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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2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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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갈라디아서 서론

1장: 복음의 유일성

2장: 복음 안에 있는 자유

3장: 율법으로부터 자유

4장: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

5장: 자유자의 삶--사랑

6장: 자유자의 삶--선행

 

 

서론

갈라디아서의 저자는 바울이다. 저자는 두 번이나 자신을 바울이라고 증거하였다(1:1; 5:2). 역사상 갈라디아서의 저자에 대한 의심은 이제까지 없었다. 본 서신의 수신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전통적으로는, 본 서신이 지리적 의미의 갈라디아, 즉 소아시아 북부의 옛 갈라디아 지역의 성도들에게 보내졌다고 보았다(북 갈라디아설). 이것은 전통적 견해이었다. 그 근거는, ①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비시디아, 루가오니아 등 지리적 의미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② 갈라디아서 4:13에 바울의 육체의 질병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1차 전도여행에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고, ③ 바울이 루가오니아인이나 비시디아인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이여’(갈 3:1)라고 표현하였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본 서신이 행정지방적 의미의 갈라디아, 즉 로마의 한 지방(도 道)으로 브루기아, 비시디아, 루가오니아 등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시 전도했던 소아시아 남부 지역 교회들에 보내졌다고 본다(남 갈라디아설). 그 근거는, ① 바울이 어떤 지역을 말할 때 아가야, 마게도냐, 일루리곤, 달마디아, 유대, 아시아 등 행정지방적 명칭을 사용하였고, 바울이 갈라디아라는 말을 세 번 사용하였는데(고전 16:1; 갈 1:2; 딤후 4:10) 그것도 행정지방적 의미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행정지방으로서의 갈라디아는 서신의 수신자로서는 너무 광범위하다. ② 사도행전에는 남 갈라디아에 대해 많이 말했는데, 바울 서신들 중에 그 지역에 대한 것이 없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직접 방문할 수 있는 거리이었다. ③ 사도행전에는 북 갈라디아교회의 설립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갈라디아서 같은 중요한 편지가 그곳을 위해 쓰였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④ 유대 땅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이 소아시아 남부 지역을 통과해 혹은 지나쳐 소아시아 북부의 옛 갈라디아 지역에 와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주후 49년경) 이후 남 갈라디아 지역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다.

본서가 쓰일 당시 갈라디아교회에는 율법주의 이단이 침투해 들어와 있었다. 그 이단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율법을 다 지켜야 하며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율법주의 이단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서 복음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서신에서 율법주의 이단을 강하게 정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과 그 복음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참 자유에 대해 밝히 증거한다.

본서의 저작 연대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시 에베소에 머문 3년 중 전반부의 어느 때이든지(주후 54년경) 혹은 마게도냐와 헬라에 머물었을 때(주후 56년경)라고 볼 수 있다.

본서의 특징적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2:4; 5:1, 13). 본서는 로마서와 함께 복음을 가장 잘 증거한 서신이다. 로마서가 복음에 대한 논리적 해설이라면, 갈라디아서는 변증적 해설이다. 바울은 본서에서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 이단에 대항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며 변호하였다. 본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며 율법주의와 행위구원론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의 대선언이다. 여기에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투쟁의 외침이 담겨 있다.

본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복음의 유일성. 2장, 복음 안에 있는 자유. 3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4장,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 5장, 자유자의 삶--사랑. 6장, 자유자의 삶--선행.

 

 

1장: 복음의 유일성

1-3절, 문안 인사

[1-3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평안]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는 주의 제자들 중에 특별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누가복음 6:13에 보면,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열두 제자들을 택하여 ‘사도’라고 칭하셨다. 후에, 바울도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말한다. 그의 사도직은 인간적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사람이 세운 사도가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예수님 믿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에 가까이 가고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키셨고 그를 택하여 주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행 9장).

바울은 또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은 복음 진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믿을 만한 자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부활할 것을 3차례 이상이나 제자들 앞에서 공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가 신뢰할 만한 선생님과 구주가 되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처음 제자들은 그의 부활을 친히 본 목격자들이었다.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살리셨다. 그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삼으셨다. 이와 같이 바울의 사도직은 신적 기원을 가진 것이었다. 또 그것은 그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문안하였다. 하나님의 진리는 몇몇 개인들의 진리가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공동적 진리요 주의 백성이 다함께 고백하고 증거하고 감사하는 진리이었다. 디도서 1:4에 ‘같은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공통적 믿음’(코이네 피스티스)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은 모든 성도의 공통적 믿음이다. 유다서 1:3에는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도 원문에서 ‘공통적 구원’(코이네 소테리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모든 성도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이다. 우리는 공통적 믿음을 가지고 있고 공통적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과 일꾼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의 겸손한 처신을 보인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 그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고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셨고(마 12:50; 23:8),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사도직은 권위 있는 직분이었지만, 바울은 높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하지 않고 겸손히 대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4에서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기원하였다. 은혜는 단순히 마음에 감동을 주고 눈물을 일으키는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사함의 은혜이다.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은혜이다. 그 은혜 때문에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받아 누리는 것을 말한다. 평안은 문제들, 싸움, 갈등, 불안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문제의 해결, 곧 죄사함을 통해 온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과 싸움, 갈등과 불안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죄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가지며 우리의 심령도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안정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성도들의 평안은 마음의 평안 뿐만 아니라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도 포함한다. 그러나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 욥기가 그것에 대해 교훈을 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훈련의 의미를 가지는 고난을 때때로 허락하신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기를 힘쓰는 성도들에게도 때때로 고난이 닥친다. 그러나 그런 고난들을 통해 성도는 믿음과 거룩에 있어서 자란다. 주께서 바울에게 주셨던 육체의 가시도 비슷한 목적을 가졌다.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 아마 어떤 질병이나 연약성을 통해 교만에 떨어지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다(고후 12:7). 그렇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도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린다.

우리는 사도직의 신적 기원을 인식하자. 그의 말씀 사역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또 그가 증거한 복음은 초대교회의 공동적 증언임을 알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사모하며 항상 누리자.

 

4-5절, 구원의 복음과 송영

[4-5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문은 구원의 복음을 간략히 증거하고 있다.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며, 그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이다.

첫째로,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말(페리)(전통본문)1)은 ‘우리 죄와 관계하여, 우리 죄 때문에, 우리 죄를 없이하기 위해’(BDAG)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이것이 성경이 분명히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디아)[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휘페르)[때문에,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인은 자신이 자기 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든지, 아니면 누가 대신 그 벌을 받아주든지 해야 한다. 여기에 대속(代贖)의 이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자신을 드리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인생의 죄 문제의 해결이 여기에 있다. 죄인들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며 사람들은 심히 죄악되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 곧 그의 선하고 의로운 뜻을 거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이 필요하다. 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불행의 원인일 뿐 아니라, 또한 죽음과 지옥 형벌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택한 영혼들은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베소서 1:4,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도덕적 질문들의 해답이시다.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사도 바울은 이제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으시기를 기원한다. ‘저에게’라는 말은 원문에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는 불택자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들이며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성을 가진 자들인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셨다. 여기에 우리의 찬송의 이유와 내용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자. 또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자. 또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답게 죄악된 말과 행위를 멀리하자.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셨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으로 부르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다. ‘다른 복음’이라는 말은 ‘내용이 다른 복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과 내용이 다른 것을 가리킨다.

갈라디아교회가 은혜의 하나님을 속히 떠난 것은 교회 곧 교인들의 연약성을 보인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신명기 9장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목이 곧고 늘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속히 떠났었다(신 9:7, 12-13, 16, 24). 인간의 이런 부패성과 연약성은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있다(롬 7:18-25).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오늘 우리도 진리의 하나님을 속히 떠날 수 있다.

