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연합에 대하여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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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교제와 연합은 아름다운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다. 시편 133:1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 다락방 강화라고 우리가 부르는 긴 교훈을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 하나님 아버지께 대제사장적 기도를 올리셨는데, 그 기도에서 그는 그를 믿는 제자들, 곧 성도들이 하나되기를 기도하셨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3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교훈을 남겼다. 또 갈라디아 5장에 열거된 육체의 일들, 즉 그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악들의 목록에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이 포함되어 있다. 성도들의 교제와 연합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인간적 분열과 분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회개해야 할 죄악이다.

그러면 교회 연합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원리에서 교제하고 연합해야 하는 것인가? 또 오늘날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또 우리 나라에서도 세계의 흐름과 별로 다르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연합운동 혹은 교회일치운동1)은 과연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성경적으로 바르고 바람직한 교회 연합 혹은 교제는 무엇인가?

 

1.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의 성경적 개념

먼저,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하나임, unity)의 성경적 개념부터 생각해보자.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 믿는 자들이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일체성(一體性)은 영적 차원, 교리적 차원, 유형적 차원, 이 세 차원에서 이해된다.

 

1) 영적인 일체

첫째로, 교회는 영적 차원에서 하나이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고찰에서 이해된다. 교회 연합과 일치의 문제를 생각할 때 교회의 본질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천주교회는 교황을 머리로 하는 조직을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 본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키푸리안에게서 그 씨앗을 볼 수 있는 사상이다. 교회의 외적 조직을 중시하고 그 조직을 이탈하는 자를 구원받지 못하는 자로 간주하는 키푸리안의 생각은 천주교회의 교회관의 기초에 있다. 조직이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가?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로마 천주교회의 생각을 단호히 부정했다. 여기에서 소위 무형교회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사상이 아니고 성경의 교회관을 표현한 것이었다.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 즉 성도들의 모임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비록 그들이 어떤 조직체 밖에 있다 할지라도, 또 심지어 그들의 이탈이 정당하지 못하고 인간의 부족 때문에 비롯된 경우라 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진실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들은 교회의 한 부분이다.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한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체성은 무엇보다 영적인 사실이다. 교회의 이 영적인 일체성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의 하나됨을 기도하셨던 그 기도는 실패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모두 이 한 교회에 속한다. 교회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어떤 교파, 어떤 교단, 어떤 교회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만일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진리를 믿고 성경에 교훈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믿는 자요 그런 자들은 다 하나님의 한 교회의 회원이며 한 교회에 속한다. 교회의 일체성은 우리가 노력해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이미 확보된 무엇이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때 이미 우리는 그 한 교회의 회원이 되고 그 한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이 하나됨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하나됨이다.

 

 2) 교리적인 일체

둘째로,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영적 일체성은 정신적, 사상적 일치, 즉 교리적 일치를 내포한다. 하나님과 사탄은 일치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하나 될 수 없다. 기독교적 일치는 진리 안에서의 일치이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교훈하셨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교회에 들어오지만 실상은 노략질하는 이리이기 때문이다(마 7:15). 예수님 자신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정죄되셨고 십자가 형을 받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셨다.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 곧 율법주의자들의 반대와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사도행전 19:9에 보면, 에베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말을 비방했을 때,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다락방에서의 마지막 만찬과 긴 교훈 후 하나님께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을 때 그는 그의 기도 전체에서 제자들 곧 택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별하셨다. 그는 그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하셨다(6, 9, 24절). 그는 심지어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표현하셨다(9절). 뿐만 아니라, 그는 제자들의 하나됨을 아버지와 자신의 하나됨에 비교하셨다(11, 21절).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됨은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주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하나됨은 복음 진리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복음 진리 밖에서는 하나님도, 구원도 생각할 수 없고, 성도들의 연합도 일치도 생각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성도들의 일치를 교훈했을 때도 구원받은 성도들의 연합과 일치를 말한 것이라는 것은 너무 확실하다. 그는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 이미 자세히 언급했다. 그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창세 전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救贖)과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임을 분명히 했다. 또 4장에서 그가 성도들 혹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할 때도 그는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께서 각각 하나이심과 또 믿음과 소망과 세례도 각각 하나임을 언급하였다(4-6절). 그런 주제들과 더불어, 그는 몸 즉 교회도 하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됨은 교리적 주제들과 상관 없이 그냥 하나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교리적 주제들과 더불어, 이런 교리적 주제들에 근거하여, 하나인 것을 잘 나타낸다.

교회의 일체성의 교리적 성격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다. 그것은 특히 교회에게 바른 교리를 지키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주님과 사도들의 교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워필드는 "참된 교회 일치“라는 그의 글에서,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하였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바르게 말하였다.2) 마틴 로이드-죤스도 기독교적 일치의 기초라는 그의 책에서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고 단언하였다.3) 그러므로 바른 교리와 상관 없이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보다 더 비성경적이고 더 교회와 하나님의 일을 혼란시키고 해를 끼치는 일은 없다. 정신적 일치가 없는 기구적 연합은 무의미하고 그런 것을 일치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에 가깝다.

 

3) 유형적 일체

셋째로, 교회의 일체성은 유형적 차원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분열과 파당이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였다(고전 1:10). 그는 에베소교회에게는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엡 4:1-3). 이것은 성도들의 일체성이 외형적으로도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낸다. 교회는 공동적 신앙고백과 사랑의 교제와, 전도와 봉사에 있어서의 협력과, 또 가능하다면 하나의 조직체로 그 하나됨을 나타내어야 하고 그 하나됨을 지키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정당한 이유가 없는 인간적 분열과 원수맺음과 반목과 대립과 분리는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 증거된 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큰 죄악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뒤늦게라고 자신의 부족과 실수와 범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 용서함을 얻을 것이다.

물론 교회의 일체성이 반드시 한 개의 조직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이며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적이기 때문이다. 조직은 교회에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신자는 한 조직체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이 반드시 한 조직체에 속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한 일이다. 우리는 한 세계적 조직체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천주교회의 횡포의 역사를 기억한다. 신앙의 선조들은 한 세계적 조직체보다 개인의 신앙의 자유와 일치된 마음을 가진 지교회의 교제가 더 귀한 것임을 깨달았다. 지상에 이상적 교회는 없다. 그러나 물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참 교회들을 존중해야 하고 그들을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그는 교회를 분별하고 선택하며 일단 선택한 교회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또 그는 기회 있는 대로 교제의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다.

