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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목사

2013년 4월 17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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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십자가의 도

2장: 영적인 진리

3장: 사람을 자랑치 말라

4장: 교만치 말라

5장: 권징

6장: 몸으로 영광 돌림

7장: 결혼 생활

8장: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9장: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

10장: 우상숭배치 말것

11장: 머리 수건과 성찬

12장: 성령의 은사

13장: 사랑의 덕

14장: 방언과 예언

15장: 부활

16장: 사랑의 교제

  

서론

고린도전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고전 1:1-3; 16:21). 속사도 시대의 저작자인 로마의 클레멘트는 본 서신을 “복스러운 사도 바울의 서신”이라고 불렀고,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등은 본 서신을 많이 인용하였다.

고린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서 아테네에서 약 60km 서쪽에 위치했는데, 동쪽으로 애게 바다와 서쪽으로 이오니아 바다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 도시는 매우 부요했고 매우 음란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시 고린도에 들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을 때 그는 회당 옆에 있었던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의 시작이었다.

바울은 본 서신을 썼을 때 에베소에 있었고 그에게 광대하고 효력있는 전도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고전 16:8-9). 그러므로 본 서신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주후 54년 혹은 55년 봄경에 썼을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특징적 주제는 ‘교회의 문제들’이다. 이 서신에서 다루어진 문제들은 분쟁과 파당, 음행한 교인의 포용, 권징, 성도의 법정 소송, 우상제물, 우상숭배, 여자의 머리 수건 문제, 성찬, 성령의 은사, 부활, 헌금 등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본 서신의 내용은 그 당시의 고린도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후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도 적용된다. 본 서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장: 십자가의 도

1-3절, 문안 인사

[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 . . .

바울은 문안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면서 문안하는 자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이라고 표현한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뜻을 따라 된 것도 타인의 권면을 따라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이었다. 그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었기 때문에 권위가 있었다. 또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세우셨기 때문에 그는 낙심치 않고 고난 가운데서도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성경 교훈대로 세우는 것이다.

성경은 직분자의 자격을 신앙 인격의 성숙에 두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3:2에서 감독의 자격을 말하면서 첫째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신앙 인격의 성숙을 말한다. 사도행전 6:3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봉사자 일곱 명을 세우려고 할 때에 사도들은 교인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말했었다. 교회의 직분자는 회중 가운데서 가장 본이 될 만한 자들 중에서 선택되어야 한다. 학력이나 재력, 외모나 사회적 신분, 구변(口辯) 등은 교회 직분자의 참된 자격 요건이 되지 못한다. 교회 직분자의 참된 자격 요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마음, 바른 성경 지식, 진실하고 덕스러운 말, 불평과 원망 대신 감사, 교만 대신 겸손함, 인내, 충성 등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되고 칭찬들을 만한 인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인정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뜻을 따라 세워진 직분은 하나님께서 결코 인정치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직분은 세우지 아니함만 못할 것이며 그런 직분은 자신에게 해(害)가 되고 교회에도 해가 될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를 택하여 보낸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핍박자 사울을 꺾으셔서 사도로 만드셨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을 증거하는 일, 그의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

바울이나 열두 제자들은 주께서 직접 불러 직분을 주셨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어떻게 부르시는가? 몇 가지 증표들이 있다고 본다. 첫 번째 증표는 그 직분을 위한 마음의 강렬한 소원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2:13에서,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했다. 두 번째 증표는 그 직분을 위한 성령의 은사의 확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직분을 위해 합당한 자에게 은사를 주시고 준비시키신다고 본다. 그가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는 각각 다르다(롬 12:6). 세 번째 증표는 회중들의 인정과 추천과 선택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일곱 집사를 택할 때 그들이 인정하는 자들을 추천하고 선택하였고 사도들은 그들에게 기도하며 안수하였다(행 6:5-6).

우리는 직분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신앙 인격의 온전함을 사모하며 조금씩 이루어가자.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범된 성도를 직분자로 세움으로써 본인에게도 교회에게도 유익이 있게 하자.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 . .

바울은 그가 문안하는 자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라고 말한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가리키지 않고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곧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벧전 2:9).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신약시대에 교회가 그러하다. 로마서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후원을 받는다는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교회이다.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었다. 죄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심히 부패한 죄인들이며 어찌 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다. 죄 없으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음 받게 되었다. 죄씻음과 거룩하여짐이 구원이다. 죄가 불행의 원인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이었고 죄씻음은 영원한 행복과 평강의 원인이다. ‘성도’ 곧 거룩한 자라는 이름은 성도에게 가장 존귀한 명칭이다.

‘거룩하여지고’라는 원어(헤기아스메노이스)는 완료분사이다. 그것은 ‘거룩하여졌고’라는 뜻이다. 우리는 법적으로 이미 완전하게 거룩하여졌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숨이 끊어지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속죄사역과 완전한 의와 거룩을 다 이루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2000년 전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義)가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중세 시대에 가리어졌었으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던 성경적 복음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진리를 밝히 증거한다. 다니엘 9:24,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완료시제].”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이오켄)[완료시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구원이며, 여기에 참된 자유와 평안과 능력이 있다.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은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말한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문안하지 않고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문안하였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예수님을 68회나 ‘주’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주인, 소유자, 주관자, 왕, 하나님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 곧 우리의 소유자, 주관자, 왕이시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그러나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그것은 예수께 대한 전적인 복종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이 고백은 사람이 죄와 파멸로부터 구원받은 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공동적(共同的)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고 우리 모두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여기에 교회의 공동성(共同性, catholicity)과 세계성이 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有無識), 피부색깔을 막론하고 구원받아 주를 믿게 된 모든 이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가족이요 한 형제들이다. 여기에 우리의 겸손함과 열린 마음도 필요하다. 우리는 외적 조건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자를 누구든지 영접해야 한다.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 . . .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죄사함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만 온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이 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었다(롬 3:16-17).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57:21). 그러나 예수께서 참 평안을 주셨다(마 11:28; 요 14:27). 평안이라는 말 속에는 마음의 평안뿐 아니라,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안정 등도 포함되어 있다.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강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을 항상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계속 사모하며 늘 받아 누리자.

4-9절, 하나님께 감사함

[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항상 감사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바른 모습이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18).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에는 감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항상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성도가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거기에 내포된 복들을 생각하면 감사할 것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것은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의 이유이다. 비록 역경의 현실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성도는 결코 실패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5-6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 . . .

바울은 말한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과 지식의 풍족함을 주셨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케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기독교 진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 곧 그가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하신 것, 그의 많은 기적들, 그의 부활, 승천 등에 근거하였다. 그것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그 사실들이 오늘 우리와 긴 시대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믿어지는 이유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의 책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 위에 근거한다.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확신하였다. 믿음은 확신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기 위하여 누가복음을 썼다(눅 1:4). 우리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해야 한다(딤후 3:14).

[7절]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 . . .

바울은 또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이유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모든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요소들이다. 믿음은 과거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믿는 것이며 사랑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실천하는 것이며 소망은 미래의 영광의 세계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성도의 소망의 첫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 후에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삶의 원동력이요 위로이다.

[8절]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주께서[그가 또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바울은 빌립보서 1:6에서도,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했고,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우리의 믿음의 주[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라고 표현하였다(히 12:2).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신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구원에 이를 것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주께서는 피흘려 사신 자들을 다 찾으실 것이며 그가 찾아 구원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롬 8:35). 성도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는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자로 훈련시키시고 보존시키실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담대함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날마다 더 가까이 하며,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힘을 내어 죄와 세상과 사탄과 싸워야 하고, 또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가 한번 우리를 불러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셨다면, 끝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주를 대항하며 죄 가운데 살았을 때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면, 그는 우리가 지금 부족과 연약이 많을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은혜 안에서 신실해야 한다. 우리도 변덕스런 심성을 버리고 꾸준히 그 분만을 따르며 그의 품성만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는 확실한 지식과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자. 또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주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우리도 그를 본받자.

10-17절, 단합을 권면함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형제들’이라는 말은 주의 제자들에 대한 겸손한 호칭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겸손은 성도의 큰 덕이다. 직분이 중할수록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서 다 형제이다. 직분자가 된 자도 형제들 위에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겸손한 자에게 직분이 주어지며 그가 그 직분을 감당하려면 더욱 겸손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과 권위로’라는 뜻일 것이다. 골로새서 3:17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말했다. 사도는 명령하지 않고 권면하였다. 그에게는 명령할 권위가 있었으나, 그는 조용히 권면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겸손한 모습이다. 우리는 피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자.

바울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였다. 말은 생각과 마음의 표현이다. 생각과 마음이 다르면 말도 달라진다. 그러나 생각과 마음이 합하면 말도 같아질 것이다. ‘분쟁(스키스마)이 없이’라는 원어는 ‘분열이 없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다. 또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은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합하는 것이다.

[11-12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 문제가 분쟁의 문제이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따르는 자, 아볼로를 따르는 자, 게바 즉 베드로를 따르는 자가 있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였다. 아직 교회가 분열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교인들 안에는 이미 단합된 마음이 없었고 교인들끼리 분파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답지 않았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 . . .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나뉘실 수 없는데, 그의 몸된 교회에 어떻게 분파가 합당하겠는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바울의 이름으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주 안에서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일치단합을 보여야 한다. 분쟁과 분열은 수치스런 죄악이다.

[14-17절]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그리고 스데바나 가족에게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 물론 세례는 주께서 친히 명하신 의식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다(마 28:19).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주의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세례는 중요하지만 구원에 본질적이지는 않다. 즉 세례받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든지 세례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복음 신앙뿐이다. 사람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복음을 깨닫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한다(막 16:16; 요 3:36).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웅변과 수사학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이루신 일이며, 그 십자가로 지금 죄인을 부르시는 일이다.

사람은 생각과 감정과 판단이 참 부족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후에도 서로 간에 오해와 갈등을 가지며 분쟁과 파당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한 분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일치하며 단합해야 한다.

그러면 루터교회나 개혁교회-장로교회나 침례교회 등 교파의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교파는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이해력과 지식의 제한성 때문에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파는 이단과 구별된다. 이단은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을 부정하거나 왜곡시키거나 더함으로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치명적 오류를 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신적 권위성, 무오성, 하나님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신성(神性), 처녀 탄생, 속죄, 부활, 재림 등을 부정하거나, 또는 마리아 숭배, 교황무오설을 주장하는 것 등이다. 그런 이단들은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파는 이단과 다르다. 교파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어떤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인간의 이해와 지식의 차이 때문에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다 인정한다. 감리교회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킨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인간의 책임과 자유로운 결정을 인정한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성경은 어떤 구절들에서(요 3:16; 딤전 2:4, 6) 보편속죄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제한속죄설이 논리일관하다고 이해한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감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회개와 믿음에 근거해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사람의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적 예정의 결과라고 이해한다.

교파들과 교단들이 많은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러나 이런 현실이 교회의 하나 됨에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이며 그것이 반드시 한 조직체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상대방의 다른 견해를 존중하고 그를 배척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한 교회의 지체로 서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18-25절, 십자가의 도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 . .

바울은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도(道)’라는 원어(로고스)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십자가의 도(道)’ 즉 ‘십자가의 말씀’이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 속죄적 의미가 죄인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두 가지 상이한 반응을 가져온다. 복음 앞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멸망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구원얻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절망하며 구주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소식을 듣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복음을 믿고 구원얻는 자들이다. 복음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19-21절]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傳道)(케뤼그마)[전도 혹은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전도 혹은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전도의 내용 뿐만 아니라, 또한 전도라는 방식도 가리키는 것 같다. 전도와 설교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며 또 말로 전하는 그 방법도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 설교와 복음 전파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 우리의 웅변, 우리의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구원하려 하지 말고 미련하게 보이는 그 십자가의 말씀이 오늘날도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자.

[22-23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 . . .

바울은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헬라인](전통사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기독교는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종교, 즉 기적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도 기독교의 이름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의 체험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오늘날 기도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비주의적이다. 기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풍조이다. 기독교는 기적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기적주의, 은사주의의 잘못된 풍조를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또 지혜를 구하는 종교, 즉 철학적 종교도 아니다. 옛날 헬라인들은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였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함’이라는 뜻이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경험을 중시한다. 철학은 그 성격상 인간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복음과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자들이 항상 있어 왔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대개 그러하다. 현대신학은 철학자 칸트의 지식론이나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을 인간의 이성적, 경험적 생각으로 혼잡시키고 변질시키려는 시도들, 즉 기독교의 철학화를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이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전파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昇天)하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며 역사적 사건들이다. 기독교 복음은 어떤 역사적 사실들을 그 내용으로 가지고 있고 그것은 변경될 수 없는 사건들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신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속죄적 의미가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다. 여기에 성경적 기독교가 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예언하였다(사 53:5-6).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다(요 6:51). 또 그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바울은 본 서신 뒷부분에서 복음의 골자를 표현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다(고전 15:3-4). 속죄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말씀은 기적을 원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을 강조하지 않고 과거의 한 사건을 중요시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 복음이 현재에 죄인들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구원의 현재적 능력이다.

십자가의 말씀은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의 논리는 단순하고 소박해보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논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가 죄씻음을 받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적 형벌의 개념이다. 그러나 지식인은 책임적 행동을 강조한다.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논리는 그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사람의 책임 있는 행동이 좋은 인격의 요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무리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히 죄악되어서 이미 많은 죄를 지었고 또 날마다 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최선의 의로운 행위라는 것은 단지 더러운 누더기 옷에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 말고 다른 방법으로 와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가 바로 그 방법이다.

[24-25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믿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믿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중생(重生) 즉 거듭남이다. 그때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 속에 깨달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신이 죄인인 것과 예수께서 구주이신 것을 깨닫고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거리낌이나 어리석음이 아니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다.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며 가장 힘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최선의 생각보다 낫고 그 어떤 힘있는 수단보다 낫다. 그것은 인간의 웅변적 말이나 수사학적 말보다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조금 감동시키는 정도가 아니고, 사람의 죽었던 영을 살리고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다. 우리는 오늘도 전도와 설교의 효력을 믿는다.

우리는 말세지말인 오늘날 인본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이나 은사주의, 신비주의를 경계하고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한다. 성경적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사실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이 속죄신앙을 가지자. 이 신앙이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이 신앙이 없으면 그는 멸망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복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이 십자가의 말씀, 곧 속죄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해야 한다.

26-31절, 예수님만 자랑해야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형제들’이라는 명칭은 주 안에서 믿음의 한 식구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 학력, 재산의 차이를 뛰어넘는 명칭이다. 교회에는 높고 낮은 계급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다. 여기에 ‘부르심’이란 내적인 부르심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부르심이다. 이것은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이다.

고린도교회에는 육체를 따라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 몸의 건강이나 정치적 권세나 물질적 힘이 있는 자, 가문이나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가 많지 않았다. 더러 조금은 그런 자가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만의 현상이 아니고 역사상 모든 교회들의 일반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야고보서 2:5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4).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의 무지와 어리석음이지만 세상의 만족과 즐거움은 그를 영적으로 어둡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의 가난한 자들은 비교적 믿음에 들어가기가 쉽다.

[27-2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많이 택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들은 과거에 세상에 속했던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교회의 대다수의 교인들은 그런 자들이다. 그들은 머리가 좋고 말 잘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좋은 학교 출신이 아니다. 그들은 건강한 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존귀하거나 인정받거나 잘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없는 자들을 택하여 있는 자들을 폐하려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지식과 삶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고 도덕의 근거와 내용을 알게 된다. 이것은 지혜 중의 지혜이며 지식 중의 지식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세상의 빛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생활을 한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소망과 용기를 가진다. 그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의 이런 점들을 보고 놀란다.

[29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건강하고 존귀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까닭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사람이 자신을 내세워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또 죄의 결과로 많은 고생과 슬픔과 허무함 가운데 살고 있다.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이다. 사람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지 말자. 자신의 총명함이나 자신의 구변이나 출신 학교나 학벌을 자랑하지 말자. 자신의 미모나 건강이나 가문을 자랑하지 말고 자기 부모나 남편이나 자식을 자랑하지 말자. 자신의 기술이나 직업이나 실력을 자랑하지 말고 자신의 업적이나 성공이나 재산을 자랑하지 말자. 우리는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고 자신의 죄악됨과 허무함과 무가치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겸손해지기를 원하신다.

[30절]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서’라는 원어(엑스 아우투)는 ‘그로 인하여, 그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의 은택 안으로 들어가 그의 의와 생명 안에 거하며 그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죽은 영혼이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아포 데우 ἀπὸ θεού)[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우리는 과거에 지혜가 없었다. 우리는 정신적 혼돈 속에 살았던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이 선과 진리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우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가 되셨다. 그는 우리의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되셨다.

그리스도 예수는 또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 의는 율법을 다 지킨 것을 말한다. 세상은 불의하고 죄악되었고 의가 없었다. 죄는 영적 죽음, 육적 죽음, 영원한 죽음을 가져왔다. 죄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義)가 되셨다. 그는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셨고 또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

그리스도 예수는 또한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에게는 거룩함이 없었다. 죄악된 세상은 더럽고 불결하며 거기에 사는 죄인들은 더럽고 불결하였다.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죽고 속이고 속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 모든 더러움과 불결을 다 씻어주셨다. 그는 우리의 주홍 같은 붉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씻어주셨다(사 1:18). 그는 우리를 위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되셨다(슥 13:1).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찬송가 190장).

그리스도 예수는 또한 우리에게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구속은 값 주고 사서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죄의 형벌로부터, 죄에 대한 법적 책임으로부터, 죄의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들 때문에 지불해야 할 값을 다 지불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 위에서 그가 이루신 구속에 근거하며 그 구속의 결과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무지한 자들, 불의한 자들, 불결한 자들, 죄의 형벌과 공포 아래 있는 죄인들은 다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한다. 그들은 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죄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가장 복된 소식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된 것, 의인된 것, 성도된 것, 천국시민된 것, 영생을 얻은 것, 이것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랑할 것밖에 없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우리는 예수님만 자랑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실상,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4:7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했고, 또 고린도전서 15:10에서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자.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우리는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지 말자. 또 우리는 교만한 마음이나 당파심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단합해야 한다.

