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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3년 3월 16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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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진리 보수

2장: 좋은 일군

3장: 어려운 시대

4장: 설교자의 직무

 

서론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바울이다(1:1). 주후 3세기 초 터툴리안은 본 서신을 사도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O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xxv). 본서의 저작 연대는 주후 67년 이른 가을이나 68년 봄경일 것이다.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갇힌 때와는 상황이 달라 보인다. 그는 사형을 기다리고 있고(딤후 4:6; 빌 1:25와 비교) 그의 주위에는 동료들이 거의 없다(딤후 4:10-11; 골 4:10, 14와 비교).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2차 투옥된 후 로마 황제 네로가 죽기 전 즉 주후 68년 6월 이전에 사형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 전에 이 서신을 썼던 것 같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서신이다. 신약성경을 수집한 초대교회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순서대로, 구원의 복음을 해설한 로마서를 맨 처음에 두었고,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와 디도서를 거의 끝부분에 두었다. 그것은 이 세 개의 서신들이 일차적으로 일반 성도들에게보다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디모데후서의 특징적 주제도 목회 교훈이다. 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후시대의 모든 목사들에게 앞으로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니 고난을 각오하며 진리를 보수하고 전도자의 직무를 다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라고 유언적으로 교훈한다.

디모데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진리 보수

2장, 좋은 일꾼

3장, 어려운 시대

4장, 설교자의 직무


1장: 진리 보수

1-11절,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대로 그의 원하시는 자들을 일꾼으로 부르시고 세우신다. 예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그의 원하시는 자들을 사도로 삼으셨다(막 3:13-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라는 말은 복음의 중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의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요 1:4).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14:6). 그는 영생의 물을 주시며(요 4:14) 생명의 떡이시며(요 6:35, 48, 51) 영생을 주신다(요 10:28). 그를 아는 것이 영생이며(요 17:3)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요 3:16; 20:31).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고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메시아의 대속 사역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제물이 되셨고 택자들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들을 위해 의를 이루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거기에 죄인들이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는 길이 있다. 10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이다.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사도 바울의 참 아들같이 여겨졌다(딤전 1:2). 영적 관계는 육적 관계보다 더 귀하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안이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고 날마다 그 은혜를 힘입어 성화의 과정을 걷는다. 또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참 평안 곧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얻는다.

[3-5절]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간절히]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은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왔고 밤낮 기도하는 중 항상 디모데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디모데의 진실한 눈물을 생각하며 그를 보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를 봄으로써 그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원하였다. 디모데의 눈물은 그의 거짓 없는 믿음을 증거했다. 그는 진실한 믿음의 청년이었다. 그의 눈물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며 회개의 눈물이며 멸망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그런 참 믿음이 있었고 그 동일한 믿음이 디모데에게도 있었다. 경건한 가정에서 경건한 자녀들이 나온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중요하다. 불경건하고 음란한 세대에 경건하고 거룩한 어머니들이 많이 필요하다.

[6-8절]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심령]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혹은 ‘신중한’] 마음이니[심령임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복음을 위해 (나와) 함께](NASB, NIV) 고난을 받으라.

사도들의 안수는 특별한 은사를 동반했던 것 같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듯이(행 8:17),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했을 때도 하나님의 은사가 디모데에게 주어졌던 것 같다. 디모데는 그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해야 했다. 그 은사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필요한 사명감과 열심과 충성심 등을 동반한 은사이었을 것이다.

디모데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여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심령을 주시지 않았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교회의 직분자들은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으로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디모데는 하나님께로부터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을 받았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또 주를 위하여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도우시며 특히 고난 중에 도우심을 보인다. 그러므로 디모데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도 주의 복음과 주를 위한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막 8:38). 주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교회 역사상 믿음의 선진들은 많은 고난을 받았으나(히 11:36-37), 그런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충성했다. 우리는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본문은 복음이 주는 구원의 근거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신 거룩한 부르심은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그가 창세 전에 은혜로 선택하심에 근거한 것이며 그 내용에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있었다.

[10절]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났다. 요한복음 1:14, 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아들](전통사본)이 나타내셨느니라.” 디모데전서 3:16,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전통사본). 또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로 확증되었다(요 1:29; 갈 1:4).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고린도전서 15:20, 22,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11절]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이방인들의](전통본문)1)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열매를 맺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 ‘반포자와 이방인들의 사도와 교사’가 되었고 13권 내지 14권의 서신을 썼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신학적으로, 신앙 사상적으로 혼란할수록 우리는 사도들의 교훈인 신약성경을 더욱 읽고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약속이 있다(1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는 부활이시요 생명이시다. 그는 영생의 물을 주시며 생명의 떡이시며 영생을 주신다. 그를 아는 것이 영생이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고 자기 뜻과 영원한 때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9절).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창세 전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救贖)과 성령의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이었다.

셋째로, 우리는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 8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우리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

 

12-18절, 바른 말씀을 지키자

[12절]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를 인하여’라는 말씀은 앞절에서 말한 대로 ‘복음을 위해 전파자와 이방인들의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일 때문에’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혀 당하는 고난은 복음 전도자로서 받는 고난이었다. 그가 전도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고난의 길이다. 사탄과 세상은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일을 가장 미워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의뢰한 자를 알고 그가 자기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키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뢰한 자란 모든 성도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또 바울이 의탁한 것이란 자기의 영혼과 생명 그리고 그가 사명으로 받아 힘쓰는 복음 사역과 그가 세운 교회들일 것이다. ‘그 날까지’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혹은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를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 즉 사도 바울이 현재 당하고 있는 부당한 고난들도 보시고 아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또한 사랑이 풍성하시므로 자기 백성과 사랑하는 종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또 전능하시므로 그의 참된 종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고 오직 그의 명령을 지키고 그 외의 일들은 그에게 맡기고 그의 처분을 기다리면 된다.

[13-1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바른 말들의 개요를] 지키고[가지고 있으라. 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 바른 말들의 개요를 가지고 있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써’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함으로써 바른 말씀들을 지켜야 하고 그래야 그것들을 바르게 잘 전할 수 있다.

또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은 복음 전파의 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전도의 직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그에게 주신 전도자의 직무를 디모데는 끝까지 지키고 완수해야 했다. 그 직무의 수행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성령 곧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성도의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우리와 화목하셨고 성령으로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약속이었다(요 14:16-17).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듭나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 속에 들어오셨다(엡 1:13; 고전 12:13). 로마서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이시며 우리 속에 거룩한 정신을 주신다. 또 그는 ‘위로자, 격려자’이시다(요 14:16).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가 주신 직무를 행하게 하신다(겔 36:27). 디모데의 복음 전도의 직무도 그의 속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잘 수행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에게 맡겨진 아름다운 일, 즉 그의 전도자의 직무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완수하라고 교훈했다.