 

4) 성결성을 동반해야

성경적 연합 개념의 균형잡힌 이해를 위해, 교회의 일체성은 교회의 성결성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성도의 사랑의 교제에 대해 가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교제의 단절, 즉 성경적 분리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비록 지상에 완전히 순결한 교회는 없을지라도, 참 교회는 성경의 모든 교훈을 성실히 지키고 순종하려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참 교회의 표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와 성례의 바른 시행과 더불어 권징의 바른 실행을 꼽았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가 중요하고 교회의 일치와 연합이 중요하지만, 악을 포용하면서까지 연합을 지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연합과 일치는 교회의 순결성을 양보하고 교리적, 윤리적 악과 타협하면서 지켜야 할 진리나 덕목이 아니다. 참 교제는 악과의 분리를 내포해야 한다. 사랑은 불의와 악을 용납하지 않는다(고전 13:5, 6).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이러한 원리는 요한일서 성경이 매우 강조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요한일서의 중요한 주제는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이지만, 그 서신은 또한, 중생한 자는 계속 죄 가운데 머물 수 없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까지 어두움 가운데 거하며 생명을 얻지 못한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진리를 고백하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명확히 가르친다. 사랑과 의는 결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 둘은 우리가 다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만큼이나 분명한 또 하나의 성경 교훈은, 교리적, 윤리적 오류 가운데 있는 자들, 그 오류를 회개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 자들과 교제를 끊고 그들로부터 떠나라는 교훈이다. 이러한 성경 교훈을 순종하는 것은 분리주의가 아니다. ‘분리주의’라는 말은 ‘분리를 일삼는 입장과 태도’를 나타내는 맛이 있다. 인간적 교만과 욕심 때문에 성도들 간에 다투고 시기하고 원수를 맺고 분쟁하고 당을 짓고 분리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죄받을 육체의 일이다(갈 5:20).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의 교훈을 순종하는 분리가 있다. 그것은 분리주의라고 비난되어서는 안 된다.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명백하고 확실하다. 대표적 구절들을 들어보자.

로마서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와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9-11,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2. 잘못된 연합 현상들4)

모든 종류의 연합이 선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류 초기의 바벨탑 사건은 잘못된 연합주의의 표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적 단합을 미워하셨고 그들을 뿔뿔이 흩으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도 잘못된 교제와 일치에 대해 강하게 말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8).

오늘날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연합운동은 확실히 비성경적이며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며 참된 교회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또 지금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들의 연합활동들도 그런 것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다. 현 시대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마 24:11; 살후 2:3; 계 13장), 말세의 징조들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배교적이고 교리적, 윤리적 악들과 타협하고 그것들을 포용하고 있고 기독교회들의 혼란은 심각한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1) 에큐메니칼 운동 

오늘날에 첫번째 지적되어야 할 잘못된 연합 현상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산물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오늘날 세계 각 나라의 대교단들의 거의 대부분을 회원으로 가지고 있는 거대한 조직체이다. 물론 한국에는 기장측, 예장 통합측, 기감측 등만 거기 속해 있고 다수의 보수적 교단들이 거기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적 판도에서 그 동안 한국교회의 특별히 보수적인 상황에 기인할 뿐이며 예외적인 일이다. 또 미국의 남침례교단도 현재는 WCC 밖에 있으나 그 교단 내의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적 그룹인 협동침례교협의회(CBF)는 WCC와 정신적으로 동일하다.

 

①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함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점은 연합과 일치의 넓은 기초에 있다. 그 운동의 이론적 기초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것의 실제적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그 운동은 기독교 이름을 가진 모든 교회들을 포용하고 있다. 그것은 20세기 초반 이후 명확해진 ‘넓어진 교회들’의 협의체로서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지교회들이나 지교단들은 다양성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넓어진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들의 연합체인 세계교회협의회가 신학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계의 상황에서 물론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명확한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대교단들이 오늘날 안고 있는 신학적 다양성의 문제점 바로 그것이다. 그 신학적 다양성이란 단순히 복음적 개신교파들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양성은, 19세기에 작게 시작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역사적 대교단들을 뒤흔들어 놓았던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적 사상인데 오늘날 세계의 대교단들은 이 이단적 사상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가 되었고 이런 교회들의 연합체로서의 WCC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조직체가 된 것이다.

 

② 천주교회를 포용함

에큐메니칼 운동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일찍부터 천주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오늘날도 천주교회와 매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WCC의 전 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WCC와 천주교회 간의 현재의 관계는 매우 긍정적이며 모든 종류의 우호 관계들이 있다”고 하였다.5) 미국천주교 주교대회와 미국교회협의회는 매년 문안과 사절단을 교환하며, ‘커져가는 협력’과 계속적인 ‘공동적 활동’을 보고한다. 1999년 6월 21일 크리스챤 뉴스는, “그런 협력의 다른 한 상징으로, 교회협의회의 회장이며, 미국의 전(前) 유엔 대사인 앤드류 영(Andrew Young)은 9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천주교 성당에서 그의 취임식을 거행할 것이다”라고 보도하였다.6) 캐나다 최대 교파인 천주교회는 1997년 캐나다 교회협의회에 회원으로 정식 가입되었다. 2000년 4월 앨버타 에드몬튼에서 열린 회의에서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천주교회 온타리오 주교인 안드레 발리를 새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그 단체는 창립 56년 만에 처음으로 천주교인을 회장으로 선출한 것이다.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천주교회의 태도도 변하였다. 1968년 이후, 10-15명의 천주교회 신학자들은 WCC의 신앙 직제 위원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해 왔다. 또 천주교회는 매년 기독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위한 예비 대회들에 참여하였고, WCC의 주요 대회들에 참관인 혹은 참조인으로 정규적으로 참여하였고 WCC의 프로그램 작성 간사 중에 들어 있다.7) 1999년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천주교회는 이미 온 세계의 56개국의 교회 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8) 1993년 8월 스페인에서 열린 WCC 제5차 신앙 직제 위원회 세계 대회의 120명 회원 중 26명은 천주교인으로서 전적으로 참여하였다.9)

1998년 1월 기독교 일치주간 연합예배가 우리나라의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려 기독교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였다. 거기에 참여한 교회들은 일반 개신교회, 한국 성공회, 한국 정교회, 천주교회 등이었다.10) 2000년 1월 18일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대희년 교회일치 기도회가 열렸다. 같은 날 저녁 우리나라의 명동성당에서 가톨릭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개신교 교단들, 루터교, 한국정교회, 성공회 등이 참가하는 합동기도회가 열렸다.11)

 

③ 종교다원주의의 경향까지 있음

심지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최근에 종교다원주의의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WCC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도 있다. WCC 종교 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Dirk C. Mulder)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느끼십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12) WCC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분과의 분과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는 1985년 WCC를 통해 공식적으로 출판한 성경과 타종교인들(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그는 절대적 의미의 진리는 어느 누구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p. 27). 그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성경이 서로 다르고 모순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고(pp. 21, 22, 67) 성경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pp. 6, 9, 24, 26). 그는,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요,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라고 말한다(pp. 9-11, 56). 심지어 그는 “만일 당신이 나에게 참된 증거의 가장 큰 방해거리이었던 한 가지 요인을 골라내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하는 절대적 주장들이 그것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p. 53). 이것은 명백한 종교다원주의이다.

