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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0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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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본서는 저자가 이.전에 쓴 현대교회문제(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개정증보판(옛신앙, 2001), 현대교회문제 자료집(옛신앙, 2004), 및 현대교회문제, 제3판(옛신앙, 2007)에 있는--그 중 일부는 지금은 절판된--자료들을 모은 것이다. 이렇게 한 목적은 오늘날 교회들 속에 널리 들어와 있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임을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좀더 잘 알리기 위함이다. 저자는 이로써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교인들이 바른 분별력과 지식과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생활을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본서나, 저자가 쓴 이전의 책들은 현대신학을 학문적으로 논한 것이 아니라,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이라는 사실을 자료에 근거해서 확증하고 비평하려는 책이다. 저자는 목회자로서 제한된 시간 안에서 자료들에 인용된 일차적 자료들을 다 확인할 수 없었으나,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자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누가 자유주의 신학이 없다든지 그것이 이단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는 무지하든지 사실을 은폐하려는 자일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라는 것이 확증되었다면, 저자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현대 교회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 낙태와 동성애의 포용,교리적 분별력 없는 교회연합운동, 우상숭배적 천주교회와의 친교, 잘못된 선교 개념, 심지어 종교다원주의적 경향, 말씀 중심의 옛 길을 벗어난 은사운동, 보수적 신앙을 가졌다는 목사들의 타협적 태도,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안수, 세속적인 교회음악과 예배 방식의 도입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현대 교회에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직시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는 노력이 주의 종들에게 얼마나 있는지 매우 염려된다. 주께서는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편지하게 하시면서 교회들의 문제들을 지적하셨다(계 2-3장). 바른 교회의 건립은 주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께서 우리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다"고 증거하였다(엡 5:26-27).

오늘날 교회의 정로(正路)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천주교회를 포용치 않는 것이다. 또 참 기독교는 은사 체험을 추구하지 않고 신구약 66권의 성경 말씀으로 만족하며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옛 길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고 옛 길, 바르고 선한 길을 구해야 한다. 예레미야 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오늘날이 엘리야 시대 같고(왕상 18:21-22) 미가야 시대 같고(왕상 22장) 예레미야 시대 같을지라도(렘 5:1),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불변적 말씀인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를 생각하고 바른 길을 구해야 하며, 비록 그 길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그 길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성경 66권에, 그리고 오직 거기에만 밝히, 충분히 계시되어 있다.

저자는 이 글들이 오늘 시대에 교회들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여 교회의 정로(正路)를 지키고 참 교회를 보존하고 설립하고 회복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참고와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내용 목차

 1. 비평의 필요, 근원, 분류

 2. 기독교와의 차이

 3. 이단 사상의 예들

 4. 교회에 끼친 영향

 5. 윤리적 부패

 6. 성경적 반박

 

 

1. 비평의 필요, 근원, 분류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말한다. 다수의 현대 신학들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진리들을 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은 한마디로 이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역사적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들을 포용하거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평의 필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평이 필요한 까닭을 간략히 생각해보자.

첫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가장 무서운 이단적, 적그리스도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마 7:1)은 성도 상호 간에 사사로이 판단하고 비평하지 말라는 뜻이지, 주의 종들이 교리적 이단들을 비판하지 말고 묵인하고 포용하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였고(마 7:15),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분별하라"고 하였다(요일 4:1).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이단에 대해 명확히 비판하였고, 디모데후서 2:17에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름을 들며 비판하였다. 유다서 3절은 이단에 대하여 힘써 싸우라고 교훈하였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상 가장 무서운 이단이며 적그리스도적 사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자를 포용치 말아야 하고 또한 그를 포용하는 자들도 책망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면 신앙생활이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생활은 연결되어 있다. 경건한 신앙 사상이 부패하면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도 부패할 것이며 그러면 교인인지 세상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교회는 쇠잔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왜 유럽이나 미국의 많은 교회들이 쇠잔해졌는가 하는 한 이유이다. 교회가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죄 씻음을 받고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감격이 없다면, 사람이 구태여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교회에 진리가 있고 기쁨과 감격과 새 생활이 있어야, 교회에 나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임을 바로 알아야 우리 주위의 교회들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교회를 선택하고자 할 때 아무 교회나 출석하지 않고 바른 교회를 찾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비교적 순수한 교회에 속할 의무와 특권이 있다. 참 성도는 자유주의적 교회에 속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협의회(WCC나 NCC)에 속한 교회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나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측) 등에 속한 교회들이 과연 건전한 교회들인가 살펴야 한다. 참된 성도들은 성경적 신앙을 지키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회에 속해야 한다.

교회 소속 문제만 아니라, 교회연합활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성경적 보수 교회들이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함께 주의 일을 할 수 있는가? 주께서 그런 일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외국 교회들과의 교류나 해외 선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보수적 교회들은 보수적 교회들이나 단체들과만 협력해야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단체들과 협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활동들은 조만간 부패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왜 처음에는 건전하게 시작되었던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점점 변질되었는가 하는 주요한 한 이유이다.

사탄은 교회들로 하여금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은근히 받아들이게 하고 또 목사들의 사상을 변질시켜 마침내 교회 전체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는 사탄의 이러한 교묘하고 치밀한 배교(背敎) 운동을 분별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얼마나 이단적이며 적그리스도적 사상인가를 잘 분별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대처해야 한다.

 

 근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비평적 연구 방식에서 나왔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종했었다. 그러나 중세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인간 이성의 권위를 발견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비평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 즉 소위 '고등비평'이라 불리는 성경의 잘못된 연구방식이다. 또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 철학자 칸트의 사상은 지성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과학의 발달이나 촬스 다윈의 진화론 등의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의심과 불신앙의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고 성장하였다.

 

  분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쉴라이엘마허와 릿츨과 하르낙 등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던 불신앙적인 신학 사상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밥죤스 대학교의 스튜어트 카스터(Stewart Custer)는 그것들을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는 본서에 인용된 인물들임.)

1. 구(舊)자유주의--*Adolf Harnack, *Harry E. Fosdick, Henry P. Van Dusen, L. Harold DeWolf, Nels F. S. Ferre

2. 후(後)불트만 학파--*Rudolf Bultmann, Hans Conzelmann, Erich Dinkler, Ernst Käsemann, Günther  Bornkamm,  Ernst Haenchen, Reginald H. Fuller

3. 해석학파--Gerhard Ebeling, Ernst Fuchs, James M. Robinson

4. 불트만 급진 좌파--Herbert Braun, Manfred Mezger

5. 편집 비평학파--Willie Marxsen

6. 급진파--*Dietrich Bonhoeffer

7. 과정 신학--Schubert Ogden, John Cobb, Charles Hartshorne, Norman Pittenger

8. 세속화 신학--Paul van Buren, Harvey Cox, John A. T. Robinson

9. 신 죽음의 신학--Thomas J. J. Altizer, William Hamilton

10. 진화론 신학--*Pierre Teihard de Chardin

11. 신정통주의--*Karl Barth, Emil Brunner, Karl Heim,

    [영국] *C. H. Dodd, Peter T. Forsyth, [미국] *Reinhold Niebuhr, Richard Niebuhr, William Hordern, *Paul Tillich,  [스칸디나비아] Anders Nygren, Gustave Aulen,

12. 독립파--Helmut Thielicke, Ethelbert Stauffer, *Joachim Jeremias, Jürgen Moltmann

13. 판넨베르크 학파--*Wolfhardt Pannenberg, Rolf Rendtorff, Trutz Rendtorff, Ulrich Wilckens, Klaus Koch, Martin  Elze, Dietrich Rössler

14. 구속사 학파--*Oscar Cullmann, W. D. Davies, Werner Kümmel, Otto A. Piper, Eduard Schweizer, Alan Richardson, A. M. Hunter

15. 신(新)자유주의--Millar Burrows, Floyd V. Filson, George E. Wright, Carl E. Braaten, Paul Minear, *Krister Stendahl, Charles C. Anderson, Hugh Anderson

 

2. 기독교와의 차이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적 이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이것은 1920년대에 미국에서의 소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신학적 논쟁’에서 잘 드러났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메이천은 당시의 논쟁을 이렇게 표현했다.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는 싸움의 시대이다. 항상 기독교로 알려져 왔던 저 위대한 속죄적 종교가 전혀 다른 형태의 종교 신앙과 싸우고 있는데, 이 종교 신앙은 전통적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더욱 파괴적일 뿐이다. 현대의 이 비(非)속죄적 종교는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고 불린다.1)

자유주의 잡지인 크리스챤 센츄리 1924년 1월 3일자 사설은 두 파의 차이를 더욱 인상적이게 이렇게 말했다.

근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요, 현대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다른 한 종교이다.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는 오는 세대들을 위해 우리 세대에 의해 아마 해결될 문제이다. . . .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은 다른 한 하나님이다. 근본주의자의 그리스도는 한 그리스도요, 현대주의자의 그리스도는 다른 한 그리스도이다. 근본주의의 성경은 한 성경이요, 현대주의의 성경은 다른 한 성경이다. 교회, 하나님의 나라, 만물의 종말--이것들이 근본주의자들에게와 현대주의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 어느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어느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그리스도인가, 어느 성경이 기독교의 성경인가, 어느 교회, 어느 하나님의 나라, 어느 구원, 어느 종말이 기독교의 교회,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 기독교의 구원, 기독교의 종말인가? 미래가 말해 줄 것이다.2)

 

   자유주의에 의한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별개의 한 경험 혹은 생활이며, 교리는 기독교적 경험 혹은 생활을 한 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표현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며 따라서 교리는 시대마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고 한다.

교리를 경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초기로부터 볼 수 있는 태도이었다. 19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쉴라이엘마허는 말하기를, 종교는 감정이나 직관에 근거하며, 종교의 핵심은 이성적 증명과 토론이 아니고 감정이며 항상 그러하였고, 종교인에게 하나님은 하나의 경험,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라고 했다. 19세기 중엽, 릿츨도 좀 다른 각도에서이긴 하지만 말하기를, 종교는 이론적이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은 사람의 가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원리이며, 구원받는다는 것은 새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19세기 말, 하르낙도 주장하기를, 사람이 스스로 경험한 종교만 고백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신조나 신앙고백은 예수의 견해에 의하면 위선적이고 파멸적이라고 했다.3) 하르낙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요 모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데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했고,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4)

이들은 모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와 별개의 경험 혹은 생활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 교리, 더 정확히 말하여 전통적 교리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되었고 현대의 철학적, 과학적 도전 앞에 변경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윌리암 호던은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적 태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자유주의의 방식은 기독교 신학을 현대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함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기독교계의 초기 신조들이 작성되었던 이후 세계는 급격히 변해 왔고 그래서 그 신조들은 현대인에게 낡고 비실제적이게 들린다고 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현대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사고 방식들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해리 E. 포스딕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 즉 ‘영속적 경험들’을 표현해야 하고, 이것들을 과거에 표현되었던 ‘변하는 범주들’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예를 들어 기독교의 영속적 경험은 하나님께서 악을 이기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으며, 이것은 전통적으로 악을 파괴하고 선을 세우기 위해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범주로 묘사되어 왔고, 우리는 더 이상 이 낡아빠진 범주[재림]를 보존할 수 없지만 여전히 이 고대의 사고 방식이 표현하려고 했던 진리를 믿을 수 있다고 했다.5)

메이천은 자유주의 신학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현대 자유주의가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기독교의 특수한 점들, 즉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기독교 교리들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救贖)의 교리들에 대해 과학적 반론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는 이 특수한 점들을 단지 종교의 어떤 일반 원리들의 시대적 상징들로 생각하며, 그 일반 원리들을 건지려고 하고, 또한 그것들을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한다.6)

 

 성경에 의한 기독교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별개의 어떤 경험이나 생활이 아니고 교리에 근거한 경험 혹은 생활이며, 또한 기독교 교리는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기독교는 교리(敎理, doctrine)에 근거함

기독교는 어떤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교리는 기독교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여기에서 교리란 단순히 진리의 진술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어떤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기원을 고찰함으로써 확인된다. 최초의 기독교 전파자들은 단순히 어떤 신비적 경험이나 하나의 생활 교훈을 전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전했는데, 이 사실들의 설명이 곧 교리이다.

예를 들어,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2-23에서 그가 전파한 내용을 표현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했고, 고린도전서 15:3, 4에서 복음의 요지를 언급할 때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교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그 시초로부터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교리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다.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교훈에서도 확인된다. 로마서 16:17,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원문 직역). 디모데후서 1:13,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의 본을 굳게 붙들라"(원문 직역). 요한일서 4: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원문 직역). 성경의 이러한 교훈들은 바른 교리가 본질적임을 전제하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임

더욱이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불변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거짓말과 거짓 증거를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출애굽기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또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시편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기독교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들에서도 확증된다. 첫째로,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에 기초하였다. 고린도전서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므로, 만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면, 그것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확증하는 표임을 보인다.

셋째로, 기독교 복음은 목격한 증인들의 증거들에 의해 확증되었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교의 피는 그들의 목격자적 증거들의 최후 확증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진리와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 성격들에 의해서 확증된다.

덧붙여, 성경에는 기독교 진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이 분명한 말로 선언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1:8-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 .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 즉 사도 시대의 교회들이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기독교 복음은 명확하고 고정된 내용이다. 아무도 그 내용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그 고정된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고 확신하고 후시대에 전수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개념에 있어서 서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두 사상 체계의 차이는 실로 심각하다.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들을 경시하고 쉽게 부정하거나 재해석한다. 여기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異端性)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이나 그러한 포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큰 실수요 불성실한 일이다.

 

3. 이단 사상의 예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들의 예들을 전부 다 드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또한 불필요하다. 많은 이들은 전체적으로 불신앙적이고,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이라는 것은 다음에 인용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예들을 통해 분명하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시조로서 구(舊)자유주의의 내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와 그 내용인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임을 부정하고, 성경의 고등 비평을 용납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 역사를 분리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German edition, 1918).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Grand Rapids: Zon- dervan Publishing House, 1928.

Church Dogmatics. Edinburgh: T. & T. Clark, 1936-1962.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49.

Dogmatics in Outline. London: S.C.M. Press, 1949.

Christ and Adam. New York: Harper, 1957.

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Richmond: John Knox Press, 1959.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1. 성경은 객관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말씀을 깨달음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한, 즉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7)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8)

계시와 성경의 직접적 동일시는 우리가 전제하거나 기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한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곳에서 계시와 성경은 하나가 된다.9)

어떻게 계시가 계시로 말미암음 외에 그 증거의 신적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계시를 계시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이란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는 계시에 의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그 이중적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은 그 안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계시 자체에 의하여 일깨워진 신앙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10)

 

 2.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11)

축자(逐字, 단어) 영감이란, 오류와 결함이 있는 인간의 말을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과 그 인간적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2

 

 3.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13)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14)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15)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16)

 

 4. 하나님의 인성(人性)을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이다.17)

이러한 신적 자유 의지와 선택에서, 이러한 주권적 결정에서(옛날 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그의 작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적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긍정, 그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관심, 그를 위한 그의 자유로운 대리(代理)--이것이 하나님의 인성이다.18)

 

5.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19)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20)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6.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21)

그렇다면 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옴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이거나 심리학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원죄의 교리는,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왔던 바와 같이, 바울에겐 ‘매력적 가설’(리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의미에 대한 많은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왜곡들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나타난 의와 같이, 초시간적(timeless)이며 초월적이다.22)

 

7.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우리의 세계가 예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23)

 

8.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서 사람,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주장함을 보려고 해야 한다.24)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25)

 

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28)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2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30)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31)

 

10.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32)

 

11.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33)

하나님의 ‘예’[용납]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34)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3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36)

 

13.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은 스캔들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다.”37)

 

14.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38)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39)

 

   씨 에취 다드(C. H. Dodd, 1884-1973)

C. H. 다드는 영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신약신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Authority of the Bible.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29.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32.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51(1936).

About the Gospe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Univer- sity Press, 1953.

 

 1.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40)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41)

요한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42)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43)

 

2.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44)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 . .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울이다. . . .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나누어 가진 그 생명의 조성자이시다.45)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self- subsistent)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objec- tive)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46)

 

3.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 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도덕에 위험물이 된다.47)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48)

 

4.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진노가 사라지는 길이 열려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덕 세계에서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49)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이성적인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일관하지 않다.50)

 

5. 아담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한다.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51)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가진다.

그 복음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 즉 우주의 의미를 표현하는 생애의 기록이다. 영원한 로고스[말씀]가 이해되는 것은 바로 이 생애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서이며, 다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 . . 그 서두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어질 수 있다: ‘모든 실제적 존재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그 신적 의미 혹은 원리이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바로, 생각에 있어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으나 실제상 그와 분리되지 않는, 이 원리이다’.52)

 

7.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승귀라고 간주한다.

요한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히심 자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승귀와 영광이기 때문에 . . . 부활이 그에게는, 그것이 다른 어느 저자들에게 가지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의를 거의 가질 수 없다.53)

그리스도의 승천이나 승귀(昇貴)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지만.54)

 

8.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55)

하나님의 의(義)가 (예를 들어, 죄의 대리적 형벌에 의해) 만족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자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방책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의와 자비 간의 그러한 대립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56)

 

9. 보편 구원론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57)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58)

 

10. 재림과 심판에 관한 성경 구절을 부정한다.

그 서신의[데살로니가후서의] 첫 번째 장에 나오는 종말론적 구절(7-10절)은--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그것이 문체에 있어서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고 논평했는데--유대교적이든지 혹은 유대-기독교적이든지 간에 실상 당시의 어떤 묵시 문학의 인용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거기에는 그 내용에서나 그 일반적 어조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59)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

라인홀드 니이버는 미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사회윤리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Beyond Traged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38.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43.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55.

 

 1. 교의(敎義)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교의(敎義, dogma)는 기껏해야 언약 공동체의 공동 견해를 나타낸다.60)

 

2. 기독교 진리 일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독교 종교에서 참된 것은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표면적인 거짓을 포함하는 상징들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 . . 우리는 거짓에 의해 진리를 가르친다.61)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예술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한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62)

성경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들이, 역사를 초월하고 성취하는 것[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63)

 

3. 창조를 신화적 개념이라고 한다.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64)

 

4.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는 원시적 신화이다. 현대 신학은 현대 문화가 그런 신앙을 종교의 개화반대론의 증거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즐거이 타락 이야기를 부정했다.65)

타락의 개념은 동산, 과일, 그리고 뱀이라는 원시적 신화를 역사적으로 참된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에 굴복한다. . . . 타락은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의 전제이다.66)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불합리하다고 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67)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68)

 

6.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본다.

사람들은 처녀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69)

‘처녀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70)

 

7.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71)

 

8.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사상으로부터 온 유산에 불과하다.72)

 

9.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크게 속인 교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73)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상징은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고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내버려질 수도 없다.74)

 

10.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75)

 

11. 마지막 심판을 부정한다.

신약의 상징론에서 에스카다(eschata) 혹은 ‘마지막 일들’은 세 개의 근본적 상징들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그리고 부활이다.76)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77)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루돌프 불트만은 불트만학파의 시조이며 신약신학자이었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New York: Scribner, 1958.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Oxford: Basil Blackwell, 1970.

Theology of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Scribner, 1951-55.

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1.

 

 1. 성경의 신빙성과 역사적 증거성을 부정한다.

그 두 이야기들은 역사적 서술들로서 조화될 수 없다. 실상, 그렇게 하려는 어떤 시도도 각 이야기의 독특한 의도를 파괴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16-20에 나오는 두 장면이 역사적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믿을 만한 역사적 전통을 담고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78)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메시아 혹은 인자(人子)는 유대교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수난의 예언들에서 인자라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이 재해석되었다는--혹은 더 낫게 표현한다면, 독특하게 부요하게 해석되었다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념의 이러한 재해석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사건들 후에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79)

만일 그 계시가 그[공동체=초대 교회] 안에 살아있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그 공동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이 기도에서도 그 안에 계실 것이다. 사실 누가 기도하고 있는가?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말해서 그 공동체이다.80)

비록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로마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고 정죄되셨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할지라도, 요한의 묘사는 거의 더 나은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그것은 역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81)

 

 2. 성경은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요한의 예수 세례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의 세례 이야기(막 1:9-11)는 하나의 전설이다.82)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시험받으신 이야기(막 1:12 이하 혹은 마 4:1-11)는 전설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전설로 채색되었고, 수난 이야기도 상당히 전설로 덮여 있다.83)

첫눈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두를, 그 주제로 판단하여,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신적 존재,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84)

요한복음 서두는, 혹은 그것의 자료는, 그노시스 신화의 언어로 말한다. . . . 그 복음서 저자는 기독교 전파와 신학을 위하여 이 신화를 사용한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은, 비록 그 자신이 로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안트로포스(사람) 신화의 용어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빈번히 해석함으로써, 요한보다 앞섰었다.85)

 

 3.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그노시스 신화로 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17:1-5의] 언어는 신화적이다. 아들의 소원은, 그의 지상의 존재로부터 한때 그의 선재 상태에서 가졌던 하늘의 영광 안으로 다시 올리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노시스 신화의 사상 형식과 완전히 일치한다.86)

 

 4.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로 본다.

