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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2년 3월 16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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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장로의 자격

2장: 바른 교훈에 합한 삶

3장: 선행

 

서론

디도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1:1). 본서의 저작 연대는 주후 65년경일 것이다. 본서는 내용과 문체에 있어서 디모데전서와 가깝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쓴 직후 본 서신을 썼을 것이다.

디도서의 특징적 주제도 목회 교훈이다. 디도서는 디모데전서와 같이 장로의 자격에 대해 교훈한 후, 구원의 목적으로서의 선행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본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장로의 자격

2장, 바른 교훈에 합한 삶

3장, 선행


1장: 장로의 자격

1-4절, 믿음, 지식, 영생의 소망

[1-2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명칭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낸다. 그는 종이 아니고 자유인이었지만, 자원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께 복종함은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다. 더욱이, 구속(救贖)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바울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된 그의 백성이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다(롬 6:22).

바울은 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증거한다. ‘사도’(使徒)는 ‘보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가 된 목적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해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엡 1:4).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 믿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6:39-40).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 믿음을 ‘같은 믿음’[공통적 믿음]이라고 표현하며 또 에베소서 4:5에서는 ‘한 믿음’[같은 믿음]이라고 말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1에서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둘째로, 바울이 사도된 것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해서이었다. ‘경건함에 속한’이라는 원어는 ‘경건함에 일치하는, 경건함에 이르는’이라는 뜻이다. 진리의 지식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고 경건함에 맞는, 경건으로 나타나는 지식이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사람의 죄에 관한 지식,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구원에 관한 지식, 내세에 관한 지식을 포함한다.

믿음은 진리의 기본적 지식에 근거하고 그 기본적 사실들을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더욱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알게 된다. 에베소서 4:13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고 말했고,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믿음이 덕과 지식을 갖추어야 함을 말했고(벧후 1:5) 또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교훈했다(벧후 3:18).

셋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었다. 영생은 인생의 최대의 소망이다. 사람은 본래 영생할 존재이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창 2:16-17) 영생의 소망이 암시되었었다. 만일 아담이 그 실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죽음이 왔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사함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미 원리적으로 성도들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그들은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복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또 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40). 또 그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8).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13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썼다. 영생은 가장 큰복이며 복된 소망이다.

[2-3절]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케뤼그마)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신, 거짓말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실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믿을 만하시다. 그는 영원 전부터,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약속 혹은 암시하셨다. 그는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및 선지자들에게 영생을 약속 혹은 암시하셨다. 하나님께는 시간표가 있다. 모든 일은 그 시간표대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 그 말씀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전도’ 곧 선포 혹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하여 나타내셨고, 이 설교의 일은 바울에게 그리고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맡겨졌다. 이것이 사도들과 목사들의 직무이다. 전도 혹은 설교는 일차적으로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맡겨진 직무이다.

전도는 죄인들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롬 10:17). 모든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전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다 찾아 구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이것은 전도자들뿐 아니라,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이 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책임을 느껴야 할 일이다. 전도는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를 위해 헌금해야 한다. 예배당도 이 일을 위해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이 일을 명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하신 명령인 전도와 설교의 일을 크게 여기고 이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4절] 같은 믿음(코이네 피스티스)[공통적 믿음,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과](전통본문)1) 평강[평안]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진 믿음을 ‘같은 믿음, 공통적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공통적 믿음이 피부 색깔, 언어, 지방, 사회적 신분, 학력, 빈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다. 이 공통적 신앙이 바로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는 그것을 ‘옛신앙’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이 신앙이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공통적 믿음은 교회의 기초이므로 이 믿음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 우리는 이 공통적 믿음,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바른 신학적 전통 속에서 확인하고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영생의 소망 안에서 항상 주님을 섬겨야 한다.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과 평안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항상 나오는 이 기원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복된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시며 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화(聖化)를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이며, 또 ‘하나님의 평안’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에 근거하여 누리는 평안, 즉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가리킨다. 은혜와 긍휼은 우리가 얻은 구원의 원인이며 평안은 그 구원의 결과이다. 구원 얻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날마다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은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전도와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얻는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한 진리 지식을 가져야 한다. 성도의 참된 지식은 그의 경건하고 선한 인격과 삶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냉랭한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경건한 진리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 지식도 전도와 설교를 통해 얻는다.

셋째로,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복은 영생이다. 그것은 성도의 복된 소망이다. 이 세상은 늙고 병들고 죽는 절망의 세상이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다. 이 소망도 전도와 설교를 통해 얻는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항상 사모하며 풍성하게 받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인격과 삶의 거룩함과 온전함을 이루고 또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환경적 평안을 누려야 한다.

