8절,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전통]을 지키느니라.” 13절,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사람의 전통은 기준이 아니며 그것을 어긴다고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했고(딤후 3:16),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사도적 교훈]을 지키라”고 교훈했다(살후 2:15).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과 규범은 사람들의 교훈이나 전통이 아니고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뿐이다. 사람들의 사상들과 교회들의 전통들도 성경에 의해 분별되고 판단되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부모 공경의 의무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부정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며 남을 죽이지 말고 미워하거나 비방하지도 말고 간음하지 말고 마음으로라도 음란하고 불결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거나 거짓말하지 말고 탐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인간관계의 도덕적 계명들도 힘써 지켜야 한다.

셋째로, 더러운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참된 성결은 단지 외적 성결이 아니고 마음의 성결이다. 사람은 마음이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악한 생각들, 간음, 음란, 살인, 도둑질, 탐욕, 악독, 속임, 음탕, 방탕, 흘기는 눈, 비방, 교만, 미련함 등이 나온다. 사람이 이런 악들을 씻음 받는 길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어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는 길밖에 없다(행 15:9; 히 10:22).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모든 더러운 악들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한다.

 

24-30절, 이방 여자의 딸을 고쳐주심

[24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와 시돈]34)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 마을들에서 전도하신 후 일어나셔서 거기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경으로 가셨다. 두로와 시돈 지경은 갈릴리 서북쪽 지중해 연안 지역이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이 필요한 곳은 어디나 방문하셨다. 그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였으나 숨길 수 없으셨다. 그가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소문은 그곳까지도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소문은 그의 사명을 왜곡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모르게 하려 하셨다. 그는 병자를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25절]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께서는 그 여자를 아셨고 그가 올 것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주께서 그 여자와 그의 병든 딸을 위해 그곳에 가셨는지도 모른다. 그 병든 어린 딸은 더러운 귀신 곧 더러운 영이 들려 있었다. 더러운 영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정신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부모에게 대항하고 이웃에 대하여 원망하고 거짓되고 음란한 정신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한 성질들과 습관들을 사용한다. 그 딸은 이런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26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수리아-페니키아] 족속이었다.마태복음 15:22는 그가 ‘가나안 여자’라고 말한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주 지역이 아니고 이방인들의 지역이었다. 그는 이방 여자이었다. 그는 예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했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어떤 형식을 갖춰야 하거나 주문처럼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할 소원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그의 소원은 “나의 딸을 고쳐주시옵소서”이었다.

마태복음 15:22에 보면, 그 여자는 예수께 나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또 그는 예수께서 각종 불치의 병들을 고치시고 기적들을 행하시는 신적 구주이심을 믿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감히 예수께 나아와 그의 딸의 치료를 간청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처음에는 대답지 않으셨다. 그러자 그는 예수께 절하며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다시 말했다.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자녀들과 개들에 비교하셨다. 그의 처음 반응은 매우 무정하게 보였다. 그의 말씀은 그 여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씀이었다. 누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하겠는지? 주님의 말씀은 그 여자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시험을 잘 통과하였다.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여자는 마음의 상처를 받는 대신에 매우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과 특권과 복을 누리나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으며 또 이방인들에게는 경건도, 도덕성도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단지 그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하였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하였다(마 15:27).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바른 마음가짐이다. 사람은 자신이 피조물이요 부족한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 여자는 겸손하게 그러나 간절하게 딸의 병고침을 간구하였다.

[29-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태복음에는, 주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5:28).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놀랍게도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고 아이는 치료되어 있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정신적 질병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질병의 치료를 위해 적당한 수면과 휴식, 운동, 맑은 공기 마시기, 등산, 걷기, 친구와의 교제, 자기 감정의 조절 훈련, 정신의학적 처방 등이 다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을 믿고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주께서는 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세상에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오늘날도 사람의 영육의 질병을 완전히 고쳐주실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겸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해야 한다. 본문의 이방 여인은 겸손한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와 응답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그에게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31-37절, 귀먹고 말을 더듬는 자를 고치심

[31-32절] 예수께서 다시 두로[두로와 시돈](전통사본)35)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지경 안으로]36)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말을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호수 서북쪽 바닷가의 도시들이다. 주께서는 그곳을 떠나 다시 갈릴리 호수 쪽으로 내려오셨다. 데가볼리 지경은 갈릴리 호수 남쪽의 일부와 남동쪽의 요단강 건너편 일부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귀먹고 말을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병자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 받기를 간구한 경우도 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병자를 예수께 데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에게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세상에는 병자들이 많다. 사람의 불행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결과이다. 이 세상은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런 불행한 일들은 장차 죄 없는 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33-34절]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신 것은 사람들이 그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뒤에 사람들을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라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병자를 고쳐주시기 위함이 아니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그의 양귀에 넣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신 것은, 그 귀먹고 말을 더듬는 자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가 지금 그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셨다. 그의 문제는 귀와 혀에 있었다. 특히 혀의 장애는 그의 말의 기능을 어렵게 했다. 사람의 말은 목청과 입뿐 아니라, 혀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문제되는 바로 그곳에 그의 치료의 손을 얹으셨다. 그의 이 특이한 행동은 그 귀머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그를 고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에바다”(ejffaqav)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37) 그는 하늘을 향하여 탄식하셨다.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곤 하셨다(막 6:41; 요 11:41; 17:1).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죄의 결과로 인한 사람의 불행을 보시고 탄식하신 것이다.

[35-37절]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38)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그런데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 주님의 치료는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이었다. 누가 예수님처럼 병자를 고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만 하실 수 있다. 오늘날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시며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영적 불구자들을 치료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를 데려온 자들에게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라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가 경계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널리 전파하였다. 사람들은 심히 놀라,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다 잘하신 것뿐이다. 그는 참으로 좋으신 구주이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몸의 연약으로 고통하는 그 사람을 보시고 하늘을 향해 탄식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병자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다. 예수께서는 긍휼이 많은 주님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오늘날에도 그는 세상에서 불행한 일을 당하여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도우실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중풍병자, 나병환자, 앉은뱅이, 소경, 귀신들린 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려주셨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20개, 마가복음은 18개, 누가복음은 20개, 요한복음은 8개 각각 증거한다. 그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풍성히 증명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구주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사도 시대 이후에 외적 기적은 중단되었을지라도, 내면적 기적, 곧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일, 심령의 눈과 귀가 열려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입이 열려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전도하는 일은 항상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외적 기적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오늘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좋은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데리고 나와 구원받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

 

8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10절, 두 번째의 떡 기적

본문은 두 번째의 떡 기적 사건으로서 떡 일곱 개로 약 4천명을 먹이신 일이다. 이것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인다. 마가복음 7:31은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로 오셨음을 증거했고, 마태복음 15:29는 마가복음과 같은 사건을 증거하기 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오셔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고 많은 무리가 그 앞에 모였고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떡 기적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났다고 보인다.

[1-3절] 그 즈음에 또 큰 무리(팜폴루)[심히 큰](KJV)39)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그때에 심히 큰 무리가 주 앞에 모여 있었고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 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에게 물질적 유여함이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그 곳은 광야이었고(4절) 그들은 사흘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을 듣는 일에 큰 열심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그들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염려하셨다.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딱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떡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두 번째 떡 기적은 무리를 불쌍히 여김에서 나왔다.

[4-7절]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도무지 인간적으로는 대책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많은 무리를 위해 떡을 살 돈도 없었겠지만, 돈이 있다 하여도 그 많은 분량의 떡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것은 떡 일곱 개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들 앞에 놓게 하셨다. 그는 작은 것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제자들은 그 떡을 무리들 앞에 놓았다. 또한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었는데, 주께서는 축복하시고 그것도 그들 앞에 놓게 하셨다.

[8-10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먹은](호이 파곤테스)40) 사람은 약 4천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그 날, 놀라운 기적이 다시 일어났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나 거두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은 약 4천명이었다. 마태복음 15:38은 떡을 먹은 사람이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약 4천명’이라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15:39의 전통본문은 그들이 ‘막달라’ 지경으로 가셨다고 증거한다.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 중간지점에 있는 마을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그 날 보잘것없어 보이는 떡 일곱 개로 그 큰 무리의 배고픔를 해결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여 그가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 다 구원하는 세계복음화라는 거대한 일을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이루셨다. 교회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으로 된다. 전도는 단지 돈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설립도 그렇다. 교회 역사는 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금액의 헌금과 보잘것없는 조직력과 행정력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어 왔음을 증거하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그 날 떡 일곱 개로 약 4천 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는 배가 심히 고팠을 그 무리에게 참으로 풍성하게 떡을 공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겨우 먹이지 않고 배불리 먹이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공급자이시다.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천지만물의 창조자시며 섭리자이신 그는 부자이시다. 그는 원하시면 자기 백성에게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 좋은 것을 공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세상 사는 동안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

셋째로, 예수님의 떡 기적은 영적으로 그가 자기의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을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요한복음 6:48, 51에 보면, 그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고 잔을 주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6-28). 그는 한 분이시지만,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 그의 살과 그의 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의 양식이 되었다. 과연, 외적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분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양식이 되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아오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는다.

 

11-21절,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11-13절]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詰難)하며(쉬제테오)[변론하며](BDAG)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과 변론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예수께서는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기적은 사람의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호기심거리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려는 자들에게 유익이 되나, 믿으려는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을 보았으나 그를 믿지 않았다(요 12:37).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의 기적들을 보고 믿었고, 또 오늘날에는 그것들을 기록한 신약성경의 증거들을 읽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요 20:30-31).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어도 성경말씀의 충족한 증거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예수께서는 제자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요 20:29).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했다(벧전 1:8-9). 우리는 기적을 구하지 말고 기적보다 귀한 믿음을 구해야 한다.

[14-16절]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므로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었을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도 하셨다(마 15:6).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제자들은 떡의 누룩을 생각하였으나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헤롯의 교훈을 말씀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외식적이었고,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이성주의적이었고, 헤롯의 교훈은 세속주의적이었다고 본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여러 부류의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교훈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바른 교훈이 아닌 것들은 다 조심해야 한다. 요한일서 4:1,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오늘날 우리는 천주교회나 이단종파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교회연합운동, WCC의 잘못된 선교, 포용주의, 은사주의, 열린예배, CCM, 사회주의 좌파운동 같은 비성경적 운동들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사회주의 좌파운동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속죄의 복음을 왜곡하고 경제 평등만을 목표로 하고 정의, 생명-인권 존중, 진실 등의 도덕성을 저버리는 운동이다.

[17-21절]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두 차례의 떡 기적은 확실한 사건들이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건들을 다시 확인시켜주셨고 또 후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기적들의 확실함을 한번 더 증거하셨다. 그러나 떡 기적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적 인격이다. 떡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일들을 포함한 모든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면, 그는 그런 기적들을 행하실 수 없었다. 그것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외적인 기적들을 구하지 말고 증인들의 증언의 책인 성경을 통하여 참된 믿음을 구해야 한다. 기적을 보거나 체험한다고 예수님 믿는 것이 아니다. 기적을 체험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 있는 여러 부류의 잘못된 교훈들을 분별하고 성경적인 바른 교훈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천주교회, 자유주의, 교회연합운동, WCC의 잘못된 선교, 포용주의, 은사주의, 열린예배, CCM, 또 하나님을 부정하고 영혼 구원의 속죄의 복음을 왜곡하고 경제 평등만을 목표로 하고 정의, 생명-인권 존중, 진실 등의 도덕성을 저버리는 사회주의 좌파운동 같은 비성경적 운동들을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인격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떡 기적을 두 번 행하셨다. 또 그는 나병환자, 중풍환자, 열병환자, 귀신들린 자, 소경, 앉은뱅이 등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이런 기적들은 확실히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거기에 더하여,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만에 승천하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고 따라야 한다.

 

22-26절, 소경을 고쳐주심

[22-23절]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께서는 벳새다에 이르셨다. 그곳은 떡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다(눅 9:10).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그에게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했다. 그들은 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있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영적 소경인 죄인을 구주 예수께로 인도하는 열심 있는 성도들의 본이 된다. 소경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도,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항상 어두운 세계 속에서 산다. 그는 생활하기나 길을 걷기에도 불편하다. 물론 이 세상의 불행한 일들이나 미움과 격노의 얼굴이나 죄악된 일들을 보지 않는 장점도 있기는 하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의 손을 붙들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는 믿음 없는 자들 앞에서는 기적 행하기를 꺼려하셨다(막 6:5-6). 그는 그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 그 소경은 비록 볼 수 없어도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아마 그의 눈에 손을 얹으셨을 것이다. 그런 후, 그는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24-26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하판타스)[모든 사람](전통사본)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말고 마을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41) 하시니라.

그 소경은 우러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때 병자가 보통 즉시 고침을 받았으나 이 경우는 웬일인지 즉시 고침을 받지 못했다. 그 소경은 사람들이 보이지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간다고 말했다. 그의 눈은 시력을 얻었으나 완전치 못하였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 눈에 다시 안수하셨고 그로 다시 쳐다보게 하셨다. 그 소경은 완전하게 고침을 받았고 모든 사람을 밝히 보았다. 주께서는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병고침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가 두 번 안수하심으로 소경을 고치신 것은 우리의 영안(靈眼)을 고쳐주시는 일에 비교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영혼의 눈이 있다(계 3:18). 우리는 과거에 죄인이었고 영적 소경이었다(엡 4: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었다(고후 4:6). 그러나 우리의 영의 눈의 시력은 단번에 완전케 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밝아진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7-19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천국 영광의 풍성과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힘써야 하고 진리의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이미 얻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 귀머거리와 벙어리, 소경과 앉은뱅이 등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심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 구원을 얻었다. 신약성경의 증거를 통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다 구원을 얻었다.

둘째로, 우리는 더욱 더 밝은 영적 시력을 가지기를 사모한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희미하게 이해하지 말고 밝히 이해하고 확신하기를 소원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했다(엡 1:18-19).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진리와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과 죄사함의 가치와 천국과 영생의 가치에 대해 더욱 깨닫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이 허무하고 죄악된 세상을 본받지 말고 심령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진리, 즉 믿어야 할 교리적 내용과 행해야 할 생활교훈을 다 바르게 깨닫고 믿고 확신하고 또 그 모든 교훈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영적 소경인 우리의 믿지 않는 많은 이웃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육신의 소경들도 불쌍하지만, 영적인 소경들은 그보다 더 불쌍하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목적도, 죄의 심각성도, 지옥 형벌도 알지 못하고, 천국의 영광도, 영생의 보화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자신의 죄악됨과 허무함을 깨닫고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

 

27-30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함

[27-28절]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라는 호칭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268회나 사용되었다.42) ‘제자’는 선생님에게 말씀을 배우며 그를 따르는 자를 가리킨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에서 약 4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도시이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근본적 질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그에 대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참 믿음은 바른 지식과 함께 생긴다.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사람들의 견해를 모르셔서가 아니고 이제 그의 제자들이 자기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선지자나 종교적, 도덕적 선생이 아니셨다.