에게네토를 기적적 과정으로, 즉 생리학적 기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계시자가 사람이라는 그 복음서의 주제를 거스르는 것이다. 더욱이, 1:45; 6:42; 7:27 이하는 그 복음서 기자가 처녀 탄생의 전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알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87)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를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88)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신화로 본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89)

 

 6.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전설로 간주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90)

 

 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거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아주 초대교회는] 지상의 예수를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다.91)

여하튼, 아주 초대교회는, 비록 예수를 주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예배하지는 않았다.92)

[요한복음 10장] 17절 이하에서 복음서 기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라는 신화적 진술을 했고, 예수의 권위의 증명을 위한 유대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풍자적 대답을 첨가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했다.93)

 

 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신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Gnostic)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94)

 

 9.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전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9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96)

 

 10.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기대는 망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개입 선포가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즉, 세상의 가까운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그 기대가 망상으로 판명되었을 때--그의 신 개념이 또한 망상적이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97)

 

 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여하튼, 공관복음서의 전통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언제(혹은 곧) 돌아오겠다고 말한 말들이 없다. (인자의 '오심'을 가리키는 파루시아라는 말도 기독교의 최초의 시기에는 '돌아옴'으로가 아니고 '도착, 도래(到來)'로 정확히 이해되었다).98)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99)

 

 12.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신화적이라고 한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신화적이다.100)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폴 틸리히는 구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경계선에 있다고 표현된다. 그의 사상들은 매우 과격하다.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Systematic Theology. 3 vol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64.

 1. 근본주의를 마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의 시간적(temporal) 표현을 혼동한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유럽의 신학적 정통주의에서 명백하다. . . . 근본주의는 현재의 상황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어떤 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높인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는 마귀적 특성을 가진다. 101)

 

 2. 기독교는 최종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고 한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102)

 

 3. 특별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한다.

예언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 . 예언자적 비평과 약속은 교회의 전 역사에서, 특히 수도원 운동과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에서 활동적이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어떤 헬라 신비종교와 이슬람교와 많은 작은 개혁 운동들에서와 같이, 기독교 밖의 종교적 혁명들과 협회들에서 활동적이다.103)

 

 4. 성경의 영감을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계적, 혹은 기타 모든 형태의 비무아경적(非無我境的) 영감 교리는 마귀적이다. . . . 영감이란 이성의 주체-객체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식의 복합체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104)

성경 저자들의 영감이란 가능적으로 계시적인 사실들에 대한 그들의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반응이다.105)

 

5.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면, 신학적 혼동이 거의 불가피하다. 그러한 동일시로부터, 구수적(口受的) 영감 교리, 성경 본문을 취급함에 있어서의 부정직, 한 책의 무오성(無誤性)이라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c) 교의 등과 같은 결과들이 나온다.107)

 

 6. 정경의 개방을 주장한다.

정경(正經, canon)을 창조한 자는 바로 성령이시며, 영적인 모든 것들과 같이, 정경은 율법적으로 확정적 방식으로 고정될 수 없다. 정경의 부분적 개방은 기독교회의 영성(靈性)의 안전 장치이다.108)

 

 7.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는 본질과 존재를 초월한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10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질문될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 .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이듯이 그것을 긍정하는 것도 그러하다.110)

 

 8.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무신론의 반항은 정당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아무 증거도 없고, 그는 궁극적 관심의 주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격적 하나님'은 하나의 혼동을 주는 상징이다.111)

 

 9. 진노의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112)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113)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114)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自滅的)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115)

 

 10.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변증법적이다. 그것들은 삶의 변증법 즉 분리와 재결합의 운동을 반영한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가장 나쁜 왜곡이었다.116)

 

 11. 창조를 부정한다.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간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창조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117)

 

 12. 천사와 귀신을 신화라고 한다.

천사와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교리의 진리는 선(善)의 초개인적 구조들과 악(惡)의 초개인적 구조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들과 귀신들은 존재의 건설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위한 신화적 명칭들이다.119)


 13.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 혹은 기적을 부정한다.

기적들은 자연 과정에 대한 초자연적 간섭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참되다면,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종교적 이원론이 주장했듯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120)

섭리는 간섭이 아니다. . . . 그것은 한 추가적 요인, 즉 초자연주의에 의한 어떤 기적적인 물질적 혹은 정신적 간섭이 아니다.121)

 

 14.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신학은 분명하게 그리고 애매모호하지 않게, '타락'을 옛날에 일어난 한 사건 이야기로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위한 한 상징으로 표현해야 한다.122)

 

 1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인 말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123)

문자적 해석은 옛날에 그의 하늘 처소로부터 내려보내져 사람으로 변형된 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네 번째 단계를 취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참되고 힘있는 상징이 한 불합리한 이야기가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의 반신(半神, a half-god),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독특한 존재가 된다. 124)

 

 16.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복종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복종시킨다.125)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유한성은 오류로의 개방을 뜻하며,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심에 속한다. 오류는, 우주에 대한 그의 고대적 개념, 사람들에 관한 그의 판단들, 역사적 순간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그의 종말론적 상상에서 분명하다.126)

 

 18.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부정한다.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127)

 

 1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가진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자유케 하는 인상은 그의 자기 복종적 사랑의 인상이다. 이 사랑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는 마지막 말이라고 확신하는 응답적 사랑을 사람 안에 일깨운다.128)

속죄의 교리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존재가 소외의 상태에 붙잡혀 있는 자들에게 미치는 효력에 대한 묘사이다.129)

하나님의 속죄적 행위는 그가 실존적 소외와 그것의 자멸적 결과들에 참여하심이라고 이해해야 한다.130)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실존적 소외에 참여하심이 드러나게 된다.131)

 

 2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명료한 신화적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132)

신들과 반신(半神, 절반쯤의 신)들의 부활은 잘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순간 . . . 부활의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가 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133)

이 사건의 성격은 어두움 속에, 심지어 부활절 이야기의 시적 합리화 속에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부활의 확실성이 그 작은 흩어진, 그리고 실의에 찬 무리들을 붙잡았던 날들에,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134)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아마 그럴 것이라는]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135)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신의 승리의 확실성이다. 역사적 확신이나 성경 권위의 수납이 이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넘어서는, 어떤 확실성도 없고, 단지 개연성--흔히 매우 낮고 때로는 높은 개연성--만이 있을 뿐이다.136)

 

 2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표현하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 표현은 우스꽝스러운(absurd) 것이 될 것이다.137)

 

 22.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138)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139)

 

2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이라고 한다.

'재림'의 상징. 140)

 

 24. 영원한 심판을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잘려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141)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은 가장 극적인 상징들 중의 하나이다.142)

[영원한 죽음은] 또한 해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액면 그대로 해석되면 완전히 모순되는, 영원과 죽음이라는 두 개념들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의 결합은 영원으로부터 ‘떠난’(away) 죽음, 즉 영원에 도달하지 못하고, 일시적 시간성에 내버려져 있음을 의미한다.143)

 

 25. 천국과 지옥의 장소성을 부정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144)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디트리히 본훼퍼는 급진파로 분류되며 또한 세속화 신학의 선구자이다. 인용된 그의 책은 다음과 같다:

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New York: Macmillan, 1959.

Ethics. New York: Macmillan, 1955.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New York: Macmillan, 1967.

 

 1.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독교가 참으로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인 말이든지 경건한 말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종교 일반의 시대를 의미하는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적으로 비종교적 시대를 향하여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종교적일 수 없다.145)

 

 2. 종교의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 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의 종교성은 그를 세상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데오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절박한 상황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無力)하심과 고난을 향하게 눈을 돌리게 한다.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 도우실 수 있다. . . . 이것이 아마 우리의 ‘세속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일 것이다.146)

‘종교적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사람의 삶 전체에 관계하는, 전체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지 않고 삶으로 부르신다.147)

 

 3.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비종교적(religionless) 해석을 옹호한다.

만일 종교가 오직 기독교의 옷이라면 . . . 비종교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생각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인 바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나의 계시의 실증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복이다.148)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종교 없이,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는 형이상학과 내면성 등의 전제들 없이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세속적’ 방식으로 말하는가?.149)

나는 네가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관한 불트만의 논문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견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적, 승천 등과 같은, 윈리상 하나님, 신앙 등의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는 ‘신화적’ 개념들만이 아니고, ‘종교적’ 개념들 전반이다. 너는 불트만이 상상하듯이 하나님과 기적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둘을 다 ‘비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150)

나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보편적 진리의 신화적 옷이 아니고 이 신화들(부활 등)이 본질이므로 ‘신화적’ 개념들을 포함하여 그 모든 내용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들이 종교를 신앙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51

 

 4. 기독교는 속죄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동양 종교들과 달리, 구약의 신앙은 구속(救贖)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항상 구속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과 분리시키고 구속에 관한 신화들에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오류가 아닌가?.152)

오늘날 구속은 무덤 너머의 더 좋은 세계에서 근심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속,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내용과 바울이 선포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하겠다.153)

 

 5. 성경 전반의 확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 . .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그러하다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154)

 

 6. 창조 사건을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영감[문자적 영감]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155)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156)

 

 7. 사람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피조물들로서 그리고 악의 목소리의 장소로서의 뱀, 하와, 지식의 나무의 애매함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명확한 해석으로 미숙하게 부서지게 해서는 안된다. . . . 성경의 목적은 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책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짐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마음과 거리가 멀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대답은 명백하거나 직접적일 수 없다.157)

 

 8.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이다. .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으신 분--그것은 진정한 초월성이 아니다--께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의 존재에의 참여를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이다.158)

 

 9. 교회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우선 그것은 그것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목사들은 오로지 그들의 회중들의 자원하는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가능하면 어떤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지배함으로써가 아니고 돕고 섬김으로써 인간의 일상생활의 세속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159)

 

 10.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절대 표준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160)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161)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

오스카 쿨만은 구속사(救贖史) 학파(the Heilsgeschichte)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Christ and Tim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0.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London: Epworth, 1958.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9 [rev. ed., 1963].

Salvation in History. New York: Harper & Row, 1968.

 

 1. 성경은 사가(Saga)들과 신화들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동일한 구속적(救贖的)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들(sagas)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적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적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 간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줄 뿐이다.162)

만일 원시적 기독교가 소위 원시적 역사나 종말론적 역사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직 그 둘을 분리시킬 능력이 정식으로 없었던 결과라면,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그 선의 역사적 요소들과 비역사적 요소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 때에 곧, 그 연결은 없어도 되게 될 것이다.163)

이와 같이, 불트만이 논리일관하게 구속의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신화를 벗기는’ 그 동일한 방법을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그 선의 부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적어도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은, 원시적 기독교에서 그 선은 실제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과, 오직 처음과 마지막으로부터만 시간 구조를 벗기고 그 역사적 중간 부분을 이 시간의 옷이 입혀진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그것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164)

하나의 전체로서의 구속사는 ‘예언’이다. 여기에 역사와 신화 간의 대조를 초월하는 점이 있다.165)

그 과정 전체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객관적으로는 오직 계시의 대상일 뿐이며 주관적으로는 오직 믿음의 대상일 뿐이므로, 그것들은 오직 예언일 뿐이다.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역사적 결정을 통한 확증은 여기에서 가능하지 않다. 좁은 의미에서 역사적인 성경의 책들(역사서)에 언급된 것은, 완전히 믿음과 독립된 역사적 시험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열려 있다.166)

 

 2.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진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그러므로,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해야 한다--우리가 그 개념을 본체와 본질들에 관한 후대의 헬라적 사색들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것을 엄격하게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167)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후대에 혼란한 여러 가지 이단적 위장들에 대해 교회는 정당히 정죄했는데, 그러한 혼란이 초대 기독교에게 낯설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 초대 기독교의 사고가 ‘구속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혼란의 위험은 오직 사람이 기독론의 문제를 본체와 성질들에 관한 사색들로써 풀어보려 할 때에만 일어난다.168)

 

 3. 보편 구원론적인 경향을 가진다.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16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170)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에 주어진 구원역사의 집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를 그 목표로 가지는가 하는 것은 특히 바울의 구원 역사관(롬 9-11장)에서 분명하게 된다.171)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 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172)

 

 4. 영혼 불멸을 헬라 철학 사상이라고 한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 내가 발견한 바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용감하고 기쁜 원시적 기독교의 소망과, 불멸적 영혼의 잔존에 대한 평화로운 철학적 기대 간에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73)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죽음과 영생이 항상 그리스도 사건과 묶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서만 그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174)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영혼의 불멸]의 이 개념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175)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1968년부터 1994년까지 독일 뮌헨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이었고 판넨베르크 학파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Revelation as History. New York: Macmillan, 1968.

Jesus--God and Man. Philadelphia: Westminster, 1968 [2nd ed. 1977].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The Apostles' Creed. Philadelphia: Westminster, 1972.

 

 1.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부정한다.

우리는 그의 이름, 그의 말씀을 통한, 혹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와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난 바는,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위의 반사(reflex)로서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의 생각이다.176)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의 현재 사건들의 규명된 목표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직 그것들이 일어난 후에만 하나님의 신성이 감지된다. 이와 같이, 계시를 역사의 끝에 두는 것은 계시의 간접성에 근거한다.177)

바울의 복음은 그가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남에 대한 해석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복음이 그 완성된 형태로, 들리는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립보서의 저작 사이에 바울의 사상에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에 반대되는 가장 작은 증거가 아니다.178)

 

 2.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근본주의적 관점은 텍스트에 적힌 진술 하나하나에 대해 모두 무오류(無誤謬)의 진리성을 고수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 . . 이럴 경우 오히려 성경 본문 자체가 지니는 진정성을 말살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179)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는 사람을 모든 다른 궁극적 권위로부터 자유케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생활 형태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적 조직들과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자유의 선물과 특권은 교회들에 의해 제출된 선언들, 교회들의 교리적 결정들, 성경의 책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 자신이 전한 내용에 관련하여 시행되어야 한다.178)

 

 3. 사도신경의 진리성(眞理性)을 부정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부분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진술들 중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181)

사도신경의 표현형식들은 믿음의 기초적 사실들의 요약이며 또한 그것의 중심적 내용이 된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더 이상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질문하면서, 숙고하면서, 비평하면서 그 진술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이런 방식은 초대교회의 방식과 다를 것이다. 또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항상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초대교회의 그 신조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아직도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가? 책임 있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우리가 그 근본적 의도들에 동의할 때뿐인데, 이 근본적 의도들은 그 신조의 진술들에서 시대적으로 제한된 그 표현형식을 찾았다. 이 의도들의 언어적 심지어 지적 표현은 더 이상 항상 우리 자신의 현대적 사물인식을 표현할 수 없다.182)

 

 4. 창조 대신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現在)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의 최초의 물질과정들의 미래이었다.183)

 

 5.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이라고 한다.

기독론적으로, 처녀탄생의 전설(legend)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가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184)

신학은 예수의 처녀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185)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관한 전통에 대한 강한 역사적 반론들이 있고, 그 전통은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적 주장의 성질을 가지는 고로, 역사적 반론들은 단순히 치워버려질 수 없다.186)

가장 초기의 형태의 그 전통 자체에 대한 조사는, 그러므로, 그것이 그 자체의 이탈과 동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반대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와 같이 처녀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전설과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이 경우에 아주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는 까닭은, 전승된 그 본문 자체가 그 전통의 전설적 기원에 대한 동기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187)

 

 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진술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188)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제자들 자신들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189)

 

 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러므로 본래는 육신적 아들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았고, 예수를 신적, 초자연적 존재로 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 유다의 왕은 확실히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단지 예수의 역할, 즉 그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본질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190)

 

 8.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191)

창조적 사랑은 자유로부터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에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 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192)

물론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의 죽음간의 이 교통은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193)

 

 9.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유로 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선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194)

 

 10. 지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지옥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방식에서 나온다.195)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독일의 신약신학자이며,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Scribner, 1965.

New Testament Theology. New York: Scribner, 1971.

 

 1.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19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 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197)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 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 나왔을 것이다.198)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199)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200)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2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절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202)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를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203)

 

 3.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 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204)

 

 4.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칭의(稱義)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 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205)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206)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207)

 

   피에르 드 샤르댕(Pierre T. de Chardin, 1881-1955)

피에르 드 샤르댕은 카톨릭 예수회 신부이며 철저한 진화론자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Hymn of the Universe.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Divine Milieu: An Essay on the Interior Life. New York: Harper & Row, 1965.

Science and Christ. New York: Harper & Row, 1968.

The Future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9.

 

 1. 범신론적이다.

그렇다면, 성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혼합이나 멸절의 독이 조금도 없는 훌륭한 형태의 '범신론'이다. 즉 그것은 각 요소가 그것에 깊이 빠져 동시에 우주로서의 그것의 완성에 이를 완전한 일체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208)

 

 2.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들의 진화 즉 자연적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러므로 진화는 거룩하다.209)

모든 비교물을 초월하는 지구의 과제는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안으로 합병하는 물질적 합병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일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정확성과 조화를 가지고 이루어진다.210)

무엇이든지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을 그것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들의 근원들의 방향으로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집합체의 마지막 섬유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눈에서 바로 우주라는 물건과 합쳐지는 것이다.211)

원자가 단순한, 원소적 물질의 자연적 미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는 생명의 자연적 미립자이다. . . . 세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진화론적 선상에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즉, 우주의 합리적 조직 속에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212)

쥴리안 헉슬레이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진화가 자체를 의식하게 된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현대적 지성들은 (그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견해에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안식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정상(頂上)에서 그리고 이 정상에서만 휴식과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213)

우리 자신의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가 자체를 쳐다보고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214)

우리의 시간 척도에 의하면, 생명이란 3억 년 이상의 거대한 시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그것은 수만 개의 분리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온 세계에 덮여 있다.215)

 

 3.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란, 생물들의 경우와 같이, 한 개인이 종족의 혈통을 따라 다른 개인으로 대치되는 일정한, 불가피한 상태이므로, 그것[분해의 악]은 더 악화되고 이중적으로 운명적인 형태라고 덧붙여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기계에서의 레버요 생명의 증가인 것이다.216)

 

 4. 에큐메니칼[교회연합] 운동을 옹호한다.

내가 믿기는, 이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 의한 현대 진화론적 견해들의 병합과 동화는 수세기 동안 계속 이성과 신앙 사이에 일어났던 장벽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그 부동(不動)의 장애물이 제거된 한, 미래에 카톨릭 교인들과 비카톨릭 교인들이 발견의 고속도로를 따라 손에 손잡고 함께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 오늘날 양측의 협력은 가능하게 되었다.217)

이 순간,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형태가 스스로를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지구의 정신적 성숙과 결합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올 것이다.218)

이러한 조건들에서,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유일한 두 가지의 효과적인 길들이 이런 것들이 아닌지 생각한다. 즉 (1) 참으로 ‘우주적’ 척도에서 극단적 정통 기독교와 극단적 인본주의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가지는 기독교인들 간의 (정상 에큐메니즘). (2) 인류의 미래에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의 ‘신앙’의 기초들을 정의하고 확장하려는 관심을 가진 일반 사람들 간의 (기초 에큐메니즘). 이 두 노력이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에큐메니즘으로 인도할 것이다.219)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

크리스터 스텐달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장이었고 신자유주의 학파로 분류된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Edited by Krister Stendahl. New York: Harper & Row, 1957.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8.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and Other Essay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Edited and Published by National Geographic Society, n.d.