 

5-9절, 장로의 자격

[5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말한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것’은 교리 사상의 면에서나 교회 행정과 질서의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신앙 지식에서나 교회 행정에서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 사도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서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했다. ‘장로’라는 원어(프레스뷔테로스)는 ‘나이가 더 든 사람’이라는 뜻으로 신약성경에서 목사와 장로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장로들’이라는 말은 한 교회에 장로가 적어도 두 명 이상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한 사람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6절부터 9절까지는 장로의 자격에 대해 말한다.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장로의 자격에 대한 말씀은 디모데전서 3장의 내용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교리적 사상이나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 온전한 자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인격, 곧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행실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장로는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 말씀은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신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 결혼한 자는 부부 관계와 결혼 서약에 충실해야 한다. 가정에서 부부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좋은 인격이 아닐 것이다.

장로는 또 신실한 자녀들을 둔 자라야 한다. 이것은 자녀들을 성경말씀대로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해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 자녀를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라고 표현하였다. 방탕은 자신의 의무나 책임, 삶의 목표 등을 잊어버리고 술과 음행 등 육신의 쾌락에 빠진 것을 말한다. 불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에 대해 다 적용된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는 경건함과 거룩함, 선함과 진실함과 단정함이다. 바른 신앙교육은 경건하고 순종하는 자녀를 만들 것이며, 그것은 믿음의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부모라면 자녀들을 성경말씀으로 바르게 충실하게 가르치며 믿음으로 양육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자녀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있는 자녀가 될 것이다. 자녀를 보면, 그 부모의 신앙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7-9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관리자]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利)[이익]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신약성경에서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이며(행 20:17, 28) 그 둘이 다르거나 둘 사이에 등급이 있다는 암시는 없다. ‘감독’(에피스코포스)이라는 말은 ‘돌보는 자, 보살피는 자, 감시하는 자’라는 뜻이다. 감독은 교회를 돌보고 보살피며 교인들이 바른 믿음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직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 곧 교회의 관리자이다. 그것은 교회 재산이나 재정을 관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를 관리하는 자, 즉 그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는지를 살피는 자이다.

한번 더, 본문은 감독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는 사상에서나 행위에서나 결함이 없어야 한다. 그는 흠 없는 온전한 신앙 인격자이어야 한다. 이 점이 반복해서 강조된다.

장로는 또한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 바른 신앙인은 자기 뜻대로 무엇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경의 교훈대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존중할 것이다.

장로는 또 급히 분내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은 성낼 때 실수하기 쉽고 선한 일을 어그러뜨리기 쉽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 사람에게 정당한 의분(義憤)은 필요하고 비진리와 불의를 볼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우리는 깊이 생각한 후에 해야 하며, 오직 진리와 의를 위해서만 해야 하고, 단순히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로는 또한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술을 즐기는 자는 술 취하게 될 것이다. 술 취함은 사람으로 실수하고 범죄하게 한다. 성경은 술 취함을 명백히 정죄한다(고전 6:9-10; 갈 5:21; 엡 5:18).

장로는 또 구타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이 아내나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성경이 교훈하는 바이지만(잠 13:24; 22:15; 23:13, 14), 그런 경우에도 격한 감정을 가지고 또 비열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되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인격적이게 해야 한다(엡 6:4; 골 3:21).

장로는 또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더러운 이익은 정당하지 않은 소득을 말한다. 성도는 고리대금이나 투기성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우리는 게으르게 먹으려 하지 말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려 해야 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 헌금을 정확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 재정에 대해 책임을 가진다. 교회의 재정은 교인들의 헌금이므로, 장로교회의 헌법대로, 목사와 장로들 즉 당회는 그것을 관리하고 감독할 책임이 있다. 헌금을 계수하고 정리하거나 지출하는 일은 집사들이 할지라도 그 재정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게 하는 것은 목사와 장로들 즉 당회의 책무이다.

장로는 또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이기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남과 나눌 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한다.

장로는 또 선을 좋아하는 자이어야 한다. 온전한 인격은 선한 인격이며 선을 좋아하는 인격이다. 선행은 참 믿음의 열매이다.