갈라디아교회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좇아간 것은 이상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주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이었지만, 이 교회 속에 다른 복음이 용납된 것이다. 역사상 기독교회 안에는 다른 복음들이 적지 않게 들어왔었다. 오늘날도 천주교회, 각종 이단 종파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 등은 다른 복음들이다. 그것들이 역사상 기독교회 속에 용납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현실이었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는 원어(호 우크 에스틴 알로)는 ‘그것은 다른 하나의(another) 복음이 아니니’라는 말이다.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유일한 내용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환경에서도 다른 내용이 될 수 없다. 아무도 복음의 내용을 바꾸거나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내용은 고정되어 있고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요란케 했다는 말씀은 다른 복음이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을 보인다. 사람들이 교회를 요란케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었다. 여기에 다른 복음의 목적이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소식인데, 어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변경시키려고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변경은 결국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상 사탄의 활동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들을 어지럽히고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혼란시킨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경고하였다(요일 4:1).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이라는 말씀에서 ‘전한’이라는 원어(유엥겔리사메다)는 과거시제로서 복음이 이미 그들에게 전해졌음을 나타낸다. 복음은 사도들이 이미 전한 복음, 초대교회에 이미 전해진 복음이다. 그 내용은 전해졌고 선언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고정되어 있고 확정되어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결코 시대마다 변할 수 있는 유의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복음의 유일성과 고정성(固定性)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도 바울 자신이라도 변경할 수 없고 하늘로부터 온 어떤 천사라도 변경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물며 오늘날 누가 감히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을 변경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도 할 수 없다.

그러면 그 복음은 지금 어디에서 확인되며 확증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서 확인되며 확증될 수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지금 신구약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제시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인 동시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이다. 복음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이었고 또한 성경에 밝히 계시되어 있고 증거되어 있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요긴한 일인지 모른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말씀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죄와 그 종말을 증거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생각대로 임의로 변경시키고 가감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일이요 그 근원은 사탄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방해하고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결코 죄절되지 않을 것이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라는 표현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새로운 것이거나 처음하는 것이 아님을 보인다. 이 경고는 이전에 이미 했던 것이고 또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 대한 저주를 다시 선언하는 것이다.

‘너희의 받은’이라는 원어(파렐라베테)도 과거시제로서 복음이 이미 그들에게 전달되었음을 보인다. 복음은 초대교회가 이미 받은 것이요 갈라디아교회도 이미 받은 것이었다. 기독교 복음은 옛날부터 즉 사도 시대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믿어온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전통적인 것, 옛것이다. 참 신앙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옛 신앙이다. 복음 신앙은 새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에 없었다가 어느 날 누가 비로소 주창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전통적인 것이 다 옳다는 말이 아니다. 잘못된 전통도 있고 순수하지 못하고 불순해진 옛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것이며 섞인 것들을 제거시키고 순수하게 보존해야 할 옛것이다. 본래 사도들에게 계시되고 사도들이 전파하고 선언한 그 옛 복음은 고정되고 확정된 것이어서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거기에서 무엇을 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신앙’ 혹은 ‘역사적 기독교’라고 부른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받은 그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변질되고 있었다. 교인들은 지도자들과 인도자들과 목사들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양무리들은 순진하여 지도자들과 인도자들과 목사들을 그냥 따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인도자들과 목사들의 책임은 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과 실수를 결코 묵과하지 않고 다 심판하실 것이다.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말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야 한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직분자의 본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감히 인간의 생각으로 변경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변경하는 자들을 용납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하고 일해야 하고 사람의 편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연약성을 극복하고 유일하고 고정된 내용의 복음을 지켜야 한다. 기독교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며 초대교회가 ‘받은 복음’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내용이다(롬 3:21-24).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기독교는 참으로 옛것이며 옛 신앙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연약하고 교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며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천주교회와 이단종파들과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기독교 복음을 충성되이 믿고 지키고 전파해야 한다.

둘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엄숙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야말로 매우 악한 일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배교와 타협이 만연한 시대에는 넓은 길, 포용적인 길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길이나, 좁은 길, 배타적인 길은 많은 원수들을 만드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한, 우리는 배타적이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배교자들과 타협자들과 절교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옛 신앙, 곧 역사적 기독교 신앙만을 지키며 그 복음만을 힘써 전파해야 한다.

 

11-24절, 바울의 복음의 유래

[11-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생각은 완전하지 못하고 사람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 기독교가 불교나 유교 같은 이방 종교들처럼 사람의 명상과 깨달음, 그리고 양심과 이성적, 도덕적 판단에서 나온 정도의 종교라면, 그것은 유일하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지전능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면, 기독교는 이방 종교들과 다르며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절대적 도리가 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교회에게 그리고 다른 여러 교회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한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그 이상이시다. 그는 사람이시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신적 존재이시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다(요 1:1). 또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요 8:58).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말씀은, 그의 복음이 하나님의 권위와 보증을 가짐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사도직의 독립성과 정당성, 그리고 신적 권위성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이 복음, 즉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는 이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연구하고 믿고 전해야 한다.

[13-14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殘害)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年甲者)[동년배]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간증한다. 그것은 무지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과거이었다. 종교적 열심은 다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른 지식에서 나오지 못할 때 오히려 유익보다 해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김에 있어서는 단순한 열심보다 바른 지식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다. 예수님 믿기 전에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그가 간략히 증거한 바와 같이, 그는 이전에 유대교인으로서 그의 동년배들보다 더욱 열심으로 믿었다. 그는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를 치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옷을 지키는 자가 되기도 했다(행 7:58). 그는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스데반의 죽음 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사울은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며 교회를 파괴했던 인물이었다(행 8:3).

[15-17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하나님]2)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이웃 나라 도시 다메섹의 여러 회당들에 갈 공문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거기에서 그는 거꾸러졌고 마침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핍박자 사울을 불러 사도 바울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울의 어떤 선행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에 뿌리를 둔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친의 태로부터 그를 택하셨다고 말하였다. 우리의 생명이 모태에서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려고 이미 구별하셨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 1:4).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를 사도로 삼으시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는 그가 받은 사명이 ‘이방인 선교’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구원받은 즉시 바울의 열심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었다. 그의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하는 열심이 끓어올랐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며 사용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그때 그 일을 위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바울은 또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다. 인간적으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는 그를 부르신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를 택하였던 것 같다. 아라비아는 사막과 광야의 땅을 가리킨 것 같다. 그는 거기에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진리들을 묵상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조용한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광야]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조용한 시간은 가장 귀한 시간이다. 고요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주께 기도하는 시간이야말로 성도의 특권이다. 거기에 성도의 힘과 기쁨과 행복이 있다.

[18-19절]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베드로]3)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15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복음과 사도직이 사도들에게 의존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그가 3년 만에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도 그와 함께 단지 15일간 머물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는 베드로 외에 주의 동생 야고보만 보았을 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여기 언급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총회에서 발언했던(행 15:13)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행 12:17; 갈 2: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이라는 표현은 야고보가 사도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2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사도 바울의 말과 기록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었다. 거짓말은 제9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은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진실을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은 진실한 증거의 책이다. 요한복음 21:24은,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말했다. 사람의 진실한 증거를 믿을 수 없다면, 바울의 이 말도 성경도 믿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하고 또 진실한 증거의 말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24절]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殘害)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길리기아는 바울의 출생지인 다소가 있는 지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아 그와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나타낸다. 바울이 회심한 지 3년이 지났고 또 예루살렘에 올라가 짧은 기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고 교제하였으나,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 그를 얼굴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그의 복음 사역은 이와 같이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하신 기이한 일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그의 능력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핍박하던 인물을 불러 구원시켜 그가 핍박하던 그 이름 예수를 전파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종으로 만드신 것이야말로 그의 놀라운 은혜를 증거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종종 이런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들이 팔아버린 요셉을 통해 형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동족을 구원하려는 그의 선한 뜻이 꺾이어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야망 없이 지내던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많은 고난을 받아 쫓겨다니던 다윗을 들어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부활시켜 세상의 구주와 주로 삼으셨다.

바울의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되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본문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되었다. 첫째, 그는 회심 직후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 사도들에게도 올라가지 않았다. 둘째,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셋째, 그는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넷째, 그는 그때에도 단지 15일간 예루살렘에 머물었을 뿐이다. 다섯째, 그는 그때에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여섯째, 이 모든 말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다. 일곱째, 그가 회심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도 그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울이 참된 사도이며 그가 전한 복음이 주 예수께서 직접 계시하신 복음, 곧 하나님의 진리임을 알자.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 우리는 이 복음과 다르거나 이 복음과 배치되는 모든 다른 복음들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교회역사상에는 많은 다른 복음들, 거짓 복음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천주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있고, 자유주의 신학이 전하는 복음이 있고, 은사주의가 전하는 복음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참된 복음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만 모든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다. 그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고 그것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형벌이 있을 것이다.