1990년 1월, 스위스 바아르에서 모인 WCC의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과의 대화분과 모임은 15개국에서 온 21명의 헬라 정교회, 개신교회, 천주교회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하였고 ‘종교적 다원성: 신학적 관점들과 선언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13) 그 문서는 선언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의 다른 길들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선함과 진실과 거룩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 . .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인격적 의탁에 제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갈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라고 하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적 신비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 성취를 향해 펼쳐질 때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들로 매개(媒介)되고 표현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 밖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고 감동하는 종교적 전통들의 구조 안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살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14) 다시 말해, 기독교 외의 타종교인들도 자기의 종교에 충실한 가운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명백히 종교다원주의 사상이다.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7차 총회에서는 당시 한국 이화여대의 조직신학교수 정현경은 주제 강연에서 한(恨)을 안고 죽어간 영들, 예를 들어 하갈의 영,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에게 죽임 당한 어린 아이들의 영, 잔다르크의 영, 십자군 파병 때 죽어간 백성들의 영, 지구상의 토착민들의 영, 나찌 시대에 가스실에서 죽은 유태인들의 영, 히로시마와 나카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죽임 당한 자들의 영, 광주에서, 천안문에서, 리쿠니아에서 죽은 자들의 영,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고 착취된 땅과 공기와 물의 혼 등을 부르는 초혼(招魂)적 행위, 즉 샤마니즘적 행위를 하였다.15) 이것이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전체모임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2) 신복음주의

오늘날에 두 번째로 지적되어야 할 잘못된 연합 현상은 신복음주의이다. 이것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보다 더 기독교회를 혼란시키는 문제이다.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단순히 복음주의라는 말로 더 널리 사용된다. 신복음주의는 성경적 교제의 원리를 내버린다. 즉 신복음주의는 교리적 이단에 대한 권징의 필요성에 대해 무지하거나 그 문제를 고의적으로 외면 혹은 회피한다.

신복음주의는 20세기 중엽 미국 교회의 상황에서 생긴 현상이다. 20세기 초 미국교회에서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논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외형적으로 자유주의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예를 들어, 미 북장로교회는 총회의 결정에 불복종했던 보수적 목사들을 권징함으로 교단 내의 논쟁을 마무리하였다. 그 때 미국장로교회라는 작은 교단이 생겼다. 거기에서 후에 성경장로교회와 정통장로교회라는 두 교단이 생겨났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교단들의 포용주의에 반대한 독립교회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었고 대교단들은 평안을 유지하며 진행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교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포용적인 교회들이 되었다. 그 이후, 적어도 장로교회들 안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교단적으로 중대하게 문제가 제기되고 제재되었던 일은 없었다.

 

 ① 자유주의에 대해 포용적임

그 때 대교단들에서 나온 보수적 목사들 중에 어떤 이들은 갈라진 극소수의 무리가 역사적 기독교회를 계승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넓어진 교단들 속으로 다시 돌아가 주도권을 다시 취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신복음주의의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교제와 권징의 문제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신복음주의의 문제는 교제의 문제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의 다수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입장은 자유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절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를 포용한 교회들을 포용하였다. 그 입장은 원리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과 비슷하다.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를 배제하지 않고 용납하고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하였다. 그러나 주후 4세기 초 니케야 회의 때에 유세비우스의 중도적 사상이 다수파의 입장이었듯이, 신복음주의는 복음주의의 다수파의 입장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런 입장을 처음으로 대변했던 인물은 미국의 풀러(Fuller) 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해롤드 오켕가이었다. 1948년 그는 풀러 신학교 강연에서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1942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47년 풀러 신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25년 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의 이사장이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의 절친한 친구이며 신학적 조언자이었다. 오켕가는 풀러신학교 교장 취임시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자기 신학교는 대교단들 안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말했었다.16) 그는 1957년 한 소식지에서 “신복음주의는 그 전략을 분리에서 침투로 바꾸었다”고 말했다.17) 또 그는 후에 “신복음주의는 분리를 거절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달랐다”고 회고했다.18)

신복음주의적인 기관들로서, 1942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가 조직되었고, 1947년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가 설립되었다. 또 1951년에는 20개국의 복음주의자 협회들이 모여서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19)를 형성하였다. 1956년에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가 창간되었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의 회장 데오도르 윌리암스(Theodore Williams)는 WEF 뉴스레터 1993년 8월호에서 말하기를, “WCC 소속 교단 내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그 교회 안에 복음주의적 영향을 끼치려고 해야 한다”고 했다.20) 이것이 신복음주의의 정신이다.

 

 ② 천주교회에 대해 포용적임

신복음주의는 점차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포용적이다. 1993년 6월 신복음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세 번째 전도대회를 개최했는데, 1050개의 교회들과 65개 교단들이 협력하였다. 이 대회에서 여섯 명의 천주교인들은 실행위원에 포함되었다.21) 199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이사 스털링 허스턴은 말하기를, “지난 10-15년 동안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고 약간의 수의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전도대회 계획위원회들의 공식적 대표자들로 봉사한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안내위원들, 성가대원들, 심지어 상담위원들로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22) 무디 먼슬리 1993년 11월호는 보도하기를, “오늘날, 선이든 악이든,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분리시키는 선들이 사라지고 있다. 양쪽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촬스 콜슨은 쓰기를, “지금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우리의 신앙고백들과 우리의 전통들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함께 모일 적절한 때이다”라고 하였다. 빌리 그레이엄과 루이스 팔라우와 월드 비젼 같은 단체들이 천주교인들을 포함한다.23)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 1997년 3월 30일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알라모도움에서의 전도집회에 대해 이렇게 보도하였다: “그 지역 천주교회도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교황의 1987년 성안토니오 방문 기간에 보인 그 침례교인[빌리 그레이엄]의 후원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 . . . 기독교 지도자로서 빌리 그레이엄은 신학적 차이점들을 초월하는 존경을 얻었기 때문에 침례교인들과 천주교인들과 장로교인들이 그레이엄 전도집회 준비를 위한 수개월 전의 계획 모임들과 훈련 회의들에 함께 모인다.”24) 또 복음 전파(Proclaiming the Gospel) 1997년 6월호는, “천주교회는 이제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대회들에 참여하고 있다. 전도대회를 선전하고 촉진시키고 천주교회 상담자들을 사용하는 댓가로, [빌리] 그레이엄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든 천주교인들을 그들의 천주교회들로 돌려보내겠다고 그 지역의 주교와 약속한다”고 말한다.25) 또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8월 10일자는 이렇게 썼다: “. . . 인구 약 백만 명의 [오타와] 지역을 위한 지난 6월 25-28일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간격--그리고 어느 정도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 간의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전도대회를 후원한 470개의 지역 교회들 가운데, 60개는 천주교회들이었다. 천주교회의 참여는 모든 그레이엄 전도대회 가운데 가장 중대하였다.” 그 잡지는 말하기를, 새 신자들 중의 얼마는 천주교회에서 데려갔다고 하였다.26)