[29-30절]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이전에 자신에 대해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증거한다. 단지, 세례 요한이 그에 대해,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증거하였고(막 1:8),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막 1:11). 또 그가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실 때 그 귀신이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불렀다(막 5:7).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 행동으로 증거하셨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또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또 그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열병환자, 한편 손 마른 자, 혈루병자, 귀머거리, 소경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귀신들린 자들을 많이 고쳐주셨다. 또 그는 다른 기적들도 행하셨다. 그는 떡 기적을 두 번 행하셨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물으심으로써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알리기를 원하신다. 그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신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약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는 참 선지자와 참 제사장과 참 왕으로 오실 자이었다. 그는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며(선지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시며(제사장)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며 보호하시며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신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를 나타낸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사실, 이것이 복음서 전체의 요지이며 성경전체의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맨 처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했다(막 1:1).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요 20:31) 또 사도들이 전한 가장 기본적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행 5:42; 16:3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16:31).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대표하여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자신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것은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이며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라야 메시아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사회적 안정을 주시고 병자들이 고침 받고 물질적 궁핍이 제거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이사야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예언하였었다(사 35:1-2, 5-6).

그렇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 그런 환경적 회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영적 회복에서부터, 즉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장차,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의 육신적, 물질적, 사회적 회복도 이뤄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요지이며 복음서들을 기록한 첫째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인류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전부는 아니다.

둘째로, 장차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속에 시작된 구원은 영화롭게 완성될 것이다. 그것이 영광의 천국이다. 메시아의 사역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완성될 것이다.

 

31-38절, 예수님을 따르는 길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이때 이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적어도 두 번 더 증거하실 것이다(마 16:21; 17:22-23; 20:17-19).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도 말씀하셨다(마 20:17-19).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실 자가 아니고,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자이시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하였다(고전 1:23). 그의 죽음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속죄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의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32-33절]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억제하매, 책망하매, 그러지 마시라고 말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무지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았지만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로는 알지 못하였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사는 것만 생각했지 죽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베드로의 최선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였다.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교훈한다. 그것은 세 가지 내용이다. 첫째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꺾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주신 의무이었고 구약 율법의 요구이었다. 마가복음 14:36에 보면, 예수께서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형수의 형틀이다. 사형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서 거기서 그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요한복음 19:17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사형장에 나오셨다고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의 현실에서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셋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제자는 선생님의 교훈을 믿고 그 교훈을 행하며 그의 본을 따르는 자이다. 그것이 그를 따르는 것이다. 주께서는 이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어떤 환경여건이든지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

한마디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부정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무거운 요구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되 자기 부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믿는 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바로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즐거이 복종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옥 형벌을 받을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부정의 요구가 우리에게 지나치다고 하겠는가?

[35-37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만일 사람이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 한다면, 그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자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확실히 얻는 자이다.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복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누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때(마 24:30) 그를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성경에 증거한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러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죽으러 오셨다. 그는 죽음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은 그가 친히 가신 길이었다. 참된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현실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여건이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행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주의 재림과 영생을 소망해야 한다.

 

9장: 변화산 사건

1-13절, 변화산 사건

[1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다음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나타낸 변화산 사건이나,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가리킬 것이다. 다니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 시대에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했다(단 2:44). 이 예언대로, 예수께서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유대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막 1:15; 4:26).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그들의 심령 속에서 시작된다. 그 나라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복음을 전함으로써 확장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2-3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같이]43) 심히 희어졌더라.

예수께서는 때때로 세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다. 늘 함께 있으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훈련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같이 심히 희어졌다.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이요 그의 거룩하심과 죄 없으심의 영광이다. 평소 감춰져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이 그 산에서 밝히 드러나셨다.

[4-6절]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은 신기하고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죽었으나 그들의 존재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과 그들이 영광 중에 안식을 누릴 천국의 존재를 증거한다. 특히 구약 성도들 중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구약의 율법은 모세를 통해 전달되었고, 엘리야는 구약시대의 대표적 선지자로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 또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율법의 제사 제도와 성막 제도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의 글들은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7절]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약시대로부터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표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 오셔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있었다(막 1:11). 변화산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또 하나의 힘있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실제로 중요한 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8-10절]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人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변화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잠시 나타난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일을 알리라고 암시하셨다. 그의 부활은 그의 그리스도 되심을 확증할 것이다.

[11-13절]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人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구약성경 말라기 4:5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대로 보냄을 받은 자가 세례 요한이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1:14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7:13에 보면, 제자들은 성경에 예언된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알았다.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 나라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도 무시하였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사람들은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그 나라에 들어간다. 신약교회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구름 속에서 세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친히 증거하셨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경에 다 기록되었다. 우리는 복음서들에 기록된 그의 모든 말씀과 모든 성경을 다 읽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14-32절,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14-16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서기관들에게]44)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산 아래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병고침이나 귀신 내쫓음에 대해 변론했을지 모른다. 그때 마침 예수께서 내려오셨다. 모든 무리가 곧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했다. 그들이 놀란 것을 보면 그들이 아마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관심을 가지고 달려와 그를 맞으며 문안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고 물으셨다.

[17-18절]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 아들은 그의 외아들이었다(눅 9:38). 귀신이 그를 잡으면 그가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파리해졌다. 그것은 간질 증세와 같았다. 그의 소망이었을 외아들이 이런 악한 귀신에 붙잡혔으니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그의 제자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받았으나(막 3:15; 6:7) 믿음이 약하여 그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서기관들도, 무리들도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미 행하신 기적들을 통해 그를 믿을 만했으나 그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탄식하셨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는 열심이 있어도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는 열심이 없다. 그러나 긍휼의 주께서는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20-22절]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 아이의 병은 아마 수년 이상된 불치(不治)의 병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구해야 할 때 그에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다.

[23-2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네가 믿을 수 있다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니라](전통본문, KJV)45)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눈물을 흘리며](전통본문)46) 소리를 질러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그는 울면서 소리질렀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믿음이다. 믿음 없는 자는 성경 읽고 기도하는 생활에 힘쓰지 않으며 예배드리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일이 바쁘다고 주일예배 빼먹기를 쉽게 한다. 그런 행위들은 믿음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걱정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시며 우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 간구해야 할 것이다.

[25-27절]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의 이 명령으로 충분하였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연계와 정신계를 주관하는 능력의 말씀이었다. 그가 명령하시자, 그 귀신은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다. 그 아이는 죽은 것같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 아이는 일어섰다. 그 벙어리 되고 귀먹은 더러운 영은 나갔고 그 아이는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귀신은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그의 말씀에는 신적 능력이 있었다. 이 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하였다.

[28-29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기도와 금식]47)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한 자는 조금 기도하고, 믿음이 강한 자는 많이 기도할 것이다. 금식은 몸에 힘과 생명이 되는 음식의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므로 비상한 기도의 방식이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성도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한다. 금식 기도는 어려운 문제 해결의 열쇠이다.

[30-32절]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人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예수께서는 이미 낮아지셨고 또 죽으심으로 더 낮아지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귀신을 명령하여 내쫓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의 대속(代贖)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 곧 신적 구주이시다.

둘째로, 성도는 사탄과 악령들과 싸우든데(엡 6:12) 이때 믿음이 필요하다. 사탄과 악령들 곧 귀신들은 사람을 범죄케 하고 불행케 하는 악하고 더러운 영이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우리가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믿음이 있다면 아무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말씀과 기도로 능력의 주님과 동행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기도와 금식으로 행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기도는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로 행해야 하며, 특히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29절,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33-42절, 서로 섬기며 영접할 것

[33-34절]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명예심과 야망이 제자들에게도 있었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죄성의 본질은 교만이요 그것은 남에게 높임을 받으려는 명예심과 남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포함한다. 그들은 주님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변론이 부끄러운 것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모든 잘못은 고쳐야 한다. 열 번이라도 지적을 받고 죽을 때까지라도 고쳐야 한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이 되기를 원하신다.

[35절]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교회 안에서 큰 자는 나이나 학력, 재력이나 사회적 신분, 심지어 신앙 연륜에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다 한 요소이긴 하겠지만, 바른 판단 기준은 아니다. 주의 말씀대로, 교회에서 큰 자는, 겸손히 다른 교인을 섬기는 자이다. 겸손히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크게 여기시는 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심으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36-37절]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내 이름 때문에]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내 이름 때문에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님 믿는 자들의 자녀라는 이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름 때문에, 혹은 그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영접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독생자를 세상에 주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보내실 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까닭은 예수께서 그 아이의 죄를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며(마 16:26),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 영혼이다(고전 8:11).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고 또 서로 영접해야 한다.

[38절]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그 사람이 진실한 신자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진실한 신자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사도시대에 귀신을 내어쫓는 하나님의 은사가 열두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주께서 풍성한 은사를 내리시는 시대에 주어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내어쫓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런 태도는 당파심의 위험이 있어 보인다. 우리를 따라야만 옳다, 우리 교회에 나와야만 된다는 생각은 분명히 당파적 마음가짐이라고 보인다. 제자들이 단지 그가 그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판단하였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사람에게는 이런 편협한 당파심이 있고 그것도 죄악이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이는]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포용심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없고 내용적으로 명백한 오류가 없는 한, 그를 허용하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역사적 정통 기독교 신앙을 비방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용납하거나 그들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를 명백히 이탈하고 왜곡시킨 천주교회나 각종 이단종파들을 용납하거나 교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명백히 비성경적인 교훈을 하거나 바른 교회와 목사를 비방하는 것이 아닌 경우, 우리 단체가 아니고 우리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를 정죄하려는 태도는 편협한 당파심이며 우리는 그런 당파심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교훈하는 교제와 절교, 포용과 경계의 선을 잘 긋고 잘 지켜야 한다.

[40절] [이는] 우리를[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너희를] 위하는 자니라[자임이니라](전통본문).48)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의 모든 일이 허용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하며 그를 공공연히 반대하지 않는 자는, 비록 다른 점들에 있어서 잘못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위하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들에 대해 이런 정도의 포용적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41-42절]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작은 종 한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것은 확실히 상을 받을 일이며,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범죄케 하는 것은 심히 큰 죄악이 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며 모든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주의 제자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의 종처럼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이런 자가 교회에서 큰 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이어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형제 자매이다. 교인들이 목사와 장로들과 교회 직분자들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지만, 직분자들도 모든 교인들의 종들처럼, 그들을 섬기며 사랑하고 그들의 믿음과 기쁨을 돕는 겸손한 봉사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영접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믿으려 하는 교인 한 명, 또 어린아이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귀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를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고 오래 참고 용납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돌아보고 피차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교훈을 실천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참 교회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드러나게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정도의 포용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런 자를 무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작은 종 한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기를 힘써야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43-50절, 지옥의 교리

[43-50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전통본문).49)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전통본문)50)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전통본문).51)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의]52)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받으며 모든 제물이 소금으로써 뿌려지리라].53)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이며 신약성경 중 가장 분명한 지옥 교리이다. 천국과 지옥은 세상의 마지막 상태이다. 그것은 몸의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일 뿐 아니라, 부활 후의 영원한 상태이다. 천국은 영생의 나라요 영광과 행복과 즐거움이 있는 나라이며, 지옥은 영원한 형벌과 고통과 불행과 치욕이 있는 세계이다. 본문에서 주께서는 지옥을 “지옥 꺼지지 않는 불” “불의 지옥”으로 증거하셨고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세 번이나 강조해 말씀하셨고 또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지옥이 이렇게 무서운 형벌의 장소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과 한 발과 한 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주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지옥 교리는 성경에 밝히 증거된 교리이다. 천국과 지옥의 교리는 몸의 부활의 교리와 연관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는 두 종류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고(행 24:15), 재림하실 주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라고 증거했다(딤후 4:1). 죽은 자의 부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의 진리는 구약 다니엘 12:2에서 이미 증거된 진리이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옥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는 본문 외에 복음서의 다른 여러 곳들에서도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27-30,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5:41, 46,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지옥은 악인들의 몸과 영혼이 함께 던지우는 형벌의 장소이지만(마 10:28), 누가복음 16:23-28에 보면 악인들이 죽은 후 아직 부활하기 전에도 그 영혼들이 고통을 당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옥 교리는 사도들이 증거한 교리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1:9에서 주 예수의 재림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지옥이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에서 지옥에 대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을 유황 불못’(계 19:20; 20:10),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21:8)이라고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이처럼 지옥 교리는 성경적 교리이다.

둘째로, 지옥 교리는 몇 가지 교훈들을 준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자이시다. 죄의 보응은 죽음이요(롬 6:23) 그것은 둘째 사망인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시는 자이시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가 어떠함을 증거한다. 우리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고 그를 두려워해야 한다.

둘째, 지옥 교리는 죄의 무서운 사실을 증거한다. 죄는 결코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심각한 문제이다. 죄의 보응은 죽음이며 그것은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우리는 죄가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죄는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무서운 문제이다. 큰 죄를 지은 사람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죄인이 다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죄는 사람을 지옥 꺼지지 않는 불로 인도하는 무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하고 모든 죄를 다 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우리의 발과 우리의 눈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범죄하게 하지 못하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 외에 다른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중간지대는 없다.

셋째, 지옥 교리는 구원과 전도의 필요성을 증거한다. 죄인은 죽고 그 죽음은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모든 죄인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므로 이 구원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

셋째로, 지옥 형벌을 피하는 길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것이다. 본문은 사람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을 조심하고 행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나쁜 것을 보고 들을 때에 죄를 범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그러나 범죄치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경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을 보인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누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해 죽으신 구주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의만 믿는 속죄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것만이 지옥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10장: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1-16절, 이혼과 겸손에 대하여

[1-2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전에 하시던 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가르치시는 사역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궁금한 것들에 대해 자유로이 질문하였던 것 같다. 본문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비난거리를 찾기 위해 질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배우려는 태도가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가르치시는 데도 그러했다. 교만한 자는 어떤 훌륭한 선생님이 와서 가르쳐도 배우려고 하지 않으나, 겸손한 자는 평범한 교훈에도 귀를 기울인다. 남에게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마음이 높고 교만한 사람이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한다.

[3-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하나님께서]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54)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모세는 사람이 이혼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을 허용했다. 사람들은 악하여 약한 아내를 학대하고 울리고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그를 버리기까지 한다. 아내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여자에게는 차라리 이혼이 낫다. 결혼해서 구타당하고 마음과 육체의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이혼은 결혼 제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반대된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결혼한 남녀는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 그러므로 부부관계는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보다 더 친밀한 관계이다. 부부관계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되고 잘 유지되어야 할 관계이며 다른 무엇에 의해 손상되어서는 안 될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의 관계를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버리든지, 아내가 남편을 버리든지, 버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부부의 사랑은 필수적 의무이다.

[10-12절]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부부가 아닌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본처에게’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 ‘그에게’라는 말인데, 그것은 본처보다 재혼한 상대를 가리킬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잘못된 이혼에 근거한 재혼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13-14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그 데려온 자들을]55)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것임이니라].