 

2장: 영적인 진리

1-5절, 전도의 내용과 방식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 . . .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복음은 ‘하나님의 증거’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영생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진리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참되며 확실하다. 그것은 인간의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 복음의 진리성은 하나님께서 증거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인간의 달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복음은 전달 방법보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다. 복음의 가치는 그 내용에 있다. 복음의 핵심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도할 때 이 복음만을 전하겠다고 작정하고 결심하였다. 사람이 복음을 아름다운 말로 단장한다고 복음이 더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효력은 인간의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그 내용 자체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3-5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인간적]1)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복음의 내용이 능력이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에 머물었을 때 인간적으로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구원의 능력으로 사용하셨으나 복음을 전하는 당사자인 바울 자신은 약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오히려 복음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그 내용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스스로 약하다고 느낄 때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실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전해야 한다.

바울은 전도하며 설교할 때 인간적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으로 하였다(원문). 여기에 전도자의 자세가 있다. 복음전도자는 인간적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그는 단순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 단순한 복음 전파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 그 능력은 단지 외적으로 나타나는 기적들 뿐만 아니라, 또한 내면적 변화의 능력, 즉 죄인을 회개시키고 믿게 하는 구원의 능력을 가리킬 것이다.

복음의 성격이 그러하듯이, 성도의 믿음도 사람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다. 이와 같이, 성도의 믿음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믿게 하셨다.

전도는 사람의 아름다운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사실을 단순히 전하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오늘날도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다.

6-9절, 세상에는 감추인 하나님의 지혜

[6-7절]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에 ‘온전한 자들’이란 복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믿음을 가진 자들, 곧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미 복음 신앙에 굳게 선 이들 가운데서는 우리가 지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이 세상의 없어질 정치가들의 지혜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것은 ‘비밀한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지혜,’ 곧 만세 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되었으나 오랫동안 감취었던 내용이었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의 목표를 보인다.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런 상태로의 회복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되었었다. 사람의 본래의 형상은 하나님을 따라 거룩하고 의로운 형상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그 영광스러운 형상, 즉 그 거룩하고 의로운 형상을 잃어버렸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래의 영광스런 상태의 회복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구원 계획은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완전한 설계자요 계획자이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대로 이루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인류 구원의 일도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구원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작정하신 방법이다.

[8-9절]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 세상의 정치가들은 하나님의 이 비밀한 지혜, 감취었던 지혜를 알지 못하였다. 만일 로마 총독 빌라도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부른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는 초라한 유대인에 불과한 자가 아니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주님이셨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 곧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이나 귀나 마음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택함을 입은 성도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섞여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 곧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과 영생을 사랑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돈과 쾌락과 덧없이 지나가는 세상의 헛된 것들을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의 도리로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의 지혜자와 권세자들에게 감취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곧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에게 그 지혜를 주신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지혜를 감사하자.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신앙 안에 거하며 만족하지 않고 더 체험적 지식을 구하는 신비주의자들도 조심해야 한다. 그것도 치우친 것이다.

10-13절, 성령의 계시와 교훈

[10-11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신비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신성(神性)을 가지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 본문은 성령께서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 말한다. 전지(全知)의 속성은 하나님만의 속성이다.

성령은 단순히 하나님의 기운이나 세력이 아니고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무엇을 아시는 분이시다. 비인격은 무엇을 알 수 없다. 또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무엇을 지시하기도 하셨고(행 10:19)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으나 그것을 허락지 않기도 하셨다(행 16:7). 또 그는 우리 속에 계시며 우리가 기도할 말을 알지 못할 때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기도 하시고(롬 8:26) 우리가 범죄할 때에 근심하기도 하신다(엡 4:30).

하나님께서 영이시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구별되신 성령에 대해 증거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는 분명하게 구별되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셨고 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마 3:16-17). 요한복음 14:16-17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요한복음 15:26에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또 요한복음 16:7에서도 그는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다.

[12-13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아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감취었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 진리를 사도들에게 계시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그가 그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그가 오시면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고 장래 일도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요 16:13). 사도들은 ‘하나님께로 온 영’ 곧 성령을 받았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성령께서 주신 진리 곧 영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동일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진리들을 다 깨닫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그는 사도들을 통해 주신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깨닫게 하셨고 믿고 구원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지혜로 분별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분별할 수 있다.

기독교 진리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가르치신 진리이다. 또 이 진리는 성령으로라야 깨닫고 믿고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다.

14-16절,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 . . .

2:14부터 3:4까지는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 즉 ‘육적인 사람’이다. ‘육적인’이라는 원어(프쉬코스)는 ‘영적인’이라는 말(프뉴마티코스)과 대조되는 단어로 감각적 성질 즉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육적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일반 사람, 즉 믿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다. 이단자들도 육적인 자들(프쉬키코이이다(유 19).

육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고전 1:21) 깨닫지 못하고(롬 3:11) 하나님을 경외함과 섬김이 없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롬 1:21; 3:18)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롬 1:23).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치 않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탄과 악령들을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온갖 죄와 부도덕에 빠져 있다(마 15:19; 롬 3:12-15; 엡 2:2-3; 4:17-19).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교훈을 받지 않고 믿지 않는다. 그는 성령께서 계시하여주신 하나님의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성령의 일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되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복음 진리들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만 깨닫고 분별되고 판단될 수 있다.

[15-16절]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신령한 자’(호 프뉴마티코스), 즉 ‘영적인 사람’이다. 신약성경에서 ‘영적인 사람’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이다.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다. 사람이 중생하고 구원을 받을 때 성령께서 그 속에 들어오시며 그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을 보내어주실 것이며 성령께서 제자들 속에 영원토록 함께 계실 것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엡 1:13).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오셨다. 바울은 또 갈라디아서 3:2에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바울은 또 로마서 8:15에서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 곧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했다(롬 8:15).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깨닫고 믿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께서 주신 지식인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3장: 사람을 자랑치 말라

1-4절, 육신적인 사람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 . . .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이 말하는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코이) 곧 ‘육신적인 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은 3절에도 두 번, 전통사본에는 4절에도 또 한번 나온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의 용어에서 ‘육신’(사르크스)은 로마서 7, 8장에서 많이 사용된 바대로 사람의 본래 타고난 죄악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육신적인 사람이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기는 하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본성의 죄악성에 지배를 받는 자, 즉 영적으로 어린 성도를 가리킨다.

[2절]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밥’은 ‘딱딱한 음식’을 가리킨다. 갓난아기는 엄마의 젖을 먹지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도 듣기 쉬운 교훈만 받고 어려운 교훈들을 받지 못한다(히 5:12-14).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자랄수록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연구하고 배우며 믿고 행하며 지식과 인격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2:6에서 ‘온전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영적으로 자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성경은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야 함을 가르친다. 에베소서 4:13-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히브리서 5:12-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베드로전서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3절]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전통본문)2)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영적 어린아이라고 취급하는 까닭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악들 가운데 시기, 분쟁, 분열을 언급하였다(갈 5:19-21). 그러므로 성도는 그것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그런 죄들을 깨끗이 씻음받아야 하고 그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4절]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한](전통본문)3)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교회의 내적 분열은 지도자들에 대한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서 나타났다.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하여 설립한 자이었고 아볼로는 바울 후에 그 교회에 와서 성경 말씀을 가르친 목회자이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육신에 속한 증거이었다. 교회에서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들은 사람에게 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파당과 분열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에 불과하다.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나아와 사람을 바라보면 시험에 떨어지고 실망하고 실족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나아와 오직 주님만을 믿고 섬기고 순종하고 바라보고 주님 중심, 하나님의 진리 중심으로 일치 단합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육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다. 두 번째는 영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세 번째는 육신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본성의 죄악성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과 지배를 받는 영적인 사람이 되자.

5-15절, 교회의 바른 건립

바울은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들을 사용하여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구원받은 영혼들을 온전케 하심을 증거한다.

[5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사역자(使役者)’라는 원어(디아코노스)는 ‘섬기는 자, 일꾼, 봉사자’라는 뜻이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믿음에서 자라게 한 복음의 일꾼들이었다. 일꾼들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복음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하시다. 그러므로 일꾼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그를 보내신 주인, 곧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한다. 또 교회는 일꾼들 중심으로 분열하지 말고, 하나님 중심, 주님 중심, 복음 진리 중심으로 일치단합해야 한다.

[6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 . . .

바울은 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복음 사역을 씨를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에 비유하였다. 씨를 심는 것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가리켰고, 물을 주는 것은 세워진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가리켰다. 씨를 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초로 뿌리는 것이요, 물을 주는 것은 그 뿌려진 씨가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일이다. 농사에서 심는 일도 가꾸는 일도 다 중요하듯이, 복음 사역에서는 전도도 목회도 다 중요하다.

그러나 씨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지만,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사람이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고 한 영혼도 성장시킬 수 없다. 개인의 구원과 성장도, 교회의 설립과 성장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므로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복음의 일꾼 자신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구원 사역에 무엇을 대단히 기여한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들을 사용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복음 사역자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복음 사역자 자신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무익한 종들에 불과함을 항상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눅 17:10). 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하다가 어느 날 뇌졸증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고 이헌영 장로님은 고백하기를,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8절]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복음 사역자들에게 상급이 따를 것이다.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성경은 상에 대해 종종 말한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을 두고 그것을 말한다. 상급은 구원과 다르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한다.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해결되었다. 그 해결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법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의롭다 하심이다. 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될 것이다(롬 8:30; 빌 3:21). 그것이 구원의 완성과 목표인 영화(榮化)이다. 그러나 상급은 다르다. 상급은 선행과 봉사, 특히 복음 사역에 대해 약속된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구원에 차등이 있다고 말할 것은 아니나, 상급에는 차등이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으며(롬 3:24), 마지막 날에 모든 성도는 다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롬 8:30). 그러나 상급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즉 자신의 선행과 봉사와 충성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질 것이므로 거기에는 분명히 차등이 있을 것이다.

[9-10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바울은 복음 사역을 이렇게 농사에 비유하고 또 건축에 비유한다. 복음 사역은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과 같고, 또 터를 닦고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복음 사역자들은 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밭과 같고 하나님의 집과 같다.

바울은 건축의 비유를 좀더 자세하게 말한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기초를 닦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교회의 터를 닦은 자로 표현하고 자기 뒤에 일하는 사역자들을 그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로 묘사한다. 바울은 터를 바르게 잘 닦아 놓았기 때문에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은 조심스럽게 건축해야 한다.

기초를 닦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여 영혼들을 구원함으로 교회를 시작한 것을 말한다. 이제 기초가 잘 닦여진 고린도교회는 더욱 튼튼히 세워져야 한다. 목회(牧會)는 집을 완성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집을 완성하는 자이다. 그것은 외형적인 예배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말한다. 목회의 목표는 교회의 영적 건립과 성장이다.

물론 복음 전파를 통하여 죄인들이 계속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고 속죄 신앙을 가진 자들은 충실한 가르침을 통하여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출산 후에 양육이 있듯이, 영적으로도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시작이요 성화(聖化)는 구원의 진행이다. 믿는 자는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자라고 훈련되어 그리스도의 형상, 곧 거룩하고 경건하며 진실하고 온유, 겸손한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 외에 다른 터는 있을 수 없다. 만일 다른 터를 닦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다른 집단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반석은 그가 조금 전에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교회의 기초이다. 속죄 신앙은 그 믿음의 핵심이며 성도의 기본적 자격이다.

[12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 . . .

바울은 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말한다. 그는 좀더 구체적으로 집을 짓는데 필요한 건축 자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본문은 목회에 대해 말한다. 칼빈은 말했다. “그는 주의 참된 목사들이 그 날에 대한 눈을 가지도록 권면한다,” “항상 그 기초를 가지고 있지만 풀과 금, 짚과 은, 나무와 보석을 섞는 자들, 즉 그리스도 위에 짓지만 육신의 연약성의 결과로 어떤 인간적인 것을 용납하거나,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엄격한 순수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자들에 대해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목사들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것이다.”4) 촬스 핫지도 말하였다. “전체적 논의는 설교자들과 그들의 의무에 관한 것이다,”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비록 복음의 기본적 교리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에 오류를 섞는 교사들에 관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일반 신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목사들과 그들의 교훈들에 관한 것이다.”5)

건축 자재에 따라 교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누일 것이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진 내구성(耐久性)과 영구성(永久性)이 있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어진 내구성과 영구성이 없는 교회이다. 이것은 또 두 종류의 목회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는 목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 목회이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크고 웅장하게, 또 빠르게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고 기술도 많이 필요해서 아마 집을 짓기가 힘들고 그렇게 웅장하지도 못하고 또 더딜 것이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교회를 짓는 목회만이 참 목회요 그렇게 지어진 교회만이 참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무엇이며, 나무나 풀이나 짚은 무엇인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바른 교훈을 가리키며, 나무나 풀이나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리킨다. 박윤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비유는, 기독신자들이(특별히 교역자들이)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는 것을 가리킨다. ‘금이나 은’은 순결한 하나님의 진리를 비유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거짓된 교훈을 비유한다(Hodge). 칼빈도 역시 그런 의미로 말하였다.”6)

참 교회는 바른 교훈을 통해서 세워진다. 바른 교훈, 건전한 교훈, 견고하고 확실한 교훈이 없다면, 참되고 바른 교회가 세워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섞이지 않은 바르고 순수한 설교는 바른 교회 건립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바른 교훈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전하기보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였다. 그들은 악한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기보다 거짓된 평안을 선포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선포된 그러한 평안은 오지 않았다. 참 평안은 죄를 버릴 때에만 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것 같은 외적으로 거창하게 보이는 일들은 환난의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여지없이 무너졌다.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공력’이라는 원어(토 에르곤)는 ‘일, 일한 바, 성과’라는 뜻이다(BDAG). 복음 사역자들의 사역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 날이든지 그 직전에 있을 대환난 날이다. 그것은 불 시험의 날이다. 그때 복음 사역자들의 사역이 바른 사역이었는지 아니면 겉보기에만 굉장한 것 같은 사역이었는지, 참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고 양육한 사역이었는지 아니면 생명 없는 사역이었는지 판별될 것이다.

[14-15절]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해를 받는다’는 원어(제미오오)는 ‘손실을 당한다, 잃는다’는 의미이다. 칼빈과 핫지가 말하였듯이, 이 부분은 일차적으로 목회에 관해 말한다. 복음 사역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에게 상을 약속하신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절).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의 일한 바가 불 시험을 통과하면 상을 받을 것이다. 즉 그가 목회했던 교인들이 불같은 환난을 잘 통과하면 그는 성공적 목회를 한 자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록 그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 하여도 그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목회 사역에 대한 상을 잃게 될 것이다.

목회 사역은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과 같고 기초를 닦고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하나는 전도이며 다른 하나는 목회이다. 그러나 전도자나 목회자나 다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또 각 복음 사역자는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목회자는 그 기초 위에 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거짓된 교훈으로 교회를 세우지 말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바른 교훈으로 세워야 한다. 또 성도는 바른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바른 말씀을 사모하며 받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17절,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 . . .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바울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 개인도 그러하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그러하다.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은 거룩한 곳, 곧 성전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구약시대의 성막이나 성전은 신약시대에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예표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2:19). 요한복음 2:21은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을 뿐 아니라,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성전에 계심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성령께서는 성도 개개인 속에 계시고 또 온 회중 가운데 계신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19에서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2:20-22에서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 성전이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성도 개개인 가운데 그리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 거하신다. 이것은 성도 개인과 신약교회에 지극히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다.

[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은 큰 복이지만, 그 사실은 또한 우리에게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고 거룩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중대한 의무를 보여준다.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범죄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성전인 개인의 몸을 더럽힐 뿐 아니라, 또한 교회를 더럽힌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사람의 생각과 주관과 감정대로 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다. 특히 당시에 고린도교회에서 볼 수 있었던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쟁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서 멸하시리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개인이 죄짓는 것을 미워하신다. 죄를 짓는 자는 평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징벌과 징계의 채찍이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숳니 그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그의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죄에서 떠나 거룩한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적으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고 교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자들을 징계하실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며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의 전인 줄을 알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게 지키며 또 교회를 더럽히지 말고 거룩히 지키자. 우리는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거룩을 지키자.

18-23절, 사람을 자랑치 말라

[18-20절]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국한문--‘궤계’)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사람의 사상들과 철학들은 실상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것들은 진리 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진리를 논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자의 지혜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스스로 속게 하시며 그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참 지혜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자기 꾀에 빠지고 자기 모순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헛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사상들의 헛됨을 알고 스스로 속는 데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참된 것을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참 지혜와 지식으로 돌아와야 한다.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는 지혜와 지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 가운데 스스로를 똑똑하고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니고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21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사람을 자랑하는 데 있었다. 사람 중심의 파당과 분쟁이 그들의 문제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중요한 교훈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들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해야 한다.

[22-23절]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교회를 위한 일꾼들이요 교회의 공동 소유물과 같다. 그들은 교회의 한 파당의 당수가 될 수 없고 모든 교회의 공동적 봉사자들이다. 온 세상도 교회의 것이요 생명도 죽음도 그러하다. 현재 있는 것들이 그러하고 장차 올 것들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다 성도를 위하여 존재하며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파당에 속하지 말고 전체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넓혀 시기와 분쟁을 버려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는 누구의 것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 곧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물이다.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기에 확실히 교회의 일체성, 교회의 하나 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교회가 하나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며 일치단합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지혜를 다 버리고 또 그런 지혜가 자신을 속이는 헛된 것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그의 지혜를 사모하며 또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4장: 교만치 말라

1-5절,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1-2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 . . .

바울은 말한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복음은 만세 전부터 구약시대까지 감취었다가 말세에 밝히 계시된 비밀의 말씀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즉 관리인으로서 그 복음을 충성되이 해설하고 전파하였다. 신약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또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 즉 그들이 충성된 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충성되다는 것은 항상 믿음으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갈 5:22).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범사에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3-4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사람의 판단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의 이런 저런 판단에 너무 마음을 쓰면 주의 일을 힘있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치 않으며 스스로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성도는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 자책할 것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겼다. 우리가 바울처럼 행하면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낙망치 않고 주의 일을 담대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의 가장 큰 전략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힘을 빼는 일이다. 낙망은 큰 시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며 충성해야 한다.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씀은 두드러진 이단 사상이나 도덕적 오류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것은 지적하고 책망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여기에 판단치 말라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진실성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들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므로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고 철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때 주의 선하고 충성된 종들은 위로와 칭찬을 들을 것이며, 악하고 불충성된 종들은 책망과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 때까지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점들을 거론하여 남을 비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충성의 여부와 충성의 정도를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드러난 이단 사상과 오류는 지적되어야 하지만,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주님께 다 맡겨두면 된다. 주께서 완전히, 철저히 판단하실 날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

6-8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

[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 . . .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이상으로 생각하지 말라](전통사본)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에 불과하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도는 그들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들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자랑해서도 안 된다. 종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말고 자신의 무익함을 항상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성도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역자들을 높이어 파당을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대적하는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교만은 타고난 인간 본성의 큰 결함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자기의 위치를 벗어난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한다. 참된 성도의 모습은 온유하고 겸손함에 있다.