[15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제한적, 대략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아시아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반대했고 그를 버렸다. 디모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을 버린 대표적 인물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었다. 그들은 유명한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이와 같이 평탄치 않았다. 그가 곳곳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의 말을 믿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를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했을 때 그의 괴로움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험하셨던 바이었다. 요한복음 6:60 이하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어렵다고 말하며 물러갔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시몬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바울을 버린 것은 그의 입장이 바르고 강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부드럽고 포용적인 말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온전히 따르기보다 적당하게 하기를 좋아하고, 악한 자들과 정면으로 싸우기보다 적절히 타협하고 절충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의와 불의, 진리와 비진리,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타협과 절충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노하시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하든지 지지하지 않고 반대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른 지식을 가지고 바른 지식을 전하고 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옛날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죄악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잘못된 점들을 고치는 개혁을 단행했다. 에스라 10: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 느헤미야 13:1, 3,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비록 반대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바른 교훈과 인도를 따라주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런 지도자들이 있고 교회들 안에 이런 개혁과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16-18절]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호사)[얼마나 많이]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사도 바울에게는 고난만 있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로도 있었다. 그것은 오네시보로의 집을 통하여 받은 위로이었다.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보내신 위로와 격려이었다. 우선, 그는 사도 바울을 자주 유쾌케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난 중에 때때로 피곤하고 지쳤을 것이다. 그러나 오네시보로의 방문은 그를 기쁘게 하였고 그를 격려했다. 또 오네시보로는 사도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믿음 있는 성도이었다. 세상 친구들은 사람이 부유하고 평안할 때는 가까이 하지만,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그를 떠나간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되고 사형을 받을 가능성이 많아졌을 때 그의 곁에 있었던 친구들은 소수이었다. 오네시보로는 그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하나이었다.

또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있을 때에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 구금되어 있을 바울을 수소문하여 찾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마침내 그를 만났다. 날마다 하나님만 바라며 재판날을 기다렸을 사도 바울에게 오네시보로의 방문은 큰 위로이었을 것이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서도 사도 바울을 많이 섬겼었다. 디모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오네시보로는 여러 일들에서와 여러 방식으로 그를 도왔고 섬겼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주의 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네시보로는 주의 이름으로 소자(小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주의 말씀을 실천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말세에 주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보수하고 악한 자들과 타협하지 말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만 전해야 한다. 말세에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한다는 것은 외로운 길이지만, 바른 길이다. 그것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말한 여호수아가 붙든 길이며,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왕상 22:14)고 말한 미가야 선지자가 지킨 길이다. 우리와 우리 교회는 그 옛길, 바른 길을 지켜야 한다.

둘째로,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하여 아시아에 있는 많은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버렸다. 고라의 동료들과 유명한 족장 250명은 모세를 대적했었다(민 16:1-2).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였고,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렸다(딤후 4:10). 지상 교회에는 항상 그런 일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들의 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오네시보로는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 만났고 그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주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님 앞에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2장: 좋은 일꾼

1-13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1-2절]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고 진실한 일꾼들이 부족하므로’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강해져서 말씀 증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은혜이다. 그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를 굳게 믿고 모든 죄를 버리고 마귀의 권세를 담대히 물리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디모데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사도 바울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가 바울에게 들은 바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그의 기적들,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 그의 승천, 그의 재림 약속 등에 관한 것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곧 복음에 담긴 내용들이다. 위의 사실들은 ‘많은 증인 앞에서’ 확증된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한다. 그 사실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믿을 만한 것들이다.

기독교는 지어낸 이야기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이나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었다. 예수님은 지어낸 인물이 아니다. 만일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지 않았고 기적들을 행하시지 않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지 않았고 40일 후에 승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거짓말이 아니고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해 증거되고 순교의 피로 확증된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한다. ‘충성된 사람들’이란 참으로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나 환경여건에 따라 변하는 자는 충성된 자가 아니다. 충성된 자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복음 진리를 믿고 그대로 행하는 믿을 만한 자이다. 디모데는 자기가 받은 복음을 이런 충성된 자들에게 전수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진리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후시대에 전달되며 계승되는 방식이다. 이것이 참 제자 훈련이며 신학 교육이다. 교회는 이런 계승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후대에 전수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받고 배워 자신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바르게 가르칠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인 복음 사역을 위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성경말씀을 진실하게 믿고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바르게, 충실하게 가르칠 수 있는 자들, 즉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3-4절] [그러므로](전통사본)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전통사본에는 없음)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는 충성된 일꾼으로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많은 고난 중에서 고전분투하면서 전도의 일을 하였듯이, 디모데도 이제 고난을 감당하며 일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전도는 전쟁에, 그리고 전도자들은 군인에 비유할 수 있다. 마귀는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전도 사역을 방해하며 전도자들을 핍박한다. 그러므로 전도와 교회 사역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각오하며 수행해야 할 일이다. 전도자들은 군인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군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군인들은 평소에 훈련에 참여하고 비상이 걸리면 언제나 출동하고 언제나 전쟁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몸이 피곤하다거나 가정에 무슨 일이 있다고 그 일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을 부른 국가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 그들의 충성된 행위와 수고 때문에 국민들은 밤에도 평안히 쉬며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그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 물론 전도자들이 자기들의 집을 내버리고 자기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들의 집을 돌보는 것도 기본적인 의무이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주의 일이 첫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5-6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에 비교한다. 선수는 규칙들을 지키며 경기해야 한다. 달리기 선수는 트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축구 선수는 손으로 공을 만지거나 상대방 선수의 발을 걸거나 차거나 하는 반칙을 해서는 안 된다. 경기에서 이기려면, 선수들은 반드시 경기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또 복음 사역자들을 농부들에 비교한다. 농사는 부지런함과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땅을 일구어 고르게 하고 그 위에 씨를 뿌리고 적당하게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아내고 마침내 잘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기까지 부지런히 수고하고 뙤약볕에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 농사일이다. 농부들이 이런 수고를 했을 때 곡식을 거두는 기쁨과 복을 누릴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첫째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성경에 교훈된 규칙대로 행해야 하고, 부지런하게 또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한다.