본문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음을 증거하면서 우리에게 겸손함에 대해 교훈한다. 우리는 주님의 모범대로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영접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순진하여 무엇을 의심할 줄 모른다. 그는 배운 대로 믿고 행한다. 그러므로 어릴 때의 바른 교육이 매우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의 마음가짐이 어린아이같이 순진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15-1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같이 영접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우리 어른들은 성경말씀을 복잡하게 생각하여 의심하지만, 어린아이는 성경에 증거된 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순진하게 믿고 따른다.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천국 복음을 어린아이들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받고 믿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관계 중에서 부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심을 알고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잘 지키고 유지해야 한다. 결혼한 부부는 서로를 위하고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부부의 사랑은 필수적 의무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옳지 않은 이혼과 재혼을 죄악으로 간주하시고 그 행위와 폐해들을 미워하심을 알고 그것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이혼과 재혼이 점점 많아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결혼 서약을 지키고 이혼을 매우 조심해야 하고 부당한 재혼도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천국 백성의 모습을 지닌 자들로 알고 주님의 모범대로 어린아이들을 사랑으로 영접하며 무시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한 명의 영혼의 가치는 매우 크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진하게 듣고 받고 믿고 그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17-31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어려움

[17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달려온 것을 보면 그는 열심이 있었고, 꿇어앉은 것을 보면 그는 겸손하였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인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영생의 방법에 대하여 물은 것을 보면, 그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실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18-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선하지 않으셔서가 아니고 사람들 중에는 선한 자가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 함이었다. 세상에는 의인이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다(롬 3:10, 23).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므로 선하시고 죄가 없으시다(히 4:15; 요일 3:5).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들을 열거하셨다. 그것은 계명들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이다(요 3:16). 주께서 그에게 계명을 말씀하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과 죄악됨을 바르게 깨닫게 하려 하심이었을 것이다.

[20-21절]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전통본문)56)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는 경건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 같다. 그는 상당히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의 문제점이 재산의 많음에 있었음을 보셨다. 그는 영생을 사모하지만, 그의 재물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참으로 영생을 원한다면 그는 재물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영생은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재물은 결코 영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깜짝 놀라서, 혹은 어두운 기색을 띠고](BDAG) 근심하며 가니라.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영생을 원했지만, 그것을 위해서 그의 많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 대신에 재물을 택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이](전통본문)57)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들은 흔히 가난보다 재물의 많음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난보다 부요가 복인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것은 아마, 부자가 그가 지금 누리는 물질의 유익들, 즉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등을, 그가 현재 실감하지 못하는 천국의 영원한 복을 위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돈을 사랑하고 부자 되기를 좋아하는 이 세상에 구원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무지한 마음을 깨우치셔서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신다.

[28-31절]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아비나 어미나](전통본문)58) [아내나](전통본문)59)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어부였던 그들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그를 따랐다(마 4:20, 2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때문에 가족이나 재산을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헌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 배나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인 신약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또 참된 헌신은 믿음의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믿은 유대인 신자들 중에 이방인 신자보다 나중 될 자가 많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자기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없었던 그 사람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주를 떠났다. 재물에 대한 애착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가 참으로 영생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단지 백년 동안 유용한 재물을 포기하고 영생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둘째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마 6:24). 돈이냐 하나님이냐, 이 세상의 부귀 영광 권세냐 아니면 내세의 천국과 영생이냐,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 천국 백성은 일만 악의 뿌리인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딤전 6:9-10).

셋째로, 사람으로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능력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은혜로 영생을 주실 자들을 택하셨고 그들의 무지한 마음을 깨우치셔서 세상의 것들과 세상 사랑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신다.

넷째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다 해로 여겼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했다(7-8절). 우리는 헛된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 대신 천국과 영생을, 그리고 거짓된 신인 돈 대신 영원하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택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32-45절,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구함

[32-34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人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決案)[정죄]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조롱]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주 부르셨다. 이것은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신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자신을 낮추심이었다. 그것이 주님의 겸손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나라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 곧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들과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들, 곧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죽이기로 정죄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것은 심히 모순된 일이었다. 주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3일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 일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증거된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되어질 일을 정확히 예언하셨고 그의 예언대로 그 일이 정확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또 하나의 증거이었다.

[35-37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영광의 보좌 좌우에 앉기를 탐내었다. 그것은 순전히 세상적 욕심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했어야 했다.

[38-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알 호이스 헤토이마스타이)[예비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나의 마시는 잔,’ ‘나의 받는 세례’는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킨다. 그런 고난을 그들이 과연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고난에 참여케 될 것을 암시하셨다. 야고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목베임을 당하였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요한은 로마에서 끓는 가마솥에 던지웠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그는 그 후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에베소로 돌아와 늙도록 생존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성도가 소원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준비된 자들 즉 예비된, 예정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될 것이며 작정된 자는 그것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자리가 작정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말씀 나눔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들이 분히 여겼다는 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음을 보인다. 그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속에도 비슷한 세속적 욕심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교회 안에서 높은 자리를 구하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42-44절]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린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섬김의 정신이, 이론적으로는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없다. 세상 나라는 힘과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것이 죄악된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이 세상의 것과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섬김의 원리이다. 이 세상은 보통 지배의 원리로 운영되지만, 교회는 오직 섬김의 원리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가 역사상 로마 천주교회처럼 세속정치와 결탁되어 교인들을 강압한 때가 있었고, 오늘날 이단종파들은 교인들에게 폭력과 강압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타락한 교회의 모습일 뿐이다. 교회는 믿는 이들의 자발적 모임이며 거기에는 일차적으로 사랑과 섬김의 원리가 지배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섬기는 데는 실상 직분도 필요치 않다. 섬기는 것은 그냥 섬기면 된다. 그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를 몰라주어도 섭섭해하지 않는다.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교회는 아름다운 모임이 되고 이 세상에서 벌써 천국의 모습을 이룰 것이다.

[45절] [이는] 인자(人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본절은 앞에서  주께서 하신 교훈의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준다. 우리가 서로 섬기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이유와 근거는 주님 자신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본을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몇 가지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는 영광의 천국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둘째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신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자신의 죗값으로 죽어야 하든지, 아니면 대속물을 필요로 하였다. 죄인이 대속물이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죄에 대한 형벌이 없어도 죄가 용서된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폐하여지고 그는 불의한 자가 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것이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이었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속죄제물이 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여기에 섬김의 모범이 있고 교훈이 있다. 교회의 직분도 섬김의 직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은 존귀하고 우리가 그 직분과 직분자를 존중해야 하지만, 그 명예는 단지 그의 섬김과 충성과 그의 선한 열매에 달려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오셨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들의 죄를 담당한 대속(代贖)의 죽음이셨다. 우리는 그의 죽음 때문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그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성령으로 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 그는 우리의 성화를 이루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능력을 주신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명예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세의 영광과 존귀는 사모하며 구할 수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허무하고(전 1:2) 모든 육체는 풀같이 마르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같이 떨어지기 때문에(벧전 1:24) 이 세상의 헛된 욕심은 버려야 하며 명예심도 헛된 욕심들 중의 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갈 5:26).

셋째로, 교회 안에서 큰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서로 높아지려고 할지라도, 교회는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교훈하신 바이며 본을 보이신 바이다.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넷째로, 무엇보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 죽음은 몸의 죽음뿐 아니라, 정신적, 신체적, 환경적 불행과 특히 지옥의 형벌을 포함한다.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길은 구주 예수를 믿는 것뿐이다(요 3:16).

 

46-52절,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주심

[46-48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구절하다가](전통본문)60)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소경 바디매오는 구걸하며 살았던 불쌍한 거지이었다. 그는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렀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지방의 한 마을 나사렛 출신이셨다. 그는 사람이 지어낸 인물이 아니고 역사적 인물이셨다. 그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것이었다. 그 소경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자기의 불행한 처지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갈망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병 고치심과 기적 행하심을 보지 못했으나 소문을 듣고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을 주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는 겸손히 예수께 소리질렀다.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했으나 그는 더욱 소리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지 않았고 무례한 자로만 여겼으나, 그는 낙심치 않고 더욱 소리지른 것이다. 그의 믿음은 간절히 부르짖는 믿음, 사람들의 방해에도 낙심치 않는 믿음이었다.

[49-50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지나쳐 버리시는 듯하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도 처음엔 응답지 않으시는 듯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낙망치 않고 믿음으로 부르짖을 때 그는 머물러 서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간절히 그리고 낙망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소경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 겉옷은 거지에게 중요한 소유물이었다. 그것은 그의 몸을 가리고 밤에 추위로부터 지켜주는 필수품이었으나 그는 그의 겉옷도 팽개쳐 버리고 주께로 나아갔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이만큼 열망했다. 그는 예수께로 가면 그의 소경이 고침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51-52절]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 소경은 보기를 원하였다. 그 소경에게는 돈 몇 푼보다 시력의 회복이 필요하였다. 영적 소경인 모든 죄인들이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비참함과 구주 예수님과 내세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은 물질적인 소득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고 값진 일이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소경의 믿음을 귀히 여기셨다. 그 소경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 첫째로, 그의 믿음은 지식 있는 믿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심을 알았고 그의 신적 능력과 자비를 믿었다. 둘째로, 그의 믿음은 간절한 기도로 표현된 믿음이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셋째로, 그의 믿음은 낙심치 않는 믿음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꾸중 속에서도 낙심치 않았다.

주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었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은 시력의 회복을 가리켰다고 본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소경은 그의 시력의 회복을 얻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는 병고침들에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받았다.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하였다.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기적들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명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확신해야 한다.

눈을 뜬 바디매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더 이상 소경도, 거지도 아니다. 그는 육신의 병만 고침 받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어 영혼의 구원도 받았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 소경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하며 증명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안(靈眼)이 날마다 밝아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잘 알고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사역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와 내세와 천국의 영광과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바디매오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주께 아뢰어 고침을 받았다. 그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병고치신 일들과 기적 행하신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심을 알았고 믿었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 예수께 부르짖어 구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낙심치 않고 구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성경을 읽고 들음으로써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확신하고 세상에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마귀와 악령들과 악한 자들과 여러 가지 시험들을 잘 극복해야 한다.

 

1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1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2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스가랴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했었다(슥 9:9). 이것은 메시아 예언이라고 본다. 흔히,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다. 또 그가 나귀를 타심은 그의 겸손함을 나타내신다. 스가랴는 “[그가]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섬기러 오셨다. 또 그가 나귀새끼를 빌려 타고 가심은 그의 가난함을 증거한다. 그는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자기 소유로 갖고 있지 않으셨다. 그는 본래 부요하신 자이셨으나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3-6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호 퀴리오스)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은 나귀의 주인이 있지만, 실상 예수께서 나귀의 참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지만, 실상 세상의 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상의 창조자요 참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24:1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복음서들에는 예수님을 ‘주’라고 표현한 구절이 약 200회 나오며 사도행전에만 약 108회 나온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사도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행 2:36). 사도 바울은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롬 10:9).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구원이 된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아는 자는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였다. 또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께서 신적 지식을 가지셨음도 증거한다.

[7-10절]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리들의 찬송은 호산나 찬송이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시편 118편에 있는 말씀이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세상에는 여러 가지 죄악된 일들과 불행한 일들, 즉 질병들, 자연 재해들, 전쟁, 굶주림, 그리고 마침내 죽음 등의 일들이 많고 사람은 이 모든 문제들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의 해결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의 창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그에게 해결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께서 오셨다. 사람의 구원의 갈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왔다. 예수께서는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사람들을 각가지 불행에서 구원하실 수 있고 구원하실 것이다.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특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대속(代贖) 사역을 예표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성으로 올라가신다. 그는 거기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정죄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죄와 죄의 결과인 모든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한 나귀새끼의 참된 주인이시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는 실상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다. 세상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요 1:3). 온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다. 그는 창조 세계를 그의 선하신 뜻을 위해 쓰실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부요하신 주께서는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시기 위해 천국 영광을 버리시고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가난해지셨고 죽임을 당하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호산나 찬송을 받으실 자이시다. 그는 인류를 죄와 그 결과인 불행과 죽음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를 사랑하고 복종해야 한다.

 

12-19절, 무화과를 저주하심, 성전을 깨끗케 하심

[12절]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예수께서 배가 고프신 것은 그의 인성(人性)의 표시이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가 사람이 되신 것은 신비롭고 놀라운 기적이다. 또 그가 그 아침에 배가 고프신 것을 보면,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를 잘 대접했던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합당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13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는 신성(神性)으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인성(人性)으로는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고 계셨다고 보인다. 무화과는 잎사귀가 생기면서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서 보신 그 무화과는 잎사귀만 있고 아무 열매가 없었다. 이것은 당시의 형식적 종교와 같았다. 그것은 형식은 있으나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 없는 자들, 성경책을 갖고 다니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교회의 직분도 있으나 참되고 진지한 마음과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 없고, 도리어 거짓과 탐욕, 미움과 음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을 버리고 종교적 형식만 가지지 말고 선한 열매를 맺는 성도, 곧 참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14절]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선한 열매 없는 당시의 형식적 종교 지도자들을 정죄하시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나무들 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도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나무들은 찍어 버리신다. 세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었다(마 3:10). 예수께서도 포도나무 비유에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2).

[15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성전은 성전뜰과 성소와 지성소(至聖所)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세 부분은 다 거룩했다. 본절의 내용은 성전뜰에서의 광경이라고 본다. 거룩한 성전뜰이 일종의 장터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제물을 사고 파는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과 결탁된 장사꾼들은 성전을 돈벌이의 장소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평소에 대체로 온화하셨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케 하려는 예수님의 열심이 그를 삼켰다. 그는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내어쫓으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6절] 아무나 기구[물건]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을 더럽히고 거기에서 세속적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다. 오늘날 교회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딤전 3:15). 교회의 설교들과 교훈들과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거룩해야 하고 세상적인 것이 섞여서는 안 된다.

교회의 교훈은 육신적 문제나 물질적 문제, 즉 병고침이나 물질적 복을 받는 일에 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활동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일반적 교육사업, 구제사업, 자선사업 등 세상의 사업들에 힘써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늘 시대의 풍조는 목사들과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오락적 요소들을 섞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방식도, 사도들의 방식도 아니었고, 역사상 하나님의 경건한 종들의 방식도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특이한 현상이며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라고 본다. 목사들은 흥미 있는 말들로 교인들을 즐겁게 하는 말쟁이가 되고 있는 것 같다.

[17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섬기는 곳이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요 2:21) 또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예표하였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듯이, 신약교회도 모여 하나님을 섬기며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교훈이 있고 하나님의 일들을 수행하는 곳이어야 한다.

목사들의 설교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그의 나라, 죄와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중생(重生), 칭의(稱義), 그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등의 문제와, 성도의 온전한 삶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교회의 교제는 예배와 성경공부와 기도 등 영적이어야 한다. 소풍도 필요하겠지만, 제한적이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교회다운 일들을 힘써야 한다. 또 교회는 오직 영혼구원의 전도의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명하신 일이요 교회의 사명이다.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초대교회는 그 일에 힘썼다. 오늘날도 교회는 전도대의 파송, 개척교회 설립과 지원, 해외선교사 파송과 지원, 목사와 선교사 양성 등에 대해 연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당시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셨다. 성전에서의 매매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강제로 팔아 이익을 남기는 일이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종교를 빙자한 장사이며 강도짓과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가증한 일이었다.