[7절]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누가 성도를 세상 사람들 중에서 구별하였는가? 또 누가 직분자들을 성도들 가운데서 구별하였는가? 이 모든 것을 구별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여 구원하셨고 또 그 가운데서 어떤 이들에게 교회의 직분까지 주셨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직분은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육신의 생명도 내 것이 아니고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세상을 떠나갈 수밖에 없다. 건강도 내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그것이 나를 떠나갈 수 있다. 부모님도,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섬기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 죄사함받고 천국과 영생을 기업으로 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성령을 받은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영적인 것들과 육적인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본래 우리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이 남의 것을 가지고 자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자랑해야 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8절]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하기를 원하노라.” 고린도 교인들은 물질적 부요함과 풍족함, 또 정신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 서로 분쟁하고 파당을 만든다면 그 부요와 풍족, 그 자유는 복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을 겸손케 하는 가난과 속박이 그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교만은 큰 죄악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좋은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진 그 무엇도 자랑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9-13절, 바울의 낮아짐

[9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바울의 형편은 고린도 교인들과 정반대이었다. 사도는 주 예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말씀을 위탁하시며 기적 행할 능력을 부여하신 자이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직분이었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이었다(엡 2: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존귀한 직분자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 가장 존귀한 자를 가장 미천한 위치에 두셨다. 그들은 세상의 구경거리,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

[10-13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사도의 비천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한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고 비천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가 전한 그 동일한 그리스도 때문에 지혜를 얻고 힘을 얻고 존귀를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 인류의 구원이 되었듯이, 주의 종들의 비천하여 보이는 사역들이 많은 사람을 구원의 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의 일행이 당한 고난을 증거한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없었고 매맞았고 거처할 곳이 없었고 손으로 일했고 비방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참고 권면하였다. 바울은 자신들을 한 마디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비천함에 두신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그들로 겸손케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확실히 가난과 고난은 사람을 겸손케 만드는 장점이 있다. 둘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견고히 두게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가난과 고난은 육신적 쾌락의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풍족함보다 장점이 있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난은 믿음이 어린 신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한 뜻도 있을 것이다. 넷째로, 그것은 복음 사역자의 길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임을 증명할 것이다. 또 그것은 진리의 진리 됨을 증거하고 진리 운동이 육신의 양식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증거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상에서 높아지고 존경을 받고 부유해지고 존귀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세상의 영광이 헛됨을 밝히 말씀해 주셨다(전 1:2-3; 사 40:6-7).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세계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 현재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계 21:5). 장차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되고 무가치함과 오는 세상의 참된 가치를 알고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셨다. 주의 사도들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부귀영광을 구하지 말고 우리의 소망을 내세에 두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14-21절, 나를 본받으라

[14-16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이 자신의 비천한 형편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면하기 위해 지금 말하고 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다.

바울은 스승이라는 말과 아비라는 말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스승은 단순히 이미 믿은 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아비는 처음 전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 자를 가리킨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통해 설립되었다. 바울은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 참 선생도 사랑을 가지고 가르친다. 그러나 아비의 사랑은 많은 선생들의 사랑보다 더 크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은 그의 낮아짐, 그의 비천함, 그의 겸손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은 높은 마음에서 생긴 분쟁과 분열이었다. 그들은 이제 높은 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들이 바울이 당한 비천함을 듣는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7-21절]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 . . .

바울은 말한다.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생생하게 확증할 한 사람을 그들에게 보내었다. 그는 디모데이다. 그는 바울이 주 안에서 아들같이 사랑하는 신실한 일꾼이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활동을 하였으므로 각처 각 교회에서 바울의 가르친 바를 그들에게 증거하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증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겸손을 실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바울은 또 말한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가지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들에게 나아갈 것이며 교만한 자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한다. 사람은 말로는 가장 고상한 이상을 논할 수 있고 가장 고결한 윤리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말뿐이라면 공허하다. 말과 실제는 다르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전력의 힘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듯이, 말은 이론이요 힘은 실제이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말씀은 곧 능력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능력의 나라이다. 거기에는 생명의 능력이 약동한다. 거기에는 이론만 있지 않고 또한 삶이 있다. 거기에는 의로운 인격과 삶, 거룩한 헌신과 봉사가 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버지와 같이 그들에게 감히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참된 구원은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변화된 인격과 삶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고 또 남에게 본이 되기를 기도하고 힘쓰자.

 

5장: 권징

[1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 . . .

바울은 말한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린도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음행한 자를 용납한 것이었다. ‘너희 중에 심지어’라는 표현은 그 용납의 행위가 교회의 거룩함에 배치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피흘려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교회는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 이단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 죄악들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큰 악을 포용하였다. 그 교회가 포용한 악은 어떤 교인이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한 것이었다. 그것은 구약 율법에 명백히 정죄된 근친 상간의 죄악이었다(레 18:6). 하나님께서는 결혼 관계의 성결을 중시하신다. 부부 관계를 벗어난 음행은 하나님 앞에서의 큰 죄악이다. 고린도교회가 포용한 그런 행위는 심지어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양심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2절]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 . . .

바울은 말한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율법에 의하면, 근친 상간의 죄를 범한 자는 사형에 해당하였다(레 20장).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형벌을 통해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셨다. 마찬가지로, 신약교회도 권징을 통해 악을 제거해야 그 거룩함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치 않았다. 교만은 불순종을 낳는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3절]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그들이 용납해서는 안 될 악을 용납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바울은 비록 몸으로는 떠나 있었지만 영으로는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거기에 있어서 그 악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다. 그 악한 자가 그 죄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였다.

[4-5절]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 . . .

바울은 말한다. “[우리]7) 주 예수 [그리스도]8)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9)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교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단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인간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교회의 권세의 원천을 증거한다. 교회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다. 권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근거하여 시행된다. 권징의 효력은 교회 자체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근거한다.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딤전 1:20도 그런 표현을 함)은 제명출교를 가리킨다고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세상은 사탄이 어느 정도 지배권을 행사하는 곳이다. 요한일서 5:20,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육신이 멸한다는 말은 사탄에게 내어 준 바 된 결과 육신의 질병 등으로 죽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한다는 것은 영으로는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은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주 예수의 날’은 주의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권징의 일차적 목적은 그를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그를 회개시키는 데 있다. 권징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오히려 죄를 회개할 기회가 없겠지만, 권징할 때 택함받은 죄인은 회개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6절]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교인들은 그런 악을 포용하면서도 뻔뻔스레 자랑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우리는 대체로 건전하다. 단지 한 명이 잘못되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자랑은 옳지 않았다. 그 한 명을 용납한 것이 문제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이다. 죄악은 전염성을 가진다. 범죄한 한 명 때문에 교회의 거룩함이 상실되고 기강이 심히 흐려지고 있었다. 그가 용납되었다면 또 다른 죄인이 용납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면 교회는 점점 더 부패될 것이다. 이것은 지교회나 한 교단이나 마찬가지이다.

[7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묵은 누룩은 옛 죄악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표된 유월절 양이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되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 유월절 양의 피를 문틀에 바름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은 누룩을 내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행했던 죄악된 행습을 버려야 한다.

[8절]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은 명절과 같다. 제자들은 이 날 공적 예배를 위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제7일 토요일로부터 주간의 첫째날인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공적 집회를 가질 때 누룩 없는 떡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것은 옛날의 죄악들을 다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모이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교회의 구성원들도 거룩해야 하고 교회의 모임들도 거룩해야 한다.

[9-10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우리가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과 격리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라든지 혹은 따로 공동집단을 만들어 그 속에서만 살라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이므로 죄인들과 전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의 전도 구역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 전도와 구원의 대상은 바로 이 세상의 죄인들이다.

[11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우리가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형제라 일컫는 자’ 즉 예수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된 자에 대한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나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형제라는 명칭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선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만 형제라고 불릴 수 있다.

권징과 교제 단절에 대한 교훈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문제이다. 즉 어떤 형제가 음행이나 탐람(貪婪)이나 우상숭배나 후욕(詬辱)이나 술취함이나 토색(討索) 등의 죄를 범했다면 그런 자와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탐람은 탐욕, 후욕은 남을 욕하고 비방하는 것, 토색은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일들은 명백히 죄이며 교회 안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죄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안에 그런 악한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자들과 사귀지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한다. 바른 믿음을 저버린 이단자들이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과 불순종자들은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12절] 외인들을 판단하는 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외인들을 판단하는 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권징의 문제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교중 사람들’ 즉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이며, 모든 교인들이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외인들이란 교회 밖의 사람들 곧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에게 복종치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물론 우리가 무엇이든지 바르게 판단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며 또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배워야 한다.

[13절]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판단하여 권징해야 한다. 만일 어떤 교인이 자신이 행한 악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를 교회의 교제로부터 제외시켜야 한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그는 교회에서 제명출교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해야 한다는 진리를 안다면, 또 만일 우리가 죄의 심각성과 전염성을 안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교회는 이 사도의 교훈대로 성실히 권징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바른 교훈을 하고 바른 지식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하고 바른 실천을 힘쓸 뿐 아니라, 권징을 성실히 시행할 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다워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그 교회와 함께할 것이다. 참 교회는 권징을 성실히 시행하는 교회이다. 그러나 권징이 없는 교회는 이름만 정통적이고 실제로는 병들었거나 죽어가는 교회일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받은 자들의 모임이므로 고의적으로 죄악된 일이 포용되어서는 안 된다. 악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작은 악일지라도 포용된 악은 누룩같이 퍼져나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악한 자들을 분별하여 권징을 성실히 시행해야 하고 회개치 않는 자는 교회에서 제명출교시켜야 한다.

 

6장: 몸으로 영광 돌림

1-11절, 세상 법정 소송

[1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 . . .

바울은 말한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린도교회에는 성도간의 문제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성도 상호간에 물질적 손해나 명예적 손상 등이 있었을 것이다. 성도가 다른 성도를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은 불의한 자 앞에 판결을 구하는 옳지 않은 일이다. 성도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세상 법정보다 교회를 크게 여겨야 한다. 성도간의 갈등의 문제는 성도 앞에서 즉 교회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2-3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 .

바울은 또 말한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성도는 장차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상호간의 일들을 판단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성도는 마지막 심판 때에 악한 천사들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상의 일들을 판단하지 못할 것인가. 성도는 양심을 깨끗이 씻음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받았으므로 세상보다 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4-5절]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교회가 성도간의 문제를 재판하기 위해 모였을 때, 교회는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의 일들은 믿음 있는 자, 하나님의 진리로 충만한 자를 세워 처리해야 한다. 믿음과 성경의 바른 지식이 있어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바른 판단을 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는 성도간의 소송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가 있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그가 교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교회가 필요로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일꾼들과 봉사자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

[6-8절]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형제간에 송사하고 더욱이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불신자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불행한 일이요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성도의 결함이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어두움의 아들들에게 판단을 받고, 죄씻음받은 자들이 죄인들에게 판단을 받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속는 것이 낫다. 한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 당한 억울한 일을 세상 법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불이익을 당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성도다운 태도이다.

[9-10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았지만 계속 불의한 행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중생(重生)한 성도는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요일 3:6, 9). 물론 구원받은 자도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으나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미혹을 받지 말라’는 말은 ‘속지 말라’는 뜻이다. 죄 가운데 머물러 죄의 낙을 즐기면서도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 속는 생각이다.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악들을 열거한다.

첫째는 음란이다. 음란은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성행위를 가리킨다. 오늘날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인해 심히 가증한 음란의 풍조가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 성도는 이 시대적 풍조를 극히 경계해야 한다. 음란에 대한 최선의 대비책은 시험되는 환경을 피하는 길이다.

둘째는 우상숭배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1, 2계명을 어긴 죄이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조상의 혼령을 위로하고 섬기기 위한 제사, 점치는 것, 천주교회의 마리아 공경과 그에게 기도함, 돈 사랑 등은 모두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셋째는 간음이다.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이것을 큰 악으로 정죄한다. 신명기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넷째는 탐색(貪色)하는 것이다. ‘탐색하는 자’라는 원어(말라코이 malakoi;)는 ‘여자 같은 남자들, 동성애자들’을 뜻하며, ‘미동(美童) 혹은 남창’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다섯째는 남색(男色)하는 것이다. ‘남색하는 자’라는 원어(아르세노코이타이 ajrsenokoi'tai)는 남자동성애자를 가리킨다. 동성애는 분명히 용납되어서는 안 될 큰 죄악이다.

여섯째는 도적질이다. 그것은 제8계명을 범한 죄이다. 속여 취한 재물은 사람에게 결코 복이 되지 못한다. 잠언 13:11, “망령되이[혹은 속여서]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성도는 돈 관계에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하며 셈이 흐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 돈을 빌린 일이 있으면 그는 그 빌린 돈을 반드시 갚되, 자기의 쓸 것을 다 쓰기 전에 갚아야 한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다른 이와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교회의 교제는 순수한 영적 교제가 되어야 한다.

일곱째는 탐람(貪婪) 곧 탐욕이다. 그것은 더 가지려는 욕심이다. 그것은 돈에 대한 욕심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교훈하셨다(눅 12:15).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했고(골 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교훈하였다(딤전 6:10). 히브리서 13:5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하였다. 정당하게 번 돈만 성도에게 복이 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주일 예배를 빠지면서 버는 돈은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덟째는 술취하는 것이다. 술취함은 마약과 비슷하게 바른 정신을 잃게 하고 많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 되는 나쁜 일이다.

아홉째는 후욕(詬辱)이다. 후욕은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다. 진실을 증거해야 할 경우, 부득이 정당한 비난을 해야 할 때가 있겠지만, 성도는 보통 다른 이에 대한 비난을 삼가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열째는 토색(討索)이다. 토색은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강제로 도적질하는 매우 악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이런 자들은 교회 속에 있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성실한 권징으로 이런 자들을 배제하고 거룩한 회(會)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원문에는 “그러나 씻음을 받았고, 그러나 거룩하여졌고,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표현되었다. 성도는 과거에 큰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씻음을 받았고, 과거에 심히 더러운 자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거룩하여졌고,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이며,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된 일이었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성도간의 소송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시 교회의 판결에 복종치 않는 자는 제명출교할 것이요 그런 자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알고 또 우리 자신이 과거에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깨닫고 모든 불의와 죄악을 멀리하자.

12-20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본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전이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가르친다.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 . . .

바울은 말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람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나 자기에게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죄악되어 그에게 해를 준다.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죄와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을 가져온다.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죄이다. 죄악되지 않은 일들 중에도 절제하지 않으면 해가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자기에게 유익이 아니고 해가 된다. 명절에 당뇨병 환자가 음식을 갑자기 많이 먹으면 혈당이 올라가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 취미 생활이나 오락도 그 자체가 죄악되지 않을지라도 거기에 너무 빠지면 자기에게 해가 되고 신앙생활도 약화될 것이다.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본다. 즉 성도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에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취미 생활이나 오락, 혹은 T.V. 시청이나 운동 등에 있어서 성도는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지 그것들에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나 육신의 즐거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 수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육신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만, 돈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하고 육신의 쾌락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13절]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음식은 배를 위해, 즉 먹기 위해 있다. 또 배는 음식을 위해 있다. 눈이 보기 위해 그리고 귀가 듣기 위해 있듯이, 배는 음식을 먹기 위해 있다. 만일 먹을 것이 없다면, 배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이나 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만 서로를 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폐하시면 그것들은 서로를 위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장병을 주시면 위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 없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세상에 기근을 주시면 먹을 것이 없으므로 위가 할 일이 없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취하시면 모든 것이 다 쓸데없어진다.

특히 우리의 몸은 음란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죄를 지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몸에 죄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몸으로 음란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몸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부부의 사랑이나 육신적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우리의 몸은 오직 주를 위해 존재한다. 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우리의 주님,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다. 우리는 그의 종이며 그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그에게 순종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만 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도 우리를 위하신다. 사실 우리가 주를 위하기 전에 주께서는 먼저 우리를 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성을 아셨고 우리를 동정하셨고(히 4:15), 친히 우리를 위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과 같이 부활시키실 것이다. 몸의 죽음은 인류에게 가장 큰 적이다. 장례식은 인생에게 가장 슬픈 시간이다. 죽인다는 말은 인간에게 가장 큰 위협이며 사형은 죄수들에게 가장 두려운 벌이다. 얼마 못 살고 죽을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은 환자나 가족에게 가장 충격적인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 한번 죽었다가 영원히 다시 산 자는 예수님 외에 세상에 아무도 없다. 장사했던 시신이 영원히 다시 살아난 예는 예수님의 사건뿐이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실 것이다. 그는 모든 죽은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실 것이다. 성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의 한 절정적 사건이다. 성도가 영광스럽게 부활할 그 날, 그 시간은 인류의 역사상 참으로 놀랍고 감격적인 날과 시간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15-16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바울은 더욱더 놀라운 사실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거룩하고 존귀하듯이, 우리도 거룩하고 존귀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자기의 몸을 창녀와 결합하므로 더럽힐 수 있겠는가! 성도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바울은 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한다. ‘주와 합한다’는 말씀은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주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비유가 의미하는 바이며, 성경에 자주 나오는 ‘주 안에’ 혹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는 말씀은 주님과 우리의 인격적 구별을 부정하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주님과의 연합은 본질적, 실체적 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과 신, 피조물과 창조주의 본질적 연합은 불가능하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주와 한 영이 된다는 말씀은 단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음행에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음행을 피해야 한다. 특히, 음행은 다른 죄들과 다른 성격이 있다. 다른 죄들은 비교적 자기 몸 밖에서 이루어진다. 살인이나 도적질은 손으로 행하는 죄일지라도 타인의 생명을 해하거나 타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거짓말도 혀로 행하는 죄이지만 남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음행은 자기 몸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지체인 우리의 몸으로 음행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 . . .

바울은 말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전통본문)1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우리는 주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몸이다(고전 3:16; 행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전인 우리 몸을 음행의 죄와 같은 죄로 더럽히지 말고 항상 거룩하게 보존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첫 번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이다. 이사야 43:7은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한다. 소요리문답 제1문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사 43:21).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이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삶이며(요일 3:23), 성경 진리대로 사는 삶이다. 요한이서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그것은 또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음행을 피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몸과 영혼을 바치자.