 

 1. 마태복음은 마태 학파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본 답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개종한 랍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 . . 만일 우리가 그 복음서를 개종된 랍비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고 봉사했던 교회의 생활 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교회 안에 활동적이었던 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220)

이와 같이 마태 학파는 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한 학파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 학파의 저작품은 교회 내에서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안내서의 형태를 취한다.221)

 

 2. 바울은 교회의 전통에서 잘못 해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바울과 루터 사이의 차이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동등하게 중요한 점이 있다. 바울의 경험은 서방의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회심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다. 이 차이점 배후에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서방에 있는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울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오해들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222)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생각에서 그 신학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사람의 행위들이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가 아니다.”223)

 

 3.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부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이 액면 그대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초대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그리고 교리 문답적 관심들의 표시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경이 초대교회 내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과 상호충돌적 경향들과 행위들을 증거한다는 것도 명백하다.224)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교의와 신적 계시로서 선전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인간 역사의 한 에피소드[혹은 삽화]라는’ 기독교에 관한 윌슨의 진술이 심각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에피소드’와 ‘계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시초부터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신학적 문제이었다. 1세기에 기독교 사상의 주관심은 기독교를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하여 그 에피소드의 면을 보존하는 것이었다.225)

 

 4. 기독교의 절대불변적 성격을 부정하고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지구의 하나됨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다원주의는 부채가 아니고 자산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 모르나, 종교들은 여러 개이다. 그것들은 그 문화가 가장 특징적인 곳 즉 바나라스, 메카, 로마, 예루살렘 같은 곳들에서 그 세력의 중심을 가진다. . . . 내가 이 책을 넘겨볼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과 비교해야 한다는 모든 종교 연구의 기본 법칙을 기억한다. . . . 사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과 구조는 문화에 따라 드러나게 다르다.226)

우리는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신앙과 고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족장 아브라함과 신학자 아브라함 헤쉘에 의해 표현된 종교적 견해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둘은 다 정당하게 유대교적이라고 불린다. 혹은 복음서 기자 요한과 교황 요한 23세 간이나, 마르틴 루터와 마르틴 루터 킹 간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것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야 한다.227)

그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모든 경계선들을 넘는 능력을 가진 생명력 있는 종교들이다. 그리스도가 동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처럼 부처는 서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228)

 

 4. 교회에 끼친 영향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단지 몇몇 신학자의 문제가 아니고 대교단들의 목사들 상당수의 문제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일찍이 배교적이 되었고 미국의 교회들도 1920년대 이후 점점 포용적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유럽과 미국 교회들의 변질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예들은 자유주의 신학이 오늘날 각 교파 교회들 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 잘 증거한다.

 

 1967년의 제프리 해든의 설문 조사

1967년,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이 미국의 성직자 10,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응답한 7,441명의 응답 결과가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인용 혹은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미국 교회의 평신도들이 아니고 성직자들(목사들)이 얼마나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증거한다:229)

(1) '귀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UMC) 성직자들의 60%, 감독교회(ECA) 성직자들의 44%, 연합 장로교회(UPC) 성직자들의 49%, 침례교회(ABC) 성직자들의 34%, 루터교회(ALC) 성직자들의 19%, 미주리 대회 루터파(MSLC) 성직자들의 5%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2) '귀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51%,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0%,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35%,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13%, 미주리 대회 루터파 성직자들의 7%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3) '귀하는 오늘 세계에 악한 귀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62%,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7%,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47%,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14%, 미주리 대회 루터파 성직자들의 7%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4) '귀하는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無誤)한 말씀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95%,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82%,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67%,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77%, 미주리 루터파 성직자들의 24%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1985년에 시작된 '예수 세미나'

1985년 약 125명의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하였다.230) 그 결과, 1988년 예수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거기에는 빨강색, 분홍색, 회색, 검정색으로 예수의 비유들의 역사적 신빙성의 정도를 표시했다. 또 1993년에는 오복음서: 예수님이 참으로 말씀하신 것(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994년 초까지 이 세미나의 대략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며,231) 이것은 오늘날의 성경 연구가 얼마나 배교적인지를 잘 나타낸다:

(1) 예수의 말들의 오직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1) 예수의 말들의 오직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2) 주기도도 예수의 말이 아니다.

(3)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4)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5) 예수는 죽은 자들로부터 결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6) 예수는 자신의 재림(再臨)을 약속하지 않았다.

(7) 성경에 묘사된 신화적 의미의 지옥은 없다.

(8) 예수는 독신이 아니었고 독신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1999년, 이 세미나를 주도하는 로버트 펑크는 미국의 한 연합그리스도교회의 강연에서 "[성경에서 예수의] 말씀들 중에 확실한 것은 20퍼센트도 안 된다,"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의 신성(神性)과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은 믿을 만하지 못하나 비유들과 재치 있는 말들은 역사적이다," "니케야 신조는 넌센스이며 수정할 가치가 없다," "고대 교회의 신조들은 상상의 산물들이다"라고 말하였고, 그는 그 모임에서 '예수 세미나'의 결론들인 다음과 같은 21개의 명제들을 배부하였다:

(1) 물질 세계 바깥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

(2) 다윈의 사상은 창조의 교리를 영원히 말살시켰다.

(3) 창세기 이야기의 비(非)문자적 해석은 원죄의 교리를 종결지었다.

(4) 신적인 기적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에 대한 모욕이다.

(5) 저 밖에 있는 신에게 말하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기도는 명상이다.

(6) 예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7) 예수를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낡아빠진 생각이다.

(8) 예수가 처녀에게서 났다는 것은 현대 지성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에 대한 모욕이다.

(9) 속죄의 교리는 이성적이지 못하고(sub-rational) 또한 윤리적이지 못하다(sub-ethical).

(10)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11) 모든 계시적 요소들은 기독교 주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12) 예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비젼이 그를 대치해야 한다.

(13) 예수는 인간의 선함을 믿었다.

(14) 예수는 축제(celebration)를 믿었다.

(15) 예수는 성적 방향성[타고난 기질]에 근거한 경계선을 포함한 사회적 경계선을 거부하였다.

(16)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중보자들은 없다.

(17) 예수는 예배 의식들을 믿지 않았다.

(18) 하나님의 나라는 끝없는, 영구적 방랑의 여행이다.

(19) 다른 신화들이 그렇듯이, 성경의 정경(正經)은 시대에 맞추어 축소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20) 성경은 객관적 행동기준을 담고 있지 않다.

(21) 예수의 비젼의 재구성은 항상 수정되어야 한다.

 

   2004년 바나 연구회의 보고

2004년, 바나 연구회(Barna Research Group)는 미국 개신교 목사들의 49%가 다음과 같은 성경의 핵심적 신념들을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1) 성경에 기초한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있다, (2) 성경의 교훈은 정확하다, (3) 예수는 죄가 없으셨다, (4) 사탄은 실제로 존재한다, (5)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다, (6)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 (7)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 할 개인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두 개의 가장 큰 교단 중, 성경적 견해를 가진 목사들의 비율은 남침례교회가 71%로 가장 높았고, 감리교회가 27%로 가장 낮았다.233)

 

 미국 장로교회(PCUSA)

1923년, 미 북장로교회의 '어번 선언서'

1923년 12월 26일, 미 북장로교회에 속한 150명의 목사들이 뉴욕주 어번시에 모여 한 문서를 발표하였다. 후에 어번 선언서(Auburn Affirmation)라고 불리운 이 문서는 곧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 내용은,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하고 1916년, 1923년에 재확인한 내용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한 내용이란 다음 다섯 가지 교리가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이라는 것인데, 그 교리들은 첫째로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둘째로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셋째로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넷째로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다섯째로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 등이다. 어번 선언서는 이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이론들일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특히 성경 무오의 교리는 성경 숭배에 빠지기 쉬운 교리라고 하였다.

 

 미 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신앙고백

1967년 미 연합장로교회[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가 됨]가 채택한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234)

1) 성경의 초시간적 진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유일 충족한 계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에 대하여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유일하고 권위 있는 증거를 하신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으로 수락되고 순종된다. 성경은 다른 여러 증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비길 데 없는 증거이다. . . .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서 주어진 것이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장소와 시대의 언어, 사상 형식, 문학 형태들의 지배를 받는다. 성경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반영한다(1. 3. 2).

2) 타종교들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종교들과 자신의 종교간의 비슷한 점들을 발견하며, 모든 종교들에 대해 열린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반복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갱신을 촉구하시려고 비기독교인들의 통찰력을 사용하셨다(2. 1. 3).

3) 속죄의 교리를 한 이론으로 돌린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화목의 행위는 성경이 여러 가지 방식들로 묘사하는 하나의 신비이다. 그것은 어린양의 제물,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주심, 제사장의 속죄로 불리며, 또한 종의 속전(贖錢), 빚의 지불, 법적 형벌의 대리적 보상, 그리고 악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로 불린다. 이것들은 모든 이론의 범위를 넘어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 속에 머무는 한 진리의 표현들이다(1. 1. 1).

4) 화목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보인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은 그의 화목케 하시는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 보내지는 것이다. 이 공동체 곧 세계적 교회는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위탁받았으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는 적의(敵意)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수고에 참여한다(2. 1. 1).

교회의 회원들은 화평의 밀사(密使)들이며 정치, 문화, 경제면에서 세력 있는 자들이나 집권자들과 협력하여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세력들이 인간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가장(假裝)과 부정(不正)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1. 3. 1).

인간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해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 1. 1).

교회는 모든 민족차별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2. 1.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 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 1. 1).

또한, 미 연합장로교회는 목사의 임직서약도 변경하였다. 변경된 임직서약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선언되지 않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 지도 아래 행한다고 선언된다. 1965년 5월 17일자 자유주의 잡지 크리스챠니티 앤드 크라이시스(Christianity and Crisis)는 말하기를, “새 신앙고백서는 1924년 어번 선언서의 교리적 노선으로 내려간다. 40년 전에 겨우 허용되었던 소수파의 견해가 이제는 교회의 공식적 교리로 제안되고 있다”고 하였다.235)

 

  1981년, 미 연합장로교회의 케이스맨 목사 사건

1981년, 미 연합장로교회(오늘날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재판국은, 그 총회 내에서 사역하던 연합그리스도교회 소속 맨스필드 케이스맨(Mansfield M. Kaseman)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무죄성(無罪性), 대리적 속죄, 육체 부활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지노회가 케이스맨의 견해를 새 임직서약에 의해 허용된 ‘용납할 만한 해석의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함에 있어서 옳았다고 판결하였다.236) 미 연합장로교회는 이단을 제거할 뜻이 없음을 명백히 드러내었다. 이것이 배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2000년,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에게 수상함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루이즈빌 장로교 신학교와 루이즈빌 대학교가 수여하는 2000년 루이즈빌 그로메이어 상과 상금 20만불을 받았다.237)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3년 1월 11일자는 그를 “금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렀다. 그러나 크리스챤 뉴스 1993년 1월 23일자는 몰트만이 삼위일체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절하고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의 신학을 위해 문을 연다고 말했다.238)

 

   미 연합감리교회(UMC)

시실 윌리암즈(Cecil Williams)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글라이드 기념 연합감리교회 목사 시실 윌리암즈는 자기의 정박소는 ‘해방의 신학’이라고 말했다. 해방의 신학은 민중들을 정치적, 경제적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구원이요 복음이라고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일파이다. 또 그는 “규칙들과 교리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239)

 

보수주의자들의 고통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적이었던 미 연합감리교회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최근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더 이상 연합감리교회의 회원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신자들은 신앙의 기본적 사실들을 긍정하지 않는 자들과 영적 동반자들일 수 없다,” “우리는 우리 교단에서 연합될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240)

 

 멜빈 탤버트(Melvin Talbert)

미 연합감리교회의 한 에큐메니칼 수석위원은 말하기를, 기독교 선교사들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것을 너무 강조하지 말고 그 대신 다른 이들과 평화로이 사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멜빈 탤버트 감독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했을 때 거기에는 기독교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예수께서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가 되라고 호소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한다.241)

 

 퍼킨즈 신학교의 학생들

헬라정교회 대주교 드미트리 로이스터는 이전에 연합감리교 소속 퍼킨즈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가르칠 때의 사건을 회고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믿는지 물었다. 내가 말뜻을 정의하여 예수께서 단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선생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임을 분명히 하자, 그 반의 학생들 중 한 명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였다.”242)

 

 죠셉 스프라그(C. Joseph Sprague) 감독

시카고 연합감리교회 감독 스프라그는 한 반대자의 주장(Affirmation of a Dissenter)이라는 그의 새 저서에서 예수의 처녀 탄생과 그의 육체적 부활과 구원에서의 그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또 그는 2002년 6월 25일 콜로라도주 덴버의 일리프 신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정녀 탄생의 신화는 역사적 사실로 의도된 것이 아니고 나타나는 교회에서 경험되는 예수에 관한 진리를 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마태와 누가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채용된 것이었다. . . .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으나 그의 부활이 그의 육체적 몸의 회생을 포함한다고 믿을 수 없다. . . .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배타적 생각들과 의견을 달리해야 한다. . . . 나는 다른 종교들이 열등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의 밖에 있다고 혹평하는 것보다 예수의 계시를 나의 삶과 교회의 삶에서 사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 . . 나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흠 없는 양과 염소의 제사들이 하나님의 노를 가라앉히며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한다고 이해되었던 것처럼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피를 한 엄위한 희생적 인간의 죽음을 통해 진노의 신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묘사하는 대속의 이론을 찬성하지 않는다. . . . 피의 제사 개념은 최선으로 생각해도 미신이다.243)

그러나 그에게 그의 견해를 취소하든지 그의 직책을 사임하라고 요청하는 28명의 보수주의자들의 고소를 다룬 그 교단의 위원회는 그 고소가 잘못이며 그는 이단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244)

 

 미국 감독교회(성공회)

죤 스퐁(John Shelby Spong)

1. 무신론적이다.

미국 감독교회(ECA, 성공회)의 유명한 자유주의자 죤 스퐁 감독은 인격적 하나님이 없으며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죽었다’고 했다.245) 그는 유신론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공격함으로써 유명해졌다. 2002년 4월 27일자 월드(World)지는 스퐁의 왜 기독교는 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인용한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한 방법으로서의 유신론은 명백히 부적절하게 되었고, 유신론의 신은 죽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 회생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미래의 종교가 유신론의 개념들을 지키는데 의존한다면,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인간적 현상은 끝날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유신론적 신 개념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 . . 이 고상한 종교적 체계가 그 자신의 죽음의 고통의 좁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246)

 

2. 예수님의 처녀 탄생, 속죄, 부활, 지옥 등을 부정한다.

1999년 4월 26일자 뉴 아메리칸지에 의하면,

스퐁의 판단에는, 기독교가 생존하려면 기독교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그리고 기적들과 같은 교리들을 치워버려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퐁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러한 생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 안에서 조성된 것이며’ ‘지식의 팽창으로 낡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신을 숭배하기보다 증오하기를 택할 것이다”라고 했다.247) 그는 말하기를, “나는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어린 소녀들을 죽이려 한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그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한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다.248)

그는 역사적 사건들로서의 예수의 기적들, 동정녀 탄생, 부활, 그리고 승천을 부정하고 천국과 지옥, 영원한 형벌과 보상에 대한 ‘옛 견해’를 버린다. 또 그는 모든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단언했다.249) 그는 2000년 1월 29일 은퇴하였으나 그 후 몇 달 동안 하버드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3. 보편구원론자이다.

스퐁은 “만일 모든 사람이 구속(救贖)함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도 완전히 구속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보편구원론자이다.250)

 

4. 모든 성경을 믿지 말라고 강권한다.

미국의 은퇴한 감독교회 감독 죤 쉘비 스퐁은 최근 6백 명 이상의 감리교인들에게 성경에서 읽는 모든 내용을 다 믿지 말라고 강권했다.251)

 

5. '새 기독교'를 제안한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 및 역사적 기독교의 다른 많은 교리들을 부정한 죤 쉘비 스퐁은 지금 “우리의 실재(實在)의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어야 할 “새 기독교”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사탄이 우리 각자 속에 함께 오도록 허용될 수 있어야 한다. . . . 그것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예수와 유다,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연합해야 한다”고 한다.252)

 

     미 연합그리스도교회(UCC)

미 연합그리스도교회는 오래 전부터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 교단은 낙태와 안락사를 찬성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인정하였고, 유니테리안 목사나 천주교 신부도 사역하도록 허락하였다.253) 그 교단의 듀부크(Dubuque) 신학교의 도날드 블뢰쉬 박사는 위트니스(The Witness) 1996년 겨울호의 한 대담에서, “연합그리스도교회는 유니테리안 사상으로 표류하고 있다. 이 교단은 이미 만인구원론적이다.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같은 구별은 이미 상실되었다. 유니테리안들과의 통합을 실제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254)

 

   미국 남침례교회(SBC)

1976년, 노엘 홀리필드의 설문조사

1976년, 미국 남침례교 신학교의 학생 노엘 홀리필드는 “남침례교 신학교의 선정된 학생들 중에서의 ‘기독교 정통성’ 정도의 사회학적 분석”(Sociological Analysis of the Degrees of 'Christian Ortho- doxy' among Selected Students in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 cal Seminary)이라는 제목의 신학석사(Th.M.) 논문에서 남침례교 신학교 학생들의 신앙 상태를 알 수 있는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남침례교 신학교는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학교로서 남침례교단의 중심적 신학교이다. 미국 남침례교단은 교회수가 4만개가 넘고 교인수가 1500만명이 넘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비교적 보수적인 교단이다. 그러나 홀리필드의 논문에 실린 설문조사는 미국 교회들의 배교가 남침례교회에까지도 미쳤음을 잘 보인다:255)

 

M.Div.

1학년

M.Div.

3학년

Th.M.

&Ph.D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없이 믿는다.

74%

65%

63%

마귀의 존재는 확실하다.

66% 

42%

37%

기적들이 성경의 증거대로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는다.

61%

40%

37%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확실하다.

66%

33%

32%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셨음은 확실하다.

59%

44%

22%

예수께서 신적인 하나님 아들이심을 의심치 않는다.

87%

63%

63%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85%

60%

59%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42%

33%

21%

죽음 너머의 삶이 있음은 확실하다.

89%

67%

53%

예수께서 어느 날 실제로 지구로 돌아오실 것을 확신한다.

79%

56%

53%


로버트 앨리

남침례교 소속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대학교수인 로버트 앨리는 신자에 대한 반란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256)

어떤 이는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 신념이 계시 신학의 유일하게 타당한 출발점과 구조”라고 계속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주장들은 미소를 지으며 들어야 하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사회의 조례에나 넣어져야 할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을 조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부정직하다. 그들은 교육과 독서를 통해 더 나은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섬기며 구원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는 무지한 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거짓된 교리를 이용하여 성공과 명성과 큰 교회들을 얻는다. 그러한 도덕적 태만은 현대의 많은 공적인 종교활동들에서 너무 일반적이다. 이런 종류의 속임에 대해 오직 경멸과 거부가 있을 뿐이다.

로버트 앨리는 또한 1977년 12월 6일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제1 유니테리안 교회에서의 무신론자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는 결코 자신이 하나님이라거나 하나님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 . . 나는 예수가 참으로 유대인이라고 본다. 나는 그가 자신의 신성(神性)을 주장하는 오만함을 가졌을 것이라고 잠시라도 상상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가르친 구절들은 후대의 편집, 즉 교회가 그에 관해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257)

 

 C. W. 크리스챤

남침례교 소속 베일러(Baylor) 대학교 종교학부 교수 C. W. 크리스챤은 워드북 출판사에서 간행한 신앙을 형성하기라는 책 67쪽에서 “창세기와 다윈 간의 차이는, 만일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다윈 편이라고 참으로 결정되었다”라고 썼다.258)

 

 C. R. 데일리

켄터키주 남침례교 신문인 웨스턴 레고더지의 이전 편집자인 C. R. 데일리는 1984년 7월 20일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259)

내가 이 신학교에 왔을 때, 나는 오경의 모세 저작성을 강하게 지지하는 단 한 명의 교수를 기억할 수 있다. . . . 신학교들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유럽 대륙의 신학사상으로 가고 있었고 그 사상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것이 신학교들의 방향이었다.

만일 여러분이 오경의 모세 저작성과 창세기 처음 11장의 역사성과 욥과 요나를 역사적 인물로 보기를 원한다면, 중부아메리카(Mid-America) 신학교로 가라. 여러분은 거기서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신학교가 여러분이 그것을 얻을 유일한 곳이다.