[18-19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매양 저물매 저희가[그는]61) 성밖으로 나가더라[나가시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고 그 의로운 자를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이 대중들에게 받을 존경과 명예의 상실을 염려했던 것 같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과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의 존경과 명예 같은 세상 것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열매는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만 가지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구약의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와 같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집 곧 성전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복음과 바른 말씀이 전파되고 가르쳐지는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를 이용하여 물질적 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며 물질적 이익을 얻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종교를 이용하여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20-33절, 기도와 용서, 예수님의 권위

[20-23절]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신적 능력이 있으셨다. 그런데 주께서는 더 놀라운 교훈을 하셨다. 그는 우리의 기도 생활에 대해 교훈하기를 우리에게 어떤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 외의 것들은 그것에 비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헛된 세상적 욕심으로 무엇을 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받는]62)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성경은 기도의 응답을 약속한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는 응답을 받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25-26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전통본문).63)

‘혐의’는 ‘마음 상하는 일이나 책망거리’를 가리킨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치 않는 죄는 기도의 큰 장애물이다. 남의 죄를 용서해야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함을 얻으며 기도의 문도 열린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고(마 6:12), 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4-15).

또 주께서는 용서에 대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35). 또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식사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14).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은 서로 용서함을 가리켰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잘 지키려면 먼저 상대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27-28절]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요 구약교회의 직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부패되어 있었다. 가장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그들이 그렇지 못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도 신학교들과 교수들이 부패한다면, 목사들이 쉽게 부패할 것이며, 또 목사들과 장로들이 부패한다면, 교회는 쉽게 부패할 것이며, 교회들이 부패한다면, 그 나라와 그 사회에는 희망과 장래가 없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질문했다. 예수께서 사람의 권위로 활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권위로 활동하는 것인지 질문한 것이다. 사람의 권위는 제한적이고 오류가 있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 무제한적이며 오류가 없으시다. 그들의 질문이 진실을 알기 위한 질문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이심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이기 때문이다(요 17:3).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진실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예수님의 말의 흠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29-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하늘로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말하고, ‘사람에게로서’라는 말은 사람이 스스로 가지는 권위를 말한다. 사람이 스스로 가지는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에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시는 종들에게는 그가 주시는 권위, 특히 말씀의 권위가 있었다. 세례 요한이 그러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알았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인정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세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였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도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31-33절]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종임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 앞에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참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무리의 비난을 피하는 대답을 했다. 인간적으로는 지혜로운 대답인지 모르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비양심적이고 비겁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원천은 분명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의 응답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주 예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소원을 간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도 용서해주시며 응답해 주실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셨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고(요 7:16-17), 또 자기의 행한 일들을 통하여 자기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1).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신적 구주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따르며 사랑하며 증거해야 한다.

 

12장: 변론하심

1-12절, 악한 포도원 농부들

[1-5절]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에게 돌을 던지며](전통본문)64)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모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즙 짜는 구유 자리’는 포도즙을 짜는 큰 통을 둘 자리를 가리킨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를, 농부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비유했다. 때가 이르자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었다. ‘포도원 소출’은 성도들의 선행의 열매를, 주인이 보낸 종은 선지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한 행위와 삶을 요구하셨고 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종을 영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었다. 그들은 그들에게 돌을 던지며 머리에 상처를 내고 모욕하였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악한 자들이었다.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보다 더 악해지는 것 같다. 유대의 타락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핍박하였다.

[6절]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셨다. 그는 선지자들과 다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1:1-2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최후로 주신 특별계시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증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세우신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충족히 기록되었다.

[7-9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 농부들은 참으로 악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었다.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 유대인들의 행위는 사람들의 무지와 배은망덕의 극치이며 종교적 부패, 교회의 부패의 극치일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와서 그 농부들을 다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죽인 죄에 대한 큰 대가를 받을 것이다. 또 구약교회는 이제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곧 신약교회이다.

[10-11절]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주와 교회의 기초가 되셨다(고전 3:11).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가장 극악한 행위를 인류의 구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12절]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는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려는 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생명을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보화를 보화로 알지 못하는 저 무지한 죄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며 그가 세상을 위해 가장 복된 선물로 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어야 할 그들이 도리어 그를 잡아죽이려 하니 참으로 불쌍한 자들일 뿐인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유대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주셨으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았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셨다. 그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시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사랑하고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열매를 원하신다. 그것은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바르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행한 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13-17절, 그리스도인과 세금

[13-16절]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흠을 잡으려고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중에서 사람들을 보내었다. 예수님의 교훈은 악한 위선자들에게 눈의 가시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그를 잡아죽이려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으로는 경건함을 추구했고 정치이념에 있어서는 반(反)로마적이었으나 헤롯당원들은 로마 황제가 세운 헤롯 왕을 지지하며 친(親)로마적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께 와서 말했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참되시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저 악한 자들은 예수님께 이 말을 진실한 고백으로가 아니고 그를 시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임을 아셨다. 만일 그가 옳다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 그를 친(親)로마파로 몰아 반로마적 정서를 가진 대중들과 대립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만일 그가 옳지 않다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 그를 반(反)로마파로 몰아 로마법을 어기고 황제를 대적하는 자로 고발하려 할 것이다.

사람이 궁지에서 범죄치 않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만 살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이나 세상적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전진하는 것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고 승리이다. 예수께서는 항상 그러하셨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게 하신 후 “이 화상(畵像)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에는 주로 세 종류의 돈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첫째는 유대인의 동전이고 둘째는 헬라인의 은전이고 셋째는 로마인의 은전이었다. ‘렙돈’이라는 유대인의 동전은 가장 가치가 작았다. ‘드라크마’라는 헬라인의 은전은 ‘데나리온’이라는 로마인의 은전과 값이 비슷하였다. 한 드라크마 혹은 한 데나리온은 약 128렙돈이었다(NBD). 또 당시의 데나리온 은전에는 디베료 황제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은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의 통치 아래 있음을 의미하였다. 가이사의 통치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신 현실이었다.

[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로마 돈을 사용하고 있듯이 로마 나라에 대한 세금의 의무도 합당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속국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도 보여준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속국가의 역할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국가와 교회는 활동영역이 다르다. 국가와 그 통치자의 역할이 있다. 국가가 교회를 압제하고 핍박해서도 안 되지만,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려 해서도 안 된다. 중세시대에 교황들이 세속국가의 황제들을 힘으로 지배하려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주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9:36).

교회는 세상의 악들에 대해 책망하는 설교를 해야 하지만, 세상의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려 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진술하였다: “[교회의] 대회들과 협의회들은 교회적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다루거나 결정해서는 안되며,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나, 국가의 위정자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 외에는,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간섭할 것이 아니다”(31:5).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세속국가의 일들에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고 위해 기도해야 하고, 국가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그 법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정한 세금도 정직하게 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국가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사자’ 혹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불렀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규정된 세금도 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롬 13:1, 4, 6, 7). 사도 베드로도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교훈했다(벧전 3:13).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23:2), 우리는 심지어 합법적 전쟁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시 24:1) 성경에 교훈된 헌금들을 드려야 할 것을 보인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과 감사헌금을 즐거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세속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는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지 않는 한 순종하고 나라의 법이 정한 세금도 정직하게 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명하신 선한 일들을 위해 즐거이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해야 한다.

 

18-27절, 부활을 증거하심

[1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부활’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부활을 정신적 개념 정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부활은 죽은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었다고 본다. 유대인 공회 회원들의 한 부류는 바리새인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사두개인들이었다(행 23:6).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사도행전 23:8에 보면, 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오경을 믿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유주의자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앙자이며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이단들이다.

[19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주님’이라는 호칭보다 낮은 호칭이었다. 그들은 수혼(嫂婚, levirate) 제도라고 불리는 구약의 법을 인용했다(신 25:5-6). 그것은,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첫아들은 형의 자손이 되게 하는 법이었다. 이것은 모세 이전부터 있었던 법이었다. 우리는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의 아들들, 엘과 오난과 셀라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그 예를 본다. 수혼법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보존을 위한 규정이었고, 이스라엘 지파들의 보존은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위해 필요하였다고 본다.

[20-23절]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일곱 형제의 이야기가 실제적 사실이었는지 가상적 이야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기발한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생각을 시험하려 했다. 그러나 사람의 최선의 질문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질문에 불과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2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었다. 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치신 진리들에 맞으며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수 있는 바이다.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 침입자와 같았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씻음이 있으면 부활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믿는다면 죽은 자의 부활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한다.

또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다. 거기에 사람의 가치가 있고 또 두려운 점도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멸적 영혼을 가진 자로 만드셨다는 사실은 부활체의 사람을 예상케 한다. 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극악한 악인이 자살함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이 세상에서 공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공의가 확립되려면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는 특히 악한 자들의 부활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능히 살리실 수 있는 자이시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께는 부활의 능력이 있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오해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25절]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부활한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는 것은 사람이 천사들과 같이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이며 이것이 사람의 사람다운 특징이다. ‘천사와 같다’는 말은 단지 내세에서는 자녀 출산이 필요 없고 육신적 정욕도 없기 때문에 천사들과 같이 결혼의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다. 천사들은 영이기 때문에 결혼이 없다. 이와 같이,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을 것이다.

[26-27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모세의 책’이라는 말은 주께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들이 하나님의 종 모세가 쓴 책임을 증거하신 것이며, 더욱이 ‘책’이라는 단수명사를 쓰신 것은 그 다섯 권의 책들이 한 권의 책으로 간주됨을 증거하셨다고 보인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세오경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주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과 신적 권위성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의심하게 하는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을 비롯하여 성경의 권위를 확신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증거로서 단순히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얼른 보기에 부활과 상관없는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의 참뜻은 예수께서 설명하신 바처럼 사람의 부활을 내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결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기억 속에만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족장들의 불멸적 영혼들은 지금도 살아 있고 장차 부활하여 복된 사람들로 나타날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뜻하신 바이다.


본문은 교훈은 정리해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첫째로,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성경의 어느 내용은 믿고 어느 내용은 믿지 않는 잘못을 범하지 말고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성경에 대한 불신앙과 회의주의가 만연하다. 이것은 확실히 마귀의 시험과 활동이다. 우리는 자유주의라는 사두개파적 불신앙을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의 모든 초자연적인 계시들과 기적들을 다 믿고 특히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들과 기적들을 많이 증거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 믿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죽은 자들의 복된 부활을 믿어야 한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근본적인 뜻이다. 복된 부활과 복된 영생은 하나님의 뜻이다.

 

28-37절, 첫째 계명, 다윗의 주

[28-31절]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영혼]을 다하고 뜻[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것이니, 이것이 첫째 계명이요](전통사본)65)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중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 6:5에는 목숨과 뜻이라는 두 단어가 ‘영혼’이라는 한 단어이다. ‘영혼’이라는 히브리어(네페쉬)는 ‘영혼’과 ‘목숨’이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다. ‘뜻’이라고 번역한 단어(디아노이아)는 ‘생각’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 즉 목숨과 생각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분이시다. 그는 그의 창조물인 사람들에게서 최상의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는 우리의 부모님보다 남편과 아내보다 자녀들보다 형제들보다 더 존귀하시다. 그는 재물보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보다 더 가치가 있으시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낡고 없어지지만 그는 영원하시다. 그는 참으로 모든 피조물에게서 최상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는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둘째로 중요한 계명은 인간 관계의 계명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남을 죽이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탐내지 않을 것이다.

[32-34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며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이나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계명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제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다 지키지 못한 죄악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제도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생활 법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계명들을 지켜 바르고 선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어떤 외적 종교 형식들보다 더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이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칭찬하셨다.

[35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가르치심은 그가 하신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선지자의 사역이었다. 그는 참 선지자이셨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은 ‘성전 뜰에서’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그는 산에서도(마 5:1), 바닷가에서도(마 13:1), 다락방에서도(막 14:15; 요 14-16장), 또 성전 뜰에서도 가르치셨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 이것은 다윗에게 암시된 바이었고(삼하 7:12-17) 여러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바이었다(사 11:1; 렘 23:5-6; 겔 34:23). 그러나 구약성경은 또한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이심을 여러 곳에서 예언하였다. 메시아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었고(사 9:6) 그의 근본이 태초로부터라고 예언되었다(미 5:2). 그러나 서기관들은 메시아의 한 면만 알고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일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36-37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네 발등상(발판)이 되게 하기까지](전통본문)66)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거룩한 저자들이 쓴 책들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쓴 시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는 성경의 영감을 증거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듣지 못하지만, 성경을 통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과 권위로 인쳐진 말씀이며 오늘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도구가 되는 책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 시편 110:1은, 메시아께서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또한 ‘다윗의 주’라고 말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구약 원문에서 ‘주께서’라는 말(예호와)은 ‘여호와께서’이며, ‘내 주께’라는 말(라도니)은 본문과 같이 ‘내 주께’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장차 오실 메시아를 ‘나의 주’(아도니)라고 부른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먼 자손인 메시아를 ‘주’라고 부른 것은 그의 신성(神性) 때문이었다. 메시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또한 다윗의 주이시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자는 그의 신성(神性)을 알아야 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곧 ‘영광의 주’시며(고전 2:8; 약 2:1), ‘하나님’(요 1:1),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했다(고후 4:3-6).

예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에 의하면, 메시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그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아의 사역과 통치권을 보인다. 그는 세상에 사람으로 오시지만, 하늘로 올리우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고 마침내 원수를 발 아래 밟게 될 것이다. ‘네 원수’는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과 인류의 싸움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싸움이다.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을 때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일이 법적으로 성취되었고, 그가 다시 오실 때 실제로 사탄을 멸하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은,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는 메시아의 신성(神性)을 확실히 증거하신 것이다. 백성들은 그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들의 요점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중요한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사람의 생활 규칙을 보이며 또 사람이 그 규칙을 잘 못 지킨다는 것도 보인다. 또 우리가 그 첫 번째 계명을 못 지킨 큰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우리는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알아야 한다. 그는 사람이 되셔서 약 33년간 세상에 사셨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신성(神性)의 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곧 참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귀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크시고 놀라우신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깨닫고 그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다윗의 주 곧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니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에게 순종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주와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사랑하고 읽고 배우기를 힘쓰며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진대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38-44절, 악한 지도자들, 한 과부의 헌금

[38-39절]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예수께서는 어떤 서기관들의 몇 가지 특징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였다. 즉 그들은 외적 치장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성도는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내면적 단장, 곧 인격의 단장, 즉 도덕성으로의 단장을 힘써야 한다(딤전 2:9-10).

둘째로,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이나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교만과 세상적 명예심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랍비나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교훈하셨고 또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마 23:8-12).

주께서는 우리가 이런 교만한 외식자들을 삼가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삼간다’는 원어(블레포 아포)는 ‘떨어져서 본다, 주의한다, 피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과는 가까이하지 말고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바른 종들과는 가까이해야 하지만, 이런 외식자들과는 거리를 두고 주의하고 피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이런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쫓고 멀리하라고 교훈하였다(요삼 9-12).

[40절]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셋째로, 이런 서기관들은 과부의 집과 재산을 삼켰다. 그들의 관심은 이 세상에 불타 없어질 물질에 있었다. 그들은 외로운 과부들을 위하는 선한 자들이 아니고 단지 그 과부들의 집과 재산을 취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기회를 보아서 그 과부들의 재산을 삼킨다. 그들은 악하고 나쁜 탐욕자들이었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는 돈에 대해 깨끗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3:3 전통사본). 불타 없어질 땅의 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땅과 함께 망할 것이지만, 영원히 있을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이다.

넷째로, 이런 서기관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다. 그것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이었다. 우리는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하여 교훈하시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6:5). 하나님께서는 골방기도에 잘 응답하신다.