 

7장: 결혼 생활

1-9절, 결혼의 원리들

[1절]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가까이 하다’는 원어(합토마이)는 ‘만지다, 붙잡다, 육체적 관계를 가지다, 결혼하다’는 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은 남자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혼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좋은 제도이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잠언 18:22,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결혼은 죄가 아니며(고전 7:28) 결혼을 금하는 것이 오히려 악령의 사상이다. 디모데전서 4:1-3,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바울이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까닭은 임박했던 환난 때문이었다. 26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심한 죽음의 환난이 닥치면 가족 관계는 즐거움과 행복이 아니라 근심과 짐이 될 수 있다. 또 성도는 결혼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32-33절,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오늘날도 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자는 독신(獨身)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2절]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 . . .

바울은 또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한다. 독신의 장점이 확실히 있지만, 현실적으로 결혼의 불가피한 목적도 있다. 결혼의 목적은 세 가지다. 첫째는 서로 교제하며 돕기 위함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교제하며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다. 사랑의 교제는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다. 결혼의 두 번째 목적은 자녀 출산을 위해서이다. 창세기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결혼의 또 하나의 목적은 음행의 방지를 위해서이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이런 시험을 물리칠 수 있게 하셨다. 결혼은 음행에 대한 최선의 방지책이다. 잠언 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한다.

[3-4절]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결혼한 남녀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자기의 의무들을 다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다정한 표정과 따뜻한 말로 그 사랑을 표현해야 하며 경제적 책임도 다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 양육, 식사 준비, 빨래, 집안 청소 등을 감당함으로 남편이 바깥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들은 부부 생활의 의무도 포함한다. 아내도 남편도 이제는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해서는 안 된다. 결혼한 자는 이제 한 몸이므로, 자기 몸을 상대방이 주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부부의 감정은 항상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는 언제나 그의 필요를 만족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부부 관계에 불만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

[5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금식과]11)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원어는 ‘서로[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말로서 상대방이 원할 때 거절치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금식과 기도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하기 위해 분방할 경우도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할 것이며 기간도 너무 길지 않게 ‘얼마 동안’ 해야 할 것이다.

부부가 분방치 말아야 할 이유는 절제 못함을 인해 사탄으로 시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절제심이 많으면 좀더 긴 기간도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탄의 시험에 떨어질 수 있다. 사탄은 항상 인간의 약점을 공격한다. 각 사람마다 다른 약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육신적인 감정과 욕망은 인간의 공통적 약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일에 있어서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성도가부부생활을 멀리하고 집안일과 자녀 보살피는 일을 소홀히하고 집밖으로 나다니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신앙생활과 부부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부부관계도 좋아야 한다. 부부간에 다투는 일이 있더라도 각방을 쓰지 말고 속히 화합해야 한다.

[6-7절]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바울이 결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용인하는 것뿐이다. ‘권도’라는 원어는 ‘허용, 용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미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말했고 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한다(8절). 이 말씀들에서 그는 분명히 독신(獨身)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물론 결혼이 두렵다거나 귀찮아서가 아니고, 또 자유 분방하게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독신이 유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독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마 10:10-12).

[8-9절]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사람은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할 수 있다. 연약한 감정은 결혼을 통해 정당하게 해소되는 것이 좋다(딤전 5:14).

결혼의 한 목적은 음행을 방지하는 데 있다. 또 결혼한 자는 부부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절제의 은사를 주신 자라면 독신으로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며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제하지 못하여 시험해 떨어지며 범죄해서는 안 된다.

10-24절, 결혼한 자에 대한 추가적 교훈

[10-11절]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결혼한 자들은 서로 나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이혼을 금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이혼의 합당한 경우는 상대방이 음행했을 경우이다(마 5:32).

‘그냥 지내든지’라는 말은 원문에 ‘결혼[재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든지’라고 되어 있다. 정당한 이혼이 아닌 경우 여자가 부득이 남편을 떠나 별거하게 되면, 재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든지 그 남편과 다시 화해하여 합하라는 교훈이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의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하다고 본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5). 남편도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음행의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정당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성격상 결함이나 무서운 질병이나 또는 자녀를 출산치 못하는 것 등은 이유가 될 수 없다.

[12-13절]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그 남은 사람들’이란 문맥상 부부 중 하나가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말은 사도의 교훈이 주의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본장 끝에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증거하였다(7:40).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말은 예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이런 경우에 대해 직접 언급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사도를 통하여 이 경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증거된다. 부부 중에 한 쪽만 믿고 다른 쪽은 믿지 않는 경우, 만일 믿지 않는 쪽이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믿는 이는 그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은 성도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결혼한 남녀 중 한 쪽이 먼저 믿게 되었을 경우를 가리킨다. 성도가 믿는 자와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적 원리이다(고전 7:39; 신 7:1-4).

[14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거룩하게 된다’는 원어(헤기아스타이)는 ‘거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내면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고,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본인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지만, 그가 아직 믿지 않을지라도, 그와 그의 가정은 이미 세상 사람들과 또 그들의 가정들과 구별되었다.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 믿는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도 거룩하다. 부모 중 한 쪽만 믿어도 그러하다. 이것은 언약적인 의미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이 증거되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출생한다. 여기에 유아세례의 근거가 있다. 신자의 자녀들이 세례를 통하여 내면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적인 의미에서 거룩한 자녀로 출생하였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15절]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결혼 관계라 하더라도, 부부 중 한 쪽이 믿지 않는 경우, 믿지 않는 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부부 관계보다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되는 방편이므로 성도에게 절대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백년의 지상 생활에 속한 부부 관계보다 앞서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화평 중에 우리를 부르셨다. 성도가 진리 문제, 신앙 문제, 이단 문제 때문에 싸우고 분리해야 할 때가 있으나, 우리는 가능한 한 화평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헤어지기를 원할 때 먼저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별거는 부득이한 경우의 일이며 이혼은 최악의 조치일 뿐이다.

[16-17절]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믿지 않는 자가 정말 헤어지기를 원할 때, 믿는 자는 거기에 구애받을 것이 없다. 믿는 아내나 남편이 믿지 않는 쪽을 구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내가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그때까지 참고 지내겠다는 것은 결코 최선의 생각이나 바른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형편과 처지대로 그대로 행해야 한다.

[18-19절]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를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오늘날 세례 의식도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는 세례가 외형적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가르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례는 주 예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참여할 때에만 효력이 있다. 참 종교는 의식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과 순종의 마음에 있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성령 안에] 있고 의문[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라디아서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20-23절]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도가 가진 세상적 신분이나 어떤 육신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 옛 시대에 그가 종의 신분이냐 자유인의 신분이냐 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매우 중요하겠지만, 주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다 동등한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자유자라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23-24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신 바 되었고 이제 그의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만 순종해야 한다.

10절부터 24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안에서 결혼한 부부는 서로 나뉘지 말아야 한다. 혹 부득이하여 나뉘더라도 재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든지 다시 화해하여 재결합하든지 해야 한다.

둘째로, 부부 중 한 쪽이 믿지 않을 경우 그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쪽이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성도는 이에 구속받을 것이 없이 헤어질 수 있다.

셋째로, 성도는 하나님이 부르신 형편과 처지대로 살고 세상적 신분과 육신적 조건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서 다 동등한 영적 특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므로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25-40절, 처녀에 대한 교훈

[25-26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는 말은 주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받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라는 말은 우리가 믿고 충성하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됨을 보인다. ‘의견’이라는 원어(그노메)는 ‘판단’이라고도 번역된다. 사도들의 의견과 판단은 신적 권위를 가진다(살후 2:15). 이것은 마치 율법을 재강론한 모세의 신명기가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과 같고 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의 찬양과 간증인 시편이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과 같다. 바울은 당면한 환난 때문에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환난 중에는 아내와 자녀들의 의식주 문제로 인한 많은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었다(마 24:19).

[27-28절]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아내에게 매였다’는 말은 결혼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결혼한 자는 결혼의 의무를 짐스럽게 생각하여 거기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결혼한 자는 결혼한 자로서 최선의 생활을 해야 한다. 아내는 아내로서 가장 좋은 아내가 되기를 힘쓰고, 남편은 남편으로서 가장 좋은 남편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가 아내와 사별(死別)했거나 정당한 이유로 이혼했을 경우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그 까닭은 결혼이 죄이기 때문이 아니고 당면한 환난 때문이었다. 환난 때에는 가족에 대한 짐을 던다는 의미에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결혼한 자들에게는 환난 중에 육신적 고통이 많을 것이다.

[29-31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초대 교회는 환난과 핍박을 당한 교회이었다.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서,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정부로부터의 핍박이 있었다. 이 편지를 쓸 때 고린도교회에는 환난이 닥치고 있었다. 자유와 안정과 평안의 때는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때가 짧아졌다는 의식은 주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언제나 필요하다.

이런 시대 의식에서 볼 때, 아내를 소유한 것이나 소유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별로 없다. 또 우는 것과 울지 않는 것, 기뻐하는 것과 기뻐하지 않는 것, 물건을 사서 소유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세상 물건을 쓰는 것과 다 쓰지 못하는 것의 차이도 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같은 환난이 닥칠 때에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무슨 좋은 것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속에서 맡겨진 자기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지만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거나 그것들에 의존되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세상의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24-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지나가는 세상이 전부인 양 분주하나 결국 허무한 것뿐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이 헛된 줄 알고 이 세상 위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읽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32-34절]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결혼한 남녀 성도는 주의 일을 전적으로 생각하거나 염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일을 염려하고 아내나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이것은 결혼한 자로서 정상적인 행위이며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성도는 결혼한 성도보다 더 주의 일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고 한다’는 말은 몸으로 범하는 죄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으로 범하는 죄도 짓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뜻이다. 여기에 독신(獨身)의 유익이 또 한번 증거된다.

[35절]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가 독신의 장점을 가르침은 성도에게 시험의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요 오직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전심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려 함이었다. 그것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때가 짧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진실한 성도마다 주의 일에 전심 전력하기 위하여 독신(獨身)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을 것이다.

[36-38절]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婚期)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부모가 처녀 딸을 결혼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요 죄짓는 것이 아니지만, 결혼시키지 않고 그로 하여금 주의 일에 전적으로 힘쓸 수 있게 하는 것도 잘하는 일이다. 후자가 더 잘하는 것이다. 이 경우 부모는 자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자녀 스스로가 원해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은 자신에게 복이 되지 못한다. 믿는 일은 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원함으로 그를 섬기기를 원하신다.

[39절]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 . . .

바울은 말한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법으로](전통사본, vgcl syr)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부부의 관계에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내가 법적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죽으면 재혼(再婚)할 수 있다.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간다’는 표현은 ‘자기가 원하는 자와 결혼할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단지 덕을 위하여, 교회 헌법에는 “부부간 일방이 별세한 후에 재혼하려면 별세한 후 6개월이 지나야 결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성도의 결혼의 기본적 원리를 증거한다. 성도는 반드시 믿는 자와 결혼해야 한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엡 2:8).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게 하신 자와 결혼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구약성경도 이 진리를 강조한다. 신명기 7: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殄滅)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느헤미야 13:23-27, “그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40절]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뜻’이라는 원어는 ‘의견, 판단’이라는 단어이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는 말씀은 그의 교훈이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은 교훈임을 증거한다. 남편을 사별한 자들은 재혼치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

25절부터 4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지나간다. 결혼 생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 것들로 인하여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또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도 말고 자랑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즐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너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독신(獨身)은 유익이 많다. 본문은 전체적으로 성도가 결혼하는 것보다 결혼하지 않고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 더 낫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힘을 주시면, 확실히 독신(獨身)은 성도가 주를 위해 살 수 있는 더 좋은 길이다. 오늘날에도 남녀 성도들 가운데 이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고 교회 일에 전심으로 봉사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면 좋겠다.

셋째로, 성도의 결혼은 주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바르게 인식시키고, 이를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주 안에서의 결혼은 결혼하는 당사자들의 행복에 직접 관계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주시는 평안이 넘칠 것이다.

 

8장: 우상 제물에 대하여

8장부터 10장까지는 우상 제물에 대하여 교훈한다.

[1-3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 . . .

바울은 말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우상 제물에 대하여는 초대교회 안에 이미 충분한 지식이 있었던 것 같다. 신앙생활에 지식은 꼭 필요하지만, 지식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그러므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랑이 없다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자이다. 우리는 지식과 사랑을 함께 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를 사랑할 때 그의 아시는 바 된 자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 지식은 사랑으로 온전케 된다.

[4-6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마치]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있는 것 같으나](원문, KJV, NASB, NIV)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초인간적 존재, 신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이 우상에 대한 바른 지식이다. 세상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시 96:5; 115:4-7). 옛날부터 사람들은 참된 신이 아닌 많은 거짓 신들을 상상해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신격화하였고 또 땅의 나무들이나 돌이나 짐승들을 신격화하였다. 종교들의 역사와 현상만 본다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신다. 그는 온 우주의 아버지이시며 만물은 그에게서 나왔다. 세상의 물질 세계나 영들의 세계는 다 그에게서 나왔고 우리 인생도 그에게서 나왔다. 이 창조의 하나님 외에는 참 신이 없다(렘 10:10-11).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요 1:3; 골 1:16). 특히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뜻이 있다. 구약성경의 여호와라는 명칭은 신약성경에서 ‘주’(퀴리오스)라고 번역되었다.

[7-8절]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우상의 생각을 가지고](전통본문)12)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지느니라]. [그러나]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우상숭배는 우상을 초인간적, 신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참 경건에서 떠나게 하는 사상이며 마귀가 주는 헛되고 거짓된 사상이다.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을 때 죄가 된다.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더럽게 만든다. 그러나 음식과 신앙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음식을 먹어서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지는 것은 없다.

[9-11절]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자유함’이라는 원어(엑수시아)는 ‘권리’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먹을 권리가 성도에게 있을지라도, 그 행위가 약한 자들에게 거리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교회 안에는 아직도 우상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우상의 제물이 복을 가져올 것처럼 생각하는 연약한 성도들이 있다. 그들은 지식 있는 자가 우상의 집에서 먹는 것을 보고 양심이 잘못된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생각하며 먹음으로 범죄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지식 있는 자의 행위는 그 연약한 자들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지식을 가진 자의 행위가 약한 형제로 범죄케 하여 그를 멸망케 한다면, 그것은 결코 선한 행동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멸망케 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면 우리도 그를 위해야지 그를 멸망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2-13절]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형제는 그의 몸된 교회의 지체이므로 그에게 잘못을 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마 25:40, 45).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서로 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께서 고난당하시고 피흘려 사신 형제를 나도 사랑하고 그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힘쓰겠다는 마음은 바르고 선한 결심이다.

이것을 술과 담배 문제에 적용해보자. 만일 교회 직분자가 술과 담배를 함으로 초신자가 술취하는 자나 애연가가 된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는가? 또 이것을 교회적 교제의 문제에 적용해보자. 만일 어떤 순진한 목사가 자신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서 성경을 부인하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을 포용하는 교단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 3)는 말씀을 실천하기는커녕 진리의 싸움을 싸우기 싫어하며 침묵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 목사의 행동 때문에 많은 성도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에 빠지고 젊은이들이나 신학생들이 자유주의의 악 영향을 받게 되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목사들은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교단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밝히 증거해야 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 둘째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으면 양심이 더러워진다. 그것은 우상을 신적 존재로 인정한 것이므로 우상숭배가 된다. 셋째로, 우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약한 형제를 범죄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이것은 술과 담배의 문제에도 적용되고, 또한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포용하는 교단에 머무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금주, 금연해야 하며 성경을 믿는 목사와 성도들은 자유주의적, 포용주의적 교단에서 나와야 한다.

 

9장: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

1-18절, 사도의 권리를 제한함

[1-2절]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바울은 종의 신분이 아니고 자유자이었다.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였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바울은 자유자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보았다. 바울의 사도직은 고린도교회에서 증거되었다. 주께서 그를 세워 복음의 전파자로 사용하신 구체적 한 증거가 바로 고린도교회이었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 사역에서 맺혀진 열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은 주 안에서 그 교회와 교인들에 의하여 확증된다.

[3-5절]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할 것이 이것이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대답]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그는 그의 사역을 트집잡는 자들에게 대답한다. 무슨 일이든지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하면 한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하며 감사히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만(딤전 4:4), 그는 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 먹고 마시는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였다.

결혼 문제도 그러하다.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는 결혼하였고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 ‘주의 형제들’이란 예수님의 육신적 동생들 즉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을 가리킨다(마 13:55). 결혼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독신의 길을 택하였다. 그것은 좀더 복음 사역에 자유롭게 전심 전력하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 것이었다. 그것은 가능하고 때때로 필요하고 유익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포기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6-7절]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自費糧)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복음 사역에만 전념하고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세상에 자비(自費)로 군인이 되는 자는 없다.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의무적인 군 복무도 의식주와 약간의 용돈을 공급받는다. 세상에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 열매를 먹지 못하거나 양떼를 기르고서 양떼의 젖을 마시지 못하는 일은 없다. 일꾼이 먹을것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다 쓰지 않았다. 그는 친히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필요한 돈을 벌었다(행 18:1-3).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다”고 말했었다(행 20:33-35).

[8-10절]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바울은 구약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모세 율법’이라고 언급하였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들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그 중 하나인 신명기를 모세의 책으로 증거하였다. 인용된 말씀은 일차적으로 소에 대한 말씀이지만, 그 이치는 비슷하다. 소를 먹이면서 일을 시켜야 하듯이,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야 한다. 교회가 전임 봉사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고 생활비를 드리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한 일이다.

[11절]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신령한 것’은 복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육신의 것’은 의식주에 관한 것을 말한다. 신령한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육신의 것은 100년 동안만 유용한,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물질에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돈을 가지고 영원한 진리를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가치를 안다면 그 진리를 연구하고 전하는 주의 종들에게 하는 물질적 필요의 공급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12절]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그는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 자유와 권리를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보화이다. 인생의 참 가치, 참 기쁨, 참 행복, 참 생명이 그 안에 있다. 이 복음과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그 복음이 장애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현세적인 것을 양보하고 그것을 사용할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제한한 것이다.