 

 로버트 케이트

골든 게이트 신학교의 구약교수이었던 로버트 케이트는 남침례교 주일학교부의 브로드만 출판사에서 간행된 평신도 성경주석, 2권 9쪽에서 “창세기의 언어와 본문의 주의 깊은 비교 연구들은 현재의 형태로서의 창세기가 아마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의 어느 때에 기록되었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260)

 

 죠엘 런스포드

켄터키주 엘리자베스타운의 남침례교 소속 죠지타운 대학에서 헬라어와 구약 교수인 죠엘 런스포드는 1963년 봄 경건회 설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 안에 있는 ‘공의’나 ‘의’나 ‘거룩’ 같은 어떤 추상적 특질을 만족시키기 위한 유화적(宥和的) 제물로 만드는 것은 내 판단에서 신성모독의 첫 번째 사촌이다”라고 말했다.261)

 

 남침례교 신학교의 한 교수

플로리다주 오란도의 델라니가(街) 침례교회의 목사인 짐 윌슨은 그가 남침례교 신학교 학생이었을 때 교수가 모든 학생들 앞에서 “나는 이 모든 피의 종교에 진저리가 난다! 우리는 ‘피, 피, 피밖에 없네’ 같은 이 우스광스러운 찬송들을 부른다. 나는 남침례교의 모든 교회들의 찬송가집에서 그것들을 찢어 내어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썼다.262)

 

 협동침례교협의회(CBF)(남침례교단 내의 자유파 모임)

남침례교 신학교 부학장 대니얼 에이킨(Daniel Akin)은, 1998년 11월 앨러배머주 남침례교인들에게 한 연설에서, 협동침례교협의회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제사적 죽음의 필요성과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지도자들이 있다고 비난하였다. 또 그는 어떤 협동침례교협의회 지도자들은 낙태와 동성애에 관한 자유주의적 견해들을 취하고 있다고 말하였다.263)

버지니아주 남침례교회들의 뱁티스트 배너(Baptist Banner) 1999년 1월호는 남침례교단과 협동침례교협의회 간의 차이점들을 열거하면서 그 협의회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속해 있다고 하였다:

(1)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의 제사적 죽음의 필요성, 혹은 그의 동정녀 탄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지도자들, (2) ‘그리스도-소피아(Sophia)’(여성적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를 요구하는 여권주의 신학 지도자들, (3) 남녀 동성애자, 양성애자(兩性愛者, bi- sexual), 성(性)전환자(transgendered)의 안수를 요구하는 지도자들, (4) 하나님께서 때때로 여자에게 인구 억제의 목적을 위해 아이를 낙태시키라고 명하신다고 말하는 지도자들, . . . (6)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적 행위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지도자들, (7) 여성을 담임목사로 안수하기를 요구하는 지도자들, (8) 펜트하우스(음란물 출판사), 전국 남녀 동성애자 전문위원회, 가족계획 협회와 연합하여 활동했던 지도자들, (9)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지도자들.264)

 

 폴 듀크(Paul Duke)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머서 대학교의 신약과 설교 교수 폴 듀크는 “동성애와 교회”라는 제목의 1994년 협동침례교협의회(남침례교단의 자유주의파 모임)의 총회 전 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우리의 최종적 권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 . . 동성애는 성경의 주관심이 아니다. . . . 나는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적 행위를 정죄한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듀크는 동성애 부부의 결합에 대한 자신의 ‘넓은 후원’을 긍정하였으나, 자신의 개인적 취향은 이성애 부부라고 주를 붙였다. 머서 대학교는 미국의 보수침례교협의회의 재정지원을 받는 학교다.265)


커비 갓세이(Kirby Godsey)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머서 대학교 총장 커비 갓세이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는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동정녀 탄생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버리고, 회개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근거’임을 거부하고, “교리적 건전함이란 교만한 신학적 난센스[터무니없는 생각]이다”고 주장했다.266)

 

 시실 셔만(Cecil Sherman)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1983년 8월 5일자는 미국의 남침례교단의 목사이었고 후에 자유파 협동침례교협의회의 초대 전국 의장이었고 현재 자유주의적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침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시실 셔만 박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하였다:

성경에 의해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게 될 선생은 해고되어서는 안 된다. . . . [동정녀 탄생은] 두 복음서들에 있으나 다른 두 책들에는 있지 않다. . . . 마가와 요한은 그것을 나열하는 것을 잊어버림으로 실수를 범했는가? 만일 동정녀 탄생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마가와 요한은] 잘못을 범한 것일 것이다.267)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마틴 마티

루터파 신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그가 편집인으로 있는 크리스천 센추리(Christian Century)지 1999년 4월 7일자에 “나는 성경을 포함한 아무 책도 무오하지 않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268) 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교리를 포함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오래 전부터 부정해왔다. 그런데 그는 1992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의 연사이었다.269)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단(ELCA)의 교수 필립 헤프너는 뉴스위크 2000년 5월 1일자의 한 면 전체에서 “왜 나는 기적들을 믿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는, “나는 정말 어떤 관습적 의미로도 기적을 믿을 수 없고, 오직 복(福)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매일 일어난다”고 글을 끝맺었다. 그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루터파 신학교(Lutheran School of Theology)의 조직신학 교수이며 자이곤 종교-과학 연구소장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공격해왔다. “기적 이야기들--신앙에 대한 증언인가 신빙성의 세대 단절(credibility gap)인가”라는 그의 논설은 루터파 신학교의 컨텍스트(Context)지 1968년 봄-여름호에 실렸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단 임원들은 인간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함하여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이 실제로 일어났는 사실을 부정하는 교단 교수들에 대해 어떤 권징적 조치를 취하기를 오래 전부터 거절해왔다.270)

 

   영국의 교회들

1984년, 런던 주말 텔레비젼의 '크리도우' 프로그램

1984년 런던 주말 텔레비젼의 ‘크리도우(Credo, 신조)’ 프로그램은 영국교회(성공회) 39명의 주교들 중 31명에게 질문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는데, 그것은 영국교회의 배교적 상황을 보인다:

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으로 간주해야 한다(11명),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최고 대리자로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19명).

② 신약성경의 기적들은 후대의 삽입이다(15명).

③ 예수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그들 가운데 살아계신다”고 확신시켰던, 그의 죽음 후 ‘일련의 경험들’이다(9명).271)

 

 성공회 교리위원회의 지옥관(觀)

영국교회 교리위원회의 “구원의 신비”라는 보고서는 지옥의 교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에는 지옥불과 영원한 고통과 형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가학적(加虐的) 괴물로 만드는 두려운 신학들을 고백하였다. . . .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해 아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의 최종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선택이다. . . . 유일한 종말은 완전한 비(非)존재이다.272)

 

 캔터베리 대주교 죠지 캐리(George Carey)

성공회의 수장(首長) 캔터베리 대주교 죠지 캐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확실성을 가지고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없다. . . . 우리는 그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없다.”273)

 

 레슬리 웨더헤드(Leslie Weatherhead)

영국 감리교회의 저술가요 증경총회장인 레슬리 웨더헤드는 그의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예수가 아마도 여러 번 성육신(成肉身)한 한 영일 것이라는 견해를 표현하는 마지막 책을 썼다. 크리스챤 뉴스 2001년 3월 5일자의 한 논설은 논평하기를, “이런 견해는 그가 비참하게 신비주의에 떨어졌음을 반영했다. 엡워스(Epworth) 출판사는 그 책을 출판하기를 거절하였다”라고 썼다. 웨더헤드는 “기독교는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인가?”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내 생각에 기독교는 확실히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6과 충돌된다. 그는 매우 중요한 다른 교리들에 대해서도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이)었다. 그러나 신복음주의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은 이 배교자가 40여년 전 그의 런던 전도대회에 참여하도록 허용하였다.274)

 

  캐나다의 교회들

캐나다 연합교회(UCC)의 총회장 빌 핍스 목사

교인 300만명을 가지고 있는 캐나다 최대의 개신교단인 캐나다 연합교회의 총회장 빌 핍스(Bill Phipps) 목사는 1997년 10월 24일자 오타와 시티즌지와의 대담에서, “나는 예수가 하나님이셨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고, 천국과 지옥의 성격에 관한 질문에 대해, “나는 지옥이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예수께서 지옥에 대하여 그렇게 관심을 가지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 땅 위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셨다. . . . 천국이 장소인가? 나는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일들이 발생했는지 어떤지 모른다. 그것은 부적절한 문제다”라고 하였다. 그는 후에 자신의 사상에 대해 첨언하기를, “예수께서 신적이시지 않다는 노골적인 진술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우리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만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신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의 본질의 전체적 개념은 예수님에게서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더 신비하고 더 거룩하다”고 하였다.

그의 발언은 한 달 이상 교단 내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주의 진영 사이에 논쟁을 일으켰다. 논쟁이 가열되자 85명의 교단 집행위원들은, “캐나다 연합교회는 개인의 신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으며, 따라서 총회장의 개인적 신앙고백을 존중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캐나다 연합교회의 신학적 노선과 총회장 신임을 재확인했다.275)

 

 클라크 피나크(Clark Pinnock)

캐나다의 맥매스터(McMaster) 신학교의 신학교수 클라크 피나크는 배교자라고 불리는데276) 아마 정당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에 그는 남침례교단 소속 뉴올리언즈 침례교 신학교의 보수적 교수이었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성경 영감과 지옥의 본질 같은 교리들에 대해 매우 비(非)정통적인 이해에 도달한 변화를 겪었다. 그는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회(ETS)에서의 논문에서 종말 사건들에 대한 ‘더 포용적인’ 복음주의 이해를 요청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포함한다.277)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 이상의 언약과 하나 이상의 백성을 가지고 계신다”라고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다양한 길들’에 대해 말했고, 많은 이방인들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거절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은 개인이 “다른 이들의 봉사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활 방식에 참여함”이라고 했다.278)

피나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아무리 그의 피조물들이 죄악될지라도 그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부과하는 그런 잔인하고 보복적인 신을 고안할 수 있을까?” 그는 말하기를, 그러한 일을 하는 하나님은 “하나님보다는 사탄에 더 가깝다”고 하였다.279)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측)

박대선 감독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박대선 감독은 1974년 6월 14일 고(故) 홍종철 특별보좌관 장례식 설교에서 불신앙적 사상을 나타내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죽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분이 두 분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에녹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에녹이나 엘리야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육신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생각해 볼 때 이 세상에서 불의를 모르고 가장 뛰어나게 의롭게 살다가 죽은 에녹과 엘리야의 사랑하던 제자들과 가족들과 친지들이 에녹과 엘리야의 죽음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하던 에녹과 엘리야의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고 강하게 그들에게 심어졌기에 도저히 죽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선생이 그들과 같이 앉아서 말씀을 하시는 것만 같고 길을 걸어갈 때도 같이 걸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 죽지 않고 산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박하게 기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280)

 

  변선환 학장

감신대학 전 학장 변선환281)은 기독교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길 되심을 부정하였다. 그는 기독교 사상이라는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에서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라”고 말했고, 또 “저들의 종교[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299호, 155쪽).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같은 책, 156쪽). 또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0년 12월 8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토리미의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을 중심하여서 돌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그는 “예수를 절대화, 우상화시키며,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마에서 벗어나 . . . 신 중심주의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비평할 가치조차 없는 이단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밝히 증거한다(출 20:3; 요 14:6; 딤전 2:5).

 

 홍정수 교수

감신대학 조직신학 교수 홍정수는, 첫째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 베짜는 하나님에서 “신 없는 종교를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그리고 무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종교까지는 몰라도 꼭 신을,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 . . 만일 신은 계신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신은 없다’고 잘라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282)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한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신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다”라고 했고 또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속량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우리를 속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83) 또 그는 그의 저서에서도 말하기를,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특정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던 한 설교자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284)

셋째로, 그는 골고다 산상에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광주 망월동 민주 항쟁으로 죽은 많은 민주 인사들의 죽음을 동일시하였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예수라는 설교자의 죽음은 억울한 희생이 아니라 ‘말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선택된 죽음이다. 이런 현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구호를 외치면서 투신 또는 분신해 쓰러져 간 젊은이들의 죽음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285)

넷째로, 그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였다.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1년 3월 30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말하기를, “부활 신앙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고 했고 동신문 6월 8일자의 글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빈 무덤이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다른 잡지에서 “나는 단연코 육체의 부활을 부정한다”고 말했다.286) 그는 그의 저서에서도 말하기를, “만일 예수 부활 사건이 오늘날의 우리가 소박하게 생각하듯이 그렇게 역사적으로 육체적으로 발생했다면, 그 사건은 자연 현상 중의 기이한 일에 불과하며, 전혀 ‘하나님’의 행위가 아님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 부활의 역사성, 육체성을 실증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성격에나 하나님의 성격에 전혀 맞지 않는 이치임을 시인해야 한다”고 했다.287)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

한국의 장로교단들 가운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은 처음부터 자유주의자 김재준 박사를 옹호하면서 세워진 교단으로서 자유주의적이었고 지금도 그 교단과 그 교단의 목회자 양성원인 한신대학교 신학부는 자유주의의 일선에 서 있다.

 

 문익환 목사

사도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 실존적으로 동참함으로 주의 부활에도 동참한다고 믿었다. . . .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부활한 몸에 관한 호기심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겨둔다고 해서 손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함으로 믿는 자가 전인적인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288)

 

 김동수 목사와 박봉랑 교수

김동수 목사와 박봉랑 교수는 1973년 부활절 메시지에서 한국 교회가 인간의 영혼불멸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부활은 2천년 전의 골고다의 예수의 부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늘 이곳 한국 땅에서 날마다 사는 부활의 승리에서 영광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다.289) 그러나 인간의 영혼불멸 사상을 부정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무시하고 현재적 부활의 의미만 붙들려고 하는 태도 역시 불신앙에 불과하다.

 

 조향록 목사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사건 자체를 사건적으로 입증하든지 부정하든지 하는 논란은 큰 의미를 거두지 못한다. . . . 문제는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수용 자세에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창문을 열고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기는 하나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대상이 된다. 신앙은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문제나 사건이 신앙하는 자에게 의미적으로 받아지는 것이다.290)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단순히 신앙의 문제로만 돌리고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인식의 대상인 동시에 우리의 신앙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적 믿음이 아니다.

 

 김경수 목사

한국신학대학 출신 제주 남부교회 김경수 목사는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3권)을 번역한 후 다음과 같이 썼다:

신학적으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신학자는 김재준, 칼 바르트, 폴 틸리히라고 할 수 있다. . . .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의 조직신학 교수는 폴 틸리히의 신봉자였고, 그는 폴 틸리히를 빼 놓으면 신학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틸리히 신학에 빠져 있었다. 내가 폴 틸리히에게 몰두하게 된 것도 그의 덕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폴 틸리히는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마음을 빼앗곤 했고 공감을 일으켰다.291)

1970년, 저자가 재학했던 연세대학교의 교양과목 중 기독교 개론 교재가 폴 틸리히의 긍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계준 역)이라는 책이었다. 그 이단적 자유주의자의 책이 소위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대학교의 기독교 개론 교재이었던 것이다!

 

 안병무 박사와 송기득 교수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원대 은퇴교수인 송기득 교수(조직신학)는 기독교 사상 2001년 1월호에서 안병무(한신대 대학원장, 한국신학연구소 창설, 현존지 발행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예수교인’이었다고 주장했다.292)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삼위일체, 신인양성(神人兩性), 성육신, 대속 등을 믿는 자이다. 그러나 안병무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 곧 민중이 해방되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정치범으로 붙잡혀 십자가 형틀에서 처참하게 죽임당한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투쟁은 패배로 끝났다. 예수는 로마의 침략 세력을 쫓아내지도 못했고 헤롯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지도 못했고 예루살렘 성전 체제를 전복시키지도 못했다. 이리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민중해방자로서 예수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면 그가 민중해방운동의 길을 열었고 한 역사적 전거(패라다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송기득 교수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와 역사적 예수의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삼위일체론, 양성론, 육화론[성육신론], 대속론 따위는 그리스도에 관한 중심 교리로서 그 나름의 진리성을 갖는다. 다만 학자들에 따라서 그 해석이 다르기도 하고 또 어떤 교리는 부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으로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한 안병무의 역사적 예수는 삼위일체적 존재, 성육신(成肉身)한 존재,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가진 존재 등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안병무가 '예수는 철저하게 "사람"이었다. 그것도 "보통사람"이었다'고 말한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 . . 사실 역사의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처형된 것이 아니라 민중해방운동을 벌이다 그 대가로 십자가 형틀에서 살해된 것이다. 만일 예수의 죽음을 굳이 '대속'이라는 말로 이해하려면 그것은 이스라엘 민중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지배 세력에 대한 민중의 항거를 대신한 대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속론을 펴려면 '민중의 대속론'을 내놓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대속론에서 대속을 받아야 할 진정한 죄는 구조악에 연원하고 있다. 예수는 죄의 대속자가 아니라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죄, 즉 구조악에 대한 항쟁자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로 보아 우리는 역사의 예수의 실상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석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송기득 교수는 안병무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고 '예수교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측)

자유주의적이라는 여러 증거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측)이 자유주의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몇 가지 증거들을 열거해보자.

첫째, 예장 통합측 장로회신학대학 학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였던 이종성 박사가 신정통주의자라는 것은 한국교계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신정통주의'란 자유주의 신학의 한 부류로서 칼 바르트, C. H. 다드,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사상에서 보듯이,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 파이다.

둘째, 장로회신학대학이 성경 무오성(無誤性)과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을 부정하고 자유주의적인 문서설을 용납하고 이사야 40장 이하를 이사야가 쓴 것이 아니고 후대의 어떤 익명의 저자가 썼다는 사상을 용납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셋째, 1980년 서울 사당동 총신대학 부근에서 개척교회를 한 통합측 목사는 학교에서 배운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적 설교를 요구하는 현실 목회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넷째, 예장 합동측 신학연구원에서 3년 간 공부하다가 통합측으로 옮겨 수년 간 공부했던 한 친구는 "과연 예장 통합측 신학교의 분위기가 다르기는 다르더라. 그러나 구약교수들 중 한 명은 보수적이며 문서설을 반대하고 있다. 나머지 교수들은 '고뇌하는 신학자들'이라고 보인다"고 말하였다.

다섯째, 예장 통합측 지도자들은 보수적이라는 인물까지도 배교적인 WCC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 교단의 분별력과 입장을 나타낸다.

여섯째, 예장 합동측 기관지 기독신보의 주필이었던 채기은 목사는 “필자가 진단하기에는 본 교단(예장 합동)을 비롯하여 고려측, 성경장로회측, 호헌파, 재건파, 복구파, 중립파는 전적으로 보수주의 신학편에 들 수 있으며, 통합측은 반반[半半]으로 나뉘어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기장측은 절대 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고 증거하였다.293)

일곱째, 1984년 장로회신학대학의 이동렬 씨는 "한국교회와 신정통주의"라는 그의 석사논문의 결론에서 "우리 입장은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 중이다"라고 말하였다.

여덟째, 1994년 통합측 총회는 701대 612로 여성안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통합측 총회는 사도적 교훈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는(딤전 2:11-14; 고전 14:34-38)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오류와 악을 택하였다.

이상의 사실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 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물론 예장 통합측이 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은 그 교단에 속한 모든 목사들과 성도들이 자유주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교단에도 성경을 믿는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교단의 목사 양성원인 장로회신학대학이 자유주의적이며 그 교단의 지도자들의 다수가 자유주의적이라면, 그 교단은 자유주의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예장 통합측은 확실히 건전한 교단이 아니다.

 

 이종성 박사

예장 통합측 장로회신학대학 학장이었고 기독교 학술원장이었던 이종성 박사는 2001년 2월 15일 제22회 학술세미나에서 성경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말했다.294) 거기에서 그는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글자) 영감과 성경 내용에 오류가 없다는 견해를 근본주의자들의 견해라고 배격하고, 성경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신정통주의적 견해를 ‘복음적 성서관’이라고 표현하며 받아들인다. 또한 그는 성경을 우주와 인류 역사에 관한 기록으로 이해하는 보수 신학자들의 견해를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고 창세기는 우주 생성에 관한 과학적 기록서가 아니라고 했다. 그의 성경관은 예장 통합측의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잘 드러낸다.