 

 

2장: 복음 안에 있는 자유

1-10절, 우리가 가진 자유

[1절]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사도 바울은 14년 후에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을 말한다. 이 일은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가리킨 것 같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크게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냈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변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의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마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에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원사도들에게 소개한 자이며(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며(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이며(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자이었다(13:2-3). 디도서의 수신자인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3절)과 그레데에 남아서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 외에는 성경에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2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안디옥 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지만(행 15장) 또한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 논쟁 중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직접 지시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받은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그가 그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예루살렘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 즉 예수님의 원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같은 지를 대조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고 있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믿고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바로 그 복음, 임을 확인하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이었다. 그것은 남자의 생식기를 덮은 피부(foreskin, 양피, 포피)의 끝을 잘라내는 의식이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것은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이었다. 율법을 따른다면, 디도도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새 언약 아래서 모든 사람은 할례와 관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하기 원했던 것 같다. 특히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그 논쟁의 시점에 바울은 디도를 데려감으로써 행동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다.

[4-5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이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비밀 첩보원처럼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킨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그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들어온 목적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함이었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이다.

물론 그 자유가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게 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의를 이루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와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거짓 형제들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유대교인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이었다. 그들은 주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 거짓 형제들을 알아차렸고 그들에게 한 순간이라도 복종치 않았다. 잠언 25:26은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말한다.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6-9절]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8절은 문맥상 삽입적 의미를 가지며 어떤 영어성경들은 8절을 괄호 안에 두었다(KJV, NASB). ‘유명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원사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자보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 자매이며 한 식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원사도들은 사도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계시로 주신 복음은 충족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사도들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복음 진리를 바울에게도 주셨다. 사도 바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출한 그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두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바로 그 복음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으로써 그의 복음에 어떤 수정이나 보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이 증거되었을 뿐이다. 그들 상호간에는 교리적 일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고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이 교제의 악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과 사도 베드로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다른 말로, 이 교제의 악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이렇게 확인된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이 세상에 없으며, 그 후 시대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복음만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된다.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면 단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1:29에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어 유대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 때에도 유대에는 가난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구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전부터 자신도 그 일을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거한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며(신 15:7-11)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이다(고후 9: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사도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이 사도 베드로가 증거한 복음의 내용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제의 악수’로 상징되었다. 오늘날 불신앙적 신학자들은 성경 안에 다양한 신학들이 있고 그 신학들 간에는 때때로 갈등과 심지어 모순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결코 사도 베드로의 복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복음 진리, 그들이 전파하고 가르쳤던 복음 진리는 동일하였다. 이 성경적 복음만이 오늘도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이 된다.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다. 그것은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한 바울의 행동에서 증거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모든 율법주의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물론 이 자유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자유는 아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주신 참 자유, 곧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누려야 한다.

 

11-16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

[11절] 게바[베드로]4)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그를 책망할 일이 있었다. 안디옥은 이방인들을 위해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던 교회가 있었던 수리아 지방의 한 도시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한 목표는 책망받을 일이 없는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화의 목표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단번에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격적 성숙은 예수님 믿기 전에 그가 살아온 상태와 관계가 많은 것 같다. 성화는 매우 더디게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히 믿는 자들 속에도 인격적 흠과 결함이 많이 있다. 대체로 사람이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알고 있지만, 종종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참 큰 문제이다.

인격적 결함 중 대표적인 것은 말의 실수이다. 인격의 온전함은 말의 온전함으로 나타난다(약 3:2). 사람이 말을 안 하면 실수도 없을 것이지만 괜히 말을 함으로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말에 대해 많이 가르쳤는데, 그것은 우리가 말의 온전함으로 인격의 성숙함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잠언 10:19-20,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베드로의 실수는 말의 실수가 아니고 행동의 실수이었다. 3년간이나 주께 직접 배웠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복음 진리를 밝히 이해하고 고난을 무릅쓰고 증거했던 베드로는 인격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게 실수가 있었다. 땅 위에 온전한 인격자는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부족이 있다. 지상에서 완전 성화란 없다. 성도의 성화가 심히 더딘 것이 현실이다. 베드로에게 책망할 일이 있었을 때 바울은 그의 앞에서 그를 책망하였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 앞에서 아부하고 뒤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지만, 사람 앞에서 바른 충고를 아끼지 않고 뒤에서 그를 존중하고 함부로 그를 비난치 않는 것이 좋은 인격의 모습이다. 사람 앞에서 그를 공의와 겸손으로 책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훌륭한 행동이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잠 27:5-6).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자 그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은 율법과 유대인의 관습에 젖어 있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말아야 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행 10:28).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일을 금한 곳이 없다.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유대인의 관례법은 음식에 대한 법이나 우상숭배를 금한 계명, 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한 법(신 7:3-4) 등에 근거한 것 같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두려워해 떠나 물러갔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공격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드로가 떠나 물러간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약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두려워함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받기를 싫어하고, 싸움과 갈등보다는 평안과 안정을 좋아한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뿐 아니라,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울의 동료인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외식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이 정당한 일이었다면, 그는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다. 반대로, 그것이 유대인들 앞에서 할 수 없을 정도로 옳지 않은 일이었다면, 그는 그들이 없었을 때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과 충성을 원하시지만, 연약한 인간은 때때로 외식의 죄에 빠진다.

베드로의 연약함은 그 혼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물러가자 함께 먹던 유대인들도 같이 물러갔다. 거기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까지도 그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임자의 역할이 큼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만일 베드로가 그때 외식하지 않고 담대히 처신하였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연약하여 외식하므로 다른 사람들도 외식에 빠졌다. 신앙생활에는 앞선 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계가 혼란한 시대에는 바른 사상과 분별력과 인격을 구비한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지교회 안에서도 목사와 장로의 역할, 교사와 권찰의 역할, 각 회 회장의 역할이 크고 중요하다. 그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모범이 되면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만, 그들이 본이 되지 못하면 해를 끼친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말하며, 부덕한 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일꾼들은 믿음에 바로 서서 덕을 세우는 자, 즉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14-15절]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베드로]5)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도 베드로의 외식적 행위는 복음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실수이었다. 복음 진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이방 죄인’이라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본래 죄인이었음을 보인다.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우상들을 섬기며 살았고 도덕적으로도 여러 가지 더러운 죄악들 가운데 파묻혀 살았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옛날부터 관리들은 탐욕적이고 부패하였고 가난하고 비천한 상민들은 고통과 눈물과 서러움이 컸다. 또 아내들이나 종들은 구타와 학대를 당하여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고 며느리들은 종들처럼 가정 일을 해야 했다. 이방 사회에 참으로 진실과 공의와 정직, 사랑과 선이 지배한 때는 한번도 없었을지 모른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이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이 모든 죄악된 처지 곧 죄인의 신분과 법적 책임, 그리고 죄성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본래의 의롭고 선한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그러나 세상에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참된 의인은 하나도 없다. 바울은 로마서 3:11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했고, 로마서 3:20에서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본절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과 같다.

또 로마서 3:21-22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다.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없이’라는 뜻이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과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곧 구약시대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에서 암시된 바이었다. 또 이 구원의 방법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방법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왜 예수님만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은혜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제사제도를 통해 암시되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3:24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바로 아는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복음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해야 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예수님 믿는 모든 사람은 형제 자매이며 한 식구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모든 믿는 성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바로 깨닫고 우리의 삶의 새로운 동기를 발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수치와 참혹한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에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고, 또 모든 악을 버리고 거룩과 의, 선과 진실을 지키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7-21절,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의(義)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킨 것을 의미한다. 의는 무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완전이다. ‘의롭게 한다’는 원어(디카이오오)는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뜻이다. ‘의롭게 되려 하다가’라는 말은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라는 뜻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라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만 믿고 그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줄 알았다가 그것이 아니었다면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은 진리이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계시해주신 내용이며 만일 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죄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

[18절] [이는]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것임이니라].