[7-9절]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주시기를 원하노라](전통사본).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전도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도 증거된 바이다. 예수께서는 비록 육신적으로가 아니고 오직 법적으로이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그는 참된 인성을 소유하셨고 그 인성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는 고난 받는 그의 모든 제자들의 본이 되셨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들이 지금 고난 가운데서 일하고 있지만, 그 결말은 복된 승리일 것이다. 그들은 복되고 영광스런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난을 받았고 죄수로 감옥에 갇혔으나 하나님의 복음은 갇혀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은 망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망하지 않는다.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제국은 삼백년이 되지 않아서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 동안 진실한 성도들은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동굴에서 신앙을 지켜 왔다. 과거에 일본 군국주의의 기독교 핍박이나 그 후 공산주의의 기독교 탄압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어둘 수 없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죄인들을 자유케 하는 자유의 복음이며 그 무엇도 그 자유의 복음을 매어둘 수 없었고 또 앞으로도 매어둘 수 없을 것이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

사도 바울이 고난 중에도 모든 것을 참은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이루셔서 그를 믿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이다. 어떤 죄인이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영원한 영광과 함께’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영원한 영광’을 동반하는 구원임을 뜻한다. 구원은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은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구원 얻은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은 죄가 전혀 없고 의만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며(벧후 3:13),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세계이다(롬 8:18).

[11-13절]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믿을 만하지만 이 말씀은 더욱 믿을 만한 말씀이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주와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참으면 또한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를 부인한다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3). 우리의 믿음은 보잘것없고 우리의 마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진실하시며 신실하시고 언제나 믿을 만하시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로서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받는 고난의 결과로 택한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구원은 영원하며 영광스럽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고 믿을 만한 약속의 말씀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의 종들과 직분자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성과 세상의 죄악된 풍조들과 마귀와의 전쟁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싸워야 한다.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에베소서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

둘째로, 우리는 성경적 사도적 복음 진리와 교훈들의 계대(繼代)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파악하고 보수하고 후대에 전수해야 한다. 우리의 바른 교훈 전수는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며 주일학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충성된 청년들을 불러 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다음 세대를 위해 가르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것이 참된 제자 훈련이며 실상 그것이 바른 신학 교육의 일이다.

셋째로, 주의 종들과 교회직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시인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인내하며 주와 함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시고 함께 살고 함께 왕노릇하게 하실 것이다. 주의 종들과 교회직분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되기를 사모하며 주를 위해 고난도 받기를 사모해야 한다.

 

14-19절, 진리의 말씀과 헛된 말

[14절]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주](전통본문)2)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복음의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각오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수고하며 인내할 것을 기억해야 하고 또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일꾼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 자들인데, 말다툼은 전혀 그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말다툼은 도리어 듣는 자들에게 큰 싸움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를 주어 그들로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잃어버리게 하고 결국 멸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말다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오직 마귀가 기뻐할 뿐이다.

[15절]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은 1:13에 말한 ‘바른 말씀’ 곧 건전하고 유익한 말씀을 가리키며, 2:2에 언급한 ‘내게 들은 바’이며, 2:8에 말한 ‘나의 복음’이며, 2:9에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교회가 소유한 하나님의 진리이며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말씀이며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교회의 힘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 ‘옳게 분변한다’는 원어(오르도토메오)는 ‘바르게 해석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전달은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근거 없이 추측하며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 성경의 어떤 본문을 성경의 다른 곳들의 명백한 진리와 충돌하게 해석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 예수님 믿고 구원을 얻으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고 읽게 되지만, 우리가 점점 성경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성경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우선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하고, 각 문장의 뜻을 바르게 해석해야 하며, 또 그 본문 앞뒤의 문맥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또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경의 어떤 불명확한 부분들은 명확한 다른 부분들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디모데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함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하였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자기 임무를 다하는 일꾼이다. 일꾼이 자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나, 자기 임무를 다하는 일꾼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된’이라는 원어(도키몬)는 ‘시험된, 증명된’이라는 뜻을 가진다. 복음 사역자는 설교할 때나 말씀을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서 그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며 전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힘쓰라’는 말은 바른 말씀의 봉사자가 되는 데에도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인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목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되어 다른 이들과 어린 성도들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할 위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에게도 교훈이 된다. 우리는 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16-17절] 망령되고(베벨로스)[속되고, 불경건하고, 가치 없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강가이나)[괴저, canker(KJV), gangrene(NASB, NIV)]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주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보수하고 바르게 해석하며 불경건하고 헛되고 무가치한 변론들과 논쟁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한 데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은 경건과 믿음에 유익한 말씀이지만, 헛된 말들은 점점 더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다.

불경건하고 헛되고 무가치한 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독한 창질’[괴저]은 몸의 한 부분이 썩어 다른 부분들까지 썩게 하고 마침내 뼈들까지 썩게 하는 무서운 병을 가리킨다. 그것을 조기에 발견해 조치하지 않으면 온 몸을 버리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암과 비슷하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이런 무서운 병과 같다. 이단이 그러하다. 교회가 이단에 대해 지혜롭고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온 교회가 부패하고 속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단자들인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름을 언급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부패시키는 이단자들의 이름을 분명히 들어 비평함으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이단자들을 조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8절]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불경건하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문제는 진리에 관한 문제이었다. 그들은 진리에 관해 그릇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를 부정하는 잘못이다.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헛될 것이다. 과연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에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렸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성경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이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 . .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 역사도 ‘신화’(saga) 혹은 ‘전설’(legend)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3) 이것은 이단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 바르트는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니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얼마나 더 불신앙적일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후메내오와 빌레도이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대교단들과 우리나라의 몇몇 대교단들(감리교, 장로교 기장, 통합)이 이런 이단 사상들을 배격하지 않고 용납하였고,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의 다수의 개신교회들은 신학적으로 변질되고 부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배교의 큰 죄악이다.

[19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과 이단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말한다.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 열거한 진리들은 성경의 근본 진리들이며 그 외에도 더 있으며 이런 근본 진리들을 다시 논해서는 안 된다. 참된 교회는 성경의 근본 진리들 위에 세워져 있다.

이제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다. 하나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단사설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바른 진리를 믿고 그 믿음에 굳게 설 것이며 마침내 다 영광스런 구원에 이를 것이다.

또 하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는 모든 성도는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 불의에서 떠나지 않는 자는 참 성도의 표를 가지지 못한 자이다. 불의는 도덕적 악 뿐만 아니라, 교리적 악 곧 이단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리적, 윤리적 악에서 떠나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분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불경건한 이단사설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각종 이단종파들과,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확신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가리킨다. 멸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그 진리들을 다 믿고 교리적 이단사설들과 윤리적 죄악들로부터 떠날 것이다.