장로는 또한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는 자이어야 한다. 근신하는 것은 정신을 차려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의로운 것은 성경과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정정당당한 것이다. 거룩한 것은 죄와 불결이 없는 것을 말한다. 절제하는 것은 술이나 육신적 쾌락을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라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장로는 또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드는 자이어야 한다.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이다. 그래야 그가 다른 이들을 교훈하고 권면할 수 있고 또 바른 교훈을 거슬러 말하는 자를 책망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장로들, 감독들 즉 목사와 장로들은 교인들을 보살피고 교회를 인도하는 직분자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어야 한다. 그들은 신앙 지식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 권면할 수 있고 말씀을 거스르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다. 이런 자가 목사와 장로들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모든 성도의 성화의 목표이다. 모든 성도는 책망할 것이 없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실천해야 한다.

 

10-16절, 복종치 않는 자들

[10-11절]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당시 그레데섬의 각 성의 교회들에는(5절)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복종은 성도의 미덕이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 즉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이다. 또 헛된 말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말을 가리킨다. 또 속이는 것은 마귀적인 죄악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모든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계 21:8; 22:15).

그런데 당시 교회들 안에 이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해이해진 교회들의 현실이었다. 특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였다. ‘할례당’은 할례를 주장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이 없었다. 복음의 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 그러나 복음의 바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복종하는 자가 될 것이다. 땅 위의 교회들은 옛날부터 문제가 많은 불완전한 교회들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지식이 부족하고 성화가 불완전하며 사탄의 활동들이 맹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더러운 이(利)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리고 있었다. 복음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물질적 이익이 삶의 전부이며, 하나님 대신 돈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다.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친다’는 말은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참된 교사들은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지만, 악한 교사들은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렸다. 즉 그들은 믿는 가정들의 믿음을 어지럽히고 파괴시켰다. 아마 그들은 집집마다 방문하며 그런 일을 했던 것 같다. 말의 영향은 크다.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주지만,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준다. 이단은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희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불순종의 말, 헛된 말, 속이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말이 교회 안에서 퍼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교회에 앞세우지 말아야 하고, 그런 자는 교회의 직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오직 순종의 말, 가치 있는 말, 진실한 말, 반드시 해야 할 말만 해야 한다.

[12-14절] 그레데인[그들 자신들]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신화들](NASB, NIV)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들]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들 자신들 중에 한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레데인들의 풍습과 기질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남을 해치는 악한 자들이며 먹기를 좋아하고 게으름쟁이였다. 좋은 풍습이든지 나쁜 풍습이든지 사회 분위기는 그 사회의 사람들의 기질을 형성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근면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자들이 있다. 그레데인들은 대체로 거짓되며 악하며 게을렀다. 그레데 교인들 중에도 그런 기질을 벗어버리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악한 자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말한다. 아첨은 상대방의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만, 책망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성경은, 훈계를 듣는 것이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며 목의 금사슬이라고 말했고(잠 1:8, 9),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하였다(잠 27:5). 우리는 복종치 않는 자들을 권면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랑이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복종치 않는 악한 자들을 책망하라고 교훈한 목적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사람은 책망을 잘 받을 때 잘못을 고치고 바른 신앙 인격이 될 수 있다. 둘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신화들과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명령들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잘못된 말을 듣는 것은 신앙을 해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망을 잘 받을 때 그런 일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15-16절]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선한 일에 합당치 않은(NASB), 부적합한(NIV)]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아직도 죄와 불결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여전히 음식물들 중에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상 그들의 생각과 양심이 더러웠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公言)하지만,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했다. 그들은 말과 행위, 신앙고백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았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는 말과 행위가 일치하고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증한 일이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더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니,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모든 선한 일에 부적합한 자이었다. 신앙의 결과는 선행이다. 물론 선행처럼 보이는 사람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신앙의 증거는 아니다. 참 신앙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선행이 가능해 보인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많은 선행을 하였다. 그러나 믿는 세계에서는 선행이 신앙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는 이가 선한 일을 행치 않고 악한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가 참으로 믿는 자인지 의심해볼 수 있다. 참된 신앙은 선행으로 증거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을 분별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며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리며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하고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에 부적합한 자이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 믿는 자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분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그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11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13절,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우리는 악한 자들의 악행을 분별하고 확증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그들이 그런 악한 말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그들의 말을 조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를 배반하는 악한 자들의 말을 따르지 말고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한다. 이단들이 퍼지는 것은 구원 얻은 성도들이 성경 진리의 지식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지식을 가지지만, 우리가 진리의 온전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모든 헛되고 거짓된 말들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2장: 바른 교훈에 합한 삶