[13-14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제물의 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부분은 먹도록 되어 있었다(레 2:3; 7:14, 31, 32).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가르치셨다(마 10:9-10). 주의 일꾼들이 일터에서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15절]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바울은 이런 당연한 권리들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의식주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독신으로 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도 의식주 문제나 결혼에 있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절제하고 제한할 수 있다. 그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복음은 영혼 구원의 소식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많은 기적들로 자신를 증거하셨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제 죄인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한 소식이며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일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부득불 할 일, 즉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주께서 그에게 맡기시고 명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해야만 할 의무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 말했다.

[17절]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임의로’라고 번역된 원어는 ‘자원해서, 자발적으로’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가 다 의무적으로 전임전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의 일반적 의무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경건하게 살고 성경 말씀대로 죄 짓지 않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또 힘있는 대로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자 중 누가 육신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원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전임전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상을 얻을 일이다. 주께서 요구하시는 신자의 의무 이상으로 자신을 주께 드릴 때 분명히 주께서 칭찬하시고 상을 주실 것이다. 모든 신자가 반드시 전도대원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전도의 일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주께로부터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을 받았다. ‘직분’이라는 원어(오이코노미아)는 ‘임무’라는 뜻이다. 바울은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복음 전도의 의무 아래 있고, 그 직분과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도 주께로부터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받았다. 목사와 장로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보살피는 임무를, 권사는 교인들을 격려, 권면하는 임무를, 집사는 교회의 재정 봉사의 임무를 맡았다. 교회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18절]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마땅한 의무이므로 거기에서 상을 기대할 것은 없다. 단지, 그의 상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고 그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데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무를 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상을 기대할 것이 없겠지만, 의무 이상을 행했을 때, 즉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행했을 때 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사도이었지만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삶을 살았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정당하지만,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자신을 절제하였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는 스스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그는 직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모든 복음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 자기 절제의 본이 된다.

19-27절, 권리를 제한한 목적

[19-21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전통본문에는 없음)13)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종이 아니고 자유인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종처럼 처신하였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는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 처신하였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마치 자신도 율법 아래 있어서 율법의 의무를 지키는 자인 것처럼 처신하였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때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들을 인해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는데, 그 까닭은 사람들이 그의 부친이 헬라인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행 16:3). 그러나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에게는 비록 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 없는 자같이 처신하였다. 그것은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얻고자 함이었다.

[22-23절]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그는 약한 자들을 대할 때 자신도 약한 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그들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는 실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진리와 의 안에서의 처신이어야 하며 비진리와 악을 포용하는 처신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악을 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진리와 의 안에서, 즉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비웠고 현실의 환경에 최대한으로 자신을 적응시키려 하였다.

바울의 행동 원리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이었다. 이로써 그는 복음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복음의 일은 영혼 구원의 일이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영혼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심지어 포기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같이 복음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포기할 자는 없는가?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인 복음의 일, 곧 영혼 구원의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리자.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 . . .

바울은 말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달리기 경주에서 많은 사람이 출발점에서 출발 신호를 받고 달리기 시작하지만, 1등의 상은 한 명에게만 돌아간다. 그 상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이 달리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치 달리기 경주와 같다. 물론 신앙의 경주에서 상 받는 자가 한 명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상을 얻기 위해 달리는 경주자들처럼 우리도 상급을 기대하며 힘써 달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모든 성도는 경주자처럼 열심히,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는 말은 일반적 진리이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나 금메달을 목에 거는 운동 선수들의 삶이 그러하다. 시간을 아끼고 육신적 즐거움을 절제하는 자만이 그런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영적 생활도 비슷하다. 사실 영적 생활은 더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경쟁은 썩어질 면류관을 얻으려는 경쟁이나, 영적 경쟁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는 경쟁이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벧전 1:9) 곧 영생이며(롬 6:22) 하나님께서 주시는 존귀와 영광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썩는 것이지만, 영생은 영원히 썩지 않을 존귀하고 영광스런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시간 절제, 돈 절제, 힘 절제, 의식주 절제 등 절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6-27절]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람은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다. 교회 봉사자는 단순히 열심히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싸우는 자가 상대를 치지 않고 허공만 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바울의 목표는 영혼 구원의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성도도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의 욕망대로 따라가면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도자라 할지라도 죄 가운데 빠져 산다면 그는 남은 구원해놓고 자신은 버림받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상적 경고이다. 참으로 중생한 자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성경에 종종 나오고 또 필요한 경고이다(롬 8:13). 그러므로 바울은 주께서 주신 영혼 구원의 임무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범사에 절제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우리의 몸은 편안하고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며 몸의 욕구대로 살면 실패자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영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앞에 놓고 자신을 절제하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할 것이다.

본장은 바울이 자신의 독신 생활과 손으로 일한 생활을 들어 우리의 절제 생활을 권면한 말씀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독신(獨身)의 길을 택했고 또 손으로 일하면서 전도 활동을 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제한하였고 심지어 포기했다. 또 그는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웠고, 자신을 현실의 여러 환경에 최대한 적응시켰다. 물론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울처럼 헌신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예는 우리에게 놀라운 도전이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은 바울의 삶에 비교하여 어떠한가?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일을 위해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어느 정도나마 제한하고 포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달리기 경주자가 이기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며 힘써 달리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돈을 주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드리며 모든 일에 절제하며 영생과 천국을 향해 힘써 달음질하여야 한다.

 

10장: 우상숭배치 말 것

1-13절, 실패의 본보기들

[1-4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았다. 구약성경에 증거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제적 예로서 모든 인류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였던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 광야를 통과할 때 있었던 일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때 다 구름 아래 있었다. 구름기둥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출 13:21-22). 또 그들은 바다 가운데로 지나갔다. 그 바다는 홍해이었다(출 14:21-22).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연합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죽음의 바다에서 구원을 얻었다. 또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었고(시 78:25; 105:40),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셨다(출 17:5-6). 바울은 그 반석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양식이시요 참 음료이시다(요 6:48, 51, 55; 7:37-39). 그는 만나같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며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같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되신다.

[5-6절]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의 옛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의 남자들 약 60만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광야에서 죽었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는 우리의 거울과 본보기가 된다. ‘거울’이라는 원어(튀포이)는 ‘예들, 본보기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본보기들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 같이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며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7-8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에서 가장 큰 죄는 우상숭배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혜와 참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우리는 하나님 외의 것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육신적 쾌락도 돈도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바꿀 수 없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사랑하고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순종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인간 관계의 죄들 중 첫째로 중요한 죄는 간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부 관계를 벗어난 음란 행위들을 매우 미워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음행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큰 재앙으로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부부의 관계를 중시하신다. 우리 각 사람은 가정의 순결과 부부의 사랑을 잘 지켜야 한다.

[9-10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그리스도](전통본문)14)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중에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의심하였고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았다. 이것은 불신앙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고 늘 함께하시며 도우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그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질병에 걸렸을 때나 물질적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도 불평하지 않을 수 있다.

[11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말세를 만난 우리’라는 말은 신약시대가 말세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지구의 역사는 현재까지 약 6천년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정확한 역사책이다. 지질학에 의한 수십억년의 연대는 주로 방사성 우라늄 동위원소의 반감기에 의해 측정한 것인데, 지금부터 수천년 전의 지구의 상태를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추론일 뿐이지 결코 확증된 연대가 아니다. 아담은 창조된 후 거의 천년 가량 살았고 그가 죽은 지 얼마 후 노아가 태어났다. 아담 창조 후 2천년경에 아브라함이, 3천년경에는 다윗이, 그리고 4천년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마지막 때에 자기 아들을 보내주셨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2천년이 지나고 있으니 확실히 지금은 말세지말 즉 말세의 마지막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또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경계가 된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에 빠져 실패자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12-13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섰다’는 말은 믿음 안에 섰다는 뜻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정상적 상태이다. ‘넘어진다’는 말은 범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기 때문에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그것도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한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주를 의심하는 불신앙에 떨어지지 말고 믿음으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면서 늘 의와 선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도우실 것을 기억하고,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상숭배나 음행이나 불신앙이나 원망 등의 죄를 범하지 말고 오직 범사에 믿음으로 행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14-22절, 우상숭배를 피하라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바울은 말한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우상숭배는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적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육신의 쾌락이나 돈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5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불렀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피해야 한다.

[15-18절]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축복의 잔과 떼는 떡은 성찬을 가리킨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성도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루신 속죄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찬의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며 그 떡을 조금씩 떼어 나누는 것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신비적으로 한 몸이 됨을 나타낸다. 또 제물을 먹는 자들, 즉 화목제물을 드린 후 그 일부분을 먹는(레 7:15-17)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에 참여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주시는 은택을 누리는 것이다.

[19-20절]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미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였다(고전 8:4). ‘대저’라는 원어(알르)는 ‘그러나’라는 뜻이다. 이방인의 제사는 종교적 성격을 띤다. 구정이나 추석 때에 조상들을 위해 드리는 제사나 차례는 단순히 조상을 공경하는 행위가 아니고 종교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우상이나 조상신은 신적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들에게 하는 악하고 헛된 일이다.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들의 우상을 인정하고 그 우상숭배에 빠져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1-22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질투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성도는 이방인의 제사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신자가 섬기는 우상이나 조상신을 인정하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진다면 주께서 우리에 대하여 노여워하시고 질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한 분만 섬기며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다투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므로 우상숭배이며 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의 상에 참여하는 것, 즉 그들의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런 우상숭배를 피해야 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며 질투하시게 만드는 가장 큰 죄악이다.

23-33절, 덕을 세우라

[23-24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모든 것이 [내게]15)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16)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는 우상제물에 대한 지식과 자유함이 있음을 강조한다. 8장에서도 그는 성도들이 우상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고 자유함과 권리가 있음을 말했었다(1, 7, 9, 10, 11절). 그러나 비록 모든 것이 가하며 우상제물에 대해 자유함이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8장부터 10장까지에서 우상제물에 대한 교훈의 방향은 분명하다. 우상제물은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우상제물을 먹으라는 교훈이 아니고 먹지 말라는 교훈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서이지, 우상제물 자체의 불결함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주를 아는 자라면, 우리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이들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25-26절]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치 말고 사서 먹으라는 뜻이다.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는 말씀은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 혹시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임을 알게 될 때 약한 자들의 양심에 거리낌이 될 수 있으므로 묻지 말고 그냥 먹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세상에 우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상은 신이 아니다. 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알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청지기의 심령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27-30절]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전통사본).17)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불신자가 식사 초청을 할 때 성도는 가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식사 초청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예절 없는 일일 것이다. 그때 그 앞에 차려진 식탁에 우상제물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함께 동참한 자들의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그냥 먹으면 된다. 그러나 어떤 이가 식탁의 음식물 중 어떤 것을 우상제물이라고 말하면 그는 알게 한 자의 양심을 위해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비록 지식 있는 자는 그것에 대해 자유함이 있을지라도, 함께 식사하는 이들 가운데 연약한 자의 양심에 거리낌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상제물이라고 알게 된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옳고 그래야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하는 것, 곧 덕을 세우는 것이 된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먹는 일에 비방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

[31-33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이것은 모든 성도의, 아니 모든 인생의, 삶의 제일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게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7). 바울은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였다(6:19-20). 원문에서는 주동사가 ‘되라’(기네스데)라는 명령어이다. 32-33절을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같이, 너희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넘어지게 하지 않는 자가 되라.” 이것은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과 유익을 위하여 행하라는 교훈이다.

우상에 대한 지식을 가진 성도라도 우상의 생각을 가진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거리낌을 주지 않도록 행해야 한다. 즉 그들이 우상제물을 우상제물로 알고 먹어 우상숭배의 죄에 떨어지게 하지 않도록 덕스럽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의 구원과 유익을 위하는 자가 되고 그를 범죄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11장: 머리 수건과 성찬

1-16절, 머리 수건 문제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본절은 앞장의 내용에 이어진다고 본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았다고 말한다. 성화의 과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쁜 본보기가 아니고 이상적 인격의 본이시다. 그는 특히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본이시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고(마 11:29), 또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들만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거짓과 위선은 신앙 운동, 구원 운동, 교회 운동에 큰 장애물이다. 우리는 참된 믿음과 실천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2절]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교훈과 규례를 잘 지켰다.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한 바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지키고 그 교훈대로 믿고 실천한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을 것이다. 자기 생각과 주관을 따라 성경 말씀을 가감하고 그대로 행치 않는 것은 책망들을 일이지만, 자기 생각을 꺾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믿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칭찬들을 일이다.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남녀의 지위의 차이와 머리 수건 문제에 대하여 말한다. 구원받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머리’라는 말은 주관자라는 뜻이다. 각 남자의 주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각 남자는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남녀의 지위의 차이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남자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이것은 남녀가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 차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였다(3:28). 남녀는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러나 남녀는 그 위치와 역할에 있어서 다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있어서 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본체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딤전 2:5) 하나님은 그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다(요 14:28).

[4-6절]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 . . .

바울은 말한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들은 공예배시 기도할 때나 설교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고 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는 것은 대표기도나 개인적 기도에 다 적용되는 것 같다. 또 예언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아 말하든지 아니면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오늘날 설교에 해당한다. 교회의 집회시 기도나 설교를 할 때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공적인 집회시 여자들이 기도나 예언을 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승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본 서신의 뒷부분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4:34). 성경은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교회의 공적 집회들에서 대표기도나 설교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여자들이 여성도만의 모임이나 미성년자들의 모임에서는 기도나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여자들은 공적인 집회들에서 기도나 설교를 할 때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지 않으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머리를 밀거나 깎은 것과 같이 그에게 부끄러움이 되었다.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여자의 머리가 남자 곧 남편이며 여자는 그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표시한다. 여자들은 교회생활에서 머리에 무엇을 씀으로써 그 사실을 표시해야 하였다.

[7절]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영광임이니라].”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그 영광을 가리우지 않고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할 이유는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기 때문에 그가 자기 머리를 가리움으로 자신이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 남녀가 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신 후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이제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 되었고 그 둘이 연합하여 이룬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남녀의 대표는 남자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은 남자가 여자 없이 홀로 가지는 것이 아니고 여자와 함께 가진다.

[8-10절]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 . . .

바울은 말한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천사들을 인하여’라는 말은 교회의 공적 집회 시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성도와 함께함을 가리킨 듯하다. ‘권세 아래 있는 표’(엑수시아)라는 원어는 ‘권세’라는 말인데, 그것은 머리 수건의 의미를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그 지위와 역할에서 구별된다는 것은 인간 창조의 사건에서 잘 증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 다음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여자는 남자와 별개로 창조되지 않았고 남자에게서 만들어졌다. 또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일차적 목적은 남자를 돕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남녀의 위치와 역할의 차이가 있다. 여자의 머리 수건 혹은 모자는 그가 그의 머리되는 남편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여자의 지위와 기능, 그리고 단정함과 여자다움의 표가 된다.

[11-12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남녀는 비록 지위적, 기능적 차이가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다. 또 남녀는 사실상 상호의존적이다. 아담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출생하였다. 그러므로 남녀의 역할이 차등하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남녀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13-16절]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 . . .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 때에 기도하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여자의 여자다운 표, 여성의 단정함과 아름다움의 표는 교회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은 그것이 머리를 가리우기 때문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그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며 긴 머리도 합당치 않다. 남자의 긴 머리는 남녀의 구별을 깨뜨린다는 점에서도 합당하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구별하셨기 때문에, 머리나 복장도(신 22:5) 구별되어야 한다. 남자는 남자다운 머리와 복장을, 그리고 여자는 여자다운 머리와 복장을 할 필요가 있다. 남녀의 구별된 머리와 복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다운 머리모양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긴 머리는 여자에게 영광이 되며 머리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이다. 교회에서 기도와 설교를 할 때 남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해야 하며 여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든지 아니면 긴 머리를 가지든지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인정된 규례이므로 누구든지 이 문제에 대해 변론하지 말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을진대 그러하다. 그러므로 모든 남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그를 본받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 섬김과 희생을 본받아야 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남녀는 본질적으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는 구별이 있고 차등하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자기의 머리가 남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질서대로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여자는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든지 긴 머리를 단정하게 하는 것이 좋다. 여자의 머리 수건이나 긴 머리는 여자가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여자의 긴 머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여자의 여자다움과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본문의 중요한 내용이다.

17-34절, 주의 만찬에 대하여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모임이 유익되지 못하였음을 지적한다. 교회의 집회는 유익한 모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임을 통해 유익을 얻어야 하고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승천 후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서로 교제하며 성찬의 떡을 나누었고 또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 오늘날도 교회의 모임들이 유익한 모임이 되려면, 성경 말씀이 충실히 강론되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마음을 합하여 힘써 기도하는 모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18-19절]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은 소문을 듣고서 고린도교회 안에 분쟁과 분열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므로 일치와 단합을 유지해야 한다. 거기에 분쟁과 분열과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교회의 일치와 단합은 단순히 외적이지 않고 내적이며 정신적이며 사상적이어야 한다.

‘편당’이라는 원어(하이레세이스)는 ‘이단들, 파당들’이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는 때때로 이단들과 파당들이 있다. 그것은 교인들의 지식과 믿음 그리고 인격과 삶이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탄이 교회들 안에 자기의 종들과 위선자들을 심는다. 교회 안에 있는 이단들과 고의적 파당들은 나쁜 것이지만,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 곧 바른 사상과 인격을 가진 자들이 드러난다. 오류들이 있어야 바른 견해와 입장이 드러난다. 교회 안에 오류들이 있는데도 만일 싸움과 갈등이 없다면 교회 전체가 다 병들게 될 것이다. 포용주의는 진리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단 못지 않게 나쁘다.

[20-22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교회의 모임은 거룩한 성찬 모임이 되지 못하고 단지 식탁 교제의 모임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음식은 각자 집에서 가져왔다. 게다가, 교회의 분열과 파당 때문에 교인들은 다함께 식사하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먼저 먹고 마심으로 취하기까지 했고 어떤 이들은 기다리느라고 시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 교회의 큰 흠과 결함이었다. 주께서 성찬을 제정하신 지가 불과 20여년밖에 안 되었을 그때에 고린도교회의 성찬은 무질서한 교제의 식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 교회는 참으로 급속히 타락했다.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이었다. 고린도교회는 교회답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시고 교정하기를 원하셨다.

교회는 분쟁과 파당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이요 마귀의 시험이다. 더욱이, 우리는 교회의 거룩한 모임을 업신여기고 교회의 가난한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들을 해서는 안 된다.

[23-25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전통본문).18)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찢는]19)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원문)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셨으니.”