대학생 선교회(CCC)의 창설자요 총재이었던 빌 브라이트는 1969년 천주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는 천주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서 힘있는 역사를 하고 계시며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일을 돕기 위하여 수백만의 천주교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학생 선교회에는 1970년대에 벌써 간사들 가운데 천주교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의 지도 아래 열린 ‘키(Key)’과 1976년의 ‘여기에 생명 아메리카가 있다’는 집회들을 위해 천주교인들이 참여하였다.27) 그들 뿐만 아니라, 제리 팔웰, 잭 반 임페, 제임스 로빈슨, 에드 답슨 등의 복음주의자들도 다 천주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또 촬스 콜슨, 빌 브라이트, 제임스 패커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1994년 기본적으로 서로의 양들을 ‘개종시키지’ 않기로 천주교인들과 합의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문서에 서명하였다.28)

 

 3) 자유주의의 이단성

오늘날의 잘못된 연합과 교제의 예로 든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의 이단성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어떻게 교회가 교제와 연합의 이름으로 이단을 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정하는 불신앙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성경의 신빙성과 진리성을 부정하고 성경을 파괴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이 부인되기 시작했다. 1923년 말에 초안되고 1924년에 미국북장로교회 총회에 제안되었던 소위 ‘어번 선언서’는 그 당시 교회에 들어오는 자유주의 신학29)에 반대하여 선언한 총회의 1910년, 1916년, 1923년의 선언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반항이었다. 자유주의가 반대한 교리들 중에는 ①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②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 등이 있었기 때문에, 총회는 그 다섯 가지 교리들은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하였었다.30)

J. G. 메이천은 1920년대 초 기독교와 자유주의31)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자유주의를 분석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와 뿌리가 다른 사상체계이며 기독교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불신앙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현대적 사두개파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시도하는 기독교의 재해석은 결코 성경적 기독교가 아니다. 메이천이 책을 쓴 시대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도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자유주의 신학들 중 가장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는 신정통주의조차도 성경의 초자연주의에 대한 불신앙과 역사적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에 대한 회의 혹은 부정으로 가득하다.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신학자들인 칼 바르트, C. H. 다드, 라인홀드 니이버와, 그 외에 폴 틸리히,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요아킴 예레미야스 등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적 사상들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첫째, 자유주의는 성경의 신빙성과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라는 그의 책에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라고 말했고32) 또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라고 했다.33) C. H. 다드는 성경의 권위라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성경의] 외적[객관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라고 했고34)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진리는 아무 곳에서도 자존적(自存的)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다.35)

 둘째,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너머서라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했고,36)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라고 하였다.37)

셋째,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자아와 역사의 희곡들이라는 그의 책에서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라고 말했고,38)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예수--신인(神人)이라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신학은 예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했다.39)

 넷째,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시작은 이 점에서부터이었으므로 말할 필요가 없으나, 한 사람만 인용해본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신약신학이라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고 했다.40)

 다섯째,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심이라는 성경적 속죄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너머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했다.41)

 여섯째,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에 쓰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42)

일곱째,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라고 말했고,43)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너머서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교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말하였다.44) 폴 틸리히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의 상징으로 보았다.4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 사실들을 부정하는 이단 중의 이단이요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다른 복음을 받게 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은 사탄의 일꾼들임을 증거했다(고후 12:15).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그가 전파한 복음, 교회가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만일 누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갈 1:8, 9).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하는 자는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했다(요일 4:1-3). 사도 베드로는 대속의 주 예수를 부정하는 이단을 ‘멸망케 하는 이단’이라고 불렀다(벧후 2:1). 자유주의 신학이 바로 그런 이단이다. 그것은 사탄의 활동이며 적그리스도의 사상, 저주받을 사상, 멸망케 할 이단이다. 그것은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는 사상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자유주의가 한국교회에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발언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에 시작되었고 20세기에 미국교회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것은 현대교회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보다 일찍 자유주의의 영향 속에 있었다. 카나다 교회는 일찍 자유화 되어서 한국의 자유주의는 카나다 선교사들, 예를 들어 서고도(William Scott) 선교사 같은 자들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은 거의 상식적인 일이다. 서고도는 성경에 다수의 역사적 오류가 있다고 말했다.46) 또 193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4회 총회에서 제기되었던 아빙돈 단권성경주석 번역출판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었다. 박형룡은 그 주석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적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부인하고 그 신성을 의문하고 그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등 “모든 자유주의 신학 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였다”고 말했다.47) 이런 자유주의적인 성경주석을 감리교회는 희년 기념사업으로 번역출간하였다.

또 1947년 51명의 진정서 사건으로 제기된 조선신학교(지금의 한국신학대학)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었다. 당시 김재준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공언하며 자신을 칼 바르트나 에밀 부룬너 같은 신정통주의자들과 같은 부류로 말했다. 이 문제는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김재준을 면직함으로 종결되었고 그를 옹호한 자들이 만든 교단이 기장측이었다. 기감측, 기장측 그리고 예장 통합측까지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 신학 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포용해왔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1984년 이동렬은 “한국교회와 신정통주의”라는 제목의 장로회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에서 “우리[예장 통합측] 입장은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 중이다”라고 말하였다.48) 현재 장로교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김명용은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옛시대의 신앙사상이라고 말하며 오늘날의 개혁신학이 바르트와 브룬너와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차원높은 신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49) 한국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이 없다든지 자유주의 신학이 단지 극소수의 몇몇 학자들의 생각일 뿐이라는 무책임하고 부정직한 말은 하지 말자.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너무 무지하든지,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든지 자신을 위장하는 것일 것이다. 한두 명의 목사가 그러해도 심각한 문제인데 아마도 상당수의 목사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추측되고 더군다나 목사후보생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와 신학교 교수들의 사상이 그러한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교회의 가장 심각한 이단이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교회의 연합과 교제는 대단히 큰 잘못이다. 그것은 WCC적 연합이든지 신복음주의적 연합이든지 마찬가지이다. 메이천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의 필요성을 바르게 역설하기를, “한가지 사실이 완전히 명백하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여하튼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면,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계속 동일한 조직체 안에서 전파된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있는 그 두 부류들의 분리는 이 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다”라고 말했다.50) 그는 또 신복음주의적 타협의 죄에 대해 말하기를,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51)