1-3절, 나이든 자들에 대한 교훈

[1절] 오직 너는 바른(휘기아이누사)[건전한,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너는 건전한,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복종치 않는 자들과 대조하여 주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1:13에서 “내게 들은 바 건전한,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말한다. ‘건전한, 바른 말을 본받아’라는 말은 ‘건전한, 바른 말의 본 혹은 개요’라는 뜻이다. 건전하고 바른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도들을 통해 주신 교훈, 곧 신약성경 교훈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과 규범이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다른 말들 혹은 어떤 때는 약간 혹은 비슷하게 다른 말들로 진리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성경을 주셨다. 선지자 이사야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직역)고 말하였다(사 8:20).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기준이며 규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오늘날 목사들은 사도들을 통해 성경에 밝히 증거된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목사들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성경에 정통해야 하고, 성경을 제멋대로 풀지 말고 바르게,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2절]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네팔레이오스)[절제하며(tem- perate), 깨어 있으며(sober), 맑은 정신을 가지며] 경건하며(셈노스)[엄숙하며(KJV), 품위 있으며(NASB), 존경할 만하며(NIV)](Thayer, BDAG) 근신하며(소프론)[건전한 생각을 가지며, 바른 생각을 가지며](BDAG)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휘기아이논)[건전케(KJV, NASB, NIV), 건강케, 바르게, 정확하게](Thayer, BDAG) 하고.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나이든 남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하라고 당부하였다.

첫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절제하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 사람이 비록 젊었을 때는 믿음과 지식과 지혜가 부족해서 술 취하기도 하고 시간과 돈과 힘을 낭비하기도 하였을지라도, 나이가 든 지금은 맑고 바른 정신, 건강하고 건전한 정신으로 절제 있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든 사람이 아직도 절제심이 없다면 그는 나잇값을 못하는 자가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했다(고전 9:25).

둘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품위가 있고 존경할 만해야 한다. 나이든 남자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품위 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이어야 한다. 빌립보서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존경할 만하며, 진지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존경할 만하고].”

셋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건전한, 건강한 생각, 바르고 정확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나이든 자들은 인생의 연륜이 헛되지 않아서 범사에 사려 깊고 신중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베드로전서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넷째로, 나이든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해야 한다. ‘온전하다’는 원어는 ‘건전하다, 건강하다, 바르다, 정확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도 건전하고 사랑도 풍성하고 인내심이 많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성숙함을 나타낸다. 나이든 남자들은 신앙 인격에 온전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3절]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히에로프레페스)[매우 정중하며, 공경할 만하며, 공손하며](BDAG)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사도 바울은 또 나이든 여자들에게도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과 처신이 매우 정중하고 공경할 만하며 공손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3:4-6, “[너희 단장은]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둘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참소치 말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3: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디모데전서 5: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참소하는 것은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비난은 오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남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옳은 비평도 남의 말은 안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은 온유함과 조용함에 있다(벧전 3:4).

셋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술은 육신의 쾌락을 구하는 것이며 술 취함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큰 죄악이다.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넷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선한 것’은 자신과 남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이다. 경험으로 확인된 성경 지식이 그런 것들이다. 개인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 가족 관계, 교우 관계, 이웃 관계 등에서 얻은 선한 지식, 특히 많은 실패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야말로 남에게 가르칠 만한 선한 것들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성경의 건전한 교훈, 바른 교훈을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며 그 교훈에 합한 대로 행해야 한다. 이것이 성화이며 온전함이다.

둘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특히 자신을 절제하며 깨어 있으며 품위가 있고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자가 되어야 하며 사려 깊고 신중해야 하며 또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한 자, 즉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이 매우 정중하고 공순하고 공경할 만한 자이어야 하고 거짓되이 함부로 남을 비난하지 않으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하며 또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살 뿐 아니라, 다른 이들, 특히 젊은 이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4-8절, 젊은 자들에 대한 교훈

[4-5절]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소프로니조시)[건전한 생각을 가지게 교훈하되](KJV, Thayer)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소프로나스)[건전한 생각을 가지며 분별력이 있으며 자제심이 있으며] 순전하며(하그나스)[순결하며] 집안 일을 하며(오이쿠루스)[집을 지키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은 젊은 여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나이든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이 건전한 생각을 가지게 교훈해야 하는데, 특히 다음 몇 가지 점을 교훈해야 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첫째로, 젊은 여자는 자기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아내는 자기 남편을 돕는 자로 창조된(창 2:18) 여자의 본래의 위치를 이해하고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듯이 기본적인 일이다.

둘째로, 젊은 여자는 자기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자녀 양육은 부모된 자의 기본적 의무이다. 그는 자녀 양육을 처음 해보기 때문에 그 일에 소홀하거나 미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젊은 엄마는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영육의 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하여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격자들이 되도록 힘써야 하고, 또 육신적으로도 건강하도록 음식을 잘 준비해주고 건강을 관리해주고 의복이나 집 등의 생활 환경도 살피고 학교 공부나 독서 등도 잘 지도해주어야 한다. 그것들은 다 자녀 사랑 속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요소들이다.