‘내가 헐었던 것’이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생각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세우면’이라는 말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면’이라는 뜻이 된다. 만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면, 그는 죄인이 될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고 그 주장이 틀린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절] [이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죽었음이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향해,’ ‘율법을 향해’라는 말은 원문에서 관계성을 나타낸다(데오, 노모--관계의 여격).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과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기 위하여”라는 뜻이며, 또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 곧 율법의 계속된 정죄, 누적된 정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정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뭇박혔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죗짐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이며 곧 우리의 죽음이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에서 ‘나’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속했던 나, 곧 옛사람 나를 가리킨다. ‘산 것’이라는 말은 ‘사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제 나는 죄로 인하여 정죄되었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므로 옛사람 나는 이미 끝났다. 그것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정죄되었던 나, 곧 옛사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을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했다. 1930년대에 황국주 씨는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 . . . 전부가 예수화하였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모습을 흉내낸다고 머리를 기르고 수염도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판명되고 정죄되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도 개개인의 인격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옛사람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속에 거하시므로, 이것은 마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것을,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물론, 믿음은 참된 회개를 동반한다.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또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고(요 1:12) 영생을 얻는다(요 3:16). 또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성도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디카이오쉬네)[의(義)]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죽으셨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을 구원하심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지금 그것을 변증하고 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게 즉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없다. 성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또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다. 의 혹은 도덕적 완전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올 수 없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의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는 의,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성도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도에게 복음 신앙이 없다면 성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도리는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주시는 영생과 내세와 천국을 확신케 하는 근거이다. 이것은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며 기쁨과 평강을 준다.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할 것이다. 성도는 이런 확신과 담력, 이런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한다.

 

 

3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1-14절, 율법주의는 잘못이다

율법주의란 사람이 율법을 행해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생각이다. 바울은 율법주의의 잘못에 대해 일곱 가지 반론을 제시한다.

[1-2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증거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를 복종치 못하게 하더냐?]6)

율법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은혜의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케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절]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엑스 아코에스 피스테오스)[믿음의 들음으로]냐?

율법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들음으로’라는 말은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을 가지고 듣는 것, 혹은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고넬로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성령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증거한다(행 10:44).

[3-4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율법주의에 대한 세 번째 반론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친다’는 원어(에피텔레이스데)는 영어성경들처럼 ‘완전케 된다’(KJV) 혹은 ‘완전케 되고 있다’(NASB)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한 영어성경은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한 후에 지금 육신적 노력으로 너희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느냐?”(NIV)는 뜻으로 번역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케 되려느냐?”는 말씀은 사람이 육신적 노력으로는 도덕적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성령으로 시작된 성도의 신앙생활은 육신적 노력으로 완전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갈라디아서 5:16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더욱이,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들이 이제 은혜의 복음을 포기하고 율법주의로 나아간다면 그들이 당했던 많은 고난이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받을 가치가 있는 고난을 받았지 헛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율법주의에 대한 네 번째 반론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성령의 기적들을 행하신 것이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지, 율법을 행할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본절의 ‘능력’이라는 원어(뒤나메이스)는 ‘기적들’이라는 뜻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율법을 지킬 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졌었다(행 3:12, 16).

[6-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율법주의에 대한 다섯 번째 반론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5:6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증거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성경 원리에 맞다.

[8-9절]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본절은 다섯 번째 반론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다. ‘의로 정하신다’는 원어(디카이오오)는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다. ‘너를 인하여’라는 원어(엔 소이)는 ‘네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네 안에서]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될 것을 암시했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 하심의 복을 받는 것이다.

[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주의에 대한 여섯 번째 반론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즉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신 27:26). 이 세상에서 율법을 항상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11-12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주의에 대한 일곱 번째 반론은 성경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합 2:4). ‘믿음으로’라는 말은 ‘행위로 혹은 법을 지킴으로’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산다’는 말은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이 성경말씀은 복음의 원리에 맞고 율법주의에는 맞지 않는다. 율법은 믿음과 근원이 다르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율법으로 인해 살 것이나(레 18:5),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살 것이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며 대리적이며 완전한 사역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이었다(롬 10:4).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의는 완전한 의, 곧 도덕적 완전이며 거기에 무엇이 더 첨가될 것이 없다. 그 의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속박과 저주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둘째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죄인들 속에 거하실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셨다. 이 두 가지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결과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큰 복이다.

본문은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생각에 대하여 일곱 가지의 반론을 제시한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전제한다. 셋째로, 사람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사 64:6; 렘 13:23; 17:9) 또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의 기적들을 베푸신 것도 신자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을 때이었다. 다섯째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여섯째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일곱째로,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주의 곧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죄인들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해야 하며, 그 의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그 의 안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며 실천해야 한다.

 

15-22절,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

[15-16절]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사람의 언약도 한 번 맺으면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 집이나 땅을 사기 위해 맺은 계약은 그대로 효력을 가지며, 아무나 그것을 임의로 폐하지 못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 얼마나 더 확실하게 시행될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은 그와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창세기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여기에 ‘네 씨[자손]’라는 말(단수명사)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켰다.

[17절]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7)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메시아 약속 곧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약속이었다. 약속된 복은 의와 영생이다. 율법이 언약보다 430년 후에 세워졌다는 것은 야곱 때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까지 계산한 것일 것이다. 출애굽기 12:40-4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아브라함 때로부터 계산하지 않고 야곱 때로부터 계산한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 26: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28:13-14, “(하나님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사람의 계약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지 못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친히 열조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이 폐하거나 헛되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 430년 전에 세워진 언약을 폐지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18절] [이는]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아닐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은혜로 주신 ‘그 유업’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었다(창 12:7; 13:15; 15:18; 17:8).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은 것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은혜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약속으로 그 땅을 얻었다. 이 사실은 후에 주신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들의 범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을 빌어’ 주어졌다. 여기에서 ‘중보자’는 모세를 가리켰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 신명기 5:5, “그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천사들로 말미암아’ 주셨다. 이것은 신명기 33:2의 말씀을 가리킨 것 같다: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거룩한 자들]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일만 성도’는 천사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신약성경은 본절 외에도 몇 곳에서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음을 증거한다. 사도행전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율법의 유효 기간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이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메시아 곧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 율법은 구약시대를 위한 것이었고 메시아가 오실 때 폐지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도 않다. 그 이유는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셨고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20절]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중보는 한편만 위하지 않고 양편을 위하여 중간 역할을 하는 자이다. 그 양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다.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는 말씀은 약속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율법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라고 본다.

[21절]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거스르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말미암았음이니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고 율법 제도가 일시적이라 하여,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모순된 것은 아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럴 수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왔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다른 목적이 있으셨다. 그러므로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참 목적을 알아야 한다.

[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율법의 목적은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그 ‘모든 것’ 속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된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특히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하다. 또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여기에 율법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과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고 그 목적이 서로 달랐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장차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와 영생의 복을 은혜로 주실 것을 보였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이 그것을 행하여 의와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은 그 목적과 의도가 각각 서로 달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에 서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행위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지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23-29절, 율법과 믿음

[23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오기 전에,’ 즉 신약시대 이전을 가리킨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어 구원얻는 진리를 계시하신 때를 의미한다.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는 말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상태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율법 제도 아래 있었고 또 율법의 정죄 아래 있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하였다(신 27:26).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감옥에서 형 집행을 기다리듯이, 모든 사람은 율법 아래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저주의 벌을 기다리는 자들과 같았다. 물론 구약 백성도 의식법에 암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렸다고 보지만, 율법의 엄격한 요구와 조건 아래서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죄의 형벌에 대한 공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의는 아직 미래의 것이었다.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몽학선생’이라는 원어(파이다고고스)는 ‘주인의 어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또 데려오는 종’을 가리킨다(BDAG). 사도 바울은 이 비유에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아이의 시절에 비유하고,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선생이 필요치 않은 성장한 나이에 비유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어린아이 시절에 필요했던 제도이었다.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한 자이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함을 통해서이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의가 없는 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깨닫지 못한 자는 결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올 수 없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이다. 율법을 통한 정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義)에 이르는 길이다. 사람에게 두 가지의 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자기의 의로운 행위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이다. 행위로 의에 이르는 길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또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불가능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이다.

[25절]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온 후’라는 말은 시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즉 신약시대를 말하며,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가 선포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를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고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최선의 삶을 추구했었다. 그때의 우리의 삶은 범죄와 실수와 불완전한 행위로 인하여 죄책과 불안과 공포 아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의 저주와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의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의 명령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또한 성막 제도 아래 있지 않고 제사들이나 절기들을 지킬 의무 아래 있지도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의를 완성하셨고 의식법들이 상징하는 바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신약 아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안에 있고 그의 대속 공로 안에 있다.