 

 김명용 교수

장로회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인 김명용은 1997년에 쓴 그의 저서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에서, 옛 정통주의가 주장했던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계몽주의와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비평학의 도전을 받아 붕괴된 옛시대의 사상이라고 한다.295)

그는 오늘날의 개혁교회의 신학은 바르트와 브룬너와 니이버와 몰트만 등의 신학의 거장들을 통해 세계교회를 이끄는 신학이라고 말한다. 그는 개혁신학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계통의 편협한 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말한다. 그는 차원 높은 신학의 전개를 위해 바르트 신학은 결코 해롭지 않다고 강변한다.296)

김 교수는 한국교회와 한국 신학에서 중심적 역할을 당담하고 있는 예장 통합측과 장신대는 보수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의 흐름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그는 장신대가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서주의를 가르치지 않으며 에큐메니칼적 신학을 지향하고 현대신학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신학이며 역사적 책임을 위해 노력하는 신학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1985년 장신대 교수회에서 발표한 장신대 신학 성명에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297)

또 그는 한국의 장로교회의 신학적 일치를 위한 방향은 우선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를 일소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신정통주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고 현대주의를 극복한 20세기의 종교개혁 신학의 부활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신학은 20세기의 현대주의에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상당 부분 실패한 개혁신학이라고 말한다.298)

 

   기타 인물들

하버드 대학교

1636년 목사 양성 학교로 설립된 미국의 하버드 대학은 일찍부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유니테리안[일위신론자]의 손에 넘어갔었다. 그러나 오늘날 하버드 대학교는 130억달러의 기금과 16억달러의 연간 수입을 가진 미국 고등교육의 우상이 되었다. 학교에 출석하는 18,000명의 학생들 가운데, 학부 학생들은 매년 수험료와 기타 경비로 무거운 32,000달러의 금액을 낸다.299) 낙태 찬성, 반(反)군국주의, 인종 편애, 과격한 남녀평등주의, 종교적 상대주의 등의 자유주의적 입장들은 캠퍼스에서 복음으로 간주된다. 천주교 신부가 신학부장인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부는 자유주의와 개방적 마음가짐, 다양성, 및 정치적 정확성 등을 자랑한다. 기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 편견은 하버드 대학교에 퍼져있다고 한다.300)

 

 마틴 루터 킹을 추앙함

전 미국연방수사국(FBI) 국장 제이 에드가 후버는 마틴 루터 킹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악한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킹은 미국에서 그를 기념하는 공휴일이 지정될 정도로 영예를 얻었고 천주교회에서는 신앙을 위한 순교자로 선포될 후보자까지 되었다.301)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 대주교는 1999년 12월 세계교회협의회 모임에서 마틴 루터 킹에게 찬사를 돌렸다. 그러나 크리스챤 뉴스 2000년 1월 3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킹이 공산당과의 의식적 협력자이었고 표절로 그의 철학박사 학위를 얻은 거짓말쟁이요 . . . 간음을 행하는 자이었고 . . . 미국의 적국에게 원조와 위안을 준 반역자라는 것 등은, 수많은 사실들에 의해 의심 없이 확증된다. . . . 그는 예수님의 참된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신학교 출신이며 역사적 기독교를 믿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친구에게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말했다. 마이클 다이슨은 그의 새로 쓴 책 나는 당신을 거기에서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참된 면모에서 위의 사실들 중의 일부를 확증하고[표절자, 간음자 등] 킹이 죽을 무렵에는 미국의 불평등의 해답이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에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302)

 

'위대한' 설교자들 목록

설교(Preaching)지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을 열거하면서 빌리 그레이엄과 마틴 루터 킹을 처음 10명 중에 두었다.303) 그 목록은 또한 스코틀랜드 설교자 제임스 스튜어트, 죠지 버트릭, 해리 에머슨 포스딕, G. 캠벨 모건, 윌리엄 생스터, 죤 R. W. 스토트, 마틴 로이드-죤즈, 및 클레어런스 매카트니 등을 포함한다. 두 번째 10명은 레슬리 위더헤드, 죠지 트루에트, R. G. 리, 노만 빈센트 피일, 피터 마솰, E. 스탠리 죤스,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랠프 사크맨, W. A. 크리스웰, 및 가드너 테일러이었다.304) 그러나 마틴 루터 킹, 해리 에머슨 포스딕, 노만 빈센트 피일 등은 정통 기독교와 거리가 먼 사상을 가진 자들이다.

 

 애니 래못(Anne Lamott)

애니 래못은 자신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며 좌파 평화주의자라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을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견해들에서 자유주의적’이라고 말하며 “나는 극단적 우파 기독교의 지옥불과 유황불 정죄와 부끄러운 용어에 움츠리며 반발할(recoil) 뿐이다”라고 한다.305) 2003년 1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철저한 자유주의자’라고 소개된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의 인격성이 임신 때에 시작하지 않는다고 믿는다.306)

 

 허 혁 교수

그러므로 저는 성서에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부활의 보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 . 이것을 학자들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 . . 그것은 신앙을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지요. . . . 저는 내가 믿는다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307)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말하지 않고 부활 신앙 사건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긍정을 보류하는 회의적 태도일 뿐이다.

 

 

5. 윤리적 부패

  낙태와 악락사308)

오늘날 낙태는 현대사회의 매우 크고 심각한 죄악이다.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에서 1980년 합법적으로 행해진 낙태는 150만 명이고 그 중 79%는 미혼자에 의한 것이고 30%는 청소년에 의한 것이며 심지어 1%는 15세 이하의 경우이었다. 한국도 낙태가 비공식 통계로 한 해 100만 건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309) 낙태가 합법화된 1973년 이후 1985년까지 미국에서 낙태된 어린 아기들의 수는 약 1,500만 명이라고 하며 또 세계적으로는 연간 5,500만 명이라고 하니 심히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310)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1986년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는 낙태에 관하여 281대 266으로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pro-choice)는 입장을 재선언했다.311)

 

 미 연합그리스도교회(UCC)

미 연합그리스도교회는 공식적으로 낙태를 지지한다. 또 그 교단은 1991년에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고 자살을 허용하는 최초의 대교단이 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12)

 

 미 연합감리교회(UMC)

1972년 미 연합감리교회의 총회는 그 해에 발표한 사회신조에서 낙태가 범죄가 아니고 여성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것을 범죄 목록에서 제거하였다.313)

 

 피터 싱어(Peter Singer)

1999년 미국 프린스톤 대학교 생명 윤리학 분야의 교수직에 임명된 피터 싱어314)에 의하면, 갓난아기는 돼지와 소와 개보다 더 큰 생명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는 척추장애나 혈우병(血友病, hemophilia) 등을 가진 갓난아기들을 죽일 권리를 환자들이나 의사들에게 주기를 원한다.315)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9년 10월호에 의하면 그는, “불구가 된 어린 아기를 죽이는 것은 한 인격을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동등하지 않다”고 말했다.316)

 

   동성애317)

동성애(同性愛)는 동성간의 성행위를 말한다. 옛날부터 동성애의 죄악이 있어왔지만, 오늘날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들에서 동성애를 용납하는 사례들은 현대교회의 매우 심각한 변질과 타락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

1993년 11월, 세계의 300개 교단 이상을 대표하는 세계교회협의회는 2,000명의 여성들이 참석한,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리-이메이징(Re-imaging) 대회를 후원하였다. 그 대회의 연사들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고, 대략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 무리는 그들의 동성애를 자축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기립 박수를 받았다. 한 분과토론회는 ‘교회 내에서의 여성 동성애자들의 예언적 목소리’라는 이름을 가졌다.318)

 

 미국 교회협의회(NCC) 및 주(州)교회협의회

미국의 대표적 동성애 교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 세계협회의 지도자 그윈 깃보드(Gwynne Guidbord) 박사는 최근의 미국 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연사로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회집된 교회협의회 대표들 중 최소한 절반은 서서 그 여자에게 갈채를 보내었다.319) 그 여자는 실제로 동성애에 대한 반대가 젊은이들을 매춘, 마약, 알코홀 남용에 빠지도록 강요한다고 비난했다. 미국 교회협의회 회장 크레익 앤더슨을 포함하여 일부 교회협의회 지도자들은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 세계협회를 회원 교단으로 받아들이자는 쪽이다.320)

동성애 교단인 세계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협회의 에큐메니칼 임원인 그윈 깃보드는 미국 캘리포니아 교회협의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321)

미국 콜로라도 교회협의회는 동성애적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 세계협의회(UFMCC)를 받아들였다. 이 교단을 받아들인 주(州) 협의회는 다섯 개라고 한다. UFMCC를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16년 간 그 협의회의 회원이었던 덴버 천주교 대교구는 헌금을 중지했고 정회원 신분에서 참관인 신분으로 자신을 바꾸었다. UFMCC 에큐메니칼 사무관인 그윈 깃보드는, “천주교회가 에큐메니칼 테이블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은 슬픈 일”이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경계선들을 초월하셨고 만일 그러한 종류의 용납이 예수께 선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내게도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322) 그 천주교 대교구는 그 협의회에 두 번째로 큰 헌금 후원자로서 매년 13,000불 이상을 헌금하였었다. 콜로라도 교회협의회의 다른 회원 교단들은 미국 침례교회, 미합중국 장로교회, 연합 그리스도교회, 그리스도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 미 복음주의 루터교회, 그리고 연합감리교회이다.323)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1993년 11월, 2,000명의 여성들이 참석한,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리-이메이징(Re-imaging) 대회의 연사들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고, 대략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 무리는 그들의 동성애를 자축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기립 박수를 받았다. 미합중국 장로교회에서 스스로 동성애 여목회자로 공언한 재인 스파(Jane Spahr)는, 그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그의 동성애 파트너인 “코니(Coni)와 사랑함”으로써 지식을 얻었다고 주장했다.324)

1997년 수년간의 논쟁 끝에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는 모든 미혼 목사, 집사, 및 장로가 독신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근소한 표 차이로 통과시켰다. 이것은, 물론 성적으로 순결치 못한 모든 독신 직분자들을 당황케 할 것이지만, 특히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다.325)

1999년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제인 스파(Jane Spahr)를 올 해의 ‘신앙의 여성’ 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미합중국 장로교회를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다.326) 그는 동성애 장로교인의 교회직분 임명을 위한 한 단체를 섬겼다.327) 상을 받을 다른 두 여자는 예일대학 교수 동성연애자 레티 럿셀과, 은퇴한 한 프린스턴대학 교수이었다.328)

1999년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는 동성애자에 대한 안수금지를 규정한 ‘정절과 순결’ 헌법조항 삭제를 주장하는 교회직제 목회위원회의 ‘다수파’ 보고서 대신, 동성애자에 대한 목사 장로 집사 안수 여부를 놓고 2년간 연구와 토론을 하자는 ‘소수파’ 보고서를 지지했다. 총회 총대들 중 다수파 지지 총대는 198명(38%)이었고 소수파 지지 총대는 319명(61%)이었다.329)

미합중국 장로교회 동북부 대회 상설재판국은 1999년 11월 22일 판결하기를, 지교회 당회들은 목사들이 동성의 짝들을 위한 ‘거룩한 결합’ 의식을--만일 그들이 이 ‘결합’이 결혼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면--집례하고 그런 의식을 위해 교회 건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고 하였다. 허드슨강 노회에 대한 고소 사건에서, 그 상설 재판국은 동성 결합들은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이 교회 헌법에 의해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330)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 상설재판국은 2000년 5월 동북부 대회 상설재판국의 판결에 불복해 올라온 상소 사건을 다루면서 목사의 동성애자 ‘결합식’(union) 주례를 인정하며 동성애자 목사후보생을 인정하는 대회 상설재판국의 판결을 정당하다고 판시하였다.331)

2000년 6월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는 동성애 금지 조항을 명시한 헌법수정안을 전체 회의에서 한 시간의 격론 끝에 268대 251의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 수정안은 총회 산하 173개 노회의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효력을 가진다.332) 그러나 이 결정은 여전히 슬픈 일이다. “한 시간의 격론 끝에 268대 251로” 통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2001년 3월,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동성 커플을 위한 축복 의식을 금하는 헌의안을 기각하였고, 성직자들은 그런 의식들이 결혼식과 혼동되지 않는 한 그것들을 자유로이 집례할 수 있게 되었다.333)

2001년 6월,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는 동성애 성직자 안수에 관한 금지조항의 제거를 추천하도록 317 대 208로 표결하였다. 비록 이 결의안이 전국 노회 투표에서 부결되었지만.334)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는 2003년 5월 24일 가장 자유적인 후보자를 새 총회장으로 뽑았다. 투표자의 53퍼센트 득표로 승리한 그는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의 목사인 수잔 앤드류스이었다. 앤드류스는 그 자유주의적 교단이 현재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금하고 있는 현행적 동성애자들의 안수를 지지한다.335)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나티의 마운트 어번 장로교회의 스티븐 반 퀴켄 목사는 그의 교단에 의해 책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결혼식을 또 주례하였다. 2003년 4월 21일에는 지역 교회재판국이 이전의 동성애 결혼식 주례에 대해 교단의 법을 불순종한 잘못이 있다고 판결했으나 그 벌은 단순한 공적인 책망뿐이었다.336)

 

 미 연합감리교회(UMC)

1979년도의 한 책에서, (미 연합감리교회 소속) 남부 감리교 대학교의 빅터 폴 퍼니쉬(Victor Paul Furnish)는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정말 동성애를 정죄했는지 의문(疑問)하였다.337)

1982년, 미 연합감리교회에서 출판된 ‘인간의 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동성애적 남자들과 여자들이 교회 목회나 지도적 직분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진술하였다. 그 보고서는 주장하기를, “많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동성애적이며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완전한 그리스도인 제자의 생활을 하고 상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338)

1995년 11월, 워싱턴 D.C.에 있는 미 연합감리교단 소속 파운드리 감리교회에서 열린 한 공개토론회에서 연사들은 사도 바울을 “자신을 미워하는 동성애자”로 묘사하였고, 동성애 결혼을 칭찬하였고, 또 다윗 왕이 양성애자(兩性愛者)이었을지 모르며 예수 그리스도가 동성애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였다. 그 대회에서는 동성애적 무지개 상징을 보이는 깃발을 앞세운 ‘성직자 행렬’이 있었다.339)

1997년 9월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제일 연합감리교회의 지미 크리치(Jimmy Creech) 목사는 그의 교인 중 두 명의 여자 동성애자들을 위해 결혼식을 거행했다.340)

1998년 1월, 미국 연합감리교회 소속 목회자들 일부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개항으로 된 이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로, 그들은 성경, 전통, 이성 및 경험에 의지하여 ‘동성애라는 관행’ 자체가 기독교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또 그들은 동성 커플 계약을 위해 예전적(예를 들어, 결혼식 거행 등) 도움을 적절히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안수받을 자격이 충분한 남녀 동성애자들에게 안수가 주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성명서에 서명한 자들 가운데는 남감리대 빅터 폴 휘니쉬 교수, 사회행동을 위한 감리교 연합 총무 조지 맥클레인 등이 있다.341)

1998년, 미국 연합감리교회 재판국은 동성애 결혼식을 집례한 일로 고소된 지미 크리치 목사의 재판에서 13명 배심원 중 8명은 크리치 목사의 유죄를 인정했으나 최소한 9명이 유죄를 인정해야 유죄평결을 내릴 수 있는 교회법에 따라 크리치 목사의 장정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평결을 내렸다. 보수적 목사들의 심한 반발이 있었지만, 크리치 목사를 지지하는 ‘비전을 선포하는 모임’이라는 단체의 목회자 92명은 동성애자 결혼식 집례를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또 ‘화해하는 교회’라는 단체는 3월 16일 ‘지미 크리치 목사 재판의 평결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며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342)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글라이드 기념 연합감리교회의 목사 시실 윌리암즈(Cecil Williams)는 30년 이상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결합 언약 의식을 집행해 왔다고 말했다.343)

1998년 미 연합감리교회의 최고 법정에 의한 한 구속력 있는 판결은 동성(同性)의 결합들이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에 의해 연합감리교회들 안에서 행해질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1998년 초 240명의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이 그들이 요청을 받는다면 동성의 결합들을 집례하겠다고 말하는 성명서들에 서명하였다고 알려졌다.344)

1999년 1월 16일, 한 여성 동성애 부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1500명의 사람들 앞에서 95명의 연합감리교단 목사들에 의해서 ‘축복’을 받았다.345) 그들은 그 의식을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동성애자들의 결합에 대한 그들 교단의 금지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사용하였다.346)

2000년, 클리브랜드에서 모인 총회의 총대들은 동성애가 “기독교 교훈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을 628 대 337의 표결로 재확인하였다. 또 ‘현행적 동성애자들’이 목사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방침을 유지하기 위한 640 대 317의 표결이 있었고, 또 성직자가 동성 결혼 예식들을 집례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표결도 하였다.347) 그러나 슬프게도 아직도 많은 감리교회 목사들이 동성애를 찬성하고 심지어 동성애 목사를 용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네브라스카 주의 마크 케믈링은 2000년 6월 3일 오마하 교회에서 두 남성을 위한 결합식을 집례하였고, 메인주 클린톤에 있는 브라운 기념 연합감리교회 목사 수전 데븐포트는 1999년에 동성애자 결합식을 집례하였다.348)

 

 미 감독교회(ECA)=성공회

1987년, 미국 감독교회의 뉴저지 주 뉴워크 시 감독 교구는 동성애적 결혼들의 인정을 요청하였다.349) 같은 해 11월, 매사추세츠 감독 교구의 ‘성직자’ 대표들은 결혼식과 비슷한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축복 의식을 개발하기로 한 결의안을 승인하였다.350)

1988년, 미 감독교회 감독 죤 쉘비 스퐁은 죄 가운데 삶: 한 감독이 인간의 성(性)을 다시 생각함(Living in Sin: A Bishop Rethinks Human Sexuality)이라는 책 198쪽에서 ‘나는 남녀 동성연애자들의 짝들에 대한 교회의 축복은 불가피하고 옳으며 분명한 선(善)이라고 간주한다’고 썼다.351)

1993년 국내 및 국제 종교 보도(NIRR)에 의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감독교인들의 75퍼센트는 현행적 동성애자들이 여전히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352)

1997년 7월 미국 감독교회 대회는 동성애자들에게 사죄하였다. 그들은 동성 결합들의 축복을 연구하고, 가사의 일에 관여하는 배우자들에게도 의료보험 혜택을 확장하기로 가결했고, 동성애 성직자를 금지하려는 시도들을 부결시켰고, 동성애에 동정적인 자유주의적 새 감독회장을 선출하였다. 그들은 7명의 여성 감독들과 약 1,500명의 여성 신부들을 가지고 있다.353)

미국 감독교회의 에드먼드 브라우닝은 감독회장으로서의 마지막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 국교회 [전통을 받은] 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과 전통과 이성을 통하여 분별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우리의 영국 국교회 전통 대신에 성경 문자주의를 받아들이기를 택하였다. 역사는, 성경 문자주의가 노예 제도의 실천 뿐만 아니라 또한 여성의 인격 훼손을 지지하는데 사용되었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노예 제도를 지나서 움직여 왔고 여성 압박을 지나서 움직이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남녀 동성애적 형제들과 자매들에 대한 선입견들을 창조하는 성경의 문자주의적 해석의 사용을 지나서 움직일 때이다.354)

새 감독회장 프랭크 그리스월드는 오래 전부터 남녀 동성애자들의 교회 생활에서의 완전한 참여에 대한 지지자이었다고 한다.355)

죤 스퐁 감독은 1990년 미국에서 최초로 공공연한 ‘남자 동성애자’ 신부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동성애자’를 벽에 가두고 여자들을 신부직에서 제외하는 교회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356) 그는 바울이 “심히 억제된, 자기 부정적 동성애자”이었고, 동정녀 탄생이 예수가 사생아임을 은닉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였었다.357)

2000년 2월 12일 미국 감독교회의 올림피아 교구의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로버트 테일러 주교를 수석주교로 임명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 의식에는 200명에 달하는 교구 대표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백 명의 성직자, 교회 대표들이 참석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 대주교도 참석했다.358)

2003년 6월 7일, 미국 뉴햄프셔주 관구는 미국의 감독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연애자 브이 진 로빈손(V. Gene Robinson)을 주교로 선출하였다. 진 로빈손은 13년 전, 그의 엄숙한 결혼 서약을 깨뜨리고 그의 아내와 두 어린 딸들을 버리고 그의 남자 파트너와 함께 이사했다. 2000년 4월 29일 워싱턴 D.C.에서의 동성애자 행진 전날에 한 연설에서 로빈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남자 동성애 무리로서 머리를 높이 들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이 가치 있다고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이 그렇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리를 이런 식으로 만드셨고 그것을 선하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가장 무모한 상상을 넘어서 사랑을 받는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성경책을 읽는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그것의 많은 증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너희는 가증한 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희는 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여러 가지 죄와 악’으로부터--그것은 우리가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구주에 대해 동등한 권리 주장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완전한 지체--‘완전한’ 지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오늘 여기에 온다.359)

미국 감독교회는, 동성애자인 진 로빈슨의 뉴햄프셔 보좌주교 서품식을 2003년 11월 2일 미국 더햄 뉴햄프셔 대학교 휘트모어 센터에서 거행하였다. 서품식은 54명의 주교를 포함한 3천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로빈슨은 공개적인 동성애자이다.360)