셋째로, 젊은 여자는 건전한 생각을 가지며 분별력이 있고 자제심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경박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자기 중심적이고 편협한 말과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하고 성경 교훈 안에서 건전한 생각과 분별력과 자제심을 가지고 그럴 때 남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도 유익이 될 것이다.

넷째로, 젊은 여자는 순결하고 정숙하고 단정해야 한다.

다섯째로, 젊은 여자는 집안 일을 해야 한다.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남자를 돕는 자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집안 일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시편 128:3은 여자를 ‘내실에 있는 아내’라고 표현한다. 잠언 31:10 이하에 묘사된 현숙한 여인, 즉 지혜와 덕이 있고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대처할 능력이 있는 여인은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는” 자로 묘사되었다(27절).

여섯째로, 젊은 여자는 선해야 한다. 디도서는 선행에 대하여 많이 강조한다. 복음 진리를 복종치 않는 자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말했다(1:16). 앞에서도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2:3). 본절 이후에도 선한 일에 대한 강조가 반복된다(2:7, 10, 14; 3:8, 14). 모든 사람은 선해야 한다.

일곱째로, 젊은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남편의 의무는 주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아내의 의무는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엡 5:22-25).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려면, 아내는 성경의 교훈대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6-8절]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소프로네인)[건전한 생각을 하게, 분별력이 있게, 자제심이 있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셈노테스)[품위가 있음]과 [신실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건전한]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젊은 남자는 건전한 생각과 분별력과 자제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둘째로, 젊은 남자는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디도는 이 일에 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젊은 남자는 경박하지 않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넷째로, 젊은 남자는 책망할 것이 없는 건전한 말, 바른 말을 해야 한다. 말은 남에게 흠 잡힐 것이 없이 바르고 유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범사에 그 자신이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을 나타냄으로써 대적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고 말할 것이 없게 하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부패치 않는 진리의 말씀이며 선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행하여 선행의 본을 보임으로써 진리의 진리 됨을 증거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나이든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이 건전하고 바른 생각을 가지도록 가르쳐야 한다. 젊은 여자는 특히 몇 가지 점들을 유념해야 한다. 그는 그의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그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또 그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는 자녀들을 경건과 도덕성이 있는 자들로 잘 교육해야 하고 또 영육의 필요를 잘 공급해야 한다. 또 그는 건전한 생각과 자제심을 가져야 한다. 또 그는 순결하고 정숙하고 단정해야 한다. 또 그는 집안 일을 잘 해야 한다. 또 그는 선해야 한다. 또 그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을 것이다.

젊은 남자는 건전한 생각과 분별력과 자제심을 가져야 한다. 또 그는 선한 일을 해야 한다. 또 그는 경박하지 않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또 그는 책망할 것이 없는 건전하고 유익한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젊은 교역자인 디도가 젊은 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칠 때 먼저 자신이 본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한다고 교훈했다. 성경을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다 믿고 행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9-15절, 종들에 대한 교훈, 구원의 목적

[9-10절]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종들에게 교훈을 준다. 먼저,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거슬러 말하지 말아야 한다. ‘거슬러 말한다’는 원어(안티레고)는 ‘말대답을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인과 종들 간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원하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종들에게 이런 교훈을 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엡 6:5- 7). 종들은 주인에게 성심으로, 단 마음으로 순종하되,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한다. 오늘날에 피고용자는 직장에 취직할 때 근무시간과 조건과 봉급에 동의했다면, 자기 위치를 지키고 범사에 고용주에게 순종하고 그를 기쁘게 하고 말대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종들은 주인의 것을 떼어먹지 말고 선한 충성을 다해야 한다. ‘떼어먹는다’는 말은 남의 돈이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도둑질이다. 또 종들은 선한 충성을 다함으로써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은 직장에서 공과 사를 잘 구분하고 근무시간에 사적인 일을 하지 말고 또 허락되지 않은 물품이나 비용을 개인적으로 쓰지 말아야 한다. 또 성도는 윗사람이 맡긴 일을 충성스럽게 처리해야 하나님의 구원의 교훈이 빛나게 될 것이다. 선하고 충성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그의 교훈의 참됨을 증거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선한 충성에 대해 좋은 것으로 보상해주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8에서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상전들과 주인들에게도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위협]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고 교훈하였다(엡 6:9).

[11-13절] [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파이듀오)[가르치시되, 교훈하시되](KJV, NASB, NIV)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하셨음이니].