오늘날은 많이 변하고 있지만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초기 교수들의 입장은 동일하였고 그들의 입장은 성경적으로 옳았다.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죤 머리는,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신복음주의적 전도 방법에 관해, 자유주의자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전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분명하게 비평하였다.52) 현대신학과 변증학 교수이었던 코넬리우스 반틸은 신복음주의의 신학적 약점들, 타협적 전도 활동, 및 신복음주의적 잡지들을 비평하였다.53) 구약학 교수 에드워드 영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문제에 대하여, 신복음주의가 전도와 학문과 교육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사실, 그것[신복음주의]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위한 활기찬 투쟁의 필요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강조한다. . . . 그러면 신복음주의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해답인가? 우리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한 일시적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빨리 지나갈수록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 . . . 근본주의 안에는 훌륭한 많은 점들이 있고, 만일 우리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를 당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주저도 없이 근본주의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신앙의 변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심은 참으로 성경적이다. . . . 그것[근본주의]은 실수들을 범했으나, 외쳐야 할 적절한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저 조심성 있는 중도파들이 범한 것과 같은 그렇게 큰 실수는 아니었다.54)

 

 4) 천주교회의 이단성

오늘날 잘못된 연합과 교제의 예로 든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신복음주의는 또한 천주교회에 대해 포용적이다. 그러나 천주교회에 대한 포용적 태도는 정당한가? 천주교회는 종교개혁 당시와 달리 변화되었는가?

전통적으로 개신교회는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변질된 적그리스도적 집단으로 간주해 왔으며 천주교회는 그 기본 교리들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① 첫째로, 천주교회는 교회와 그 전통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다고 간주하면서 로마 교회의 우위성과 교황의 베드로 사도 계승을 주장해 왔고, 특히 1870년 바티칸 회의는 교황 무오성까지 선언하였고 이 교리는 1964년 제2바티칸 회의의 선언에서도 반복되었다.55)

그러나, 교황 무오성에 대한 천주교회의 이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개신교회 교리들의 제1 원리인 성경의 신적, 절대적, 최종적 권위의 교리에 가장 모순된다. 또한 교황 무오성의 교리는 교황의 칙령들의 실제 역사에도 모순되는 거짓된 교리이다. 그 외에도, 교황들 가운데는 역사상 드러나게 부도덕한 자들이 있었다. 또 교황들은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확실히 천주교회의 교황은 하나님의 참 교회의 우두머리나 무오한 지도자가 아닐 뿐 아니라, 참되고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부당하게 탈취한 자이다.

② 둘째로, 천주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승천을 주장하고 신도들에게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보혜사, 중보자, 천상과 지상의 모후 등 부당한 많은 칭호들을 돌린다. 이것은 제2바티칸 회의의 선언에서도 변함이 없다.56)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기도해야 하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된다. 또 우리의 구주와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요 14:6; 행 4:12; 딤전 2:5). 마리아 자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마리아 교리는 확실히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이다. 피조물에게 신적 명칭과 속성 그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상숭배적이다.

③ 셋째로, 천주교회는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1563년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사람이 공식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고,57) 또 “누구든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에 의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면, . . . 혹은 심지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호의뿐이라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58) 또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죄들의 속죄가 남아 있다고 가르치며 여기에서 선행과 기도를 통한 속죄의 교리와 연옥의 교리 등이 나온다. 천주교회는 트렌트 회의의 선언을 수정한 적이 없고 제2바티칸 회의의 선언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59)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며 오직 그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이 죄씻음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밝히 가르친다(롬 3:21, 22; 4:4, 5).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는 완전하다(롬 10:4; 히 10:10, 14).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은 결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예수님 믿고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은 결과요 그 열매일 뿐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칭의론은 명백히 복음의 왜곡이며 변질이요 이탈이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갈라디아서 1:8, 9에서 한 사도 바울의 선언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④ 넷째로, 천주교회는 미사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의 미사는 형식상 개신교의 성찬과 같지만, 그 내포하는 의미는 매우 다르다. 천주교회는, 미사가 속죄 제사로서 거기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미사 때마다 반복하여 죽으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미사는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에 대한 왜곡이요 모독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칼빈의 주석대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내며 미사라는 가증스러운 것을 정죄한다.60) 또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강조하였다(7:27; 9:12, 26; 10:18).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오류들을 볼 때, 천주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며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우상숭배적 단체이다. 천주교회는 신약교회 2천 년 역사상 대표적인, 가장 강력한, 그리고 지금도 세계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이단이다.

16세기 개혁자들은 천주교회가 적그리스도적이며 우상숭배적 단체임을 분명히 하였다. 루터는 말하기를, 교황은 “귀신들이 충만한 자요 . . . 하나님의 원수요 적그리스도”라고 단언하였고, 교황 제도를 마귀적이라고 하였다.61) 또 그는 “이 악마적인 교황 제도는 땅 위의 최종적 불행이요, 모든 악령들이 전력을 다해 할 수 있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표현하였다.62) 칼빈도, 천주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치명적 대적자들로 간주하였고, 천주교회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 때보다 더 불순한 교리와 더 큰 우상숭배를 가지고 있고 다니엘과 바울이 예언한(단 9:27; 살후 2:4) 바로 그 적그리스도요 그 악하고 가증한 왕국의 지도자요 기수라고 보았고63) 교황의 복음을 바울의 복음의 ‘무서운 변질’로 간주하였다.64)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들은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천주교회에 대한 개혁자들의 태도는 여전히 정당하고 유효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천주교회에 대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나 복음주의자들의 교제와 우호 관계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저버림이며 성경에 교훈된 교제의 원리에 명백히 반대된다. 그것은 큰 잘못이다.

 

3. 바른 연합의 원리

그러면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상황에서 교회 연합의 바른 원리는 무엇인가? 교회 연합체 혹은 협의체들은 어떤 원리에서 조직되어야 할까?

 

1)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의 일치

첫째로, 현재 세계의 모든 참된 교회들은 적어도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에 있어서 일치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교회들이 동일한 교리 사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교회들은 적어도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에 있어서 일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의 일치에 온 세계의 기독교회가 하나라는 표가 있다.