[26-27절] [이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되었음이니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안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옷 입었음이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문구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라고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요한복음 1:12의 말씀과 같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이라는 선생님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 또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예식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 옷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더 이상 율법 아래, 즉 율법 제도와 그 속박 아래 있지 않다.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본절을 직역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없도다.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이니라”이다. 이것은 구원의 복, 의(義)의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차별이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다 동등한 복을 받았고 다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린다. 이 말씀은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서의 남녀의 역할의 구별을 부정하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 그런 구별을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이다(고전 14:34-38; 딤전 2:11-15). 그러나 믿음 안에서의 영적 특권은 동일하다.

[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그와 연합한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기업을 상속받을 자이다.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이 상속받을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으나, 그의 영적 자손인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다. 베드로전서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증거한다. 여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 즉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그리고 우리가 아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을 때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여 있었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였고 우리로 하여금 의(義)를 갈망케 함으로써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이제 믿음이 온 후로는,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가 그를 알고 믿은 후에는 우리가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시시때때로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의 뜻과 교훈에 복종하고 있는가?

 

 

4장: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

1-11절,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과 율법의 관계를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는 아들과 그의 후견인이나 재산 관리인의 관계로 설명한다.

[1-3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원어(타 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는 ‘이 세상의 초보적인 것들’이라는 뜻으로 율법을 가리킨다. 상속받을 아들은 장차 아버지의 모든 유산의 주인이 될 것이지만, 어릴 때는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며 그의 후견인이나 재산 관리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의 법이 정한 나이가 되면 그 아들은 자기의 권리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즉 구약시대에는 율법 아래 복종해야 했었다.

[4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곧 그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요 1:1; 17:5).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이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후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창 3:15).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또한 예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영혼과 몸을 가진 참 사람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또한 율법 아래 나셨다. 그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다. 그것은 그가 언약의 백성이며 율법을 다 지킬 의무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과연 율법을 다 지키셨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셨다. 그가 율법 아래 나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이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모든 사람들을 다 가리킨다. ‘속량(贖良)한다’는 말은 값을 주고 사셔서 건져내시며 자유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셨다. ‘아들의 명분’이라는 원어(휘오데시아 uiJoqesiva)는 ‘양자 됨 즉 양자의 자격’을 뜻한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 아래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그들은 장성하여 더 이상 후견인과 재산 관리인 아래 있지 않는 아들과 같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6절]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사실이다(롬 8:9; 빌 1:19). ‘그 아들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영이 아니고 그의 신성(神性)의 영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 속에 오신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이시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사실이다. 아바[아빠]는 아람어로서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친근히 부르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의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7절]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상속자]8)니라.

신약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을 자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아들로서의 자유와 권리, 즉 상속자의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8-9절]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바울은 신약 성도가 또 다시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한다.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방종교의 종교의식이나 도덕적 규례들)에 종노릇하였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무지하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즉 율법으로 돌아가서 그것에게 종노릇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에 대해 바로 안다면, 신약 성도가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율법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신약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10-11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의 예이다. 깨끗하고 부정한 음식이나 할례의 규례를 지키는 것도 그러하다. 우리가 구약의 의식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건져내어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믿어 구원받게 한 일을 말한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음이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율법주의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의 복음의 바른 사역이 헛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진리를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기를 원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진리를 증거한다. 구약시대는 교회의 어린 시절과 같았으나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이것이 신약시대이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십자가 구속 사역으로 예수 믿는 우리를 율법의 멍에와 정죄(定罪)와 공포로부터 속량(贖良)하셨고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보내어주심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신약성도들은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율법의 멍에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12-20절, 바울의 염려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율법적 생활을 버리고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되었듯이 갈라디아 교인들도 율법에 대해 자유하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씀은 도덕법을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율법 제도로부터 자유하라는 뜻이며, 도덕법을 지킬 때에도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가 아니고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참으로 위했지만,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복음 진리에서 이탈함으로써 지금 바울에게 마음의 큰 고통을 주고 있다.

[13-15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 했을 때 여러 가지 육체적인 핍박과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이곳 저곳을 이동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든지(고후 11:23-30), 혹은 그가 어떤 몸의 질병 때문에 갈라디아 지방에 머물게 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은 몸의 약함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 일들이 초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버리셨거나 그를 징벌하시는 표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멸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혹은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핍박하였지만,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고 영접하였던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은 증거이었다. 그러나 주의 종 바울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러한 처음의 태도가 변하고 있었다. 이전에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자신들의 눈까지도 빼어주려 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6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간의 간격은 그가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겼다. 그가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감 없이 그대로 선포하고 가르쳤다는 사실이 그와 그들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 때문에 원수가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에 미혹되어 복음 진리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이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원수 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바른 복음 진리 안에서 그러해야 한다. 교회의 참된 일치와 연합은 성경 진리와 바른 교훈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7절]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저희’는 거짓 교사들, 즉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좋은 열심이 아니고 나쁜 열심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열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 자기 중심의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봉사자들의 열심은 인간 중심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복음 진리 중심적이어야 한다. 본문에 ‘이간 붙인다’는 원어(엑클레이오)는 ‘분리시킨다’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도 바울과 분리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열심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키고 자기들에게 속하게 하기 위한 열심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참된 종과 분리시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18절]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성도들은 목사의 기쁨이며 자랑이고 목사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교회에서 아무도 그를 필요한 인물로 아껴주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요긴한 인물이 되고 다른 성도들이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나의 자녀들아’라는 원어(테크니아 무)는 매우 친근감 있는 호칭이다. 이 말(테크니온)은 문자적으로는 ‘어린 자녀’를 가리키며 보통 ‘자녀’라는 말(테크논)보다 ‘사랑하는 자녀’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본 서신에서 여러 번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아’라고 불렀던(1:11; 3:15; 4:12, 28, 31; 5:11, 13; 6:1, 18) 사도 바울은 오직 이 곳에서 그들을 ‘나의 어린 자녀들아[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진심의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복음 진리 위에 세우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 사람에게 전도하고 그를 구원하여 복음 진리 위에 바로 세우는 일은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일 못지 않게 수고로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지도록 수고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약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도 얻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의 생명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나는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죄인, 아무 가치가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굳게 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만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살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한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음성을 변하려 한다’는 것은 사랑과 위로의 음성을 책망의 음성으로 변하려 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음성을 변하려 하는 까닭은 그들을 향해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이 있다’는 원어(아포레오)는 ‘당황하다’는 뜻도 가진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진실히 믿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토록 속히 변한 일 때문에,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헛되게 된 것처럼 느껴지는 일 때문에, 그리고 마치 마귀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보다 더 강하게 보이는 상황 때문에, 그들을 향해 의심이 생겼고 당황케 되어 그의 음성을 변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교훈의 목표는 분명하였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가 전한 복음대로 복음 안에서 의와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며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 안에 거하며 그 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그의 교훈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21-31절, 두 언약

[21-23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믿은 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곧 사탄의 미혹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예를 들어 복음에 속한 자와 율법에 속한 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난 이삭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었다. 한 사람은 자유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종이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자손이 크게 번창할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이 지날 때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의 제안으로 그의 여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하신 아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하기를 원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 후 15년이 지나 그의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이삭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었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24-28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모두의](전통사본)9)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劬勞)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그의 여종 하가[하갈]과 그의 아내 사라를 비유로 사용한다. 하갈과 사라는 두 언약과 같다.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 곧 지상의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구약교회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신약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을 통해 영혼들이 구원받고 또 구원받은 영혼들이 교회에서 양육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는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이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요 복음의 자유를 가진 자유자들이다. 우리에게는 성령 안에서 받은 의(義)와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가 있다. 구약교회는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을 교인들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많은 자들, 곧 아브라함의 수많은 영적 자녀들, 약속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이다.