 

20-26절, 귀히 쓰는 그릇

[20-21절]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큰 집’ 곧 부잣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 주인 밥상에 놓이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좋은 그릇일 것이다. 귀한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고 보관해 놓은 더 좋은 그릇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쓰레기통으로나 버리는 물건을 두는 데 쓰는 그릇도 있을 것이다.

주의 종들이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과 같은 불신앙적 이단사설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될 것이다.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교리사상적으로 깨끗해야만 한다. 그들은 모든 이단사설들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고 바른 신앙 사상, 바른 교리 사상을 가져야 주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주께서 귀히 쓰시는 종은 바른 말씀, 순수한 말씀을 소유한 종이다. 그런 종은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될 것이다.

[22절]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의 종들은 윤리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젊은 교역자들은 무엇보다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 음란의 죄는 매우 치명적 죄악이기 때문이다. 정욕의 시험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남녀 관계의 시험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이다. 성경에서 요셉은 그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창세기 39:10, 12,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비록 집주인은 진실을 알지 못하였고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것들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범죄하지 않으려 애쓴 경건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마침내 그를 들어 가족들을 구원하는 자로 쓰셨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는 말은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인다. ‘깨끗한 마음’은 모든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진실하게 믿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자기 믿음의 성장을 위하며 또 다른 이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는 자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참된 교회이다.

참된 교회는 이런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여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의는 모든 죄와 불의와 악에 반대되는 말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의는 성경적 행위이며, 세상 표준이나 세상 사고방식에 따른 행위와 다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만을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모든 불신앙과 의심을 다 버리고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 믿음은 성경말씀을 통해 온다(롬 10:17).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함으로써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요 13:3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사랑은 모든 윤리적 선을 포함하는 가장 고상한 덕이며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성품이다.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다. 또 우리는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마음에는 교만한 마음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해야 한다(마 11:29). 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려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순수하게 부르는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특히 주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들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하고 온전해야 한다. 주께서는 이런 그릇들을 교회에서 크게 들어 사용하실 것이다.

[23-24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또 주의 종들이 소유해야 할 덕들이 있고 버려야 할 악들이 있다. 주의 종들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들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다툼이 나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란 용어나 명칭이나 표현상 문제로 다투는 말다툼이나, 중요성이 없는 지엽적 문제로 다투는 것이나, 세상 문제들의 변론들을 말할 것이다. 그런 변론들은 어리석은 변론들이다. 우리는 그런 일들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온유하고 다투지 않는 성품을 첨가하였다. 과연 온유함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성품이다. 주의 종들이 온유한 성품이 없고 사사건건 사람들과 다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 모세는 매우 온유한 자이었다. 민수기 12:3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주의 종들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 자이어야 한다. 자녀 교육에서와 비슷하게, 영혼들을 양육하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눈물과 더불어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25-26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교훈, 훈계, 교정,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던 저희로 깨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까 함이라](NASB; KJV, NIV도 뜻이 비슷함).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교훈하고 징계하되 온유함으로 교훈하고 징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혹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진리를 알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와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곧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주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겨 돌아오게 하신다면 그들도 회개하여 복음 진리를 깨닫고 믿고 구원 얻을 것이다.

우리는 다 과거에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었다. 에베소서 2: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요한일서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거역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그들이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믿고 그 말씀만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와 개혁신학이 하나님의 그 바른 말씀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 말씀만 믿고 이단사설들을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그들은 육신적 욕망의 죄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들을 귀하게 사용하신다.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서로 다투지 말고 온유한 마음으로 교훈하며 징계해야 한다. 거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온유함으로 그를 교훈하고 교정하고 징계해야 한다. 바른 사상, 바른 인격, 특히 온유한 성품--이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들과 직분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며 모든 성도들이 힘써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성화의 목표이다.

 

3장: 어려운 시대

1-5절, 어려운 시대

[1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칼레포스)[어려운(NASB), 위험한(KJV)] 때[때들]가 이르리니.

하나님의 종들은 말세에 어려운 시대가 올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이 일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시대는 역사상 종종 있었으며, 오늘 시대는 특히 그러하다고 보인다.

[2-5절] [이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부인할 것임이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본문은 말세에 어려운 시대가 온다고 말한 이유를 보인다. 2절부터 5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열아홉 가지의 이유와 특징을 말한다.

첫째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과 사람들의 눈과 사회의 여론 때문에 이기적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선을 행하려 하지만, 사람의 뿌리깊은 죄성의 하나는 이기심이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함이 없고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의 유익만을 위할 것이다.

둘째로, 사람들은 돈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탐심이다. 이것은 사람의 뿌리깊은 죄성의 또 하나의 요소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딤전 6:10). 돈 사랑이 말세의 특징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셋째로, 사람들은 자긍할 것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고 자기의 업적을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자랑하고 선전하고 자기를 내세울 것이다.

넷째로, 사람들은 교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자기를 크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말세에는 사람들이 교만하여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크게 여길 것이다.

다섯째로, 사람들은 훼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훼방한다’는 원어(블라스패모스)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욕하고 비난한다는 뜻이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악하게 모독적이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방하는 말을 잘할 것이다.

여섯째로, 사람들은 부모를 거역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람의 기본적 의무이지만, 말세에는 사람들이 악해져서 부모를 멸시하고 거역할 것이다.

일곱째로, 사람들은 감사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며 부모님을 비롯해 우리가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감사하는 것도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사할 줄을 모를 것이다.

여덟째로, 사람들은 거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죄와 불경건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깨끗함을 말한다. 그러나 말세에는 사람들이 죄악된 일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홉째로, 사람들은 무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없을 것이다.

열째로, 사람들은 원통함을 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용서하고 화해하지 않고 보복심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열한째로, 사람들은 참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소한다’는 원어(디아볼로스 diavbolo")는 ‘거짓말로 남을 중상하며 비난한다’는 뜻이다(Thayer). 말세에 사람들은 거짓말로 남을 중상하고 비난할 것이다.

열두째로, 사람들은 절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술 뿐 아니라, 말이나 감정이나 오락 등에서도 절제함이 없을 것이다.

열셋째로, 사람들은 사나울 것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의 특징은 사나움이다. 사람들은 온유하고 양순하지 않고 노아 홍수 심판 때에 멸망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처럼 심히 강포할 것이다(창 6:11, 13).