이런 서기관들의 특징들은 요약하자면 외식과 명예심과 탐욕이다. 그들은 외식적 복장, 외식적 기도를 하였고 명예심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높임과 존경과 대우를 받기를 좋아했다. 또 그들은 땅의 물질을 탐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특징들은 다 헛되고 악한 것들이다.

주께서는 이런 서기관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죄와 벌에는 경중(輕重)이 있다. 죄에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으며, 벌에도 큰 벌이 있고 작은 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그의 심판은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41-42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는 성전의 연보궤 가까이에 계실 때 한 과부의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구약성경에서 교훈된 헌금은 십일조와 감사예물이다(레 27:30-33; 말 3:8-10).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하는 이유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주인이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시 24:1). 더욱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6:19-20). 헌금은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작은 표시이다.

헌금의 용도는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비이었다. 신약시대에도 교회는 헌금을 가지고 목회자들과 교회의 특별봉사자들의 생활비의 전부 혹은 일부를 공급하고, 또 국내외 전도를 위해 전도자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그들의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원하는데 사용한다. 또 헌금은 교회 안의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위해서도 쓰인다.

여러 부자들은 많이 넣었으나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한 렙돈은 약 128분의 1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작은 가치의 돈이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 약 10만원으로 보면, 한 렙돈은 800원 정도이고,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는 1,600원 정도이다. 가난한 과부는 지극히 작은 돈을 헌금하였다.

세상에는 빈부의 차이가 있고 그것은 여러 요인들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가 더 심화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자들의 너그러운 자발적 구제 행위가 요청된다. 성도는 열심히 돈을 벌되 사치하지 말고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부자들이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17-19절).

[43-44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가나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예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보다 많이 헌금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지 헌금 액수의 크기에 있지 않으시다. 부자의 많은 헌금이 선하고 귀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헌금 액수보다 헌금자의 마음에 관심을 두신다. 주께서는 헌금자의 헌금 액수와 그의 경제 형편을 비교하여 평가하셨다. 그것은 헌금자의 마음에 대한 평가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어려운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다. 그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의 표시이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이며(고후 8:1, 4, 7) 진실한 믿음과 사랑의 표시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당시에 어떤 서기관들은 외적인 치장을 중시했고 교만과 명예심이 있었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 있었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들과 가까이하지 말고 좀 거리를 두고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살피고 그들과 교제하기를 조심하고 피해야 한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그들과 교제하고 또 그들의 조언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악한 자들과 교제하기를 조심하고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그들의 외식과 교만과 명예심과 탐욕을 본받지 말고 그런 악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보다 그의 인격성을 중시하고, 돈과 명예보다 하나님과 천국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둘째로, 한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주께서는 한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귀히 보셨다. 우리는 단지 많은 헌금을 크게 여기는 잘못된 사고방식과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헌금을 단지 금액으로만 평가하지 말고 헌금하는 자의 환경여건과 그 중심과 정성을 보아야 한다. 사람의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며 증거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의 주인으로 참으로 인정한다면,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참으로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과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의 가진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는 우리 모두에게 교훈과 도전이 된다.

 

13장: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

1-8절, 미혹, 전쟁, 지진, 기근의 징조들

[1-2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스룹바벨 성전을 개축하였다고 보인다. 아름다운 돌들이 사용되었을 것이고 건물의 외형도 웅장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런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을 자랑한다. 제자들도 그러했던 것 같다. 그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장차 완전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살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마침내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배당 건물보다 교인들의 경건과 도덕성을 중요히 여겨야 한다.

[3-4절]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은밀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세상의 종말과 자신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세상 종말에 대한 한 작은 예표적, 모형적 사건이 될 것이다.67)

[5-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속임]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주께서는 첫째로 사람들의 미혹을 언급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와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부패, 신학의 변질, 교회지도자들의 변질을 암시하신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사람들을 사용한다. 그들은 잘못된 사상, 잘못된 말과 글, 잘못된 책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속인다. 사탄은 사람들을 한두 명 정도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사용할 것이다.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에 많은 거짓 목사들이 나타날 것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속임에 넘어갈 것이다. 목사들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도 변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주의 재림 전에 먼저 배교(背敎)하는 일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고, 또 디모데후서 4:3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오늘날 사탄의 속임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명백한 배교이다. 그것은 뿌리깊은 로마 천주교회와 19세기 중엽부터 나타난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등 각종 이단종파들과 20세기 말  이후 기독교 세계를 부패시킨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고 왜곡시킨 이단 사상이다.

둘째는 타협적 복음주의이다. 그들은, “자유주의나 로마 천주교회는 우리와 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제를 끊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며 협력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배교의 속임수 못지 않게 정통 기독교회를 혼란시키는 거짓말이며 사탄의 속임수이다.

셋째는 은사주의의 혼란이다. 은사주의는 조용한 성경 강론보다 열광적 은사체험을 강조한다. 그들은 확실히 열심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열심 속에 성령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와 로마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연합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사탄의 속임수이다. 기독교의 중심은 열광적 은사체험에 있지 않고, 말씀의 충실한 가르침과 참된 믿음과 거룩하고 선한 순종의 삶에 있다.

주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잘못된 사상과 말, 글과 책을 주의해야 한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은 우리의 발에 등이며 우리의 길에 빛이다(시 119:105).

[7-8절] 난리(폴레모스)[전쟁]와 난리[전쟁]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기근과 소동이]68) 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징조로서, 주께서는 둘째로 전쟁을 언급하셨다. 주의 재림 직전에, 세상에 전쟁의 소문이 들릴 것이며,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전쟁들이 일어날 것이다.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지금까지 세계는 핵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은 화학무기, 세균무기, 핵무기의 지극히 참혹한 전쟁이 될 것이다. 세상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가까워 오고 있다.

세 번째의 징조는 지진이다. 19세기말 이후 세계 곳곳에는 무서운 지진들이 있었다. 큰 지진의 힘은 약 1억 8천만 톤의 폭약(TNT) 같으며, 그것은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의 만 배 가량의 힘이라고 한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었고, 그 중에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도 14개이며,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도 7개이었다.69)

네 번째의 징조는 기근이다. 기근은 홍수, 가뭄, 폭설, 태풍, 전염병, 자원 부족, 병충해, 이상 기온 등 자연환경적 요인도 있을 것이지만, 인구 증가, 군사비의 과다 지출, 정치가나 재벌들의 부정축재, 경제 정책의 실패, 경제 공황 등의 사회적 요인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19세기 말부터 세계 곳곳에서는 큰 기근들이 있었다.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하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동부 인도 벵갈에 큰 기근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이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1998년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전 세계에 8억 2,800만명이 기아 상태에 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이 가깝다는 징조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재림의 징조로서 속이는 목사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속이는 목사들과 그들의 교훈들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신구약 66권의 성경만 기준으로 삼아 바른 교리들을 믿고 바른 생활교훈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재림의 징조들로서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이 나타날 것이다. 주께서 예언하신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징조들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이 세상은 결국 다 불타 없어질 세상이다(벧후 3:7, 10-12).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세계 곧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림의 징조들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성경 교훈들만 힘써 행해야 한다.

 

9-23절, 핍박, 세계복음화, 환난, 거짓 기적들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공회들]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관리들, 통치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다섯 번째 징조로서, 예수께서는 핍박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주 예수의 제자들을 공회에 넘겨줄 것이다. 원문에 ‘공회’라는 복수명사는 유대인의 공회를 포함하여 법정들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사람들은 주 예수의 제자들을 회당에서 때릴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배당인 회당이 참된 성도를 핍박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관리들과 임금들 앞에 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심문을 받고 법정에 서는 것은 그들이 그 위정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전도할 기회가 될 것이다.

[10절]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여섯 번째 징조는 세계복음화이다.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핍박과 전도는 함께 이루어졌다. ‘만국’이라는 원어(판타 타 에드네)는 마태복음 28:19의 ‘모든 족속’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민족과 국가에 전파되어야 한다. 물론 세계복음화는 세계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세계의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복음화는 교회의 최대의 임무, 곧 교회의 사명이다.

[11절]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주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끌려 법정들에 서게 될 것인데, 그들은 그때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염려할 것이 없다. 그들은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말하는 이는 그들이 아니고 성령이시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설교자들과 핍박당할 전도자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다.

[12절]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핍박은 가족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한 식구가 다른 식구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6). 신자들은 가족 관계를 존중하지만 또한 그것을 초월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일하게 절대적 차원의 일이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고 영생을 줄 수 있는 자는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과 힘과 위로이시다.

[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핍박할 것이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따르는 길은 외로운 길이며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가야 할 길이다. 그렇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인내를 포함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참고 견디는 자들은 영광에 이를 것이다.

[14절]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전통사본)70)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다니엘서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은 세 구절에 언급 혹은 암시되어 있다. 9:27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할 것을 가리킨 예언이라고 본다. 다니엘 9장은 메시아의 강림과 죽음을 예언한 장이다. 11:31과 12:11은 수리아 왕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울 것을 가리킨 예언이라고 본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이방인들의 신상을 가리키며, ‘서지 못할 곳’은 성전을 가리킨다고 본다. 마태복음 본문에는 ‘거룩한 곳’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들과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책에 증거되어 있다.71) 그러나 다니엘에 예언된 사건들은 장차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의 모형이었다고 보인다. 확실히, 주 예수님의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 때 뿐만 아니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에도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게 될 것을 보인다. 그것은 마태, 마가 복음서들에 증거된 주님의 예언의 문맥에서 분명하다. 또한 이 사실은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주의 재림 직전에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 안에서 하나님처럼 높일 것을 예언한 것과도 일치한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예언하시면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쓴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 멸망 시 제자들이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 지방 북쪽의 펠라라는 곳으로 도피하였다고 전한다.72)

[15-20절]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으로](전통사본)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너희의 피함이](전통사본)73)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創初)[창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예루살렘 멸망의 때에 주의 제자들은 지체치 말고 도피하여야 했다. 성도들은 환난의 때에 롯의 아내처럼 세상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고 도피해야 한다. 그 환난은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이다. 임신과 출산과 아기 양육은 귀하고 복된 일이지만, 환난이 올 때 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또 주께서는 “너희의 피함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겨울’이라는 원어(케이몬)는 일차적으로 ‘폭설’이라는 뜻을 가진다. 겨울에나 폭설 중에 피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환난 날의 계절과 일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그 환난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환난일 것이다. 그러나 주의 백성은 그것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환난 기간의 길이나 그 혹독함의 정도는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시대에도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가 감당할 만큼 환난을 주실 것이다. 만일 그가 이런 배려를 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그 환난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실 것이다.

[21-23절]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주께서는 앞에서 거짓 목사들의 미혹에 대해 언급하셨었다(5, 6절). 그는 이번에는 거짓 목사들이 기적을 행하면서 속일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은 기적들을 통해 택하신 백성이라도 속이려고 할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거짓 목사들의 속이는 말에 빠지지 않으려면, 조심하며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사탄이 주는 거짓된 기적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기적을 좋아하지 말아야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하신 모든 말씀과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만 붙들고 바른 교리를 믿고 바른 생활교훈을 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장차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이다.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며, 이 세상은 마침내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 일이 있기 전에 온 세상에는 대환난이 있을 것이다. 본문은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징조로서 다섯 번째는 핍박이며, 여섯 번째는 세계복음화이며, 일곱 번째는 거짓 기적들을 든다. 우리는 사람들의 핍박을 각오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 핍박은 때때로 우리 가족들을 통해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 관계를 초월한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핍박 중에서라도 오직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한다. 세계복음화는 신약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임무이며 사명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가치와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하고 장차 임할 천국에 가치와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장차 세상에 임할 대환난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이 세상의 종말과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거기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흠과 점이 없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있다면, 우리는 마지막 대환난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과 인간 역사의 섭리자이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성경을 늘 읽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소망하며 생활함으로써, 즉 성경적 믿음과 삶으로 세상의 종말과 대환난과 주의 재림과 영광의 천국을 준비해야 한다.

 

24-37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24-26절] 그때에[그 날들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구름 가운데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대환난의 날은 여러 날들일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의 미혹과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핍박, 배교가 있을 것이며, 그런 후 거기에 더하여 천체의 변화가 있고 그 오랜 세월의 규칙성이 흔들릴 것이다. 해는 어두워지며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때에 주께서 구름 가운데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다니엘 7:13-14는, 장차 심판 권세를 가지고 오실 자를 ‘인자 같은 이’로 묘사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건이다. 그의 재림 때에 하늘에는 구름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영광스런 사건일 것이다. 그는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그가 처음 세상에 오실 때는 가난한 가정에 연약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고, 따뜻한 방이나 포근한 병원 침대에서가 아니고 춥고 더럽고 냄새났을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의 먹이통 속에 누이셨었다. 그는 비천한 종,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자로서 큰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일 것이다. 사람들은 재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떤 불신앙적 신학자들의 생각대로 ‘세상의 기독교화(化)’에 대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세상 종말이 가까울수록 세상이 더 악화될 것을 계시한다. 재림의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다.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땅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사도행전 1:11, “[천사가]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심을 볼 것이다. 요한계시록 1:7은,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말하였다.

[27절]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에 택한 백성들을 모으실 것이다. 신약 성도들은 하늘로 끌려 올라갈 것이다. 이것이 소위 ‘휴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택자들을 모으시기 위함이다. 죽은 자들은 부활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들은 변화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악인들의 심판을 위해서이다. 사도신경의 표현대로, 그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28-31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人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이런 징조들, 즉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세계복음화, 배교, 거짓 기적주의, 핍박 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은 비록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을 포함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 세대’는 30년 혹은 길게 잡아 100년을 의미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내세’와 대조해 ‘이 시대’ 혹은 ‘이 세상’을 의미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역사상 주후 70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대 사건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 삶을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해야 한다.

[32-33절]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깨어 있어 기도하라](전통본문).74)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세상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반드시 올 것이지만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아들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물론 이 말씀을 그의 신성(神性)의 면에서 생각할 수 없고, 단지 그의 인성(人性)의 면에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는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본질상 동일하시지만,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본질상 동일하시다. 사람의 지식은 제한적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의 날을 예언했던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안식교도들, 또 어떤 휴거론자들은 마귀에게 속은 자들이요 또 남들을 속이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또, “주의하라, 깨어 있어 기도하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33절 이하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다(33, 35, 37절).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4-35절]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깨어 있다’는 말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구원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이며, 산 자들은 이제 깨어 있어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생활이다.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은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며(살후 3:2) 하나님의 은혜이다. 소망은 신자의 힘과 기쁨의 원천이며, 사랑은 생명의 표이며 열매이다.