 

 미 연합그리스도교회(UCC)

1972년, 미 연합그리스도교회는 윌리암 존슨(William Johnson)의 안수를 허락했는데, 그는 대교단에 의해 안수받은 첫 번째의 공공연한 동성연애자이다.361)

1980년 미 연합그리스도교회는 현행적 남녀 동성애자들이 목사로 사역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대교단이 되었다.362) 또 1985년, 2년마다 모이는 미 연합그리스도교회 총회는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하였다.363)

1994년 미 연합그리스도교회 총회장 폴 쉐리(Paul Sherry)와 지도자들은 ‘남녀 동성애자들과 양성애(兩性愛, Bisexual)자들의 동등권과 해방을 위한 워싱턴 행진’에 참가하였다.364)

1998년 미 연합그리스도교회 총회장 폴 쉐리는 동성애의 용납을 지지하면서 쓴 목회서신이 6천 개의 모든 연합그리스도교회 강단들에서 읽혀지기를 원하였다.365)

 

 미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최근에 만든 인간의 성적 성격에 대한 사회적 진술의 한 초안은 동성애적 결합을 지지하고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최고 감독인 허버트 킬스트롬의 찬사를 받았다. 킬스트롬은 현행적 남녀 동성애자를 목사직에 안수하고 임직하기를 소원한다고 알려졌다.366)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소속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의 소망 루터교회의 톰 브록 목사는 여름 청년집회와 교단 총회에 대해 슬픔과 탄식의 심정으로 몇 가지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 중에, 그는 교단의 청년집회에 관해, ‘관심 있는 루터교인들’(Lutherans Concerned)이라는 단체가 거기에 한 홍보 책상을 두었음을 증거하였다. ‘관심 있는 루터교인들’은 동성애를 조장하는 단체다. 그는 한 방에서 그들의 전시물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이런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교단 집회에 보내서 실제 동성애자들에 의해 선전을 듣게 하는 것이 정당한가?”367)

2003년 5월 4일, 미국 미네소타주 성 바울시의 글로리아 데이 루터교회는 그 교회 목사들이 ‘동성 결합식’을 축복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표결하였다.368) 미네아폴리스시의 구속자 그리스도 루터교회는 2003년 5월 18일 여자 동성애자 메리 알빙을 목사로 임명하였다. 알빙은 그의 남편과 함께 다른 한 루터교회의 동사목사이었으나 5년 전 남편과 이혼했고 자신의 동성애를 공포했다. 그는 미네아폴리스시의 중앙 루터교회 교회음악인 제인 리엔과 동거하고 있다.369)

 

 미국침례교회(ABC)

1993년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리-이메이징 대회에서 연사들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했는데, 미국침례교회의 첫 번째 ‘드러난’ 여성 동성애 목사인 내디안 비숍(Nadean Bishop)은 성경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여성 동성애자이었다고 주장하였다.370)

미국침례교회의 1999년 대회는 캘리포니아주의 네 교회들을 친(親)동성애적 경향들 때문에 출교하기로 한 결정으로 야기된 심각한 내적 분열을 드러낸 가운데 마쳤다.371)

미국침례교회에는 동성애자들의 참여를 격려하는 ‘환영하고 찬성하는 침례교인 협회’에 속하는 37개 교회들이 있다.372) 최근에 제명된 네 교회 중의 하나의 목사인 에스더 하기스 목사는 몇 번의 항의 때문에 제명이 일시 유예상태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373)

 

 미국의 기타 교회들 및 인물들

1968년, 메트로폴리탄 공동체교회 세계협회라고 불리는 한 교단이 활동적 동성애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오늘날 그 교단은 330교회들에 30,000명 이상의 교인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1997년 2월, 주로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이 협회는 남캘리포니아 에큐메니칼 협의회에 가입되었다.374)

1980년 유니테리안 보편구원교회(UUC)는 공공연히 동성애적이고 양성애적인 인물들을 지도적 지위들에 채용하기로 결의했다. 또 1984년 유니테리안 보편구원교단(UUF)은 동성애자들 간의 결혼을 인정한 최초의 주요 교단이 되었다. 또 1996년 7월, 유니테리안 및 보편구원 회중협회(UUAC)는 동성 결혼의 합법적 인정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375)

1993년, 그리스도의 제자들 교회(The Disciples of Christ) 총회는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지지하는 목사를 대표자로 선출했다.376)

미국 남침례교 머서대학교 신약과 설교학 교수 폴 듀크는 1994년 협동침례교협의회(자유파)의 총회전 학교에서, “성경은 우리의 최종적 권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 . . 동성애는 성경의 주된 관심이 아니다. . . . 나는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 행위를 정죄한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377)

형제들 교단(the Church of the Brethren)의 매튜 제이 스머커는 그의 안수가 지방 교직자들에 의해 처음 연기된 후 2002년 6월 9일 안수를 받았다. 그가 공공연하게 남자동성애자이기 때문에, 6월 1일 미시간 교구 교회지도자들은 그 안수식을 진행하기 전에 교단으로부터의 추가적 지도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안수를 연기하는 표결을 하였다. 그러나 스머커의 지지자들은 그 표결은 교회 규칙 아래서 필요로 하는 3분의 2의 찬성을 얻지 못했으므로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임원회는 그 결정을 재고하였고 그 안수가 계속되기를 허용하도록 동의하였다. 스머커는 한 교회회보에서 “오늘은 매우 기쁘고 축하할 만한 놀라운 날이었다”고 말했다.378)

하버드 대학교 기념교회 동성애 목사 피터 고움즈는, 그 교회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하였다.379) 또 그는 레위기에서의 동성애 금지가 동성애자가 “본래 악하기” 때문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그것을 행하므로 그것이 의식적(儀式的)으로 불결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로마서 1:27에서 동성애 행위에 대한 바울의 비평이 “본성적으로” 동성애자인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고 이성애자(異性愛者)들에 의한 동성애 행위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바울이 동성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모두 그것의 타락한 이방적 표현이었다. 그는 그러한 무지 때문에 정죄될 수 없지만, 그의 무지가 우리 자신의 무지를 위한 변명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380)

하버드 대학교의 비교 종교 및 인디안학 교수 다이아나 에크는 1998년 7월 그의 동료 교수 도로시 어스틴과 함께 하버드의 로웰 기숙사 사감의 임무를 맡았다. 이 여성 동성애자 커플은 20년간 파트너이었다.381) 크리스챤 비이컨지 1988년 12월 1일자에 의하면, 에크는 1988년 이방 종교들과의 대화를 취급하는 세계교회협의회의 한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382)

 

 캐나다의 교회들

1988년, 캐나다 연합교회는 캐나다에서 동성애자의 목사 안수를 합법화한 최초의 교단이 되었다. 그 후, ‘남녀 동성애자들’을 교회 생활의 모든 방면에 환영하는 연합교회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383)

1992년 5월, 캐나다 연합교회의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회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팀 스티븐슨을 목사로 안수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상호간의 위탁의 진정한 표현들로서 동성간의 언약들의 타당성을 선언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종교뉴스서비스(RNS)는 캐나다 연합교회의 어떤 목사들은 동성애자들의 짝들을 위한 ‘언약’ 의식들을 집행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384)

1992년, 캐나다 연합교회의 마니토바와 노스웨스턴 온타리오 대회는 동성애자들의 짝들을 교회들 내에서 결혼시키는 것을 허락하도록 표결하였다. 사스카치완 대회도 앞으로 삼 년 동안 적어도 10개의 강단을 동성애자들에게 개방하기로 표결하였다.385)

2001년 1월, 캐나다의 토론토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에서 두 쌍의 동성 짝이 1,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합법적으로 결합식을 올렸다.386) 합법적 동성 ‘결혼식’이 행해진 것은 세계에서 처음이라고 한다.387)

캐나다 성공회 뉴웨스트민스터 관구는 2001년 6월 1일 캐나다 밴쿠버 카플리아노 대학에서 열린 대회에서 2,226명의 총대들 중 56.5퍼센트의 찬성으로 교회 안에서 동성애 결합을 축복할 것을 결의했다. 이 관구는 동성애 결합을 인정하는 캐나다의 첫 번째 관구가 되었다. 이 관구의 마이클 잉햄 주교는 동성애가 비성경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다고 주장해왔었다.388)

뱅쿠버의 성공회 주교 마이클 잉햄은 그의 교구들 중 여섯 개에게 동성 관계를 축복하는 의식을 행하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정의 선언은 세계의 성공회 지도자들이 그런 축복에 대해 반대한 그 다음날인 2003년 5월 28일에 나왔다. 잉햄은 “이것은 결혼식이 아니고, 동성(同性)의 인물들 간의 영속적이고 성실한 공약에 대한 축복이다”라고 말했다.389)

 

영국의 교회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현행적 동성애자들의 안수를 요청한 최고위급 성공회 교인이며 동성애자를 거절하는 것이 “거의 근본적 신성모독”이라고 경고했다.390) 투투는 말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가 계속 신뢰할 만한 단체가 되기 원한다면, 짐바붸 총회에서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391)

1997년 7월, 영국의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는 ‘실제적 동성애자들’을 그들이 청빙된 교회들의 목사로 받아들이기로 동의하였다.392)

1998년 8월, 램버스 회의에 참석한 전 세계 성공회 주교 대표들은 ‘동성애는 비성경적’이라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을 526 대 7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했다. 아프리카 출신 주교들이 발의한 이 결의안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맺어진 결혼관계 외의 성생활을 성경이 금지하고 있으며, 동성애자가 사제서품을 받을 수 없으며, 동성애 결합을 결혼으로 축복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393)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보수적 주교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감사하다. 그러나 세계 성공회 대표회의에 70명의 가증한 지도자들이 포용되어 있다!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 로원 윌리암즈는 한 때 드러나게 현재의 동성애자를 안수하였고 심지어 동성애 신부들이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독신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394) 영국 성공회 내의 한 복음주의 그룹은 최근에 윌리암즈에게 “교회의 모든 교인이 거룩한 결혼관계 밖의 성 관계를 금해야 한다는 교회의 공인된 교훈”을 확언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적절한 권징의 필요성”을 긍정하든지 아니면 캔터베리 대주교로서의 직책을 사퇴하라고 촉구했다.395) 윌리암즈는 거기에 대해 성 도덕은 “명확히 규정짓는 문제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또 그는 “교회의 다수파의 가르치는 바를 진술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윌리암즈는 동성애와 여성 안수 같은 논쟁적 문제들로 교회 내에서 투표하게 되면, 그는 그의 결정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이나 성공회의 역사적 신앙고백서들과 신경들보다 교회의 다수파가 믿는 바에 근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해 초에, 윌리암즈는 세계의 7천만 성공회 교인들의 영적, 도덕적 지도자의 역할을 시작할 것이다.396)

새로 취임한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에 대항하는 성직자들의 소요가 영국교회 내에서 일어났다. 보수주의자들은 그가 동성애에 대한 그의 자유주의적 견해들을 철회하든지 아니면 사임하라고 요청한다. 그는 동성애자간의 “공언된” 성 관계에 대해 동정적이다. 500명의 영국교회 성직자들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54퍼센트는 모든 현행적 동성애자의 안수를 인정치 않는다. 영국교회 성직자의 3분의 1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의심하고 2분의 1은 그의 동정녀탄생을 의심하거나 불신한다.397)

2003년 5월, 동성애자인 제프리 죤은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리딩이라는 도시의 주교로 임직되었다. 죤은 자신이 지금 ‘독신’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남자와 20년간 관계를 가졌다고 인정한다.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옥스포드의 주교 ‘은퇴한’ 리차드 해리스에게 임직을 받았다. 해리스는 하나님을 ‘어머니’ 같은 여성적 용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자이다. 그는 진화론을 믿고 창조론을 비난했다. 2003년 6월 17일, 16명의 성공회 주교들이 죤의 임직을 비난하는 서신을 발표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398)

 

 호주의 교회들

1996년, 남호주연합교회(Uniting Church in South Australia) 대회는 동성애자들을 지도적 직위들에 임명하는 것에 대한 연기 제안을 부결시켰다.399)

2003년 4월 호주의 더 웨스트 오스트랄리안지의 글에서, 존 셰퍼드 목사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의 교리가 역사적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의 월등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상징적 이야기이며 동성애를 죄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썼다.400)

2003년 7월 호주연합교회 총회401)는 이틀 동안의 격렬한 토론 후 총대 265명의 약 80퍼센트의 찬성으로 동성애자를 목사로 임직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402)

 

 6. 성경적 반박

그러면 이제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라는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확인해보자. 먼저 자유주의 신학의 요점들을 하나씩 열거하고 그 예들을 대표적 신학자들의 글들에서 들고 성경적으로 간략히 반박하는 순서로 정리해보자.

 

    1. 성경의 신빙성(信憑性)을 부정한다.

첫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빙성(信憑性)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403)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404)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이다.405)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공존(共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406)

또한,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한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하였다.407)

[가나의 기적 설화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408)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409)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410)

또한,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동일한 구속(救贖)의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뿐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전설(saga)이나, 창조와 자연 과정을 취급하는 신화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411)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의 신빙성을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이 신앙 속에는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다. 다음의 몇 성경구절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 페플레로포레메논)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certainty)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표적'(세메이온)이라는 말은 확증하는 표(sign, mark)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전했고 지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은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천국의 속성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2.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둘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예를 들어,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의] 외적인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412)

우리가 계시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진리는 아무 곳에서도 자존적(自存的),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413)

또한,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414)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을 신앙생활의 표준인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모든 개신교회들,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와 영국교회가 공통적으로 믿는 기본적 신념이다. 심지어 천주교회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다음 몇 개의 성경구절들은 이 신념을 뒷받침한다.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예수께서는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이 한마디 말씀으로 분명히 선언하셨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께서 친히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영감을 증거하셨는데, 성경의 축자적 영감은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증거한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쉼으로'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성경의 영감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의 신적 기원과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전해 들은 바]을 지키라." 이 말씀은 사도들의 권위 즉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요한계시록 22:18-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주께서는 신약 계시를 가감할 수 없는 신적 권위로 인치셨다.

 

      3.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셋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증인으로서의 역할에 있어서도, 또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행동에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글에서 실수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415)

또한,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하였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416)

나는 바울이 잘못이라고 때때로 생각하고 감히 그렇게 말해왔다, 비록 그가 말하는 바가 전체적으로는 나의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417)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의 신적 권위성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포함한다. 또 성경의 완전한 영감성이나 목적도 그것의 무오성을 포함한다. 몇 개의 중요한 성경구절들을 열거해보자.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이 말씀은 주 예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선언하신 것이다. 성경의 오류를 말하는 것은 성경의 일부분을 폐하는 것이며 그것은 주의 말씀과 반대된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께서는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글자적), 아니, 축획적(逐劃的) 영감을 증거하셨다.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을 부정하는 것이다.

시편 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성경의 완전성과 그 고결한 목적은 성경이 오류 있는 책이라는 생각에 맞지 않고 오직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에만 맞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성경이 불확실하고 오류투성이의 책이라면 이 고결하고 중대한 목적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4.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넷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는 그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 이야기들에서 순수한 전설(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418)

[바르트는 사가(saga)에 대해 설명하기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하였다.419)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같은 개념이다.]

또한,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비록 바울에게는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라고 말한다.420)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도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라고 말한다.421)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라고 말한다.422)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겠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믿는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423)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이 흙 한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설화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의미 있을 뿐이다.424)

또한,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모든 피조물의 미래가 보편적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현재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저의 미래이었고 선사(先史)시대의 도마뱀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 최초의 물질과정의 미래이었다.425)

 

 <성경적 반박>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내용이 아닌가. 창조를 부정하면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 몇 개의 기본적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천지 창조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교리의 첫 번째 지식이다. 천지 창조를 믿지 못한다면 성경의 나머지 중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5.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을 부정한다.

다섯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하나님을 가장 높은 이상적(理想的) 인격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 일관하지 않다”고 말한다.426)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427)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428)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혹은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429)

 

 <성경적 반박>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은 성경의 매우 기본적인 내용이다.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홍수 심판(창 6-8장)이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창 19장)은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의 충분한 증거다.

다섯 장으로 된 예레미야 애가서에는 '진노'라는 말이 14회나 나온다.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밝히 말한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 .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나 1:2-3, 6).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쳤다.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로마서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한다.

여섯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곧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말한다.430)

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적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인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救贖)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온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영지주의적(Gnostic, 靈知主義的)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431)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 sensical) 말이다”라고 말한다.432)

 

 <성경적 반박>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 사실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육신하지 않은 예수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이다. 요한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이서 7, "이는 미혹하는[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7.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일곱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433)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도 말하기를,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하고,434) 또 그의 다른 책에서도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이다”라고 말한다.435)

불트만(Rudolf Bultmann)도,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를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436)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은 그 계시적 사건의 근본적 요소, 즉 예수께서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라고 말하며,437) 또 “신학은 예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438)

 

 <성경적 반박>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자세하고 확실하게 증거한다(마 1:18-25).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0절,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5절,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성경을 믿는 자는 이 증언들을 부정할 수 없다.

누가복음도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밝히 증거한다(눅 1:26-38). 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7절, "이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원문직역).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믿음을 판별하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은 그의 신성(神性)과 연관된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 사상이다. 예수께서는 당시 부활이나 천사나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마 22:29).

 

    8.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여덟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에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나 초자연적 기적들을 의심하는 성경의 비평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다. 몇 가지 예들만 들어보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motif),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라고 한다.439)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을 따를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440)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발생했을 것이다.441)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 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에서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에서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442)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전반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고 한다.443)

 

 <성경적 반박>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사두개인들처럼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지적하셨다(마 22:29).

주 예수의 기적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너희도 아는 바에,' '너희 가운데서,' '너희 앞에서'라는 말씀들은 예수님의 기적들이 어떻게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잘 증거한다.

제자들은 주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에 대한 목격자요 증인이었다. 사도행전 10:38-3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우리가 성경의 신빙성과 신적 권위를 믿는다면(요 20:30-31; 21: 24), 우리는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모든 내용을 다 믿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진실한 증인들에 의해 증거된 내용들이다.

 

      9.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아홉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형벌적 대속’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이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가라앉힘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고 말한다.444)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더욱 사악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한다.445)

불트만(Rudolf Bultmann)도 분명하게 그러나 불신앙적이게 대속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부정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영지주의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446)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는 ① 속상 (贖償; expiation), ② 구속(救贖, redemption), ③ 유화(宥和, 진노를 가라앉힘; propitiation), ④ 화목(reconciliation) 등의 용어에서 나타나며, 그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셔서 택함받은 자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겼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진리를 증거하는 성경의 많은 구절들 중에 다음 몇 구절들은 아마 대표적인 것들일 것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린도후서 5:14, 21,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12,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에게서 유전된 헛된 행실로부터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열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우리가 ‘부활의 역사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자유주의자들도 부활을 믿는다고 언어적 유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부활은 역사적으로 ‘빈 무덤’을 만든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육체적 부활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447)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은 아니다.448)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449)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 신화(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450)

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451)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452)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453)

신들과 반신(半神)들의 부활은 익히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순간에 . . . 부활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야가 된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하였다.454)

역사적 연구는, [부활 상징에서]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455)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456)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제자들 자신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457)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하였다(행 1:3).458)

처음 보기에는, 부활하신 주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에 대한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459)

 

 <성경적 반박>

그러나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해 자세하고 충분한 증거들을 제공한다. 또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보이셨다고 말한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하다니 성경을 거꾸로 읽는 자들이다!

또 그 외에도 성경에서 몇 개의 중요한 구절들을 들어보자.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본적 신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구원받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특히,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임을 증거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15:3-4). 또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의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든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5:12). 또 그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今生)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한다(15:19).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의 진리와 관련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부활의 역사성, 사실성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승천의 역사성과 사실성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 그의 재림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1. 보편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열한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보편구원론적 경향을 띤다. 보편구원론이란 신자나 불신자나 결국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는 이단적 사상이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460)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해 모든 인간이, 심지어 가장 쓸데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형제이며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런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461)

씨 에취 다드(C. H. Dodd)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462)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면 내적 필요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463)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도 비슷한 사상을 보인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기독교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해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464)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465)

우리는 모든 구원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에는 전 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 원리에 따르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수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이며 집중(concentration, 선택)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extra-biblical)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한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466)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는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러나 그를 통해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해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생명은 이미 예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할 것이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467)

창조적 사랑은 자유에서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 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468)

물론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특히 죽음에서 예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469)

 

 <성경적 반박>

그러나 보편구원론은 명백히 비성경적 이단 사상이다.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이다. 우리는 성경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궁극적 상태와 처소가 언급되어 있다. 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다(마 7:13-14). 또 어떤 이가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셨다(눅 13:23-24). 최종적으로 멸망할 자들이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는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또 요한계시록은 회개치 않은 악인들은 장차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을 밝히 증거한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20:15),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12. 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

열두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 사상의 유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470)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不滅性)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471)

불멸성(不滅性)이라는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기독교는 그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 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472)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한다.473)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밝히 증거한다. 사람의 영혼의 불멸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묘사이다. 성경은 사람의 죽음을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으로 묘사한다(전 3:20-21; 12:7). 또 성경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고 묘사한다(창 15:15; 25:8). 이것은 육체적 죽음 후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증거한다.