열넷째로, 사람들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 양심이다. 그러나 사회가 심히 타락하면 사람들이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이다.

열다섯째로, 사람들은 배반하여 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리를 버리고 배신하는 것을 말한다. 의로운 선생이신 주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처럼, 사람들은 선생과 친구와 이웃을 배신할 것이다.

열여섯째로, 사람들은 조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모든 일을 신중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말세에 사람들은 지혜 없고 어리석은 자같이 조급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열일곱째로, 사람들은 자고(自高)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곧 교만이다. 말세에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고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또 남에게 무례한 말을 하고 무례한 행동을 할 것이다.

열여덟째로, 사람들은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쾌락이 다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즐거움들이 있지만(전 5:18), 말세에 사람들은 하나님과 경건보다 육신의 쾌락이 삶의 목표와 가치가 될 것이다.

열아홉째로,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세에 사람들은 예수님 믿는다는 이름과 교회 다니는 모양이나 교회 직분은 가지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거나 성경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열아홉 가지 내용들을 열거한 후에 디모데에게 “이런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교훈했다. ‘돌아선다’는 원어는 ‘돌아선다, 피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과 교제를 끊고 그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의 악에 물들게 되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더럽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 운동은 숫자 운동이나 재력 운동이 아니다. 진리 운동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건져내고 그들로 하여금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게 훈련시키며 오직 천국에만 소망을 두게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숫자가 많든 적든이 문제가 아니고 재정이 많든 적든이 문제가 아니다. 땅 위의 참된 교회가 항상 외적 영광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말세에 어려운 시대가 올 것이다. 본문은 그 어려운 시대의 특징을 열아홉 가지로 열거하였다. 그 시대가 오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즉 이기적이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악하게 비난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으며 거룩하지 않으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으며 거짓말로 남을 비난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싫어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신을 높이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다.

둘째로, 오늘 시대가 어려운 시대라고 보인다. 특히 오늘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쾌락을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로, 우리는 이 시대를 분별하고 악한 자들과의 교제를 끊고 그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노아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엘리야나 미가야처럼,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만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힘써야 하고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과의 교제를 끊고 그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6-12절, 바울의 간증

[6-7절] [이는]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여자들]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있음이니] 그 여자[여자들]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메데포테)[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 중에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여자들은 죄를 많이 진 자들이 되었다. 사람의 죄는 점점 누적되어 무거운 짐이 된다. 그 여자들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었다. 죄악된 행위는 욕심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려면 정욕, 물욕, 명예욕 등 모든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해야 한다. 또 그 여자들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죄를 버리고 죄씻음을 받으라는 교훈이므로, 참된 회개가 없이는 그 누구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고 죄사함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8-9절]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생각](mind)(KJV, NASB, NIV)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임이니라.

얀네와 얌브레는 유대 전통에 출애굽 당시 모세를 대적했던 인물로 알려졌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했던 자들도 그들과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저들을 세 가지로 묘사하였다.

첫째로, 그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진리, 곧 사람이 믿고 구원 얻어야 할 진리를 대적하였다. 바울에게는 대적들이 있었다. 디모데후서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둘째로, 그들은 생각이 부패한 자들이었다. 사람의 부패는 그 생각의 부패에서 시작된다. 생각의 변화가 없이는 참된 회개도, 참된 믿음도 없다. 따라서 사람이 구원 얻으려면 생각의 변화가 필요하다. 시편 14:1-3,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회개는 생각의 변화이다.

셋째로,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나, 버려두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요한복음 10:26-28,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요 주 예수님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다. 저 악한 자들은 이와 같이 진리를 대적하고 생각이 부패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로 행동하고 있지만, 그들의 어리석음이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다.

[10-11절] [그러나]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나의 교훈’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가리킨다. ‘행실’은 복음에 합한 그의 행실을 가리키며, ‘의향’은 그의 행실의 의도를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 ‘사랑’은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말하며, 또 ‘오래 참음’과 ‘인내’는 그가 많은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참고 견딘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핍박과 고난의 일들이다. 사도행전 14:19,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선동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일들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다”고 말한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따라 다니며 그가 당한 고난들을 다 보았다. 그는 그와 함께 가까이 활동하면서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가 어떻게 믿고 사랑하며 오래 참고 인내했는지, 또 그가 어떤 핍박과 고난들을 받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지만, 주께서 그 모든 것들에서 그를 건져주셨다. 그가 순교해야 할 때가 되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도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세상의 모든 일을 통치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 그는 사도 바울을 많은 핍박과 고난과 죽음의 위험 가운데서 건져주셨다.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 자신이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참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주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11). 성도들의 핍박과 고난은 기독교 역사상 사실이었다. 한국교회도 일제 시대와 공산 정권 하에서 그러하였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은 다 끝난 것은 아니고 아직도 남아 있다. 진실한 성도들은 항상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면서 믿음과 충성으로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본문에 언급된 어리석은 자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죄를 무겁게 졌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렸고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복해 죄를 짓지 말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참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대적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바울 당시에도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생각이 부패되었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 교회에는 때때로 이런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을 때 결코 그것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것을 믿고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을 피하는 자가 되지 말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바른 교훈, 바른 행실, 바른 의향, 믿음, 오래 참음, 사랑, 인내, 핍박과 고난의 견딤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졌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핍박과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주님의 위로와 보호와 구원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라야 한다.

 

13-17절, 성경의 효능

[13-14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이 세상은 악하며 속이며 속는 세상이며 그런 일들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일수록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한다. 디모데는 이미 배웠고 확신하였다. 그는 그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먼저 잘 배우고 그 배운 진리를 확신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이 세상 풍조나, 해이해지고 속화된 교회들의 풍조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 옛신앙, 성경적 신앙을 붙들고 그 안에 거해야 한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배웠던 선생님을 기억하면서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전달한 선생이었다. 오늘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사도들의 교훈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입장과 인격과 삶을 기억하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진리들 안에 거하기 위해서 그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듯이, 오늘날도 바른 진리를 배운 자들은 그 진리를 가르쳐준 목사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 진리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는 또 그가 배우고 확신한 것들 안에 거하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배우고 알았던 성경을 기억해야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알았다. 오늘날 많은 아이들은 성경 대신 세속적인 오락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