[29-31절]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이스마엘과 이삭은 14살 가량의 차이가 났었다.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고 기록한다(창 21:9). 그가 어린 이삭을 괴롭혔던 것 같다. 자기 아들을 희롱하는 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요구했다(창 21:11).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이었고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난 자이었다. 신약교회 안에서도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어떤 육신적 관계 때문에 몸만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있다. 자기 자신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부모가 믿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다. 구원의 동기가 아닌 다른 동기나 이유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자들이 있다. 중생하지 못한 이런 교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참된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된다. 갈라디아교회 안에 있었던 율법주의 이단자들도 그런 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믿고 전파했던 바울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핍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교회의 회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참 교회의 회중에서 제외되고 제명되어야 할 자들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두 언약에 대해 말하며 두 종류의 교인들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율법 아래 있는 교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 안에 있는 교인들이다. 전자는 구약교회이고 후자는 신약교회이다. 율법주의 이단들은 신약 아래서도 여전히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소식이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와 자유를 얻은 자들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이 서신이 증거하는 핵심적 진리이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 성경적 복음의 진수요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의(義)는 죄인을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참 평안과 기쁨을 준다.

 

 

5장: 자유자의 삶--사랑

1-12절,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의 대선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곧 율법의 정죄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로마서에서도 증거된 진리이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주 예수께서도 “진리[하나님의 복음]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2). 죄로부터의 자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핵심이다. 이것이 의(義)요 구원이요 생명이다. 이 의, 이 구원, 이 생명을 받은 자는 율법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와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안에 굳게 서고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교훈한다. 종의 멍에란 율법의 종으로서 짊어졌던 멍에를 가리킨다. 구약시대 곧 율법 제도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의 공포, 율법의 정죄, 율법의 형벌이라는 무거운 멍에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그 멍에를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 복음의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율법의 멍에 아래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2-4절]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교회는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할 것인가,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갈래 길에 서서 혼란스러워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복음 안에 거하며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라고 교훈한다.

‘율법 안에서’라는 원어(엔 노모)는 ‘율법으로’라는 뜻이다. 할례를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는 같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할례 자체가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할례가 옛 언약의 표이기 때문이다. 옛 언약은 율법을 통해 맺어졌다. 율법의 요구 조건은 ‘하나님의 모든 법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영원한 저주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아래 속하여 율법을 다 지키겠다는 결심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가 될 것이다.

[5-6절] [이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기다림이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믿음뿐임이니라].

본문은 신약 성도들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육체로’라는 말과 대조되고, 또 ‘믿음을 좇아’라는 말은 ‘행위를 따라’라는 말과 대조된다. ‘의의 소망’이라는 말은 ‘의에 근거한 소망’이라는 뜻이다. 죄는 죽음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지만, 의는 영생과 천국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의의 소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무할례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은 결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고,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이다. 참된 복음 신앙이 그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의와 생명이 된다.

[7-9절]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 신앙생활을 잘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생들 때문에 복음 진리를 거역하는 자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권면은 잘못된 것이다. 복음 진리와 반대되는 권면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면은 항상 성경적이며 복음 진리에 맞는다. 사람의 권면은 성경말씀으로 분별되어야 한다. 잘못된 권면은 ‘누룩’과 같다. 비록 그 오류가 작게 보일지라도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잘못된 권면은 온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킨다. 작은 오류가 점점 더 큰 오류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온 작은 오류를 작게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10절]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비록 큰 오류가 갈라디아교회 안에 들어왔고 심각한 탈선이 일어났지만,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교인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 확신하였다. ‘다른 마음’은 복음 진리와 배치되는 생각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7). 갈라디아 교인들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라면, 그들은 사도 바울이 다시 강조하는 바른 복음 진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요동케 한 자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11-12절]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할례를 전하지 않고 오직 바른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했더라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핍박 때문에 진리를 변질시키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진리에 관한 한, 바울은 비타협적이었다. 이만큼 이 문제는 중요했다. 곡식과 가라지는 분명히 구별된다.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끊어져야 할 자들이었다.

본문의 요점은 할례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는 사람을 율법 지킬 의무 아래 두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 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복음 진리에 반대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 의에 근거하여 우리는 영광스런 영생과 영광스런 천국을 소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신 모든 잘못된 이단사설을 버리고 오직 성경의 바른 교훈에 굳게 서야 한다.

 

13-15절, 자유의 선용(善用)

[13-14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이루었음이니].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 안에서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을 말한다. 율법으로부터의 이 자유가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의를 행하라고 주신 자유이지, 결코 죄를 지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죄를 짓는 일에 쓰거나 자기 뜻대로 사는 일에 써서는 안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였다(롬 6:12-13).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한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상대방이 나의 주인이요 나는 그의 종인 것처럼 서로 섬기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하는 까닭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마 22:37-40). 사랑은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나타난다. 주님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도왔고 섬겼다(눅 10:33-35). 예수께서도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13:5),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요 15:13).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로 물고 먹는다’는 것은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데서 나온다. 미움은 마음의 살인과 같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서로를 죽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피차 멸망하는 길이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국가에서도, 또 온 세계에서도 진리이다. 주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25).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우리가 서로 헐뜯고 비난한다면 그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죄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성도도 때때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나 그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다른 성도를 계속 헐뜯고 비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다(요일 3:9-1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죄 짓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며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주신 자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성도들 간에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죄와 멸망의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18절, 성령을 좇아 행하라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聖化)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좇아’라는 원어(프뉴마티)는 ‘성령으로’라는 말인데,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聖化)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물론 성도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라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노력할 수 있고 또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화(聖化)는 성도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행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화(聖化)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로마서 8:13-14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에스겔 36:24-2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故土)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영=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17절] [이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 속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대립과 싸움이 있다. 성도의 싸움은 단지 육과 영 혹은 영혼의 싸움이 아니다. 성도의 싸움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본문에 ‘육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단지 ‘몸’(소마)을 가리키지 않고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의 싸움은 우리 속에 있는 죄성과의 싸움이다. 성도의 마음 속에는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가 있다. 그것은 몸의 남은 죄성과 영혼의 새로워진 성향이라는 두 원리이다. 후자를,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속사람,’ ‘마음의 법,’ ‘마음’(누스)[생각]이라고 표현하였다(22, 23, 25절). 그러나 중생한 자는 새 마음, 새 성향만으로는 성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던 것이다(24절). 성도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몸의 부패성을 극복해 나간다. 만일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그는 몸의 죄성과 죄악된 욕심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산다면,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를 표현한다. 구원받은 자, 즉 중생한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이다. 로마서 8:14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은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구약의 율법 제도 아래서는,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율법의 요구는 한마디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이었다. 구약 아래서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줄 뿐,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에 암시된 메시아께서 오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죄인들로 하여금 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하신 바가 되면 그는 이 의 안에 있고 이 의 안에 있는 자마다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 이 의가 갈라디아서가 강조하는 성도의 자유의 근거이다. 이것은 물론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된다는 뜻의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이 자유야말로 성도가 항상 평안하며 기뻐할 수 있는 보장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 때때로 실수하여 범죄하여도 다시 진심으로 뉘우치며 씻음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의 때문이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 때문에 율법의 공포와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그가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그의 성화(聖化)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과 같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몸의 남은 죄악성과 성령과의 싸움이 있다. 그것이 성도들의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 속에서 성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聖化)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는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비록 때때로 실패할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와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받을 형벌의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율법은 더 이상 그를 정죄하지 못한다. 그것이 성도의 평안과 기쁨과 힘의 원천이다.

19-21절, 육체의 일

[19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육체의 일’ 즉 죄악된 행위들은 분명하다. 첫 번째 부류는 음란이다. 전통사본에는 ‘음행’ 앞에 ‘간음’이라는 말이 하나 더 들어 있다.10) 간음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등은 다 성적인 죄악들이다. 세상의 많은 죄악들 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두드러진 죄악이 음란이다. 음란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모든 육체적 관계를 가리킨다. 인간의 성(性)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은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악을 범하고 있다. 그것이 음란의 죄악이다.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매우 음란했었다. 그들의 음란은 동성애라는 변태적 행위로 나타났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에 그곳의 원주민들은 매우 음란했었다. 그들에게는 근친상간적인 음행이 있었고, 동성간의 음행이 있었고 짐승과의 음행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가증한 행위들을 인하여 그 땅의 사람들을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해 그들을 진멸하셨다. 현대 사회는 매춘이 보편화되어 있는 매우 음란한 시대이며 인터넷 문명은 그것을 더욱 부추긴다.

음란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건전한 부부관계라고 본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2-5에서 말하였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거절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또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욕망을 자극하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20-21절] 우상숭배와 술수와.