바울은 성찬의 의미를 증거한다. 우선, 성찬은 주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신 규례이다. 그것은 그가 잡히시던 밤에 제정되었다. ‘잡히시던’이라는 원어(파레디데토)는 ‘배반당하시던’이라는 뜻이다. 주 예수께서는 가룟인 유다에게 배반당하시던 그 밤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이 규례를 명하셨다.

성찬의 떡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양손과 양발이 못박혀 찢어지시고 머리가 가시면류관으로 찢기시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상하셨다. 그의 고난은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가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면서 이 의식을 행해야 하였다.

성찬의 잔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주께서는 그 피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새 언약’ 곧 신약은 ‘옛 언약’ 곧 구약을 전제한 말이다. 구약과 신약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역사의 요약이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제목이 되었다. 그러면 구약은 무엇이고 신약은 무엇인가?

구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다. 그것은 율법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거기에는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인 것을 깨우치기 위한 요구이며, 율법 아래서도 성막제도나 제사제도를 통하여 죄인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중보자의 희생으로 죄씻음을 얻을 것이 암시되어 있다.

신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와 맺으신 언약이다. 그것은 복음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거기에는 “믿으라. 그러면 살리라”는 은혜의 선언이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물론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선하신 뜻에 순종하며 바르게 살아야 한다. 구약에 암시되고 증거된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성취되었고 새 언약이 선포되었다. 성찬은 이 새 언약의 표와 확증이 된다.

‘내 피로 세운’이라는 말은 피가 죄를 속(贖)함을 말한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贖)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레 17:11).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했고, 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했다(히 9:12, 22). 피가 중요했다.

[26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은 상징적 의식으로 표현되는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쁜 소식의 핵심적 내용은 예수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의 죽으심이다. 그의 죽으심에 큰 의미가 있다. 물론 그는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살아계시고 믿는 이들 속에 영으로 살아계시지만, 그의 생애에 있어서 그의 죽으심은 속죄라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이 죄인들을 위한 복음 곧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22-24). 성찬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다.

인간의 죄들에 대하여는 두 가지 가능한 조치밖에 없었다. 하나는 심판이요 다른 하나는 속죄이다. 심판뿐이라면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죄가 있었다. 속죄란 속죄제물이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많은 죄인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속죄의 죽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에겐 속죄도, 죄씻음도, 구원도, 영생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야 한다. 오직 그에게 나아오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이미 그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형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그는 영광의 주로, 세상의 심판자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에 대해 알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27-2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의 떡과 잔은 주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다. 물론 떡이나 포도즙이 예수님의 몸이나 피가 아니고 또 몸이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지만, 상징적 의미에서 그 떡은 곧 주님의 몸이요 그 잔은 곧 주님의 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들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죄’라는 원어(크리마)는 ‘정죄, 심판’이라는 뜻이다. 성찬의 의미가 그러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을 살핀 후에, 그리고 성찬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이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께 정죄당하게 될 것이다.

[30-32절]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 . . .

바울은 말한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잘못된 태도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 고린도교회 안에는 심신으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았고, 잠자는 자 곧 죽은 자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성찬에 바르게 참여하면 그것이 구원의 확증이 되고 은혜가 되지만,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하면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죄가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를 판단하여 징벌하시기 전에 성도는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성도가 주의 판단과 징계를 받는 것도 유익이 있다. 그가 참으로 택함받은 자요 구원받은 자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냥 버려두지 않고 질병과 고난, 심지어 죽음으로 징계하실 것이다. 히브리서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하였다. 성도가 당하는 징계는 결코 하나님의 미워하심 때문이 아니고 사랑하심 때문이다. 징계는 성도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성도는 고난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하여 거룩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자가 된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받는 징계는 세상이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심판에 비하면 가볍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이 세상과 함께 영원히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미리 그들을 근실히 징계하신다.

[33-34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고린도교회는 성찬식을 바르게 거행해야 했다. 이제는 그 의식이 파당적인 식사, 그것도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로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모일 때는 서로 기다리고 혹 시장한 자는 집에서 먹고 와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한 모임이 정죄받는 모임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이외의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곳에 가서 바로 잡겠다고 말한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그것은 주의 재림 때까지 시행되어야 한다. 주의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며 또 전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마음으로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된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생각하며 먹고 마셔야 한다. 바른 지식과 믿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된다.

 

12장: 성령의 은사

12장부터 14장까지는 성령의 은사들에 관한 교훈이다.

1-11절,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1-3절]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신령한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사람은 돈이나 건강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관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 지식도 가지지만, 하나님과 죄와 구원에 대하여는 관심이 적고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상 영적인 것들은 더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우리에게 참 기쁨과 평강이 되신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닌 자들이었으나 이제 그 허무한 것들에게서 구원을 받아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와서 그를 섬기는 자들이 되었다(살전 1:9).

성도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구원을 받는데 그때 바른 신앙고백을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저주할 자’(아나데마)[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의 고백은 성령의 역사이며 구원받은 표시이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죄로 죽었던 영혼들을 살리시고 그들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게 도우신다.

[4-7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사’(카리스마)는 값없이 주시는 재능을 가리키며, ‘직임’(디아코니아)은 봉사의 일이나 직분을 가리키고, ‘역사(役事)’(엔에르게마)는 일하심이나 활동하심을 가리킨다.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들과 직임들과 역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이다. 성령께서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목적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것은 개인의 유익보다 특히 교회 전체의 유익을 말하는 것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한 활동들은 교회의 유익과 영적 건립을 위한 것이다.

[8-11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 . . .

바울은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지혜의 말씀’은 현실에 바르고 민첩하게 대처하게 하는 말씀을 가리키며,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이 둘은 설교나 가르침의 직분에 관계되는 은사들일 것이다.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리라는 강한 믿음을 가리키고, ‘병고치는 은사’는 기적적으로 병들을 고치는 능력을 가리킬 것이다. ‘능력 행함’은 병고치는 것 외의 기적들을 행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예언함’은 하나님의 뜻을 대언(代言)하고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을 가리키고, ‘영들 분별함’은 사람들의 생각들과 사상들의 분별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각종 방언 말함’은 각 나라 언어들을 말함을 가리키고, ‘방언들 통역함’은 그 언어들을 통역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킨다고 본다.

‘방언’이라는 원어(글로싸)는 신약성경에 50회 사용되었는데, ‘혀’라는 뜻으로 17회, ‘언어’라는 뜻으로 8회(행 2:11; 계 5:9; 7:9; 10:11; 11:9; 13:7; 14:6; 17:15),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는 뜻으로 25회(막 16:17; 사도행전에 3회, 고린도전서 12-14장에 21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언어’라는 다른 용어(디알렉토스)는 사도행전에서만 사용되었는데 6번 나온다(행 1:19; 2:6, 8; 21:40; 22:2; 26:14). 특히, 사도행전 2:6, 8, 11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묘사하면서 두 말이 동의어로 교대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글로싸라는 말이 언어라는 뜻임을 증거한다. 오순절에 약 15개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여온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방언(디알렉토스)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고(행 2:6) 또 그들은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디알렉토스)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글로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말하였다(행 2:11). 또 성경에 ‘새 방언[들]’(막 16:17), ‘다른 방언[들]’(행 2:4), ‘방언[들]’(행 10:46; 19:6)이라는 표현들과,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든지, 그것을 기도와 찬송과 감사에 사용한다든지, 그것을 통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등도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의 언어적 성격을 잘 보인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 그러니까 대략 주후 100년경에 중단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은사들을 거두심으로 그것들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칼빈은, “방언의 은사와 그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했다. 워필드는,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중지되었음을 매우 밝히 가르쳤다. . . .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기적들]은 사도시대 교회의 특징이었고 오직 사도시대에 속하였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거두신 까닭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전달하고 확증하는 목적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약성경이 기록되기까지 필요했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거두어졌다. 그것은 마치 건물을 짓기 위해 설치된 비계목들이 건물이 완성된 후 철거되는 것과 같았다.

성령의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동일한 한 성령께서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돌아보신다.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개인을 중생(重生)시키시고 점점 더 거룩하여지게 하시며 마침내 교회 전체가 든든히 세워지게 하신다.

초자연적 은사들 외에,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자연적 은사들을 나누어주심으로 지금도 교회를 세워가신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은사, 영혼들을 보살피는 은사, 병든 자들이나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보며 위로하는 은사,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사 등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심으로 교회 전체가 유익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쓰임받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12-31절, 한 몸, 많은 지체들

[12-13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하셨음이니라].”

사람의 몸은 머리, 눈, 코, 귀, 입, 손, 발 등 많은 지체들이 있는데, 뇌, 위, 간, 폐, 심장 등 약 128개의 기관들과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로 구성되었고, 뇌(腦)는 약 80억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도 많은 지체들과 직분들이 있어 한 교회를 이룬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 된 것은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성령 세례는 민족, 피부색깔, 사회적 신분, 직업, 경제 정도 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죄씻음받아 한 몸이 되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믿는 이들이 두 번째의 경험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들이 이미 받은 것이며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이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성령을 물로 비유하여 성령을 받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요 7:37-39).

[14-20절]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각 지체는 다른 지체와 다르다고 해서 자기가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발과 손, 귀와 눈은 서로 달라도 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다. 또 몸의 각 지체는 다 필요한 지체이다. 몸에는 눈도 귀도 코도 다 필요하다. 한 지체만으론 몸이 될 수 없다. 한 지체만 가득한 몸은 없다. 몸의 각 지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몸의 각 지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21-27절]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의 지체는 어느 것 하나도 불필요하거나 쓸데없는 것이 없다. 눈이 손더러 ‘너는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다. 손이 없다면, 눈이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집어올 수 없다. 또 머리가 발더러 ‘너는 걸어다닐 줄만 알지 생각이 부족하니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다. 발이 없다면, 머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생각해도,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다. 이와 같이, 몸의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무시하여 쓸데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몸의 지체들 중에는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한 것이 많다. 눈은 약한 지체이지만 참으로 중요하며, 두뇌나 심장이나 폐 등도 약하지만, 매우 중요한 지체들이다. 또 몸의 지체들 중 덜 귀히 여기는 것이나 덜 아름다운 것은 옷을 입히거나 신을 신기지만, 아름다운 얼굴은 가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를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신다. 그래서 각 지체로 서로 싸우거나 분열치 않고 서로를 돌아보게 하시는 것이다.

몸의 지체 중 한 부분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다. 몸의 모든 지체는 그 아픔을 함께 나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지체는 없다. 모든 지체가 한 몸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는 함께 그 영광을 누리며 즐거워한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성악가는 입과 목만 칭찬을 받지 않고 온 몸이 칭찬을 받고, 금메달을 딴 마라톤 선수는 발과 다리만 축하를 받지 않고 온 몸이 축하를 받는다. 모든 지체는 한 지체의 영광에 참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 몸의 각 지체이다. 그러므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과 다르다고 자기는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각 지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한 지체만 가지고 몸이 될 수는 없다. 또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무시하지 말고 서로 분쟁하지 말고 서로 돌아보아야 한다. 한 지체의 고통은 모든 지체의 고통이요, 한 지체의 영광은 모든 지체의 영광이다.

[28-31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교회 중에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셨고 여러 직분자들을 세우셨다. 바울은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침,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말함 등을 말한다. 에베소서에서 그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을 말했다(엡 4:11).

바울의 의도는 성령의 은사들이나 직분들을 다 열거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한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들과 여러 직분들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뿐이라고 본다. 한 지체만으로는 몸이 되지 못하듯이,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한가지 은사, 한가지 직분만 주신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은사들과 직분들이 있다. 이것이 교회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은사들에는 크고 작음,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함이 있으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다음 장들에서 교훈하는 대로, 더욱 큰 은사는 다른 성도에게 유익을 끼치는 은사, 다른 이들의 믿음과 사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은사를 말한다. 또 ‘제일 좋은 길’이란 다음 장에 말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것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되 사랑의 원리를 따라 하라는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은사들과 직분들을 주셨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 때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또 몸에 지체들이 많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는 많은 지체들, 즉 여러 가지 은사들과 직분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무시하지 말고 서로의 역할과 필요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몸을 세워 나가야 한다.

 

13장: 사랑의 덕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논하다가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는 사랑이 그 어떤 은사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은사를 사모하되 사랑을 먼저 구하며 사랑 가운데서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1-3절, 사랑의 중요성

[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바울은 먼저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는 신기한 일이 있었다.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를 뜻한다. 그러나 방언하는 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사랑은 방언들보다 더 중요하다. 또 예언과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가진 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과 교훈은 아무 쓸모가 없다.

또 믿음과 능력의 은사를 받은 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목적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격자가 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무가치하다. 사람들은 큰 믿음과 능력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또 사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구제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드릴지라도 그것이 사랑의 동기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면, 즉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나 영웅심에 도취되어 행한 것 등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

4-7절, 사랑의 성격

[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은 사랑의 성격에 대해 증거한다. 무엇보다 첫째로, 사랑은 오래 참는다. 사랑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이 감정이라면 그것은 영속적 감정이다. 사랑은 머리로 잠시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다. 사랑은 조급한 심정을 극복하게 한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아내로 얻기 위해 7년 동안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했으나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창 29:20).

사랑은 또한 온유하다. ‘온유하다’(크레스튜오마이)는 원어는 ‘친절하다’는 뜻이다. 거칠고 사나운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집안에 애완용 강아지를 사랑해도 그것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는다.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고 그들을 구타하지 않고 말이나 표정이나 행동에 있어서 친절할 것이다.

사랑은 또한 투기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가 잘되는 것을 샘내거나 질투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축하할 것이다. 또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자랑은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자랑은 그런 자랑거리가 없는 상대방을 낙심케 하거나 슬프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배치된다. 사랑은 또한 교만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 앞에서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사랑은 또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히 행하다’는 원어(아스케모네오)는 ‘보기 흉하게 행하다’는 뜻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절을 지킨다. 사랑은 또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다.

사랑은 또한 성내지 않는다. 사람이 진리와 공의를 위해 성내는 경우가 드물게 있고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하면 기뻐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고 손해가 되면 화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의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사랑은 또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 사랑은 남을 위한 선한 마음가짐이요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참 사랑은 결코 불의를 행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 참 사랑은 성결하고 의롭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그냥 죄 없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독생자에게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시키심으로 공의롭고 정당하게 우리를 구원하셨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우리가 참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이것은 불의와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고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하다. 진실한 성도간의 관계는, 비록 지금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

8-13절, 사랑의 영원성

[8-10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쇠잔하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바울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은 완전한, 이상적 인격의 특성이다. 사랑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생활 원리이며 영광스런 부활체들의 속성이다.

사랑의 영원성에 대조하여,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의 일시적 성격을 말한다. 여기에서 또 한번 사랑의 가치가 드러난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간의 가치적 차이는 무한히 크다. 그러면 사랑의 중요성이 충분히 증명되며, 우리가 사모하여야 할 덕이 무엇인지 확실히 분명해진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일시적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부분적인 것에 관계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지식의 은사는 부분적인 지식에 관계되고 예언의 은사도 부분적인 것에 관계된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에 관계하던 은사들은 폐지될 것이었다.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시기는 온전한 것이 올 때이며, 폐지될 이유는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에 관계된 것들이 불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충족한 지식, 충족한 예언이 오게 되면 부분적인 지식, 부분적인 예언은 불필요하게 된다.

여기에 ‘온전한 것’은 무엇이며,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언제인가?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성경을 연구하면서 이것은 신약성경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게 된다. 신약성경 27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과 교훈에 관한 한 ‘온전한 것’이다. 사도시대에 신약성경 27권이 다 기록되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충족한 지식과 교훈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지식의 은사, 부분적인 예언의 은사 등 사도시대 교회에 있었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후 시대에 불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들은 중지되고 폐지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11-12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초보적 성격을 말한다. 초자연적 은사들은 마치 사람의 어린 시절과 같다. 어린 시절에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리다. 어느 날 심방갔다 오다가 길에서 한 성도의 어린아이를 보았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였다. “모싸님 안넹 가쩨오.” 나는 그 귀여운 말을 다 알아들었다. 어떤 유치부 아이는 선생님 사진을 보다가 선생님의 바지가 바뀐 것을 보고 말했다. “선생님도 쉬쌌어요?” 그것은 그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시기는 교회가 장성한 사람이 될 때이며 그 이유는 그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성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어린아기에게는 젖병과 장난감들이 필수품이지만 크고 나면 더 이상 필요치 않듯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교회의 창설시기의 것들이며 후시대의 것들이 아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진리의 지식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고 불명료하다. 그것은 마치 쇠로 만든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온전하게, 충족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 27권의 완성된 계시가 초자연적 은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전체적이고 명확하고 충족한 말씀일 것을 암시한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완성된 특별계시이며 그의 명료하고 충족한 말씀이다.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본절은 13장의 결론이다. 믿음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경건하고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을 믿는 것이다(요 20:30, 31; 21:24). 그것은 모든 성경을 다 믿는 것이다(행 24:14).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과, 영광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세상의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필수적 덕목들이다. 성도에게는 믿음도 꼭 필요하고 소망도 꼭 필요하고 사랑도 꼭 필요하다. 믿음은 구원의 방법이며 소망은 힘과 위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꽃이요 열매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도들의 필수적 덕목들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은 참된 믿음과 소망의 결과요 증거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이다.

사랑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고 교만치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기적이지 않다.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쳤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필요하며 그 중 사랑이 제일이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자.

 

14장: 방언과 예언

본장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에 대하여 증거한다.

1-19절, 예언이 방언보다 나음

[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 . . .

바울은 말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원어(디오케테 텐 아가펜)는 ‘사랑을 구하라’(개역개정)는 뜻이다. 사랑은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사랑의 덕을 구하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영적 은사들을 구하라는 뜻이다. ‘신령한 것’은 영적 은사들, 곧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물론 사도시대이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가르친 줄 안다. 만일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한다면, 은사들을 사모하지 말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고 성경으로 권면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다(눅 16:29-31; 계 22:18-19). 바울은 그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사모하되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가르친다. 본절의 내용은 본장 전체의 요지이다. 즉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이다. ‘예언한다’는 원어(프로페튜오)는 일차적으로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한다는 뜻보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론 때때로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豫言)도 포함한다.