성경은 두 가지 중요한 효능이 있다. 첫째로, 성경은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효능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은 성경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죄인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성경의 중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누가복음 24:26-27,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믿음을 얻는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엑세르티스메노스)[온전히 준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한다. ‘모든 성경’이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책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각 책의 모든 부분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적 내용들과 교리적 내용들과 윤리적 내용들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이라는 뜻이다. 그 말은 성경의 신적 원천과 신적 권위를 보인다. 성경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말씀이며, 성경의 사상은 사람의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상이며 성경의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교훈’은 교리적 내용과 윤리적 내용을 포함한다. 신앙생활에는 믿어야 할 내용과 행해야 할 내용이 다 중요하다. 오늘날 교인들은 단지 귀를 즐겁게 하며 웃기고 울리는 말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교회들이 속화된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을 사모해야 한다. ‘책망’은 교리적, 윤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다. ‘바르게 함’은 잘못의 교정이다. 우리는 성경의 책망을 통해 사상적, 윤리적 오류를 고친다. ‘의로 교육함’은 구원 얻은 성도들이 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나, 우리의 인격과 삶이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히 준비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두 번째 효능이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게 한다. 구원의 목표는 우리로 거룩하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며 성경은 이 일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함으로써 성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 얻은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고 진리의 진리 됨, 새 생명의 생명 됨을 증거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확신해야 하고 그 확신 안에 거해야 한다. 누가복음 1: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1,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확신해야 한다.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전통사본).

셋째로, 우리는 온전케 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성경을 통해서 가능하다. 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주야로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을 주야로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는 자들은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온전케 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이 칭의(稱義)이며 법적인 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인격이 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성화이다. 성령께서는 이 일을 위해 우리 안에 오셨고 거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육신의 죄성을 극복함으로 성화를 이룬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또 베드로후서 1:10의 말씀대로, 우리도 성화를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한다.

 

4장: 설교자의 직무

1-5절, 설교자의 직무와 고충

[1-2절] [그러므로 내가](전통사본)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의 나타나실 때에 그의 나라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 앞에서](전통사본)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에피스테미)[준비하라](Thayer, BDAG). 범사에[온전히]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설교와 전도의 직무를 엄숙하게 명하였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부분에서 성경의 유익에 관해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구원 얻은 자로 온전한 인격자가 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게 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주께서 목사들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직무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일을 엄숙하게 명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며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승천하신 주 예수께서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하늘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재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이지만, 구원 얻지 못한 자들은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디모데가 전해야 할 말씀은 첫째로 복음 진리이며 둘째로 ‘바른 교훈’ 곧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다.

‘전파하라’는 것은 선포하라는 뜻이다. 설교는 대화나 토론이 아니고 선포적이어야 한다. 설교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을 좋아하든지 안 좋아하든지 관계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사람의 견해들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선포하면 된다. 설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목사들이 항상 힘써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즉시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많은 죄인들이 지옥 곧 영원한 멸망의 불못을 향해 가고 있다. 또 구원 얻은 영혼들도 항상 하나님의 모든 뜻을 듣고 배워야 한다.

‘온전히 오래 참으라’는 말은 설교 사역이 어려운 일임을 암시한다. 영혼들의 구원과 변화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사탄은 자기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또한 사람의 죄성과 인격의 결함은 매우 느리게 극복되고 고쳐지는 것 같다. 전도의 결실이 금방 보이지 않기도 하며 또 믿는 자들의 연약한 모습들을 보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설교자를 낙망케 하는 요인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온전히 오래 참음으로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가르침과 경책함과 경계함과 권면함을 포함한다. 성경은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며 또 그들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이다. 그러나 전도와 양육은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다. 구원의 복음의 증거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교훈과 함께, 교리적, 윤리적 부족과 잘못에 대한 책망과 경계도 필요하고 권면도 필요하다.

[3절]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우크 아넥손타이)[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투스 뮈두스)[신화들](NASB, NIV)를 좇으리라[좇을 것임이니라].

목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하기를 힘써야 할 이유는 어려운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가 이미 왔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졌다고 해서, 이 세상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어렵고 힘든 날들이 올 것을 예언한다. 물론, 역사상 교회들이 부흥하는 때도 있었으나, 교회들이 매우 해이해지고 속화되는 때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을 것이다. 바른 교훈은 역사적 기독교, 즉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바른 교훈, 신구약 성경에 밝히 계시된 교훈을 가리킨다. 그것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 즉 옛신앙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와 생활 교훈으로 구성된다. 바른 교리의 핵심은 속죄의 복음 진리이다. 이것을 좀더 체계적으로 진술한 것이 신학이다. 옛날부터 믿어온 기독교 신앙은 바른 신학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사람이 무엇이며 특히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가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지, 구원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내세의 소망은 무엇인지 등이 교리들과 신학의 주요 내용이다. 개혁신학의 내용이 그러하다. 바른 생활 교훈은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부모 거역,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 등의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겸손하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이런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둘 것이다. ‘귀가 가렵다’는 말은 귀를 긁어주는 말, 곧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말들의 주제나 내용은 천적(天的)이거나 영적이지 않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이다. 그런 소원은 육신적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욕망을 충족시킬 스승들을 많이 둘 것이다.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들을 좇을 것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바른 교훈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 대신 헛된 이야기들, 즉 신화들을 좋아할 것이다. 신화는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이다. 이것은 재미있을 수는 있으나 무가치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좋아할 것이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예화들이나 과장된 이야기들도 이런 유의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무익하고 헛된 말들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견디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시대에도 목사는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은 목사에게 주는 네 마디의 명령이다. 첫 번째 명령은 “모든 일에 근신하라”는 것이다. 목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깨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그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변질되기 쉬울 것이다.

두 번째 명령은 “고난을 견디라”는 것이다. 고난 받을 각오를 하는 것, 이것이 어려운 시대에 부름 받은 목사들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마귀의 종들이 세력을 얻고 악한 자들이 앞장서서 분주히 왕래하며 무지한 교인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때에는 주의 참된 종들은 고난을 각오하고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