[36-37절]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주의 재림은 많은 이들에게 갑작스러울 것이다. 성경은 주의 재림의 갑작스러움을 ‘도적같이’라는 말로 표현했다(마 24:43; 살전 5:2). 깨어 있지 못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잠잔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우상숭배나 돈 사랑, 세상 사랑, 쾌락 사랑, 또 온갖 불의와 미움, 음란, 거짓 등에 빠지는 것이 잠자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깨어 있으라’는 주의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이며 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구원을 받아야 하며, 구원받은 산 자들은 불경건과 부도덕 가운데 잠들지 말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의 재림 직전에 마지막 대환난이 있을 것이며 그 마지막 대환난 후에 그는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실 것이며, 큰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그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늘 이끝에서 하늘 저끝까지 모으실 것이다. 그때 죽은 성도들은 부활할 것이며 살아 있는 성도들은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다 영생할 몸을 얻을 것이며 복되고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악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될 것이다. 재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행위대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며 특히 악인들을 엄하게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고 낙심하지 말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행하며 또 이 구원의 복음을 두루 전파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징조들과 더불어 확실히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세상의 종말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들이란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배교, 세계복음화, 핍박, 거짓된 기적주의 등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징조들을 볼 때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 ‘아, 세상의 종말이 가깝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지고 있구나!’ 하고 세상의 종말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함을 느끼고 잘 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그 날과 그때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 세상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은 천사들이나 심지어 인간 예수님 자신에게도 감추인--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하나님의 비밀이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영원한 형벌의 멸망이 될 것이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또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모든 불경건과 죄를 멀리하고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깨어 있는 생활이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항상 깨어 있는 생활이다.

 

14장: 잡히심

1-9절, 값진 향유를 부음

[1-2절]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은밀히]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民擾)[백성의 소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 14일 저녁이었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 간이었다(레 23:5-6). 이 두 절기는 때때로 동일시되기도 한다(눅 22:1).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때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대문틀 위 아래와 양옆 기둥에 발랐다. 유월절 어린양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은밀하게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며 백성의 소요가 날지 모르니 명절에는 말자고 말하였다. 그들은 명절에 모여 들 군중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명절을 피하여 이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만일 예수께 무슨 죽일 죄가 있었다면, 정당한 절차를 따라 재판을 통해 처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 악한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사건은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사건과 같은 사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고 이틀 전에 이 일이 있었다. 향유를 부은 여자는 나사로의 여형제 마리아일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께 부었다. ‘옥합’은 석고병을 말한다. 본문은 그 여자가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말하고, 요한복음은 그의 발에 부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머리와 발에 다 부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가 심지어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증거한다.

그 향유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본문 5절과 요한복음 12:5에는 그것이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300일 품삯에 해당하고, 하루 품삯을 10만원만 치면 약 3,000만원이 되는 가치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 여자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결혼을 위해 준비해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것은 자기의 몸에 바르기 위해, 자기의 육신적 아름다움과 단장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생각이 달라졌음에 틀림없다. 우선, 그는 세상적 가치가 헛됨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가 마리아라면, 그는 남자 형제의 병과 죽음과 회생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세상의 것들이 무가치함을 알게 된다. 그것은 세상의 금은보물이 자기 목숨을 건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300데나리온이 큰 것이지만, 이제 그 여자는 세상적 가치관을 넘어서게 되었다.

더욱이, 그 여자는 그 향유가 자기에게보다 예수님께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님을 참으로 귀한 분으로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자기 남자 형제를 병과 죽음에서 건져내 주신 은인이었다. 그 사실만 생각해도 그 향유의 옥합은 결코 큰 보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병원들에서 못 고치던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준 병원에 몇 억원을 기증한 어떤 아버지의 보답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뿐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매우 값진 향유의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예수께 대해 가장 숭앙하고 가장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3천만원짜리 향유 옥합을 깨뜨려 드릴 만큼 귀한 분이셨다. 그 여자의 행동은 예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이기적 생각이나 외식적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그 향유가 자기 같은 죄인이 바르기에 합당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부어드리기에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4-5절]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 여자가 깨뜨려 부은 그 값비싼 향유가 쓸데없이 낭비된 것이었는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여자를 책망한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고 돈궤를 맡은 자로서 거기 든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기 때문이었다.

[6-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아니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보신다. 그는 선한 동기로 하는 행위를 귀히 보신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해심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다. 물론 가난은 반드시 환경이나 사회구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고, 많은 경우 게으름과 낭비와 과도한 욕심 때문에 온다. 우리는 쉽게 부자 되려 하지 말고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선한 일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아무 때라도 그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몇 일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다.

[8-9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 여자가 자기의 가진 가장 귀한 보화를 주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였을 때 우연하게도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한 일을 귀하게 여기시고 칭찬하셨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고, 그 여자의 한 일이 복음이 전파될 세상의 모든 곳에서 알려져야 할 모범이라고 암시하셨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많은 구제보다 귀한 일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에서 나온 지극히 높은 숭앙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보다 귀하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지식을 가지고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헌신해야 한다. 비록 우리에게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 옥합 같은 것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 즉 우리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줄 아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오늘날 하나님 사랑, 예수님 사랑은 일차적으로 그의 복음 사역, 영혼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참된 교회를 건립하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 물질 낭비가 아니고, 우리 인생의 삶 중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향유 옥합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가장 귀한 것, 곧 우리의 재능, 우리의 시간, 우리의 힘, 우리의 돈, 우리 목숨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원하시는 일을 위해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고 한 명의 영혼을 구원하고 참된 교회를 건립하고 그 교회를 부흥 발전시키는 일을 위해 즐거이 드려야 한다.

 

10-21절, 예수님을 배신할 자

[10-11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 중 열두 명의 수에 든 자이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들었고 그의 선한 인품과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다. 그는 전도하기 위하여 여러 동네들로 보냄을 받았다. 그는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아 병자들을 고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자가 되었다. 확실히, 그는 참 믿음과 회개로 나타나는 구원의 은혜는 받지 못했다. 유다가 선생님을 배신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돈을 사랑했고 돈을 훔치곤 했었다. 요한복음 12:6,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6:64) 마침내 마귀의 이끌림을 받았다고 증거한다(13:2).

[12-14절]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전통사본에는 없음)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이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간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루를 해질 때부터 다음 해질 때까지로 보기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의 첫날은 오늘날 우리의 개념으로 보면 같은 날 저녁이다. 그 두 날은 때때로 동일시되었다.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는 누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눅 22: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신 것은 그의 신적 지식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경제적으로 유여하지 못하셨다. 그는 많은 돈을 저축하거나 좋은 집을 구입하려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부하려 하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생각하는 것도 최선의 생각은 아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자립적이고 독립적이게 키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단지 자신을 위해서나 자녀들을 위해서만 쓰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참된 교회의 건립과 발전을 위해 써야 할 것이다.

[15-16절]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다. 하나님께 헌신된 한 성도를 통해 큰 다락방이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종들의 필요한 것을 준비하신다. 이것은 주의 종들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우리는 의식주를 염려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바로 살고 죄 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17-20절]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배신하리라] 하신대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집에 들어가 예비된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저녁식사를 준비하였다. 날이 저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함께 앉아 식사를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배신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와 함께 식사하던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주님을 배신하고 원수들을 도와 주님이 잡히게 할 것이다. ‘내니이까?’라는 원어(메 티 에고)는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이다. 이렇게 배신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한 명의 마음은 진실히 예수님을 믿고 순종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자이며 마침내 그를 배신할 자이었다.

[21절] 인자(人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세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의 길을 가실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피흘리실 것이 예표되어 있거나 예언되어 있다.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피흘려 죽으심을 예표하였다. 또 성막 제도에는 제물의 죽임과 피흘림 그리고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림 등이 있었다. 이것도 메시아의 죽으심과 피흘리심을 예표했다. 구약성경에는 예표적, 상징적 사건들과 말씀들 뿐만 아니라, 또한 직접적인 분명한 예언들도 있었다.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뱀은 여자와 원수가 되고 그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며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어떻게 고난을 통해 원수 마귀를 이기실 것인가를 암시하였다. 특히, 이사야 53장 전체는 메시아의 고난과 죽으심을 예언한 놀라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대로 죽음의 길을 가셔야 했다. 그것은 그의 길이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어 있었고 그 작정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누가복음 22:22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간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러나 그를 배신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책임의 관계를 가르쳐 준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는 그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람의 행위와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하나님의 작정 진리는 숙명론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으므로 사람이 무슨 일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사람의 책임 있는 행위를 긍정하고 요청한다.

구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예정과 선택이 제1원인이지만, 구원받는 사람의 회개와 믿음과 순종은 당연히 요청된다. 회개하고 믿지 않으면 또 순종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결코 사람의 행위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택과 예정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다고 본다. 악인들의 악행도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 악행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가룟 유다의 악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 악에 대한 책임은 가룟 유다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사람의 악행에 대한 책임의 관계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일들에 있어서 주권을 가지고 행하시고 이루신다는 사실과, 사람은 자기 악한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행도 주권적으로 작정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주권적 통치자가 없고 오직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물건이 되고 말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가치가 단순히 출생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사람으로 출생했다는 것이 반드시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았다. 그에게 있어서 사람으로 출생했다는 사실이 복이 아니고 오히려 화이었다. 그것은 특히 사후에 심판과 지옥 형벌이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히 9:27; 계 21:8).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사람의 가치는 사람이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섬기며 그의 뜻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데 있다. 경건과 도덕성이 사람을 가치 있게 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긍휼과 은혜로 선택하신 자들은 그런 삶을 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확증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다가 주님을 배신하였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돈을 받기로 약속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그는 평소에 중생한 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결국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 영혼이 멸망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고 또 돈을 땅에 쌓는 자가 되지 말고 하늘에 쌓는 자,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책임 간의 관계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하나 그 둘을 다 인정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 속에서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악행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 행위의 책임을 져야 한다.

셋째로, 악을 행하는 자는 차라리 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사람의 가치는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사람이 아무리 존귀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고 불의하고 악하게 사는 자는 가치가 없다.

 

22-31절, 주의 몸, 주의 피, 베드로의 결심

[22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받아 먹으라].75)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들이 유월절 저녁식사를 할 때에 예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 말씀은 그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였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 떡 속에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비유적, 상징적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 떡은 분명히 실제의 떡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떡을 떼어 나누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찢겨지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전에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신 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요 6:51). 떡은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의 기력을 주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자신을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양식이 됨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물론 영적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내일 십자가 위에 못박혀 찢기시고 상하실 그의 몸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실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을 것이다.

[23-24절]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새 언약]76)의 피니라.

예수께서는 또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그것을 마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 이 말씀도 역시 그 포도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된다거나 그 포도즙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즉 그 포도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했다. 제자들은 실제로 포도즙을 받아 마셨지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마신 것과 같은 뜻이 있었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이 참 양식인 것처럼 자신의 피도 참 음료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요 6:55). 피는 생명이다. 피가 없으면 생명체는 죽는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에서 피는 죄를 속(贖)하는 뜻을 가졌다(레 17:1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를 상징했다. 그것은 속죄의 피이었다. 유월절 저녁식탁에서의 포도즙은 그런 의미를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해, 그들의 죄사함과 영생을 위해 흘리는 새 언약의 피이시며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는 피이시다.

[25-26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주 예수께서는 또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요 14:6). 천국에서는 즐거운 잔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주님과 함께 즐거이 음식을 들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 후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갔다.

[27-28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것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구약 스가랴 13:7에는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시 살아나실 것과 그런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갈릴리에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갈릴리에서 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전도자의 사명을 처음 받았던 갈릴리에서 그들의 사명감을 다시 새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29-31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주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연약하여 실패할 것을 알고 계셨다. 주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두 번의 고백은 진심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죽을 각오를 가졌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자는 훌륭한 제자임에 틀림없다. 베드로만 그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했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50절). 또 베드로는 그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일은 모든 성도들 곧 우리의 의지의 연약함을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성찬식을 제정하셨다. 그는 떡을 나누시며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고 잔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은 택한 백성을 대속(代贖)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성찬식을 통해 증거되었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이제 그를 위해 살며 충성해야 한다.

둘째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고 따르겠다고 고백했으나, 그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연약함이다. 그들의 결심과 고백은 진실했을지라도, 그 결심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자신을 의지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며 의지하며 행해야 한다.

 

32-52절,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잡히심

[32-34절]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헤 프쉬케 무)[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성밖 골짜기 너머에 있는 동산이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자주 기도하셨고 열두 제자들을 세우실 때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눅 6:12-13).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때 그는 심히 놀라며 슬퍼하시며 “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예수님의 고통스런 모습을 본다. 십자가 형틀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도 그 위기의 밤을 잘 이기려면 깨어 기도해야 했다.

[35-36절]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바’라는 말(!Abba')은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잔’은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리는 고난을 말한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소원은 인간 예수님의 마음의 불안과 고통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그의 순종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사람의 뜻보다 훨씬 선하다. 그것은 세상에서 최선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

[37-38절]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시간]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토 프뉴마)[영]에는 원이로되 육신(헤 사르크스)[몸]이 약하도다 하시고.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깨어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면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깨어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 “영은 원하되 몸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영의 활동은 마음으로 표현되므로 이것은 영과 몸의 대조이며 또한 마음과 몸, 즉 심신(心身)의 대조이다.

[39-42절]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人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께서는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자고 있었다. 그 밤에 그의 기도는 동일한 내용이었다. 그 기도는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아마 약 세 시간의 기도이었을 것이다. 그가 한번의 기도가 끝날 때마다 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3-47절]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많은] 무리가 검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랍비여, 랍비여](전통사본)77)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인간 관계에서 입맞춤은 일반적으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지만,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속이는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파송된 군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확실히 잡게 하는 신호이었다. 요한복음은 곁에 섰던 자 중에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린 자가 베드로이었고 그 종의 이름이 말고임을 증거하였다(요 18:10).

[48-50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큰 죄인처럼 잡히는 일이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성경에 능통하셨다. 또 그의 생애는 성경의 예언과 예표를 이루는 생애이었다. 우리도 어떤 점에서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능통하기를 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애도 성경의 교훈을 행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애가 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잡히셨다. 그때 그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했다. 그것은 제자들의 진심의 결심대로 되지 않았고 “너희가 다 이 밤에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된 일이었다. 그들은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고백했었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었다(31절). 그러나 그 위협과 공포가 있었던 현장에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하였다.

[51-52절]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청년들이 그를 잡자](전통본문)78)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 청년은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 중요한 책에 그 의미 없어 보이는 부끄러운 일을 기록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가는 유월절 식사 후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까지 왔던 것 같다. 여하튼 베 천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는 말은 그때의 두려운 분위기를 증거해준다.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라도 그런 때에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라도 그런 위기 상황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시며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영은 원하지만 몸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도 영은 원하지만, 몸이 약하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깨어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의 뻔뻔스런 배신과 거짓된 입맞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도망침을 경험하셨다. 그것은 마음의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연약한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의 고통이다. 목회자는 어느 정도 그런 마음의 고통을 경험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배반하지 말고 고난을 각오하고 인내하며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53-72절, 공회에서 심문 받으심, 베드로의 부인(否認)

[53-54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이었다(마 26:57).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산헤드린 공회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최고회의의 의원들이었다. 그 새벽에 그들이 다 모인 것을 보면, 그 회의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이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소집된 계획된 회의이었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의인(義人)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죽이려 할 정도로 극도로 부패해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좇았다. 그는 제자들 중에 그래도 용감한 편이었다. 비록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지는 못했으나 멀찍이라도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갔고 직원들과 함께 불을 쬐었다. 때는 이른봄이었고 밤 날씨는 쌀쌀했던 것 같다.

[55-59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정죄할 증거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을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14:1의 증거대로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뜻을 정하였고 계획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 대해 거짓 증거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그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만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거짓되이 정죄하려 하였고 거짓 증인들은 그를 거짓되이 비난했다. 그러나 거짓 증거는 마귀의 죄이며(요 8:44) 제9계명을 범하는 죄요 지옥갈 만한 큰 죄요(계 21:8) 천국 들어가지 못할 죄이다(계 21:27; 22:15). 잠언 19:5는,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고 말하였다.