모든 사람들에게 즉 각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 즉 복음 진리의 교훈에는 다음 몇 가지의 내용들이 들어 있다.

첫째로, 복음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고 교훈한다. 사람들의 죄들 중에 첫 번째 죄, 즉 근원적인 죄는 불경건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로 살면서 창조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적인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삶이다. 그것은 실상 미련한 삶이다.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혹은 시작]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말했다. 또 불경건의 당연한 결과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상숭배와 정욕의 더러움에 버려두셨으며 세상은 음란한 세상이 되었고 그 음란함은 마침내 동성애의 상황에까지 나아갔다고 말했다(롬 1:20-27). 그러므로 구원은 이런 죄악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2-14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둘째로, 복음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근신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살라고 교훈한다. ‘근신함’은 앞에서도 교훈한 내용이다. 디도서 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며] 경건하며[품위가 있으며, 존경할 만하며] 근신하며.” 2:5, [젊은 여자들에게] “근신하며.” 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근신함’이라는 말은 건전한 생각을 가지며 분별력이 있으며 자제심이 있다는 뜻이라고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또 ‘의로움’은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삶을 가리킨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또 ‘경건함’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그를 사랑하며 섬기며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이다. 우리는 이제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분별력과 자제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고 섬기며 그를 찬송하고 그를 위해 살아야 한다.

셋째로, 복음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라고 교훈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복스러운 소망’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놀라운 증거이다. 구약성경은 메시아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렀고(사 9:6),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요 1:1), ‘참 하나님’(요일 5:20), ‘크신 하나님’(본문)으로 부른다. 삼위일체는 성경적 진리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인격은 한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시다. 그것은 그의 영광스런 재림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 . .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4절] 그가[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일들]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셨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그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들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시다. ‘친 백성’이라는 원어(라온 페리우시온)는 ‘특별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출애굽기 19: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의 언약을 지키면, 그들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 곧 특별한 백성이 되었다.

본문은 그 친 백성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라고 표현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삶은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진 삶이어야 한다. 에베소서 2:10도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교훈하셨다(마 5:14-16).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8-9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을 변화시켜 의인이 되게 하시고, 악한 자들을 변화시켜 선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지는 것은 구원 얻은 성도의 당연한 표이다. 우리는 그 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성도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이어야 한다.

[15절]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목사들과 설교자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각 연령층의 사람들에게 이상의 말들을 말하고 권면하고 모든 권위로 책망하기도 하며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사람의 권위로가 아니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권위로 말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종들은 주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오늘날 성도들은 직장에서 윗사람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기쁘게 하고 말대답을 하지 말고 떼어먹지 말고 선한 충성을 다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사람들은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하며 의로우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며 특히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신론적인 삶,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삶, 또 음란한 삶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분별력과 자제심을 가지고 계명에 일치하는 삶, 특히 선한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소망해야 한다. 거기에 우리의 삶의 목표가 있다. 우리의 참된 기쁨과 소망은 주 예수님의 재림에 있다.

 

 

3장: 선행

1-7절, 선행과 구원

[1-2절]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에피에이케스)[친절하며, 예절 있으며, 관용하며](BDAG)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구원 얻은 성도들은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은 세상의 권세자들 곧 국가의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성도들이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세속 국가의 질서와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이며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고 말하였고, 또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고 말했다(롬 13:1, 4, 6).

또 성도들은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해야 한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선행들은 성도들의 필수적인 열매이다. 또 성도들은 남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고 친절하고 예절이 있으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3절] [이는]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본문은 성도의 선한 삶의 이유를 보인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른 생각과 깨달음이 없었고,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도 없었다. 또 우리는 ‘순종치 않은 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또 그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다. 또 우리는 ‘속은 자’이었다. 우리는 마귀의 말에 속았고 세상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속았으며 우리 자신의 어리석고 혼란한 생각에 속았었다.

또 우리는 ‘각색 정욕과 쾌락에 종노릇한 자’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육신의 정욕과 쾌락의 종이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돈과 정욕과 쾌락이 그의 신(神)이 되고 가치가 된다. 죄는 이처럼 사람을 어리석고 허무한 데 빠지게 하며 자신을 낭비시키며 멸망케 한다.

또 우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이었고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다. 이것들이 구원 얻기 전의 사람들의 일반적 상태이었고, 구원 얻은 후에도 때때로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죄악성의 내용이다. 구원 얻기 전의 인간 관계는 한마디로 서로 싸우는 질투와 미움과 악독으로 얼룩져 있었다.