세 번째 명령은 “전도인의 일을 하라”는 것이고, 네 번째 명령은 “네 직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목사의 일차적 직무는 설교이며, 설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 전파는 주께서 교회에 맡기신 첫째 과제이다. 물론,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며 가르치는 것이다. 목사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치며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면해야 한다. 이것이 목사의 직무이다. 목사는 전도뿐 아니라, 교훈과 책망과 경계와 권면의 모든 직무를 다해야 한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어려운 시대를 당하였을지라도, 목사들은 설교의 직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변질시키거나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에 맞춰 줄이거나 절충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타협 없이 충실히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심판의 때가 올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즉 모든 산 자들과 모든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을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 바르고 선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설교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그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직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항상 힘써야 한다. 그는 온전히 오래 참고 가르치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해야 한다. 교인들은 그들의 목사가 이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어려운 시대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이다. 오늘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라고 생각된다. 오늘 시대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저버리는 배교와, 그 배교를 책망하지 않고 용납하고 포용하는 타협과, 신비적 은사 체험을 강조하는 은사주의가 만연한 혼돈의 시대이다.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교인들은 세상과 가까워지고 있고, 성경의 바른 교훈, 즉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에 관심을 갖고 사모하기보다 돈 사랑과 육신의 쾌락 추구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은 더욱 그러하여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넷째로, 참된 목사들은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 바른 말씀을 전하며 참된 교회를 건립하고 이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오늘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목사는 근신하여 고난을 각오하고 성경의 바른 교훈을 계속 충실하게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 교인들도 근신하여 그것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

 

6-8절, 사명의 길

[6절] 관제(灌祭, drink offering)[전제 奠祭; 붓는 제사]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유언적 서신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옥에 두 번째 갇혀서 순교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이 마지막 편지를 썼다고 보인다. 관제(灌祭) 즉 전제(奠祭)는 주로 포도주를 붓는 제사 방식을 말한다. ‘부음이 된다’는 말은 ‘부어지고 있다’는 뜻인데, 자신이 순교의 죽음을 죽을 것을 암시한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붓고 있었다. 그것이 전도자의 길이다. 전도자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진리를 위해 죽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바울의 순교의 죽음은 그가 전파했던 복음을 확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복음은 순교자들의 피로 인쳐진 복음이다.

‘떠날 기약’이라는 말은 죽음의 때를 가리킨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고 있다. 죽음은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 즉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죽은 성도들의 영혼은 천국에서 임시로 거하다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함께 와서 몸과 결합하여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7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싸웠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마쳤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그의 사명의 생애를 세 마디로 표현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하였다. 성도의 생애는 선한 싸움의 생애이다. 물론, 우리는 나쁜 싸움은 피해야 한다. 그것은 몸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 . .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 . .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 .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나 성도에게는 선한 싸움이 있다. 디모데전서 1:18-19,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신앙생활은 선한 싸움이다.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몸의 죄악된 성질과 싸우며 세상의 악한 풍조들과 싸우며 그 배후에 활동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 에베소서 6:10-1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특히, 사명의 길은 싸움의 길이다. 바른 말씀의 전파는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전도와 설교는 큰 싸움이다. 진리를 전파하고 보수하는 것은 싸움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싸움이나 싸움은 언제나 힘들고 피곤해지고 지치기 쉽다. 영적 싸움도 그렇다. 그러나 성도들과 목사들의 싸움은 끝까지 잘 싸워 이겨야 할 싸움이다.

사도 바울은 또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하였다. 그는 사명의 길을 완수하였다. 그의 ‘달려갈 길’이란 전도자의 길이었다. 그는 그 사명의 일, 곧 전도를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충성하였다. 사도행전 20:24에 보면,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그의 사명의 길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 그의 일을 완수했다. 사명자는 중간에 주저앉거나 포기치 말고 사명의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달려야 한다. 사명자는 물론이고 모든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사도 바울은 또 “내가 믿음을 지켰다”고 말했다. 성도가 지켜야 할 것들 중에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이며 참된 보화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죄씻음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지만, 그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파선되고 변질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온갖 고난 중에서도 이 믿음을 지켰다.

세상에는 우리 믿음을 무너뜨리는 이단들이 많고(딤후 2:18) 믿음에 관하여 실패한 자들도 있다(딤후 3:8). 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환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수한 성경적 믿음을 잘 지켜야 한다(계 13:10; 14:12).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의 면류관’은 천국에서 누릴 완전한 의(義)를 가리킨다고 본다. 주께서는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바울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나 장차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도 최종적으로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마지막 심판에서 모든 사람들이 의인과 악인 두 부류로 나뉠 때, 바울은 의인으로 분류되고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행한 것인데 바울이 받을 의, 곧 성도들이 받을 의는 율법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롬 3:21-22; 빌 3:9). 로마서 10:4는 주 예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말했다.

이 의는 바울에게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실 복이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고 그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을 사모하는 자이다. 주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에 대한 소망과 사모함이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성도의 필수적 덕목이다(고전 13:13). 모든 믿는 자는 주의 재림의 날과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다.

성경은 장차 성도가 얻을 면류관을 ‘의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할 뿐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라고도 표현한다. 그것은 성도들이 장차 얻을 영생과 영광을 증거한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요 5:24) 장차 주의 영광의 몸의 형상을 본받아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다(롬 8:18, 30; 빌 3:21).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둘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같이 사명의 길을 잘 걸어야 한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 몸의 죄성과 이 세상의 악의 풍조와 마귀의 시험과 잘 싸워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달려갈 길을 잘 마쳐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도로서의 일평생의 삶이 있고 직분자로서의 생애가 있다. 우리는 성도로서와 직분자로서 우리의 달려갈 길을 잘 마쳐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잘 지켜야 한다. 참 믿음은 구원과 영생을 보장한다. 예수님 믿는 믿음이 있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믿음 없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한다.

셋째로,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나, 믿음과 순종으로 잘 살다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 의를 확인 받아야 한다. 그 의의 면류관과 그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은 천국 백성의 표가 될 것이다.

 

9-22절, 복음 사역의 어려움들

[9-10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이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갔음이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자기에게로 오기를 요청했다. 그 이유는 동역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복음 사역의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은 복음 사역자들의 부족일 것이다. 데마는 골로새서 4:14에 보면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골로새 교인들에게 문안했었다. 그러나 그는 복음 사역자로서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갔다. 그에게는 옥에 갇힌 바울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고 그에게서 세상적 소망이나 영광을 찾아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바울을 떠나갔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 우리는 그들이 그곳들로 간 이유를 모른다. 그들은 데마처럼 이 세상을 사랑해 사도 바울을 떠나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바울 곁에 있지 않다. 옥에 갇혀 부자유스럽고 나이 많은 사도 바울 곁에 그를 도와 일할 자들이 부족하였다.