칼빈은 참된 교리의 모든 조항들이 똑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비본질적 문제들에 대한 의견의 차이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들을 기독교의 일체성의 기초로 간주하였다.65) 죤 오웬도, 교회의 일체성은 영적이며 또 신앙의 일치, 즉 동일한 신적 진리의 믿음과 고백의 일치라고 말하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첫째는 기독교의 근본 조항들의 정확하고 명백한 고백이며, 둘째는 다른 것들과 의무들에 있어서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것”라고 했다.66)

성경의 근본 교리들이 무엇인가, 특히 어느 교리까지 근본 교리에 속하는가라는 문제는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파적 확신만 주장하여 다른 모든 교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신교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교회, 루터교회, 영국교회와, 그 외에 침례교회, 감리교회 등을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지체들로 인정할 수 있고 적어도 그 교회들의 공통적 신앙고백을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근대에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복음적 개신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믿는 근본 교리들을 천명하였다.

예를 들어,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다:

(1) 성경의 완전한 영감, 무오(無誤), 최종적 권위, (2) 하나님의 삼위일체, (3)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과, 그의 참되신 그러나 죄 없으신 인성, (4) 그의 처녀 탄생, (5) 그의 대리적, 속상적(expiatory) 죽음, (6) 그의 육체적 부활, (7) 동일하신 그 분의 영광스런 재림, (8) 사람의 타락과 전적 부패, (9)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 (10)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복과, 잃어버린 자들의 영원한 형벌, (11) 그의 보혈로 구속받은 모든 자들의 영적 일체성, (12)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교회의 순결성 보존의 필요성.67)

또 세계근본주의자대회(WCF)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채택하였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重生)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① 무오(無誤)하며 글자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는 자, ②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고 믿는 자, ③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자, ④ 삼위일체의 교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등의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⑤ 이러한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애쓰는 자, ⑥ 이러한 신앙에 대한 모든 교회적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자, ⑦ 그리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68)

교회들에서 이러한 근본 교리들의 일치는 다수결적 일치이어서는 안 되고 만장일치이어야 할 것이다.

 

2) 이단들의 배제

둘째로, 참된 교회들은 이단을 배제해야 한다. 이단은 ‘근본 교리에서의 이탈’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거나 가감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이다. 교회들은 이단을 막기 위해 신조를 작성했다.69) 죤 머리가 강조하듯이, 신조들은 오류의 침입에 대항해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였다.70) 교회 역사는 신조 작성의 역사이었다. 초대교회 시대에 니케야 신조나 칼케돈 신조, 종교개혁 이후의 제2스위스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등은 그러하다.

신조의 이런 기능을 생각할 때, 교회연합의 근거로서 사도신경을 제안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사도신경은 이단을 배제하는 기능에 있어서 부족하다. 예를 들어, 천주교회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지만 참 교회로 인정될 수 없다. 천주교회의 문제는 사도신경 외의 첨가된 교리들에 있다. 삼위일체 외에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성경 외에 교황의 무오한 권위를 주장하고 지옥 외에 연옥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희생 외에 미사에서의 계속적 희생을 가르치는 데 천주교회의 문제가 있다. 교인에게 세례를 줄 때는 기본적 신앙고백을 요구하지만, 신자가 이단을 주장하면 권징의 대상이 되듯이, 교회는 기본적 신앙고백뿐 아니라 이단을 배제하는 원숙한 신조가 필요하다. 사도신경은 이를 위해서는 부족하다.

전통적으로, 참 교회의 세 가지 표는 (1) 말씀의 바른 전파와 (2) 성례의 바른 시행과 (3) 권징의 바른 시행이라고 말한다.71) 이 표는 교회연합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의 교리무관심주의는 이단을 포용하는 것일 뿐이다. 교회연합체에는 이단 방지 장치, 즉 권징의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참 교회나 참 교회연합체가 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어떤 교단이 과거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 문제를 먼저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사 정리가 없는 연합 활동은 혼란만 일으킨다. 비록 더딜지라도 원리 원칙을 가진 교제의 확장이 바른 일이다.

특히 오늘날 기독교계의 상황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계선을 무시하고 연합을 추구하는 연합주의와 신복음주의가 널리 퍼져 있고 유행하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자유주의 신학, 즉 신정통주의를 포함하여 성경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신학들은 명백히 이단이다. 또 천주교회는 종교개혁 당시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으며 그것은 확실히 기독교의 변질된 형태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 연합과 교제는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제하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

 

3) 교파들의 정당성

셋째로, 비록 우리가 기독교회의 일체성을 공통적 근본 교리들에서 찾는다 할지라도, 교파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개혁교회만 교회로 인정할 것인가? 칼빈주의 5대 교리들 중 네 가지만 믿는 소위 아미랄더스파 교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 5대 교리들 전부를 믿는 스펄젼 같은 침례교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알미니안파를 이단으로 볼 것인가? 웨슬리안 알미니안파 즉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어떻게 볼 것인가? 20세기에 등장한 순복음교회는 어떻게 볼 것인가? 교파의 특색이 되는 교리나 정치 체제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그것에 대한 확신과 생각의 일치가 없이는 한 조직체 안에서의 성도들의 교제에 평안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지교회에서 교훈과 행정에 대한 회원들의 생각에 일치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생각의 불일치는 갈등을 일으킨다. 이것이 교파들의 불가피성이다. 땅 위에 여러 교파들이 있는 것은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교리적 이해의 제한성과 부족 때문에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본다. 또 우리가 교회의 영적 본질을 이해한다면, 교파들의 존재가 교회의 일체성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교파들은 비록 여러 개로 나뉘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요 한 나무의 가지들이다.

 

4) 초교파적 교제와 협력의 필요성

넷째로, 우리는 한 지교회나 교파의 담을 넘어서서 범교회적 혹은 초교파적 교제와 협력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그것은 본질적 교리들의 일치와 이단들의 배제라는 최소한의 공통적 근거 위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증거로서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범교회적혹은 초교파적 교제나 협력은 상당한 제한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전도 집회나 부활절 연합집회 등의 공동적 개최, 기독교 방송국이나 성서공회 같은 연합 기관들에의 참여, 비상한 경우의 대사회적 발언이나 자연재해 등 특별한 경우에 공동 대처하는 자선활동 등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초교파적 신학교의 건립 등은 바람직하지 못한데, 왜냐하면 교회는 일치된 사상과 입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그럴 때만 교회의 일치된 교제가 가능하고 또 충실한 말씀 증거와 변호의 사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범교회적 혹은 초교파적 교제나 협력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교파적 확신을 버리거나 성경의 모든 교리들에 대한 바른 이해와 고백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모든 교리들의 공동적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교회들은 기회 있는 대로 또는 기회를 만들어, 교파적 차이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토론하고 연구해야 하며 공동적 이해와 고백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결론

교회 연합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몇 가지 점을 말하고자 한다.