육체의 일의 두 번째 부류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사실 더 근원적 죄악이지만, 음란보다 더 드러나지는 않는 것 같다. ‘우상’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말한다. 불교나 유교의 문화적 전통에는 우상숭배적 요소들이 많이 있다. 불교의 본래 교훈은 그렇지 않았지만, 오늘날 불교는 불상 앞에 엎드려 절하며 소원을 비는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비는 대상이 복을 줄 수 있는 참 신이 아니므로 그 행위는 우상숭배이다.

유교에서 유래되었을 제사와 차례의 조상숭배 행위는 부모 공경과는 실제로 관계가 없다. 그 행위를 통해, 돌아가신 부모님이 공경함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효도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해야 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후에는 할 수 없다. 장례식 때 고인의 사진이나 시신 앞에 절하는 것도 비슷하다. 절은 인격자 앞에 하는 것이 옳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죽은 자 앞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욱이, 제사나 차례는 후손들이 조상에게 화를 받지 않고 복을 받고자 예법과 정성을 갖추는 행위이기 때문에 분명히 우상숭배적이다.

미신 혹은 샤머니즘도 잡신 숭배 곧 우상숭배이다. 전통 문화나 민속 문화 속에는 이런 요소들이 많다. 결혼이나 취직이나 승진을 앞두고 점이나 궁합 혹은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어떤 사람들은 장난삼아 그런 일을 해보고 심지어 그런 일을 하는 교인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은 다 우상숭배적이다. 거짓된 신비주의도 일종의 잡신 숭배이다. 천주교회의 마리아 숭배도 우상숭배이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중보자,’ ‘보혜사,’ ‘하늘의 여왕’으로 부르며 그에게 기도하며 그를 경모하며 의지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었던 복된 여인에 불과하였다. 하나님 대신 하나님처럼 가치 있게 여기고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다. 오늘날 인간을 숭배하며 과학을 믿고 돈과 명예와 쾌락을 삶의 목표와 최고 가치로 두는 것도 분명히 우상숭배이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11)

육체의 일의 세 번째 부류는 싸움이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 등의 악들은 다 이웃을 미워하는 데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반대된다. 물론, 정당한 싸움, 선한 싸움, 진리의 싸움이 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 엘리야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하였고, 미가야는 400여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하였다.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의 버림을 받으면서도 진리를 위해 싸워야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한다. 의와 진리를 위한 싸움은 우리가 치루어야 할 선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런 싸움 말고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싸움이 있다. 남을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혹은 자기 명예나 세상 권력이나 물질적 이익 때문에 하는 싸움이 있다. 이것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싸움이다. 이런 자들은 이웃을 향해 분노를 품고 파당을 만들어 그를 해친다. 친밀한 교제와 파당은 다르다. 우리는 성도들 간의 참된 친밀한 교제는 나누어야 하지만, 파당은 피해야 한다.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육체의 일의 네 번째 부류는 술취함이다. 술취함은 사람을 방탕에 빠뜨린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술취함이나 마약은 사람에게서 바른 정신을 빼앗아가고 사람을 비현실적 환각 상태에 빠뜨리고 사람으로 책임 있는 인격자가 되지 못하게 한다.

성경 시대에는 술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만, 술에 대한 몇 가지의 점들을 생각한다면, 완전 금주(禁酒)가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첫째, 성경 시대의 술은 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았으나 오늘날에는 알코올 농도가 매우 높은 술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으므로 술을 조금만 마셔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졌다. 둘째, 술취함은 천국 갈 수 없는 큰 죄악이다. 셋째, 술이 가져오는 폐해들이 매우 크다. 술은 몸에 해로우며 경제적 낭비도 크고 또 살인, 강간, 교통사고 등의 사회적 해악도 크다. 그러므로 완전 금주가 가장 좋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천국에 못 들어가면 지옥밖에 갈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죄들을 지은 자들은 다 회개해야 하고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이 이런 죄들을 회개치 않으면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또 구원받은 성도는 이런 일을 계속 행해서는 안 된다. 일곱 번 넘어졌을지라도 또 다시 일어나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이런 죄악된 일들을 다 버려야만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에 열거된 열 일곱 가지 등의 죄악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다. 그 열 일곱 가지는 크게 네 부류인데, 음란과 우상숭배와 원수 맺음과 술취함 등의 일들이다. 우리는 이런 죄악된 일들이 있었으면 철저히 회개하고 버리고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22-26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열매’라는 원어(카르포스)는 단수명사이다. 이것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한 열매의 여러 면인 것을 보인다. 성령의 열매는 분리된 것들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바른 신앙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한 열매의 요소들이다.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사랑은 최고의 덕이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미움이 전혀 없고 사랑만 충만할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요점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신 6:5), 또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 사랑, 교인들 간의 사랑,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희락’이다. 성도가 들어갈 미래의 천국은 기쁨이 넘친 세계일 것이지만(롬 14:17), 범죄함으로 저주받은 세상은 슬픔과 근심 걱정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기뻐해야 할 이유를 발견했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게 되었다. 기뻐하는 삶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빌 4:4; 살전 5:16).

성령의 세 번째 열매는 ‘화평’이다. 화평은 마음의 평안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에게 편히 쉼을 주시려고 오셨다(마 11:2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린다. 화평은 또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을 포함한다. 서로 다투고 원수를 맺는 것은 죄악된 일이다(갈 5:20).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는 남과 싸울 것이 없고 원수를 맺을 것이 없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참된 평안을 주시고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신다.

성령의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상 소망을 내포하며 그 소망은 오래 참음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조급하지 말아야 하고 쉽게 분노하거나 또 쉽게 낙망해서도 안 된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때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온전한 인격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는 ‘자비’이다. ‘자비’라는 원어(크레스토테스)는 ‘친절함’이라는 뜻이다(BDAG).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가지시는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다(롬 2:4; 11:22; 엡 2:7). 성령께서는 우리를 감동하셔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향해 친절한 마음을 갖게 하신다.

성령의 여섯 번째 열매는 ‘양선(良善)’이다. 양선은 선한 마음이다. 악은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에게 물질적 손실을 끼치거나 남을 비난하고 그의 명예를 손상시킴으로 정신적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양선은 남을 위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마음이다.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언행을 해야 한다.

성령의 일곱 번째 열매는 ‘충성’이다. ‘충성’이라는 원어(피스티스)는 ‘믿음’이라는 단어이다. 충성은 믿음이 충만하여 믿을 만한 상태를 가리킨다. 믿음과 충성은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며 충성된 사람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신임성’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다.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은 인격의 큰 결함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믿을 만하지 못한 자는 쓰임받기 어려운 자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감동하시고 우리를 도우셔서 믿음의 인격 또 믿을 만하고 충성된 인격을 만드신다.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는 ‘온유’이다. ‘온유’라는 원어(프라오테스)(Byz)는 ‘온유, 겸손, 예절’ 등의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품성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시다(마 11:29). 교만은 온유와 반대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려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부드럽게 하셔서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8:3).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이다. 절제는 우리의 삶의 여러 면에 관계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술이나 오락에 적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시간과 물질 사용에도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욕구나 즐거움은 죄가 아니지만, 과도하게 추구하거나 거기에 빠지는 것은 나쁘다. 잠언 16:32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23절 끝에,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은 “이 같은 것을 율법이 거스르지 못하느니라”는 뜻이다. 성령의 열매는 율법에 반대되지 않고 오히려 일치된다. 성령의 열매는 실상 율법의 성취이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율법을 이룬다. 그러므로 로마서 8:4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자들이며 그에게 속하고 그와 연합된 자들이다. 그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여기에 ‘육체’라는 말은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정과 욕심’은 죄악된 감정과 욕심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 우리의 죄악된 감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되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우리는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행하자].