[11절]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누가는 의사로서(골 4:14) 사도 바울과 더불어 전도 활동에 참여했고 지금도 바울 곁에 있고 아마 의술로도 그를 도왔을 것이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어졌고, 누가만 바울과 함께 있었다. ‘누가만’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곁에 필요한 동역자들이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 20절 이하에도 몇 명의 인물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복음 사역을 위해 중요한 일꾼들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마가는 사도 바울의 처음 전도 여행시 바울과 함께 있었으나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돌아갔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와 함께 일하기를 강하게 거절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고 마침내 서로 헤어지기까지 했었다(행 15:36-41). 그러나 이제 사도 바울은 마가가 그의 일에 유익하므로 데려오라고 말한다. 이전에는 마음이 약했던 마가가 이제는 그에게 유익한 일꾼이 되었다.

복음 사역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충성된 일꾼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인들은 많으나,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일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도 바울에게 동역자가 부족했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디모데 같은 동역자가 있었고 누가도 있었다. 또 마가도 이제 그에게 유익한 동역자의 한 사람이었다.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동역자의 부족뿐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감옥은 춥고 배고프며 또 육신적 고통이 있는 곳이다. 더군다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21절).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노 사도가 밤의 추위에 떠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추위는 복음 사역에서의 어려움의 한 요소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주의 일에 힘썼고 성경말씀을 읽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디모데에게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그 책은 물론 성경책일 것이다. 원문에는 복수명사로 되어 있다. 그것은 여러 권의 책들, 즉 여러 개의 두루마리들을 의미한다. ‘가죽 종이’라는 원어(멤브라나)는 짐승들의 가죽으로 만든 종이(parchments)를 가리킨다. 바울은 배고픔과 추위가 있는 옥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쉬지 않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평안할 때, 건강할 때,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얼마나 더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더 성경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는가?

[14-15절]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복음 사역의 또 하나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이다.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디모데전서 1:20에 언급된 인물 즉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해 파선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인 그 알렉산더일 것이다. 그는 처음에 교인이었던 것 같다. 직분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날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처럼, 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었던 가룟 유다처럼, 그는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사도 바울에게 해를 많이 보였다. ‘해를 많이 보였다’는 말은 ‘악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뜻이다.

또 그는 사도 바울의 말을 심히 대적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무시했고 그와 변론했고 그의 말씀을 심히 대적했었다. 이런 자들이 구약교회 안에도, 신약교회 안에도 있었다. 진리의 말씀을 바로 전파하셨던 주 예수님에게도, 사도 바울에게도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회 사역에 때때로 대적자들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복음 사역에는 항상 그런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도 저를 주의하라”고 말한다. 진실한 성도는 이런 자를 주의해야 한다. 이런 자가 있다고 해서 낙심할 것은 없다. 주의하면 된다. 우리는 이런 자들과 동류가 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과 사귀면 시험에 들기 쉽고 신앙에 유익 대신 큰 손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현세에서도 그들의 악을 보응하신다. 그것은 악인들 중에 회개하고 구원 얻을 자가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일이 너무 방해를 받지 않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6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대적자들이 있는 것뿐 아니라, 또한 때때로 외로이 홀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처음 복음을 변명할 때 그의 편에 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외로운 사역의 길인가! 이것이 진실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때때로 가야 했던 길이다. 노아가 이 길을 갔고 엘리야도 갔고 다니엘도 갔고 바울도 갔다. 우리도 가야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를 버렸던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았다. 바울은 저 무지하고 깨달음이 없었던 사람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셨던 긍휼과 사랑이다. 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말씀하셨다(눅 23:34).

[17절]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바울의 복음 사역에 대적자가 있었고 또 사람들의 지지나 격려는 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를 버림으로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함이 있었으나, 주께서는 그와 함께하셨고 그를 강건케 하셨다. 목사의 용기와 힘은 주께서 함께하신다는 그 한가지 사실에 있다. 실상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신 것은 그를 통해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복음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말씀이다. 주께서 목사들을 강건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 택한 백성이 다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극심한 반대와 비난, 그리고 위협과 고난이 바울에게 있었지만, 그는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 ‘사자의 입’이라는 말은 그를 죽이려는 무서운 악의 세력을 비유한 말일 것이다.

[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구원하신다’는 원어(소죠)는 ‘구원한다’는 뜻 외에 ‘지킨다’는 뜻도 있다. 이 경우는 옛날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지킨다’는 뜻이 적합해 보인다(KJV). 주께서는 바울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바울뿐 아니라, 주의 신실한 모든 종들과 성도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신실하기만 하면 된다.

신약성경에서 ‘주’는 대부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께서 바울을 강건하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고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일하시며 신적 영광을 받으시는 참된 하나님이시다.

[19-22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가족]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4)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오네시보로의 가족 등은 바울에게 위로가 되는 동역자들이었다(롬 16:3-4; 딤후 1:16-18). 또 바울은 에라스도, 드로비모, 으불로, 부데, 리노, 글라우디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형제들을 언급한다. 그들은 다 교회들의 모범적인 봉사자들이었던 것 같다.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다”는 원어(트로피몬 데 아펠리폰 엔 밀레토 아스데눈타)는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이었다. 사도들이 다 그러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의 말기에 그는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다. 이것은 사도시대의 말기에 주께서 병고침의 은사를 점차 거두어 가신 증거인 것 같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기적이 사도시대 이후 모든 시대에 계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다니엘의 시대들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으며,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들을 거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복음 사역에는 어려움들이 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떠나갔다.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 바울을 대적하였다. 동역자의 부족, ‘추위’ 같은 육체적 고난, 감옥에 갇힘, 의식주의 궁핍, 대적자들, 교인들이 참된 사역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버림, 외로운 싸움 등이 있었다. 우리는 복음 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서 여러 어려움들을 가진다. 때때로 우리는 참된 교제를 나눌 대상이 없고 의식주의 궁핍이 있고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하는 일도 있다. 신앙의 여정에는 어려움들이 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어려움들 속에서도 사도 바울을 위로하셨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인 디모데, 처음에 연약했을지라도 나중에 복음 사역에 유익했던 마가, 또 끝까지 바울 곁에 있었던 의사 누가 같은 몇 명의 동역자가 있었다. 그들은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들이었다. 또 비록 사람들은 그를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그를 도우셨고 구원하셨고 위로하셨다. 그는 오늘 우리에게도 세상 끝날까지 그러하실 것이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가르치기를 힘썼고 소원하였다.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우리는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고 힘써 성경 읽고 기도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미주

1) Byz C itd vg syrp copsa bo arm 등에 있음.

2) Byz A itd vg syr(p) copsa-mss bo-pt 등이 그러함.

3) 교회교의학, 4권, 1부, 335, 336쪽.

4) Byz vg copbo-pt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