[60-62절]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人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서 자신의 신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하여 잠잠하실 수 없었다. 그 질문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묻는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꼭 필요한 때에 말씀하셔야 했던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신 것이다.

“너희는 인자(人子)가 권능자의 오른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말씀과 일치한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니엘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人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모든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하늘의 구름 가운데서 재림하시는 것을 볼 것이다(계 1:7).

[63-64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예수님의 증언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으며 그 증언이 참람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한 증거라고 간주하였다. 공회원들도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다. 누가복음에 보면,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그들의 결의에 반대하였다(눅 23:50-51).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한 것은 이성적으로 바른 판단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실 수 없다는 증거를 제시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그가 무슨 죄를 지으셨다든지, 그에게 어떤 거짓된 일이 있으셨다든지, 혹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는 등의 증거들이 있어야 하였으나 그런 증거들은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본장 55절은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부당한 재판과 정죄를 받으셨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는 아무런 반증(反證)도 없이 그를 정죄한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이며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주님 자신의 분명한 증언이 있다. 주께서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또한 그가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각종 병자들, 예를 들어 나병, 중풍병, 열병, 귀신 들림, 소경, 혈루증, 벙어리, 손 마른 병, 절뚝발이 등을 고치셨고 또 죽은 자를 살리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물 위로 걸어오셨고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고 또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셨다. 더욱이,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이런 증거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65절]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고 그를 멸시하였다. 불경건하고 악한 세상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와 같이 학대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전에 제자들이 선생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마 10:24). 그러므로 그의 제자된 우리도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매맞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66-68절]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婢子)[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마침 닭이 울더라.]79)

베드로의 부인(否認)은 육신의 목숨을 위한 비겁한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이전의 그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행위이었다. 그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저버렸다. 그것은 사람의 부끄러운 연약함이었다. 3년 간의 제자훈련이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킬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마침 닭이 울었다. 이것은 첫 번째 닭의 울음이었다.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후 앞뜰로 나갔다. 앞뜰은 입구 쪽을 말한다. 그것은 그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69-70절] 비자[그 여종](원문)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너는 갈릴리 사람이며 네 말씨가 그러하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전통본문).80)

‘그 여종’은 처음 여종을 가리켰다고 본다. 두 번째 말한 사람에 대해 복음서들은 ‘다른 여종’(마 26:71),81) ‘다른 사람’(눅 22:58),82) ‘사람들’(요 18:25) 등 다양하게 말한다. 두 번째는 그 처음 여종을 포함하여 다른 한 여종과 또 남자들이 함께 말했다고 보인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했다. “너는 갈릴리 사람이며 네 말씨가 그러하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마태와 마가의 증거는 동일하지만, 누가는 “또 한 사람이 말했다”고 증거하고(눅 22:59), 요한은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말했다”고 증거한다(요 18:26). 이때도,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말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 특히 대제사장의 종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71-72절]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였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참으로 철저한 부인(否認), 철저한 비겁과 불신실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큰 죄이었다. 그때에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다. 그는 심히 통곡하였다(마태, 누가).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반증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제시하지도 못하면서도 그를 정죄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공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그의 직접적인 증거 외에도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사람이 이 많은 증거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증거를 통해 그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자일 것이다. 구원받을 자는 성경의 증거들을 통해 그를 믿는다. 우리는 그를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학대를 당하셨다. 유대인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해놓은 상태에서 그를 부당하게 심문하고 아무런 정당한 증거들도 없이 그를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또 손바닥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고난과 핍박의 길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마귀와 악령들은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그리로 가는 자들은 많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도 많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자신을 살펴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면서, 그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

셋째로, 사도 베드로는 그 날 밤 한 여종과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그것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부인한 것은 큰 죄이며 참으로 비겁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써 충성되고 능력 있는 증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주를 증거했다(행 4:8, 19-20, 31; 5:40-42). 오늘 우리도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써 죽도록 충성하는 증거자들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15장: 죽으심

1-28절, 빌라도에게 정죄되심, 십자가에 못박히심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유대인들의 공회는 이른 새벽에 모였다(눅 22:66). 대제사장들은 그 새벽에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함께 의논하고 예수님을 정죄한 후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예수께서는 죄수처럼 결박을 당한 채 총독의 법정에 서셨다. 당시에 유다 나라는 로마 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로마 총독의 판결이 필요하였다. 특히 사형의 경우 그러하였다. 요한복음 18:31에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다.

[2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길 때 정치적 죄목을 걸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로마 제국에서는 가이사 황제가 왕이며 또 그가 유대 나라에 세운 헤롯 외에 다른 왕이 있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면 그것은 가이사를 대항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19:12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은 과연 이런 논리로 빌라도를 몰아붙였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공식적인 재판 자리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임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네 말이 옳도다.” 유대인 공회 앞에서의 그의 증언이 중요했듯이, 빌라도 법정 앞에서의 그의 증언도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는 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유대인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믿고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3-5절]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악한 자들은 의로우신 예수께 대해 많은 비난거리를 만들어 빌라도에게 말했지만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즉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셨다. 빌라도는 그것을 기이히 여겼다. 사실, 저 악한 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뜻을 정하였다.

[6-10절]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前例)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소리치며]83)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로 재판정에 오게 되었고 실상 죄가 없음을 알았고 그를 놓아주기를 원하였다.

[11-14절]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선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못박으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못박으소서] 하는지라.

무리들은 참으로 무지하고 무정하였고 불의하고 배은망덕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권력자들 앞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못박게] 넘겨주니라.

총독 빌라도는 백성의 여론에 몰려 불의하고 비양심적인 판결을 내렸다. 그는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잘못된 판결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와 미움과 악함, 무리들의 무지, 무정, 배은망덕, 기회주의,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불의하고 비양심적인 판결 때문에 정죄되셨다. 그는 악인들의 죄들 때문에 정죄되셨다. 죄 없으신 그가 죄인들 때문에 정죄되셨다. 그 대신에, 살인자 바라바가 풀려났다. 주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그 대신, 한 죄인이 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16-20절]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조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께서는 총독 빌라도에 의해 정죄되시고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 군인들에게 조롱을 당하셨다. 자색 옷은 왕의 복장을, 가시 면류관은 왕의 금관을 흉내낸 것이라고 보인다. 예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를 조롱하였다. 조롱을 다한 후 군인들은 그에게서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그를 끌고 나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불경건한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조롱을 당하셨다.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마 27:32 각주를 참조)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십자가는 거기에 달릴 죄수가 사형장까지 지고 가는 것이 로마의 사형 집행 규정이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19:17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나오셨다. 십자가 형틀은 크고 무거워서 예수께서 혼자 지시기에 힘드셨을 것이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갔다고 보인다. 그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잡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을 같이 지었다고 본다. 이 구레네 시몬 외에 그 십자가를 자원하여 함께 질 제자가 하나도 없었다!

본문이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증거하는 것은 뜻이 있어 보인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로마서 16:13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말했는데, 그 루포가 아마 본문의 루포일지 모른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는 그 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의 자녀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불평스럽게 억지로 했을 것 같은 그 봉사가 자신과 온 가족이 예수님 믿고 구원의 복을 받는 기회가 된 것이다.

[22-23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84)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해골의 곳’이라는 뜻인 ‘골고다’는 그 언덕의 모양이 사람의 머리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인다. 군인들은 예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 마태는 ‘쓸개 탄 포도주85)’라고 기록하였다(마 27:34). 그것은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그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주는 ‘쓰고 신 포도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포도주를 받지 않으셨다. 우리를 위해 자원함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그는 십자가에서 당할 고통을 피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24절]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당시의 십자가 처형 방식은 양팔과 손을 펴서 각각 못박고 양발을 포개어 못을 박는 것이었다고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눅 24:39), 그는 분명히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셨다. 군인들은 또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다 취했다. 예수께서 이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겉옷과 속옷을 다 빼앗기신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시편 22:16, 18은,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예언하였다.

[25-26절] 때가 제3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마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각을 증거했다. ‘제3시’는 오늘날의 아침 9시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새벽에 유대인의 공회에서 심문받으시고 빌라도 법정으로 이끌려 가셨다(마 27:1; 막 15:1; 요 18:28).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시각이 제6시라고 기록한다(요 19:14). 그것은 오늘날의 시간과 같이 오전 6시를 가리킬 것이다. 그의 십자가 형틀 위에는 히브리어와 로마어[라틴어]와 헬라어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죄패가 달려 있었다(요 19:20; 눅 23:38 전통본문).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메시아이심은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27-28절]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가 불법자들과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는 성경이 응하였더라](전통본문).86)

예수께서는 두 강도들 사이에 죄인들 중 한 사람처럼 나무에 달리셨다. 28절(전통본문)은 이사야 53:12에 예언된 말씀이다. 의인이신 예수께서 극악한 죄인처럼 취급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곧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속죄제물이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증거하셨고 그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여졌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하신 메시아이시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유대인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지옥 형벌을 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 무리들의 배은망덕, 빌라도의 불의하고 비겁한 재판으로 정죄되셨고, 로마 군병들은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 밷으며 조롱하였고 그는 친히 십자가 형틀을 지고 사형장으로 나가셨고 강도들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 무리들의 배은망덕, 로마 총독 빌라도의 불의하고 비겁한 판결 등은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들로부터 씻음을 받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살인자 바라바는 놓여났고,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갔다가 후에 그와 그의 아들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택자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고 그의 죽음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죽음이 되었다.

 

29-47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장사되심

[29-30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예수님을]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이것이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할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시편 22:6-8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이었다. 거기에 말씀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31-32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조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예수님을] 욕하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긴다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이처럼 무정하고 비양심적이며 사악할 수 있는가. 그들은 지금이라도 후회하며 예수님을 측은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종교적 형식과 사람의 인격은 근본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다. 종교적 형식을 가진 자라도 이렇게 악한 자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격의 변화이다. 구원은 죄인들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좌우편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도 처음에는 둘 다 예수님을 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증거대로, 그 둘 중 한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회개했다(눅 23:39-43). 이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강도라도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시간과 장소는 자유롭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시간에도 또 한 명의 죄인을 구원하셨다.

[33절] 제6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6시부터 제9시까지, 즉 오늘날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 어두움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슬픈 일, 즉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일을 행하였고 어두움의 권세가 이긴 것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증거할 것이다. 또 그 어두움은 하나님의 크신 슬픔과 노여움을 증거했고, 또 아마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무서운 재앙과 불행을 예시할지도 모른다.

[34절] 제9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리마](전통사본)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에게만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불에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셨으나,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틀에서 건져주시지 않았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를 담당하신 속죄제물이셨다.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요 1:29). 구약시대에 행해져 왔던 짐승 제사 제도는 메시아의 대리적 속죄를 예시(豫示)했다. 구약의 짐승 제물들은 메시아의 모형으로 죄인들을 대신하여 피흘려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졌던 것이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예언하였다(사 53:5-6).

예수님의 고난은 속죄의 고난이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증거했고(고후 5:21),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고 말했다(갈 3:13). 하나님의 버리심,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깊은 의미가 있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영원히 연합된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지만, 그는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당할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셨다. 그것은 죄인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35-38절]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하신 말씀은,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을 것이다(요 19:3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택자들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우리의 완전한 대속(代贖)을 이루셨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것은 이제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0:19-20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요 14:6) 천하 인간이 그로 인해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이시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히 4:16).

[39절] 예수를[예수님을]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외치시며]87)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고백이었다. 진리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세상에 다 함께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얻는 사람이 있고 단지 죄의 낙이나 누리다가 허무하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가 있다.

[40-41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남자들이 대부분 다 도망쳐버린 때에도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인들이었다. 요한복음 19:25는 그 여자들 중에 그의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고 증거한다. 성경에 보면, 여자들은 때때로 남자들보다 열심과 충성된 마음이 더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며 복음 사역에 수고하고 협력한 일이 많았다(눅 8:2-3; 롬 16:1, 3, 6, 13).

본문에 언급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자로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아주셨고 그 병을 고쳐주셨다(눅 8:2). 그는 그 병을 고침 받은 후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고 섬겼다.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을 가리킨 것인지(막 6:3) 잘 모르겠다. 살로메는 마태복음 27장에 언급된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인들의 심정은 심한 슬픔 가운데서 아마 의분했을 것이다. 세상의 도덕 질서가 이렇게 짓밟혀도 되는가? 의인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일이 있어도 되는가 ? 그들은 또한 허탈했을 것이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추종한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끝났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은 불신앙적이고 무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나무랄 것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하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같이 살지 않고 현실만 보고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제자들이 그때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42-47절]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예수님을]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예수님] 둔 곳을 보더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아리마대 요셉을 예비하셨고 그를 사용하셨다. 요셉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했고 공회에서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다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 자이었다(눅 23:51). 그러나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요셉은 그의 시신을 장사 지내드리는 것이 그에게 대한 마지막 예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세마포를 샀고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다가 아마 물로 닦고 세마포로 쌌고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그를 장사했다(마 27:60). 예수님은 죽어 무덤에 내려가시기까지 심히 낮아지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셨다. 지나가는 자들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들도 그를 욕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죄인들의 조롱을 받으셨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를 져야 할 차례이다. 주께서는 의를 위해, 주님을 위해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10-12). 우리는 의를 위해, 주님을 위해 조롱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둘째로,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버림을 받으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자들의 대속(代贖)과 완전한 의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셨다. 성전의 휘장은 찢어졌고 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와 즐거이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는 죄 가운데 머물지 말고 그를 사랑하며 그의 말씀, 곧 성경의 모든 교훈에 순종해야 하고 오직 의와 선과 진리의 도구로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슬픔과 절망의 날에도 하나님을 위하는 자들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섬기며 따르던 자들과 그 외에도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제자들이 다 두려워 도망친 그때에 그들은 비록 멀리서지만 십자가를 주목하고 있었다. 또 존귀한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있었다. 그는 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자신의 새 바위 무덤에 장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그를 사용하셨다. 우리는 어두운 날에도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6장: 부활하심

1-14절, 여자들의 빈 무덤 확인, 제자들의 불신앙

[1절]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주간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이었고(막 15:42) 그 날 해 지기 전 무덤에 안치되셨다고 보인다. 해가 졌을 때 안식일이 시작되었고 그 안식일은 토요일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안식일이 지나매’라는 말은 토요일 저녁 해가 졌을 때를 가리킨다. 그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께 바르기 위해 향품을 샀다.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것은 부패하는 냄새를 방지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거룩한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부활에 대한 세 차례의 말씀(막 8:31; 9:31; 10:33-34)을 기억하지 못했다.

[2-5절] 안식 후 첫날(테스 미아스 삽바톤)[주간의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다른 복음서들도 그 새벽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그 무덤에 갔다고 증거한다(마 28:1; 눅 24:1, 10). 그들은 가면서 무덤 문의 심히 큰 돌 때문에 걱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와보니 그 돌이 벌써 굴려져 있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것은 천사가 한 일이었다(마 28:2-4).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유대 나라의 무덤은 흔히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여자들은 무덤 안에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오른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랐다. 흰옷을 입은 그 청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거룩한 천사이었다. 마태복음은,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돌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이 눈같이 희었다고 증거하였다(마 28:2).