둘째는,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관한 말씀이다. 시편 73:24은 성도가 죽은 후 영광 중에 영접될 것을 말한다. 주께서는 회개한 강도가 죽은 후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눅 23:43). 특히,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 문제에 대해 잘 증거한다. 16:22-23,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셋째는, 부활에 관한 말씀이다. 성경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의인들과 악인들의 부활을 믿는다고 증거하였다(행 24:15). 죽은 자들의 부활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다.

넷째는, 심판에 관한 말씀이다. 악인에 대한 심판은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1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부정한다.

열셋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474)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더욱 악하게 주장하기를, “기독교 교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한다.475)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476)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처럼 그[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였다.

요한에게는 예수의 부활, 오순절, 및 예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477)

 

 <성경적 반박>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복된 소망의 진리이다.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주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재림에 대해 밝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명백히 증거하였고,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 그는 매 장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후서 1:7-8,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사도 베드로는 말세에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였다. 베드로후서 3:3-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사도 요한은 주 예수의 재림과 그 전에 있을 사건들을 예언한 책을 저술하였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또 요한은 자신의 재림을 증거하신 주의 말씀에 간절히 화답하는 말로 그 책을 마쳤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도신경에 고백된 대로 모든 정통적 기독교회가 고백하는 성경적 진리요 복된 소망이다. 주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한 이단이다.


      14.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한다.

열넷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물론 몸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고 말한다.478)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함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의 부활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에 감춰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479)

 

 <성경적 반박>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은 성경이 말하는 복된 소망이다. 의인들은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며 악인들은 부활하여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또 그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을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책망하셨다(마 22:29).

사도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었다.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논증하였다. 고린도전서 15:12-13, 51-5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15.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열다섯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인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480)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定罪)’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말은 신학 용어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결코 잘려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481)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482)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옥의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독특한 특징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결정적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제외되는 것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부적당한,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483)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 밝히 증거한다. 주께서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분명하게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3:39-40,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지옥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교리이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특히 마가복음 9:43-48에서 그는 지옥에 대해 밝히 증거하셨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3절). 그 외에 그는 마태복음 25:41, 46에서도 '영영한 불' '영벌'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아무도 주께서 말씀하신 지옥 교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해설하면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증거하였다. 로마서 2:5-6, 16,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또 그는 데살로니가후서 1:9에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 대해 증거하였다. 히브리서 6:1-2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독교의 초보적 교훈에 속한 것으로 말하며 그것을 수정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요한계시록 20:11-15은 마지막 대심판에 대해 증거하며, 또 요한계시록 21:8은 악한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할 것을 증거하였다. 마지막 심판과 지옥에 대한 교리는 참으로 두려운 교리이지만, 분명히 성경적 교리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인쳐진 교리이다. 이 교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은 분명히 이단이다.

 

      16. 성경이 윤리의 규범임을 부정한다.

열여섯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이 윤리의 규범임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에 내재한 명령대로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해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484)

선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法典),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게 있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485)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생활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486)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된 보편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487)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하고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은 모든 개신교회의 기본적, 공통적 신념이다. 모세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성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확무오한 규범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의 기본적, 공통적 신념이다. 이것이 신구약성경을 사람들에게, 특히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주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8-19). 그는 계명이 우리의 행위 기준이 됨을 증거하셨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말했다(딤후 3:16-17). 또 그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지키라"(원문 직역)고 교회에 편지하였다(살후 2:15). 그러므로 신구약성경의 윤리적 규범성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히 이단이다.

 

      17. 낙태와 안락사를 용납한다.

열일곱째로,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는 교회들은 낙태와 안락사를 용납한다. 그것은 신학적 변질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1972년 미 연합감리교회(UMC)는 총회에서 발표한 사회신조를 통해 낙태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고 여성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것을 범죄 목록에서 제거하였다.488)

미 연합그리스도교회(UCC)는 공식적으로 낙태를 지지한다. 또 그 교단은 1991년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고 자살을 허용하는 최초의 대교단이 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489)

1986년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총회는 낙태에 관하여 281대 266으로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pro-choice)는 입장을 재선언했다.490)

 

<성경적 반박>

그러나 낙태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하는 죄, 즉 살인죄이다. 출산 이전의 인간 태아는 인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 태아는 ‘아이’라고 불린다.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브레포스 βρέφος, child)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2) 또 태아를 가리킬 때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예레미야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491) (3)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출생하기 전에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다. 갈라디아서 1:15,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4) 특히, 출애굽기 21:22-25은 명백히 낙태가 살인임을 증거한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 . 갚을지니라.

본문에서 ‘낙태케 하였다’는 원어(웨야체우 옐라데하)는 ‘그 여자의 아이들이 나온다’는 뜻이다(KJV). 이것은 유산(流産) (NASB)이 아니고 조산(早産)(NIV)을 의미한다. 낙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히브리어는 쉭켈 (유산[流産]하다)과 네펠 (유산, 낙태)이다. 그러므로 ‘다른 해가 없으면’이라는 구절은 엄마에게나 아기에게나 다 적용된다.492) 다시 말해, 만일 조산된 아기가 죽었으면 살인죄가 적용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태아는 인간 생명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낙태는 분명히 살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의학적으로도, 인간 생명이 임신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의학자들의 일반적 신념이다.493) 유전학적으로도, 수정란은 정상적 인간의 특징을 가진다.494)

그러므로 낙태는 성경적으로나 의학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태아 살해의 죄악이다. 시작된 생명을 죽일 권한은 어머니나 의사나 누구에게도 없다. 낙태는 살인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낙태를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잘못된 일이며 배교의 증거이다.

 

      18. 동성애를 용납한다.

열여덟째로,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는 교회들은 동성애를 용납한다. 이것도 신학적 변질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1968년, 미국에서 메트로폴리탄 공동체교회 세계협회라고 불리는 한 교단이 활동적 동성애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오늘날 그 교단은 330교회들에 30,000명 이상의 교인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997년 2월, 주로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이 협회는 남캘리포니아 에큐메니칼 협의회에 가입되었다.495)

1972년, 미 연합그리스도교회는 윌리암 존슨(William Johnson)의 안수를 허락했는데, 그는 대교단에 의해 안수받은 첫 번째의 공공연한 동성애자이다.496)

1980년 유니테리안 보편구원교회(UUC)는 공공연히 동성애적이고 양성애적인 인물들을 지도적 지위들에 채용하기로 결의했다.497)

1980년 미 연합그리스도교회는 현행적 남녀 동성애자들이 목사로 사역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대교단이 되었다.498)

1984년 유니테리안 보편구원교단(UUF)은 동성애자들 간의 결혼을 인정한 최초의 주요 교단이 되었다.499)

1985년, 2년마다 모이는 미 연합그리스도교회 총회는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하였다.500)

1988년, 캐나다 연합교회는 캐나다에서 동성애자의 목사 안수를 합법화한 최초의 교단이 되었다.501)

1988년, 미 감독교회 감독 죤 쉘비 스퐁은 죄 가운데 삶이라는 책 (198쪽)에서 ‘나는 남녀 동성연애자들의 짝들에 대한 교회의 축복은 불가피하고 옳으며 분명한 선(善)이라고 간주한다’고 썼다.502)

죤 스퐁 감독은 1990년 미국에서 최초로 공공연한 ‘남자 동성애자’ 신부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503)

1992년 5월, 캐나다 연합교회의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회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팀 스티븐슨을 목사로 안수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상호간의 위탁의 진정한 표현들로서 동성간의 언약들의 타당성을 선언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504)

1993년, 그리스도의 제자들 교회(The Disciples of Christ) 총회는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지지하는 목사를 대표자로 선출했다.505)

1993년 국내 및 국제 종교 보도(NIRR)에 의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감독교인들의 75퍼센트는 현행적 동성애자들이 여전히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506)

1996년 7월, 유니테리안 및 보편구원 회중협회(UUAC)는 동성 결혼의 합법적 인정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507)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현행적 동성애자들의 안수를 요청한 최고위급 성공회 교인이며 동성애자를 거절하는 것이 “거의 근본적 신성모독”이라고 경고했다.508)

1997년 7월, 영국의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는 ‘실제적 동성애자들’을 그들이 청빙된 교회들의 목사로 받아들이기로 동의하였다.509)

1998년, 미 연합감리교회 재판국은 동성애 결혼식을 집례한 일로 고소된 지미 크리치 목사의 재판에서 13명 배심원 중 8명은 크리치 목사의 유죄를 인정했으나 최소한 9명이 유죄를 인정해야 유죄평결을 내릴 수 있는 교회법에 따라 크리치 목사의 장정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평결을 내렸다.510)

1998년 초, 240명의 연합감리교 목사들이 그들이 요청을 받는다면 동성의 결합들을 집례하겠다고 말하는 성명서들에 서명하였다.511)

1999년 1월 16일, 한 여성 동성애 부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1500명의 사람들 앞에서 95명의 연합감리교단 목사들에 의해서 ‘축복’을 받았다.512)

1999년, 미국 침례교회에는 동성애자들의 참여를 격려하는 ‘환영하고 찬성하는 침례교인 협회’에 속하는 37개 교회들이 있다.513)

2000년 2월 12일 미국 감독교회의 올림피아 교구의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로버트 테일러 주교를 수석주교로 임명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 의식에는 200명에 달하는 교구 대표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백 명의 성직자, 교회 대표들이 참석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 대주교도 참석했다.514)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 상설재판국은 2000년 5월 동북부 대회 상설재판국의 판결에 불복해 올라온 상소 사건을 다루면서 목사의 동성애자 ‘결합식’(union) 주례를 인정하며 동성애자 목사후보생을 인정하는 대회 상설재판국의 판결을 정당하다고 판시하였다.515)

2001년 1월, 캐나다의 토론토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에서 두 쌍의 동성 짝이 1,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합법적으로 결합식을 올렸다.516) 합법적 동성 ‘결혼식’이 행해진 것은 세계에서 처음이라고 한다.517)

2001년 3월,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동성 커플을 위한 축복 의식을 금하는 헌의안을 기각하였고, 성직자들은 그런 의식들이 결혼식과 혼동되지 않는 한 그것들을 자유로이 집례할 수 있게 되었다.518)

2001년, 동성애 교단인 세계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협회의 에큐메니칼 임원인 그윈 깃보드는 미국 캘리포니아 교회협의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519)

2001년, 미국 콜로라도 교회협의회는 동성애적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 세계협의회(UFMCC)를 받아들였다. 이 교단을 받아들인 주(州) 협의회는 다섯 개라고 한다.520)

캐나다 성공회 뉴웨스트민스터 관구는 2001년 6월 1일 밴쿠버 카플리아노 대학에서 열린 대회에서 2,226명의 총대들 중 56.5%의 찬성으로 교회 안에서 동성애 결합을 축복할 것을 결의했다. 이 관구는 동성애 결합을 인정하는 캐나다의 첫 번째 관구가 되었다.521)

2003년 5월 4일, 미국 미네소타주 성바울시의 글로리아 데이 루터교회는 그 교회 목사들이 ‘동성 결합식’을 축복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표결하였다.522)

2003년 6월 7일, 미국 뉴햄프셔주 관구는 미국의 감독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연애자 브이 진 로빈손(V. Gene Robinson)을 주교로 선출하였다.523) 2003년 11월 2일 동성애자 진 로빈손의 보좌주교 서품식이 미국 더햄 뉴햄프셔 대학교 휘트모어 센터에서 거행하였다. 서품식은 54명의 주교를 포함한 3천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되었다.524)

2003년 7월 호주연합교회 총회525)는 이틀 동안의 격렬한 토론 후 총대 265명의 약 80퍼센트의 찬성으로 동성애자를 목사로 임직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526)

 

 <성경적 반박>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 안에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은 현대교회의 배교의 한 증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죄로 여기신다. 그것은 다른 큰 죄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철저히 회개해야 할 죄이다.

성경에서 맨 처음 동성애를 말한 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이야기에서이다(창 19장). 소돔성의 사람들은 그 날 저녁에 롯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기를 원하였다. '상관한다'는 말(야다)은 성경에서 17번 이런 의미로 쓰였다(BDB). 사사 시대에도 소돔성의 일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기브아의 이야기이다(삿 19장).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거기 살던 노인의 집에 유숙하기 위해 들어온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며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말했다(삿 19:22). 그들이 동성애 관계를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큰 죄악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연합케 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위반하는 음란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다. 또 사사 시대에 심히 음란했던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 전체는 거의 전멸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었다.

율법은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행위, 즉 결혼 전 혹은 결혼 외의 성행위를 정죄하며, 특히 동성간 성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간주한다.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신명기 23:17,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美童, 카데쉬, 동성애자)이 있지 못할지니." 열왕 시대에도 남색(男色, 동성애)은 큰 죄악으로 정죄되었다(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동성애 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다. 레위기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큰 죄로 간주하며 그 죄를 짓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였다. 로마서 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매춘, 동성애),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디모데전서 1:10, (불법한 죄의 예들)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탐색하는 자'(말라코스)는 남색의 상대자를 가리키고,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테스)는 '남자 동성애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것은 신구약성경에서 너무나 명백하다.

또한 오늘날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 전염병(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이 많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야 한다. 1985년의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에이즈 환자 12,067명 중에 남성이 92%인데, 그 중 78%가 동성애자라고 한다.527) 유엔 에이즈 계획(UNAIDS)에 의하면, 2002년 7월 현재 에이즈 바이러스(HIV) 감염자수는 세계적으로 4천여만명이며, 향후 20년간 약 7천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528)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시대적 재앙이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동성애를 용납하는 것은 배교(背敎)의 한 증거이다. 참된 교회들은 이 죄로부터 성별되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과 교회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결론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1)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2)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3)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4) 자유주의 신학은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5)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을 부정한다. (6)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한다. (7)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부정한다. (8)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9)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10)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11) 자유주의 신학은 보편구원론적 경향, 즉 악인들의 멸망을 부정하는 경향을 가진다. (12) 자유주의 신학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한다. (13)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14) 자유주의 신학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한다. (15) 자유주의 신학은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16)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이 윤리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17) 자유주의 교회들은 낙태와 안락사를 용납한다. (18) 자유주의 교회들은 동성애를 용납한다.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점들을 대표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글들이나, 대표적 교단들과 목사들의 입장과 주장과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무서운 이단 사상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점에서 명백히 이단이다. 이런 사상이 이단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단이겠는가?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계 속에 깊숙이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먼저 부패되었고 미국의 교회들은 20세기 초에 그 뒤를 따랐다. 오늘날 전 세계의 역사적 대교단들의 대다수는 자유주의적인 교단이 되었거나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포용주의적 교단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를 비롯하여, 한국기독교침례회(기침), 기독교대한성결회(기성), 구세군 등은 적어도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교단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교회는 교리적으로 심히 배교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으로도 심히 부패되어 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가장 두려운 현대 사회의 죄악인 낙태와 안락사를 용납하며, 음란의 극단적 형태인 동성애까지 용납하고 있는 실정이다. 믿음은 행위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 바른 믿음은 반드시 거룩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구원의 목표는 단순히 지식의 새로움이 아니고 전인격적 새로움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교와 부패의 현상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가 성취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데살로니가후서 2:2,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고."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명백히 이단임을 바르게 인식하고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성경적인 교회는 자유주의자들을 제명 출교하고 그들과 교제치 말아야 하며, 그들을 용납하는 자들도 책망하고 그런 자들과의 교제도 삼가야 할 것이다. 성경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교훈하며(유 3), 이단들과 교제치 말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주

1)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2.

2) "Fundamentalism and Modernism: Two Religions," Christian Century, 3 January 1924, pp. 5-6.

3) Adolf von Harnack, What Is Christianity?, p. 159.

4) Ibid., pp. 21-22.

5) William E. Hordern, A Layman's Guide to Protestant Theology, rev. and expanded ed., p. 74.

6) Machen, p. 6.

7) Church Dogmatics, I. i. pp. 122-123.

8) Ibid., p. 124.

9) Ibid., p. 127.

10)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pp. 66-67.

11) Church Dogmatics, I. ii. pp. 528-529

12) Ibid., p. 533.

13)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14)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15) Church Dogmatics, III. i. p. 81.

16) Christ and Adam, pp. 54-55.

17) The Humanity of God, p. 49.

18) Ibid., p. 51.

19) Church Dogmatics, III. i. p. 42.

20) Ibid., p. 81.

21) Ibid., IV, i, p. 508.

22) The Epistle to the Romans, p. 171.

23) Ibid., pp. 29-30.

24) Dogmatics in Outline, p. 96.

25) 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26) The Epistle to the Romans, pp. 103-104.

27) 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p. 46

28)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29) 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30) Church Dogmatics, IV. i. p. 335.

31) Ibid., pp. 335-336.

32)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33) Ibid.

34) Church Dogmatics, IV. i. p. 356.

35) The Humanity of God, p. 53.

36) Ibid., p. 62.

37) 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대한기독교서회), 89쪽.

38) “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39) Ibid., p. 85.

40)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p. 17.

41) Ibid., p. 30.

42) About the Gospels, p. 31.

43)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p. 297.

44) 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4.

45) Ibid., p. 16.

46) Ibid., p. 289.

47) Ibid., p. 13.

48)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xxxv.

49) Ibid., p. 23.

50) Ibid., p. 24.

51) Ibid., p. 79.

52)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pp. 284-285.

53) Ibid., pp. 440-441.

54) Ibid., p. 442.

55) The Romans, p. 55.

56) Ibid., p. 59.

57) Ibid., p. 186.

58) 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59) The Apostolic Preaching, p. 37.

60)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93.

61) Beyond Tragedy, p. 3.

62) Ibid., p. 7.

63)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89.

64) Beyond Tragedy, p. 7.

65) Ibid., p. 10.

66) Ibid., p. 11.

67) Ibid., p. 13.

68) Ibid., p. 14.

69) Ibid., p. 17.

70)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71) Beyond Tragedy, pp. 17-18.

72) Ibid., p. 290.

73) Ibid., p. 21.

74)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89.

75) Beyond Tragedy, p. 290.

76)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90.

77) Ibid., p. 294.

78)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p. 108.

79)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31.

80) The Gospel of John, p. 522.

81) Ibid., p. 637.

82)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26.

83) Ibid., I, p. 27.

84) The Gospel of John, p. 14.

85) Ibid., p. 28.

86) Ibid., p. 496.

87) Ibid., pp. 62-63.

88)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50.

89)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17.

90) The Gospel of John, pp. 118-119.

91)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50.

92) Ibid., I, p. 51.

93) The Gospel of John, p. 282.

94)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17

95)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45.

96) 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97)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22.

98) Ibid., I, p. 29.

99)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100) Ibid., p. 14.

101) Systematic Theology, I, p. 3.

102) Ibid., I, pp. 134-135.

103) Ibid., I, p. 141.

104) Ibid., I, p. 114.

105) Ibid., I, p. 35.

106) Ibid., I, p. 35.

107) Ibid., I, p. 158.

108) Ibid., I, p. 51.

109) Ibid., I, p. 205.

110) Ibid., I, p. 237.

111) Ibid., I, p. 245.

112) Ibid., I, p. 284.

113) Ibid., I, p. 284.

114) Ibid., II, p. 77.

115) Ibid., II, p. 174.

116) Ibid., III, p. 284.

117) Ibid., I, p. 252.

118) Ibid., I, p. 263.

119) Ibid., II, p. 40.

120) Ibid., I, p. 116.

121) Ibid., I, p. 267.

122) Ibid., II, p. 29.

123) Ibid., II, p. 94. ‘역설적’이라는 말은 ‘일견 모순된 것 같으나 바른’이라는 뜻임.

124) Ibid., II, p. 109.

125) Ibid., II, p. 107.

126) Ibid., II, p. 131.

127) Ibid., II, p. 176.

128) Ibid., II, p. 172.

129) Ibid., II, p. 170.