 

1) 건전한 세계적 단체들을 존중해야

첫째로, 우리는 이미 설립된 건전한 초교파적 교제의 단체들을 존중해야 한다. 1948년에 설립된 국제기독교회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ICCC])나 1976년에 설립된 세계근본주의자대회(World Congress of Fundamentalists[=WCF])나 1987년에 설립된 성경적교회세계협의회(World Council of Biblical Churches[=WCBC])72) 등이 그러하다.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는 헌법 서문에서 현대를 이교적 현대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배교(背敎)의 어두운 시대라고 말하고 “그의 백성에게 모든 불신앙과 부패로부터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하고 적극적이다”라고 말한 후에, 앞에서 인용한 대로 12가지의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다.73) 세계근본주의자대회(WCF)도 근본 교리들에 대한 진술과 더불어 이러한 신앙에 대한 모든 교회적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함을 선언하였다.74) 오늘날의 배교와 타협의 상황에서 이러한 단체들의 진술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며 오늘날 참된 교회들의 연합과 교제는 이러한 원칙보다 못하지 않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근본주의 단체들을 분리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 비난은 근본주의에 대한 오해나 신복음주의적, 타협주의적 입장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분리는 성경적이다. 그것은 분리를 일삼는 입장이나 태도가 아니고 명분 없이 분리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교훈하는 분리 즉 교제 단절의 교훈을 지키는 입장이요 태도이다. 성경은 로마서 16:17; 고린도후서 6:14-17; 데살로니가후서 3:6, 14; 요한이서 7, 9-11 등에서 분리 즉 교제 단절에 대해 분명히 가르친다. 우리가 근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고 신복음주의적 타협을 반대한다면, 근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성경적 교회들은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이단들을 배제하는 기초 위에서 서로 교제하고 연합해야 할 것이다.

 

2) 잘못된 교제들을 반성하고 교정해야

둘째로, 교회는 잘못된 교제를 반성하고 교정해야 한다. 참 교회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이런 류의 교제 즉 연합주의를 반대하고 거기서 나와야 한다. 오늘날 연합주의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또 심지어 이방종교에 대해 포용적 태도를 보인다. 그런 교제는 분명히 성경이 금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였다(고후 6:14-17).

또한 참 교회들은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 이전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같은 신복음주의적 교제를 책망하고 관계치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적 교훈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해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말했다(살후 3:6, 14-15).

우리나라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교단(예장 통합측)을 주요 회원으로 두고 있고 또 그 외에 자유주의 신학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단들(기감측과 기장측)을 배제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75) 또 한기총이, 자유주의 혹은 포용주의적 교단들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협의회(NCC)와 연합하려 하는 근래의 움직임은 분명히 잘못이다.

 

3) 너무 조직체적 연합을 강조하지 말아야

셋째로, 우리는 너무 조직체적 연합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일체성이 유형적 성격을 가지지만, 교회 역사는 늘 교회 조직체의 불완전함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성도의 인격적 불완전함 즉 성화의 불완전함은 무덤에까지 이른다. 사람의 교만은 자기를 드러내기 쉽고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겸손한 인격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서지 않는 인물이 다 무능한 자는 아니다. 빈수레는 보통 요란하다. 교회의 조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성도들의 경건과 겸손과 사랑이 더 중요하고 사상과 입장, 정신적 일치가 더 중요하다.

이상적인 세계적 단일 교회(super church)가 가능할까? 모든 신자들 위에 군림했던 천주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세계적 조직체가 가능할까? 흔히, 회중교회는 장로교회로 변해가고 장로교회는 감독교회로 변해간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이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교회 조직의 횡포는 교회 역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은 과거 이런 횡포의 희생물이었다고 본다. 1937년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갈라진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후에 Orthodox Presbyterian Church가 됨)는 그런 횡포의 파생물이었다. 이것이 교권의 횡포이었다. 세상 법정에서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합당한 항의와 토론과 판단의 절차가 생략된 횡포이었다. 최근에 한기총이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를 퇴출시킨 방식도 그와 비슷해 보인다. 모 신문에 의하면, 한기총 대표회장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때려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내보내겠다”고 주장하고 그 일을 강행했고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는 한기총의 자체 조사도 없이, 최소한의 소명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퇴출되었다고 한다.76) 물론 이것은 실수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 조직의 결함과 부족의 한 예이다.

교회가 과연 이런 류의 행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무조건적으로 단일 기구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가? 그것이 참 교회의 모습인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교제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너무 조직체적 혹은 기구적 일치를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바른 정신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조직체는 언제든지 권력 조직이 되기 쉽다. 또 단일 조직이라 할지라도, 권력 조직으로 변질된 조직은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보다 결코 더 낫지 않다.

 

4) 영적 안목을 가지고 충성해야

넷째로, 참 교회들은 외적 규모만 중시하지 말고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적은 무리’의 운동이었다(눅 12:32). 진리 운동은 구약시대로부터 적은 무리의 운동이었다. 우리는 선지자 엘리야와 미가야 시대를 기억하며 또 선지자 예레미야의 41년 간의 사역을 기억한다. 비록 그들이 부패된 유형교회를 부정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거짓된 선지자들이나 부패된 지도자들과 더불어 거창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을 때때로 외로이 행하였다.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않는 것이 좋다(시 131:1).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로 진행하라고 말씀하셨다(마 7: 13, 14).

하나님의 거대한, 세계적 교회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안목을 가질 때 각 나라, 각 방언, 각 민족으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성도들의 무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요한계시록 14:4-5에 14만 4천 명으로 상징되었고 순결한 자들이며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그 무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충성해야 한다.

‘어려운 시대가 올 것이며’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는 성경의 예언(딤후 3:1; 4:3, 4)은 오늘날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는 사도의 유언적 교훈을 기억한다. 우리는 지교회를 건립하고 각 신자를 영적으로 바르게 세우고 지교단을 바르게 건립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신학교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 전체 교회의 교제는 기회 있는 대로, 건전한 원리에 따라서 행하면 되지만, 우선 지교회, 지교단이, 비록 그것들이 작은 규모일지라도, 바르게 세워지고 바르게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 의무일 것이다. 그것을 선행(先行)하면서, 우리는 진리와 사랑 안에서, 온유와 겸손으로 전체 교회의 건전한 교제의 확장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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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the ecumenical movement)은 교회연합운동, 교회일치운동으로 번역되며, 연합이나 일치(union 혹은 unity)라는 용어는 교회가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표현한다. 교회 연합은 교회의 조직체적 하나됨을 나타내고 교회 일치는 교회의 영적, 교리적 하나됨의 상태를 나타내는 맛이 있다. 그러나 그 두 용어는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2) “True Church Unity: What It Is," in Selected Shorter Writings of Benjamin B. Warfield, p. 302.