‘성령으로 산다’는 말은 성령으로 중생(重生)하여 새 생명으로 산다는 뜻이다. ‘성령으로 행할지라’는 원어(스토이코멘)는 ‘성령으로 행하자’(KJV, NASB)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며 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신구약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었을진대, 우리는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26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은 세상 영광이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 권세, 명예, 쾌락 등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것들은 영원하신 영광의 하나님과 그가 약속하신 영광의 천국과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단지 얼마 동안만 누리는 헛된 것들이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죄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탐하여 남을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또 속인다. 우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다 헛된 것들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요일 2:15-1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성령으로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화평,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 믿음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의 덕성이다. 사람의 가치는 세상 지식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돈의 많음에 있지 않고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성도의 가치는 그의 믿음의 정도와 성화의 정도, 특히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에 있다. 우리는 헛된 세상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 속에 성경말씀을 다 믿고 성경 교훈을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6장: 자유자의 삶--선행

1-10절,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본문은 범죄자에 대해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하여 교훈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신령한 자’ 곧 성령을 받은 자요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는 자이다. 성도는 범죄자를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충고하고 또 필요하면 책망도 해야 한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규모 없는 자들[무질서한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했다(살전 5:14). 히브리서 3:13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도는 범죄자를 충고하고 책망하고 바로 잡되 교만하거나 거친 마음으로가 아니고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25에서도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였다.

성도는 또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은 “너도 시험을 받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성도 각자가 시험을 받지 않고 범죄치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 각자의 성화가 중요하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것은 죄 안 짓는 거룩한 삶이다. 성도에게 성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가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마 5:16)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며(벧전 2:9)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벧전 3:1).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설교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마음의 기쁨과 평안과 힘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성도의 삶의 첫 번째 목표는 죄 안 짓는 것이다.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들을 서로 지라는 것은 남의 드러난 죄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라는 뜻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그런 다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죄의 용서를 상징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의 결점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서로 사랑하려면 서로의 결점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성도가 짐을 서로 질 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3절] [이는]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속임임이니라].

우리는 짐을 서로 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남의 드러난 실수와 범죄를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고 고상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비슷하게 부족한 사람이며, 어느 날 우리 자신도 다른 이의 죄와 비슷한 죄를 범할지도 모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자신을 속이거나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4-5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크게 여기지 말고 각자 자기 일을 살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자랑거리가 있으면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만 있고 남과의 관계에서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알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안다.

[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모든 좋은 것’은 현세적인 좋은 것들을 가리킨다. 말씀의 봉사자들의 사역은 귀하고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시는 일이다. 우리가 영적인 것의 가치를 안다면, 육적인 것을 함께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 봉사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후한 공급을 하였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져 레위 지파 사람들의 생활비로 주어졌다. 한편, 제사장들의 수는 레위인들의 수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레위 지파가 받은 십일조의 10분의 1을 받았다. 그들은 십일조 외에도 백성들의 제물들의 일부분을 그들의 몫으로 받았다(민 18:12, 29). 이와 같이, 구약시대의 십일조 제도는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 곧 성전 봉사의 일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유여함을 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운영의 한 원리를 보인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가 없지만, 복음 사역과 교회의 일에 전무(專務)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가 구약의 십일조 정신으로 교역자들과 교회 직원들에게 물질적으로 공급한다면, 목사들은 성경 연구, 독서, 설교 준비, 심방 등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고, 목사 후보생들은 충실한 신학 교육과 목회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 직원들은 교회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 유여함이 교회 봉사자들을 해이하고 불성실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 간의 문제이다. 성도들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에서 보여주신 정신을 따라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물질적으로 너그럽게 공급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거둘 것임이니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원어는 단순히 ‘속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아마 마귀에게나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속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들을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근거로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은 자연 세계나 영적 세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사무엘상 2:3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사 엘리에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야 한다.

[8절] [이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거둘 것임이니라].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은 육신의 죄성에 이끌려 행하는 행위들을 말한다. 그런 행위들의 결과는 썩는 것 곧 멸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것’ 곧 성령에 이끌려 행하는 행위들, 곧 성령의 열매를 맺는 행위들은 영생에 이른다. 이것은 사람이 이런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자는 육체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한다. 그러므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 전도하고 선을 행하는 것 등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영생 얻는 자들의 표요 장차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들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이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디도서 2:14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 쉽다. 남이 그를 몰라주고 오히려 그를 비난할 때, 또는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좋은 결과를 볼 것이며, 또 최종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결과를 볼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는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다.

[10절]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더욱’이라는 원어(말리스타)는 ‘특히’라는 뜻이다(KJV, NASB). 선행의 대상에는 구별이 없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모범이 되었다. 사도행전 2:44-45는 증거하기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했다. 또 사도행전 4:32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증거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는 범죄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하며 때때로 범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한 마음으로 범죄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

둘째로, 성도는 자신이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며 조심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안 짓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죄를 안 지으려면 우리는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죄를 안 짓는 방법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셋째로, 성도는 다른 이의 결점에 대해 관용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참된 사랑과 용서의 심정이다.

넷째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씀의 봉사자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하여지는 길이다. 몸의 죄성을 따라 사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생에 이르는 성도들의 마땅한 삶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중요한 한 목적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일곱째로,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아야 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거나 도리어 오해를 당할 때 또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쉬우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어야 한다.

 

11-18절, 할례냐, 십자가냐?

[11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직접 쓴 것 같다. 로마서 같은 서신은 더디오가 대서(代書)하였다(롬 16:22). 바울이 본 서신을 친히 쓸 때 큰 글자로 쓴 것은 아마 그의 눈이 나빠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교사들뿐 아니라, 단지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할례를 받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에 대한 어떤 신념 때문에가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하려고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진리를 저버렸던 것이다.

[13절]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언약의 내용인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같다. 그러나 할례를 이미 받았고 또 믿는 자들에게 할례를 강조하는 그들도 실상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육체로 자랑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에게는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할례받은 육체가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자랑거리는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그가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세상의 것들이 그에게 크게 생각되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빌립보서에서도 증거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害)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빌 3:7-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그토록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거리인가? 그것은 대속(代贖)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대속(代贖)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죗값과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신 일이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악된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 속했던 과거의 우리는 구주의 대속 사역으로 끝났고 새로운 우리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과거의 우리, 곧 죄악되었던 우리는 그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세상의 그 무엇도 이제는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15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2)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아무 유익이 없으되]13)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자뿐임이니라].

본문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를 보인다. 우리에게 할례는 아무 효력이나 유익이 없다. 할례는 율법 준수의 의무를 보인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며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할례가 유익하다는 뜻도 아니다. 이방인들의 할례 없음은 그들이 본래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으며 소망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다.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새 자아(自我)를 가리킨다(고후 5:17). 그것은 새 생명을 얻은 자요 새 성향을 받은 자이다. 구원받은 영혼의 새 성향은 지식과 의와 거룩만을 향한 성향이며 범죄치 아니하며 범죄할 수도 없는 성향이다. 성도의 거룩하고 의로운 삶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주신 구원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효력이 있고 유익이 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의미도, 가치도, 효력도, 유익도 없다. 그리스도 밖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정죄된 자요 허무한 자이며 영원한 멸망 곧 영원한 지옥 불못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이다.

[16절]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규례’라는 원어(카논)는 ‘규칙’라는 뜻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는 말은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 규칙’은 은혜의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안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가 있고 그것이 구원이라는 진리이다. 그것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는 복음 신앙을 가진 성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 듯하다. 신약 성도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17-18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이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가졌음이니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한 것은 그의 사도직과 권위를 부정하고 그의 전한 복음을 대항하고 이탈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런 도전 때문에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을 괴롭게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그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흔적’이란 채찍 자국같이 예수님과 그의 복음 때문에 그가 받은 고난의 흔적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사역자이었다. 고난의 흔적을 가진 자는 참된 종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복음의 왜곡일 뿐 아니라 그 복음의 부정(否定)이다. 그것은 다른 복음으로 제시되었지만, 그것은 실상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길이 없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자. 세상의 것들은 다 허무하다. 또 그것들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어야 하며 우리의 감사의 내용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겁내지 말고 각오하자. 고난과 핍박을 겁내는 교인들은 복음 신앙을 버리고 넓은 길로 가겠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가신 그 길, 사도들과 초대 성도들이 간 그 고난의 길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며 담대히 걷자.

 

미주

1) Byz p46 א* A 등.

2) Byz א A cop arm Irenaeuslat 1/2 Origen 등이 그러함.

3) Byz latt 등이 그러함.

4) Byz it vgmss 등이 그러함.

5) Byz it vgmss 등이 그러함.

6) Byz C vgcl 등이 그러함.

7) Byz itd vgmss syrp arm 등이 그러함.

8) Byz itd (syrp) 등이 그러함.

9) Byz A vgmss arm Irenaeuslat Origenlat 6/10 등에 있음.

10) Byz (Irenaeuslat Cyprian)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