130) Ibid., II, p. 174.

131) Ibid., p. 175.

132) Ibid., II, p. 153.

133) Ibid., II, p. 154.

134) Ibid., II, p. 154.

135) Ibid., II, p. 155.

136) Ibid., II, p. 155.

137) Ibid., II, p. 162.

138) Ibid., II, p. 66.

139) Ibid., III, p. 409.

140) Ibid., II, p. 163.

141) Ibid., II, p. 78.

142) Ibid., II, p. 164.

143) Ibid., III, p. 415.

144) Ibid., III, p. 418.

145)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1967], p. 152.

146) Ibid., pp. 196-197.

147) Ibid., p. 199.

148) Ibid., p. 153.

149) Ibid., p. 153.

150) Ibid., p. 156.

151) Ibid., p. 181.

152) Ibid., p. 185.

153) Ibid., p. 186.

154) Ibid., p. 210.

155) 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p. 26.

156) Ibid., p. 44.

157) Ibid., p. 65.

158) Letters from Prison, p. 209.

159) Ibid., p. 211.

160) Ethics [1955], p. 161.

161) Ibid., p. 244.

162) Christ and Time, p. 94.

163) Ibid., p. 95.

164) Ibid., p. 96.

165) Ibid., p. 97.

166) Ibid., p. 98.

167)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 306.

168) Ibid., pp. 306-307.

169) Christ and Time, p. 179.

170) Salvation in History, p. 160.

171) Ibid., p. 162.

172) Ibid., p. 310.

173)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6.

174) Ibid., p. 17.

175) Ibid., p. 15.

176) Revelation as History, pp. 13-14.

177) Ibid., p. 131.

178) Jesus--God and Man, p. 73.

179) 공개강연회 강의 중에서. 크리스챤신문, 2001. 11. 19, 7쪽.

180)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94.

181) The Apostles' Creed, p. 10.

182) Ibid., p. 13.

183)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184) Jesus--God and Man, p. 146.

185) Ibid., p. 149.

186) The Apostles' Creed, p. 72.

187) Ibid., p. 73.

188) Jesus--God and Man, p. 89.

189) Ibid., p. 98.

190) The Apostles' Creed, pp. 63-64.

191) Jesus--God and Man, p. 269.

192)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p. 69-70.

193) The Apostles' Creed, p. 89.

194) Ibid., p. 104.

195) Ibid., p. 91.

196) New Testament Theology, p. 86.

197) Ibid., p. 86 footnote.

198) Ibid., p. 87 footnote.

199) Ibid., p. 88.

200) Ibid., p. 88 footnote.

201) Ibid., p. 301.

202) Ibid., p. 308.

203) Ibid., p. 310.

204) 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pp. 53-54.

205) Ibid., p. 59.

206) Ibid.

207) Ibid., p. 65.

208) The Phenomenon of Man, p. 294.

209) Hymn of the Universe, p. 133.

210) Ibid., pp. 143-144.

211) The Phenomenon of Man, p. 39.

212) Ibid., pp. 79-80.

213) Ibid., p. 221.

214) Ibid.

215) The Future of Man, p. 66.

216) The Phenomenon of Man, p. 312.

217) Science and Christ, p. 190.

218) Ibid., p. 197.

219) Ibid., p. 198.

220)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 30.

221) Ibid., p. 35.

222)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 12.

223) Ibid., p. 26.

224) 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p. 3.

225) Ibid., p. 4.

226) "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p. 7.

227) Ibid..

228) Ibid.

229) Trans-Action [of Washington University], July-August 1967; Christian News, 3 March 1969; 27 June 1983, p. 5; Pulpit Helps, De- cember 1987; Christian News, 23 November 1987, p. 2.

230) 이 세미나의 목적은 예수께서 참으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결정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 세미나를 주도한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는 에모리 대학교 신학부 교수이었고 성경문헌협회 증경회장이다.

231) "Did Jesus Say He's Messiah?: Seminar Concludes He Didn't Publicly," The Charlotte(NC) Observer, 18 October 1987, in Christian News, 2 November 1987, p. 24; "Views of Jesus Seminar Scholars Adopted at Roman Catholic and Protestant Seminaries," Christian News, 2 January 1989, pp. 1, 21-22; John Dart, "Panel: Jesus Didn't Speak of Second Coming," Philadelphia Inquirer, 6 March 1989; "Jesus Never Promised Second Coming, Seminar Concludes," Courier Post (Cherry Hill, N. J.), 7 March 1989, in Christian Beacon, 9 March 1989; Christine Wolff, "Seekers of Jesus' Words," Cincinnati Enquirer, 1 October 1989, in Christian News, 9 October 1989, p. 10; Gayle White, "Scholars Conclude Jesus Didn't Practice or Advocate Celibacy," Christian News, 9 October 1989, pp. 1, 10; "The 'Jesus Seminar' Strikes Out Again," Calvary Contender, 1 May 1991; Time, 10 January 1994; St. Louis Post Dispatch, 8 January 1994; "Jesus Seminar Publishes New 'Bible,'" Christian News, 17 Janury 1994, pp. 1, 20-22.

232) Wanderer, 30 December 1999; Christian News, 3 January 2000, p. 12.

233) World, 7 February 2004; Calvary Contender, March 2004.

234) 미국 연합장로교회 헌법: 제1부 신앙고백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발행 (1968), 251-265쪽; 킥, 띠 깐지, 헨리 공저, 1967년 신앙고백서 비판, 임택권 역 (1967) 참조.

235) Carl McIntire, The Death of a Church (1967), p. 129.

236) Time, 16 February 1981; Christian News, 27 July 1983, p. 5; James R. Mook, "The Validity of the Kaseman Case Verdicts in the Confessional/ Subscriptional Context of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Th.D. diss., Dallas Theological Seminary, 1985).

237) Christian News, 27 December 1999.

238) Calvary Contender, 15 January 2000.

239)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8.

240) World, 25 July 1998;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8.

241) Agape Press, 1 May 2001; Calvary Contender, 15 June 2001.

242) Calvary Contender, July 2002.

243) Friday Church News Notes, 28 March 2003; Christian News, 7 April 2003, p. 3.

244) Christian News, 24 February 2003, pp. 1, 4.

245) Christian News, 13 July 1998; Huntsville Times, 29 January 2000.

246) Calvary Contender, June 2002.

247) Christianity Today, 15 June 1998; Calvary Contender, 15 May 1999.

248) Daily Record [N. J.], 27 January 2000; Star-Ledger, 30 January; Christian News, 7 February 2000; Calvary Contender, 1 March 2000.

249) Huntsville Times, 29 January 2000; Calvary Contender, 15 Feb- ruary 2000.

250) Calvary Contender, 15 May 1999.

251) Christian News, 15 April 2002.

252) World, 8 July 2002; Calvary Contender, September 2002.

253) Christian News, 29 April 1985, p. 3; 4 Feburary 1991, p. 2; 13 April 1992, p. 13.

254) Christian News, 12 February 1996, pp. 1, 14.

255) David O. Beale, S.B.C.: House on the Sand? (1985), pp. 44-46.

256) E. J. Daniels, Family Magazine, May-June 1986, p. 13.

257) The Richmond News Leader와 1977년 12월 14일자 Baptist Press Release에서 보도되었다. E. J. Daniels, p. 14.

258) Daniels, pp. 18-19.

259) Daniels, p. 20.

260) Daniels, p. 20.

261) Daniels, p. 18.

262) Daniels, p. 18.

263)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8.

264) Calvary Contender, 1 March 1999.

265) Calvary Contender, 1 June 1999.

266) Baptist Banner, January 2000;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0.

267) Baptist Banner, 1 March 2001;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268) Christina News, 12 April 1999.

269) Calvary Contender, 15 May 1999.

270) Christian News, 22 May 2000, pp. 1, 5.

271) Daily Telegraph, 25 June 1984, in The Revivalist, July-August 1984, p. 13.

272) Christian News, 12 February 1996, p. 15.

273) WITW; Calvary Contender, 1 March 2000.

274) Calvary Contender, 1 April 2001.

275) 기독신문, 1997. 12. 3, 16쪽; Christian News, 8 December 1997, pp. 1, 12.

276)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2.

277) Baptist Banner, January 2000.

278)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0.

279)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0.

280) 친필 원고에서 인용함.

281) 1992년 5월 7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재판위원회는 당시 감신대학 학장인 변선환과 동대학 조직신학 교수인 홍정수에게 출교를 선고했다. 기독교 연합신문 1992년 5월 17일자(6쪽)에 실린 “변선환, 홍정수 교수 재판 판결문”과 기타 신문들에 실린 성명서들이나 보고서들은 그들의 이단적 사상들을 잘 나타낸다.

282) 홍정수, 베짜는 하나님, 52, 56쪽.

283) 한 몸, 7권, 16, 17쪽.

284) 베짜는 하나님, 190쪽.

285) 베짜는 하나님, 191쪽.

286) 우먼 센스, 1991. 12월호.

287) 베짜는 하나님, 201쪽.

288) 문익환, “죽음에 대한 성서의 물음과 대답,” 기독교 강좌 (대한기독교서회), 제1권, 138쪽;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 3. 30, 8-9쪽에서 재인용함.

289) 크리스챤 신문, 1973. 4. 21.

290) 조향록,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주간조선, 1976. 4. 26;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 3. 30, 8-9쪽에서 재인용함.

291) 교회연합신보, 1986. 8. 17.

292) 크리스챤 신문, 2001. 1. 15, 7쪽.

293) 채기은, 한국교회사 (1977), 231쪽.

294) 교회연합신문, 2001. 3. 4, 9쪽.

295)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200-201쪽; 성기창, “예장 통합측의 신학적 흐름: 1990-2004년을 중심으로” (M. Div. 논문,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2005), 9쪽에서 재인용함.

296) 김명용, “개혁교회 신학의 역사적 조명,” 예장 바른 목회실천협의회 수련회 강의안 (1993. 8. 23);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208-209쪽; 성기창, “예장 통합측의 신학적 흐름,” 18-19쪽에서 재인용함.

297) 김명용, 이 시대의 바른 기독교 사상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1), 320쪽; 성기창, “예장 통합측의 신학적 흐름,” 29-30쪽에서 재인용함.

298)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214-215쪽; 성기창, “예장 통합측의 신학적 흐름,” 44쪽에서 재인용함.

299) World, 9 October 1999.

300) Calvary Contender, 15 November 1999.

301) Huntsville Times, 14 January 2000.

302) Huntsville Times, 17 January 2000; Calvary Contender, 15 January 2000.

303) Christian News, 20 December 1999.

304) Calvary Contender, 15 January 2000.

305) World, 20 September 2003.

306) Calvary Contender, November 2003.

307) 허 혁, “부활 사실과 부활 신앙,” 기독교 사상, 1973. 4월호;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 3. 30, 8-9쪽에서 재인용함.

308)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서울: 옛신앙, 2004), 98-99쪽.

309) 조선일보, 2001. 11. 17, 21쪽.

310) Haven B. Gow, "Is Abortion in America Like the Holocaust?" Christian News, 24 June 1985, p. 8; 교회연합신문, 2002. 5. 26, 11쪽.

311) Religious News Service, 18 June 1986.

312) Christian News, 13 April 1992;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1; 1 January 1999.

313) 크리스챤 신문, 1998. 2. 2.

314) Calvary Contender, 1 July 1999.

315) New Americans, 27 September 1999.

316)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9.

317)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100-121쪽.

318)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19) National Liberty Journal, February 1999.

320)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1999.

321)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322) Denver Post, 15 June 2001.

323) Foundation, July-August 2001, p. 43.

324)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25) Calvary Contender, 1 May 1997.

326)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2.

327) World, 15 May 1999.

328) Calvary Contender, 1 July 1999.

329) 기독신문, 1999. 6. 30, 16쪽.

330) Christian Observer, December 1999; Christian News, 24 January 2000, p. 3.

331) 기독신문, 2000. 5. 31, 8쪽.

332) 기독신문, 2000. 7. 5, 8쪽.

333) Calvary Contender, 1 April 2001.

334) Huntsville Times, 16 June 2001; Calvary Contender, 1 July 2001; 크리스챤 신문, 2002. 3. 4, 2쪽.

335) Friday Church News Notes, 30 May 2003; Christian News, 9 June 2003, p. 2.

336) Ibid.

337)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38) Ibid.

339) Ibid.

340) Christian News, 24 November 1997, p. 11.

341) 크리스챤 신문, 1998. 1. 26, 2쪽.

342) 기독신문, 1998. 4. 15, 16쪽.

343)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344) Christianity Today, 5 October 1998.

345) Christianity Today, 1 March 1999.

346)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9.

347) Religion Today; Christian News, 22 May 2000, p. 3.

348) Christian News, 17 July 2000, p. 3.

349)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50) Ibid.

351) Ibid.

352) Christian News, 1 November 1993, p. 1;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53)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7.

354) Evangelicals Concerned, Spring 1998.

355) Calvary Contender, 1 May 1998.

356) 미국 뉴저지 주의 Daily Record, 27 January 2000; Star-Ledger, 30 January; Christian News, 7 February 2000.

357)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358) 기독신문, 2000. 3. 15, 8쪽.

359) ENI, 10 June 2003; Friday Church News Notes, 13 June 2003; Christian News, 23 June 2003, p. 2.

360) “미 성공회, 동성애자 주교 서품 강행,” 기독신문, 2003. 11. 5, 17쪽.

361)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62) Christian News, 13 April 1992.

363) Christian News, 29 April 1985, p. 3.

364)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65) World, 5 December 1998.

366) Christian News, 15 November 1993, pp. 1, 12;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367) Christian News, 10 November 1997, pp. 1, 7.

368) Star Tribune [Minneaplis], 18 May 2003.

369) Friday Church News Notes, 23 May 2003.

370)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71) Christian News, 5 July 1999.

372) Huntsville Times, 22 July 1999.

373)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9.

374)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75) Ibid.

376)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3.

377) Calvary Contender, 1 June 1999.

378) Kevin Eckstrom, Religious New Service; Christian News, 24 June 2002, p. 2.

379) Huntsville Times, 17 July 1997;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7.

380) USA Weekend, 3 October 1997; Christian News, 10 November 1997, p. 7.

381) Huntsville Times, 26 April 1998.

382) Calvary Contender, 1 June 1998.

383)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84) Ibid.

385) Ibid.

386) Toronto Sun, 15 January 2001.

387)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1.

388) 기독신문, 2001. 6. 13, 19쪽.

389) The Ottawa Citizen Thursday, 29 May 2003; Christian News, 30 June 2003, p. 3.

390) Calvary Contender, 1 June 1996.

391) Christian News, 2 March 1998.

392)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93) 기독신문, 1998. 8. 12, 16쪽.

394) Associated Press, 23 July 2002.

395) Eposcopal News Service, 10 October 2002.

396) Foundation, November-December 2002, p. 42.

397) Christianity Today, 9 November 2002; Calvary Contender, De- cember 2002.

398) Friday Church News Notes, 20 June 2003.

399) Ibid.

400) 허순길, “동성애자를 감독으로 세우는 영국교회(성공회),” 기독교보, 2003. 8. 23, 2쪽.

401) 호주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of Australia)는 1977년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의 대부분이 연합하여 교인 약 140만의 큰 교회를 이루었다.

402) 허순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지구촌 교회(1),” 기독교보, 2003. 8. 16, 2쪽.

403) Karl Barth, Christ and Adam, pp. 54-55.

404) Karl Barth,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405) Ibid., p. 72.

406)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 i. 81.

407) C. H. Dodd, About the Gospels, p. 31.

408) 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p. 297.

409) 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p. 17.

410) Ibid., p. 30.

411)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 p. 94.

412) C. H. Dodd, 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4.

413) Ibid., p. 289.

414)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 35.

415)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 ii, 528-529.

416) C. H. Dodd, 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3.

417) C. H. Dodd,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xxxv.

418)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 i, 42.

419) Ibid., p. 81.

420) C. H. Dodd,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79.

421)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7.

422)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 252.

423) Dietrich Bonhoeffer, 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p. 26.

424) Ibid., p. 44.

425) Wolfhart Pannenberg,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426) C. H. Dodd,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24.

427)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 284.

428) Ibid., I, 284.

429) Ibid., II, 77.

430)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p. 13-14.

431) Rudolf Bultmann,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17.

432)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94.

433)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 i, 5, footnote.

434)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17.

435) Reinhold Niebuhr,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436)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p. 50.

437) Wolfhart Pannenberg, Jesus--God and Man, p. 146.

438) Ibid., p. 149.

439) Rudolf Bultmann, The Gospel of John, pp. 118-119.

440) Joachim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p. 86.

441) Ibid., p. 87 footnote.

442) Ibid., p. 88 footnote.

443)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107.

444) C. H. Dodd, The Romans, p. 55.

445)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p. 17-18.

446) Rudolf Bultmann,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17.

447) Karl Barth,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448) 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449) Karl Barth,Church Dogmatics, IV. i, 335.

450) Ibid., pp. 335-336.

451)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45.

452) 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453)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153.

454) Ibid., II, 154.

455) Ibid., II, 155.

456) Wolfhart Pannenberg, Jesus--God and Man, p. 89.

457) Ibid., p. 98.

458) Joachim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p. 301.

459) Ibid., p. 308.

460)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 ii, 34.

461) Karl Barth, The Humanity of God, p. 53.

462) C. H. Dodd, The Romans, p. 186.

463) C. H. Dodd, 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464)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 p. 179.

465) Oscar Cullmann, Salvation in History, p. 160.

466) Ibid., p. 310.

467) Wolfhart Pannenberg, Jesus--God and Man, p. 269.

468) Wolfhart Pannenberg,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p. 69-70.

469) Wolfhart Pannenberg, The Apostles' Creed, p. 89.

470)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290.

471)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66.

472) Ibid., III, 409.

473) Oscar Cullmann,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15.

474) Karl Barth,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475)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21.

476) Rudolf Bultmann,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477)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163.

478)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290.

479) Wolfhart Pannenberg, The Apostles's Creed, p. 104.

480)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94.

481)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78.

482) Ibid., III, 418.

483) Wolfhart Pannenberg, The Apostles' Creed, p. 91.

484) Karl Barth, The Humanity of God, p. 84.

485) Ibid., p. 85.

486) Dietrich Bonhoeffer, Ethics, p. 161.

487) Ibid., p. 244.

488) 크리스챤 신문, 1998. 2. 2.

489) Christian News, 13 April 1992;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1; 1 January 1999.

490) Religious News Service, 18 June 1986.

491) 원문에서 본절에 네 번 나오는 -카라는 말은 남성 2인칭대명사 어미이다.

492) Calvin, Matthew Poole, Keil-Delitzsch도 그렇게 생각한다.

493) 1981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Dr. Micheline M. Matthews-Roth, Dr. Jerome Le Jeune, Dr. Hymie Gordon  등의 의학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하였다. 가이슬러, 기독교 윤리학, 190쪽.

494) 가이슬러, 189쪽.

495)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496) Ibid.

497) Ibid.

498) Christian News, 13 April 1992, p. 13.

499)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500) Focus on the Family; Christian News, 29 April 1985, p. 3.

501)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502) Ibid.

503) 미국 뉴저지 주의 Daily Record, 27 January 2000; Star-Ledger, 30 January; Christian News, 7 February 2000.

504) Ibid.

505)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3.

506) Christian News, 1 November 1993, p. 1;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507)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508) Calvary Contender, 1 June 1996.

509)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510) 기독신문, 1998. 4. 15, 16쪽.

511) Christianity Today, 5 October 1998.

512) Christianity Today, 1 March 1999.

513) Huntsville Times, 22 July 1999;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9.

514) 기독신문, 2000. 3. 15, 8쪽.

515) 기독신문, 2000. 5. 31, 8쪽.

516) Toronto Sun, 15 January 2001.

517)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1.

518) Calvary Contender, 1 April 2001.

519)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520) Foundation, July-August 2001, p. 43.

521) 기독신문, 2001. 6. 13, 19쪽.

522) Star Tribune [Minneaplis], 18 May 2003.

523) ENI, 10 June 2003; Friday Church News Notes, 13 June 2003; Christian News, 23 June 2003, p. 2.

524) 기독신문, 2003. 11. 5, 17쪽.

525) 호주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of Australia)는 1977년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의 대부분이 연합하여 교인 약 140만의 큰 교회를 이루었다.

526) 허순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지구촌 교회(1),” 기독교보, 2003. 8. 16, 2쪽.

527) Times, 12 August 1985.

528) 조선일보, 2002. 7. 9,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