[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방언을 말한다’는 말(랄레온 글로쎄)은 ‘방언으로 말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킨다. 본문은 왜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 내용은 4절까지 반복된다. 즉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내용을 ‘비밀’이라고 말한 것은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4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덕을 세운다’는 원어(오이코도메오)는 문자적으로는 ‘(집을) 세운다(build)’는 뜻이고, 비유적으로는 ‘영적 유익을 준다(edify)’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예언 즉 대언(代言)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권면, 위로와 격려 등 영적 유익을 준다. 방언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자기에게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다른 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신앙 지식과 인격과 생활에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생각할 때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방언들로]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이는](전통사본)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사도시대에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 방언들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그들이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그들이 방언들로 말하는 것보다 예언하기를 원하는 까닭은, 방언들로 말하는 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예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크다”고 되어 있다. 예언이 통역 없는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는 뜻이다.

[6-9절]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바울은 만일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가서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교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고 묻는다. 이와 같이 통역 없는 방언이 예언보다 가치가 적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한지 예언하는 것이 필요한지 그 답은 분명하다.

심지어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들도 그것들의 독특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이 피리인지 거문고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또 나팔소리도 다양한 신호의 역할을 한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을 할 때 나팔을 통해 모이라고 알리기도 하였고 앞으로 진행하라고 알리기도 하였다. 또 나팔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의 역할도 했다. 나팔의 소리에 따라 그 의미가 달랐다. 이와 같이 성도가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다. 아무리 방언을 잘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한다.

[10-12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 . . .

바울은 말한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있지만 의미 없는 소리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내게 무슨 말을 했을 때 내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내게 말하는 그에게 야만인이 되고, 내게 말하는 그 사람도 내게 대하여 야만인이 될 것이다.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것은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 영적 건립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훈은 분명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였으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 곧 다른 이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중요하다.

[13-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방언과 예언에 대해 설명하였기 때문에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자신의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통역하지 못하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통역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다른 이들에게 어떤 교훈이나 권면이나 위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의 활동이기는 하나 마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께서 성도의 영을 직접 사용하시는 현상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성도의 영의 활동이었음에 불구하고 그의 지성(知性)은 방언의 내용을 깨닫지 못하였다. ‘마음’이라는 원어(누스)는 ‘생각, 지성, 이해력’을 뜻한다. “나의 마음이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15-17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찬미]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했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영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지성으로 이해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내용을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고 스스로 통역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가 방언으로 찬미하고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성도는 그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다. 그는 감사를 잘하였을지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였다.

[18-19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방언들]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바울은 여러 나라 언어들로 말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방언들로 말하게 되었음을 감사하였다. ‘깨달은 마음으로’라는 원어(디아 투 노오스)는 ‘생각을 가지고, 이해력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한다’는 원어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한다’는 뜻이다. ‘낫다’는 원어(델로)는 ‘원한다’는 뜻이다.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생각을 가지고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하노라”이다. 바울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방언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그 둘의 가치의 차이는 ‘다섯 마디의 말’과 ‘일만 마디의 말’의 대조로 완전히 분명해진다.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말이, 생각을 가지고 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하다.

1절부터 19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면서 교회의 덕과 유익을 생각할 때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교회 안에서 방언이 가치를 가지려면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낫다. 이 진리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오늘날에도 어떤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크게 여기며 사모한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는 신구약성경의 충만한 교훈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성경의 가치와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의 중요성이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깨닫는 말씀, 그래서 남을 권하는 다섯 마디의 말은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의 말보다 낫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선물인 성경을 힘써 배우고 이 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여 교회를 굳게 건립해 나가자.

20-33절, 질서 있는 모임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라는 원어(프렌)는 ‘생각,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본절은 지혜, 생각, 깨달음에 있어서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한다. 악은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 악은 모를수록 좋다. 악은 경험해볼 필요가 없다. 사람 속에는 악의 경향성이 있으므로 악을 알면 알수록 악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생각과 깨달음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며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잠언 23:7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사람됨]도 그러한즉”이라고 말했다.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인격자이며, 생각이 성숙하면 성숙한 인격자이다. 바른 생각, 깊은 생각, 원만한 생각, 완전한 생각은 성숙한 인격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생각에 있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

[21-22절]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바울은 이사야서를 율법이라고 불렀다. 율법은 구약성경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율법서나 역사서나 선지서나 시편은 권위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두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책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 3:16). 또 바울은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이며, 예언은 믿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방언을 구할 것이 아니고 예언을 구해야 하며, 성도가 방언으로 무엇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23-25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교회에는 방언보다 예언이 있어야 유익이 된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지만, 예언은 사람의 죄를 책망하고 숨은 잘못을 드러나게 함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그를 경배케 만들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이미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더욱더 하나님을 알게 할 것이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사도시대 교회의 집회 순서는 주로 찬송과 설교로 이루어져 있었다. 찬송시(프살모스)는 시편 찬송을 가리킨 것 같고, ‘가르치는 말씀’이란 설교에 해당한다고 본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도 교훈적 성격을 가진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의 순서는 사도시대에만 있었고 그 후 시대에는 없어진 순서들이다. 교회의 공예배의 순서들은 다 덕을 세우기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 물론 공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영적인 유익을 얻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집회는 사람들에게 유익도 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회개와 구원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집회들은 이것을 위하여 유익한 모임이 되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이다.

[27-28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 . . .

바울은 말한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교회 집회시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두 사람이나 혹은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며 한 사람이 통역하는 것이 좋았다. ‘다불과(多不過)’라는 말은 ‘많아도’라는 뜻이다. 그것은 한 집회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세 사람을 넘지 말라는 규정이다.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만 공집회에서 허용되었다. 만일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의 공집회에서는 잠잠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말해야 했다.

[29-31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방언과 비슷하게, 교회의 공집회시 예언도 둘이나 셋이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해야 했다. ‘분변한다’는 말은 참되고 그릇됨을 분별하고 판단함을 말한다. 예언은 한 사람씩 순서대로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권면을 받을 수 있었다. ‘권면한다’는 원어(파라칼레오)는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뜻도 있다. 권면과 위로를 통해 교회는 유익을 얻을 것이다.

[32-33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 . . .

바울은 말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방언이나 예언은 무질서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다. 교회의 집회는 질서 있는 집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과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건건한 인격자는 무질서하지 않고 질서 있게 행동하며 또 그런 행동을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건전한 인격자이시다.

창세기 1장에 증거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창조의 일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우주와 인간의 한 신비는 그 질서정연한 법칙에 있다. 예수님께서도 떡 기적을 일으키실 때 사람들을 오십명씩, 백명씩 질서정연하게 앉히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도 질서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혼돈과 싸움을 버리고 질서와 화평을 존중해야 한다.

죄는 사람의 인격을 무질서와 혼란에 떨어지게 하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지금 무질서하고 혼란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잘 살고 있고 자신들이 장차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면서도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 없는 인간들은 근본적인 무의미 속에 살고 있으며 삶의 목적과 도덕적 판단 기준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주와 인생의 질서를 찾게 되며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 그리고 도덕적 판단 기준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주신 은사이며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해 주신 은사이다. 초대교회라도 방언은 통역되어야 했고 질서 있게 행해져야 했다. 교회의 공적 집회는 덕과 유익과 질서가 있어야 한다.

34-40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너희의 아내들]20)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4절로 38절에서 바울은 아내들 혹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고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교훈에 대해 그는 몇 가지 점을 말한다. 첫째로, 그는 이 교훈이 모든 교회에서 지켜지는 규례임을 증거했다. ‘모든 성도의 교회’라는 말(파사이스 타이스 에클레시아이스 톤 하기온)은 ‘성도의 모든 교회’라고 읽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 교훈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규례이다. 둘째로, 바울은 이 교훈이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증거한다. ‘율법에 이른 것같이’라는 말은 이 진리가 율법 즉 성경에 근거하였다는 말이다.

[35-37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셋째로, 바울은 이 교훈이 인간의 생각이 아니고 ‘주의 명령’임을 증거한다. 사도들의 모든 교훈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을 전달한 자들이 아니고 주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증거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교훈을 인간 바울의 생각으로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글의 교훈은 주의 권위로 증거된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그가 디모데전서 2:11-14에서 가르친 말씀과 동일하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1-14).

[38-40절]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교훈한 것은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덕의 문제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중요한 주제이다.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19절)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26절에서는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했다. 사람의 영혼의 구원과 유익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다. 그것은 곧 덕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의 구원과 신앙적 유익을 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바울은 질서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한다. ‘적당하게’라는 말은 ‘바르게’라는 뜻이다.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한 원리는 질서이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평화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모임들과 활동들은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의 모든 모임들은 성경의 교훈대로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적 질서는 교회에 평안과 덕을 이루지만, 무질서는 교회에 부덕(不德)과 해를 가져올 것이다. 질서는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남의 인격을 존중할 때 가능하다. 여성도의 활동 제한도 성경적 질서에 속한다.

 

15장: 부활

바울은 본장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의 문제에 대해 증거한다.

1-11절, 복음의 내용인 그리스도의 부활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 . . .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먼저 복음에 대해 말한다. 이 복음은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바요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바요 그 가운데 선 바이었다. 기독교 복음은 시대마다 수정보완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이미 고정된 내용으로 사도들을 통해 세상에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복음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오늘날도 교회가 전파하는 바는 바로 이 동일한 복음이다. 복음의 목적은 그것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와 그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므로 구원이 필요하며, 또 그러므로 복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굳게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말은 진실하고 확고한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임을 보인다.

[3절] [이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4절은 앞절에 언급한 구원을 받을 근거를 나타낸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복음의 핵심적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이 곧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예표된 바이었다는 뜻이다. ‘위하여’라는 원어(휘페르 uJpe;r)는 여기에서 ‘대신하여’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은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속죄(贖罪)의 진리이다. 기독교 복음은 속죄의 복음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소식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길이다.

[4절]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확실한 사실이고, 그가 인간으로서 가장 슬프고 비참한 처지인 무덤에까지 내려가셨고, 그의 부활이 무덤으로부터의 부활 곧 그가 묻히셨던 무덤을 비우시고 부활하신 사건임을 암시한다. 기독교 복음의 두 번째 중요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가장 기본적 내용이다(롬 10:9-10). 그의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모든 것을 확증하기 때문이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무죄성(無罪性)과, 그의 모든 말씀들의 진실성과, 그가 자신의 증거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확증하고, 가장 중요하게 복음의 핵심적 사실인 그의 속죄사역을 확증하고, 그럼으로써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5-8절]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대부분]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한다. 복음서들과 달리, 여기서는 남자들만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증인들이다. 첫째로 그는 게바 곧 베드로에게 보이셨다. 둘째로 그는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셋째로 그는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지금까지 대부분 살아 있고 어떤 이들은 죽었다. 이것은 놀라운 증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은 수십 명이 아니고 수백 명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다. 넷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야고보에게, 다섯째로 그는 모든 사도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이 정도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충분하지 않는가? 이 정도의 증인들을 확보한 사건이라면 믿을 만한 사건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사건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죄와 형벌의 대속자이시며 기독교는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진리가 아닌가? 우리는 성경의 이런 증거들에 근거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

[9절]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자임이로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마지막 증인으로 자신을 언급한 후 자신에 대해 잠시 간증한다. 앞절에서 그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표현한 이유를 말한다. 그는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곧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한다.

[10절]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바울이 되었다. 바울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바울만의 고백이 아니고 모든 목사들과 성도들의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했었다(고전 4:7). 우리가 오늘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11절]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바울은 자신이나 다른 사도들이나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그의 몸의 부활을 증거하였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사도들이 증거한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처음부터 교회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고 그 복음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었다. 속죄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을 기본적 신앙이다.

1-11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복음 신앙, 속죄 신앙을 가지자.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증인들에 의해 증거되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우리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섬기자.

12-19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확증함

[12-13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것은 부활이 인간의 이성으로 불가능하여 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다 썩고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며(사 26:19; 단 12:2; 마 22:23-33; 히 6:1-2) 기본적 진리를 부정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교회의 중대한 문제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사실이며 복음의 핵심적 내용임을 증거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을 반박하고 부활 진리를 확증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예이며 증거이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14-15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그들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파하는 중심적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행 1:22; 2:32; 3:15; 4:33; 5:30-32). 또,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헛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부활을 믿었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진실하심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즉시 허위로 판명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사활(死活)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을 포함하여 모든 사도들은 다 거짓 증인으로 판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거짓 증거는 하나님의 십계명의 제9계명을 어기는 중죄(重罪)이다. 핍박을 참고 순교까지 당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짓 증인이며, 기독교는 역사상 유래 없는 거짓말에 근거한 사기(詐欺)이며, 기독교 신자들은 거기에 속아넘어간 가련한 영혼들인가? 순교의 피로 인쳐진 기독교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세상에는 믿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를 의심하는 것은 증거들의 부족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들이 심히 무관심하고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와 같이 중요하고 확실한 만큼, 그것에 의해 확증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16-19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요지를 반복하면서 두 가지를 덧붙이고 있다.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그의 부활로 확증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는 그의 말이 거짓이 되며 또 그의 무죄성(無罪性)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이 부정될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그의 속죄가 부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이 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믿고 소망 가운데 죽었으나 그 소망이 헛되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순교를 당한 자들은 아무런 보상과 위로가 없는 헛된 죽음을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全) 역사를 뒤엎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렇게 부정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실로 확실하게 증거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은 돈, 부귀, 영화, 명예, 권세, 쾌락 등 이생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길어야 백년 동안만 가치 있는 것들이며 영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부활에 있고 영원한 천국에 있다. 그 진리,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도 받고 순교도 감당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이생뿐이라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순교까지 당한 사도들과 주의 제자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세가 있고 부활이 있고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자. 또 그의 부활에 근거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 영광을 소망하자.

20-34절, 부활의 순서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죽은 자는 잠자는 자와 모양이 비슷할 뿐 아니라, 또 잠자는 자가 깨어 일어나듯이 죽은 자도 깨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유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라고 부른 것은 그의 부활이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곡식이나 과일나무의 첫열매는 동일한 종류의 많은 열매들이 뒤따를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는 자들이 그의 부활과 같은 부활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하는 사건이다.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부활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21절]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 . . .

바울은 말한다. “[이는]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말미암음이로다].” 본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열매가 되는 이치를 보인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라는 말씀은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사망이 들어온 사실을 말한다(롬 5:12).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는 말씀은 대속의 이치를 보인다. 사람이 범죄하였으므로 사람이 형벌을 받아야 했다. 천사가 그것을 대신할 수 없고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대신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사람의 범죄로 죽음이 왔기 때문에 사람이 죗값을 받음으로 죽음을 극복해야 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하는 이유, 곧 성육신(成肉身)의 필요성과 이유가 있다. 물론 사람이 되신 후에도 그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참으로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얻을 것임이라].” 본절은 죽은 자의 부활이 사람으로 말미암는 까닭을 보인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고 범죄하였고, 그의 범죄로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엡 1: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전 12:13; 요 15: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다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3:16).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까닭은 그리스도 때문이며, 곧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때문이다. 그의 대속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바울이 전도할 때에 어떤 이들은 그의 말을 믿고 어떤 이들은 믿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은 증거하기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였다(행 13:48).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성취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실패치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된다.

[23절]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열매인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부활에는 순서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다. 그는 부활의 첫열매이시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곧 그의 재림 때에 그에게 붙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근본 진리이며 거기에 우리는 큰 소망을 둔다. ‘그에게 붙은 자’라는 원어(호이 투 크리스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곧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뜻이다(롬 1:6). 그에게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 재림 시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살전 5:16). 이 말씀은 세상에는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도 있음을 암시한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인류는 두 부류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던 자들이다.

[24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바울은 또 말한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나중’이라는 말은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의 부활이 있은 후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다. 물론 그때 악인의 부활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악인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표현하셨다(요 5:29). 다니엘서에는 그것이 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을 입을 부활로 묘사되었다(단 12:2). 요한계시록은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보좌 앞에서 심판받는 장면을 증거하였다(계 20:12). 악인의 부활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또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실 때이다. 마귀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의인들을 핍박하던 세상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계 11:15).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은 이미 시작된 교회 시대가 끝나고 영광스런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됨을 말한다. 지금도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중생한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요 3:5; 골 1:13; 계 1:6), 주의 재림으로 이 나라는 아버지께 바쳐져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완성될 것이다.

[25-26절]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하나님의 ‘모든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 도구인 세상의 악한 정권들을 가리킬 것이다(엡 6:11-12; 단 10:20-21). 그러나 그는 모든 원수를 결국 다 복종시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전투에서 노련한 대장이시다.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온 우주의 물질계와 영계를 통치하시고 모든 원수를 복종시키실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장례식은 그의 세상 생활의 종말이다. 인류 전체로 말하면 세월이 지나갈수록 세상에는 공동묘지나 무덤들만 늘어간다. 그러나 사망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극복된다. 그것은 원리적으로 이미 정복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시 그것은 실제적으로 정복될 것이다. 의인들은 다 영광의 부활로, 악인들은 다 심판의 부활로 부활할 것이다.

[27-28절]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히브리서 5:8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다(마 26:39; 빌 2:8).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라는 말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려’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이 세상과 인류에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있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지금 있어 보이는 것도 다 없어질 수 있다. 마지막 심판 날에 그것들은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에게 지극히 중요한 질문이다.

[29-32절]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받는다는 말은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것은 아마, 촬스 핫지의 주석대로, 비세례교인이나 학습교인이 세례받기 전에 죽었을 때 그의 가족이 그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았던 초대교회의 한 잘못된 풍습을 가리킨 것 같다. 그 풍습은 비록 잘못된 것이었지만 부활 신앙에 근거하였었다. 바울은 그것을 들어 그들의 부활 소망을 증거하려 한 것 같다.

바울은 또 말한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凡人)처럼(카타 안드로폰)[인간적 동기로]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바울의 전도생활이 죽음의 위험이 가득한 삶이었음을 증거한다. 그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위험한 생활을 피하지 않는 것은 부활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초월할 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부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맹수들’은 바울을 죽이려는 무리들을 가리킨 듯하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면 누가 죽음의 위협을 감수하겠는가? 쾌락주의자들의 좌우명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심판도 부정하는 자들이며, 부활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도 다 쾌락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과 내세가 있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현세를 근신하며 조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산다.

[33-34절]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호밀리아이)[교제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교제는 영향이 있다.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과의 교제는 악한 교제이며, 악한 교제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 우리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이제는 선하고 의롭게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은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부활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이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시 살 것이다. 이 영광스런 부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경건하고 죄 안 짓는 삶, 헌신과 희생의 삶, 현실의 역경을 초월하며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인내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악인의 부활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지옥에 던지우는 심판의 부활이다.