3) D. Marty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50.

4)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옛신앙, 2001), 127-197, 289-322쪽;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옛신앙, 2004), 65-97, 163-2367쪽; Hyo Sung Kim, Analysis and Criticism of the Concept of the Unity of the Church in the Contemporary Ecumenical Movement (CLC, 1990).

5) One World, January-February 1986, p. 6.

6) Calvary Contender, 15 July 1999.

7) Hans-Georg Link, ed., Apostolic Faith Today, p. 9.

8) Calvary Contender, 1 February 1999.

9)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3.

10) 기독교신문, 1998. 1. 11, 1쪽.

11) 조선일보, 2000. 1. 22, 23쪽.

12) 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 8.

13) Marlin VanElderen, "Consultation Speaks on Plurality," Christian News, 5 February 1990, p. 1.

14) VanElderen, p. 15.

15) 기독교 연합신문, 1991. 3. 17, 7쪽; 1991. 3. 24, 7쪽; 1991. 3. 31, 7쪽.

16) William E.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Mentor Ohio, 1975), p. 5.

17) Ibid., p. 4.

18) Harold J. Ockenga, "Foreword" in Harold Lindsell, The Battle for the Bible (Zondervan, 1976).

19) 2001년 말레이시아에서의 모임에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는 그 명칭을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으로 바꾸었다.

20)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3.

21) Christianity Today, 19 July 1993;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3.

22)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23)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24) Calvary Contender, 1 May 1997.

25)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7.

26)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8.

27) The Post and Times Star (Cincinnati, Ohio), 30 August 1969; David W. Cloud, "Bill Bright Joins Hands with False Gospels," Christian News, 3 January 2000, p. 18.

28)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7.

29) 예를 들어, 1890년 촬스 브릭스가 독일 유학 후 당시 북장로교 소속인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들어와 공공연히 성경 오류를 주장했을 때, 1892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그를 징계했었다. 그러나 유니온 신학교는 총회로부터 독립하여 브릭스를 옹호하였다.

30) Margaret G. Harden, ed., A Brief History of 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and Its Agencies (Bible Presbyterian Church, n, d.), p. 15.

31)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reprint ed. (1923; Eerdmans, 1974).

32)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Zondervan, 1928), p. 65.

33) Ibid., p. 72.

34) The Authority of the Bible (Harper & Brothers, 1929), p. 14.

35) Ibid., p. 289.

36) Beyond Tragedy (Charles Scribner's, 1938), pp. 13-14.

37) Systematic Theolog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64), II, 94.

38)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Charles Scribner's, 1955), p. 66.

39) Jesus--God and Man, 2nd ed. (1968; Westminster, 1977), p. 149.

40) New Testament Theology (Scribner, 1971), p. 88 footnote.

41) Beyond Tragedy, pp. 17, 18.

42) Church Dogmatics (T. & T. Clark, 1936-62), IV. i. 335, 336.

43)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44) Beyond Tragedy, p. 21.

45) Systematic Theology, II, 163.

46)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십년사(1945-195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56), 186쪽.

47) 박형룡, “한국교회에 있어서의 자유주의,” 신학지남, 31권 1호(1964년 9월), 9쪽 이하.

48) 이동렬, “한국교회와 신정통주의”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원, 1984), 63쪽.

49)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200-201, 208-209쪽.

50) Christianity and Liberlism, p. 160.

51) Ashbrook, Evangelicalism, p. 45.

52) John Murray, “Cooperation in Evangelism,”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I, 161-162; 273-279.

53) Cornelius Van Til, The New Evangelicalism.

54) Edward J. Young, “Where Are We Going?” The Presbyterian Guardian, 10 April, 1959, pp. 187, 188.

55) Lumen Gentium (Dogmatic Constitution on the Church)  III. 18, 25, in Documents of Vatican II, ed. Austin P. Flannery, pp. 370, 380.

56) Lumen Gentium VIII. 59, 62, in Documents of Vatican II, pp. 417-419.

57) Canons of Trent, Session VI, Canon X.

58) Ibid., Session VI, Canon XI.

59) Indulgentiarum Doctrina (Apostolic Constitution on the Revision of Indulgences) I. 2, 3, in Documents of Vatican II, pp. 63, 64.

60)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p. 235-37.

61) Martin Luther, Church and Ministry, III, p. 363.

62) "Against the Roman Papacy, an Institution of the Devil, 1545," in Luther's Works, vol. 41, p. 376.

63) 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4. 2. 4, 9, 12.

64) 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2.

65)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 1. 12.

66) Church Purity & Unity, vol. 15 of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106-110.

67) “Constitutio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in Program and General Information: The Ninth 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Nairobi, Kenya, 16-27 July 1975, p. 39.

68) Elmer L. Rumminger, "Special Report: World Congress of Fundamentalists," Faith for the Family, September -October 1976, p. 9.

69) 제임스 베너만은 신조의 기능들을, (1) 성경의 진리를 연합의 기초로 붙드는 것, (2) 신적 진리를 권위 있게 가르치는 것, (3) 세상의 오류나 불신앙에 대항하여 진리를 증거하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James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 [1868], I, 296-302).

70) John Murray, "The Creedal Basis of Union in the Church," in The Claims of Truth, vol. 1 of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Banner of Truth Trust, 1976), p. 281.

7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년) 18항은 참 교회의 표지를 (1)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전파, (2)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의 바른 시행, (3) 교회적 권징의 바른 시행으로 보았고, 벨직 신앙고백(1561년) 29항은 참 교회의 표를 (1) 복음의 순수한 교리, (2) 성례의 순수한 집행, (3) 권징의 시행으로 보았다. 훽스마는 참 교회의 표지를 (1)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전파, (2) 성례의 바른 시행, (3) 권징의 성실한 실행이라고 말했다. Herman Hoeksema, Reformed Dogmatics, p. 620.

72) 처음에는 ‘성경을 믿는 교회 국제협의회’이었으나 1990년에 지금의 명칭으로 바꾸었다.

73) “Constitutio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74) Rumminger, "Special Report," p. 9.

75) 한기총은 예장 통합측을 주요 회원으로 두고 있고, 또 일찌기 1991년 제2회 정기총회에서 “기감과 기장의 가입 문제는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거듭 밝혔다”(기독교 연합신문, 1991. 1. 13, 15쪽).

76) 기독신문, 2006. 2. 8, 7쪽.