[4-5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크레스토테스)[선하심, 친절하심, 너그러우심]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重生)[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해 있었지만, 우리 구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친절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났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람 사랑하심은 주 예수께서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역사적으로 나타났으나, 우리가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었을 때 각자에게 나타났고 경험되었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는 것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번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다(롬 8: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않으셨다. 실상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누더기 옷에 불과하였다. 이사야 64:6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했고,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다. 사람은 심히 부패되었고 무능력해져 있다. 성경과 인류 역사와 우리의 경험은 이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이루어졌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은 그의 긍휼의 결과이었다. 하나님의 긍휼, 그의 은혜, 그의 선하심과 사랑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원인이요 이유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중생(重生)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중생(重生)은 다시 남을 말하며 그것은 죄씻음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영혼이 죄로 인해 죽었었기 때문에 죄씻음을 통해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 죄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이루어졌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셨을 때 우리는 중생케 되었고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이것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동일한 구원 사건이다. 구원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6-7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 결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義)에 근거하여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는 조금 오셨거나 손가락만 조금 내미신 것이 아니고 풍성히 부어지셨다. 성령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시며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주시는 영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풍성히 오셔서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 이와 같이, 구원은 사죄(赦罪)[죄사함]와 칭의(稱義)[의롭다 하심]이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또 구원은 사람이 영생을 얻고 천국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다. 죄는 죽음이요 의(義)는 생명이다. 우리는 의롭다 하심에 근거하여 영생을 얻었다. 요한복음 5:24,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그러나 그것을 영광스럽게 누림은 아직 미래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광스런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목표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과거에 어리석고 반항적이며 악하고 이기적이고 정욕과 행악에 종노릇한 자이었고 남을 미워했던 가증한 죄인들이었다. 이것이 부패된 세상과 인간 본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육신의 정욕과 쾌락을 위해 살지 말고 또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성경의 바른 교훈을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얻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 얻지 못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심으로써 구원을 얻었다. 우리는 죄사함과 새 생명을 얻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속에 풍성히 부어주셨고 의롭다 하심을 주셨고 영생의 소망을 주셨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 얻은 자답게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성도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에서도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형제와 이웃을 비방하지 말아야 하고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하고 관용하며 친절하며 예절을 가지고 범사에 온유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8-15절, 선한 일에 힘쓰라

[8절]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확신 있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일들]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선행에 대한 교훈(1절)과 그 이유에 관한 말씀이다(3절 이하).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구원하심, 곧 무지와 불순종과 행악과 미움의 상태에서 건져내심과,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주신 것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과, 이 땅 위에서의 선한 삶에 관한 말씀들은 믿을 만한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디도는 이것들, 즉 죄로부터 건짐을 받아 의로운 삶, 선한 삶을 살라는 성경적 교훈에 대하여 확신 있게 말해야 했다.

이렇게 말해야 할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들을 힘쓰게 하려 함이었다. 교훈의 목표는 선한 일들을 힘쓰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선한 일들에 열심 내는 친 백성이 되게 하셨다(딛 2:14). ‘조심하여’라는 말은 성도가 조심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악에 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자라면 선한 일들에 힘써야 한다. 이와 같이, 디도서는 선한 행위에 대해 강조한다. 사실, 성경의 중요한 내용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으라는 것과 선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경건과 도덕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이며 사람의 사람다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면 무엇이 선한 일인가? 디도서에서 많이 나오는 ‘선하다’는 원어(아가도스, 칼로스)는 ‘선하다, 좋다, 유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한 일들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성도가 힘써야 할 선한 일들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의 각 방면에 많이 있다. 구원 얻은 성도는 선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선한 일들에 힘쓰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선한 일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유익을 주는 일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돕고 물질적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확실히 선한 일들이다.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에서 그런 선한 삶을 살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선한 일들 중에 참으로 선한 일은 죄와 불행과 사망 중에 살며 장차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와 지옥 형벌의 대상이 되어 있는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구원하여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하는 일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다.

[9절]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디도가 확신 있게 말해야 할 말이 있는 반면, 피해야 할 말도 있는데,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 등이 그것이다. 그런 것은 ‘피해야’ 한다. 그것들은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물론, 논쟁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필요한 논쟁도 있다. 바른 교리를 규명하고 확증하는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그것은 선한 논쟁이다. 오늘날처럼 자유주의 신학과 연합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주의가 교회들 안에 많이 들어와 있는 때에 자유주의의 배교적 성격과 타협주의의 비성경적 오류를 지적하고 또 은사주의의 혼란스러운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필요한 변론이다. 그런 것은 주의 종들이 해야 할 선한 싸움이다.