35-49절, 부활의 몸

[35-38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 . . .

바울은 말한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바울은 이제 부활의 몸에 대해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이 썩어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살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죽은 성도의 부활의 모습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영감 속에 증거한다. 우선, 그는 사람이 뿌리는 씨가 썩음으로 싹이 나는 이치를 말한다. 이와 같이 사람도 죽지만 그것을 통해 영원한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의 싹이 난다. 죽은 후의 부활은 자연계에서도 추론할 수 있는 결코 이상하지 않은 이치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씨를 뿌릴 때 곡식의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알갱이 곧 낟알을 뿌린다. 여기에 ‘형체’라는 원어(소마)는 ‘몸’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곡식의 몸 곧 성장한 곡식을 가리킨다. 즉 사람이 쌀 농사나 밀 농사를 할 때 벼나 참밀을 직접 심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의 낟알 곧 씨를 뿌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그것에게 각각의 형체 혹은 몸체를 주신다. 다시 말해, 그는 벼와 밀의 낟알이 싹이 나고 자라 각각 벼와 밀이 되게 하신다. 사람은 곡식의 낟알을 뿌리고 하나님은 곡식이 나게 하시며 심겨진 벼와 밀의 낟알은 자라서 각각 벼와 밀의 형체를 가지는 것이다.

[39-41절]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육체(사르크스)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또한] 하늘에 속한 형체[형체들]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형체들]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짐승들이나 새들을 흙으로 지으셨다(창 2:7, 19). 물고기들도 흙으로 지음받았다고 보인다(시 104:29). 그러나 그 육체들은 다 동일하지 않고 각각 다르다. 생명 세계의 육체들도 다 다르고, 해와 달과 별들의 형체들도 다 다르고 하늘의 것들과 땅의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고 하늘의 것들 간에도 영광이 서로 다르다. 해와 달과 별들은 그 크기와 밝기에 있어서 각기 다르다.

[42-44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다’는 말씀은 피조세계의 각 육체 혹은 형체가 다르며 그 영광이 다르듯이 사람도 부활 전 상태와 부활 후 상태가 다르며 그 영광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면 부활 전의 몸은 어떠하며 부활 후의 몸은 어떠한가?

첫째로, 부활 전의 몸은 썩을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이다. 사람의 범죄 이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과 피조세계 전체가 시들고 쇠하고 마침내 썩는 존재가 되었다. 아마 이 세상에 썩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죄씻음을 주는 구원의 결과인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인 것이다. 죄악성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에 썩지 않아야 마땅하다.

둘째로, 부활 전의 몸은 욕된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지혜롭고 거룩하고 의로웠으나, 범죄함으로 그 의와 영광을 상실했고 슬픔과 고생이 많은 세상 속에 살면서 그 얼굴과 몸이 보기 흉해졌다. 어린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의 외적인 청순함과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더욱이 사람의 내면적 무지와 불결과 어리석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구원의 결과인 부활은 본래의 영광의 회복인 것이다.

셋째로, 부활 전의 몸은 약한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강한 몸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수록 인간의 몸이 참으로 약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작은 부속품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멈추는 정교한 기계처럼, 인간의 몸은 작은 부분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지장이 생긴다. 문명이 이토록 발달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 몸은 조금 춥게만 자도 감기에 걸리고 한번 감기에 걸리면 흔히 몇 일 동안 아파야 낫고 심지어 감기로 죽기까지 한다. 종합병원들의 수많은 환자들과 또 이 세상의 많은 장애인들은 인간의 몸의 연약성을 잘 증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할 때에는 더 이상 병이 없는 건강한 몸을 가질 것이다.

넷째로, 부활 전의 몸은 육의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신령한 몸이다. ‘육의 몸’과 ‘신령한 몸’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육의 몸’이라는 원어(소마 프쉬키콘)는 인간의 타고난 죄성 즉 죄악된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몸이라는 뜻일 것이다. 영어성경들은 그것을 ‘본성적 몸’(a natural body)이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신령한 몸’이라는 원어(소마 프뉴마티콘)는 ‘성령께서 그 안에 충만히 계시는 몸’이라는 뜻일 것이다. 성도의 부활체는 현재 우리가 타고난 몸과 다를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영적인 몸일 것이다.

[45-46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프쉬케 조산)[산 존재]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사람 아담과 그 안의 모든 사람들과 대조하여 마지막 아담으로 죄 없는 인성(人性)을 입고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와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셨음을 암시한다. 그로 인하여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는 마지막 아담이시며 그 후에 또 다른 이가 올 필요가 없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는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살려주는 영’ 혹은 ‘생명을 주는 영’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인류의 대속(代贖)을 이루셨고 지금 성령으로 죄인들에게 그 속죄를 적용하여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일을 하심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인생들에게 새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 ‘먼저는’은 첫 사람 아담을 가리키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첫 사람 아담은 육적 생명을 가진 존재이었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존재이시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러하셨지만, 부활 전에는 그 사실이 육신의 생명에 가리웠으나 부활 후에는 그것이 밝히 드러나셨다.

[47-49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곧 주(主)는]21)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입자].22)

첫 사람이 땅에서 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음을 의미한다. 첫 사람은 육이 먼저 지음 받고 그 후에 영혼이 지음을 받았다. 그는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었다. 그러나 둘째 사람 곧 주께서는 본래 신성(神性)을 가지신 영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신 그가 때가 되어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인간 본질을 취하신 것이었다. 그의 근본은 육이 아니며 영이고, 땅이 아니며 하늘이었다. 그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48절은 다시 번역하면, “흙에 속한 자와 같이 흙에 속한 자들도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자와 같이 하늘에 속한 자들도 그러하니.” ‘흙에 속한 자’는 첫 사람을 가리키고, ‘흙에 속한 자들’은 부활 전의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하늘에 속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장차 부활할 성도를 가리킨다. 모든 인류는 흙에 속한 아담과 같지만, 장차 부활할 성도는 하늘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을 닮을 것이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흙에 속한 자’ 곧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장차 ‘하늘에 속한 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의 형상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적인 몸이다. 그것이 모든 성도가 장차 입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이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은 현격히 다를 것이다. 현재의 몸은 썩을 것이지만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것이며, 현재의 몸은 보기 흉하지만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울 것이며, 현재의 몸은 약하지만 부활의 몸은 강할 것이며, 현재의 몸은 육체의 욕구와 죄성이 있지만 부활의 몸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영적인 몸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복된 부활의 몸을 사모하자.

50-58절, 부활의 개가(凱歌)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 . . .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血)과 육(肉)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썩을 것]은 썩지 아니한 것[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은 현재의 몸을 가리킨다. 성도의 부활체가 단지 영은 아닐 것이지만 현재의 몸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현재의 혈과 육의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썩을 몸이기 때문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51-52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이는]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변화할 것임이라].”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 있는 자들의 변화는 비밀과 같다. ‘잠잔다’는 원어(코이메데소메다)는 미래시제이다. 우리가 다 죽을 것이 아니지만, 이미 죽은 자들이나 주의 재림시 살아 있는 자들이나 간에 마지막 나팔에 다 변화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부활과 변화의 사건은 마지막 나팔소리에 맞추어 일어날 것이다. 마태복음 24:31에 보면, 예수께서는 “저가[인자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했다(살전 4:16-17). 나팔은 예비신호이다. 마지막 나팔은 예비신호의 끝이며 본 사건의 시작이다. 주의 재림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끝날 때 죽은 성도의 부활과 살아 있는 성도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홀연히’라는 원어(엔 리페 오프달무)는 ‘눈깜짝할 사이에’라는 뜻이다(KJV, NASB, NIV). 성도들의 부활과 변화는 순식간에, 눈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팔소리가 날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53-54절]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입어야 하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입어야 함이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0절에 말한 대로,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모든 성도는 죽은 자나 산 자나 간에 주의 재림시 다 변화를 받아야 한다. 이 부활의 시간이 오면 사망의 확실한 패배가 증명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이사야 25:8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상 사망처럼 강력한 승리자가 없지만, 그때가 되면 그것이 패배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보다 더 강한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생명이다. 성도의 부활과 변화는 사망에 대한 영원한 승리이며 세상으로부터 사망의 영원한 추방이다.

[55-56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무덤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전통본문)23)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의 권세는 죄 때문이다. 또, 죄가 힘을 가지는 것은 율법 때문이다. 죄가 없다면 사망이 힘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 범죄하였고 온 세상이 죄로 가득함으로 사망이 또한 온 세상을 주장하였고 율법 때문에 죄는 죄로 드러나고 정죄된다. 인류 6천년 역사는 사망과 무덤이 지배해왔다. 모든 사람은 죽었고 무덤에 묻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시, 곧 죽은 성도가 부활하고 산 자들이 변화될 그때에 그 기록이 깨질 것이다. 사망은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못하고 무덤은 더 이상 사람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최종적 원수인 사망에 대한 개가(凱歌)가 아닐 수 없다. 부활과 영생의 개가보다 더 감격적인 것은 없다.

[57-5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바울은, 율법으로 드러난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사망 아래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사망에 대한 승리를 감사한다. 구원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은 사망에 대한 영원한 승리이다. 성도는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으나 부활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은 끝으로 두 가지의 권면을 한다. 첫째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들, 특히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약속들을 확신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주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며(요 6:29),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막 16:15),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마 16:18), 복음 사역자들을 훈련하며 파송하는 일이다(딤후 2:2). ‘더욱 힘쓰는’이라는 원어(페리쑤온테스)는 ‘풍성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주의 일에 항상 더욱 힘쓰는 자, 즉 항상 기도하고 시간과 몸과 물질과 재능을 풍성히 드리며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바울은 부언하기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였다. 주의 일을 위해 풍성히 참여하고 수고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나를 위해 쓰거나 단순히 세상을 위해 쓰는 것은 내가 죽고 세상이 불탈 때 헛될 것이다. 그러나 주의 일은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헛되지 않다. 주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2:12).

모든 성도는 주의 재림시 순식간에 다 변화할 것이다. 죽은 자들은 살아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들은 변화할 것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이 될 것이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권세자인 사망의 쏘는 것과 무덤의 이기는 것은 끝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죄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결과로 부활과 영생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망은 영원히 패하고 무덤은 더 이상 슬픔과 두려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이다. 이것이 부활과 영생의 개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며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장: 사랑의 교제

1-4절, 헌금에 대하여

[1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헌금에 대한 교훈이다. ‘연보’라는 원어(로기아)는 ‘모금’(collection)이라는 뜻이다. ‘성도를 위하는’이라는 말은 헌금의 목적을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부탁하였었다(행 24:17; 고후 8, 9장). 성경에 계시된 교회의 헌금의 목적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전도와 구제를 위하여 물질로 섬기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라는 말씀은 성경의 교훈이 어느 한 지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보인다.

[2절]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 대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매주일 첫날’은 일요일 곧 주일(主日)이다. 이 날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헌금하여 저축하라는 지시는 초대 교회가 이 날 공적인 집회로 모여 헌금했음을 암시한다. 사도시대 직후인 소위 속사도들의 글들에 보면 초대 교회들이 더 이상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았고 일요일 곧 주일에 공적 예배를 위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주후 100년경의 바나바 서신은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날을 지킨다”고 말했고, 주후 107년경 익나시우스의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도,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그들의 삶을 형성한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주후 150년경 순교자 저스틴도, “일요일에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사도들의 글을 읽으라.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라고 말했다.

[3-4절]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바울은 헌금을 취급할 때 교인들의 시험과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관계하지 않고 그 교회가 인정하는 사람이면 누구이든지 그들을 보내도록 처리하였다. 한글개역에는 ‘인정한 사람’이 단수명사이지만, 원문에는 ‘인정한 사람들’로 복수명사이다. 헌금은 두 사람 이상에 의해 바르고 깨끗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교회의 일꾼이 마귀의 시험을 받아 거룩한 헌금을 오용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큰 화가 될 것이다.

헌금은 교회의 공집회의 한 중요한 순서이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하셨다. 십일조와 헌물은 신약시대에도 헌금의 모범이 된다. 우리의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다. 헌금 용도는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헌금은 전도자들과 교회의 전임봉사자들의 생활비를 위해 사용되고 또 교회 안의 물질적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헌금을 관리하는 일은 매우 덕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한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짐으로 사람들의 의혹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세워서 투명성 있게 관리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으로 범죄치 말아야 한다.

5-9절, 성도의 교제를 원함

[5-7절]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過冬)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하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그는 고린도 교인들과 교제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지나가는 길에 그들에게 잠시 들리기를 원치 않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함께 지내며 겨울도 지나기를 원했고, 또 그들이 그를 그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기를 원했다. 성도의 교제는 얼마나 아름답고 사모할 만한 것인지! 거짓과 미움과 이기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참된 교회처럼 진실과 사랑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서만 그런 교제를 기대할 수 있다.

[8-9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본절은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대략적 시기와 장소를 보여준다. 그것은 사도행전 19장에 해당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그 도(道)를 비방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기를 2년 동안이나 했고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의 사역이 에베소에서 큰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라는 말씀은 그의 전도 사역에 큰 열매가 있었음을 뜻한다. 사도행전 19:19-20은,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5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증거한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 전도의 문이 열려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힘있는 말씀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해야 한다.

10-12절, 디모데와 아볼로에 대한 증거

[10-12절]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디모데는 바울처럼 주의 일을 힘쓰는 자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그를 존중하고 예우하라고 권한다. 여기에 복음사역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의무가 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는 일이다.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바울은 아볼로에게 무엇을 명령하거나 그의 심령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주의 사역자들은 겸손히 서로 존중해야 한다. 또 주의 일은 자원적으로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자. 또 복음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사역자들을 존중하자. 또 우리는 자원함으로 주의 일을 하자.

13-18절, 마지막 권면

본문에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몇 가지 권면을 추가하였다.

[13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바울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말한다. 원문에서 본절은 네 개의 명령어로 되어 있다: (1) 깨어라(그레고레이테 ), (2) 믿음에 굳게 서라(스테케테), (3) 남자다워라(안드리제스데), (4) 강건하여라(크라타이우스데). 세상은 악하고 마귀와 악령들은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백방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으라고 교훈하셨다(마 24:42).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정상적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사람이 죄를 짓고 세속적 쾌락에 빠지면 영적으로 해이해지고 잠이 드는 것이다. 또 성도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엡 2:8).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우리로 낙심하고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려 한다. 또 우리는 남자답고 강건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의와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담대하고 강건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6:33).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말했다(엡 6:10).

[14절]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바울은 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말한다. 고린도교회에 필요한, 그리고 모든 시대에 모든 교회들에 필요한, 중요한 덕은 사랑이다. 고린도교회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함으로 일치단합하여야 했다. 사랑은 이상적인 인격의 덕이다. 우리 속에 참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유익을 끼치며 주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15-18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 . . .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바쳐진 가정이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등은 교회를 섬기는 헌신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에게 찾아왔고 정신적으로 또 아마 물질적으로 그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바울과 또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이것은 아첨하는 칭찬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온 인정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 같은 자들에게와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고 또 이런 자들을 알아주며 인정하라고 권면한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의 복음의 일을 위해 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한 봉사자들을 존중하고 알아주고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헌신된 자들을 세우셔서 자기의 양들을 지키시고 양육하게 하시고 교회가 진리 안에서 바르고 질서 있게 진행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고 남자답게 강건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주께서 세우신 교회의 봉사자들에게 복종하고, 또 그런 자들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19-24절, 문안과 축복

[19-21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의 가족들로서 서로 진심으로 그리고 거룩한 사랑으로 교제하고 문안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믿어 구원얻은, 온 세계의 성도들은 한 교회를 이룬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교회들과 유럽의 교회들의 차별이 없다. 사도시대에는 또 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있었다. 외적으로 훌륭한 건물이 있어야만 교회가 아니고 집에서 모이는 교회도 참된 교회일 수 있다. 교회의 교회다운 점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섬기며 순종하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데 있다.

[22-24절] 만일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전통사본)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전통사본)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아멘].24)

마지막으로, 바울은 두 가지 내용을 말한다. 첫째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랑 없이 내뱉은 경박한 저주의 말이 아니다. 이것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선택 사항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 사항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주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 외에 이 세상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없다. 그 분 외에 아무 곳에서도 우리는 삶의 참된 의미와 위로를 찾을 수 없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시다. 더욱이 그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이었지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셨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자라면 어찌 주를 사랑치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는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은 원어로 ‘마라나 다’(marana qa)라고 하는데,25) 이것은 아람어로서 ‘주여, 오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말씀이다. 신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말씀으로 끝난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진실로] 오시옵소서.” 주께서 다시 오시면 모든 일이 완성될 것이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주를 사랑한 자들은 영광과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 주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인들과 악인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보상, 보응]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는 주의 사랑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자. 또 우리는 참으로 구주 예수님을 사랑하자. 또 우리는 주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자.

 

미주

1) Byz A C vgcl Origengr 1/7, lat 1/8 등에 있음.

2) Byz p46 D itd syrp Irenaeus (Origenlat 1/4) Cyprian 등에 있음.

3) Byz syr 등에 있음.

4) John Calvin, I Corinthians [1546], pp. 139, 140, 141.

5) Charles Hodge, I Corinthians [1857], pp. 56, 57, 58.

6) 박윤선, 고린도전서 [1969], 49쪽.

7) Byz p46 B itd 등에 있음.

8) Byz p46 א vg syrp cop 등에 있음.

9) Byz א vgst 등에 있음.

10) Byz vgms syrp arm 등에 있음.

11) Byz syrp Origenlat 1/6 등에 있음.

12) Byz D itd vg syrp arm geo 등이 그러함.

13) Byz syrp Origen1/2 등이 그러함.

14) Byz p46 D itd vg syrp cop Irenaeuslat 등이 그러함.

15) Byz vgcl syr 등에 있음.

16) Byz vgcl syr 등에 있음.

17) Byz. 그러나 א A B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등은 생략함.

18) Byz vgcl syrp arm eth 등에 있음.

19) Byz itd syrp (arm) 등에 있음.

20) Byz syr Cyprian 등이 그러함.

21) Byz A syrp arm Origengr 1/2 등에 있음.

22) Byz p46 א A C itd vg copbo Irenaeuslat Clement Origengr lat 등.

23) Byz syr(p) eth Origengr 1/2 등이 그러함.

24) Byz א A C D itd vg copbo arm 등에 있음.

25)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 ed. Zane C. Hodges and Arthur L. Farstad, 2nd. ed. (Nelson,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