누가복음은, 여자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고 이를 인해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있었다고 말한다(눅 24:3-4). 요한복음은 천사의 나타남에 대해서는 생략하였다. 종합해보면, 그 새벽에 여자들은 무덤 밖에서 천사가 돌 위에 앉은 것을 보았고 그의 말을 들었고, 또 무덤에 들어가서도 두 천사를 보았다. 하나는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증거했다.

[6절]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예수님을]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에게르데)[그가 일으킴을 받으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셨다. 그의 시신을 안치했던 그 자리에는 그의 시신이 없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그 무덤을 떠나셨다. 무덤이 빈 것은 그가 일으킴을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무덤은 제3일에 비었다. 여자들은 천사들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환각 현상이 아니었다. 환각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여러 명의 여자들이 천사의 증거하는 말을 들었고 그 빈 무덤을 확인하였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무덤은 심히 큰돌로 막았고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었고(마 27:64-66)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 시체를 훔쳐가 숨겨둔 후 그가 부활하였다고 용기 있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그의 나타나심들과 더불어 그의 부활에 대한 강력하고 확실한 증거이다.

[7-8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께서는 전에,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들이 처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던 그 갈릴리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고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여자들은 심히 놀라 떨며 나왔고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가복음은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했다고 증거하였다(눅 24:9-10). 여자들은 아마 처음에는 놀라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으나, 얼마 후 그 모든 일을 증거했던 것 같다.

[9-11절]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 --현재시제)[살아계신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한글개역성경 마가복음 16:9-20에 괄호가 쳐 있고 본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 없음”이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4세기에 쓰여진 두 개의 헬라어 사본들인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해 성경 원본의 본문을 추정한 잘못된 이론에 의한 설명이다. 그러나 9-20절의 본문은 절대 다수의 헬라어 사본들과 2-3세기에 기원한 고대의 역본들인 라틴어, 수리아어, 콥트어 역본들에 의해 확증된 본문으로서 확실히 신약성경 원본의 본문이다.88)

예수께서는 주간의 첫날 곧 일요일 이른 아침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흰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고 잠시 후 그의 뒤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요 20:11-18). 그는 가서 예수님과 함께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이 일을 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13절]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누가복음은 이 일을 자세히 증거한다(눅 24:13-35).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엠마오로 가고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이었다. ‘다른 모양으로’라는 말은 ‘부활 전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화로워진 모습이었다고 보인다. 그 제자들은 길에서 주님을 만나 이야기하며 동행하다가 날이 저물어 한 곳에 유하러 들어가서 음식을 먹을 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았다. 그들은 즉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 사실을 고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역시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14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 후에 열한 제자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고 있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을 책망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여자들이 전한 천사의 증거나 빈 무덤의 증거를 믿지 않았고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도 믿지 않았고 엠마오로 갔던 제자들의 증거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이성과 상식과 경험을 앞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부정하고 불신하였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책망받을 불신앙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제삼일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의 무덤은 비었다. 그는 일으킴을 받으셨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 새벽에 천사들은 그의 부활과 빈 무덤을 증거하였고 여자들은 그의 빈 무덤을 확인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 이후, 그는 하늘에 올라가셨고 지금도 살아계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가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최후의 확증이다. 그의 부활은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근거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지만, 그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최후의 확실한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전도의 원동력이며 성도들의 부활 소망의 근거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가 지금도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그를 전파해야 한다.

셋째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그의 부활은 이성적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는 무덤에 안치되신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뵈었으나, 제자들은 그의 증거를 믿지 않았다. 시골로 가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뵈었으나,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는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그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15-20절, 마지막 부탁, 승천하심

[15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태복음 끝부분에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마 28:19). 이것은 전도의 명령이다. 이것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다 찾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주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복음(福音)’(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내용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서 대속(代贖) 사역을 이루셨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의 명령은 교회에 주신 주 예수님의 최대의 명령이며 교회가 받은 최대의 임무이며 사명이다. 교회는 이 사명을 위해 힘쓰고 또 전도자들을 불러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주께서는 전도를 명령하시면서 몇 가지 내용을 지시하셨다. 첫째, 온 천하에 다니며 전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온 천하’(톤 코스몬 하판타)는 ‘온 세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아시아나 유럽이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나 어디든지 가야 한다. 세상에는 아직도 현대문명을 등지고 원시적 생활을 하고 있는 종족들이 있고 글자가 없는 종족들도 있고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되지 못하는 나라들과 지역들도 있다. 전도자들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은 어디든지 가야 한다. 우리나라 안에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농촌들과 섬들은 전도자들이 가야 할 우선적 전도 대상지역이다.

둘째, 만민에게 전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만민에게’라는 말(파세 테 크티세이)은 ‘모든 피조물, 즉 모든 사람에게’라는 뜻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有無識)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 누구에게나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전파하라’는 말(케룩사테)은 ‘선포하라’는 뜻이다. 전도는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니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전도는 의논하거나 토론하는 것이 아니고, 선포하는 것이다. 전도는 주고받는 형식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전도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고전 1:21).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제 사업이나 사회 활동을 하라고 명하지 않으셨고, 지옥 갈 영혼들에게 천국 가는 길,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길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예쁜 옷이나 맛있는 음식이 중요하지 않고 병의 치료가 중요하듯이, 지옥 갈 영혼들에게는 밥이나 옷보다 천국 가는 길, 영생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전도의 목적은 구원이다. 이 구원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며, 세례는 그 구원의 외적인 표와 확증이 된다. 믿음은 무엇인가? 우선, 믿음은 지식을 포함한다. 우리는 누구에 대해 잘 알 때 그를 신임할 수 있다. 그에 대해 더 알수록 그를 더욱 신임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믿음의 지식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셨다(요 20:30-31). 믿음은 또 동의하며 동감하며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믿음은 또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18). 믿음은 행위와 구별되지만(롬 4:5), 참된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뜻한다. 죄가 사람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로부터의 구원은 그 근본 문제의 해결이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 문제의 해결은 또한 죽음의 문제의 해결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또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지만 죄사함이 있은즉 영원한 생명도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증거하였다(롬 6:23). 또 그 영생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복을 포함한다. 악인에게는 심판의 부활이 있고 영원한 지옥이 있다. 그러나 구원은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표적들은 사도시대에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었던 것들이다. 그것들은 사도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며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에, 즉 사도시대 이후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으므로 중단되었다고 본다.

[19절] 주 (예수)(전통사본에는 없음)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주께서는 다른 복음서에 보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임을 설명해주셨고 또 이 구원의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천국으로 올리우셨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들에 대해 생략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 잘 증거되어 있다. 마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증거한다. 주 예수님의 승천도 그의 부활의 한 중요한 증거이다. 그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승천할 수도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셨고 또 승천하셨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승천에 대해 자세하게 증거하였다.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승천하신 장소는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감람원이라는 산이었다(행 1:12).

주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것은 성경 여러 곳에 증거되어 있다(롬 8:34; 엡 1:20; 골 3:1;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 주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가진 자로서 교회와 온 세상을 다스리심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20절]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아멘](전통사본).89)

주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고 그의 왕권을 행사하시기 때문에, 그는 제자들을 도우시고 역사하셨다. 그는 사도시대에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말씀을 확증하셨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이 있었다(히 2:3-4). 그러나 신약성경이 다 기록된 후에는 기적들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기적들이나 초자연적 은사들을 구할 것이 아니고 열심히 신구약 66권의 성경을 읽고 배우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는 기적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사는 종교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기적을 행한 역사가 아니고 이미 확증된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새 삶을 산 역사이었다. 기적들이 없어서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거나 확장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요한 것은, 성경에 증거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믿고 바로 전하며 거기에 합당한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이다.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전도의 사명을 깨닫고 힘써야 하고, 교회는 또 전도자들을 불러 바르게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둘째로, 오늘날 우리는 초자연적 기적들을 의존하지 말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택한 죄인들을 다 구원해야 한다(고전 1:22-24).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며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요 20:31). 예수께서는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셋째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사도시대에 여러 가지 기적들로 제자들과 함께 역사하셨다. 비록 우리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주께서 더 이상 기적들로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믿지만,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주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경말씀과 함께 또 그 말씀을 통해 오늘날에도 역사하신다.

 

 

미주

1) Byz A W vgms copbo-mss Irenaeuslat2/3 등.

2) Byz A vgcl 등에 있음.

3) Byz A (D) W (ita b d vg syrp copsa) arm 등이 그러함.

4) Byz A D W ita d vg syrp copbo-pt 등에 있음.

5) Byz A C it vg 등에 있음.

6) Byz A C D ita d e ff2 vg syrp copsa-mss bo-ms arm 등이 그러함.

7) Byz C 등이 그러함.

8) Byz W ita vgmss copsa-mss bo-pt 등에 있음.

9) Byz p45vid A C D ita b d ff2 i vg (syrp s) copsa bo (arm) 등에 있음.

10) Byz A W it vg syrp s 등에 있음.

11) Byz A D itb d ff2 vg syrp s copbo arm 등에는 이 구절이 없음.

12) Byz A vgms syrp copbo-pt 등.

13) Byz C it vg syr 등이 그러함.

14) Byz A (D W it) vgcl syrp (Origenlat) 등이 그러함.

15) Byz (A) D it vg syr copbo-pt 등이 그러함.

16) Byz A C 등이 그러함.

17) Byz A syr copsa-mss bo-pt 등이 그러함.

18) Byz A C syrp Diatessaronsyr 등이 그러함.

19) Byz A (D ita) 등.

20) Byz A C (ita)에 그러함.

21) Byz A D it vg 등.

22) Byz A C W copsa-mss arm 등.

23) Byz A ita syrp copbo-pt 등에 있음.

24) Byz A C D ita b d ff2 i vg syrp s c (arm) 등에 그러함.

25) Byz p45 A D W ita b ff2 vg syrp s copsa-mss 등.

26) Byz A D W it(a) b d vgmss syrp arm 등에 있음.

27) Byz W it vg syrp copsa-ms 등에 있음.

28) Byz A D W ita b d ff2 i vg syrp s copbo arm Origen이 그러함.

29) Byz A D W ita b d ff2 vg syrp copsa-mss arm Origen 등에 있음.

30) Byz A it syr 등이 그러함.

31) Byz (A D ita b d ff2 i) vg (syrp copbo-ms) 등에 있음.

32) Byz A D W ita b d ff2 i vg syrp s copsa-mss arm 등에 있음.

33) Byz A (it) vg (syrp) syrs 등이 그러함.

34) Byz א A B vg syrp copsa bo arm 등이 그러함.

35) Byz p45 A W syrp s copsa-mss (arm) 등이 그러함.

36) ‘통과하여’라고 번역된 아나 메손 ajna; mevson은 ‘안으로’라는 뜻이다(BDAG, NASB, NIV).

37) 아람어 엣페사크의 음역(音譯)이다(BDAG).

38) Byz p45 A W vg syrp s copsa-mss arm 등에 있음.

39) Byz A copsa-mss bo-mss 등에 있음.

40) Byz A C W it vg syr copsa-mss bo-pt 등.

41) Byz A C (D itd) syrp copbo-pt에 있음.

42) 신약성경에 ‘형제들’(약 346회), ‘성도’(약 61회), ‘하나님의 자녀’(약 35번), 그 외에 ‘그리스도인,’ ‘신자’ 등의 호칭이 있다.

43) Byz A에 있음.

44) Byz A C에 있음.

45) Byz A (D itb d i vg syrp) 등이 그러함.

46) Byz ita (b) d (i) vg syrp copbo-pt 등이 그러함.

47) Byz p45vid A C D ita b d ff2 i vg (syrp s) copsa bo (arm) 등이 그러함.

48) Byz A D it vg syrp copbo-ms 등에 있음.

49) Byz A D ita b d ff2 i vg syrp Diatessaron Irenaeuslat 등에 있음.

50) Byz A it(a) d (ff2) i vg Diatessaron 등이 그러함.

51) Byz A D ita b d ff2 i vg syrp Diatessaron Irenaeuslat 등에 있음.

52) Byz A C it vg syrp copbo-ms 등이 그러함.

53) Byz A C it vg syrp copbo-pt 등에 있음.

54) Byz (A C) D W (ita) itb d ff2 vg syrp copsa bo arm 등에 있음.

55) Byz A D W ita b d ff2 vg syrp s arm 등에 있음.

56) Byz A (W) (ita syrp s copsa-mss bo-mss arm) 등에 있음.

57) Byz A C (D ita b d ff2) vg syrp s copbo-pt arm (Diatessaron Clement) 등에 있음.

58) Byz א A 등이 그러함.

59) Byz A C syrp copbo-ms 등에 있음.

60) Byz A D W it vg syr copsa 등이 그러함.

61) Byz א C D ita b ff2 i k vg syrs copsa bo 등이 그러함.

62) Byz A syrp s copsa-ms bo Origen 등이 그러함.

63) Byz A C D ita b d ff2 vg syrp copbo-mss Diatessaron Cyprian 등.

64) Byz A C syrp 등에 있음.

65) Byz A D W it vg syr copbo-ms 등에 있음.

66) Byz א A ita (b) d ff2 i k vg syrp arm 등에 있음.

67) 매튜 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 징조들이 요세푸스의 증거대로(유대인의 전쟁들, 제2권 11장부터 제4권까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상태에서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말했다. Matthew Poole, III, p. 113.

68) Byz A (W) syrp (syrs copsa-mss) Origenlat 등이 그러함.

69) The World Book Encyclopedia..

70) Byz A 등에 있음.

71) Josephus, Jewish War, 2. 19. 2-9; 2. 20. 1; 4. 3. 6-10; 4. 5. 4; 4. 6. 3; 4. 7. 3; Antiquities, 10. 11. 7;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3. 5. 3.

72) Eusebius, 3. 5. 3.

73) Byz A (itk) syrp cop 등이 그러함.

74) Byz א A C W itff2 i vg syrp s (copsa) copbo-pt arm Diatessaronarm.

75) Byz itff2 copbo-mss 등에 있음.

76) Byz A ita b i vg syrp s copsa bo-mss arm Diatessaron 등에 있음.

77) Byz A syrp 등에 있음.

78) Byz A (W copsa-mss) 등이 그러함.

79) Byz A C D ita d ff2 k vg syrp copsa-mss arm 등에 있음.

80) Byz A syrp copbo-pt 등이 그러함.

81) 알레 a[llh, 여성을 가리킴.

82) 헤테로스 e{tero", 남성을 가리킴.

83) Byz A C W syrp s copbo-ms (arm) 등이 그러함.

84) 라틴어로 calvaria이고 여기에서 영어의 Calvary라는 말이 나옴.

85) 전통사본에는 ‘포도주’라는 말 대신에 ‘신포도주 혹은 포도 식초’라고 되어 있음.

86) Byz itff2 n vg syrp copbo-mss Origenvid (Diatessaronarm) 등에 있음.

87) Byz A C (D) W it(d) ff2 vg syrp s arm Origenlat 등에 있음.

88) Byz A C D itff2 n vg syrp c copsa bo fay armmss Justin-Martyr Irenaeus Tertullian 등에 있음.

89) Byz C*vid W vgww copbo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