[10-11절] 이단에 속한(하이레티코스)[이단적인, 분파적인]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파라이테오마이)[거절하라, 피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스스로를 정죄하며] 죄를 짓느니라.

교회는 하나이며 진리도 하나이지만, 오류가 교회들 안에 침입해 들어왔다. 잘못된 생각들이 교회 안에서 지지자들을 얻었고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사탄의 미혹이며 사람들의 무지와 연약이다. 그래서 이단이 생겼고 잘못된 사상을 가진 무리와 당파가 생겼다.

‘한두 번 훈계한 후에’라는 말은 이단과 당파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고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보인다. 그때 거기에 빠진 자가 돌이키면 다행스럽다. 사람은 누구나 사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실수와 부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잘못과 부족을 깨달을 때 거기서 돌이키는 자는 용서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한두 번 훈계를 받은 후에도 돌이키지 않는 이단자와 당파적 인물은 성도가 멀리해야 할 자이다. 이단과 오류에 빠진 자들과 계속 교제하는 것은 그 악을 인정하거나 그 악에 물드는 일이 되므로 성도 개인과 교회 회중의 거룩함을 위하여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단자들이나 오류에 빠진 자들을 멀리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거절하는 것은 결코 부정주의나 소극주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른 방법이다.

한두 번 훈계해도 고치지 않는 이단자들은 심히 부패하여 스스로를 정죄하며 죄를 짓는 자들이다. 그들은 완고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무지해 실수로 죄를 짓는 자들이 아니고,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완고한 심령으로 죄를 짓는 자들이다. 민수기 15:30은 이런 자를 ‘짐짓 악을 행하는’ 자로 묘사했고, 히브리서 10:25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것으로 말했고, 요한일서 5:16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다고 본다. 바로 이단들은 이와 같이 성경 진리와 교훈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고의적으로, 심히 완고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12-14절]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過冬)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교법사(노미코스)[율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선한 일들]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사도 바울에게는 아데마와 두기고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또 그는 디도가 속히 오기를 원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니고볼리에 있고 거기에서 겨울을 지내려고 작정하고 있다. 니고볼리는 아가야 지방 서쪽 해안에 있는 도시이었다. 세나는 율법을 연구한 자이었다. 세나와 아볼로는 다 성경에 능통한 교사들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돈이 다 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지금 그들로 궁핍함이 없도록 속히 보내라고 디도에게 부탁한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이 선행을 힘쓰기를 배우게 하기를 원하였다. 사람은 악을 행하는 데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해야 할 줄은 알지만, 선을 행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또 행할 힘도 부족하다. 마치 아기가 홀로 서기나 걷기가 힘든 것과 같다. 그러나 구원 얻은 성도는 이제 선행을 배움으로 선한 일들에 힘쓸 수 있다. 선행은 참된 경건과 신앙의 열매이다. 선행이 없는 자는 열매가 없는 자이지만, 선행이 많은 자는 열매가 많은 자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구원은 좋은 생명, 새 생명의 씨앗과 같다. 이제 이 좋은 구원의 새 생명은 많은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 기대된다.

앞에서 말했지만, 무엇이 선한 일인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모든 행위들이 선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시는 선행은 전도하는 일이며 전도의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자를 세우고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후원하는 일이다. 전도자들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파하고 오늘 시대의 배교적 풍조와 타협치 않고 충성되이 일할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15절]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

성도들의 상호 문안은 아름다운 일이다. 사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은 그와 함께 디도에게 문안하였다. 사도 바울은 또 디도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받은 사도의 직분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 때문에 성도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오늘날에도 진실한 성도들은 진실한 전도자들과 하나님의 종들을 사랑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구원의 목표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하나님의 뜻하신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선한 일들 중에 가장 선한 일, 모든 성도가 해야 할 가장 선한 일은 전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이루시는 일이다. 우리가 구주 하나님과 내세를 바르게 이해하고 구원 얻은 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단과 교리적, 윤리적 오류를 회개치 않고 고집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거절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거룩함 때문이다. 교회는 죄와 멸망으로부터 죄사함과 의롭다 함의 구원을 얻은 자들의 모임이다. 이단과 교리적, 윤리적 오류에 빠진 자들과의 계속적 교제는 개인과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다. 이단자나 오류에 빠진 자를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고 교제를 끊는 것은 결코 소극주의적, 부정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바른 방법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의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성경의 교훈대로 권징을 충실히 시행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서서히 해이해지고 부패해질 것이다.


미주

1) Byz A copms Origenlat 등에 있음.

2) Byz א C vg syrp copbo armms eth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